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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망제 - 지난 8월 23일(월)은 저 개인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정확히 27년전 7월 기망에 40세였던 저는 오대산 비로봉 정상에서 약 100m 못미친 곳의 너르바위에 앉아서 기망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중 태산을 걸어서 올라가기까지 제가 오른 가장 높은 고도였습니다. 선생님은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습니다. 산, 강, 들판이 생명체라고 생각하신 선생님은 함부로 훼손하거나 짓밟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산속에서 새벽에 일어나면 정말 산이 숨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옅은 남색이 감도는 새벽 산안개를 남기嵐氣라고 합니다. 밤새 산이 토해낸 가장 신선한 공기로 식물이 동물에게 주는 최고의 생명 에너지입니다. 이 남기의 농도, 양, 흐름, 색깔을 보면 그 산의 품격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정상에 올라가지 말아야합니까? 당시 저는 이런 수준 낮은 질문을 자주 던졌습니다. 너 같으면 누가 이마빡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면 좋겠나? 선생님의 핀잔에 순간 이마가 서늘해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선생님께서는 사형과 함께 중국 오대산으로 가신 후 종적을 감추셨습니다. 160cm 남짓한 작은 키에 한 줌도 되지 못할 왜소한 체구를 지녔던 선생님은 경남 함안 출신으로 일제식민시기 게이오대학으로 유학하여 의학을 공부했으나 곧바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합니다. 게이오는 유명한 정한론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네델란드를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1858년에 설립한 란가쿠주쿠가 전신으로 다양한 사상이 자유롭게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 조선유학생들처럼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에 기대하셨습니다. 영남우도의 명문 함안조씨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선생님의 과거에 관한 대부분을 모릅니다. 선생님과 저는 월정사 계곡 어느 곳에 숨은 비트에서 살았습니다. 개울가의 거대한 너르바위는 선생님과 저의 놀이터이자 교육장이었습니다. 한문, 영어, 일본어는 물론 아나키즘, 헤겔과 피히테, 생 시몽과 포이에르바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과 바쿠닌,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스탈린으로 이어진 러시아 혁명의 변질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선생님은 해방 이후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한국전쟁 이전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파르티잔이 됩니다. 저는 선생님을 통해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과 한국전쟁에서 북한군 동부군 총사령관 남도부가 사실은 함양 출신 하준수라는 사실 등을 알았지만 별 흥미는 없었습니다. 지리산에서 벗어난 선생님은 남도부의 참모가 되었다가 경북 북부지역에서 활동합니다. 그러나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철수하는 북한군을 따라가다가 부상으로 오대산에 낙오됩니다. 이후 이 빨치산은 오대산의 신비에 끌려 사상보다는 자연과 영혼에 몰두하는 수행자로 변합니다.
오대산은 흔해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라고 합니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비로봉이라 부르는 것은 오대산 전역에서 펼쳐지는 우주와 대자연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화엄세계를 상징합니다. 비로봉은 오방불 가운데 중앙불이자 모든 부처의 본원인 Vairochana 즉 태양과 같은 여래 비로자나불의 상징입니다. 화엄경은 샤카무니 현생 이전 세계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이 세계를 화엄세계라고합니다. 문수사리보살은 이 시기에 전생의 샤카무니를 만나 가르칩니다. 저는 화엄경의 중요한 등장인물 선재동자를 샤카무니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오대산 비로봉 아래에서 선생님과 저는 임 깜깜해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칠월기망달을 기다렸습니다. 1500고지에서 바라본 밤하늘은 너무도 맑았고, 진작부터 서쪽 하늘에 떠오른 금성도 우리 사제지간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날 끼어든 금성이 훗날 저의 창작욕을 자극한 아수라의 친구 루시퍼가 되리라고 당시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과 금성과 제가 함께 맞이한 그날 기망달은 비로자나불의 대일여래大日如來, 안과 밖도, 크고 작음도, 밤과 낮도 없이 비쳐지는 지혜의 빛이었습니다. 삼라만상이 그 빛을 받고 찬란해지는 장면은 이전도 이후도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습니다.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가르침을 벗어난 별개의 전달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경지가 대자연을 통해 이루어지는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작은 공간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하거나, 염불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경지였습니다. 