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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들 지내셨어요? 자, 우리 기도하고 시작하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주님, 저희들과 늘 함께 하시며 저희들의 인생의 여정에 빛이 되어주시고 이끌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저희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움직임들 저희들 삶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움직임들을
당신 성령의 빛으로 비추임 받아서 잘 식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성령의 움직임과 합치되어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분별의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고
사랑으로 깊어진 맑은 눈을 허락하여 주시어 당신의 생명을 향한 그 움직임을 잘 포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예. 우리 지난 시간에는 영의 식별에 대해서 영의 식별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전제 조건을 먼저 갖춰야 되는지 영의 식별에 들어가기 위한 어떤 준비 작업 그 점에 대해서 봤더랬습니다.
오늘부터는 이제 본격적으로 영의 식별에 대해서 살펴봤으면 합니다.
근데 우리가 이 영의 식별에 들어가면은 어떤 영적 상태, 영적 상태를 이야기를 할 때 영의 식별에 들어가면은
아, 내가 지금 영적인 위안 상태에 있다 혹은 영적인 고독 상태에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영적 위안이라든지 영적 고독. 근데 이제 여기서 좀 더 세분을 해서 나누면은 영적 위안 안에는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 있는가하면은 사전의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도 있죠.
여기 ‘사전’ 하는 거는 뭐 국어사전 영어사전 이런 게 아니고 ‘어떤 일의 앞선’ 이 말이죠.
어떤 일의 앞선 원인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들을 쭉 구분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도대체 지금 영적인 상태가 어떤 상태에 머물고 있는가?
크게 나누면은 위안과 고독으로 나누고 더욱 더 엄밀하게 이야길 하면 위안도 아니고 고독도 아닌 ‘영적으로 평온한 상태’ 하는 것도 하나 있다는 거.
따라서 내가 요즘 위안을 맛보고 있지 않다 이래가지고 무조건 내가 아, 고독 상태에 떨어져 있구나 그렇게 이야기 할 것은 아니죠.
위안을 맛보고 있지 않을 뿐이지 평온한 상태에 있을 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이 평온한 상태의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때 있어서 셋째 시기하고 관련지어지는, 이것도 중요한 영적 상태죠.
어쨌거나 그건 다음에 기회가 오면 다음에 보기로 하고 우선에 영적인 위안, 영적인 고독 이러는데, 이 영적 위안, 영적 고독이 도대체 뭐냐?
여기에 보면은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가 위안, 고독이죠.
이 위안이나 고독이란 단어는 보통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면서 쓰는 그 의미 그대로다 하는 거.
나는 성탄절 날 이래, 성탄 때 뭐 눈이 오거나 이러면은 마음이 좀 고독해진다.
근데 이렇게 마음이 고독해질 때 내가 좋아하는 그 친구 만나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이야기를 좀 하다보면은 많은 위안을 받는다.
이런 고독, 위안 우리 보통 쓰는 그 개념이다 하는 거. 그것 그대로 알아들으시면 되는데 다만 여기서는 영적 위안, 영적 고독 하는 ‘영적’ 이란 수식어가 하나 더 붙어 있죠.
이것이 우리가 식별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다는 거.
그렇다면 영적 위안이 있다 하는 것은 잘 유추를 해보면은 영적이 아닌 위안도 있다 이 말이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따라서 비 영적, 영적이 아닌, 비 영적 위안도 있는 것. 마찬가지 고독도 비 영적인 고독도 있는 것. 그렇다 하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위안하고 비 영적인 위안 이거 두 개 구별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식별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지난 강의 때 제가 얼핏 건드리고 지나갔지만은 왜 이런 식별이 중요하냐 이러면은 영적 위안 하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그랬죠.
영적인 위안,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예요. 영적인 위안을 자궁으로 해서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뜻이 배태되어 나오는 것.
‘배태’.
이 한자가 좀 어려운 단언데 아기밸 ‘胚(배)’ 자 에다가 아기밸 ‘胎(태)’ 자. 이 영적인 위안을 자궁으로 해서 거기서부터 하느님의 뜻이 배태되어 나오기 때문에 이 하느님의 뜻, 영적인 위안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는 거예요.
이 말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위안을 주실 뿐 만아니라 그 영적인 위안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밝혀 드러내 보이시고
당신의 뜻을 향해서 우리를 끄집어 당기시는 이런 이끌림, 의지적인 충동, 마음의 움직임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를 식별하기 위해서 영적인 위안이 중요하죠.
따라서 하느님꼐서는 영적인 위안을 자궁으로 해서 하느님 뜻을 드러내시는 것이지 비 영적인 위안을 가지고 여기서부터 하느님뜻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영적인 위안과 비 영적인 위안을 구분을 하지 않고 있으면은 비 영적인 위안을 실컷 맛보고 있으면서
그런 위안 상태에서 마음의 움직임이 있을 때 아,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이런 식으로 오판할 위험들이 있다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먼저 영적인 위안이다 비 영적인 위안이다 영적인 고독이다 비 영적인 고독이다 이러다 보니까 영적인 차원이 하나 있고 비 영적인 차원이 하나 있는 거예요.
이것을 분별을 잘 했으면 하는 거.
예를 들면은 이런 것이 있을 수가 있죠.
여러분들 어느 날 집에 가만히 있는데 전화가 때르릉 걸려온 거예요.
그래서 전화를 받으니까 친한 성당 친구인 엘리사벳이 전화를 딱 했죠.
