|
나는 개혁되었는가? (HAVE I BEEN REFORMED?)
시리즈 연재 1 - 14
저자: 손 성 은 목사
본 연재물은 지난 2004년 종교개혁기념주일을 앞두고 시작해서 2005년 1월 22일 주일까지 영국 런던 소재 양무리 교회의 주보에 실린 칼럼을 모은 것을 편집한 것입니다.
나는 개혁되었는가? (HAVE I BEEN REFORMED?) (1)
- 종교개혁 487주년 기념주일을 기다리면서 -
1517년 루터의 95개조 항의문으로 시작된 종교개혁(the Reformation)의 핵심은 ‘종교’의 개혁이 아니고 ‘자신’의 개혁에 있다. 그 항의문의 제 1항은,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깊이 뉘우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로 시작된다. 결국 95조개항의 항의문의 논지는, 참된 참회(회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면죄부라는 것이 아니고 교황의 사면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된 회개란 바로 심령과 마음의 개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서구사회의 소위 기독교권(Christendom)을 뒤흔들어 놓았던 핵심요지였다.
심령과 마음의 참된 개혁-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서구교회가 다시금 위기를 겪고 있고 있는 것은, 바로 루터의 95개조항의 항의문의 그 핵심논지가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심령과 마음”의 개혁, “자신”의 개혁이라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개혁”이란 말도 너무나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개혁”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그렇게 개혁되어야 할 “심령과 마음”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과 마음의 개혁”을 알고 “개혁”을 논하면서도, 우리들의 교회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위기 중에 흔들리고 있다.
이 짧은 글에 그 모든 현상들을 담을 수 없다. 단지, 심령(heart)과 마음(mind)의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성”(nature)의 개혁에 대해서만 언급해 두자. “본성”이란 “本來의 性”이란 뜻이다. 이 말이 나온 영어단어는 ‘nature’인데, “자연”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본성”과 “자연”이 어떻게 관계되어서 “nature”라는 말로 표기할까? “본성”이란 “자기 스스로 그렇게 있는 본래의 성질”이란 뜻이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본유의 속성,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성질로서의 “본성”이 과연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해도 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태고로부터” 자연이 자연이었던 것처럼 그저 그렇게 있어왔던 것이라고, 자연이 그러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도 그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연”(nature)을 이해하면서 전혀 그 자연의 “창조주”에 대한 고려가 없다. “본성”(nature)을 고려하면서도 그 본성을 본성되게 하셨던 “창조주”에 대해서 생각할 줄 모른다. 본성과 자연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게 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창조주”없이 “자연”과 “본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 있게 된 자연(nature)로서의 “본성”(nature)이, 창조주의 빛 가운데서 조명이 되면, 인간의 본성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창조된 그대로의 본성(created human nature)과 창조 이후 타락된 본성(fallen human nature)이 그것이다. 물론, 구속된 본성(redempted human nature), 그리고 영화된 본성(glorified human nature)을 염두에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는 타락한 인간 본성만 살펴보자.
이 타락한 인간본성은 바로 창조된 본성으로서의 타락이었다. 본성이 본성인데, 어떻게 타락될 수 있었을까? 타락이라 함은 인간이 인간이 아니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요소의 그 어떤 부분이 변질, 왜곡되었음을 말한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지만, 그 마음과 그 심령이 변질되어서 이전같이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음(mind)과 심령(heart)의 변질 - 이것이 문제이다. 성경은 그래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롐17:9)이라고 고발한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롐13:23) 없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 그 마음을 개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어떻게 나는 나의 “마음”을 개혁하고, 우리의 “종교”를 개혁할꼬? 다음 주에 계속 생각해 보자.
나는 개혁되었는가? (HAVE I BEEN REFORMED?) (2)
본성이 개혁되고 변혁된다는 것은, 인간의 인간됨, 곧 인간의 사고하고 느끼는 그 기능이 뒤바뀐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인간으로서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바가 아니지만, 일차적으로는, 인간의 죄된 본성(sinful nature)이 변혁되고 개혁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변혁이 인간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인간의 마음이 죄로 가득차 있고, 만물의 찌끼보다도 더 악하기 때문이다(롐18:9).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인간의 선행과 노력과 어떤 규정(율법)의 준수를 따라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죄된 본성은 죄를 지어내는 것이 일종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마치, 약물에 중독된 것처럼, 약물의 습관적인 힘이 나의 의지를 제어하는 것처럼, 죄의 습관적인 힘이 나의 의지를 제어하기 때문에, 나는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으면서도, 나는 그 죄를 즐기고 있다. 죄를 짓는 것에만 자유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약물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또 다른 편에서는 그 약물의 힘을 즐기고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죄를 짓는 것에는 자유롭지만, 선을 행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의 본성은 죄를 지어내는 “습관”(habit)이 되어 버렸다. 이것을 바울은 “사망의 몸”이라고 탄식한다(롬7:24).
본성으로서의 “습관”(habit)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예로부터 “습관”이란 말을 사용할 때에 “제 2의 천성”이란 말을 한다. 이런 개념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기인한 것이다. 습관이 “천성”(곧, 우리의 본성)이 되는 것은, 반복적인 윤리적 훈련과 학습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곧 인간의 의지적인 훈련으로 반복해서 인간의 체질 속에 형성되어지는 것이 바로 “습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습관화된 좋은 품성이 “덕”(virtue)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제의 천성”이 되는 습관의 강조는 중세 때의 로마천주교를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까지 내려온다. 믿음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행함"의 요소를 강조해 온 로마천주교회의 신학적 기초가 여기에 있다. 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철퇴를 가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단순히 면죄부판매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잘못된 “습관”의 개념에 반대하고, 그럼으로 인해서 변형되고 왜곡된 복음을 반대하였던 것이 이 “종교개혁”이었다. 그래서, 단순한 외형적 “종교”의 개혁이 아니라, “마음”의 개혁, “본성”의 개혁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그 이후의 청교도들이 강조하였던 개혁은 바로 “습관으로서의 본성의 개혁”이었다. 우리의 반복된 훈련과 학습에 의해서 형성되는 습관이 아닌 또 다른 습관이 있다는 것이다. 곧 복음을 듣고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진정으로 깨달은 자에게 일어나는 본질적인 변화, 인간의 힘과 의지적 결단으로도 안되는(그러면서도 이런 것을 동반하는), 그러면서도 하늘로부터,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으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기질로서의 습관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거룩한 기질”(spiritual sense, or spiritual propensity)이라고 하였다. 참된 회개와 참된 믿음을 가질 때, “율법적인 회개”가 아니라, 참으로 진심된 심령으로 회개하게 될 때(그들은 이것을 “복음적 회개”라고 하였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이런 “거룩한 기질”이라고 하였다. 반복된 훈련과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번”에 주어지는 새로운 기질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새 생명의 기질”이 바로 이것이다. 옛 생명이 가진 기질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중생)하게 됨으로 새로운 기질이 입히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기질은 당연히 어떤 교파나 종파와는 무관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됨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다. 교파나 종파가 무시되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하나됨은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의 기질”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거룩한 기질”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지 않은 자라고 하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해 보아야 한다. 만일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된 확신일 가능성이 높다. 다음 주에는 이 “거룩한 기질”이 무엇인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나는 개혁되었는가? (3)