선종의 참선과 명상은 일정수준 이상에게만 허용되는 수행법이지 보편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깜깜하던 세상에 온통 흰 달빛이 비칠 때, Allperrading wisdom 즉 공평하게 두루 존재하는 지혜의 장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불교라는 종교적, 신앙적 프레임에서 벗어난 위대한 장면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후 25년 동안 저는 매년 음력 7월 16일 밤에 누군가와 기망달을 맞이했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대산에서 기망달을 보여주신 선생님의 가르침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날 선생님은 나중에 내가 보고싶으면 저 달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5년 동안 선생님은 아무리 비가 내리거나 짙은 구름이 덮여도 반드시 기망달과 함께 나타나셨습니다. 그동안 여러분과 함께 맞이한 기망달은 저의 선생님이자 비로자나불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심신에 비친 기망달빛은 선생님과 비로자나불의 사랑과 지혜였을 것입니다. 저에게 주신 여러분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기를 희망합니다. 불교에는 오방불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동방 아촉불은 약사불이 대신하기도 하는 분노의 조절과 건강을 주재합니다. 남방 보상불은 인과응보를 주재합니다. 서방 아미타불은 영원한 삶과 극락을 주재합니다. 북방 부동불은 현세를 주재하는 석가모니불입니다. 모두 인간의 삶과 직접 연계되어 있는 것에 비해 중앙 비로자나불은 일정한 형체와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리적 좌표에 존재하는 것은 고정된 상태로 일시적 확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존재 또는 현실이라 하고, 그것이 아닌 것을 존재하지 않는 또는 비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인체의 5가지 기능인 감각기관 즉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과 인지작용인 의意에 따른 인식의 결과일 뿐이지 실존여부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비로자나불은 우리의 감각기관과 인식체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모든 가능태(Potentiality or Dynamis)를 가리킵니다. 잠재적 가능성을 의미하는 Potentiality보다 불확실한 다양성을 의미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Dynamis가 비로자나불에 더 가깝습니다.
찰스 헬퍼린이 쓴 킵차크칸국을 읽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 넓은 초원지대에서 11-13세기에 벌어진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인종적, 군사적 충돌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현상에 대한 연구서입니다. 개인끼리의 관계는 물론 집단의 관계에서도 형태와 층차에 따른 상호거부와 수용이 공존합니다. 여기에서 헬퍼린은 침묵의 에데올르기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어느 한 쪽의 편견 또는 목표와 다른 쪽의 경험 또는 업적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감한 부분에 대한 언급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백한 것보다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부터 해결하면서 가치의 공유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곧 비로자나불의 가능태를 명백한 영역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화엄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인식가능과 불가능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인간의 어떤 감정도 이 차이를 극복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이방인의 시각이 가능성을 확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르다는 것에 대한 거북함 때문에 서로 적대시합니다. 이는 개인과 집단 모두의 수준차이를 가늠하는 지표입니다. 다양성을 힘의 원천으로 보는 민주주의와 획일성을 단결력으로 보는 독제주의가 이러한 인식의 양극단에 존재합니다.
2년전 기망달은 심학산 정상에서 맞이했습니다. 습도가 높았던 덕분에 유난히 빨간 홍월紅月을 보았습니다. 중천에 떠오른 후 선생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왜 정상에 올랐는가? 꾸지람이 아니라 기특하다는 듯 선생님의 음성은 다정했습니다. 다시 내려가는 것이 아쉽지 않고, 더 넓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셨습니다. 극에 이르러야 변하고, 변해야 통한다는 역경易經의 이치와 중용의 멈춤을 아는 지지知止 사이에서 참으로 긴 세월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생명체에게 극단은 소멸을 의미하는 죽음입니다. 죽을 때까지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궁극을 알겠는가라는 경험적 인식론으로 선생님을 떠난 1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저에게는 선생님의 약속이 함께 했습니다. 손에 책 3권을 들고 있어라. 그러면 누군가 너를 지켜준다.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모은 책은 3만권이 넘었습니다. 하루 3권씩이라도 100년이 넘어야 하는 숫자를 채웠으니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이렇게 살아남았고, 어느새 기망달 곁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싶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정상에 오르지말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20년이 넘어서야 겨우 깨달은 것 같습니다. 설익었을 때의 작은 성취를 경계하셨다고 생각한 저는 진짜 설익은 인간이었습니다. 정상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은 최근에 알았습니다. 심학산 정상에서나, 반구정에서나 기망달은 여전히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높이를 기준으로 사물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은 진리와 넘 동떨어진 허구였습니다. 심학산에서 본 기망달은 교하의 갈채를 받르며 서쪽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늦은밤까지 기망달을 배웅했습니다.
