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무술이란 온몸을 사용해서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맨손 격투술을 말한다. 즉 자신이 신체의 일부나 전부를 사용하여 건강. 체력. 증진.안전 도모하는 과거의 동양맨손 무술의 총칭이라 할 수 있다. 맨손 무술은 현대의 다른 무술과는 달리 특별한 장비가 필요 없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자유로이 수련 할 수 있는 무형의 기술로서 효용가치가 크다.
맨손무술은 그 특성상 어느 지역이든지 충분히 꽃필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중국에는 우슈, 태국에서는 무에타이가 있고 일본에서는 가라데, 몽골의 버흐 등 다양한 형태의 맨손 무술이 시대별, 지역별로 발전해 왔다.
그럼 한국의 맨손무술은 무엇일까?
고구려 벽화에 보면 옷을 벗은 무사들의 맨손무술을 하는 장면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이종격투기 선수들이 팬티를 입고 경기를 하는 모습과 비교해서 볼 수 있다. 그 그림에서의 무사들의 공방형식은 유도나 씨름처럼 잡는 기술이 아니고 태권도의 차기나 아니면 합기도의 치기, 꺽기, 던지기의 기술이 주종을 이루었다고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의 이종격투기처럼 옷을 벗고 단지 팬티 비슷한 옷을 입은 형태로 보았을 때 유도처럼 깃을 당기거나 하는 것이 아닌 레슬링처럼 상대의 몸을 끌어 안거나 당겨서 겨루기를 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럼 그 서기 600년 전에 그려진 고구려 벽화에서 보여지는 무사들이 행했던 맨손무술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국의 최초의 이종격투기라 볼 수 있는 그 맨손 무술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최근 아주 특별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고구려 때부터 내려오는 맨손무술을 지금까지 보유 전수하고 있는 송창열 선생을 통해서 우리 나라의 맨손무술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송창열 선생은 개성태생으로 지금은 김해에 살고 있다. 송창렬 선생의 맨손 무술이라고 하는 그것은 바로 송도수박(手搏)이다. 어린 시절 개성의 유명한 장돌뱅이인 천일룡(개성의 장돌뱅이로 개성에서는 주먹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고 한다)라는 사람으로부터 배워 내려와 지금은 아들인 송준호씨가 전수를 받아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송창렬 선생과의 직접 인터뷰에서 천일룡은 어린 시절 개성에서 유명한 주먹으로 통했다고 한다. 송창렬 선생의 집은 개성에서 금속제조 공장을 했기 때문에 부유했다고 한다. 일제 탄압시기에 송창렬 선생은 가난해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다른 한국아이들과 달리 일본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매일 조센징이라고 왕따를 당하며 몰매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래서 송창렬 선생의 아버지는 아들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천일룡에게 무술을 가르쳐 달라고 의뢰를 하고 그 때 배운 무술이 바로 수박이다. (여기까지 스토리를 보면 최근 개봉을 한 바람의 파이터의 앞부분과 흡사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송창렬 선생은 사실 자기가 배운 무술이 수박이라고 배운 적은 없다. 단지 천일룡이 네가 배우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것이라고만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 개성은 일본이 장악한 시절이었죠. 게다가 전쟁이다 뭐다 해서 세상이 어수선한 시절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이 한국문화 말살정책을 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우리 것을 배운다는 것이 금지된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나를 가르친 천일룡과 여우골(주위에 여우가 다니는 골짜기라 해서 사람들이 가기 꺼려하는 골짜기) 올라가 몰래 배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송창렬 선생의 말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유일한 수박 기능보유자인 송창렬 선생은 1942년부터 50년까지 개성에서 천서방(본명 천일룡)에게서 배운 수박기(手搏技)를 수년간 틈틈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현재 수박의 동작을 하고 있다.
송창렬 선생의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개성 남문통이라는 시장에서 보부상(장돌뱅이 또는 건달패)들이 싸우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하는데 그들이 싸우던 방식이 자신이 배운 수박과 비슷하다고 하며 수박은 손을 주로 쓰고 발은 막싸움에서 가릴 것 없이 싸울 때 가끔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술용어와 관련해서는 수박치기,어깨,둘레치기,물레돌리기,잡놈지랄떨지마(기술을 쉽게 외울 때 사용했던 암기 법)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그 정확한 동작의 이름을 알고 있는 못했다. 그 당시 지도 법이 여러 사람들을 통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일, 즉 체계를 갖출 필요가 없이 단순한 동작과 그 응용 법을 교수하던 것이었다는 것은 수박 이외에도 전통적인 기예들에 공통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간다.