- 추수감사주일을 기다리면서 -
종교개혁기념주일을 기다리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 추수감사주일을 기다리게 되었다. 주제를 바꿀까 하다가 계속 이 주제로 글을 쓰기로 했다. 추수감사주일의 “감사”와 “기쁨”이란, 바로 “마음의 개혁”, “습관으로서의 기질과 성품의 변화”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기질(spiritual sense)로서의 “감사”와 “기쁨”의 성품으로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무”가 전적으로 배제된 것이 아니지만, 그보다 앞서서, 우리 안에서 “습관”으로 주어지는 “감사”의 성품과 “기쁨의 기질”로써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본성의 변화”를 동반하는 “마음의 개혁”으로서의 “종교개혁”이란, 이렇게 우리의 모든 교회생활에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앞 글에서, 거듭날 때에 주어지는 “기질로서의 습관”이, 훈련과 반복을 통하여 주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습관”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가? 훈련과 반복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이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다는 말이 무엇인가? 이것은 옛사람에 속해 있던 것에 전적인 변화가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옛 창조에서 새 창조로의 변혁인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에서 말하고 있는 그런 전적인 변화를 말한다. 이런 변화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우선, 옛 창조에 속한 옛 사람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sense)이 어떤 것인가? 우리에게는 오감(five senses)이 있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은, 육감(sixth sense)를 첨가하기도 한다. 문제는, “거룩한 기질”(spiritual sense)이란, 이러한 오감(혹은 육감)에 하나 더 보태어지는 “제 7의 센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옛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오감(혹은 육감)을 통해서 외부의 자료들을 흡수, 통합하는 “이성”(reason)이나 “오성”(understanding)을 제 7, 혹은 제 8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거듭난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전적인 은혜로 인하여 받게 되는 감각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오감과 육감, 혹은 칠감, 팔감 모두가 다 “옛 감각”에 속한 것이다. 그것이 “옛 세상”에 대한 성경의 심판이고 판단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1)는 선언이 이런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거룩한 기질, 이 영적인 기질은 옛사람에게 속해있는 어떤 감각(기질)에 또 다른 어떤 감각(기질)이 더하여진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감각들을 새롭게 하는 그 무엇이다. 지금까지 옛 세상에 속해서, 옛사람으로서 모든 감각을 가지고 추구해 왔던 그 방향과 태도를 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전환(conversion)시키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거룩한 기질”이다. 이때껏 “나”를 추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달려왔는데, 이 “기질”로 인해서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완전히 180도의 변혁이 주어진 것이다. 옛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감각”들이 이제는 새로운 방향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감각”으로 모두 재정립된 것이 바로 “거룩한 기질”이다. 이전 것 그대로지만, 전혀 새로운 그 무엇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떤 관계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의 관계이다. 그 관계로 인해서, 이전에 있던 오감, 육감, 칠감, 팔감이 새로운 오감, 육감, 칠감, 팔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라는 세력권(power field)에 있던 존재가 이제는 성령의 세력권(power field)안에 들어옴으로 인해서, 그 자기장(magnetic field)의 영향에 의해서 새로운 성향(propensity)을 갖게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다음주에 살펴보자.
나는 개혁되었는가? (4)
성령의 소욕, 육체의 소욕
추수감사절에 설교를 통해서 “열매”에 대해서 듣게 된다.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가 그것이다. 설교본문 중에 있는, 갈라디아서 5:19-23에서는 이 열매들을 대조시키고 있다. “육체의 열매”에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성령의 열매”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있다. 육체의 열매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행하게 되면 맺히게 되는 것이고,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행하게 될 때 맺히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중생과 회심을 “기질과 성품으로서의 본성의 변화”임을 강조했다. 본성은 일종의 “습관”이라고 했다. 옛 습관에서 새로운 습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 바로 중생이고 회심이다. 참된 개혁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설명을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과 관련해서 할 수 있다. 육체의 소욕이란 “옛 습관”이고, 성령의 소욕은 “새 습관”이기 때문이다. 옛 습관이란 육체중심의 삶의 경향성이고, 새 습관이란 하나님 중심의 삶의 경향성이다. 육체의 가장 핵심은 바로 나 자신이기에 이런 경향성을 “구심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하나님 중심(이웃중심)의 삶의 경향성은 “원심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심력으로만 살아가던 사람이 바로 “원심력”이 은혜로 믿음으로 주어지게 된 사람, 곧 원심력으로서의 거룩한 기질과 습관이 주어진 사람이 바로 중생한 사람이겠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구심력만 있는 사람, 곧 “나 중심”, “나를 지향하는 경향”만 있는 구심력의 사람들이 그 구심력으로 살아서 “나”만 똘똘 뭉쳐 있는 “블랙홀”이 있다고 상정한다면, 그 블랙홀은 이 우주 가운데 가장 적은 것이겠지만, 놀라운 흡입력을 가지고 있는 검은 힘의 실체가 되는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로만 뭉쳐져 있는 곳, 그러한 시간과 공간, 시공체가 바로 “지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지옥이란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인간 자신이, 바로 “나”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천국”은 어떤 곳일까? 바로 이웃사랑, 하나님사랑의 원심력만 작용하는 곳, 구심력은 완전히 약화되고, 아니 제거되고, 온전히 원심력으로만 작용되는 곳, 오직 사랑과 헌신과 희생과 위로와 격려와 소망이 있는 곳….성령의 열매만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우리 안에 이런 두 개의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두 개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겠다. 하나는 중생하기 전의 “구심력”으로 살아왔던 세계가 있다. 또 하나의 세계는 중생함으로 인하여 들어오게 된 세계가 있다. “원심력”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중생함을 얻은 사람이란, 원심력이 지배하는 세상 가운데에 들어와서 그 지배를 받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지배되었던 “구심력”의 그 힘이 아직도 습관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장으로 들어와서 성령의 소욕을 느끼게 되는 세상에서 사는데, 이전에 살아왔던 육체의 소욕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따라서 살아갈 것인가? 육체의 소욕을 따를 것인가? 육체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행할 것인가? 그렇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런 선택이 주어져 있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다. 이런 실존은 의무나 짐이 아니고 특권이다. 중생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런 실존 자체가 없다. 언제나 육체의 소욕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 특권을 무시하지 말라. 우리에게 성령의 소욕이 주어졌다. 성령의 원하시는 바가 느껴지는 장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새 세계”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새로운 피조세계인 것이다(고후5:17). 이것이야 말로 바로 개혁된 삶이 아닌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니라”(갈5:24).
나는 개혁되었는가? (5)
도대체 “육적인 그리스도인” 이란 것이 있는가?
한 마디로, 없다는 것부터 밝히고 이 글을 쓰자. 개혁이란 것을 습관으로서의 성품과 기질의 변화로 설명하는 이 글의 서론을 지금까지 쓴 셈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설명이 한국교회와 현대교회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그 적용점을 이제부터 설명하려고 한다. 본론인 셈이다. 그러기 위해서 현대교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한 개념을 먼저 설명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개념이다. 바로 CCC 라는 선교단체의 “4영리”라는 전도 소책자에서 비롯되어 한국교회 내에 널리 퍼진 개념이다. 하지만, CCC 이전에도 이런 개념들이 점차 현대교회 속으로 은밀하게 침투되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싶다. 그리고 이런 지적이 그 단체와 교회사에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참된 영적 지도자들을 험담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님을 또한 강조하고 싶다.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런 개념이 작용함으로 인하여 현대교회의 많은 문제점들을 양산시키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요지이다.
