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타란티노의 두 번째 영화이자 그의 천재적 재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든 영화가 [펄프 픽션]이다. 칸
느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기 전까지 전세계 영화팬들
은 아직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92년 [저수지의 개
들]이 성공하기는 했지만 아직 전문가나 마니아 수준에서
그 미학성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펄프 픽션]
은 94년 칸느 그랑프리를 받으면서 타란티노의 존재를 전
세계적으로 알렸다.
[펄프픽션]은 원래 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미국 대중을
사로잡았던 싸구려 소설잡지를 말한다. 그레이 하운드 고
속버스를 타기 전에 가판대에 꽂혀 있는 싸구려 대중소설
이나 잡지를 펄프픽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조악하게 인
쇄되어 있고 야한 삽화가 그려진 이런 소설들은 대부분
추리물로서 내용적으로는 살인, 강도, 불륜 등의 범죄를
다루고 있다. 대실 해밋, 데이비드 구디스, 코넬 울리치,
제임스 M 케인, 레이몬드 첸들러, W.R. 버넷 등의 작가
들이 범죄로 얼룩진 어두운 도시에 관해 하드보일드 터치
로 소설을 썼다. 이런 소설들은 후에 50년대 프랑스 영화
평론가들인 장 뤼 고다르 등에 의해 [필름 느와르film
noir]라는 장르로 불리우기도 했다.
[펄프픽션]에서 타란티노 영화미학은 확연하게 색깔을
드러낸다. 투기꾼들의 수많은 돈이 걸린 복싱시합에서 패
하기로 약속해 놓고는 약속을 어기고 도주하는 삼류 복서
와 그의 여자 친구, 보스의 애인을 경호하기로 되어 있지
만 이상한 관계로 발전하는 갱들, 레스토랑에서 한 탕을
꿈꾸며 총을 들고 설치는 얼치기 연인들, 이 세 가지 에
피소드가 안과 밖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다.
영화는 풋내기 좀도둑 커플 하니 버니(아만다 플러머
분)와 펌킨(팀 로스 분)이 싸구려 레스토랑에 앉아 강도
를 모의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
던 그들은 술집 대신 지갑에 돈이 두둑한 손님들이 밀집
되어 있는 이런 레스토랑이 한 탕 하기에는 적당하다고
의견을 교환한다. 그리고 그들은 총을 빼어 들고 사람들
을 위협하며 엎드리게 하는데, 레스토랑 한쪽 구석에서
식사를 하고 잇던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빈센
트 베가(존 트라볼타 분)와 줄스 윈필드(사무엘 잭슨 분)
이다.
그러면서 화면은 빈센트와 줄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도입부의 레스토랑 강도 씬은 이야기를 여는 역
할만 하고 있는 것이다. 빈센트와 줄스는 조직의 보스인
마르셀러스 윌러스(빙 레이스 분)의 명령을 받고 검은 서
류 가방을 찾기 위해 그들을 배반한 사기꾼들을 뒤쫒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배반자들이 숨어 있는 아파트로 가
서 그들을 몰살시키고 인질을 붙잡아 현장을 빠져 나온
다.
그런데 돌아오는 차안에서 인질을 권총으로 쏘아 죽이
는 바람에 차안은 피범벅이 된다. 보스는 보고를 받고 해
결사를 보낸다. 빈센트와 줄스는 친구인 지미(쿠엔틴 타
란티노 분)의 집에서 보스가 보낸 해결사(하비 케이틀
분)를 기다린다. 해결사는 능수능란한 솜씨로 차를 청소
하고 시체를 흔적도 없이 완벽하게 없애 버린다. 살인의
증거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보스는 사업차 출장을 떠나면서 심복인 빈센트에게 정
부인 미아(우마 써먼 분)를 부탁한다. 그들은 함께 레스토
랑에 가서 식사를 하다가 춤 경연대회에 나가 우승을 한
다. 신나는 춤으로 기분이 상승된 미아와 빈센트는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빈센트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려
고 애를 쓴다. 그때 미아는 빈센트의 재킷을 뒤져서 마약
을 찾아내고 그것을 복용한다. 그러나 미아가 복용한 마
약은 치사량이었다. 정신을 잃고 호흡곤란 상태에 있는
미아를 구하기 위해 빈센트는 마약상의 집으로 가서 응급
처치로 미아를 구출한다.