물론 여기 있는 특정 엘리사벳 자매하고는 상관없고.
그래가지고 야, 마리아야, 너 뭐하는데? 오늘 동창회인줄 모르느냐고 나오라고 그러죠.
그래서 나 아직 남편한테 이야기도 안 했고 어떻게 나가느냐고 그러자 아 그래도 일년에 한 번 있는 동창횐데
니 좋아하는 고등학교 동창들도 다 모여있고 빨리 나오라고 하도 그러기에 남편 회사에다 전화해 가지고는 오늘 동창회가 있는데 좀 갔다와도 되겠느냐고 그래 뭐 그러라고 그러죠.
그래서 정말 이래 탁 동창회에 나가보니까 고등학교 때 그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몽땅 다 모였죠.
그러가지고는 요즘은 뭐 자매님들도 술 한잔씩 하는 거는 예사로 하죠.
저녁 먹으면서 맥주도 한 잔씩 하고 뭐 남편자랑 자식자랑 하면서 정말 친구들을 만나서 이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큰 위안과 힘을 얻었죠.
그래서 가정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그런 신선한 힘, 위안 이런 것들을 맛 본 거예요.
근데 이제 그런 게 있으면은 꼭 튀는 사람도 또 한 명 있죠.
그래가지고 야 모처럼 우리가 다 남편 허락 맡고 모였는데 이런 날이 맨 날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저녁도 이제 먹었는데 노래방이라도 한 번 갔다가 가자.
그래가지고 노래방에 또 쭉 가서는 노래를 한 자락씩 하는데 야 마리아 너 옛날에 노래 잘했지 않느냐 노래 해보라고.
그래 이제 마이크를 잡고 애모를 탁 불렀더니 막 앵콜 앵콜 이러고. 그래가지고는 앵콜송까지 또 탁 부르고 그렇게 집에 돌아왔죠.
그랬더니 집에 돌아와서 자기 전에 의식 성찰을 이래 쭉 하는 거예요.
하루동안 내 살아온 것을 쭉 의식의 흐름을 이래 더듬어 보는데 이 의식성찰은 여러분들에게 꼭 해줘야 될 이야기다 싶으긴 한데 시간이 따로 없다 싶죠.
그래서 마 그렇다 치고. 어쨌든 하루를 이래 마감을 하면서 의식의 흐름들을 이래 쭉 보니까 그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나 가지고 담소를 나누면서 그 신선한 힘과 위안과 평화를 깊이 맛봤던 것.
아, 이것이야말로 성령으로부터 온 선물 아니냐.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내일도 이런 위안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러고는 그냥 코 박고 잠들었다 이러면은 그때 맛봤던 기쁨, 위안 이런 것들이 영적인 위안인가 하는 거. 어때요?
눈칫밥들만 드셨나?... 막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고 떠들고 하니까 영적 위안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차원을 조금 더 높이면은-
역시 오후에 그냥 이래 별 할 일도 없고 성당 갔다와서 뭐 집안 정리도 다 해놓고 무료하게 그냥 신문을 뒤적뒤적 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때르릉 걸려왔죠. 전화를 탁 받으니까 남편한테서 전화가 온 거예요.
그러면서 당신 오늘 저녁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없다고. 그러면은 오늘 내 퇴근 시간에 맞춰 가지고 회사 앞으로 좀 나오라 그러죠.
왜 그러느냐고, 하여튼 뭐 나와 보면 안다고 그러고 전화를 탁 끊는 거예요. 도대체가 내가 이 남편이라는 사람하고 20년이 넘도록 살아왔지만은 한번도 무슨 자기 회사 앞으로 나와라 이런 적이 없었죠.
이 남자가 도대체 왜 이러나 하고 어쨌든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나갔죠. 나갔는데 남편이 떡 그러는 거예요.
사실은 이 회사에서 뭔가 이래 아이디어 모집이 있었는데 내가 거기 아이디어를 냈고 그것이 당첨이 됐고 그래서 특별 보너스를 탔다.
그 동안 이래 몇 년 동안 IMF니 뭐니 이래가지고 당신 외식도 한 번 못시켜줬는데 그러고 당신 맨날 요 앞에 보고는 이 원피스, 이 원피스 하고 있었는데 마침 지금 보니까 현대 백화점 원피스 세일하고 있더라고 가자고.
그래가지고는 엉겁결에 떡 따라가서는 정말 내가 원하고 있던 그 원피스를 탁 선물로 받았죠.
그러더니 남편이 모처럼 우리 나왔으니까 외식이라도 하고 들어가자고 그러고는 좋은 갈비 집에 가서 저녁을 사주길래 널름 얻어먹고.
그래가지고 집에 좌석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거예요.
좌석버스 타고 오는데 옆에 남편이 앉아 가지고는 그 툭툭한 손으로 내 손을 꽉 잡고는 아무 말도 없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쪽 오죠.
그렇게 손을 맡겨 놓고 이래 오는 가운데 그냥 남편의 그 사랑이 물밀 듯이 쭉 밀려들어오죠.
그러면서 큰 기쁨과 위안 평화 이런 거 맛보고 이런 남편을 허락하신 하느님이 너무나 고맙고 그래서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자, 이쯤 되면은 이거는 영적인 위안이에요?
그 정도면 이제 영적인 위안으로 된.... 자 그럼 단수를 더 높이면은-
눈이 잔뜩 온 거예요.
그래가지고 관악산 꼭대기에 이래 탁 올라가서 보니까 온 천지가 이래 눈으로 확 덮여있는게 너무나 장관이죠.