무엇이 “육적인 그리스도인”인가? 이 개념이 교회 내에서 유행하기 전에는, “중생한 사람”과 “중생하지 않은 사람”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원리적으로나마) 구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통례적인 입장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세 부류의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화되어지기 시작했다. “자연인”, “육적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구분의 근거는, 바로 고린도전서 2장 13절 - 3장 3절에 나오는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 “육신에 속한 자”(육적인 그리스도인?), 그리고 “신령한 자들”(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을 이렇게 “육신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들”로 구분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에 속한 자”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이고, “신령한 자들”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그 근거를 찾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런 성경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분명히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육적인 사람”(중생하지 않은 자연인)과 “신령한 사람”(곧, 영적인 사람으로서의 중생한 사람)으로 구분한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분류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신령한 사람”(영적인 사람/중생한 사람)은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약한 자들일 수 있다. 어린아이 같다. 자라야 할 필요가 있는 자들이다. 아직 그리스도의 도의 질긴 고기맛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도 그들은 “영적인 사람들”이다. “완전한 사람”이 아닐 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영적인 사람들”을 “영적인 사람같이” 취급할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의 연약함 때문에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같이 여긴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곧 육적인 그리스도인)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적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같다. 어쩌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사람들”이면서 자라감과 성숙이 필요한 자들이다. “영적”이라는 것을 “완전함”과 “수준높음”등으로 이해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헬라철학의 플라톤주의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잘못된 성경해석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중생하지 못함에서 나오게 되는 비성숙함과 거짓과 게으름과 나태함을, 그들이 “육적인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럼에도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여서 나오게 되는 불가피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힘쓰면 그래도 다행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육적인 그리스도인”임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자기만족과 도취에 빠져서 자신의 영적인 성숙과 분발을 게을리하고 그 게으름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바로 자신들은 그래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최소한 천국티켓은 따놓았다고 생각한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지는 자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수많은 비리들이 여기에서 나오게 되고, 이것을 영적인 지도자들이 분별력이 없이 방조하고 어쩌면 조장하기 때문에 나오게 된 현대교회의 병리현상들이 만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개혁되었는가? (6)
구주시지만 주님이 아니신 예수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것은 없다”고 앞 글에서 말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그것 자체가 “영적인 사람”이다. “연약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영적인 사람”이다.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이나 “거룩”(holy)라는 말은 어떤 사람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 이전에(이런 요소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함”인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과 연합되어진 자이면 누구든지 “영적인 사람”이다. 그 연합은 나의 능력과 공로로서가 아니라 바로 “은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기 때문에, 나의 영적인 상태의 여하가 나의 그 어떠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영적”이라는 말을 나의 노력 여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인 양 오해하고 있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영성신학”의 “영성”(spirituality)이라는 개념도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실, 우리들의 교회생활에 이런 오류들은 너무나 산재해 있다. 그 중에 하나 오늘 간단히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육적인 그리스도인”개념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것으로, “구주”와 “주”를 구분하는 오류이다. 물론, 당연히 이 단어들이 지칭하는 그 의미에는 차이가 난다. “구주”는 Saviour로서 “구원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란 Lord로서 “주인님”이란 뜻이다. 구원자는 죄와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준 자를 말하고, 주란 우리의 모든 삶의 주관자이시라는 것이다. 앞의 것은 우리를 “죄인”으로서, 그리고 뒤의 것은 우리를 “종”으로 보는 용어이다.
문제는, 이런 용어를 예수님에게 적용할 때에,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주장하는 이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주”가 되시지만, 아직은 “주”가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에 예수님을 “주”가 되시도록 우리의 삶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의 교묘한 함정을 눈치 채었는가? 예수님을 “구주”로서는 인정하고 믿고 고백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으로서는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사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과 얼마나 절묘하게 일치되는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비록 예수를 “구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구주”로 인정하는 그 인정이 거짓되고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물론, 예수님을 “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삶에서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연약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그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내가 지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구주”되심은, 그 분이 “주”되심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기 보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도들이 예수를 전할 때에 “구주”로서 뿐만 아니라, “주되심”을 먼저 우선적으로 강조했었던 것을 보여준다.
한국교회에서 1980년대에 강남지역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던 “제자화 운동”이 주장했던 구호가 바로 “주의 주되심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Lordship”이라는 생짜베기 영어가 유행하기도 했었다. 옳은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헛점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모르겠는가! 이런 운동들을 통해서 참으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보다 성숙한 삶을 사는데 자극과 도전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은 줄 안다. 하지만, 이런 신학체제에서 양산되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거짓된 그리스도인”들, 곧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구도자”(seeker)이다. “구도자”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직전, 혹은 그 이전의 “자연인들”이다.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은, 그들이 “참된 복음”으로 인도될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자비의 이름으로 베푸는 영적 살인이다. 이런 영적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말이 있다: “An almost Christian is not at all a Christian.” 그래서 묻고 싶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개혁되었는가? (7)
교만하게 하는 영성
“영성신학”(spirituality theology)이 유행한지 꽤나 되었다. 현대교회를 휩쓸고 있는 유행 중에 하나이다. 얼마 지나면 이것도 시들해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인기를 끌고 있다. 십자가의 복음이 변질되어져서 현대인들의 영혼에 참된 복음의 감격을 제시하지 못하자, “영성”을 “복음”의 핵심인양 오히려 복음을 변질시키는 또 다른 운동이 바로 이런 “영성”운동이다.
영성운동에서 강조하는 “영성”의 개념은, 헬라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서 왔다고 말하였다. 우리 인간내부에 잠재해 있는 거룩에 대한 열망을 “에로스”로 파악하고(“에로스”를 육적인 욕망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헬라철학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인간의 본원적인 이 욕구와 잠재능력을 통해서 보다 더 높은 단계의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 “에로스”이다. 그래서 인간의 거룩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이런 개념과 자료들을 읽으면 자신이 이전보다 혹은 지금보다 보다 더 “성숙”한 모습을 가지게 될 것처럼 기대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기가 있다.
하지만, 거짓된 경건을 추구하는 것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참된 경건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자생적인 능력으로 추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소원”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주어지는 것이란, 바로 우리의 “참된 중생”을 통해서 주어지는 “본성의 변화”이다. 습관과 기질의 변화로서의 본성의 변화이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인데, 오직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이다(우리로 말미암아 이런 변화를 추구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잘못된 비성경적 개념을 주장하게 되면, “그리스도인”도 아니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게 되는 경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영성”을 추구하면서, 자신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른 보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교만을 부추길 수 있음이 더욱 큰 문제이다. 자신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육적인” 그리스도인?)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면서 그 체험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성령체험”을 말하고 “방언체험”을 말하고, 또한 “신유와 기적”의 체험들을 늘어놓는다. 그런 것이 없으면, “육적인 그리스도인”일 뿐이기 때문에,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 애를 쓰지만, 그 마음에는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영적인 그리스도인도 연약하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이미 특별한 관계 속에서 들어와 있는 자들이다. 이미 특별해진 그들에게 특별하게 특별한 자들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소위 어떤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영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영빨”을 자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손가락의 길고 짧음을 논하는 것과도 같다. 손가락은 모두가 다 귀하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한 “영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직 그가 “그리스도인됨”을 모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신에게 있는 그 어떤 능력으로 어떤 “영성”의 깊고 강함으로 자기가 무엇이 된 양 자랑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영성은 사회를 계급사회로 만든다. 그의 “공화국”이 그러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 이런 공화국이 아니다. 오직 홀로 하나님께서만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고, 다른 모든 그의 자녀와 백성들은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부름받은 무익한 종들일 뿐이다.
