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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금북정맥 제 3 구간 산행
(곰쟁이재에서 머구미 고개까지)
1. 산행일자 : 2006년 3월 5일 (일요일)
2. 산 행 지 : 시루봉(482.4m), 국사봉(586.7m) - 충북 보은
3. 출발일시 : 3월 5일(일) 04시 (시간엄수)
4. 일정 및 예상 소요시간 : 총 산행 약17.5km, 8시간 30분 정도
(1) 산 행 지
곰쟁이재(중티)--시루산--칠봉산--쌍암재(290m)--살티재--국사봉--추정재
(260m, 머구미고개)
(2) 소요 시간
① 수원 ~ 경부고속 ~ 청주 ~ 25번 국도 ~ 미원(06:10/아침식사/06:40) ~ 창리 ~ 중치교 앞 신설도로(07:10)
② 중치교(07:20) -- 중치/안부십자로(07:35) → 제단(07:45) → 돌탑봉(07:48) → 시루 산(08:05) →구봉산/산불감시초소(08:40) → 도랑이안부(08:55) → 412봉(09:10) → 바 깥대안차도(09:30) → 대안리고개(09:50) → 무명봉(10:00) → 475봉(10:25) → 구룡산 분기점(11:00) → 쌍암재(11:15/점심/11:50) → 시멘트길 안부4거리(12:05) → 분기봉 (12:25) → 피발령분기봉(12:37) → 성황당안부(12:50) → 분기봉(13:20) → 604봉/삼각점(13:30) → 살티재(14:20) → 국사봉(15:05) → 능선분기(15:35) → 시멘트 길 (15:45) → 추정재(16:00)
③ 추정재, 32번 지방도(16:30) ~ 25번, 36번 국도 ~ 청주TG ~ 수원(19:30)
④ 탈출로 : 19번 국도, 571지방도(쌍암재), 미원면 고향식당 올갱이(043-297-1004)
5. 참 가 자 : 강동규, 박봉하,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6명)
6. 산 행 기
[1] 山行 前
(1) 산행 준비
漢南錦北正脈 산행 일이 3월 5일로 잡혔다. 학교 이동, 입학, 개학 등으로 분주한 날을 보내느라 산행 대비도 하지 못했는데 걱정이 앞서 산행을 가나 마나로 참가 신청을 한동안 망설였다. 카페에 올라 있는 참여 인원도 5명(산타, 윤희원, 강동규, 안상경, 노승애) 밖에 되질 않는다. 고민하다 한 번 빠지면 다음에 또 빠질 것이 염려 되 가겠다는 리풀을 달아 놓고서도 영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다.
일기 예보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전국적으로 비가 올 것이라 했는데 토요일 저녁때부터 심하게 바람이 불고 비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윤사장님, 전화. 내일 도시락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산악 대장의 연락이 있었다며 날씨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다.
3월 5일(일요일) 3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비도 그치고 그렇게 요란하던 바람도 잠잠하다. 배낭에 넣어 두었던 예비 옷과 산행 장비 몇 가지를 도로 꺼내고 다시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섰다.
집 앞에 대기하고 있는 윤사장님의 차에 올라 권선고로 향했다. 04 : 20분경, 권선고 정문에 도착하니 안상경교감, 강동규사장, 이용준산악대장, 장현옥부장 나와 반긴다. 장현옥 부장, 한동안 대하지 못했는데 반갑다.
윤사장(박봉하, 강동규)과 장부장(안상경, 이용준)의 차에 분승하고 출발, 기흥 TG를 빠져나간 것이 04 : 35분, 잠시 눈을 붙였는가했는데 오늘 산행의 끝 지점 『추정재』도착이다.
(2) 청원군 이원면 고향 식당
주유소 옆 공간에 차(장부장)를 駐車시키고 윤사장님의 차에 모두 합승하여 아침 식사를 위해 산악대장이 미리 예약 해 둔 청원군 이원면 올갱이 해장국 전문 집 『고향식당(043-297-1004)』으로 이동하여 아침 밥상을 받았다. 도라지 무침, 김장 김치, 된장 풋고추 무침, 풋김치 饌에 올갱이 해장국으로 아침상을 받았는데 아주머니의 훈훈한 인상만큼이나 해장국 맛 또한 은근하다. 올갱이 해장국으로 든든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곧바로 지난 구간(제2구간)의 끝 지점 중치리로 이동(07 : 05분경), 신발 끈을 동여 맺다.
