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랑이 나를 이곳에 있게 했다!
사랑, 일터를 살리는 힘
일터를 흔히 조직 사회라 합니다. 그리고 조직은 냉정하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구조조정, 대량 인원 감축, 노사분쟁 같은 일이 일어나면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받아들이면서도 그 개개인의 마음엔 상처와 회한이 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조직이 정다운 일터가 되는 것, 결국 ‘사람’의 일입니다. 아주 작게 여겨지는 말 한마디, 배려 하나에 일터는 따스해집니다. 그 따뜻한 체온이 한파를 이겨냅니다. 생기가 넘치는 일터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만든 일터의 마음을 느껴봅니다.
“사랑하면 노사 협력은 저절로 됩니다”
취재,사진 정하나
“말 못하게 따뜻하고 고마운 우리 회사” 강원도 ‘성산택시’ 사람들
강원도 홍천군에 가면 ‘노란지붕 콜택시’라고 불리는 소문난 택시가 있다. 차량 지붕이 노란색인데다 노란색 방범등을 켜서 붙은 애칭이지만, 진심 어린 친절과 서비스로 더 유명하다. 단정한 운전복과 사원증을 착용한 정중한 기사들, 차를 부른 지 5분 이상 지체되면 사과방송과 함께 회사에서 요금을 지급하고, 비 올 때는 우산까지 씌워준다.
성산택시에 감동하는 이유는 ‘영업전략’이 아닌, 사랑이 담긴 배려에 있다. 90여 명의 기사들이 정성껏 고객을 섬길 수 있는 비결은 그들 자신이 회사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믿기 때문. 그들 곁에는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끔찍이도 아껴주는” 김완기 대표가 있었다.
직원들 저마다 간직한 고마움의 기억들
오수빈(42)씨는 일년 전 성산택시에 들어왔다. 10년 전 베트남에서 의류 수출업을 하다 결국 실패하고, 몸 마음이 모두 지쳐 돌아왔다. 한때는 절망해 죽음도 생각했던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준 곳이 바로 성산택시다.
“입사 당시 주눅도 들어 있었고, 길도 잘 몰라 실수가 많았어요. 근데 사장님과 동료 기사 분들이 어찌나 다정하게 가르쳐주고 기다려주시는지…. 마음의 상처가 다 치유된 느낌이고, 나는 행운아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 고마움은 평생 못 잊을 거예요.” 성산택시엔 오씨처럼 외지에서 온 직원이 절반을 넘는다. 사업하다 접고 온 가장, 방황하다 희망 없이 찾아든 사람, 생활고로 일하러 나선 주부…. 저마다 사연도 다르지만, 이 회사에 오면 공통점이 생긴다. 오씨처럼 고마움과 따스함을 가슴에 간직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충옥(36) 과장은 입사한 이후 지금까지 7년 동안 “아, 회사도 이럴 수 있구나,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기주의가 없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챙기고 도와주고. 장애인 직원을 위해서도 어떻게 도울까 의논해요. 이런 가족적인 분위기의 회사가 있으리라 생각도 못 했죠.”
힘들 때 회사에 오면 마음이 밝아진다는 이씨는 “이런 분위기는 사장님이 먼저 직원을 끔찍이 사랑해준 덕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모두들 사장님을 아버지처럼 따라요. 때론 빚도 갚아주고 집도 마련해주고, 당신 가족에게 하듯 최선을 다하세요. 회사에 큰 손해가 나도 직원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합시다’ 하실 때는 정말 마음이 훈훈해지죠.”
15년간 근무해온 업무부장 김학재(46)씨는 입사 당시만 해도 회사가 이렇게 성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함께 고생했던 기사들에게 김대표는 “이다음에 우리 회사가 커지면 해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회사는 성장을 거듭했고 김대표는 그 약속을 200% 지켰다.
냉정한 원칙보다 믿음과 배려가 우선인 회사
성산택시의 직원은 모두 정규직이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가족을 고향에 두고 온 직원들에게는 함께 살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해준다. 결혼하면 16평짜리 아파트를, 그리고 독신 생활자에게는 사택을 제공해준다.
