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달·비·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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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하월상
<P>·나오는 사람들
<P>운호거사
<P>용희
<P>삼녀
<P>강일도사
<P>용건
<P>심마니A
<P>심마니B
<P>·무대
<P>하수에서 무대중앙 쪽으로 커다란 바위가 가로로 질러져 있다. 그 바위에 커다란 굴이 파여져 있고 그 입구가 무대 중앙쯤에 있다. 바위 측면은 엷은 사(紗)로 장치해서 3장에서 훤히 보이게 한다. 바위 뒷면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다. 굴의 입구 앞에 있는 나무 하나가 꽃이 피고, 푸른잎이 나고, 누런잎이 되는 것으로 바뀜을 표현한다. 상수 밖으로 넓은 호수가 있는 것으로, 그리고 또 하수 밖으로 높은 산봉우리가 있는 것으로 각각 설정한다. 대사는 모두 칠·오조의 운문으로 이루어진다.
<P>[장] 1장 [봄]
<P>소나무 숲위의 하늘은 저녁놀이 붉게 탄다. 산새 울음 소리--- 강일도사와 삼녀, 하수에서 등장. 삼녀, 굴속을 들여다본다.
<P>[강일] 삼녀야, 운호거사 굴속에 없니?
<P>[삼녀] 네, 큰아버님. 그는 어딨을까요?
<P>[강일] 이맘때 있는 곳은 뻔한 일이지.
<P>[삼녀] 염호(娙湖)의 소금밭에 가있겠군요.
<P>[강일] 그렇지. 이제 봄니 닥쳐왔으니 소금 만들 준비를 해야 할테니
<P>[삼녀] 그럼 소금밭으로 가보실까요.
<P>[강일] 안돼! 거기에 가면 운호거사의 불같은 꾸지람을 듣게 될 거다.
<P>[삼녀] 왜 그런 꾸지람을 듣게 되나요?
<P>[강일] 여자란 원래부터 부정한 거야. 부정타면 소금이 안만들어져.
<P>[삼녀] 내 참, 큰아버님도--- 운호거사는 그런 것을 가리지 않던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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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강일] 여자는 소금밭엔 금물인 거야.
<P>삼녀, 냅다 재채기를 한다.
<P>[삼녀] 호수가까이 오면 짠 바람 불어 콧구멍 간지럽혀 재채기 나요.
<P>[강일] 그게 소위 개펄의 바람이니라.
<P>[삼녀] 갯펄바람이라니 무엇인가요?
<P>[강일] 넌 아직 보지 못해 모르겠지만 바닷가를 흔히들 갯펄이라며 거기서의 바람을 그리 말하지.
<P>[삼녀] 바다는 호수보다 더 넓은가요? 바다는 호수보다 더 깊은가요?
<P>[강일] 하기야 이 호수도 넓고 깊지만, 바다에다 비하면 어림도 없지. 이곳 도마산(刀磨山)에서 동쪽을 향해 한참을 가노라면 동해바다가 넓고도 깊푸르게 펼쳐져 있지. 그곳에선 아득히 눈에 띄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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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하늘과 마주닿은 수면뿐이지.
<P>[삼녀] 그 수면이 얼마나 훤히 보일까!
<P>[강일] 그 수면 위에 앵속 꽃씨와 같이 아주 조그만 점이 나타난단다. 그 점이 차차 커져 수수알 되고, 살구가 되었다가 호도알 되면 배가 오고 있는 걸 알게 된단다.
<P>[삼녀] 어디를 갔다 오는 배들인가요?
<P>[강일] 가까이로는 왜국, 먼 곳으로는 동해바다 휘돌아 대국에까지 갔다오는 배란다. 크나큰 배지.
<P>[삼녀] 바다와 크나큰 배, 가보고파요!
<P>[강일] 하늘과 수면만이 맞닿은 것과 아주 비슷하면서 반대인 것이 하늘과 지면만이 맞닿은 거지. 그곳에서는 온통 땅만 보이고 산은 눈씻고 봐도 안보인단다.
<P>[삼녀] 어머나! 어찌 산이 안보일까요?
<P>[강일] 원래 산이 없으니 안보일밖에.
<P>[삼녀] 이곳에선 사방이 산으로 싸여 눈길이 가는 데는 온통 산인데!
<P>[강일] 그곳에선 산 구경 할 수 없단다.
<P>[삼녀] 그 광경 어디 가면 볼 수 있나요?
<P>[강일] 여기서 서쪽으로 한참을 가면 관서(關西)라는 벌판이 펼쳐져 있어. 그 곳에서 그 광경 볼 수 있단다.
<P>[삼녀] 오, 그곳에 가보고 싶어지는데! 그러고 보니 제가 못가본 곳이 수두룩한 셈이군. 가보고파라!
<P>[강일] 수두룩하다마다 그뿐이겠니. 넓고 넓은 벌판의 군데군데엔 대처의 저자 거리 또한 있단다.
<P>[삼녀] 대처의 저자 거린 뭘 하는 데죠?
<P>[강일] 거기에선 여러곳 사람들 모여 진귀한 물건들을 사고 판단다.
<P>[삼녀] 진귀한 물건이란 무엇인가요?
<P>[강일] 대국에서 가져온 비단과 향료, 장신구 등 그리고 왜국에서 온 갖가지 염료 물감, 화장품이지.
<P>[삼녀] 오, 그런 것 모조리 보고 싶군요!
<P>[강일] 그나 그뿐이겠니. 그곳에 사는 남녀들은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잠자리 날개 같은 비단옷 입고 두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온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거야.
<P>[삼녀] 오, 얼마나 즐겁고 멋진 일일까!
<P>[강일] 특히 남자들이야 비단옷에다 금은으로 장식한 긴칼을 차고 다니는 폼이 모두 귀공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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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삼녀] 오, 귀공자 얼마나 멋들어질까?
<P>[강일] 정말로 멋지단다. 반할만하지. 삼녀야, 그러니까 눈을 돌려라. 운호거사에게만 홀딱 반해서 혼자서 속태울 게 뭐 있겠느냐. 이 세상엔 그보다 잘생긴 남자 얼마든지 있단다. 잘 생각하렴.
<P>[삼녀] 큰 아버님, 그 무슨 말씀이세요! 거사님으로부터 이 내 마음을 슬쩍 돌려 놓으려 은근하게도 수면과 지면, 저자 거리니 하고 그다지도 허두가 거창했군요.
<P>[강일] 아니다. 나는 다만 네가 아직도 보지 못한 세상이 숱하다는 걸 얘기하려 했단다. 오해 말아라.
<P>[삼녀] 그야 제가 아직도 못본 세상이 수두룩하다는 건 저도 알아요. 이 첩첩 산속에서 태어난 제가 조실부모한 후론 큰아버님의 보호 아래 여기서 자랐는 걸요. 아무리 그러해도 저는 알아요. 거사님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지금도 제 눈에는 선하거든요. 거사님이 맨 처음 큰아버님을 찾아왔던 그 때의 그 모습을요. 정말로 거사님은 귀공자였지! 그때 제 나이 겨우 열살였지만, 잘 생기고 의젓한 남자란 것쯤 처음 만난 때부터 알만했지요. 그는 저를 아기씨 하고 불렀죠. 오, 아기씨, 아기씨--- 이 한마디 말! 저는 노래보다도 더 감미롭고 즐겁게 들을 수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와서 그 거사님이 달빛이 휘영청히 밝은 밤마다 딴 여인을 만나고 있단 말예요. 더구나 분한 것은 그 여인네가 저보다 날씬하고 우아하대요.
<P>((그때 운호거사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P>[운호] (소리)넓은 호수 건너서 찾아든 봄은 즐거움의 씨앗을 지니고 온 듯 이지랭이가 되어가물거리네. 둘레는 꽃이 피고 새가 울건만 그대 그리는 맘에 입술 메말라 즐거운 봄의 노래 잊어버렸네.
<P>[삼녀] 글쎄, 그대 그리는 마음이라니, 저런 투라니까요. 에이 분해라!
<P>[강일] 삼녀야, 그 사람이 이리로 온다. 우리 저기 숨어서 거동을 보자.
<P>((강일도사와 삼녀, 급히 하수로 퇴장. 운호거사, 상수에서 등장))
<P>[운호] 훨훨 하늘을 나는 나비들이여, 진정 난 너희들을 부러워한다. 구김살 없이 맘껏 날 수가 있는 너의 그 두 날개를 부러워한다. 가시조차 꽃피는 봄이 왔건만 내 맘은 숲속인양 어두침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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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 낭자가 누군지 알 수 있다면 내 마음 역시 훨훨 날 수 있겠지.
<P>((삼녀, 하수에서 등장.))
<P>[삼녀] 운호거사님, 이제 일 끝냈나요?
<P>[운호] 아, 삼녀 아기씨가 어쩐 일이지?
<P>[삼녀] 거사님, 나도 이젠 어린아이가 아니란 말이에요! 스무살이 된 어엿하고 꽃다운 낭자이지요.
<P>[운호] 벌써 그렇게 됐나? 하기야 내가 수도하기 위해서 이곳 온지도 10년이 지났으니 그럴법하지.
<P>[삼녀] 거사님, 나를 어찌 생각하세요?
<P>[운호] 어찌 생각하다니 무슨 말이야?
<P>[삼녀] 내가 거사님에게 뭐냐말예요?
<P>[운호] 삼녀야 도사님의 조카딸이지. 내가 이곳 왔을 때 열살이었고.
<P>[삼녀] 고작 그뿐인가요? 기가 막혀라.
<P>[운호] 고작 그뿐이라니 무슨 소리야?
<P>[삼녀] 나도 이젠 클대로 컸단 말예요. 이런 산간벽지선 좀 보기 드문 인물이란 치사도 듣게쯤 됐죠. 그런데 거사님은 아무렇지고 않은 듯 본둥만둥 왜 그러시죠? ((운호거사, 삼녀를 진득이 보다가 웃음을 터뜨린다.))
<P>[삼녀] 아니, 왜 갑작스레 웃는 거예요?
<P>[운호] 내 노래 가르쳐 준 삼녀가 벌써 그런 소릴 하게쯤 된 것을 보니 저절로 웃음보가 터졌던 거야. 코흘린 게 엊그제 같은데 말야.
<P>[삼녀] 공연히 웃음으로 엄벙뗑 마요.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거사님, 나는 요즘 달밤이 되면 이부자리 뒤채며 잠 못이뤄요. 거사님은 그 까닭 아시는지요?
<P>[운호] 글쎄, 내가 그 까닭 알 리 없잖아.
<P>[삼녀] 거사님이 달밤에 어떤 여인과 밀회하는 광경을 생각해서죠. 그 여인이 누구죠? 말해 주세요. 누구길래 달밤에 만나는 거죠?
<P>((삼녀, 느닷없이 운호거사의 목에 두팔을 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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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삼녀] 거사님, 사모하고 있단 말예요! 제발 어여삐 여겨 안아주세요!
<P>[운호] 삼녀, 이러면 못써, 이러지 말아!
<P>((운호거사, 쌀쌀하게 삼녀의 팔을 풀자, 그녀는 다시 달라붙는다.))
<P>[삼녀] 사모하는 이한테 이러는 것이 무엇이 못쓴다고 그러는 거죠?
<P>[운호] 이러면 못쓴대도 자꾸 이러네!