나는 개혁되었는가? (8)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죄를 짓자
지난 주일에는 거짓된 영성과 참 영성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면에서 현금의 “영성신학”을 비판하였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는데 거듭난 자들이라고 부추겨주는, 그래서 개혁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개혁되었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거짓된 교리들이 교회사를 통해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 오늘 주목했으면 하는 것은 무율법주의(anti-nomianism)이다. 무율법주의를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과 무관해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의 저주와 권세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오직 믿음만 가지고 살아가면, 은혜만 받으면 만사형통이라고 한다. 믿음을 강조해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책임과 의무를 무시하는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것의 반대는 신율법주의(neo-nomianism)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말하겠다.
어째튼, 무율법주의적 사고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허용하는 신앙생활 속에 어떻게 침투해 들어오는가를 잘 관찰해 보기를 바란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죄를 여전히 짓고 있으면서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면 전혀 죄를 짓지 않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물론, 죄를 여전히 짓는다. 우리의 육체가 남아있는 마지막 날까지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그리스도인”임을 빙자하여서 자신의 여전히 짓고 있는 죄를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는 것과 우리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여전히 짓고 있는 죄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말 그대로, “육적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죄를 혐오하는 기질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서 그 죄를 감추려고 하고 변명하려고 하고 회개를 한다고 하면서도 은밀하게 감추어 두면서 그 죄를 또 짓고 그러면서 그 죄를 즐긴다. 반면에, “영적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죄를 혐오하는 기질과 성품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지만, 그렇게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고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밖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음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다시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끊임없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죄로 인하여 그 양심이 화인을 받은 것처럼 굳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죽여가고(mortification), 또한 영을 따라서 새 성품을 키워가려고 한다(vivification).
“나는 계속 죄를 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당신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없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하나님을 찾으라! 두드려 구하라! 하나님께서 긍휼의 햇살을 비춰주시도록 그 은혜를 구하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롬6:1,2). 바울사도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이지만, 어찌 죄를 더할 수 있겠느냐고 단언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생각으로 죄를 멀리하고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자들이 바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옳은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율법”이 우리와 무관한가? 무한대로 용서해주시는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에, 그런 보혈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용서받을 길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의 삶에 죄를 허용하고 있는가? 그렇게 당신이 생각한다면, 당신이야말로 바로 “무율법자”이다. 이단인 것이다. 어떻게 이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계속 되는 글에 관심을 기울이기 바란다.
나는 개혁되었는가? (9)
남은 조건을 채워야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게 되었으니 이제는 죄를 짓자는 것이 반율법주의(antinominianism)적 사고라고 하였다. 이제는 이런 견해에 다른 극단이, 예수를 믿었으니 새로운 율법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율법을 행함으로 받은 구원을 증명해야 하고 이런 증명이 없으면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설령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율법주의(neo-nominianism, neo-legalism)적 사고가 바로 이것이다.
전자의 반율법적 사고는, “육신적 그리스도인”을 핑계되면서 실제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라고 한다면, 신율법주의적 사고는 참으로 중생한 사람이면서도 그 중생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잘 믿어보려고 하고, 반율법주의의 폐해를 방지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세속화된 교회의 위기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다가 그만 또 다른 극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열매로서 행함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행함을 열매로 맺을 “조건”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성화”의 “조건”으로 “칭의”라는 복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성화를 반드시 살아야 하는데, 그 성화가 조건이 될 정도로까지 강조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삶은 또 다른 하나의 “율법”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교묘한 주장임을 알아야 한다. 칼빈이 말하고 있는 율법의 제 3 용법은 “성화”가 우리의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의미로서 제시되었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의 삶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그 성화라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우리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된 구원이 취소된다는 식으로 “성화”를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복음의 또 다른 왜곡이다. 반율법주의적 왜곡이나 신율법주의적 왜곡이나 참된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경계해야 할 것이다.
참된 복음은, 우리의 죄된 본성이 의의 본성으로 바꿔진 것을 강조한다. 인간됨의 본성이 바뀐다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 되어도 여전히 인간이다.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본성의 변화란 곧 성품과 기질의 변화요 습관의 변화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변화이고, 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한 변화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바로 이런 변화를 경험(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한 자이다. 이런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그런 변화의 순간에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고, 그 의롭다 여김을 받는 순간에 거룩을 향한 기질을 받게 된다. 칭의와 더불어서 성화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칭의가 주어질 때 그 법정적인 의 안에는 실제적인 의가 포함되어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우리 안에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내주하시게 되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축복이다.
우리의 성화는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주가 되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시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설득하고 권면하고 열심을 내도록 격려하셔서 우리가 즐거워하면서, 자원하는 심령으로 감당해 갈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이가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식으로 그리스도 이후의 성화의 삶을, 우리가 성취해야 할 “조건”으로 주장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이 그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제 3 용법으로서의 율법을 이루어가야 하지만, 그것은 “조건”으로 주어진 것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감사함으로 이루어가고, 감격함으로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조건”을 성취하여 나의 구원을 완성시켰다 함으로 오는 “자부심”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자랑은 오직 하나님에게 돌리게 된다. 우리로 말미암아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하시는 이도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개혁되었는가? 참으로 개혁되었는가? 나의 개혁됨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살펴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 다음 주에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나는 개혁되었는가?(10)
언약의 복들을 나누지 말라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경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모두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과 우리의 삶의 관계를 오해한 것들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 맺는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해서도 이런 비슷한 오해가 있다. 믿음을 가질 때에 맺는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가 영원 전에 맺으신 그 언약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안에서 영원한 언약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영원 전에 맺어진 언약이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 언약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의 믿음으로 맺게 되는 그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부른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을 전제하는 것이지만, “새 언약”이란 더욱 그렇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당사자가 되는 인생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러서 “언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어떻게 당신의 피조물이 되는 인간과 더불어서 “언약”을 맺을 수 있단 말인가? 언약사상 자체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암시한다.
그래서 언약체결의 당사자가 된 인생은 감사와 감격이 넘칠 수 밖에 없다. 그런 동기로 넘쳐나는 것과 힘쓰는 것이 “율법”이요, 선행과 성화의 삶이다. 물론,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무로서 힘써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복이요 선물이면서 또한 과제요 의무이다. “은혜”의 성격이 그렇다. 선물이면서 과제로서 주어지는 것이 은혜이다. 생명이 선물로 주어지고 그 생명의 기운으로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과제수행을 일종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경계할 “신율법주의”라고 하였다. 설령 “조건”이라는 말로 그 과제와 의무를 표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무척 주의해서 이 말을 사용해야 한다. 주의하지 않으면 잘못에 빠진다.
특별히 주의해서 빠지지 않아야 할 잘못은, 새 언약을 맺게 됨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두 개의 복을 따로국밥으로 분리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곧 죄의 용서라는 복과 하나의 새로운 본성이 부여되는 마음의 변화(기질과 성품으로서의 습관의 변화)라는 복을 별 개의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칭의와, 마음의 변화는 성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칭의 따로, 성화 따로 생각하게 된다. 칭의는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래서, 성화는 선택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성화가 되지 않았으면서도 칭의의 복을 받았다고 여긴다.
새 언약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이 두 개의 복을 나눌 수가 없다. 나누어서는 안된다. 지상에 있는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기질과 성품으로서의 습관들이 변화되어가지 않으면서도 하늘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기대하고 소망하고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의 예언을 받아서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기억하자: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10:15-17). 마음의 변화와 죄의 용서가 결합되어 있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선포하면서 결론적으로 모세가 말한 것을 기억하라: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신 30:11,14).
문제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 나에게 이 율법을 행할 이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하고 배도의 계획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오호라, 이 사망의 “마음”에서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몸”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지금 “마음”이라고 하고 있다. 그 차이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어리석은 짓(렘42-43장)이 우리들 사이에 비일비재하다.