그래서 그 자연의 큰 아름다움, 숭고함, 이런 것들이 가슴에 깊이 밀려들면서 아주 큰 위안, 기쁨, 평화 이런 것을 맛봤다.
자, 이것은 영적인 위안인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전부 다 영적인 위안이 아니죠.
그것들은 전부 비 영적인 위안들이다 하는 것.
비 영적인 위안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쉽게 이야기하면은 인간적인 위안이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비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위안, 심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위안
이런 것들을 비 영적인 위안이라고 하고
영적인 위안, 영적인 고독 이러면은 반드시 살아 계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바탕이 되어서 살아 계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맛보는 위안일 때 그것을 영적인 위안이라 그러고 그렇게 맛보는 고독을 또 영적인 고독이다 그런다는 거.
근데 여기서 살아 계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하는 거니까 우리가 얼핏 생각할 수 있는 거 대표적인 것- 영성체. 미사 때에 영성체를 통해서 깊은 주님과의 일체를 맛보고 위안을 얻을 때 이거 영적 위안이죠.
그 뭐 성체 같은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 눈에는 이거 뭐 아무것도 아니죠.
근데 우리 그 깊은 차원에서 그렇게 알아듣는 것. 근데 이 살아 계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맛보는 위안이다 이럴 때도 이것도 조심해서 알아들어야 되는 것이
그저 우리가 그냥 머리 속에 교리적 지식 차원에서 알아듣고 있는 그런 하느님, 그것하고 연결 지어지면은 무조건 영적인 차원이다 이런 것 아니죠.
그 대표적인 것이 기도를 할 때- 우리가 기도를 하면은 머리로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하는 이거는 필히 명심을 해야되죠.
그저 내 의식 차원에서 내 생각을 전개를 시키고 분석하고 정리하고 결심하는 것 이거 기도 아닌 거예요.
비 의식의 차원에서 성령께서 이끌면서 움직여주시는 것 그것을 내가 깨어 있다가 포착하면서 알아듣는 것 이것이 참된 의미의 기도죠.
근데 내가 그냥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분석하고 있어도 어느 정도는 기도 중에 머물고 있으면은 기쁨이나 위안을 맛볼 수가 있죠.
근데 이제 그럴 경우에 그때 맛보는 기쁨이나 위안 이런 것들을 그저 단순히 무조건 영적인 위안이다 라고 보기는 어려운 면도 많이 있다 하는 거예요.
그저 내 어떤 지식적인 차원에서 그저 내 감성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위안을 맛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무조건 하느님과 관련되어진다 이래가지고 단순히 영적 위안인 것이 아니고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아닌지
이거 몸으로 감각적으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고 그 차원에서 분별이 일어나야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냥 전례에 참석을 했을 때 하도 남편이 냉담 중에 있길래 아내가 매일 주일마다 바가지를 긁고 이랬더니
남편이 할 수 없어서 자, 적선하는 셈치고 미사 가 줄게. 이래가지고 떡 왔는데
마침 미사가 성가대에서 특송도 있고 오랜만에 와보니까 성당 분위기도 좀 바뀌어져 있고 장식들도 좀 바뀌고 그래서 분위기도 참 좋고 신부님 강의도 그날따라 잔잔하게 뭔가 마음에 좀 와 닿고.
그래서 아, 미사가 참 괜찮았다 그래서 위안을 맛봤다. 이런다해가지고 그거 그대로 단순히 영적인 위안을 맛봤다 이렇게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좀 깊이 있게 분별을 할 필요가 있는 거죠.
그래서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비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이것 제대로 분별하지 않으면은 하느님의 뜻을 오판할 위험이 있으니까 잘 분별할 수 있어야 될 것이다 하는 거.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맛보는 위안을 영적인 위안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와 관련지어 가지고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알아듣는 거.
음양의 움직임 속에서 그 음양이 통합되는 가운데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그런 움직임, 그 속에서 이렇게 우리가 맛 볼 때 영적인 위안을 맛보는 거예요.
그리고 비근한 예로 이런 걸 또 들 수도 있어요.
여러분들이 무언가 어디 뭐 강좌를 등록을 해 가지고, 꽃꽂이 강좌를 등록해서 꽃꽂이를 많이 연습해서 배웠다. 그래가지고 무슨 꽃꽂이 대회에 나가서 거기서 우승을 하게 됐다. 뭔가 그런 어떤 성취감, 이뤄냈다는 이런 것 때문에 깊이 있게 맛보고 야!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는 그것.
이런 경우 거의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의 염은 표했을지 모르지만은 영적 차원의 위안이라고 보기 힘들죠.
‘에고’ 내 자아가 중심이 돼있는 인간적 차원의 위안일 경우가 많죠.
오히려 어떤 거냐 하면은 그냥 차를 타고 퇴근을 한다고 집에 떡 돌아가고 있는데 저 멀리 저녁노을이 지고 있죠.
근데 그 저녁 노을 어릴 때부터도 봐왔고 매번 봐왔던 것인데 그날 따라 그 노을이 가슴 깊이 이렇게 쑥 들어오고 그냥 그 아름다움 그 자체가 깊이 있게 들어오면서 마음이 뭉클하고 움직였다면은
그러면서 굳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평화를 맛 봤다면은 그런 것들이 영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위안이죠.
굳이 거기에서는 무슨 하느님을 따로 의식을 하고 자시고 이런 것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위안으로 볼 수 있다 하는 거.