<P>((운호거사가 뿌리치자, 삼녀는 휘청거리다가 바위에 의지하고 짐짓 흐느껴 우는척한다.))
<P>[삼녀] 남의 속도 모르고 바보 같으니 저녁놀 정열처럼 붉게 타는데! 진달래 애욕처럼 붉게 폈는데!
<P>((운호거사, 냉정히 삼녀를 보다가 그냥 상수로 퇴장. 이윽고 강일도사, 하수에서 등장해서 삼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P>[삼녀] 오, 다정히 손 얹은 운호거사님! 이 손으로 다시 날 안뿌리치죠? ((삼녀, 강일도사의 손을 잡았다가 실망하고 뿌리친다.))
<P>[강일] 거사가 아니라서 미안하구나.
<P>[삼녀] 그는 가버렸군요. 아이 분해라!
<P>[강일] 분해봤자 네 몸만 수척해진다. 안되겠다. 그자가 그 여인한테 단단히 사로잡힌 모양이구나
<P>[삼녀] 글쎄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죠. 나같은 건 안중에 없단 말예요.
<P>[강일] 얘야, 내게 맡겨라. 내가 신중히 그자의 맥을 다시 짚어보겠다. 너의 사랑이 가망이 있는가 보자.
<P>[삼녀] 이 일만은 꼭 성취시켜야 해요.
<P>[강일] 내가 힘써볼테니 너는 가보렴.
<P>[삼녀] 네, 그 오만한 코를 큰아버님이 납작하게 만들어주셔야 해요.
<P>((삼녀, 하수로 퇴장. 강일도사. 운호거사를 부른다. 운호거사, 상수에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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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운호] 아이 강일도사님, 어서 오시오. 그동안 무슨 별고 없었는지요?
<P>[강일] 나야 별다른 일은 없었지마는 운호고사는 별고 있었다던데? 별고치곤 굉장한 별고라더군.
<P>[운호] 굉장한 별고라니 괴이한 말씀. 나야 다만 소금을 만들었을 뿐 다른 일은 도무지 없었는데요.
<P>[강일] 운호거사, 시치미 떼지 마시오! 달이 뜨는 밤마다 피리를 불어 아리따운 낭자를 꾀어내어서 사랑을 나눈다는 소문 자자해.
<P>[운호] 과장된 소문이요, 믿지 마시오. 내가 다만 달뜨는 밤이 되오면 낭자와 만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소.
<P>[강일] 이름도 모르다니 말이 안되지.
<P>[운호] 정말이오. 달밤에 피리를 불면 그녀가 어디선지 나타나지만 내가 말을 건네도 대답 없다오.
<P>[강일] 대답이 없다 화면 벙어리인가?
<P>[운호] 벙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왜냐하면, 그녀가 내 말소리는 알아듣는듯하기 때문이라오. 자고로 벙어리는 귀가 안들려 말을 할 수 없다고 하잖습니까.
<P>[강일] 하기야 알아듣지 못하고 보면 자연히 말 못하게 되는 거겠지.
<P>[운호] 그러니 내 속인들 얼마나 타며 얼마나 타며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어요. 사랑의 정 통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나 시원스레 주고 받아야 나의 마음 후련히 트일텐데요.
<P>[강일] 운호거사, 정말로 타락했구려, 생명의 보금자리 찾기 위하여 목마른 사습처럼 헤매다니며 영원한 해탈의 길 얻고지고저 온갖 난행고행도 마다 안하던 시절이 언제인데 그 모 양이오!
<P>[운호] 내가 타락했다고? 허허허허허---
<P>[강호] 내 말이 가소롭소, 왜 웃는 거요?
<P>[운호] 도사의 타락이란 말이 너무나 과장된 것 같아서 그만 웃음이---
<P>[강호] 뭣이 과장됐다고 그러는 거요!
<P>[운호] 타락한 게 아니라 깨달은 거요. 도사는 언제든지 말을 하기를- 격노한 금강장왕 모습 떠올려 그와 같은 맹렬한 용맹심으로 수도에 정진하라 부르짖으며 본래공(本來空)의 긴 칼을 휘둘러대며 아집(我執)탐욕의 망상 베어버리고 초인적 행동으로 이 몸 산산이 부숴버린 다음에 금강불괴(金剛不壞)의 큰힘 얻어 자기를 제도하라고 항상 입버릇처럼 되뇌었지요.
<P>[강일] 그건 만고의 진리, 최상의 진리!
<P>[운호] 하지만 그 진리는 도사와 같은 특수한 분들이나 능히 해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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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일이고 보다 많은 중생에게는 까마득히 멀고도 험한 길이오.
<P>[강일] 그렇다고 외면은 할 수 없는 일.
<P>[운호] 하지만 보다 많은 중생들이야 모두 두려워하고 꺼리게 되어 더욱더욱 도사의 말과는 달리 금강불괴의 큰힘 얻을 기 없소.
<P>[강일] 그야 인연 없으면 어쩔 수 없지.
<P>[운호] 그렇다고 그렇게 내팽개치면 어떻게 중생 제도 이룰 건가요? 그래 나는 앞으로 인간 본래의 욕망을 덮어놓고 누르지 말고 잘 길들임으로써 훌륭히 길러 중생 제도의 길 찾을까 하오.
<P>[강일] 사나운 짐승 같은 우리 욕망을 그다지도 섣불리 다루겠다니!
<P>[운호] 그야 중생이 모두 도사 말처럼 초인적인 행동을 할 수 없으니 어쩌겠소, 차라리 그럴 바에는 욕망을 어느 정도 긍정하고서 그 천성(天性) 위에다가 제도의 길을 찾는 게 타당하지 않을는지요? 진흙 구렁텅이에 연꽃이 피듯.
<P>[강일] 흥! 짐승의 천성을 인의도덕의 우리 안에 가두고 잘 길들여서 차츰 고쳐나가려 한다는 것은 소위 공맹지교(孔孟之敎)의 패거리들이 내세우는 중화(中和)의 길이 아니오? 그런데 운호거사 하는 소리는 우리에도 가두지 않고서 그냥 길들이려는 거요, 어이가 없소.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일까보냐! 길들이기는 커녕 그 짐승에게 잡혀먹히는 것이 십상일 거요. 그러니 그 짐승을 꼼짝 못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금강불괴의 큰힘을 내 손으로 꽉 쥐어야 해![운호] 도사의 가르침이 너무나 높고 험준하기 때문에 중생으로선 오르고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저 쭈찍한 도마산 꼭대기처럼 도저히 터득할 맘 솟지 않아요. 설사 그런 의욕이 솟는다 해도 오르는 도중에서 헐떡거리다 주저앉고 말 것이 뻔한 일이오
<P>[강일] 그것은 스스로가 약하기 때문!
<P>[운호] 그렇소! 우리들은 약한 존재요. 약하고도 가련한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그 꼭대기를 오르려 생각하는 그것부터가 오만한 생각임을 나는 알았소. 오직 관음보살께 귀의하여서 제도의 길 찾아야 할 것 같아요.
<P>[강일] 스스로의 타락을 그럴싸하게 발라맞춰 나에게 말하지 마오!
<P>[운호] 설령 내 깨달음이 타락이라도 지금의 나로서는 개의치 않소! 도사가 주장하는 금강불괴의 큰힘을 얻는다고 말할지라도 그게 인간의 정을 말살하려는 오직 앙칼지고도 차디차고도 혹독한 것이라면 차라리 나는---
<P>[강일] 닥치오, 째째하고 껄렁한 소리! 그래 겨우 거사가 생각해낸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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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호숫물로 소금을 만들어 내서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일이오? 너무나 시시하고 가소롭구나.
<P>[운호] 소금은 이 땅위의 정기 아니오. 소금은 모든 것을 부패로부터 막아주는 요긴한 것이 아니오. 그리고 모든 음식 간을 맞추어 한결 맛을 돋우는 일을 하지요.
<P>[강일] 구도자(求道者)가 할 일이 겨우 음식 맛 돋우는 일이라니 가소롭구나.
<P>[운호] 음식이란 중생의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던가요? 누구든지 음식은 들어야 하오. 도사 역시 음실을 들지 않으면 기운 잃어 그 어찌 금강불괴의 큰힘을 얻을 수가 있겠는지요!
<P>[강일] 난 하루 한끼밖엔 안들고 있소
<P>[운호] 비록 하루 한끼의 음식이라도 소금을 안쓰고는 안될텐데요.
<P>[강일] 그야 그렇지만도--- 참, 운호거사, 내 부탁 하나 있소. 들어주구려.
<P>[운호] 갑자기 무슨 부탁? 말해 보시오. 들을 수 있는 것은 들어줄테니.
<P>[강일] 내 조카딸 삼녀를 거사 아내로 맞이해 줄 수 없소? 부탁하리다. 실은 내 조카딸이 어려서부터 거사를 사모하고 있었다는군.
<P>[운호] 그 일이야 도사의 금강불괴의 큰힘 얻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그러니 삼녀더러 단념하라고 타일러 주십시오, 부탁하겠소.
<P>((강일도사, 화가 나서 하수로 퇴장하려다가 마침 등장하는 심마니 A, B와 부딪친다.))
<P>[A] 아이구, 도사님이 웬일이세요?
<P>[B] 죄송하게 됐군요, 용서하세요.
<P>((강일도사 한번 노려보고 퇴장.))
<P>[A] 안녕하십니까요, 운호거사님.
<P>[B] 궁금했읍니다요, 산속 깊이서.
<P>[운호] 어서 오게. 이번엔 수확이 어때?
<P>[A] 거사님 말씀대로 목욕재계로 오로지 정성들인 덕이었는지---
<P>[B] 산삼 한뿌리를 캤읍니다요.
<P>[운호] 정말 잘했군그래, 어디 좀 보세
<P>[A] 보세요, 이래 봐도 이 한뿌리가 너끈히 10년 묵은 산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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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운호] 아니 이리 작은 게 10년간이나!
<P>[B] 원래가 산삼이란 마디가 커서 10년 동안 커봤자 별 게 아니오.
<P>[A] 이 세곱 자라려면 한 백년쯤은 걸리는 겁니다요. 기가 막히죠.
<P>[운호] 백년이라니 정말 놀라운 일야. 강산이 열번쯤 변하는 세월---
<P>[B] 그러길래 산삼이 영약이지요. 죽을 사람 살린단 것입니다요.
<P>[A] 아무튼 이 산삼이 영물임에는 틀림없읍니다요. 사람의 눈에 안뜨이려고들면 바로 눈 앞에 두고도 못보게끔 되거들랑요.
<P>[운호] 그렇다면 정말로 산삼 한뿌리 캐는 게 예사 일이 아니로구만.
<P>[B] 예사 일이 뭡니까요, 몇달동안을 깊은 산 헤매다가 산삼 한뿌리 캐게끔 될라치면 큰숩니다요.
<P>[A] 1년 내내 산속만 헤매다니다 공치는 일도 흔히 있읍니다요.
<P>[운호] 그러니 영약이라 할 수밖에는! 진시황이 동자를 동래국으로 보내어 불로초를 구하려한 건 바로 산삼였는지 알 수 없는 일.
<P>[B] 불로초는 못돼도 무병초라곤 할 수 있읍니다요, 틀림없지요. 어렸을 때에 이런 뿌리 하나만 먹이면야 일평생 무병이지요. 고뿔 한번 앓는 일 없거들랑요.