농번기 때는 손님이 감소할 것을 고려해, 사납금도 깎아준다. 그렇게 해서 일년간 기사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금액이 140만원가량이나 된단다. 회사는 언제나 냉정한 ‘원칙’보다 직원에 대한 믿음과 배려를 우선했고 그런 ‘회사의 마음’은 직원들 가슴에도 스며들었다.
“우리 모두 자부심이 대단해요. 일본의 MK택시 부럽지 않아요. 사장님은 늘 ‘열심히 일하고 꿈을 잃지 않으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희망을 주거든요. 이런 택시회사 없어요.” 김학재씨의 말처럼, 이미 직원들은 회사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닷새에 하루 쉬는 날에도 회사에 나오는 직원들이 많다. 쉬기 위해서, 회사에 ‘봉사’하기 위해서 나온다. 어떤 직원은 화장실부터 마당까지 청소를 싹 해놓는다. “어려울 때 사장님이 이만큼 이끌어주셨는데, 보답하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더라”는 그의 말에 많은 직원이 공감한다.
집보다 회사에 오는 것이 더 즐겁다고 말하는 직원들이기에 고객에 대한 친절도 남다르다. 배운 대로 받은 대로, 노약자의 짐 보따리를 집 앞까지 들어다 주는 기사들. 어느 때는 콜센터가 고객들의 감사 전화 받느라 더욱더 분주해진단다. 성산택시에서 가장 일찍 출근하는 사람은 김완기(60) 사장이다. 늘 새벽 5시면 일어나는 그가 회사에 나와 하는 일은 청소와 세차. “하루에 두 시간 정도는 꼭 남을 위해 할애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이다. “잠깐이라도 남을 위해 시간을 쓰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사회가 참 밝아질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아내가 외출했다 늦게 오는 날은 방 청소까지 다 해놓아요. 얼마나 피곤하겠소, 푹 쉬시게, 했을 때 아내는 정말 감동받고 행복해하지요. 일터의 이치도 같은 거예요. 내가 먼저 남을 위하고 사랑하는 거예요.”
1950년생 ‘사변둥이’인 그는 전라도 전주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지런한 천성은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가 물려준 유일한 유산이었다. 부친은 그가 세 살 때부터, 해 뜰 무렵이면 “완기야 복 들어오게 대문 열어 놔라~” 하셨단다. 그것이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되었다. 그런 부친이 가난한 살림에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그는 한 가지 원(願)을 세웠다.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는 것. 그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청계천 다리 밑에서 살며, 고철을 주워 돈을 모았던 그는 열여덟 살 때부터 택시를 몰기 시작했다. 밥 먹는 시간도 아끼며 노력한 끝에 1986년, 강원도 홍천에서 성산택시를 인수한 그는 19년 만에 꿈을 이루었다. 당시 전국 최초로 콜택시를 도입했다. 강원도 지역 120여 개의 택시 회사 중 택시 다섯 대로 가장 작게 시작했지만, 그 후 20년 만에 다섯 곳의 계열사를 갖추며 10위권의 탄탄한 택시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는 사이 ‘회사의 마음’도 함께 성장했다. 그 중심에 “마음을 비우는 것, 그리고 남과 나누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라는 김사장의 경영 철학과 실천이 있었다.
“어려운 사람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생겨야죠. 돈을 아무리 벌면 뭐해요. 제가 어려웠을 때 누가 조금만 도와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제게는 그때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제가 그런 사람이 되면 되죠. 항상 사랑은 먼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가 워낙 아낌없이 나누다 보니,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냐. 누가 알아주냐”며 핀잔 주는 지인들도 많았다. 실제로 몰래 사고를 일으키고 야반도주하는 직원도 있었지만 그는 마음으로라도 밀어낸 적이 없단다. 오히려 먼저 고맙다고, 열심히 살자고 늘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거친 언행으로 물의를 빚거나, 늘 술 먹고 태만한 사람도 희한하게 이 회사에 있다 보면 ‘새사람’이 된다.