나는 개혁되었는가? (11)
내가 구원받는 믿음(Saving Faith)을 아는가?
교회에서 “믿음”이 오해되고 있다. 믿음이 좋은 사람, 믿음으로 구원얻는다 혹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얘기가 흔하게 회자되다 보니, 도대체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는다면 우습게 생각한다. 당연한 것을 질문한다고 한다. 아하, 제가 신학교시절에 가장 고민했던 주제가 이것이었다면 의아하게 여기실런지…슬픈 것은 누구도 정확하게 답변해주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구원받는 믿음”(Saving Faith)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한다. “구원받는 믿음”을 아는가? 믿음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고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지고 오지 못하고 생명에 이르게 하지 못하며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믿음이냐가 중요하다. 그 어떤 믿음이 참 믿음이라면 아무리 적어도, 아무리 약해도, 우리를 구원과 생명에 이르게 한다. 어떤 믿음이 그런 믿음인가?
무엇보다 심리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심리적인 믿음이란, 주관적인 확신이다. 자기암시를 통해서 가질 수 있는 믿음이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말을 백 번쯤 속으로 반복하면서 자기암시를 주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가 있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만 아니라 심지어는 내가 세상의 구주라는 확신도 가질 수 있게 된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믿음이다.
지적 믿음 혹은 추상적인 믿음도 그렇다. 역사적 믿음이라는 것도 그렇다. 일시적으로 가지지만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믿음도 그렇다. 그것을 “감정적” 믿음이라고 한다. 기적의 믿음도 그와 비슷하다. 물론 이런 가짜 믿음들을 간혹 구분해서 설명을 하곤 한다. 하지만, 무엇이 진짜 믿음인가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못한다.
여기서 진짜 믿음이라 함은 그 믿음의 대상을 두고 논의하지 않고 있음에 주의하기 바란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이 유일한 그 믿음의 대상이다. 문제는, 그 믿음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믿음은 “마음”과 관계된다. 참된 믿음이란 무엇보다도 그래서 “마음의 변화”가 있는 믿음이다. 전인격이 반응하고 소위 “사람이 바뀐다”고 하는 변화를 동반하는 믿음 말이다.
이 믿음은 내가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분명히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의 뜻”으로도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믿음의 비밀과 신비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박사학위로 믿음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박사라도 믿음이 없을 수 있다. 목사라도 믿음이 없을 수 있다. 장로라도, 집사라도 그렇다. 직분이 믿음을 보장하지 못한다. 혈통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몇 대 기독교인 집안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믿음이 참 믿음인 것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된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요, 이 믿음의 선물로 인한 영생도 구원도 선물이 된다. 우리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실 때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통회하는 “마음”을 주신다. “회개”하게 하신다. “상한 심령”을 주시는 것이다. 자신의 죄된 행위들만 아니라 그 행위들을 죄 되게 하는 마음의 본성에 주목하게 한다. 나로 하여금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나의 죄성을 깨닫게 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마음을 쥐어짜는 고통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죄의 실체가 살아있는 실재로서 체험된다는 것이 공통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다음 주에 좀 더 자세히 상술하겠다.
나는 개혁되었는가?(12)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회개가 많습니다 (1)
내가 가지고 싶으면 갖게 되는 심리적이며 주관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얻게 하는”(Saving, or salvific) 믿음은 참된 회개가 동반된다고 하였다. 믿음에도 가짜가 많은 것처럼, 문제는, 회개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선 강조해야 할 것은 “참된” 회개라는 것이다. 여기서 참되다는 것은, 눈물콧물 흘리면서 소나무뿌리 하나 정도 뽑는 류의 그런 회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고 싶어해도 안되는 것이 바로 “참된” 회개이다. 참된 회개도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어떤 이는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회개한다. 무언가 허공을 대고 마구 고함을 치고 나면 시원해 지는 것처럼, 머리 속에 희뿌연 안개 속이지만 어딘가 계실 것 같은 어떤 대상을 향해서 “주여~” 목청을 돋구어서 부르짖으면서 회개한답시고 고함을 치고 나면 속이 시원해 진다. 세게 고함을 지르다가 목이 쉬어서 컬컬할 정도가 되면 더욱 좋다. 나도 기분이 좋고 내가 그래도 진짜 기도했다는 것을 남에게 과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속지 말라. 얼마나 나는 간교한가! 나의 마음은 얼마나 부패해 있는가!
어떤 이는 심판이 두려워서 회개한다. 앞으로 올 지도 모를 심판이나 자신의 부정한 행위가 들키게 될 경우를 미리 상정하고 미리 회개를 해둔다. “회개”를 하면서도 은밀하게 그 죄악된 행위를 계속하고, 또한 속으로 은밀히 즐기게 된다. 이래서는 안되는 데 하면서도 계속 한다. 며칠 뒤에 있을 부흥회 때에, 아니면 주일예배에 참석해서, 회개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 뻔뻔스럽게 계속 그 범죄 가운데에 머무른다. 회개가 진지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벌이 두렵다. 들키는 것이 두렵다. 정말 두렵다. 수치스러움을 어떻게 감당해. 그래서 회개를 한다. 내가 언제 언제 회개했었쟎아요. 변명하기 위해서이다. 소위 율법적인 회개의 한 모양이다.
어떤 이는 도둑질한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만 회개한다. 거짓말하고 있는 입술만을 저주한다. 음란한 짓을 행하고 있는 손이나 발을 끊어버리려고 한다.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손이나 발을 끊어버린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게 될까? 예수님이 그것도 모르시고 너희가 범죄하거든 눈을 빼어버리고 손을 잘라버리라고 하셨을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마음”의 죄를 두고 하신 것이다. 손으로 발로 생각으로 하여금 죄된 행위를 하게 하는 그 원흉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의 본성이다. 죄는 바로 마음의 뿌리 밑에 숨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물로도 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보상적 행위로도 씻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를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면, 정말로 착각해도 큰 착각이다.
현대교회의 위기는 바로 이 죄의 본질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아니, 무지로 변장하고 있는 우리 마음의 기만적 행위, 죄된 행위 때문이다. 우리의 본질이 우리의 본성이 죄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하자면, 우리의 마음은 죄의 공장이다. 참된 회개란, 바로 이것을 깨닫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의의 하나님, 빛의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다. 참으로 할 말이 없다. 지옥을 보내셔도 할 말이 없다.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실체 자체가 죄된 덩어리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저주와 멸망 가운데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죄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회개를 하는 사람이 많다. 역설적이다. 그래도 “회개”란 것을 하는 것을 보면 어쩜 다행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회개는 윤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종교적이며 신학적인 행위이다. 사람 앞에서, 자기 앞에서 하는 것 이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워, 그 하나님의 진리와 의의 기준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다윗이 회개할 때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 앞에서” 득죄하였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 참된 회개를 허락하실 때에 자신을 계시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참된 회개는 불가능한 것이다. 다음 주일에 계속 참된 회개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자.
나는 개혁되었는가? (13)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는 회개가 많다 (2)
구원에 이르는 참된 회개는 심리적인 것도 감정적인 것도 율법적인 것도 아니라고 했다. 무엇인 지도 모르고 회개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죄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부록으로 설명한 “죄(罪)의 한자어에 대한 어의연구”라는 글을 참고하라]. 먼저 죄의 죄책성(gultiness)이고 다른 것은 죄의 패괴성(fallenness, or depravity)이다.