<P>[A] 살기가 웬만하면 두눈 딱 감고 어린 자식놈에게 산삼 한뿌리 먹이면야 그놈의 평생 약값은 땡전 한푼 필요가 없겠지마는 지긋지긋하게도 구차한 살림! 생각사록 울화가 치밉니다요.
<P>[운호] 그 말을 듣고 나니 참말 안됐네. 내게 여유 있다면 그리 하도록 해줄텐데 나 역시 여유 없으니.
<P>[A] 아닙니다. 구차한 집안 자식이 공연이 분수넘게 이런 영약을 먹는다면 천벌을 받습니다요.
<P>[B] 그보다 거사님이 이 산삼 쓰면 어떻겠읍니까요, 거사님 몸이 몹시 쇠약했다고 들었는데요.
<P>[운호] 무슨 말! 나야말로 이런 영약을 먹으면 불벌(佛罰)받게 될지도 몰라.
<P>[B] 거사님이 불벌을 받게 되다니! 무슨 말입니까요, 당치 않아요.
<P>[운호] 나야 자네들처럼 산속 헤매며 고생도 하지 않고 편한 몸인데.
<P>[A] 왜 고생 않는다고 그럽니까요. 거사님이 소금을 만드는 방법 미처 생각해내지 못하셨다면 그리고 땀 흘리며 안만든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불편할까요. 이곳에서 소금을 만들기 전엔 소금 값이 금값과 다름없었죠?
<P>[B] 금값 주고도 어디 이 산중에선 소금을 구하기가 수월했나요. 정말 소금 보기란 세끼나 굶은 시에미 낯짝에서 맏며느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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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웃음기 보기보다 더 어려운 일. 그러나 거사님이 우리들에게 큰 도움을 두루 준 셈입니다요.
<P>[운호] 게다가 돈도 없는 형편 아닌가.
<P>[B] 아니 누가 돈달라 했읍니까요. 거저 갖다 잡수란 말입니다요.
<P>[A] 우리도 거사님이 만든 소금을 거저 쓰고 있지들 않습니까요.
<P>[운호] 거저는 왜 거전가 조, 수수 같은 곡식 얻어 끼니를 잇고 있잖나?
<P>[A] 그야 돈으로 따질 거나 되나요. 여긴 산간 벽지라 흔해빠진 게 조나 수수와 같은 잡곡이지요.
<P>[운호] 흔해도 자네들의 구슬땀으로 이룩된 걸 허술히 여길 수 있나.
<P>[B] 거사님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 성인군자도 참말 무색할 지경. 정 그러하시다면 이 곁가지의 작은 것만이라도 써보시지요. 자, 여기 작은 뿌리 잘라냈으니 아무 소리 마시고 들어보세요. 효험이 지금 당장 있을 터이니.
<P>[운호] 안된다는데 자꾸 왜 이러는가?
<P>[A] 그래야만 다시금 기운 차리고 소금을 만들 것이 아닙니까요. 그러니 눈 딱 감고 들어보세요.
<P>[운호] 자네의 그 고집이 여간 아니군. 내가 졌다네, 졌어. 먹도록 하지.
<P>((운호거사, 가지 뿌리를 먹는다.))
<P>[B] 영약을 먹은 맛이 어떱니까요?
<P>[운호] 글쎄, 쌈싸름하니 별맛 없구만.
<P>[B] 거사님의 얼굴이 불콰해지며 산삼 기운 뻗는 것 같습니다요.
<P>[운호] 아무려면 갑자기 그럴 리 있나.
<P>[B] 아니 당장 효험이 있읍니다요. 효험 빠름긴 이게 제일 이지요. 자식이 먼 곳으로 출타했는데 그 부모가 숨넘어가게 됐을 때, 이 산삼을 먹이면 곧 효험 있어 생명이 연장되어 출타한 자식 돌아와 임종하게 되는 거지요.
<P>[운호] 글쎄, 왠지 기운이 솟는 것 같군.
<P>[B] 틀림없다니까요. 이 뿌리 마저 잡수면 어떨까요? 더 기운나게.
<P>[운호] 웬 걸! 그 뿌리마저 들었다가는 솟구치는 기운의 처리 어려워. 제발 이 한가지로 용서해다오.
<P>((A와 B는 유쾌하게 웃는다))
<P>[페이지] 171
<P>[운호] 여보게들, 내 가끔 생각한 건데 이 산삼 씨를 뿌려 잘 가꾸어서 많이 생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가 곡식농사 짓듯 말일새.
<P>[A] 안될 말입니다요. 저도 이 씨를 산에 뿌려 봤는데, 싹이 안트고 썩어버려 실패를 했읍니다요. 그저 산삼은 깊은 산중에서만 온갖 고생한 끝에 구해야 해요. 산삼은 영약 중의 영약이니까.
<P>[운호] 하지만 피와 땀의 노력으로서 많이 많이 생산해 모든 중생이 그 약효를 얻을 수 있게 되면야 얼마나 도움되는 일이갰는가. 이 세상에서 병이 자취 감추고 중생이 튼튼한 몸 유지한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 어디 있겠나.
<P>[A] 이치야 그렇지만 산삼 농사는 어려울 겁니다요. 우선 천째로 씨뿌려도 싹트이지 않거들랑요.
<P>[운호] 그럴 리가 없다네, 싹트게 하는 방법이 있을거야. 꼭 있을거야. 골똘히 생각하면 없을 리 없지.
<P>[B] 그건 단념하는 게 거사님한텐 좋을 것 같슴니다. 괜히 그러다 산삼을 다스리는 산신령님의 호된 노염을 사면 액운 면하기 심히 어려울 것만 같습니다요.
<P>[운호] 그래도 단념할 수 나는 없다네. 중생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좋은 일인데 어찌 단념하겠나. 그게 관음보살의 가르침인데.
<P>[A] 산삼의 농사란 건 생각할 수도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입니다요.
<P>[운호] 내가 이 호숫물로 귀중한 소금 만들겠다 한 때도 모든사람이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일이니 부디 단념하라고 입을 모았지. 용왕의 노염 사서 파멸당하게 된다고들 모두가 성화했었지.
<P>[B] 그것과 산삼 농산 다릅니다요.
<P>[운호] 다른 게 뭐 있겠나, 찾아내야지. 소금의 경우에도 난 생각했어. 이 근처의 산에서 소금으로 된 바위가 발견되는 사실로 해서 옛날에 짠 물 호수 있었던 것을. 그러자 내 추측이 들어맞아서 과연 이 호숫물에 염분이 많아 소금 만드는 방법 궁리해냈지. 나는 곧 호숫물을 호숫가에다 가두고서 증발을 시켜봤었지. 그러자 지금 같은 좋은 소금을 생산하게 된 거야.
<P>궁리해 보면 무슨 수가 있겠지. 꼭 있을 거야. 난 앞으로 골똘히 궁리할 테야. 그래서 중생에게 산삼의 효험 두루 얻을 수 있게 만드는 거야. 이게 관음보살의 자비정신이야.
<P>((운호거사, 벌써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A, B는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살래살래 내두르더니 살며시 하수로 퇴장.
<P>[페이지] 172
<P>어느덧 저녁놀은 어둔고 밤하늘로 바뀌고, 소나무 숲위로 조용히 달이 뜬다. 밤 안개가 자욱이 끼기 시작한다. 운호거사, 굴에서 피리를 가지고 나와 조용히 분다. 그 피리 소리를 따라 조촐한 비단 옷차림의 용희가 상수에서 조용히 등장.))
<P>[운호] 낭자, 또 오셨구려! 고맙소이다. 낭자, 혹시 내 말이 안들리나요? 아, 낭자는 이 몸이 이리 말해도 아직 대답해 주지 않는 건가요? 원컨데 한마디만 대답해 주오. 낭자는 이 세상의 사람인가요? 사람이 아니라면 나의 덧없고 하염없는 환상의 모습인가요? 아무래도 좋아요. 난 낭자한테 한마디 말을 듣고 싶을 뿐이오. 이 침묵의 만남 더 참을 수 없소. 야릇하게 청초한 낭자의 모습. 달빛이 호숫물에 은구슬처럼 빛날 때 나타나는 그 모습이여! 아, 내가 이다지도 낭자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을 불태우면서 그리는 간절한 맘 모르시나요?
<P>[용희] 왜 모르겠읍니까, 알고 있어요.
<P>[운호] 아, 비로소 그 입을 열으셨군요. 그대도 나와 같은 사람인가요? 또는 관음보살이 날 돕기 위해 낭자로 몸바꾸고 나타났나요? 아니면 호수속의 요정인가요?
<P>[용희] 아니에요, 소녀는 사람이에요.
<P>[운호] 사람일진대 어찌 인적이 드문 마을에서 떨어진 이곳에 왔소?
<P>[용희] 호수 건너 저쪽에 집이 있어요. 그래서 달밤이면 피리소리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곤 하지요.
<P>[운호] 그럼 낭자 이름은 무엇인가요?
<P>[용희] 용희예요. 용 용자, 계집 희자의---
<P>[운호] 용희, 용희--- 부르기 운치가 있소. 용희낭자, 낭자는 무슨 연유로 달밤이면 내 앞에 신비한 모습 나타내어 내 마음 설레게 하오?
<P>[용희] 소녀 나타나는데 무슨 연유가 있겠소이까. 다만 아까 말했듯 그대 피리소리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나타나게 되는 거지요.
<P>[운호] 아, 내 피리소가가 그렇게까지 낭자를 매혹했단 말이던가요?
<P>[용희] 소슬한 바람처럼, 긴 한숨처럼 구슬프고 애틋한 그 피리소리--- 거사남은 분명코 쓸쓸하신 분. 소녀가 그 허전한 맘의 빈 자리 포근히 채워주고 위로하고파!
<P>[운호] 아, 달밝은 밤이여! 안개에 싸여 엄숙히 잠자는 땅 모든 생령이 숨을 죽이고 있는 이 고요한 밤--- 미풍에 풍겨오는 향긋한 꽃내--- 수줍은듯 이슬을 담뿍 머금고 다소곳 고개 숙인 꽃봉오리에 달빛은 향내처럼 흐르고 있네. 그 꽃봉오리처럼 화사한 모습---
<P>[페이지] 173
<P>관음보살이 내게 보내신 낭자--- 청초한 선물이오, 신비한 선물!
<P>[용희] 아니에요, 소녀는 여인일 따름. 오직 거사님께서 부는 피리를 가까이서 듣고픈 여인이에요.
<P>[운호] 아, 나 역시 낭자의 가까이에서 피리를 불고 싶소. 내 피리소리, 낭자에게 그다지 감명 줬다니 새삼 흥취가 솟아 불고 싶구려.
<P>[용희] 그 흥취를 피리에 불어 넣어서 한가락 흥겨웁게 들려 주세요.
<P>((운호거사, 피리를 부니, 용희는 황홀하게 듣는다.))
<P>[용희] 오, 언제나 들어도 황홀한 소리! 어쩌면 이렇게도 잘 부실까요?
<P>[운호] 이게 모두 관세음보살께오서 나한테 내려주신 기량이지요.
<P>[용희] 거사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관세음보살이란 이름이 자주 나오는데 그분은 누구신가요?