그래서 이런 영적인 차원과 비 영적인 차원을 우리가 잘 구분을 해야 되겠고 그럴 때 이제 영적 위안의 표징은 어떤 상태가 영적인 위안이냐 이러면은
우리 안에 기쁨이 넘친다든지 기쁨이라든지 평화라든지 안정감이라든지 부드러움, 따뜻함, 그 다음에 용기가 솟는 것, 힘이 나는 것, 거룩한 것을 향한 열정이 막 샘솟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이 일어나는 것 이런 여러 가지 마음의 느낌들이 있으면은, 그런 걸 보고 우리는 영적인 위안 상태에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 전부 영적인 고독이죠.
기쁨 대신에 슬픔이고 안정감 대신에 불안, 뭐 용기 이런 것 대신에 두려움, 공포 이런 것들 낙담하는 것, 용기가 꺾이는 것, 힘이 없어지고 무기력에 빠져드는 것,
거룩한 것 대신에 비속한 것을 향해서 자꾸 움직이는 것, 사람들이 점점점 싫어지는 것 이런 일련의 느낌들 움직임들이 안에서 일어나면은 우리 그것 영적 고독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안에 그런 위안도 고독도 없을 때 특별히 무슨 이래 위안을 맛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무슨 특별히 슬럼프에 빠져서 고독을 맛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때 우리는 영적으로 평온한 상태에 있다 이렇게 이야길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분별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매일 의식성찰을 쪽 하고 있어야 된다.
요즘 내 마음 판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계속 추적하면서 관찰을 하고 있어야 아 요즘 내가 위안 상태에 머물고 있구나 고독 상태에 머물고 있구나 자 고독 상태에 머물고 있으니까 어떻게 움직여야 되겠다 이러 가닥이 잡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영적 고독에 대한 문제는 다음 강의 때 봤으면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영적 위안에 대해서만 봤으면 합니다.
근데 이제 이 영적 위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은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 있고 하나는 사전의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이 있고 이 두가지로 나뉜다 하는 거.
근데 우리가 이런 위안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랬죠.
그래서 이 위안이라는 것은 보면은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은 이것은 성령께서만 주신다 하는 거.
사전의 원인이 없는 위안은 성령으로부터만 오는 거예요.
하느님으로부터만 오는 거.
따라서 창조주이신 하느님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영혼 안에 자유롭게 드나드시면서 우리 영혼을 당신 사랑에로 끄집어당기시는 거.
이것은 하느님만 이루시는 것이니까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의심할래야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위안은 위안은 100% 믿고 받아들이고 즐기면 되는 거죠. 근데 문제는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이다.
이것이 거의 대부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맛보는 위안들은 원인이 있는 위안이다.
근데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선신도 주지만은 선신 주니까 당연히 성령도 주시겠죠.
선신도 주지만은 악신도 준다.
이렇게 때문에 우리가 분별을 잘 해야 된다.
악신으로부터 오는 영적 위안은 우리의 본래의 참된 생명에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고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운이니까
저것을 저 악신이 주는 위안에 좇아서 나아가면은 우리는 생명으로부터 점점점 이탈하는 것이다 하는 거죠.
근데 우리가 신앙 생활 이렇게 하는 것 보면은 위안들에 너무나 굶주려 있다 싶은 거예요.
영적 위안 기도를 해도 무슨 미사에 참석을 해도 레지오 활동을 해도 그렇게 살고 있어도 남편도 이제 뭐 몇 십년 살다보니까 뭐 그저 남편으로 있는 것이지 애틋한 사랑이 막 샘솟고 마음이 움직이고...
원피스나 사주면 그럴까 안 그러면 그것도 잘 모르겠죠.
삶 자체가 그저 무덤덤 해져버리는, 그러면서 좀 뭔가 나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그런 힘, 위안들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열망들이 아주 강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위안만 찾아오면은 마치 죽은 오라비라도 살아서 돌아온 양 덥썩 안아들이는 거.
여기에 우리 영적 여정의 큰 함정이 놓여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절개가 있어야 된다 싶은 거예요. 왜그런가 하니까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 저것은 좀 경우가 드문 거예요.
대부분의 경우는 원인이 있는 거예요.
기도 중에 위안을 맛본다든지 미사 때 영성체를 통해서 위안을 맛본다든지 자연을 통해서 위안을 맛본다든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위안을 맛본다든지 위안이 일어나는 그 원인이 됨직한 것이 전부 있는 것. 근데 이제 이런 원인이 있는 경우는 악신으로부터도 올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영의 식별에 있어서는 참으로 절개가 중요하다 싶은 거예요.
요즘 같은 세상에 절개 찾기가 아주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예를 들면은 집에서 떡 있는데 띵똥 하더니 택배가 탁 하나 왔죠.
택배가 왔는데 딱 보니까 아주 좋은 현대 백화점 포장을 탁 해놓은 멋있는 물건이 하나 온 거예요.
탁 열어보니까 아주 멋있는 아름다운 가디건이죠.
뭐 디자인도 좋고 감도 좋고 너무나 좋아 가지고 도대체 누가 이런 걸 내한테 보냈나하고 발신인을 딱 보니까 이름이 김중배 이래 딱 찍혀있죠.
그러면은 그것을 열어본 것조차도 후회를 하면서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버려야 되는 거예요.
근데 이제 그러고 씩씩거리고 있는데 다시 또 택배가 하나 탁 날라왔죠.