보스의 사무실에서 빈센트는 버치(브루스 윌리스 분)와
마주친다. 버치는 삼류 복서인데 보스인 마르셀러스에게
거액을 받고 권투 시합에서 다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버치는 돈을 모아서 자기 자신에게 거액의 돈을
걸고 상대 선수를 다운시켜 시합에서 이긴다. 그리고 애
인 파비엔느(마리아 드 메데로이스 분)와 함께 도망을 친
다.
그러나 미리 약속대로 변두리 싸구려 모텔에서 파비
엔느를 만난 버치는, 애인이 버치 아버지의 유물인 금시
계를 놓고 왔다는 것을 알고 죽음을 무릅쓰고 혼자서 다
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에는 예상대로 보스의 심복인
빈센트와 줄스가 기다리고 있다. 버치는 금시계를 찾아서
도망치다가 그들과 마주치자 총을 집어 그들을 살해한다.
버치는 도망치는 과정에서 다시 보스와 조우하는데 그
들은 변태 게이 조직의 지하실에 붙잡혀서 치욕을 당한
다. 버치는 보스를 구해주고 그곳을 탈출하는데 보스는
자기를 구출해준 버치에게 다시는 이 도시로 돌아오지 말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다시 첫 장면으로 되돌
아간다. 빈센트와 줄스는 풋내기 좀도둑을 제압하고 그들
에게 돈을 주어 돌려보낸다.
[펄프 픽션]의 시간적 구조는 교묘하게 비틀어져 있다.
이야기들은 서로 파편화 되어서 각각 해체되었다가 다시
조우한다. 타란티노는 이미 구세대의 인물로 버려져 있던
왕년의 디스코의 황제 존 트라볼타를 새로운 모습으로 멋
지게 재창조했다. 존 트라볼타는 올백으로 머리를 넘기고
살찐 모습으로 등장해서 바람둥이 디스코 황제의 이미지
를 벗어던지고 킬러로서 눈부시게 변신했다. 또 브루스
윌리스 역시 싸구려 액션 배우처럼 생각했지만 이 영화에
서는 아버지의 유물에 집착하는 내면 연기를 뛰어나게 표
현하고 있다.
내기 시합의 약속을 어기고 도망치는 복서나, 보스의
애인과 눈이 맞는 갱들, 좀도둑이 강도를 하다가 고수를
만난다는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3,40년대에 등장했던 싸
구려 범죄 소설에 수없이 반복되었던 이야기들에 다름 아
니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이미 낡은 장르와 소재를 자신
의 독창적 상상력으로 과감하게 비틀어 새롭게 창조함으
로써 낯선 형식을 창조했다. 그것은 이미 서술한대로 시
간의 해체와 재구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시간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일직선적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의식이 타란티노 영화미학의 근저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윤회를 기초로 하는 불교적 세계관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
물론 타란티노가 불교정신에 입각해서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고뇌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 막
다른 골목에 다다른 서구 형이상학의 한 단면을 보여 준
다. 우리의 삶은 일직선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식은, 비선형적 서사구조를 창조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것은 시간의 비틀림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인데, 타란티
노의 데뷔작인 [저수지의 개들]에서 보여준 놀랍고 대답
한 시간의 해체와 [펄프 픽션]에 나타난 시작과 끝이 모
호한 비선형적 세계질서의 드러냄은 타란티노 영화가 기
독교적 세계관에서 일탈해 있다는 뚜렷한 증거로 보인다.
존재를 제외하고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불교의 존재
론 속에는 움직이는 시간과 움직이지 않는 시간에 대한
폭넓은 자각이 있다. 생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오
욕칠정의 세계 속에서는 오직 움직이는 시간만이 존재한
다. 삶의 숙명적 허무와 맞부딪치게 되는 선형적 시간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결국 움직이지 않는 시간, 이미 존재
하는 그 자체로 충분한 절대에 대해 자각케 한다. 일상적
시간을 초월하는 세계에 대한 탐구가 아직 타란티노 영화
속에 구체적으로 묘사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제 그 절
대적 시간 속으로 막 한 걸음을 떼어놓고 있다.
유럽에서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타란티노 영화는 바로
그 바탕에 이처럼 시간의 해체를 깔면서 정신적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단지 뛰어난 기교를 갖춘 감독이 아니
라 서구 문명의 근저를 송두리채 뒤흔드는 무서운 실험의
식과 도전정신이 있기 때문에, 타란티노인 것이다. 사실
타란티노 정도의 기교를 갖춘 감독은 많이 있다. 그럼에
두 불구하고 그에게 세계 영화의 물결을 뒤바꾼 혁명아라
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이유는, 타란티노의 영화가 단
지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기댄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충
격을 줄 수 있는 사유의 새로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