<P>[운호] 관세음보살이란 이름 그대로 이 세상의 소리를 듣고 보고서 딱하고도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비의 손길 뻗쳐 구원하는 분.
<P>[용희] 하지만 소녀로선 보살이라면 아직 크게 깨닫지 못하신 분을 그리 부르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부처님 되기 위해서 수도중인 부처님 다음 가는 분. 그리 알고 있는데 참말인가요?
<P>[운호] 그건 조금 틀렸소. 관음보살은 과거에 이미 깨쳐 성불하신 몸. 하지만 오직 중생 불쌍해 하는 자비심이 너무 커 관음보살로 시현(示現)했으니 그는 성불하려는 수도자가 아니라 크게 깨달은 부처님과도 같은 대보살이오.
<P>[용희] 지금 막 시현이란 말을 했는데, 그건 무슨 뜻인지 말해 주세요.
<P>[운호] 그건 보문(普門) 시현을 말하는 거요. 보문의 보(普)는 덕이 두루 갖춰진 관음보살의 덕을 말하는 거요. 그렇지만 그 덕이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대자대비의 구원하는 힘으로 활동하는게 보(普)이나 대자대비 구원의 빛이 두루두루 미치는 것을 말하오. 문(門)이란 그 구원을 받는 중생의 기류나 부문별을 말하는 거요. 따라서 보문이란 중생의 기류, 천차만별에 따라 그때 그때에 알맞게 나타남을 말하는 거요. 그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를 고루고루 받도록 서른셋으로 몸을 바꾸어 직접 나타나심을 보문시현이라고 하는 거라오.
<P>[용희] 보문시현이란 건 그런 거군요.
<P>[운호] 그렇소, 보문시현 알뜰한 이치!
<P>[페이지] 174
<P>[용희] 거사님, 아까부터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엇을 생각하나요?
<P>[운호] 아, 그것은 산삼을 어떻게 하면 씨를 뿌려 싹트게 해가지고서 보다 많이 생산해 여러사람이 그 영약의 혜택을 입게 하는가 그런 일을 골똘히 궁리했었소. 그리하여 낭자를 관음보살의 보문시현으로서 나타나시어 내게 도움 주려는 것으로 봤소.
<P>[용희] 소녀 관음보살의 보문시현이 아니라 죄송하게 되었삽군요. 하지만 묘한 궁리 튀어나와서 거사님 도울지도 모르잖아요. 소녀 한번 그 일을 생각해 보죠.
<P>[운호] 그러겠소? 낭자여, 고맙소이다. 지금까지 생각한 산삼농사의 제일로 큰 문제는 산삼씨 뿌려 썩지 않고 싹트게 하는 일이오.
<P>[용희] 그렇다면 그 동안 뿌린 씨들은 썩었다는 얘기가 되는 건가요?
<P>[운호] 그렇소. 그 동안에 뿌린 씨들은 모조리 썩어버려 싹이 안텄소.
<P>[용희] 그럼 산에서 나는 진짜 산삼은 어떻게 해서 씨가 뿌려지나요?
<P>[운호] 그건 사람이 짐짓 뿌리는 것이 아니라 산새들이 씨를 따먹고 산에다 변을 보면 똥속에 있는 씨가 땅에 묻혀서 싹이 튼다오.
<P>[용희] 그렇다면 사람이 씨를 뿌려도 산새 똥을 섞어서 자연스럽게 뿌려진 것과 같이 하면 되겠죠.
<P>[운호] 아, 희한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낭자의 그 말에서 훤히 트였소. 그렇소! 산새 똥에 조화가 있소. 산삼 씨를 새똥에 얼버무려서 새 뱃속과 똑같이 따뜻이 해서 하룻밤 지웠다가 밭에 뿌리면 싹이 터오를지도 모르겠군요. 내일이 되면 바로 해봐야겠소. 산새가 산삼씨를 쪼아먹고서 똥으로 깔겨 싹이 트게 되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거기까지는 궁리를 못하니 어이없구만. 그러니 나는 더욱 낭자의 도움 절실히 느끼겠소. 고맙소이다.
<P>[용희] 소녀 크게 배운 건 없을지언정 그만한 도움이야 줄 수 있어요. 앞으로 힘을 합쳐 산삼농사를 기어코 성공토륵 해보시지요.
<P>[운호] 그 말은 내가 할 말, 부탁드리오. 정말 낭자야말로 관음보살이 내 일을 도우려고 낭자 몸으로 보문시현으로서 오신 것 같소.
<P>[용희]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소녀는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P>[운호] 아뭏든 고마운 일 피리를 다시 불테니까 낭자는 들어주구려.
<P>((운호거사, 다시 피리를 분다. 용희, 황홀히 듣는다. 피리소리에 따라 천천히 무대 어두워진다.))
<P>---제1장 끝---
<P>[페이지] 201
<P>[장] 2장 [여름]
<P>((늦은 아침 뙤약볕이 벌써부터 내리쬐어 모든 것이 번쩍번쩍 빛닐 지경이다. 농기구를 든 심마니 A, B가 하수에서 등장하여 굴속을 들여다본다.))
<P>[A] 아직도 안깨셨군, 운호거사님.
<P>[B] 꼬박 늦잠이 들은 모양이시군.
<P>[A] 거사님의 머리는 좋은 편이야. 산삼씨를 새똥과 섞어 버무려 새 뱃속과 똑같이 뜻뜻이 해서 하룻밤 재웠가가 뿌리고 보니 용케도 싹이 트지 않았냐. 말여.
<P>[B] 산새가 산삼씨를 쪼아먹고서 하늘을 날다가는 똥으로 깔겨 산삼 싹트게 하는 그 이치쯤은 뚜렷이 알면서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 못했어, ((바보같이도 A가 B의 머리를 툭 치고, 자기 머리는 쓰다듬으며---))
<P>[A] 그러니까 말이여, 네 대가리나 어르신네 대가린 돌대가리지!
<P>[B] 아니 어른 머리를 왜 치는거야?
<P>[A] 돌대가리라 쳐도 안아플 줄로 알았는데 아픈가? 이상하구먼.
<P>[B] 예끼 싱거운 친구! 장난하지마.
<P>[A] 장난이나 해야지. 2년간이나 비 한방울 안와서 정성껏 가꾼 산삼 망치게 되어 마음 울적해.
<P>[B] 이젠 제법 컸는데 큰 야단이야. 산속서 홀로 크는 산삼보다도 사람이 가꾸는게 더 잘 크더군.
<P>[A] 삼밭에 거사님과 우리의 정성 온통 기울였으니 그럴 수 밖에.
<P>[B] 하긴 그래, 거사님 잠꼬대서도 산삼 산삼 산삼만 외친다니까.
<P>((그 때 운호거사의 비! 비! 비! 하고 외치는 소리.))
<P>[B] 이제는 잠꼬대가 비로 변했군.
<P>[페이지] 202
<P>[A] 워낙 가물어놓으니 그럴 수밖에
<P>[B] 거사님, 어서어서 일어나세요. 해가 벌써 중천에 떴읍니다요.
<P>((운호거사, 기지개를 켜며 굴속에서 나온다.))
<P>[운호] 어쩌다가 늦잠을 자고 말았군.
<P>[A] 거사님 늦잠아야 요 근래에는 다 아는 사실인데 뭘 그러세요.
<P>[운호] 요 근래엔 다 아는 사실이라니?
<P>[B] 아씨를 얻은 후란 말입니다요.
<P>[운호] 미안해. 부지런히 일어나려고 노력을 하는데도 안되는구만.
<P>[A] 일찍 일어나기엔 아씨가 너무 아름답습니다요. 어쩔 수 없죠. 여보게, 자넨 어찌 생각하는가?
<P>[B] 암, 나 역시 그렇지, 그렇다마다. 우리 아씨야말로 요조숙녀의 우아단려 본보기 그대로이지.
<P>[운호] 자네들이 그러니 더욱 미안해.
<P>[A] 아니 미안해 할 것 없읍니다요. 그보다도 가뭄이 줄곧 이어져 야단났읍니다요, 어떡허지요?
<P>[B] 애써 가꾼 산삼이 비비 꼬여서 마치 염병을 앓는 어린아이의 가는 목이 꼬이듯 됐읍니다요.
<P>[운호] 참으로 야단이야, 어떻게 한담. 자식이 죽어가는 꼴은 보아도 농작물이 가뭄에 타죽는 꼴은 못본다는 것인데, 더구나 이건 그 많은 사람들을 병으로부터 구원하고 건강을 유지시키려 재배하는 것인데 어떻게 한담!
<P>[A] 거사님,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리 오래 가뭄이 계속되는 건 도사의 심술이라 그럽디다요.
<P>[운호] 도사의 심술이란 무슨 소리야?
<P>[A] 거사님이 도사의 조카 삼녀를 얻지 않고 아씨를 얻은 탓으로 앙심먹고 심술을 부린답니다.
<P>[B] 그러니 제발 비를 오게 하려면 도사의 조카딸을 첩으로라도 맞아야 한다고들 수군댑니다.
<P>[A] 쉿! 그런 소린 아예 하지도 말게.
<P>[B] 왜 첩이면 어떤가? 그게 모두가 비내리게 하려는 고심책인데.
<P>[A] 그게 아냐, 아씨가 오고 있다네. 아씨께서 들으면 섭섭할 소리!
<P>((B, 혓바닥을 빼문다 용희, 물동이 이고 등장. 운호거사, 얼른 물동이를 받아든다.))
<P>[페이지] 203
<P>[운호] 물 길어 오는구려, 수고하였소.
<P>[용희] 워낙 날이 가무니 옹달샘에서 솟는 물도 이제는 말라붙어서 박정한 지어미가 지아비 위해 흘리는 눈물처럼 시원치 않아 한동이 물받는데 눈 빠질지경---
<P>[A] 에이구, 큰 호숫물 눈앞에 두고 옹달샘 물 긷느라 이 고생이나!
<P>[B] 그 옹달샘이란 게 마치 어린애 고추에서 나오는 오줌과 같아---
<P>[A] 여보게, 무슨 소리 지껄이는가!
<P>[B] 아씨 앞에서 그만 실언을 했군.
<P>((B는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모두 웃는다.))
<P>[운호] 저 호수의 물이야 짠 물이니까 식수로 쓸 수 없어, 그림속의 떡!
<P>[용희] 식수로 못쓴다면 농사 용수로 쓸 수 있다면 매우 좋으련마는---
<P>[운호] 그 대신 귀한 소금 생산하잖소?
<P>[용희] 그 소금의 생산이 탈이라구요---
<P>((용희, 더 말을 하려다가 소스라쳐 자기 입을 막는다.))
<P>[A] 그럼 한걸음 먼저 가겠읍니다.
<P>[B] 거사님은 아씨와 정담 나누고 뒤따라 오십시오, 기다리지요.
<P>((A, B 하수로 퇴장.))
<P>[운호] 여보, 고생을 시켜 미안하구려.
<P>[용희] 이게 고생이라면 발 벗고 나서 얼마든지 하지요. 염려 마세요.
<P>[운호] 여보, 친정에 한번 가보고 싶은 맘이 간절할텐데 가보지 그래.
<P>[용희] 아니예요, 가보고 싶지 않아요!
<P>[운호] 나와 살게 된지도 벌써 2년이 되었는데 한번쯤 가면 어떻소?