먼저 주고, 한없이 주고, 끝까지 주자
이런 성산택시에도 노사분규가 있었다. 김사장에겐 가장 큰 시련이었다. 2002년, 노조의 정치적 성향 차이로 시작된 노조 간 갈등과 분쟁이 6개월가량 이어졌고, 급기야 소송까지 가게 됐던 것. 가장 행복한 일터를 만들고 싶었던 그는 이때 택시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한다. 하지만 그는 곧 초심으로 돌아갔다. 처절하게 자신을 탓했고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계속해 나갔다.
“좀 더 마음을 비워 더 열심히 해보자, 더 열심히 주자,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하는 마음이었죠.” 진심으로 귀 기울이며 다가가자 직원들은 마음을 열었다. 그 후로 노사 갈등은 없었다. “안 된다” 대신 “그럼 해야지” “시정하지”라며 수용하고 실행하니 문제가 없었다.
그는 “돈을 벌면 3분의 1은 직원에게, 3분의 1은 사회에 환원하자”는 꿈을 한 걸음씩 실천하고 있다.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회사를 사랑해야, 직원들 마음 덕에 회사가 커가는 거예요. 직원들에게 먼저 열심히 해라 할 게 아니에요. 사장이 먼저 베풀고, 한없이 베풀고, 끝까지 베풀었을 때 직원들이 감동해서 열심히 하게 되는 겁니다.”
전국 택시업체의 가동률이 50%도 안 될 정도로 불황인 요즘 성산택시는 언제나 풀가동이다. 하루 콜 전화 1천~1천5백 통, 홍천군 내 콜택시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성업 중인 이 회사의 성공 비결은 바로 ‘먼저 내주는 사랑’이었다.
방황할 때 잡아준 사랑 5년 차 기사 전광조(46)씨
경북 울진이 고향인 전광조씨는 한때 말없이 회사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오고 또 나가기를 몇 번. 지금은 열심이지만 그때는 마음의 중심을 못 잡았다. 다시 돌아온 그를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준 이가 바로 사장님이었다. “사장님 얼굴을 봐서라도 이젠 다른 짓 못한다”며 웃는 전광조씨.
“사장님이 늘 ‘광조야, 나는 니가 참 좋다’ 하시는 거예요. 마음이 따듯해지고 좋죠.” 그가 무척 힘들 때 늘 도움을 준 분, 아들의 대학 등록금이 없어 애태울 때 등록금을 마련해준 이도 사장님이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다 표현을 못 해요. 사고도 많이 쳤는데 늘 잡아주고 감싸주고 베풀어주시고 안아주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싶고 마음이 찡했어요.” “성산택시에 들어와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는 그는 이젠 마음도 잡고 자리도 잡았다.
“그 고마움…, 늘 잊지 못합니다.”
고단한 객지 생활, 홀로 앓을 때 받은 정
9년 차 기사 박상기(55)씨
9년 차 기사 박상기씨는 2001년 2월, 서울에서 왔을 당시 방 얻을 돈도 여의치 않았다 한다. 이때 선뜻 돈을 빌려준 이가 사장님이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뀐 생활에 적응하기가 고단했는지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때도 사장님은 배차에서 빼주고 푹 쉬라고 위로해주어 참 고맙다 싶었단다. “이삼 일째 되던 날, 사장님이 전화를 하셨어요. 좀 괜찮으면 저녁에 나오라고.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고깃집으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그날 김사장은 박씨와 같은 연배의 동료 기사 한 명도 같이 불러냈다. 그리고는 “혼자 객지에 나와 있는 사람이 잘 먹어야지 자꾸 아프면 안 된다”, “나하고 둘이 먹자 하면 부담 가질 것이니 동료하고 실컷 드시라” 하고는 자리를 떴다. 처음엔 깐깐하고 철저한 분이라 생각했다는 박씨는 “정이 많은 분이구나, 이분은 절대로 배신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어떻게 먼저 등을 돌릴 수 있겠나 싶었단다.
박상기씨의 말을 옆에서 듣던 오수빈씨는 자신도 똑같은 경험이 있다면서 놀라워했다.
마음이 좋아하는 잡지
월간 마음수련 2009년 11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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