과연 그럼 수박은 무엇인가? 요즘 말로 표현해서 최초의 이종격투기이였던 우리의 수박은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무도미디어에서는 우리무술의 원형이며 최초의 이종격투기였던 수박을 하나씩 파헤쳐보고자 한다.
그림설명: 무용총 (舞踊塚) 수박도(手搏圖)
◈ 소재 : 中國 吉林省 集安縣 通溝 ◈ 광개토왕릉비의 북서쪽 약 1km 지점에 각저총(角抵塚)과 나란히 있다.
1편 수박의 역사 삼국시대 이전 조선상고사문화사 [신채호]- 고려사 팔관회 끝에 “신라의 고사대로 백기와 가무를 습한다”하고 백기 종류는 말하지 ?訪弩립? 각 사를 참증하여 몇가지 얻을 수 있도다. 수박(手搏) 이는 곧 무기를 가지지 아니하고 白手白身으로 서로 반격하는 것이니 후에 일본에 전하여 유술이 되고 지나에 전하여 권법이 되니라. 조선 수천년 사이에 이를 매우 숭상하여 다만 10월 3일의 대제후뿐 아니라 곧 어느 명절이든지 매양 조중의 문무를 갈라 양편이 돼서 수박을 행하고 임금이 구경하더니, 고려 의종 때 이 장난으로 말미암아 문무당의 싸움이 일어나매 곧 폐지시키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단군이래 한반도의 전 부족사회에 이와 같은 제례의식인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신라의 가배등이 전해져 내려왔으며 최근세까지 우리의 풍속에 남아 있던 오월, 단오, 팔월한가위 등에서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각종 놀이를 즐기며 수박, 씨름, 줄다리기 등의 경기가 행하여 지는 것이 모두 이에 연유한 것이다. 지금도 명절마다 제사를 지내고 놀이를 하는데 이때의 놀이는 단순히 재미로 하는 놀이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 놀이에서 승부를 가리여 명예를 얻고 출세의 기회로 삼는 것이었다. 현대에 행해지는 씨름을 보면 그 점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에 보면 고구려의 강성은 선비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태종때부터 해마다 열리는 신수두 대제에 모든 사람들이 모아 혹은 칼로 춤추고 혹은 활도 쏘며 혹은 깨금질도 하고 혹은 수박도 하며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은 노래하고 춤을 추어 그 잘하고 못함을 보며 혹은 크게 사냥을 하여 그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을 보아서 여러가지 내기에 승리한 사람을 선비라 일컫고.. 라고 하여 무예가 능한 자를 뽑아 단체를 만들고 급여를 주었다고 말한다. 명림답부와 연개소문 등이 선비 출신이다.
또한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에서 “수박이 씨름과 함께 제례 행사로 행하여 졌다. 송도 수박이 조선까지 내려오고 있다. 송도 수박은 고구려 선배의 유풍이다”라고 말한다.