<P>[용희]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여보, 마음 쓰지 마세요. 정말이에요!
<P>[운호] 친정은 호수 건너 저쪽이라고 내게 분명 말했지, 틀림없지요?
<P>[용희] 네, 호수 건너 저쪽 틀림없어요.
<P>[운호] 다시 한번 묻겠소, 틀림없지요?
<P>[용희] 네, 여보 새삼스레 왜 그러시죠?
<P>[운호] 실은 내가 어저께 하도 궁금해 호수 건너 저쪽의 마을에 가서 수소문 해봤다오, 은밀히 홀로.
<P>[용희] 수소문 했다구요! 왜 그런 짓을?
<P>[운호] 2년이나 살면서 친정 부모께 기별을 안한 것도 송구스러워---용희, 말을 못하고 굳어진다.
<P>[페이지] 204
<P>[운호] 그랬더니 아무리 수소문해도 당신 친정 찾을 길 바이 없더군. 우리가 2년이나 코를 맞대고 살갗을 맞부비며 살아왔는데, 숨기고 감출 것이 무엇 있겠소? 도대체가 당신은 어디서 왔소? 말해 줄 수 없겠소. 당신의 친정.
<P>[용희] 여보, 제발 그것은 묻지 마세요! 내게 말 할 수 없는 사정 있어요!
<P>[운호] 하지만 내 입장도 생각하구려. 정체도 알 수 없는 아내와 함께 산다는 건 얼마나 고통이겠소?
<P>[용희] 그 심정은 충분히 일 수 있어요. 하지만 내 사정이 따분하다오. 당신을 속이려는 맘은 없어요. 부디 이 내 마음을 믿어주세요! 당신이 지금처럼 나의 사정을 모르고 지내는게 좋을 거예요. 그것이 당신 위한 길이라고만 생각되어 말하지 않는 거예요. 여보, 제발 내 말을 믿어주세요!
<P>[운호] 알겠소! 당신 말을 믿으리이다.
<P>용희, 운호거사 앞에 무릎 꿇고---
<P>[용희] 고마워요, 은혜로 여기겠어요!
<P>[운호] 은혜라니, 별안간 무슨 소리요! 당신과 나 사이에 쑥스럽구려.
<P>((운호거사, 농기구를 들고 퇴장하려 한다.))
<P>[용희] 아침밥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P>[운호] 별로 생각이 없소. 이따 당신이 산삼밭에 가져다 주면 좋겠소.
<P>[용희] 시장하실텐데요, 어쩌시려고?
<P>[운호] 날씨 탓에 도무지 입맛이 없소.
<P>((운호거사, 하수로 퇴장. 용희, 수심스럽게 앉아 있다. 햇빛이 너무나 밝기 때문에 도리어 비현실감을 준다. 소금장수로 변장한 용건, 상수에서 등장하여 둘레를 살핀다.))
<P>[용건] 아씨, 소금 사세요, 싸게 팔겠소.
<P>[용희] 소금은 많답니다. 소용 없어요. 금년은 가물어서 소금 잘 되어 남아서 돌아가는 형편인 걸요.
<P>((용희, 표주박으로 물을 떠주며---))
<P>[용희] 물이나 드시지요, 몹시 더운데.
<P>[용건] 용희야 잘 있었니? 나 용건이다.
<P>[용희] 어머나, 오라버니! 웬일이세요?
<P>[페이지] 205
<P>[용건] 오래간만이로군, 2년만인가?
<P>[용희] 정말 면목 없어요, 용서하세요.
<P>[용건] 나야 괜치 않다만 아버님께서 노여움 이만저만 아니지 뭐니.
<P>[용희] 무리도 아니시죠, 아버님 품안 떠나 2년인데도 무소식이니.
<P>[용건] 그보다 왜 네 소임 다하지 않지?
<P>[용희] 그이가 너무너무 착한 분이라---
<P>[용건] 그이라 부르게쯤 벌써 되었니?
<P>[용희] 네, 그렇게 됐어요. 용서하세요.
<P>[용건] 그래서 네 소임을 잊은거로군. 소금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게 네가 맡은 소임이 아니었더냐?
<P>[용희] 그랬지요. 하지만 방해할 필요 하나도 없는 것을 깨달았어요.
<P>[용건] 그게 무슨 소리냐! 너는 잊었니? 호숫물이 소금기 품고 있는 건 이 우리 호수만의 특징 아니냐. 그런데 네 <그이> 는 호숫물에서 자꾸만 소금기를 뽑아내잖니? 이대로 가다가는 이 호숫물이 소금기 하나 없는 맥빠진 호수, 머지 않아 되고야 말지 않겠니?
<P>[용희] 그것이 아니에요, 오해이세요. 요 근처의 산에는 염암이라는 소금으로 된 바의 있기도 하고, 소금기를 꽤 많이 머금고 있어 비오면 그 소금기 흘러들어서 제아무리 소금을 만든다 해도 소금기 줄어들지 않을 거예요.
<P>[용건] 이건<그이>한테서 들은 얘기지?
<P>[용희] 하지만 틀림 없는 사실인 걸요.
<P>[용건] 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용왕이신 아버님께선 그리 생각하시지 않으시거든. 원래 용이란 것은 바닷물처럼 짠 물에서만 살게 마련이거든. 지금도 아버님이 이 호수에서 사실 수 있는 것은 물이 짜서지. 그래 성화이신데 별 도리 있니.
<P>[용희] 그럴수록 열심히 설득을 해서 아버님께 납득을 시켜야지요.
<P>[용건] 그게 어디 쉽더냐, 아버님 고집 너도 알고 있잖니? 골치 아프다.
<P>[용희] 하기야 그 고집은 당할 수 없죠.
<P>[용건] 그래 인간 세상이 행복하더냐?
<P>[용희] 그야 용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인간 세상의 행복 따로 있지요.
<P>[용건] 이런 바위굴에서 사는 재미냐?
<P>[용희] 비록 어둡고 습한 굴속이지만 금 은과 주옥으로 아로새겨진 찬란한 용궁과도 안바꿀테요!
<P>[용건] 참, 괴이한 일이군. 용궁에서도 용왕의 외동딸로 금지옥지로 고이 자란 네 어찌 이런 곳에서 행복을 찾았다니 알 수 없는 일.
<P>[페이지] 206
<P>[용희] 여기에는 사랑이 깃들고 있죠. 그 사랑의 힘으로 누추한 이곳 용궁의 누각보다 나를 끌지요.
<P>[용건] 용궁에도 사랑은 있었을텐데? 아버님, 어머님의 사랑말이야.
<P>[용희]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요. 용궁의 격식이며, 법도였어요.
<P>[용건] 그 격식과 법도가 자못 문제다. 넌 격식과 법도를 무시한 거야. 그래서 아버님은 격노하셨지.
<P>[용희] 아버님도 여전히 완고하시긴---
<P>[용건] 갈테냐, 안갈테냐 대답해 다오.
<P>[용희] 나는 안가겠어요! 아니 그보다 나는 못가겠어요! 그리 아세요.
<P>[용건] 너 대단한 결심을 한 모양이군.
<P>[용희] 내가 가면 그이는 어떡하지요? 그이 사는 보람은 나의 사랑과 산삼밭을 가꾸는 일뿐인데요.
<P>[용건] 안됐지만 산삼은 못가꾸게 돼! 산삼도 비가 와야 가꿀게 아냐.
<P>[용희] 그러면 이 가뭄은 아버님께서?
<P>[용건] 이 일대의 비 모두 아버님께서 관장하고 계신 걸 잊었었더냐?
<P>[용희] 설만들 아버님이 그럴 줄이야!
<P>[용건] 아버님의 말씀은 도리어 네가 설만들 그럴 줄을 모르셨단다.
<P>[용희] 비 안내려 그이의 고통 심한데.
<P>[용건] 고통은 아버님도 마찬가지다.
<P>[용희] 오라버님, 내 소원 들어주세요. 아버님께 부탁해 비 내리도록 해주세요, 네! 제발 소원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이 누이 동생의 오직 한번의 평생 소원이에요! 오라버님, 비 내려 다 죽어가는 산삼을 살아나게 해주세요, 네! 그이도 죽어가요, 산삼 때문에! 그러니까 산삼을 살려내는 게 그이를 살려내는 방법이에요!
<P>[용건] 비를 내리게 하는 오직 한 방법 그건 네가 용궁에 돌아가는 것!
<P>[용희] 그 일은 나로서는 할 수 없어요. 그이를 떠날 수는 없으니까요.
<P>[용건] 그럼 하는 수 없지, 비는 안내려! 산삼은 말라 죽고 너의 <그이>도 따라서 말라 죽게 되고 말겠지.
<P>((용희, 몹시 고민한다. 용건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P>[용건] 만약 네가 당장에 돌아가기가 망설여진다며는 맹세만 해라. 꼭 돌아오겠다는 맹세만 하면 내 가서 아버님께 말씀 여쭈어 우선 비 내리도록 주선해 주마.
<P>[용희] 오라버님, 주선해 주시겠어요!
<P>[페이지] 207
<P>[용건] 맹세하마. 내 어찌 너를 속이랴. 하지만 너도 역시 잊지 말아라. 꼭 돌아오겠다는 맹세 지킬 일! 만약에 잊어먹고 안지킬 경우, 알겠지? 그 다음은 말을 안해도---
<P>[용희] 나를 죽게 하겠죠. 뻔한 일이지.
<P>[용건] 아니다. 아버님은 네가 아니고 분명 너의<그이>을 죽게 할 거다.
<P>[용희] 내 사랑의 그이를 죽게 하다니!
<P>[용건] 그러는 게 네 맘에 주는 타격이 클 것이 아니더냐, 그리고 또한 아버님이 보실 때 너의<그이>는 너를 피리소리로 유혹을 해서 소임을 잊게 만든 몹쓸 놈이지.
<P>[용희] 그이를, 몹쓸놈은 당치않아요! 오라버니 말씀이 너무하군요! 용희, 느껴운다
<P>[용건] 우지마라, 우는 건 지긋지긋해. 어머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P>[용희] 어머님이 우세요, 이 딸 때문에?
<P>[용건] 음, 어머님은 네가 돌아오잖아 눈물로써 세월을 보내신단다.
<P>[용희] 어머님이 나 때문에 오, 어머님이---
<P>용희, 더욱 느껴운다.
<P>[용건] 제발 우지 말아라. 지긋지긋해. 우는 건 어머니로 충분하대도! 어떠냐, 돌아올 걸 맹세하겠니?
<P>((용희, 울기만 한다. 용건, 측은히 지켜보다가---))
<P>[용건] 돌아오겠단 맹세 하겠냐니까?
<P>[용희] 비가 내긴 후에야 돌아가지요.
<P>[용건] 비내리게 하는 건 내게 맡겨라. 틀림없이 내리게 하고 밀테니.
<P>[용희] 오직 오라버님만 믿을테예요.
<P>[용건] 걱정마라, 그 대신 비 내린 후엔 일각의 지체 없이 돌아와야 해,
<P>[용희] 네, 비만 내리면 곧 돌아가지요.
<P>[용건] 맹세를 안지키면 너의 <그이>가 죽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P>[용희] 네, 잊지 않겠어요, 염려마세요.
<P>[용건] 그럼 나는 가겠다, 몸조심해라.