내가 남의 상점에서 사과를 훔쳐서 먹어버렸다. 죄를 지었다. 그런데, 사과를 훔친 것에 대해서 그 훔친 것을 값아주든지, 그것에 해당되는 값을 치루기 위해서 품삯을 팔든지, 그런 것도 할 수 없다면, 파출소에 끌려가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불려와서 데리고 가기까지 <쪽>을 팔 것이다. 자동차를 훔쳤거나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든지 하면 감옥에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이렇게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고려하고 있는 것은, 죄의 형량, 죄의 형벌에 대한 크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죄의 “죄책성”이다. 흔히들, 우리가 죄용서함을 받는다고 할 때, 바로 훔친 것을 대신 값아주거나 품삯을 팔거나 해서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 죄의 값에 해당되는 것, 곧 사과값, 자동차값 등을 지불하게 되면 죄용서함을 받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이것은 죄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의 죄책만을 면케되는 것이다.
죄에는 죄책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죄를 짓게 하는, 곧 사과나 자동차를 훔치게 하고, 위조지폐를 만들게 한, 그 죄된 행동을 유발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이것을 죄의 <패괴성>이라고 한다. 화투놀이에 찌든 사람이 손가락 하나를 찍어내어버려도 그 찍힌 손가락없는 채로 화투장을 들고 화투놀이를 하게 하는 그 무엇, 그 화투쟁이의 습관이 된 본성이, 죄에 적용한다면, 죄의 패괴성이다. 죄된 본성(sinful nature)이다.
죄의 용서함이란, 죄책의 용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의 패괴함에 대한 용서도 있다. 여기에 우리의 구원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다. 죄책만 용서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죄의 패괴함에 대한 용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죄용서함이 칭의만을 불러오고 성화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본성의 변화가 없는 채로도 구원받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삶이 없는 믿음의 고백만으로도 죄용서함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반쪽 구원은 온전한 구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아예 구원이 아닐 수도 있다.
회개란 죄책에 대한 회개만이 아니라 바로 죄의 패괴성에 대한 회개여야 참된 회개가 된다. 이 회개는 입술만의 회개가 아니라, 마음이 뒤집혀 지는 회개이다. 죄를 혐오하는 회개이다. 이전에는 거룩을 혐오했는데, 이제는 거짓과 어둠을 혐오하게 된다. 이런 회개를 통해서 죄를 혐오하는 기질이 덧입혀지게 된다. 새 생명, 새로운 본성의 생명이 덧입혀지게 된다.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새 생명을 가져서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죄의 패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책은 완전히 없어지지만, 여전히 죄의 패괴성은 남아있다. 뿌리가 통째로 뽑혀 버렸지만, 남아있는 잔뿌리들이 있다. 죄는 잔혹하다. 질기다. 고래심줄보다 더욱 질기다. 남은 잔뿌리들이 자라지 못하게 하라. 끊임없이 뽑아주고 또 뽑아주는 것, 이것이 이전 청교도들이 말하던 <Mortification>이다. 새롭게 주어진 새 생명을 키워라. 물을 주고 계속 영양분을 주어서 자라게 하라. 이것이 바로 <Vivification>이다.
이미 구원이 선물로 주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살아난 사람에게 걸으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죽어있는 사람을 두고 걸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죽어있다면 우선 살려놓고 나서 그렇게 살아난 사람에게 걸으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우리들이 살아나게 되었다. 의로운 자가 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의로운 삶을 살도록 명령을 받는다. 우리가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회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계속 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는 첫 번째 참된 회개, 곧 죄의 뿌리를 통째로 들어내는 그 회개가 필요하다. 죄의 패괴성을 알고 그 죄에서 그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달라고 주를 바라보는 자는 복이 있다. 용서함이 있으리라고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행2:38-39). 이런 회개가 자기개혁의 시작이요 근본이다. 이것 없이는 자기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 사회개혁, 민족개혁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자기개혁과 사회, 민족개혁의 관련성을 다음 주에 생각해 보자.
나는 개혁되었는가? (부록)
“죄”(罪)라는 한자어에 대한 어의(語義)연구
기독교의 복음은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소식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구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구원은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인식이 필요해 진다. 그런 자각과 인식은 물론 성령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의 방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죄에 대한 인식과 자각은 우리 죄인 편에서의 죄에 대한 인식과 자각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런 노력 자체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나는 개혁되었는가?>라는 시리즈글을 쓰면서,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회개가 많다>는 주제를 다루는 중에, <죄>라는 단어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죄>란 말은 히브리어(아삼, 하타,아온, 페사 등으로 표현됨)나 헬라어(하말테마, 하말티아, 마랍토마 등으로 표현됨)에 다루는 <죄>가 아니라, 바로 그런 단어들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사용된 한자어로서의 <죄>(罪)에 대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국내의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의 <죄>에 대한 글들을 보면, 헬라어 히브리어에 대한 언급은 많은데, 한자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는 것 같아서 어리둥절해 진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로서의 <죄>라는 말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가, 한글, 혹은 한자어로 번역되어지는 중에, 원래의 한자어가 가지고 있던 <죄>라고 하는 단어의 의미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며 절충되고 복합되어서 의미의 전화를 이루는 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성경의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통해서 표현된 <죄>라는 것과, 한자어로 번역되어진 <죄>라는 것이 과연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과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질문을 회피할 수는 없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죄>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런 <죄>인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면, 내가 알고 있는 <구원>도, <복음>도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헛다리를 짚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도 이 부분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식으로 한자어의 이 <죄>를 해석하면서 오용하고 있다. 가령, 어떤 설교자는, <罪>라는 말이 <넉 四>자와 <아닐 非>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착안해서, “네 사람이 모두 어떤 사람을 두고 아니다라고 하면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죄인이 된다”고 하든가, “세 번째까지는 나쁠 뿐이지만, 네 번째까지 반복하게 되는 나쁜 짓은 죄가 된다”고 하든가, “동서남북 사방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잘 안되도록 하는 것이 죄이다”고 한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그저 눈쌀이 먼저 찌푸려진다. 과연 저 설교자가 하는 설교가 진실할까 하는 의심마저 들게 된다. 올바르지 못한 자료에 근거해서 자기 자신의 논리를 쌓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교라고 한다면, 참 슬픈 일이다.
다음과 같은 <죄>라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 설교는 어떠한가? “<罪>라는 말이 <넉 四>자와 <아닐 非>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죄는 “네 가지 아닌 것”이어서, 첫째, 법이 아닌 것(不法), 둘째, 의가 아닌 것(不義), 셋째, 선이 아닌 것(不善), 넷째, 믿음이 아닌 것(不信)이라고 한다. 성경구절을 적당하게 들이대면 교인들은 대개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그 한잣말 참 묘하다고 생각한다. 한자어가 가지고 있는 성경교리와의 연관성을 더욱 더 강조하게 되면 설교는 더욱 감치게 된다. 그런데, 설교자마다 이 네 가지 <아닌 것>들이 약간씩 다르다. 어떤 설교자는 위의 네 개 중에 어떤 것을 빼고는, <아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不行)을 첨가하기도 한다. 얼마나 절묘한 해석들인가! 회중들은 설교자의 해박한 한자실력에 감탄을 하고 <은혜>받을 준비가 되어 진다.