[2] 산행 첫 걸음, 중치리
비가 올 것을 걱정 했는데, 산행 날씨로는 그저 그만이다. 약간 찬 기운이 있었지만 이른 봄기운이 얼굴을 스쳐가고 길 건너 밭에는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農心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타오르는 불 길 만큼이나 올 농사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
평지 같은 넓은 길을 걷는데도 숨이 가빠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오늘 산행 거리가 총 17.5Km, 8시간 30분 정도로 예상을 하고 있는데 지금 상태면 중간 탈출은 따 놓은 堂上이다. 07 : 10분, 곰쟁이재 도착, 오늘 산행의 첫 봉, 『시루산』으로 올라 붙는다.
[3] 시루산 중턱의 致誠壇
시루산(482.4m)은 봉우리가 일곱으로 한남금북정맥 줄기로서 보은의 4증8항(四甑八項)의 하나로 북증(北甑)이라고 일컬어 왔다. 산의 형태가 시루를 엎어놓은 형국이라 하며, 속리산 아래 있는 4개의 시루산 가운데 북쪽에 있다하여 북중산(北甑山) 이라고 한다.
바람이 자주 불어 주는데도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어 上衣 內皮를 벗어 배낭에 말아 넣고 다시 산을 오르니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자리한 아래로 점판암[粘板岩 : 점토가 굳어서 된 흑색의 치밀한 암석, 얇게 잘 갈라지는 데 슬레이트, 석반, 벼룻돌 등에 씀]으로 ∩자 모양의 돌담을 쌓고(높이 : 120cm 정도) 가운데 시루를 엎어놓았으며 양쪽에 두 개의 童子像이 놓여진 致誠壇 있다. 동네 아낙들 또는 巫俗人이 간절히 致誠을 드리는 장소인 것 같다. 우리네 할머니, 아주머니의 간절한 정성과 소망이 엎어 놓은 시루 속에 고이 담긴 듯 하여 정감이 간다.
가던 걸음 잠시 멈추고致誠壇 앞에 서서 오를 무사 산행을 빌고 다시 산을 오른다. 이마의 땀을 연신 훔치며 급경사를 치고 올라 峰 하나를 지나고 고만 고만한 봉 3개를 오르내리며 도착(07 : 50분)한 곳이 삼각점이 있는 『시루봉』정상이다.
[4] 九峰山 오르는 길
정상에서 숨 한 번 크게 몰아쉬고 급하게 내려가니 진행 방향의 왼쪽 산허리가 뚝 잘린 암벽이 눈앞에 와 닫는다. 잘라낸 형태로 보아 점판암을 캐 낸 흔적 같다.
안부에 내려 서는가했는데 다시 급하게 오른다. 절개지 능선을 따라 오르노라니(08 : 05분) 산 아래로 흰 천을 풀어놓은 듯 시멘트 포장길이 굴곡을 이루며 산모롱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이 몇 십 년 만에 고향을 찾는 것 같은 정감을 자아낸다.
절개지 능선 끝 지점, A4 용지 절반 크기의 방향 표지판이 나무에 매 달려 있다. 구봉산 정상 300M→, ←산외면 방향. 정간 길에서 이정표를 본다는 것은 가물에 콩 나듯(무슨 일이나 물건이, 어쩌다가 하나씩 드문드문 나타난다는 말) 한 일인데 작은 이정표 하나도 모처럼 만나는 知友처럼 반갑다.
다소 급한 경사면을 올라 구봉산(칠봉산) 정상에 도착한 것이 08 : 15분. 산불 감시 초소가 있고 사방이 툭 터져 주변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선두 대원들이 휴식을 취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미 사라지고 없다. 휴식 생각을 접고 좀 더 진행하니 갈림 길(구봉산 삼거리, 08 : 25분)을 만나고 정간 길은 표시기가 많이 달린 왼쪽으로 꺾어 가파른 내림 길로 이어진다.