<P>((용건이 나가려고 하자---))
<P>[용희] 오라버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P>((용건이 되돌아온며---))
<P>[페이지] 208
<P>[용건] 왜 그러니, 무슨 말 또 남았느냐?
<P>[용희] 아니예요, 아녜요! 어서 가세요!
<P>((용건이 다시 나가려고 하자, 용희가 쫓아가 붙들고---))
<P>[용희] 오라버님, 맹세를 취소할테요! 아무래도 그이와 작별하고는 난 한시도 살 수가 없을 거예요! 산삼이 타 죽으면 타 죽을망정 난 그이와 작별을 할 수 없어요!용희 쓰러져 운다. 용건, 측은히 안아 일으키며---
<P>[용건] 용희야, 그럼 나는 그냥 가겠다. 하지만 네가 만약 맘이 변해서 맹세를 지키려는 결심이 서면 저 용궁쪽을 향해 네번 절하렴. 곧 비를 내리도록 마련해 주마.
<P>[용희]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P>[용건] 만약의 경우 위해 하는 말이다. 용희야, 그럼 부디 행복하여라.
<P>[용희] 오라버니, 안녕히 돌아가세요.
<P>((용건, 호수쪽으로 퇴장. 이윽고 그 반대쪽에서 운호거사와 삼녀가 등장.))
<P>[삼녀] 거사님, 두 눈으로 똑똑히 봐요. 아씨는 지금 분명 울고 있지요.
<P>[운호] 분명히 울고 있어, 내 눈앞에서.
<P>[삼녀] 그야 내 먼빛으로 보긴 했지만, 아씨는 분명 어느 외간 남자를 붙안고 울고불고 했거들랑요. 그 끔찍한 현장을 거사님한테 직접 보여주려고 달려갔지만 아뿔사, 한발짝이 늦었구먼요. 그 남자는 자취를 감춘 후예요.
<P>[운호] 그 남자는 누구며, 무엇하려고 여기 왔으며, 지금 어디 숨었소?용희, 대답을 안한다.
<P>[운호] 왜 도무지 대답을 안하는 거요?
<P>[삼녀]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죠. 입이 열개라 해도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한 사실은 말 못하겠죠.
<P>[운호] 어서 말해 보구려, 답답하구만.
<P>[삼녀] 입이 열개라 해도 말 못한대도!
<P>[운호] 당신은 애초부터 수상쩍었소. 내가 안타깝게도 당신 내력을 알고 싶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미소만 볼에 띠우고 요리조리 내 말을 회피하면서 도리어 궁금증만 더하게 했소.
<P>[페이지] 209
<P>하지만 이제는 더 참을 수 없소. 두눈으로 당신의 이런 모습을 똑똑히 보았으니 어쩔 수 없소.
<P>((운호거사, 용희의 멱살을 잡아 사납게 흔들며---))
<P>[운호] 그 남자가 누구며, 무엇하려고 여기 왔으며, 지금 어디 숨었소? 이래도 끝내 대답 안 할 것이오! 내 미쳐 날뛰는 꼴 봐야 하겠소! 겉으로는 여보살 같으면서도 속은 야차와 같은 음탕한 계집!
<P>((운호거사, 용희를 확! 밀어부치자 그녀는 격정적으로 느껴운다. 운호거사, 조용히 다가가서 한 무릎 꿇고---))
<P>[운호] 여보, 우지 말아요. 내 잘못했소. 비가 안오는데다 너무 뜨거워 내 머리가 갑자기 돌았나 보오. 여보, 내 잘못했소, 용서하구려.
<P>((운호거사, 더욱 느껴우는 용희를 안아 일으키며---))
<P>[운호] 손찌검을 하다니 내가 미쳤지. 여보, 하기야 이리 뜨겁다 보니 미칠법도 하잖소? 용서하구려. 자, 눈물을 닦아요, 얼굴을 펴요.
<P>((용희, 운호거사가 눈물을 닦아주자, 와락 그 품에 안기며---))
<P>[용희] 여보! 난 사랑해요, 오직 당신만---
<P>[움호] 여보, 우리가 이리 다투게 된건 처음인 것 같구만, 그렇지 않소?
<P>((용희, 울음을 삼키며 끄덕인다.))
<P>[운호] 우리 다툰 오늘을 잊지 맙시다. 처음 다툰 날로서 기억합시다.
<P>[운호] 여보, 그렇게 해요, 당신 뜻대로.
<P>[운호] 사랑하오, 사랑해. 이젠 당신의 내력을 알려고도 하지 않겠소! 오직 내 사랑하면 되는 것이지 내력을 알아내서 무엇하겠소!
<P>[용희] 오늘의 그 남자는 당신 생각의 그런 분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착찹한 사연으로 말 못할 따름--- 그런 분이 아니니까. 믿어주세요!
<P>[운호] 난 당신만 믿겠소. 비록 이 맘이 배신당하는 일이 있을 지라도. 난 진실로 당신을 누구보다도 이 세상 뒷보다도 사랑하니까.
<P>[용희] 고마워요, 고마워, 믿어주시니.
<P>((삼녀, 붉으락 푸르락 하며---))
<P>[삼녀] 야! 이건 정 눈뜨고 볼 수 없구나. 내 꾀에 떨어질 줄 알았더니만 더 찰싹 달라붙어 안떨어지네. 에이, 울화 치밀어 살 수가 있나!
<P>[페이지] 210
<P>((삼녀, 하수로 퇴장하려다가 마침 등장하는 도사와 마주쳐 중지한다.))
<P>[삼녀] 마침 잘 오셨군요. 어서 오세요.
<P>[강일] 운호거사, 이제는 동곳 빼시오. 호숫물 가두어서 소금 만들고, 산삼씨 밭에 뿌려 가꾸는 따위 째째한 일로 중생 제도하다니 가소롭기 짝없소, 집어 치워요.
<P>[운호] 거창하게 중생을 제도한다는 그런 명분보다도 그들 생활에 두루두루 도움이 되려는 거요. 그게 관음보살의 정신이기에.
<P>[강일] 그까짓 일이 무슨 도움 되겠소. 난 애초부터 그런 시덥지 않은 껄렁한 생각일랑 하지 않았소. 보다 크고 강력한 금강불괴의 힘 얻어 나의 제도 하려 했었소. 중생 제도하는 건 내 뜻 아니오. 그래 운호거사는 반대를 하고 내 밑을 떠나가서 이 짓 했었소.
<P>[운호] 난 도사 맡 떠난 걸 아직 한번도 후회한 일 없는 걸 알아주시오.
<P>[강일] 그렇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 후회하게 되었소. 그것도 몹시!
<P>[운호] 무슨 대단한 일이 생겼단 거요?
<P>[강일] 대단하지, 대단해! 나는 드이어 금강불괴의 큰 힘 얻게 되었소. 따라서 신통력도 얻은 바 되어 이제는 천지간의 기상까지도 맘대로 주무르게 됐단 말이오.
<P>[운호] 우리 인간 힘에는 한계가 있소. 그래 관음보살께 귀의하지요. 공연스레 망상에 사로잡혀서 오만과 방자한 맘 돋우지 마오.
<P>[강일] 거사나 방자하게 말하지 마오! 난 지금껏 혼자서 실험해왔소. 그게 오늘 여실히 증명된 거요.
<P>[운호]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 마시오.
<P>[강일] 잠꼬대 아니라서 미안하오만, 난 금년 초에 몰래 실험하기를 천지간의 기운을 한 몸에 모아 열심히 기도드린 적이 있었소. 칠월말까지 비가 단 한방울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게 말이오. 그런데 오늘이 곧 칠월 말이오. 그러니 천지간의 기상조차도 좌지우지 맘대로 하게 된 거요.
<P>[용희] 그건 거짓말예요! 거짓말예요!
<P>[강일] 뭐, 거짓말이라고! 무슨 소리야?
<P>[용희] 비가 안오는 것은 딴 연유예요. 도사님의 신통력 탓이 아니오. 분명히 그 연유는 딴 데 있어요.
<P>[강일] 그럼 그 딴 연유를 대보지 그래.
<P>[용희] 연유는 사정 있어 댈 수 없어요. 하지만 내 이 말은 정말이에요.
<P>[강일] 연유 댈 수 없다며 정말이라니! 속임수에 넘어갈 내가 아니야!
<P>[페이지] 211
<P>[용희] 속임수가 아니라 정말이예요! 아뭏든 도사님의 신통력으로 비 안온 것 아니요, 결코 아니요!
<P>[강일] 지아비의 패비를 감싸 주려는 계집의 갸륵한 맘 높이 사주어 함부로 내뱉은 말 용서하리라.
<P>[용희] 도사님이 용서를 하든, 안하든 신통력이 아닌 건 정말이에요!
<P>[강일] 그렇다면 연유를 대보라니까.
<P>[용희] 연유는, 그 연유는--- 말 할 수 없소.
<P>[강일] 그 무슨 얼어죽을 여유 있겠나. 운호거사, 잠자코 동곳 빼시지.
<P>[운호] 그럼 동곳 뺄테니 그 대신으로 비가 오게 해줘요. 이대로 가면 산삼밭은 쑥대밭으로 되고 말거요.
<P>[강일] 그건 무엇보다도 내 바라는 일! 내 뭣이 아쉬워서 비오게 할까.
<P>[삼녀] 신통력이 비오게 할 수 있다면 큰아버님, 비오게 해 보이세요. 이 남녀에게 본떼를 보여 주세요. 콧구멍 뻥 뚤리게 하여 주세요.
<P>[강일] 나는 그런 짓으로 금강불괴의 신통력에 먹칠을 하고 싶잖아.
<P>[삼녀] 그게 왜 먹칠하는 일이신가요? 도리어 빛내는 일 아니신가요?
<P>[운호] 가뭄 물리치는 건 중생 돕는 일, 신통력을 제대로 쓰는 일이오!
<P>[용희] 가뭄은 내가 지금 당장이라도 물리칠 수 있어요. 믿어 주세요.
<P>[강일] 당치도 않은 소리! 금강불괴의 신통력에 대해서 모독하는군!
<P>[용희] 함부로 굴지 말고 입다무세요!
<P>((강일도사, 용희의 위엄에 눌려 머쓱해진다.))
<P>[용희] 여보,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내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어요.
<P>[운호] 내가 비를 얼마나 바라는가는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소?
<P>[용희] 하지만 내가 비를 내리게 하면 당신과 헤어져야 하는 거예요.
<P>[운호] 아니 왜 헤어져야 한단 말이오?
<P>[용희] 그 연유는 말할 수 없단 말예요.
<P>[운호] 아, 여보! 왜 말할 수 없단 말이오?
<P>[용희] 그건 묻지 마세요, 대답 못해요.
<P>[강일] 연유 대기를 몹시 싫어하는군.
<P>[운호] 내게 못댈 연유가 뭐란 말이오?
<P>[용희] 더 캐묻지 마세요. 난 괴로워요.
<P>[강일] 교활스런 잔꾀로 지아비마자 농락하려 드는군, 간교한 계집!
<P>[용희] 닥치지 못하겠소, 방자한 그 입!
<P>[강일] 뉘 입이 방자한지 모르겠구만.
<P>[용희] 오, 나와 헤어져도 좋으시다면 당장에 비내리게 할 수 있어요.