문제는, 어떤 근거에서 이런 한자어 해석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한자어 해석의 사전에서 그 출처를 삼고 있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기독교의 설교자들만 아니라, 다른 종파, 종교에서도 흔히 범해지고 있는 실수들이다. 동학계통의 어떤 사람은 죄를 사시(四時)를 어기는 것, 곧 봄,여름,가을,겨울의 때를 놓치고 농사를 짓는 것을 죄라고 해석한다. 유교계통의 어떤 사람은 충의예지신의 오상(五常)을 범하는 것들 중에서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것(무지)을 제외한 네 가지 곧 불충, 불의, 무례, 불신 이 네 가지가 죄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아예 죄라는 것이 없다고 하니, 이런 단어연구에 관심이 없고…
이러한 잘못된 해석들을 지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사실, “죄”라는 단어를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살펴보았더니 15,000개의 자료가 뜬다. 그 중에서 2-300개 정도를 살폈더니, 위와 같은 해석들이 반복해서 이용, 혹은 오용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저 다 살펴 보면 얼마나 더 멋있고 애교가 있는 해석들이 나올까 궁금해진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시간이 있는 분은 그렇게 해보길 바란다.
그 자료들 중에서 그래도 상식과 이성에 근거해서 합당하고 여겨지는 해석이 있어서 이 글을 통해서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罪>라는 말이 <넉 四>자와 <아닐 非>라는 말의 회의(會意)문자라는 전제부터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겠다. 오히려 <넉 사> 아니고 <그물 網>에서 왔다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겠다. <망>자에 해당되는 한자어를 찾아보면 그래서 <罒(망)>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물 망(网)부의 약자이다. 이런 발견은 정말 <죄>라는 한자어의 이해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져온다.
문제는, 어떻게 <그물 網>이 <罪(죄)>와 관계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자면, <아닐 非(비)>에 대해서 좀 더 살펴야 한다. <아닐 비>라고 했는데, 무엇이 아니란 말인가? 이 <비>자는 “….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원래, “잘못된 행동” 그 자체를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부정어로서의 용법만이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형용하는 명사로서 사용되는 용법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이 <비非(비)>자는, “서로 등을 지고 좌우로 벌리는 모양을 본뜬” 상형(象形)문자이다. 서로 등을 지고 있는 잘못된 상태나 사물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형태나 상태 혹은 사물”을 일컫을 때 <非(비)>라고 하는 것. 그런 형태, 상태 혹은 사물(非)에 그물(網,网,罒)을 씌워 둔 것이 바로 <죄罪>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물(網,网,罒)과 그 사물, 혹은 상태나 형태로서의 비(非)와의 관계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한자에 정통한 사람들도 분명한 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는, 그물이 고기를 잡는 그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릇된 일을 하는 사람이 그물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罪>라고 보기도 하고, 혹은 죄수들이 머리에 덮어쓰는 형틀의 일종을 <그물(網)>이라고 보고는, 그렇게 머리에 <그물>형태의 모자 같은 것을 덮어쓰게 되는 것이 바로 <罪>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설문해자說文解字>[중국 후한(後漢) 때의 자전. 15편으로 되어 있다. 허신(許愼)이 지었으며, AD 100년에 쓴 서문이 있다. 글자형에 따라 분류된 가장 오래된 자전]라는 일종의 중국어사전을 보면 그 7편 하에 罪字를 “물고기를 잡는 그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원래는 <辠(죄)>라는 글자(스스로 自+ 매울 辛)로서 “그릇됨”을 나타내었었다고 한다. 맛이 매워서 스스로 코를 비틀 정도로 그릇되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천하를 통일한 그 유명한 진시황제가 이 <辠(죄)>라는 글자가 황제를 나타내는 <황(皇)>자와 유사하게 보여서 이 <辠(죄)>자 대신에 <죄(罪)>자를 사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릇됨>을 나타내는 말로는 <매워서 자기 코를 비튼다>는 뜻을 가진 <辠(죄)>자 대신에 <그물>을 나타내는 <죄(罪>자를 사용하게 되면서, 그물과 비자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시도되어 왔다는 것이다.
언어란 이렇게 생성, 발전, 소멸을 하게 되는 셈이다. 원래는 <코를 비트는 매운 맛>과 관계되었다가 BC 100년 경의 진시황제 때에는 <고기잡는 그물>과 연결되었다가 그 이후에는 그 <그물>이 <죄인의 머리에 잡아 씌우는 형틀로서의 그물>로 그 의미가 전화(轉化)되어지고, 지금도 어쩌면 똑 같은 <죄(죄)자를 사용하고들 있지만,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 채로 사용하고 있게 되는 셈이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죄>라는 한글과 한자어의 <罪>사이에도 의미상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니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이후의 500여년 동안의 세월동안에 <죄>라는 한글조차도 그 의미가 그 시대마다 달랐을 것이다(이런 차이와 변동의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면 충분히 그것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연구들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해 놓고 싶다. 교회가 혹은 신학교에서 한자교육에 등한히 하지 말아야 중요한 이유는 이런 한자문화권 가운데에 기독교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는 선교의식 때문이다).
그물(網)과 그릇됨(非)의 관계를 추적하다 보니, 그런 관계형성 훨씬 이전에 있었던 <죄辠>라는 단어와 개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매워서 코를 비튼다>는 뜻에서 무언가 <잘못됨>,<그릇됨>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이 <죄辠>였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원시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곧 인간의 오감(五感)의 감각기능과 연결되어서 어떤 추상개념들을 형성하게 되던 때의 흔적을 느끼게도 된다.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발전되어 온 것일까 또한 의문을 갖게도 된다. 아담이 사용했던 단어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바벨탑으로 언어가 혼잡하게 된 후 분화 발전되어온 그 언어들의 계보는 어떻게 된 것이며, 한자어는 그 중에서 어떤 계통의 흐름을 따라서 발전되어온 것일까? 정말 기가 막힌 연구가 될 것이다. 고대 근동어와 우랄 알타이어족군과의 관계들을 추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구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죄罪>라는 단어에 집중해 보자. 그러면서, 원래의 원시적, 총체적인 죄의 개념으로서의 <매워서 코를 비틀 정도의 그릇됨>이라는 의미가, 진시황의 지시로 그릇됨을 지칭하는 단어 자체가 바꿔지게 된 이후로, 또한 <그물>의 개념도 바꿔지는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그릇됨이라는 것이 <형법적> 혹은 <법정적>인 개념으로 바꿔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릇됨>이란 개념이 그렇게 분화되어져 간 것이다. <그릇됨>이라는 개념이 총체적이고 미분화되었다는 것은, 아주 다양하고 복합적인 뜻으로 발전되어갈 수 있는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단어가 시대와 역사의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서, 혹은 사상과 철학의 오고감을 통해서(예를 들자면, 중국의 한나라시대의 불교의 흥왕과 명나라 이후의 불교와 유학의 종합으로서의 신유학의 발전 등의 과정), 이 <죄>라는 단어가 겪었을 의미상의 변화에 대해서 음미해 볼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라고 하는 단어의 개념은 원래의 개념에서 어느 정도나 멀어져 있는 것일까? 멀어져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지만, 사실,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러한 우리들이 현재 지니고 있는 <죄>라는 개념이 과연 성경적인 <죄>의 개념과 얼마나 다른가 혹은 유사한가 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정확한 답들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한자어의 <罪죄>라는 말의 사용을 살펴보는 중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그릇됨>의 의미가 외적인 행위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곧 죄의 죄됨에 대한, 곧 그릇됨에 대한 기준이 외적인 행동이고 또한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신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은 외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을 느끼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원래의 죄(辠)라는 단어에 스스로 自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인간 자신이 맵다고 느껴지는 것 그것이 그릇됨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辠라는 것이다. 또 다른 기준은 염두에 없다. 이런 지적은 진시황 이후에 바꿨다고 하는 죄(罪)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할 수 있다. “물고기를 잡는 그물”이든, “죄수의 머리에 씌우는 형틀로서의 그물”이든 모두 외적인 것과 관계된다.