그래 오늘은 뭐 택배 오는 날인가하고 떡 받아보니까
이거는 무슨 포장도 엉망으로 돼있고 꾸깃꾸깃한 종이에 대충 싸서... 그래 또 뭔가해가 또 열어보니까 이것도 또 가디건이죠.
근데 이제 이거는 그냥 무슨 리어카에서 얹어놓고 막 흔들면서 파는 것 한 번 입고 나면은 세탁하고 나면 두 번 다시 못 입을 것.
근데 이런 것을 또 누가 보냈느냐하고 딱 보니까 발신인이 이수일 이래 찍혀있으면은 그걸 이래 입고는 거울 앞에서 이리 돌아보고 저리 돌아보고 코끝이 시큰해지고 이래 되어야 하는 거.
그런 식으로 기개가 서 있지 않으면은 야 내야 뭐 김중배도 좋고 이수일도 좋다. 누구든지 좋은 가디건만 보내주면 된다 이래버리면 우리의 영신 사정에 있어서는 낭패를 당한다 하는 거예요.
원체 위안에 굶주려 있다 보니까 어디로부터 이 위안이 오는가 이것을 분별을 할 생각들을 안 한다 하는 거.
그래서 악신으로부터 오는 위안임에도 불구하고 진짜인양 그래도 덥썩 받아들이는 거 이것 아니다.
근대 이런 현상은 여러분들이 이래 생각하는 거 보다는 훨씬 심각한 거 같애요.
그래서 피정을 할 때 보면은 영신 수련 피정을 하면은 짧은 게 9박10일. 그래서 8일 피정이다 이래가지고 9박10일 대침묵 가운데 쭉 하죠.
그 다음에 한달 피정이 본래 원칙이죠.
31박32일.
그 침묵 속에 이래 쭉 하는데 피정 지도하는 사람하고만 하루에 한 차례씩 면담을 하죠,
기도한 내용들 이렇게 쭉. 우리가 어떤 함정에 떨어지느냐 하면은
마치 내가 기도 중에 뭔가 알아듣는 게 있고 마음의 움직임이 있고 그래서 위안을 맛보지 않으면은 기도 중에 영적인 위안을 맛보지 않으면은 마치 내가 기도를 잘 못한 것인 양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신앙 생활 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영성체를 해도 덤덤하고 레지오 활동을 해도 덤덤하고 기도를 해도 무감각이고 그런고 있으면은 즉, 위안이 없으면은 내가 신자로서의 신앙 생활을 잘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들을 하신다.
근데 그것 아니다 하는 거예요.
이 위안이라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애기들에게 주는 사탕과 같은 것이다 하는 거예요.
요즘은 그러죠.
뭐 처가에 간다 이러면은 차에 시동 걸어놓고 자 타라 타라 이래가지고는 시동 걸어가 부르릉하고 떠나면 되죠.
근데 우리가 옛날에 처가에 갈 때는 그런 식으로는 안 갔죠.
그저 세 살짜리, 네 살짜리 애 손을 잡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이래 막 가죠.
근데 지금 내가 강의를 하는데 여러분들이 얼마나 지금 긴장해 있는가하면은 우리가 옛날에 처가에 갈 때 이러는데도 아무도 웃지도 않는 거예요.
도대체 어, 옛날, 저, 저 신부는 옛날에 처가가 있었나. 근데 그렇다 치고 어쨌든 이제 그렇게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이렇게 가는데 요 서너 살짜리 꼬마가 그냥 뭐 다리가 아파서 가네 못 가네 하고 막 칭얼대죠.
그럼 할 수 없어서 애미가 구멍가게 가서 뭐 얼음과자 요즘같이 무슨 멋있는 브라보콘 이런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얼음과자 물들여놓은 거 하나 사서 아나 먹어라 요놈아. 이래가 주면은 그 놈은 고거 빨아먹는 재미로 그렇게 한 백미터는 잘 가죠.
그러고 나서는 고거 다 빨아먹고 나면은 또 무슨 다리가 아프네 어쩌네.
그러고 있어도 애미 눈에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이쁘죠.
근데 이 녀석이 커가지고 군대를 갔다가 제대를 하고 왔죠.
그래서 야 이제 제대도 했으니까 외할머니한테 인사드리러 가자. 그래가지고는 또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이래 가는데
아 이 녀석이 한 백미터쯤 가더니 뭐 다리가 아파서 가네 못가네 이러고 앉았으면은 애미 속에서 천불이 날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무슨 자식 덕 보자는 건 아니지만은 그래도 이 놈이 커서 든든한 애미의 의지처가 되어주기를 그렇게 바랬는데 애 짓을 하고 있으면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것도 꼭 마찬가지다 하는 거예요.
아직은 우리가 오른쪽 왼쪽도 구분 못하고 막 허둥대고 있어도 하느님 당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전부 이쁘고 좋은 존재들이다 하는 거.
근데 그것을 지금 그러는 것은 보기 좋다는 것이지 죽을 때까지 그 태를 못 벗어나가지고 관속에 들어가면서도 오른쪽 왼쪽을 바꿔 가지고 뒤집어서 떡 들어가 누워있고 이러면은 하느님 속도 천불이 난다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가 영적인 위안이라는 것이 없으면은 얼마만큼 영적 여정을 걸어나가는데 어려움을 겪는가 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아시는 거.
그래서 위안이 좀 없으면은 뭐 성당에 가니 안 가니 레지오 회합에 가니 안 가니 온갖 공갈 협박을 하니까 하느님께서 할 수 없이 ‘아나 요놈아 ’ 이러고 영적 위안을 주시는 거.