<P>[페이지] 212
<P>((운호거사의 무거운 침묵---))
<P>[용희] 어서 대답하세요, 안타까워요.
<P>[강일] 대답이 없는 것은 승락 뜻하지.
<P>[용희] 당신도 그런가요, 도사 말처럼?
<P>[강일] 그래도 더 묻는 건 잔소리렸다.
<P>[용희] 여보, 제발 제발 대답하세요!
<P>((운호거사, 여전히 무거운 침묵! 용희, 크게 실망하며---))
<P>[용희] 당신은 나보다도 비였었군요. 그럼 당신 원대로 비를 내리게 해드리죠, 이별을 각오하구요.
<P>[강일] 어서 비가 오게 해 보여주실까.
<P>[운호] 여보, 비오는 즉시 헤어져야만 한다면 내 생각할 여유를 주오.
<P>[용희] 오, 비보다 나군요! 오, 고마워요! 당신이 나보다도 비 원할 리가 있을 수 있겠어요.
<P>그럼 그렇지!
<P>((심마니 A, B가 하수에서 등장.))
<P>[A] 거사님, 우린 서로 상의한 끝에 결정했읍니다요, 그만 두기로
<P>[B] 오늘 내일 사이에 비가 안오면 다 끝장입니다요, 하는 수 없죠.
<P>[A] 아무리 거사님의 일이지만도 이 이상 더 도울 수 없읍니다요.
<P>[B] 처자식하구 먹고 살아야 하니 별 수 없읍니다요, 용서하십쇼.
<P>[운호] 아, 당신이 정말로 비내릴 수만 있다면 내리도록 하여주구려.
<P>[용희] 나하고 헤어저도 괜찮으세요?
<P>[운호] 그야 나도 당신과 헤어지는 건 뼈마디가 저리는 고통이겠지. 하지만 우리 사랑 희생을 해서 중생에게 큰 도움 줄 수 있다면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한 보람 있는 게 아니겠소? 생각해 보오.
<P>((용희의 무거운 침묵!))
<P>[운호] 우리 두 눈 딱 감고 작별합시다.
<P>[용희] 알았어요. 당신의 이타진실(利他眞實)을.
<P>((용희,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상수를 향해 엄숙히 4배(四排)한다. 그러자 먹구름이 뒤덮이고 비가 내려 퍼붓는다. 번개! 천둥소리!))
<P>[운호] 아, 먹구름이 인다, 뭉쳐 솟을듯, 흩어져 내릴듯이 먹구름 인다.
<P>[페이지] 213
<P>태양을 소두리째 삼켰나보다! 번쩍! 얼마나 날쌘 칼부림이랴! 우르릉 땅! 우르릉--- 하늘이 마구 금이 가는가보다, 우르릉 땅땅! 호숫물이 성난듯 용솟음친다. 미친듯이 춤춘다. 숲속의 나무--- 아, 악, 비! 비! 비! 비! 비! 비가 내린다.
<P>((A. B는 손을 맞잡고 껑충껑충 뛰며 춤춘다. 강일도사는 기절초풍하고, 삼녀는 그를 부축한다. 이 광경이 잠시 계속된 후에---))
<P>[용희] 여보, 이젠 이별을 할 차례예요.
<P>[운호] 여보, 가지 말아요, 가지 말아요!
<P>[용희] 가야 해요, 만약에 내가 안가면---
<P>[운호] 안가면--- 어찌되오? 말하여 주오.
<P>[용희] 오, 말할 수 없어요! 나는 당신과 헤어진다 하여도 우리 행복을 영원히 잊을 수는 없을 거예요. 안녕히 계십시오, 행복하세요.
<P>[운호] 나도 함께 가겠소! 같이 갑시다!
<P>[용희] 내 뒤를 쫓아오면 큰일이에요. 죽음이 닥쳐와요. 오지 마세요!
<P>[운호] 나는 쫓아가겠소! 죽어도 좋소!
<P>((운호거사가 한사코 쫓아가려는 것을 A·B가 두 팔을 저마다 붙들어 말린다. 운호거사, 몸부림치며---))
<P>[운호] 여보, 여보, 여보오! 나도 가겠소!
<P>((삼녀, 운호거사의 앞을 막고 서며---))
<P>[삼녀] 오, 거사님 안돼요! 진정하세요!
<P>[운호] 아, 비켜라, 비켜라! 나도 가겠다!
<P>((무대가 급히 어두워진다.))
<P>[장] 3장 가을
<P>((처량한 밤새 소리와 더불어 무대 밝아지면---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고, 땅에는 밤 안개가 자욱히 서려 있다. 암굴 속에 광솔 불이 켜져 있어, 암굴 측면에 장치된 엷은 사를 통해서 내부가 훤히 보인다. 운호거사, 머리를 암굴 입구께에 두고 피리를 두 손으로 꼭 끌어안은 채 열병으로 신음하고 있다.
<P>[페이지] 214
<P>암굴 구석에 강일도사의 황영이 나타난다.))
<P>[강일] 운호거사, 꼴 좋소, 가관이구려! 중생의 도움이 될 일하겠다고 거들먹거리더니 일개 하찮은 계집이 떠났대서 이게 무슨 꼴! 명색이 수도자가 되어 가지고 이게 무슨 추태요, 부끄럽잖소! 그 계집은 마물요, 요괴란 말요. 마물이나 요괴가 만일 아니면 어떻게 감히 비를 내리게 할 수 있겠소? 그러니까 나로 말하면 그 계집에게 패배 한 게 아니오! 내 힘으로 얻어진 금강불괴의 신통력은 그 따위 마물 요괴와 겨루기를 바라지 않을 뿐이오! 그 계집이 거사 곁 안떠났다면 필경 잡아먹히고 말았을 거요. 마물, 요괴는 사람 잡아먹기를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게 하지. 거사는 나 때문에 그나마 목숨 붙이고 있는 줄을 알아야 하오!강일도사, 마구 웃어댄다. 그러자 운호거사는 신음하듯---
<P>[운호] 아니야, 아냐, 아냐! 나의 용희는 마물, 요괴가 아냐! 허튼 수작마!
<P>[강일] 무엇이 아니라고! 운호거사는 아직도 그 계집의 저주에 얽혀 못벗어나고 있군, 어리석은 자! 아집으로 눈 먼 자, 내가 제정신들도록 해주겠다, 내 주문으로.
<P>강일도사, 결장(結掌)을 하고, 주문을 응얼거린다 그 주문에 따라 운호거사의 신음소리는 차츰 커진다.
<P>[강일] 거사를 괴롭히는 마물, 요괴여! 당장에 물러가라, 물러가라, 갈(喝)!!
<P>[운호] 도사여, 당신이나 물러가시오!
<P>((강일도사의 환영이 사라진다.))
<P>[운호] 내 사랑 용희, 용희! 아, 용희, 용희!
<P>((화려한 용궁의 왕녀 옷차림을 한 용희 환영이 나타난다.))
<P>[용희] 여보, 운호거사님! 나 여讶어요.
<P>[운호] 아, 아, 당신이구려! 정말 당신이---
<P>[용희] 난 용궁의 용왕님 딸이었어요.
<P>[운호] 나 역시 벌써부터 알고 있었소.
<P>[용희] 당신은 진정 나를 사랑했군요. 내가 당신의 곁을 떠나자마자 열병 걸린 것처럼 신음하면서 나를 몹시 그리워하는 걸 보면.
<P>[페이지] 215
<P>[운호] 아니 나는 실제로 열병 걸렸소.
<P>[용희] 아이, 딱해라, 딱해. 이를 어쩌나! 하지만 잠시간만 참아 주세요. 내가 당신 데리러 갈 테니까요.
<P>[운호] 아니. 나를 데리러 와주겠다고?
<P>[용희] 네, 정말 가겠으니 그때까지만 나를 그리워하며 기다리세요. 아버님의 허럭을 받아야 하니.
<P>[운호] 용왕인 아버님이 허락하실까?
<P>[용희] 허락하실거예요. 틀림 없어요. 나한테 아버님이 그러시는데 당신과 나 사이엔 전세(前世)로 부터 인연이 있었대요. 깊은 인연이.
<P>[운호] 전세로부터 인연 있었답니까?
<P>[용희] 그렇대요, 전세에 당신과 나는 사랑하는 연인의 사이였대요 그런데 도중에서 내 맘 변하여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대나요. 내가 그땐 당신을 몹시 괴롭힌 바람둥이였대요. 굉장했대요.
<P>[운호] 아, 바람둥이라니 당치도 않소!
<P>[용희] 아뭏든 그랬대요. 그래 당신이 비관하고 도마산 꼭대기까지 한사코 올라가서 아찔아찔한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져서 젊은 목숨 아깝게 끊었대나요.
<P>[운호] 아, 도마산 하고는 전세로부터 인연 있었군 그래, 깊은 인연이.
<P>[용희] 아마, 그런가 봐요. 그래서 나도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서 당신의 뒤를 따라 이 호수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대나요.
<P>[운호] 저런! 애틋한 얘기 그게 정말요
<P>[용희] 나도 아버님한테 들은 얘기나, 틀림없을 거예요. 아버님께선 용왕이신데 설마 꾸몄겠어요.
<P>[운호] 그렇겠지, 설만들 꾸몄을라구.
<P>[용희] 그래 옥황상제가 우리 두 사람 불쌍히 여기시고 마음쓰셔서 당신은 도마산을 찾는 수도자, 난 용궁의 왕녀로 각각 환생을 시켰다는 거예요. 그럴싸 하죠?
<P>[운호] 참으로 그럴싸한 인연이로군. 그게 윤회(輪廻)란 거요, 불법(佛法)에 있소.
<P>[용희] 나도 알고 있어요. 당신한테서 그전에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P>[운호] 그랬던가요? 나는 깜빡 잊었소.
<P>[용희] 그러니 당신과 난 천생연분의 한쌍이란 말예요, 누가 뭐래도. 그런데 아버님이 반대하실 리 있을 수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P>[운호] 그랬으면 좋겠소. 관음보살께 기원드리고 싶은 내 심정이오.
<P>[용희] 그러니까 그 일은 걱정 마세요. 그보다 내가 있는 용궁 궁전이
<P>[페이지] 216
<P>얼마나 화려한지 아시는가요?
<P>[운호] 가보지 못했는데 알 리가 있소.
<P>[용희] 그럼 내 얘기할께 잘 들으세요. 궁전을 삥 둘러싼 일곱겹 난간, 거기엔 황금 백은 유리 수정의 네 보배로서 만든 여러 방울이 꼭 복숭아 나무에 주렁주렁히 복숭아가 달리듯 달려 있어요.그 일곱겹 난간의 울 안쪽에는 칠보의 못 있는데, 그 못속에는 8공덕(八功德)물이 철철 넘쳐 있어요.
<P>[운호] 팔공덕의 물이란 무엇이지요?
<P>[용희] 달고 차고 가볍고 부드러웁고 깨끗하고 냄새가 없을 뿐더러 또한 마실 때 목에 걸리지 않고, 마시고 나서 배가 아프지 않는 여덟가지 공덕을 갖춘 물예요. 게다가 못바닥엔 황금의 모래. 못가에는 칠보로 아로새겨진 눈부시게 화려한 여러 누각이 쭈쩍쭈쩍 하늘로 솟아 있어요. 그리고 못속에는 큼직한 연꽃만발하고 있는데, 푸른 색에는 푸른 빛, 노랑색엔 노랑빛으로, 붉은 색엔 붉은 빛, 흰 색엔 흰 빛, 5색(五色)으로 빛나고 있는거예요.