[5] 도랑이재를 거쳐 벼재(星峙) 가는 길
구봉산을 출발하여 20여 분을 내려오니 작은 돌들이 깔려 있는 사거리에 도착(08 : 45분)하게 되는데 『도랑이재』라고 한다.
도랑이재를 지나 얕은 능선에 올라서니(08 : 50분) 길 오른쪽으로 묘 1기가 있는데 보기에도 흉물스럽게 파헤쳐져 있다. 아마도 멧돼지의 소행인 듯싶다. 머리를 풀어헤친 九尾狐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다.
묘를 지나 능선을 따라 내려서니(08 : 55분) ꡒ進士恩津宋公諱必寧之墓 配淸州韓氏합부ꡓ라고 쓰인 비석이 세워진 묘가 있고 묘 앞으로는 옛날 人家인 듯한 넓은 공터를 지나 斜面으로 올라붙는다. 斜面에는 밤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斜面을 올라 능선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진행하다 보면 자갈로 덮인 묘가 나오고 묘(09 : 05분)에서 오른쪽으로 능선 따라 내려오니 2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난다(09 : 15분). 아마도 바깥 대안리에서 성치리(星峙里)로 넘어가는 『벼재-고개(星峙)』인 모양이다.
이 고개는 벼랑이 있어 『별재고개』라 부르던 것이 『벼재고개』로 변했다고 한다(보은문화원 지명 자료). '별' 은 '벼랑'의 古語가 된다. 일설에는 고갯길이 험준하여 별이 떠오를 때까지 오른다 하여 '별재'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벼재','비재'가 되었다고 한다.
※ <참고> 바깥대안마을은 금강수계이고, 안대안과 성치리는 한강수계이다.
[6] 서낭 고개
밭 끝자락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변을 살펴보니 멀리 구봉산 감시 초소도 눈에 들어온다. 휴식도 잠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도로를 건너 70도 정도의 급경사 산봉을 힘겹게 올라(09 : 20분) 다시 휴식. 다시 출발. 잠시 내림 길로 들어섰는데 선두는 숲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고 생각 없이 내려오다 갈림 길을 지나쳐 10여분을 되돌아오는 愚를 범했다.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긴 代價를 치룬 것이다.
바른 길을 찾아 선두를 부지런히 따라간다. 一列 縱隊인 묘 5기와 잘 손질을 한 平山 申氏 묘 4기를 지나(10 : 10분) 급한 걸음으로 내려오는 길에 20여명의 산꾼들을 만났다. 서울서 온 『가고파 山友會』라고 한다. 5분여를 더 내려오니 포장도로가 나오고 『미원』11km라 표시된 작은 도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도로 건너에 대형 버스 한대가 정차해 있다. 『서낭-고개(대안리재)』에 도착한 것이다.
서낭고개는 일명 대안리재라고도 하는데 안대안에서 바깥대안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보은↔청주간 19호 국도상에 있음)가 된다. 전에는 서낭당이 있었으나 도로 확장공사로 없어졌으며 이 고개에서 북쪽 안대안 물은 한강으로, 남쪽 바깥대안 물은 금강으로 흘러가는 분수령이 되는 고개라고 한다.(보은 문화원, 보은의 지명- 內北面 大安里)
[7] 쌍 암 재
선두 대원들과 합류하여 급경사로 올라붙는다. 잣나무 조림지,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방치된 묘(10 : 20분), 안부, 급경사 오름,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원형 참호(9-2-33-1)가 있는 바위 지대를 힘들게 오르니(10 : 55분) 비로소 급한 오름 길이 끝나면서 왼쪽 내림 길로 이어진다(구룡산 분기점).