그럼 어쩌다가 미사 대 성체를 통해서 눈물이라도 한 번 핑 돌고 가슴이 움직이면은 고 맛에 고 약효가 지탱하는 동안에는 또 한 한달은 잘 다니죠.
그 약효 떨어지면은 또 뭐 성당에 가니 안 가니 판공성사 보니 안 보니 막 그래 떠들어대고 있으면은 할 수 없어서 하느님이 또 위안을 주시고.
우리가 영적 위안이 있으면은 영적인 여정을 걸어가는데 훨씬 더 힘과 용기가 나고 수월하게 걸어가죠.
그래서 늘 청하는 것은 괜찮은데 그렇다 해가지고 영적 위안이 많이 있다 해가지고 제대로 잘 살고 있다는 표징은 아니다 하는 거.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어린 애 같기 때문에 위안이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잘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점에 대한 유일한 기준은 신망애(信望愛) 삼덕(三德)이다 하는 거.
신망애 삼덕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느냐 자라고 있지 않느냐.
영적 위안은 많이 맛보고 있는데 기도 나눔을 하면은 뭐 놀라울 정도의 기도 나눔을 해주는데
“야 본당에서 우리 이번에 무슨 일이 좀 있으니까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남아서 좀 도와 주십시오.” 그러면은
그 멋들어지게 기도 나눔을 하던 사람이 “ 아 집에 오늘 시어머님이 무슨 일이 좀 있어서” 그러곤 싹 빠져 나가고.
그 다음주 되면은 뭐 또 시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러고 또 싹 빠져나가고.
이런 식으로 사랑이 자라고 있지 않으면은 그 때 그 사람이 맛보고 있는, 기도를 통해서 맛보고 있는 영적 위안들 이거 가짜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 하는 거.
이런 것들을 분별하지 않으면은 안 된다 하는 거.
그럴 때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은 어떤 거냐하면은 예를 들면은 이런 것일 수가 있어요.
그낭 갑작스럽게 이래 찾아오는 거,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위안들.
이런 거 아까 영신수련 피정 이야기를 했는데 기도를 우리가 사실은 영신수련 피정에 들어오면은 한 시간짜리 기도를 하루에 다섯 차례씩 하거든요.
근데 그 기도 중에는 뭔가 이래 좀 알아들을려고 그리고 뭔가 마음이 좀 움직였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에 앉아있지만은 한 시간 내내 별다른 생각이나 느낌이 없이 그냥 쭉 지나가 버릴 수가 있죠.
여러분들이 지금 댁에서 기도하실 때도 마찬가지일지 모르죠.
기도하려고 정작 앉아있어도 온갖 분심 들만 들어올 뿐이지 별다른 느낌 없이 지나가는 거.
이제 그럴 때 이제 면담 들어와서는, 면담을 이렇게 들어오면은, 피정 하는 분들이 들어올 때 보면은 뭔가 이래 기도 중에 좀 알아들었고 위안을 받았으면은 면담 들어올 때도 아주 씩씩하게 들어오죠.
근데 그런 게 아무것도 없을 때는 피정자들이 곧잘 쓰는 표현이 교무실에 붙들려온 학생 같다 이럽니다.
그런 식으로 기가 팍 죽어서 들어오는 거예요.
근데 이제 그럴 때 하루는 어느 피정자가 기도를 너무 잘했죠.
그래서 ‘야 진짜 오늘은 가서 신부님한테 얘기를 하고 칭찬을 들어야지’ 이래가지고는 면담시간 내내 자기 기도한 이야기를 막 아주 그럴 듯하게 이야기를 다 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는 이제 칭찬을 들을 거라고 내 얼굴을 빤히 보는데 그냥 이 못된 할아버지가 가더니 바가지 물을 한 바가지 갖다가 팍 퍼부어 버리죠.
그러면서 수녀님 도대체 그걸 지금 기도라고 하고 있느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시 기도하라고 나가라고.
이래가 나가라 그러니까 나오니까 막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해 죽겠죠
. 이 놈의 영신수련 피정을 내가 다시는 하나봐라.
마침 나오니까 저녁 식사시간이죠.
그래서 이제 홧김에 더 먹죠.
잔뜩 먹고 나서는 배가 이제 방실방실 해지고 기도는 아무 생각도 없고 빨리 돌아가서 다른 거 뭐 할 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책이나 좀 해야지 하고 피정집 뜨락을 이렇게 쭉 산책을 하고 있는데,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두개골이 열리더니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쭉 내려오시는 거예요.
근데 이런 대목은 웃어야 되는데 전부다 너무... 이런 걸 진지하게 듣고 있으면 안 되죠.
무슨 하늘이 열리고 두개골이 열리고...
어쨌거나 그러면서 갑자기 예수님 수난의 신비가 환하게 펼쳐지는... 아! 바로 저것이었구나 하고 깊이 알아듣고 큰 위안을 맛보죠.
근데 한 편으로는 야속하죠.
참 성령도 이것을 30분전에만 내한테 보여줬어도 진짜 면담 때 들어가서 내가 본때를 보여줄 건데.
이런 위안들 이거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은 원칙적으로는 그 위안의 강도가 세기가 아주 강하다.
그저 그냥 마음에 슬쩍 건드리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아주 큰 감동으로 몰려오는 거.