<P>[운호] 아, 화사한 오색의 연꽃 선하네!
<P>[용희] 늘 맑은 하늘에선 하루 여섯 번 하얀 만다라 꽃이 비오듯 내러 그 꽃이 황금으로 이룩된 땅에 쌓인 광경은 휘황 찬란하지요. 더군다나 이 꽃은 향기가 짙어 꽃 향내 온 누리에 그윽하지요.
<P>[운호] 아, 아, 향기로운 꽃! 흰 만다라 꽃!
<P>[용희] 어둠이 없는데다 오직 광명만! 그러니 밤이 없는 셈이거든요, 다만 연꽃이 활짝 벌어지며는 낮이 되고, 연꽃이 닫히면 그냥 밤이 된 것이라고 여길 뿐이죠. 그리고 산들바람 불어오며는 일곱겹 난간이나 칠보 나무에 달린 보배 방울이 오묘히 울려 수천개의 악기를 마치 동시에 연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돼요.
<P>[운호] 아, 마치 극락처럼 찬란하구만!
<P>[용희] 맞았어요! 꼭 극락 그대로예요.
<P>삼녀가 흰 국화를 한 아름 안고 하수에서 등장, 굴속으로 들어가 운호거사를 흔들며---
<P>[삼녀] 여보, 여보 거사님 일어나세요.
<P>((운호거사, 잠을 깬다. 그러자 용희의 환영이 사라진다.))
<P>[삼녀] 또 즐거운 꿈을 꾼 모양이군요. 오, 나하고 즐기는 꿈이었나요?
<P>[페이지] 217
<P>나는 투기심 많은 여인이에요! 다른 여인하고의 꿈을 꾼다면 난 죽이고 싶도록 미워할테요.
<P>삼녀, 굴의 입구 쪽에 앉아 운호거사의 머리를 자기 무릎에 올려 놓고---
<P>[용희] 이 국화꽃 향기를 맡아 보세요. 얼마나 짙은 향기 내뿜고 있나운호거사는 성가신듯 자는 척한다. 달빛이 입구를 통해 그 얼굴에 비친다.
<P>[삼녀] 꽃향기에 취해서 살며시 잠이 오는 모양이군요, 자면 안 돼요. 오, 우리의 즐거운 밤이 왔어요. 푸른 신비한 빛이 당신 가슴엔 비치지가 않나요? 왜 말이 없죠? 보세요, 달은 은빛 쟁반과 같이 중천에 걸려 있고, 밤의 안개는 마치 내 목 둘레에 목걸이처럼 고즈넉히 감돌며 흐르는군요. 오, 내 가슴은 마치 저 호수 위에 떠도는 한송이의 파란 꽃처럼 쓸쓸한 심정으로 숨쉬고 있죠. 구슬피 물결치고 있는 거예요. 여보, 잠들었군요. 깨어 나세요.
<P>((운호거사는 여전히 자는 척한다.))
<P>[삼녀] 내 몸이 밤이슬로 함뿍 젖었죠. 하지만 내 가슴은 긴긴 탄식의 뜨거운 입김으로 가득 찼어요. 그런 나를 버리고 어디로 훌쩍 가버리려는 거죠? 가지 말아요! 제발 안가겠다고 맹세해 줘요. 난 당신 곁을 떠나 살 수 없어요. 난 당신 가슴에서 들리는 피의 고동소리에 귀를 대고 싶어요. 오, 슬픈 사랑이죠, 쓸쓸한 사랑--- 이 불타는 가슴의 괴로운 심정--- 어떡하면 좋을까? 이 텅 빈 맘의 쓸쓸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나 혼자만의 고뇌로움을 가슴 깊이 지니고 있는 거예요. 내 가슴속에 훨훨 타오르던 불! 어느덧 꺼지고서 이제는 꽁꽁 얼어붙어 가는군--- 오, 이 싸늘함! 당신의 그 따뜻한 순결의 눈물, 내 얼굴에 살며시 뿌려 주세요. 이 흰 국화꽃으로 텅 빈 가슴을 장식하여 주세요. 당신 마음은 그윽한 수풀 속을 흐르고 있는 마치 여울물처럼 깨끗하군요. 그게 내겐 산뜻한 매력이지요. 입구에서 스며든 푸른 달빛은 당신의 얼굴에다 삶의 신비를 속삭이고 있어요. 신비로워요! 오, 나는 당신과의 뜨거운 사랑 은근하게 꿈꾸고 있는 거예요.
<P>((운호거사, 어느덧 잠들어 잠꼬대를 한다.))
<P>[운호] 아, 용희, 용희, 용희! 돌아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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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삼녀] 또 용희를 꿈꾸는 모양이로군!
<P>((삼녀, 국화를 내동댕이쳤다가 짐짓 미소를 띄우고---))
<P>[삼녀] 이 어스름 달밤의 엷은 어둠이 우리 둘레를 둘러 싸고 있어요. 난 그 엷은 어둠의 밑바닥에서 당신의 그 입술에 나의 입술을 대고 있는 거예요, 입마춤이죠.
<P>((삼녀, 오랜 키스를 하고 나서---))
<P>[삼녀] 오, 술에 취한듯한 이 감미로움---
<P>((삼녀, 긴 머리를 빗질하며---))
<P>[삼녀] 삼단 같은 머리는 당신과 나의 얼굴을 꿈결처럼 어루만져요.
<P>((삼녀, 또 키스하며--- ))
<P>[삼녀] 으슥한 골짜기의 수풀 속에 핀 꽃처럼 내 마음을 이끌어 가는 당신의 입술 속에 나의 입술이 달콤히 녹아들고 있는 거예요.
<P>((삼녀의 정역적인 키스에 운호거사는 눈을 뜨고---))
<P>[운호] 아, 시들은 꽃에서 풍기는 듯한 쉰 냄새의 말들을 집어치라구! 아, 난 얼마나 길고 그리운 꿈을 가슴 설레며 꾸고 있었던 걸까!
<P>((삼녀, 운호거사를 껴안고---))
<P>[삼녀] 당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나와 더불어 꿈을 꾸어야 해요. 내 품에서 절대로 못도망쳐요!
<P>((운호거사, 절망적인 몸부림!))
<P>[삼녀] 또 그여자 그리는 모양이군요. 그렇게 차가운 당신 가슴 속 사랑의 따스함이 저녁놀처럼 그 여자로 인해서 살아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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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운호거사, 삼녀 팔로부터 몸을 빼내며---))
<P>[운호] 나는 용희 곁으로 찾아 갈테다!
<P>[삼녀] 당신은 나한테서 도망칠테요!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쳐 봐요. 난 이제 당신 맘을 안쫓겠어요. 하지만 당신 몸은, 당신 입술은 결코 도망을 치지 못할 거예요.
<P>[운호] 마음과 할께 몸도 찾아갈테다! 완전한 사랑 속에 용희 겉으로! 아, 다시곰곰 방금 꿈에서 만난 용희의 고운 얼굴 생각나는군.
<P>[삼녀] 당신을 돌려줄 줄 알고 있나요? 맘은 그 여자 곁에 날아가구려 하지만 몸은 안돼, 몸은 내꺼야! 당신의 가슴에서 스며나오는 남자의 그 향기는 줄 수 없어요! 도망치게 내버려 둘 줄 알아요? 오, 당신은 내꺼야, 꼭 끌어안고 아무 데도 못가게 하고 말테야!삼녀가 운호거사를 또 꼭 끌어안자, 그는 그녀를 떠밀며---
<P>[운호] 요부처럼 음탕한 계집같으니! 내 눈 앞에서 당장 없어져버려!
<P>[삼녀] 자기를 버리고 간 여자 못잊는 멍청이 얼간둥이 바보 같으니! 정 네가 그 여자를 찾아간다면---
<P>((삼녀, 칼을 뽑아들며---))
<P>[삼녀] 이 칼로 네 가슴을 쿡 찌르고서 붉은 피로 내 몸에 피칠을 하고 오, 나도 너와 같이 죽고 말테다.
<P>((운호거사, 삼녀의 칼을 피하여 굴속에서 비틀거리며 뛰쳐나와 이리저리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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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삼녀] 내 칼에 심장 찔려 죽으란 말야!
<P>((삼녀, 운호거사의 심장을 찌른다. 그는 호수쪽을 향해 쓰러지며---))
<P>[운호] 아, 사랑하는 용희, 찾아 갈테다! 나무관세음보살, 도와 주시오! 나무관세음보살, 부디 이 몸을---
<P>[삼녀] 오, 드디어 죽였다. 내가 죽였어! 내 품을 떠나려는 그를 죽였어! 심장에서 튀어난 이 붉은 피, 피!
<P>((삼녀, 피를 두 손과 얼굴에 칠하고 히쭉히쭉 야릇하게 웃으며---))
<P>[삼녀] 난 그를 안죽였어, 내가 왜 죽여? 그냥 극락왕생을 시켜준 거야. 매정한 그를 극락 보내 주다니 나도 미친년이지, 미친년이야.
<P>((삼녀, 실제로 미쳐서 춤추듯이 날뛰다가 갑자기 슬픈 노래를 부르며 하수로 퇴장. 노래소리 차츰 멀어진다. 이윽고 용희, 백의(白衣)관음보살 차림으로 상수에서 조용히 등장하여 쓰러진 운호거사를 자비롭게 어루만진다. 그러자 운호거사는 천천히 살아 일어나 손에 꼭 쥐고 있던 피리를 불기 시작한다. 용희, 그를 옆으로 부축하고 조용히 호수쪽으로 퇴장. 피리소리, 차츰 멀어진다. 밤안개가 더욱 자욱해진다.))
<P>[A] (소리) 거사님, 이젠 제법 컸읍니다요.
<P>[B] (소리) 3년생 산삼이 잘 됐거들랑요.
<P>((A. B, 산삼을 저마다 한뿌리씩 들고 하수에서 뛰어 등장, 굴로 간다.))
<P>[A] 이 보세요, 훌륭히 켰읍니다요.
<P>[B] 굴안에 거사임이 안계시잖아.
<P>[A] 글쎄나, 안계신데 어디 갔을까?
<P>((A, 호수쪽을 가리키며---))
<P>[A] 아, 저기 보살같은 여자와 함께, 호수쪽을 향해서 가시고 계셔.
<P>[B] 아, 호숫물 속으로 잠겨드는군.
<P>[A] 앗, 그만 물속으로 자취 감췄어! 마치 나들이가는 내외간 같군.
<P>[B] 그 여자 뒷모습이 아씨 같은데---
<P>[A] 그럴지도 모르지, 거사와 아씨 다정하게 용궁에 갔을지 몰라---
<P>((A. B, 고개를 조용히 끄덕인다. 밤 안개가 더욱 짙게 피어오르며--- 조용히 막이 내린다. ))
<P>-끝-
첫댓글 끝부분이...........쬐께 야시시헌디..............^^;;
별루 야하진 않은데;; 키스신 밖에 없자나 -ㅁ -;
ㅋㅋ 키스신을 어떻게 하려구.. 니가 할래??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