결국 한자어의<죄(罪)>는 영어로 표현되는 <죄(sin)>와는 다른 것이고, 오히려 <죄책guilt>와 관계된다는 것이다. 영어에서 사용되는 <죄(sin)>는 <죄책(guilt)>과 <패괴함(fallenness, 혹은 depravity)>으로 구성되어 있다. <죄책>은 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받게 되는 형벌로서의 죄를 죄책이라고 한다. 법정적이다. 반면에 <패괴함>이란 어떤 사람이 그런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외적인 행동을 범하게 하는 내적인 상태와 동기를 지적할 때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그 동인으로서의 죄를 말하는 것이다.
도둑질이라는 죄가 성립되려면 그 죄에 해당하는 죄책이 있고, 어떤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게 하는 그 사람의 성질과 성향이 있습니다. 이 성질과 성향을 <죄의 패괴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은 <죄>를 생각할 때에 언제나 이렇게 두 가지 면을 동시에 생각해 왔다.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책을 보시면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고, 그가 거의 참고했다고 할 수 있는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책에서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설명을 한국교회가, 아니, 세계교회가 잊어가고 있고,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히브리어, 헬라어를 들먹이면서 설명을 해도, 이런 죄의 패괴성을 지적하지 않는다. 죄의 죄책성만을 언급하고, 죄의 용서를 선포할 때에도 죄의 죄책에서의 해방만을 말하지, 죄의 패괴성으로부터의 자유함에 대해서는 선포하지 않는다. 아니, 선포할 줄 모른다. 어떻게 죄의 패괴성에서 죄인이 자유함을 얻는 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역과 우리 죄의 패괴성의 사죄가 어떻게 연결되는 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죄를 <하말티아>라고 하면, 과녁을 명중하지 못했다라고 설명한다. 옳은 설명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옳은 것이 아니다. 왜 그 과녁을 명중하지 못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 곧 죄인이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계명의 과녁을 정통으로 맞추지 못하게 만드는 그 근원적인 원인으로서의 죄의 패괴성을 지적하지 못한다. 죄인의 죄를 지적하되, 죄의 죄책성에만 집중한다. 외적인 행위에만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용서도 죄의 저주에서의 해방이나 면죄만을 강조하지, 죄의 패괴성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자유함을 강조하지 못한다.
이것을 잊어가고 이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야말로 현대교회의 죄가 아닌지 생각된다. 물론, 이런 한자어의 단어뜻을 제대로 안다고 해서 우리의 죄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죄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죄는 교묘하다. 자신을 감추고 있다. 숨기고 있다. 우리의 무지의 벽 뒤에 자신을 감추고는 우리로 하여금 변명거리를 만들 수 있게 한다. 죄는 죄자신을 왜곡시킨다. 변장한다. 죄의 본질을 죄인들로 하여금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은밀히 그런 변장과 변명을 즐긴다.
지금도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바로 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낄낄거리면서 죄는 자신의 둥지를 틀면서 더욱 그 뿌리를 깊이 내려가고 있다.
오, 님이시여, 사랑하는 님이여,
그 뿌리에 성령의 검 곧 말씀의 검을 내려치소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는 그 좌우 날선 검 앞에 벌거벗은 채로 자신을 내려놓으소서.
자유의 영이 님과 함께 하시길!
나는 개혁되었는가? (14)
Cor meum tibi offero Domine sincere et prompte
(주여 당신께 나의 심장을 바치나이다. 신실하게 바로 지금!)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없이 사회와 민족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의 개혁없이는 교회의 개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 종교개혁기념주간을 맞이하면서 <나는 개혁되었는가?>라는 글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 시리즈를 마치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위기의 벼랑 끝에 서있다고들 합니다. 이 시대를 진단하면서 우리들의 후손들은 질문할 것입니다. 과연 그 시기에 살았던 우리의 아빠, 우리의 엄마들은 무엇을 하셨을까? 물어보면서 혹은 비평의 칼을 들이대면서 분석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의 노고와 수고를 알아주지 못하고 오해하는 진단을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오해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부림을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총체적인 국가의 위기와 맞물려 돌아가는 현하 한국교회의 위기의 현장에서 나름대로 진단하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며 나름대로 몸부림을 치는 우리들의 그 비지땀을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어떤 이는 이런 한국교회에 “영성운동”이 대안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제자훈련”이 잘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평신도교육”이 잘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교회제도”가 온전하게 회복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개혁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성령충만”이야말로 대안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성령세례의 체험”이 참된 대안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성직구분철폐”를 주장하고, 어떤 이는 “목사장로임기제한”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서 제가 제안한 “심령개혁”- 나의 본성과 습관과 기질이 변화되는 회심과 중생에 근거한 자아개혁, 나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할 수 있는 이 개혁이, 앞서 제기된 여러가지 대안들에 대해서 또 다른 하나의 대안으로 제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모든 “대안들”이 진행되는 중에, 그 밑바닥에, 그 기초에, 바로 이 “자아개혁”, 곧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중생과 회심”의 개혁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기초를 새롭게 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 없이는 참된 교회일 수가 없고, 이것 없이는 참된 교회개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교회개혁론이 되는 것일까요? 시편기자가 질문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시11:3)?그리고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4절). 하늘의 터만이 참된 터이고 진정한 터입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보면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히11:10)습니다. 세상의 모든 터가, 외부적인 조직으로서의 교회의 터가 무너져도 이 터만큼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터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터를 두고 이 지상의 모든 터를 다시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개혁이 바로 나로서는 할 수 없는 하나님께로서만 가능한 자기개혁, 참된 중생과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개혁이라도 이것 없이는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이것 위에서 교회개혁이, 그리고 민족개혁이 시도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 하늘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만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옵소서!
실상 이제부터 교회개혁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어야 할 대목입니다. 교회개혁을 통한 민족개혁과 세계변혁의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황당한 꿈일까요? 건방진 희망일까요? 개혁되어진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세계경영에 대한 비젼과 꿈을 공유하게 된 사람들이 아닌가요? 자신의 행복에 집착했던 자아의 그 본성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소망하도록 개혁된 자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던가요? 그리하여, 무너진 터를 쌓기 위해서 탄식하는 “의인”이 바로 그리스도인 아니던가요? 그런 그리스도인됨으로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사용하옵소서! 무너진 터를 수보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여, 나의 펄펄 뛰는 이 심장을 주께 바치나이다! 신실하게 지금 바로! (Cor meum tibi offero Domine sincere et prompte)
첫댓글 그동안 글을 올려주신 Horace목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편집과 교정을 보아주신 양무리마을 손재익 형제님의 수고에도 감사드립니다. 계속해서 목사님의 교회개혁에 대한 견해도 기대가 됩니다.
이 글을 쓰신 호레이스 목사님도 대단하신 분이시지만 이 글을 꼼꼼히 읽고 또 퍼온 광주행님도 대단한 분이십니다. 상당히 길어서 다 읽는다는 것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글인데요...ㅋㅋㅋ.
교회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글이라 생각합니다. 현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역사적사명 , 하나님의 경륜(영원전부터 가지신 목적)을 이해하고 감당하기위해서는 심령과 마음의 개혁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Horace목사님이 잘 지적하고 계신것같습니다. 아울러 이광호 목사님의 교회를 향한 '신학적 관심'
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짚어 볼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