근데 그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가 하면은 또 하나는 원인을 생각을 하면은 고독 상태에 떨어져야 되는데 오히려 거꾸로 위안을 깊이 맛보는 거.
그래 이제 한 자매님이 본당에서 피정을, 1박2일 피정을 한다 이래가지고 남편한테 간신히 허락을 얻어 가지고는 피정에 갔죠.
피정에 가서 너무나 많은 위안을 받고 좋았죠.
그래가지고는 집에 탁 돌아왔는데 씩씩하게 돌아왔는데 뭐 남편하고 막... 집, 집이 엉망이고. 그래서 남편하고 막 다투고.
이러다가는 막 남편이 뭐 피정에 대해서 뭐 이랬느냐 저랬느냐 이런 거는 물어보지도 않하고 한 달 전에 잘못한 일을 끄집어 내가지고 막 구박을 하죠.
여자가 되가지고 집구석에서 뭐하느냐고 고함을 질러대고. 그래서 진짜 분하고 원통해서 도저히 못 살겠죠.
그래 막 좀 울려고 덤비니까 집은 코딱지 만해서 막 울어대면은 동네 이웃이 다 알 것 같고.
그래서 ‘아, 안되겠다. 성당에 가서 울어야지.’
그래가지고 이제 폼나게 한 번 울 거라고는 수건한 장 들고 크리넥스 한 통 들고 성당을 뜩 찾아갔죠.
뒤에 앉아 가지고는 울 거라고 이래 크리넥스도 놓고 타월도 놓고. 털퍼덕 앉아 가지고 울려고 딱 보니까 앞에 저 제대 위에 십자 고상이 딱 걸려있죠.
그러면서 그 십자 고상이 그냥 가슴으로 이렇게 깊이 있게 쑥 들어오면서 깊은 내적 평화와 고요에 머무는 거.
그래서 한 시간 내낸 그 위안 속에 깊에 머물다가 ‘그래.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내 남편인데 같이 걸어가야지.’
그러면서 나오다가 수건하고 크리넥스는 수녀원에 주고 그래가 집에 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되면은 그 때 우리가 맛 봐야할 상황은 그 원인을 따져 보면 ‘뭐 세상에 남자가 지 밖에 없을 줄 알고,
내가 시집와서 이렇게 고생해 주는 것만도 어딘데 응? 이혼을 해? 말어?’ 막 이러면서 눈물 콧물을 짜내야 할 이런 상황인데
즉, 고독상태에 쭉 들어가야 될텐데 오히려 거꾸로 깊은 위안을 맛보는 거.
이거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거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위안들은 하느님께서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위안 속에는 전혀 거짓됨이 없다 하는 거.
그래서 그런 위안은 충분히 받아들이고 느끼고 나아갈 필요가 있죠.
근데 사전에 원인이 없는 이런 영적 위안을 우리가 아주 강도가 큰 그런 영적 위안이다 이랬는데 저것을 그렇게 따지면은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런 위안을 맛볼 수 있는 경우가 아주 드물지 모르죠.
근데 저 강도를 조금 떨어뜨려 보면은 우리 안에도 저런 위안들이 많이 있는 것 아닌가 싶은 거예요.
그래서 꼭 뭐 기도 중에 큰 위안을 알아듣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 기도 중에 아무런 위안을 못 얻고 알아듣지 못하고 이랬을 때
그냥 밥하려고 주방에 들어가서 밥하려고 쌀 씻고 있을 때 그 때 갑자기 머리를 탁 치면서 가슴을 탁 치면서 들어오는 생각이나 느낌들.
‘아! 그거구나’ 하면서 위안을 맛본다면, 전혀 그런 거 생각지도 않고 다른 일 하고 있는데 이젠 다 끝났으니까 씻고 잠자리에 들려고 샤워기 꼭지를 탁 트는데 그 때 갑자기 한 생각이 한 느낌이 툭 차고 들어오면서 위안을 맛본다면,
뭐 그게 눈이 번쩍 뜨이는 그 정도의 강도 큰 위안은 아니라 할 지라도 그런 위안들이 있다면 그것 역시 사전에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으로 보고 성령께서 건드리시는 것으로 봐야될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우리 일상의 삶 속에서 맛보고 있는 위안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건드려 주시는 것들이 많이 있다 하는 거.
따라서 우리가, 바오로 사도 말씀하시듯이 여러분들은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알아듣는 거.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이 꼭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시간에 혹은 미사드리고 있는 시간에 그럴 때만 은총이 딱딱 시간맞춰서 주어지는 것 아니다 하는 거라구요.
하느님 은총도 이래 내려오다가 한참 차가 밀리고 정체가 되고 이러면은 한 두시간 늦기도 하죠.
그래서 기도 시간에는 아무것도 없다가 이제는 발 닦고 잘까 할 그 시간에, 잠자리에 딱 들려고 할 때 그때야 문 똑똑 두드리고 마리아 댁이냐고, 은총 가져왔는데요.
그때 이제 우리가 안 깨어 있으면은 그런 거 다 놓쳐버리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24시간 깨어있는다 하는 것은
그저 24시간 깨어 기도한다는 것이 감실 앞에서 24시간 죽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맑게 깨어 있으면서 내 주위에서 어떤 상황들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고요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 거.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기도다 하는 거예요.
근데 이제 그런 식으로 깨어있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타고 있지 않으면은 삶이라는 것을 딱 구획을 지어놓고 구분을 해놓고 고기에만 움직이는 거.