수박이 경기방식은 현재 일본의 스모와유사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에 보면 선비는 싸움에 당하여 물러서지 아니한다. 고려의 대장군이었던 이 송응이 수박희를 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도망을 치므로 분신인 한뢰가 그의 빰을 쳐서 계단으로 밀어제쳤다는 말이 있다. 이를 보면 수박은 타(打)보다는 상대를 밀어 넘어뜨리는 것을 중시했던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수박을 보는 다른 견해는 중세조선의 권법[조승희, 평양사범대 교수] 수박이란 이름을 손으로 쳐서 넘어뜨리는 놀음이라고 일러 왔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면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치기,차기,막기의 세가지 동작을 다 갖춘 매우 수준높은 기술 수준을 전제로 하는 무술이었다, 다리 힘이 세고 걸음걸이가 빠르며 뛰기를 잘하는 것을 장기로 여겼던 고구려 사람들이 발길질을 안했다고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시말하면 고구려 시대의 수박은 학교의 교과과목, 일상에서의 놀이, 제천행사에서는 개인의 장기로서 행해졌으며 전쟁시에는 무술로서 활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사회 조직을 보면 산무사(?武士)라는 직업이 보이는데 이는 평소에는 생업에 종하하다가 전쟁이 있을 때 임시로 군대를 조직하여 전투에 참가하는 무사를 말하는데 전투와 생업을 분리할 수 없었던 원시 부족사회의 유풍으로, 전국민이 평소에도 무예를 연습하고 있다가 5월 10월에 제천행사의 경기대회 참가하여 개인의 기량을 시험하고 부락끼리의 단합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제각기 무리 별로 별도의 군대를 조직하고 그 중에서 무예와 용기가 뛰어난 자를 지휘자로 내세워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다. 이들 중에에서 특별히 공로가 있을 때에는 무관의 별슬을 얻어 직업적인 무사가 되기도 하나 대개는 전쟁이 끝나면 본업에 돌아왔다. 고려사에 보면 당태종이 30만의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노하니 고구려는 僧軍3만을 내어 이를 격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모두 산무사의 일단을 엿 볼 수 있는 기록들이다. *신채호는 승이나 재가화상이라 중이 아니라 신수두 단전의 조의무사라고 하였다. 조의 무사란 고구려의 무사 선비이며 선비는 5월 10월 경기에서 승리한 자로서 한집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며 급여를 받았던 직업적인 무사들로서 산무사(재가화상)와는 구별된다고 보여진다. 수박을 하는 그림은 새간무덤(삼실총), 춤무덤(무용총), 미천왕무덤(안악 3호분)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 벽화는 고인이 생전에 생활하던 환경을 재현 하려는 의도에서 그린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벽화중에는 수박, 씨름의 경기 장면이 있다. 고구려 제10대 산상왕 13년부터 수도였던 환도산성의 무용총 현실 벽화에 수박희를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 시대에 이미 수박이 어느정도 체계화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우리 조상들이 수박을 얼마나 즐겼던가를 알 수 있다. 각 저총에는 두 사람이 해가 뜬 날 큰 나무밑에서 서로 잡고 씨름을 하는 그림이 있어 무용총의 수박 그림과 비교해 볼 때 수박과 씨름은 고구려 시대부터 분리되어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무용총은 수박, 그리고 각저총은 씨름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나 이는 일면적인 해석일 수 도 있다. 수박은 손으로 치기도 하고 잡고 넘어뜨리기도 하는 것으로써 위의 두 그림은 수박의 특징적인 두가지 (떨어져 손으로 치기, 허리를 붙잡고 넘기기)모습을 구분해서 표현한, 즉 두그림 모두 수박그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의 스모는 수박희와 비슷한데 떨어져서 손바닥으로 치거나 허리를 잡고 넘기기도 한다. 1935년 36년 양차에 걸쳐 무용총벽화를 조사한 일본인 사학자들은 무용총 그림을 스모라고 하였다. 상박(相撲)을 일본인은 스모라고 읽는데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사인들과 일본 무사들이 상박을 했다고 하는데 이때 상박이 지금의 일본의 스모이며 우리의 수박이었던 것이다. (안자산 조선무사영웅전)에서 수박을 상박이라고 말한다. 수박의 搏과 상박의 撲은 뜻이 같다. (치다,잡다, 밀다). 각저의 저도 찌르다, 막다의 뜻이며 경기 방식도 또한 거의 같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소가 싸울 때 소로 거리를 둔 상태에서 한번에 달려들어 뿔로 받으며 싸운다. 각저= 상박(스모) 이고 지금의 상박(스모)가이 일시에 달려들어 손으로 치고 밀고 붙이는 것을 볼 때 각저가 어떤 것인지 이해 할 수 있다. 씨름 선수 이만기 교수도 각저는 현재처럼 샅바를 잡고 하는 것이 아니라 떨어진 상태에서 달려들어 부딪히며 싸우는 것이라고 한다 (이만기 씨름)
결론적으로 각저는 상박이고 손으로 치고 막는 수박이며 각력도 각저,상박,수박과 씨름에 공통으로 사용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