지난해 기망달은 임진강변 고구려고성 당포성에서 맞이했습니다. 폭우가 예보된 가운데에서도 저는 반드시 달이 떠오를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당포성은 제가 10년이 넘도록 영계와 접촉하면서 수도 없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곳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얼어죽다가 살아남았습니다. 이후로 지장보살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현신과 소멸을 반복하며 저의 수호보살이 되었습니다. 남촌학당을 중심으로 20여명이 넘게 동참한 당일에는 이미 엄청난 비가 내려 곳곳에 도로가 차단되었고, 저녁에는 폭우가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이 너무도 그리웠고, 내 곁에 지장보살이 있는지를 묻고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임진강변을 떠돌며 수도 없이 읽은 갈현葛玄의 청정경을 정성껏 제문으로 적었습니다. 악기를 공부하던 제자들에게는 이 강변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을 위한 춤을 부탁했습니다. 달구경이 제사를 겸한 카니발로 바뀌는 날이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많이 지쳐있었고, 더 많은 사람들과 짐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11시에 행사가 시작될 무렵 비는 그쳤습니다. 그러나 하늘에는 두껍고 짙은 구름이 덮여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달을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선생님께서 저를 보러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춤이 끝나고 제문을 태워 하늘로 올릴 때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달이다! 거짓말처럼 검은 구름이 갈라지고, 커다랗고 밝은 달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과 비로자나불이 기망달과 함께 세상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날 선생님은 무엇인가 못마땅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한 달 동안 깊이 생각했습니다. 정확히 한 달 후, 녹파, 급우와 함께 당포성으로 갔습니다. 그날도 종일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고, 저녁무렵에는 태풍예보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우리의 소망은 이러한 자연의 장막을 걷어냈습니다. 한 순간에 구름 사이로 달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과 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분명히 안 것이 있습니다. 이제 저에게 현생에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러보니 많은 친구들이 은퇴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너도 정리해라! 선생님의 준엄한 말씀이셨습니다. 그날의 달은 무서웠습니다.
초조한 1년이 또 지났습니다. 많은 일들이 저의 주변에서 일어났습니다. 거울과 같은 벗 녹파는 폐관에 가까운 깊은 공부에 들어갔고, 저보다 저를 더 좋아하는 우향도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 세상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인류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게 쩔쩔 매면서도 치욕인 줄 모릅니다. 그동안 저는 제주도에서 지귀도地歸島라는 섬을 발견했습니다. 이 섬을 통해 저는 오랜 과제를 풀었고, 이제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남은 삶을 빨리 정리할 것입니다. 요즈음은 유난히 자주 꿈속에서 많은 사람과 영혼을 만납니다. 여러가지를 듣고 배우는 기쁨의 이면에는 초조함과 미련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리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이행할 만큼의 능력이 없다는 자각과 신체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현명한 선배들은 어떻게 했을까? 온갖 케이스가 있지만, 제에게 적합한 답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올해 7월 기망이 다가오면서 저는 모든 생각을 멈추었습니다. 어느날 제자들이 갑자기 말했습니다. 감악산 골짜기에 있는 영국군 그로스타샤 전적비에서 춤을 추고 싶다고. 같이 공부하던 분들도 기꺼이 함께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7월 기망제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가지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방역조치가 강화되면서 행사 자체가 어려워지자 모든 지원과 협력이 중단되었습니다. 전기사용까지 불가능하여 조명, 음악, 촬영까지 최소화하기로 했습니다. 태풍소식까지 들리자 야외행사를 위한 모든 악조건이 겹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감독을 맡은 후소는 늘 밝은 표정으로 벅찬 기대를 보여주었고, 근 20여년 저를 도운 시몬네 가족은 현지에서의 여러가지 확인과 장소를 기꺼이 제공했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지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작 시간이 다가올수록 암담했습니다. 기망제에 올릴 제문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고민하던 어느날 깨끗한 기품을 지닌 문인이 나타나 이번 기망제에 자기 작품을 올려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웃으며 사라졌습니다. 문득 일어나 머리맡에 있던 책을 아무렇게나 펼쳤습니다. 거기에 송옥宋玉의 구변九辯 일부가 있었습니다. 송옥은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출신의 시인이었습니다. 약 15년 전 저는 우연히 그로스타샤 생존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당시 상황을 기록한 영문자료를 얻어ㅔㅔㅔㅔ 그것을 바탕으로 설마치의 영웅들이라는 글을 잡지에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송옥의 9변에서 그로스타샤의 기록이 오버랩되기 시작했습니다. 원작은 초회왕의 외교노선에 반대했다가 유배되던 도중 상강 유역 멱라에 빠져서 죽은 굴원에 대한 그리움과 애도로 알려졌습니다. 그것이 기망제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무엇인가 이어질 것 같았지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전북 장수를 거쳐 소백산 저수령을 넘고 충북 단양에 이르렀습니다. 커다란 돌무더기 속에 정갈한 커피집이 있었습니다. 긴 여행의 끝자락에 커피를 마시다가 비로소 송옥의 작품이 두 사람의 대화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설마치 전투에서 맨 마지막에 전사한 그로스타샤 젊은 병사와 참전을 만류하던 그의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보였습니다. 비로소 송옥이 자신의 구변을 추천한 까닭을 알았습니다. 9편의 연작시는 그 병사가 죽기 1초전에 떠오른 모든 생각이었고, 그 회한과 슬픔에 대해 대답하는 그의 아내가 애써 풀어놓은 속내였습니다. 구변의 긴 원문을 먼저 작은 손병풍에 적고 거기에 병사와 그의 아내가 주고받는 안타까운 대화를 우리말로 붙였습니다. 22일 오전 10부터 23일 아침 6시까지 20시간만에 길이 30m의 제문이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만든 지화와 이 제문을 태워 하늘로 보낼 것입니다.