작은 祭壇을 지나(11 : 20분) 10여분을 더 내려오니 인삼 밭이 있고 인삼밭 가장자리로 길이 나 있는데 철조망으로 가는 길을 막아놓았다. 철조망에는 표시기가 촘촘히 매 달려 있다. 우선 표시기를 중심으 기념 촬영을 하고 인삼밭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포장도로(쌍암리와 법주리를 잇는 2차선의 571지방도로)로 내려선다(11 : 40분). 우리가 내려 선 10m 전방(법주리)에『쌍암재 해발 280m』 라고 표기된 도로 표지판이 설치되 있다. 힘들게 생각한 오전 산행을 끝내는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8] 明沙十里에서의 중식
쌍암재에 도착하여 7,8분을 기다리니 예약해 둔 승용차 두 대가 나타난다. 2구간 때 저녁 식사를 했던 「명사십리」에서 보내준 차다. 10여분을 달려 「명사십리」에 도착, 갈비탕으로 융숭한 점심 식사를 했다. 오전 산행에 별 무리가 없었는데도 온 몸이 나른하고 食後 졸음이 쏟아진다. 오후 산행은 접었으면 좋겠다. 예고 된 비라도 쏟아지면 핑계라도 삼을 텐데 날씨는 더 화창해져 누구 하나 다음 날로 산행을 미루자고 하지 않는다.
우격다짐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 끈을 졸라매고 차에 올라 쌍암재로 향했다. 제자들의 방문으로 산행에 참여 하지 못한 노부장의 심기나 건드려 볼 요량으로 전화, 마음에 없는 날씨 타령을 늘어놓는다.
[9] 604봉 오르는 길
[9-1] 장고개
쌍암재 도착, 오후 산행의 무거운 발걸음을 내 딛는다. 13 : 15분, 土地之神 비가 세워져 있는 墓地群을 지나 사과 밭을 통과하고 경운기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을 따르다 감나무 있는 지역 통과하여 오른쪽 계곡에서 급경사 산봉으로 오른다. 고도표에 나타난 604봉까지는 6. 70도가 되는 가파른 봉을 6개 정도 오르는 것으로 되 있다. 오후 산행의 시작부터 진을 뺀다.
된 걸음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연방 훔치며 정상에 올라(13 : 50분) 휴식, 다시 출발, 좌측으로 낙엽송이 울창한 숲을 지나 안부에 도착(14 : 00분) 했다. 성황당인 듯한 돌무더기가 있고 길이 네 갈레로 나 있다. 『장고개(화북면 쌍암 1리)』에 도착한 것 같다. 『장고개』는 능암에서 청원군 가덕면 금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청주장을 보러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안부를 지나 다시 급하게 오른다. 산 정상 2/3지점, 피나무와 참나무가 서로 꼬아 자라고 있다. 여러 해 산을 다녔으면서도 처음 보는 신기한 현상이다. 앞서간 장부장, 카메라에 담았는지 모르겠다.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며 산마루에 올랐다 내려서니 다소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고 放牧地 철사 줄 서너 가닥이 나무와 나무로 연이어 연결 되 있다. 옛날 강원도 홍천 염소 방목지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9-2] 오후 산행의 첫 고비 604봉
604봉 오르기 전의 6개봉을 어느 정도 오르내린 것 같다. 산마루 근처 돌담(참호)이 있는 봉이 오늘 산행의 가장 힘든 고비, 604봉으로 생각하고 다리에 힘을 주며 산봉에 올랐다(14 : 20분). 정상에는 삼각점이 있고 헬기장을 조성하기 위함인지 잘린 나무가 여러 개 널려 있다. 오후 산행의 첫 고비를 넘긴 것 같다.
[10] 살티재(삼일-재, 三日峙)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가쁜 숨을 잠시 진정 시키고 다시 출발(14 : 30분). 604봉 정상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급하게 내려오다 防火線 같은 넓은 능선 길로 이어진다. 다시 내림 길, 잣나무 조림지를 지나 山城처럼 돌이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뽀족봉에 올라 후미로 가는 안교감과 함께 짧은 휴식(15 : 00분)을 갖고 다시 출발. 쉬엄쉬엄 걷는 걸음에 휴식까지 취하다 보니 선두와는 꾀 멀어진 것 같다.
절개지 같은 급경사 고개로 내려섰다. 돌무더기가 있고 고개를 지난 10여m 지점에 작은 돌을 쌓아 만든 탑도 보인다. 『살티재』에 도착(15 : 25분)한 모양이다. 먼저 온 대원들도 우리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40분을 더 진행하면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 『국사봉』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살-티(사흘티, 三日峙. 삼일-재[고개, 내북면 화전1리 소재)는 염둔에서 청원군 가덕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 노인이 고개를 넘는데 고개가 길어 사흘이 걸려 넘었다고 한다.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 대안리→말구리 고개→살티→미티고개→청주에 이르는 길목이 된다.