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 이 시간은 일하는 시간 뭐 이 시간은 노는 시간. 그래가지고 기도하는 시간은 기도만 딱 하고 나몰라라하고 빠져나와 버리고
먹는 시간은 또 열심히 먹기만 하고 뭐 이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은 설사 아름다운 모습으로 잘 살고 있다손 치더라도 성령의 움직임과 함께 하면서 나아가는 그런 역동적인 삶의 모습은 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결국은 생명이 없는 삶이 될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꼭 이 시간엔 이것을 하고 저 시간엔 저것을 하고 이런 것들을 이 만큼 더 많이 하고 저런 것을 저만큼 더 많이 하고 이런 어떤 틀이 딱 있어서 그것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늘 맑고 고요한 가운데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지금 뭘 해야하는 상황인가 그리고 그런 느낌들이 내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이거 분별하면서 좇아가는 것 그것이 훨씬 중요한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리고 강도의 크기에서 볼 때도 그렇지만은 또 이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하는 것은 꼭 원인이 없다는 거,
예컨대 이제 이런게 있을 수가 있죠.
기도를 한다고 이렇게 들어갔는데 기도 중에 어떤 기도 주제를 가지고 뭐 예컨대 뭐 ‘잃어버린 아들’이면 그걸 가지고 기도를 좀 하고 있는데 그 기도 중에 이제 위안을 맛보기는 하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안이 평소에 우리가 기도하면서 맛보는 그런 위안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어 버리면은 즉, 우리가 원인이라고 제공할 만한 그 원인과 결과라고 볼 수 있는 이 결과, 위안이 주어지는 이런 결과의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이 있으면은, 보통 우리가 기도한다 이러면 이 정도의 위안은 맛보지 않는다 이래 된다면은
그럴 때는 비록 기도 중에 맛본다 하더라도 원인이,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 되고 그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만 온 것으로서 보는 거예요.
그래서 100% 신뢰해도 좋다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원인이 있느냐 없느냐, 원인이 있을 때도 거기에 불균형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걸 좀 볼 필요가 있죠.
이런 것들이 이제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고 그 다음에 사전에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여러 가지 원인들을 통해서 우리가 보통 살아가면서 맛보는 여러 가지 위안들 그것이 원인이 있는 위안이죠.
근데 이제 이 점은, 원인이 있는 위안의 경우에는 악신도 줄 수가 있기 때문에 이런 분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좀 더 어려운 문제니까 우리가 다음 다음 강의 때 좀 이 문제를 다뤘으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때 자세히 보기로 하고 영적 위안은 이 정도로 이렇게 봤습니다.
근데 이제 이런 영적 위안을 우리가 성서구절을 통해서 이렇게 살펴보면은
대표적인 구절에 로마서5장 1절에서 2절 이 말씀을 볼 수가 있어요. 여기 보면 이러고 있거든요.
<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평화를 맛보고 있습니다. 이런 평화 이것이 바로 영적인 위안이다 하는 거죠.
2절에 보면
<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 희망 거기에 바탕을 두고 기쁨을 맛보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가 말하는 영적인 위안들이다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한 구절만 좀 더 보면은 로마서14장 17절에 보면은 이렇게 해놨죠.
<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
이것이 바로 영적인 위안과 비 영적인 위안을 구획하는, 나누는 잣대가 되는 거죠.
먹고 마시는 가운데 즐거움을 맛보는 그 기쁨, 그런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 이런 것들이 영적 위안인 거.
그래서 이런 영적인 위안을 우리가 복음 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은 부활 체험과 완전히 같은 거예요.
뭐 완전히라면 좀 어폐가 있을 지 모르지만은 사도들이 부활체험을 했던 것, 예수님의 발현을 통해서 부활 체험을 하죠.
그럴 때 영적으로 슬럼프에 빠져있는, 낙담 상태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다시금 걸어가게끔 이렇게 초대하시는 거.
영적 위안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죠.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어려움에 처해있고 힘이 빠지고 낙담해 있을 때 그럴 때 영성체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신부님 강론을 통해서 위안을 맛보고 그 위안이 이제 힘이 돼서 더 잘 걸어갈 수 있는 거.
다만 이 부활 체험하고 좀 다른 것은 우리 복음에서 보면은- 부활체험이 일어날 경우에는 반드시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미션을 주시죠.
사명을 줘서 파견하시는 거예요. 하다 못해 막달라 마리아한테는 제자들에게 가서 알려라 하는 그런 알리는 역할이라든지 베드로 사도에게는 내 양들을 돌봐라 하는 이런 미션. 영적인 위안을 통해서는 그런 구체적인 명시적인 미션, 사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뿐이지 그 점에 있어서 좀 약하다 싶은 거예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위안들을 통해서 결국 당신의 뜻을 밝혀 드러내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이 쪽으로 이끌려 가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도 그렇게 무슨 본질적으로 차이를 내는 것은 아니다 싶어요.
그래서 이 정도로 해서 우리 오늘은 영적 위안에 대해서 살펴봤고 다음 주에는 영적 고독에 대해서 살펴보고 영적 고독일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 그 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영광송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첫댓글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왔어야 하는가 하고 내가 늘 말을 하며 사람의 사고를 확장시키려 하는데, 내가 사람에게 회의가 드네요. 고독으로 빠져 드는 자신을 보며 자신의 삶을 뒤돌아 봅니다. 계속 ~~!
토마스Aq님때문에 할수없이 유신부님강좌 올렸어요......더 나중에 올리려구 했는데 급한거 같아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