행사 직전까지 비가 와도 진행하는지 묻는 전화가 계속 왔습니다. 저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비는 오지 않을 것이고, 분명히 우리는 기망달을 볼 것이라고.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 표정으로 여러분들이 시몽으로 모였습니다. 한 사람씩 기원을 담은 말을 제문에 적게 했습니다. 여기저기 여러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제문에 남는 장면이 사실상 이번 기망제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염원에 따라 그로스타샤와 그들이 그리워했던 영혼들의 해후가 이루어지고, 선생님도 비로자나불과 함께 짙은 구름을 뚫고 나타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밤9시에 도착한 현장에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소중히 만든 지화를 소창에 매달아 함께 들었습니다. 무거운 첫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딱딱한 대리석 바닥은 그들이 오랫동안 춤추던 무대와 달랐을 것입니다. 춤舞이 악樂의 본령을 완성하려면 모든 사람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춤과 악의 관계를 알고 진짜 악을 만드는 첫번째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시도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방은 여전히 깜깜하고, 몇 개의 휴대폰 불빛이 우리의 춤을 따라다녔습니다. 골짜기는 깊고 고요했습니다. 오로지 부루투스를 통해 들리는 애잔하고 탁한 소리마저 자꾸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드문드문 둘러선 사람들의 마음이 모아지기까지 우리의 춤은 힘겨웠습니다. 어느 순간 조금씩 멈칫거리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스타샤의 마음이 우리에게 실리고, 우리의 진심이 그들의 영혼에 닿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제문의 주인공인 병사도 저의 곁에 있었습니다. 갑자기 꽃을 든 사람들이 저를 향해 다가 왔습니다. 그 병사를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춤은 그렇게 우리와 그로스타샤를 하나로 모으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어서 일범이 하모니카로 Danny boy를 연주했습니다. 2차대전에 출전하는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사랑이 주제이다. 너는 가고 나는 슬픔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목장에 여름이 찾아오면 너도 돌어온단다. 여기 그로스타샤 대부분은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일범은 그 단장의 슬픔을 거칠고 끊어질 것 같은 소리로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로스타샤가 합창하는 대니 보이가 몇 차례나 설마치 골짜기에 울려퍼졌습니다. 전혀 사전에 계획하지 않은 우리의 춤과 일범의 연주로 깊은 밤 산골짜기에 세상에 없는 악이 형성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와 보이지 않는 그로스타샤가 어울렸습니다. 우리는 춤추던 꽃다발에 여러날 정성껏 만든 꽃을 이어 긴 꽃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와 그로스타샤가 꽃다리를 들었습니다. 송옥의 시에서는 영혼이 되어서도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울부짖는 대목이 있습니다. 누군가 다리를 놓아주어야지요. 우리는 꽃다리를 들고 그로스타샤의 베레모 둘레를 돌았습니다. 예중이 트럼펫으로 정지상의 대동강을 불었습니다. 멜로디에서 떠난 자유로운 음들이 꽃다리춤과 어울려 진정한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로스타샤는 꽃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렇게 설마치의 기망제도 조용히 마무리되었습니다.
벌써 밤 11시가 가까웠습니다. 모두 수고했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헤어질 무렵 누군가 달이 보인다고 소리쳤습니다. 정말 구름 사이로 달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재촉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와 달빛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달빛이 어두운 골짜기를 비추기 시작한 것은 기망제 완성에 대한 선생님과 비로자나불의 박수였습니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새벽 1시에 다시 활짝 웃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후렴
며칠 후 10년 가까이 소식이 없던 도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랫동안 간직한 옥비석 3개가 있으니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문득 제문을 소지하지 말라고 말린 우향과 녹파가 떠올랐습니다. 제문을 셋으로 나누고 거기에 여러분이 남긴 글까지 넣어 3개의 비석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로스타샤 마을에 두어도 좋고, 설마치에 두어도 좋고, 어디에 있으면 어떻겠는가? 우리말 번역본에는 김예중이 곡을 붙이기로 했으니 분명 잘 어울릴 것입니다. 비석과 노래는 많은 영혼들이 서로 만나기 위해 건너가는 꽃다리의 표지석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