[11] 國師峰 오르는 길
쌍암재에서 산행을 접자고 했던 오늘 산행도 『국사봉(586.7m)』에 오르는 것으로 마지막 고비를 넘기게 된다. 다소 힘은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산행을 한 것이 잘 한 것 같다. 잠시 휴식, 끝 힘을 모아 國師峯을 향해 출발 했다. 앞에 보이는 峯이 국사봉으로 생각하고 오르면 또 앞을 가로 막는 봉, 저 봉이 국사봉이다 생각하고 돌아 오르면 또 봉이 나타나 몇 번이고 빗나간 예측을 하며 거북 형상을 한 차돌 바위를 지나 헬기장에 도착했다. 國師峯이 咫尺인 듯하다. 30m 쯤 더 나가니 많은 표시기가 달려 있고 삼각점이 있는 산 정상에 오른다. 國師峯(586.7m)에 도착(16 : 17분)한 것이다.
국사-봉(國師峯:586m) 먹골 북쪽에 있는 산으로 청원군과의 경계가 된다. 휴식을 취하며 주변을 살피니 작은 떨갈나무에 ‘안산시 金正吉(011-319-0900)씨’가 1500개의 산을 돌았다는 코팅 쪽지를 매 달아 놓았다. 대단한 산꾼이라 생각하며 단체 사진 촬영.
[12] 下山 길(추정재)
산악 대장과 윤사장, 차 이동 때문에 급히 내려가고 나머지는 완만한 내림 길로 여유를 부리며 쉬엄쉬엄 내려오노라니 마을(머구미 마을)과 車들이 질주하는 도로(32번 국도)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다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국사봉을 출발하여 40여분, 헐벗은 묘 두 기를 지나 시멘트 포장 길로 들어선다. 시멘트 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면 『관정사』 입구 표지판과 『용창목공예』건물이 있고 그 앞으로 男 , 女 형상의 木 彫刻品을 일렬로 세워 놓았다. 도로변에는 『추정재(머구미재) 해발 260m』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도로 건너편에는 아침에 차를 세워 둔 SK주유소와 한가롭게 보이는 『머구미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힘들게 생각했던 17.5km의 한남금북정맥 제 3구간 산행을 무사히 끝낸 마음이 한결 가볍다. 산악대장과 윤사장, 차를 이동시키는 동안 강사장이 머구미 마을 구멍가게에서 사온 막걸리와 맥주로 오늘 산행의 피로를 풀었다. <終>
2006. 3. 10
< 참고자료 1 > 粘板岩 clay slate
셰일 또는 이암이 약한 광역변성작용을 받아 편리(片理)가 잘 발달하여, 편리를 따라 얇게 판모양으로 쪼개지기 쉬운 성질을 갖는 변성암. 비록 변성암이지만 재결정 정도가 매우 약하고 세립질이어서 퇴적암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색깔은 대개 암회색에서 검은색이고 응회질인 경우 적자색이나 녹색을 띤다. 중․고생대층 가운데 이암에 많다. 석질은 치밀하고 단단하여 습기를 흡수하는 일이 적으며 얇은 판모양이어서 캐기 쉽다. 또 쪼개진 면에 요철이 적어 기와․석판 등 지붕재료나 벼루․비석에 쓰이기도 한다. 점판암 석재로는 박리성이 풍부하여 납작한 박편모양을 한 것과 박리성이 발달되지 않아큰 석재로 캐어지는 것도 있다. 바둑판의 검은 돌은 검은색점판암으로 만든다.
<참고자료 2> 무속신앙(샤머니즘)
무속신앙은 다신교로 여러 신이 신앙의 대상이 된다.
또한 무신은 민간신앙에서도 예배의 대상이 되어 둘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다. 무신의 종류를 보면 첫째 가신의 비중이 가장 크다. 성주 ․제석 ․삼신 ․조왕 ․터주 ․업 등으로 굿을 할 때도 이들은 중요한 신으로 대접받는다. 둘째 동신(洞神)을 들 수 있다. 산신 ․서낭 ․당산 ․부군 ․도당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지는 지역공동체의 수호신으로 마을굿을 할 때 주신으로 모신다. 셋째로는 자연현상의 질서를 나타내는 신들이다.
일월성신 및 방위, 바람 등인데 칠성은 수명 ․장수의 신으로 모시고 오방신장은 방위수호의 신이다.
넷째 사령신(死靈神)은 조상신 ․동신 ․잡귀 등으로 신앙된다. 특히 최영이나 임경업 장군처럼 억울한 죽음을 당한 위대한 인물들은 넓은 지역에서 신앙된다. 다섯째로는 무속신화의 주인공들이 있다.
저승을 관장하는 바리공주, 생산신인 당금애기 등이 대표적이다.
여섯째 인간의 생명현상과 관련된 신들로 손님(천연두신) ․시왕 ․사자 등이 있고 그 외에 불교나 도교 등 외래종교의 영향을 받은 신들도 있다.
일곱째 금성대왕(錦城大王) 이 있다. 무당의 노래인 가망청배, 호귀(胡鬼), 만명(萬明), 창부(倡夫), 군웅청배 등에 따르면, 금성대왕․금성대신(錦城大神)․금성대국(錦城大國)․ 금성대신창부(錦城大神倡夫) 등으로 부르고 있으나, 무신의 고유명사라기보다 금성산신을 무당이 받들기 시작하면서 존칭이 붙었다고 볼수있다.
이러한 무속의 신들은 상호 관련없이 각자가 맡은 직능을 수행하는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다.
http://www.aljago.com/lim_data/3_1.html
<참고자료 3> 쌍암리
“능암은 고바위(곰바위) 능암사에서 유래된 듯 龍이 昇天한 용둠벙, 장사가 나온 굴재, 삼천명승궁 웅암사 전설이 있는 회인군 동면 능암지를 1914년 일제 때 『雙岩里』라 하다”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보은군 회북면 쌍암 2리 마을비문>
< 참고자료 4 > 쌍암 1리 마을비문
九龍山脈 이남을 달려 황계봉이 솟아 있고 좌우산맥 이남으로 내려와 마을을 아늑하게 안아주고 있다.
조선 숙종 왕 7년(1645년)에 광산 김공세욱선생께서 터를 정하시고 곧이어 동래정공 계황선생이 입주 하시어 지금까지 연안전씨, 단양우씨, 경주김씨등이 내주하여 30여 호가 살고 있다.
남으로 회인읍 있고, 서로는 오동리가 있고, 동으로 보고실이 있고, 북으로는 법주리가 있다. 마을 뒤 횡계봉 아래에는 계수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넓게 둘러진 아래에는 산신제단이 있어 영험이 많다 하여 축원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주민은 횡계봉에 청수한 정기를 받아 천성이 순박할 뿐 만 아니라 농학박사, 공학박사등 저명한 인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소산물로는 오곡이 고루생산 되고 호두, 밤, 대추, 배, 사과 등이 고루 생산되어 풍요롭고 살기 좋은 마을이다. 선조를 모시고 자손을 기르며 이 마을을 아끼고 가꾸며 길이길이 살리라.
<참고자료 5> 장수굴 전설
보은군 회북면 쌍암리 2구 마을 뒷산에 "장수굴"이라 부르는 굴이 있다.
조선 선조때의 이야기다.
이 굴에 장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큰 고목나무를 한손으로 뿌리째 뽑았으며 한번에 큰 돼지 한 마리와 술 세동이나 먹었으나 그렇다고 특출한 무예는 없었다.매일 열자나 되는 긴 창을 들고 다녔으나 사냥조차 제대로 못하였으며 얼마나 게으른지 한번 잠이 들면 석달 열흘간이나 쿨쿨 잠만 잤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졸지장의 명색만 장수"라고 비웃었으며 흑심한 사람은 "미치광이장수"라고 놀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내색도 않고 소같이 많이 먹고 배부르면 다시 굴안에 들어가 세상 모르게 잠만 잤다.
어쩌다 그가 마을 앞에 나타나면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미치광이 장수"라고 놀려 주었지만 그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침내 왜놈이 우리나라를 쳐들오와 이곳 마을까지 당도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허겁지겁 왜병을 피하여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때까지 굴안에서 잠을 자던 장수가 창을 들고 나타났다.장수는 한 손에 긴창을 들고 왜병을 상대하여 싸우기 시작했는데 빠르기가 바람같았다.
한손으로 왜병 두명을 한꺼번에 번쩍 들어 집어 던지는가 하면 한창에 적병을 십명씩이나 곶감끼듯 찔러 버렸다.
왜적은 감히 당하지 못하고 뿔뿔이 도망갔다. 장수는 그제서야 다시 술과 고기를 청하여 배부리게 먹고 "나는 이제 속리산 문장대로 간"하면서 굴안을 들어갔다.
그 뒤 세월이 1년이 지나도록 장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궁금하여 굴속들은 굴속에 불을 때면 연기를 못참고 장수가 굴밖으로 나올것이라 믿고 나무를 때기 시작했다. 아무리 며칠을 두고 불을 때었지만 연기가 문장대로 나올 뿐 장수는 영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굴을 "장수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곳에 계속하여 불을 때면 속리산 문장대에서 연기가 나온다고 믿게 되었다.
<참고자료 6> 법주리
내북면 법주리 마을비 : 예전 백제시대에는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드리라고 불려졌다하며 마을동쪽에 굴뚝안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굴뚝샘은 물맛이 좋을 뿐 아니라 가뭄에 동네아낙들이 모여 키로 물을 까브루면 삼일만에 비가 온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으며 마을뒤 구룡산은 마을을 보호하는 기운이 서려있어 전쟁시에도 전사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하며 매년 정월 십사일이면 마을의 모든 잡귀를 쫒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에 장승제를 지내는데 동은 남자요 서는 여자로 전해지고 있음. 한편 이웃마을인 염둔리에 (주) 한화공장이 위치하여 마을발전은 물론 주민소득증대에도 기여하고 있으며 창리-오동간 군도가 확포장되어 마을 중앙을 통과하니 교통이 편리하고 마을전경이 아름다우며 인심좋고 젊은 영농후계자가 많은 산간 농촌마을로 옛조상들께서 물려주신 농사일에 전념하며 마을의 모든일에 협동단결하여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풍요로운 농촌마을로서 이에 전주민의 협동단결과 애향심이 가득찬 마을임을 길이 후손에 전하고저 사적을 적기하여 주민일동의 유래비를 건립합니다.
<참고자료 7> 花田 1 리 마을비
우리마을은 서북쪽에 국사봉의 줄기아래 자리잡고 동남쪽에는 노적봉이 우뚝서 마을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써 면적은 5,202,485㎡이고 61가구에 220명이 주거하고 있고 지금으로부터 약500년전에 장수황씨가 이곳에 들어와 터전을 잡고 그후 전주이씨를 비롯해서 현재의 성을 가지고 있는 주민으로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이름은 먹을 생산하였다하여 먹골이라 불렀고 그후 청산현 주성면에 속하였던 곳으로 1906년 보은군 주성면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묵동.수평동을 병합하여 화전리라 하고 내북면에 편입되었다.
화전리란 이름은 국사봉의 한줄기가 마을로 내려온 한봉우리가 꽃처럼 생겼다하여 꽃화자와 밭전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다.
먹골의 자연샘물은 물맛이 소문난 곳으로 아무리 가뭄이와도 마른적이 없는 자연수로써 마을을 찾는 모든사람 들의 자랑거리 이기도 하다.
관내에서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가 1971년에 우리마을에 세워졌으며 국사봉의 정기아래 노봉을 바라보며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는 전당이 자리를 잡고 마을 서남쪽으로는 1989년 (주)한화가 들어옴으로 화전리 일부가 공장부지로 편입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웃말, 아랫말, 솔정, 집너머, 무드리마을로 구성되었고 마을전경이 아름답고 옛 선조님께서 물려준신 땅을 마을주민 모두가 협동단결 하여 열심히 충효예절을 마을지표로 삼고 주민일동은 한마음으로 이 비를 세웁니다.
첫댓글 그러려 한것이 아닌데 이일 저일 겹쳐서 그만 못갔습니다. 이러다 한남금북정맥은 산행기로나 보게 될런지... 담엔 가야지... 재미있습니다. 산행기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다음에는 봄나물 나오는데 박사장님도 가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