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는 과학적 근거로 형성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로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라며 “풍수는 인간생활과 관계되는 것을 알려주며, 풍수를 알면 득(得)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집을 구하거나 팔 때에도 풍수를 알면 도움이 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은 곧 ‘왕(王)’을 말한다. 왕이 날 자리를 알려주는 것은 풍수가의 생명을 단축시킨다. 이는 천기누설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김자겸은 난을 일으켜 자신이 왕이 되고자 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성지대사로부터 왕이 되는 땅을 찾아 묘를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자겸은 나중이 두려워 성지대사를 죽이려 했고, 이를 알게 된 성지대사는 김자겸이 왕이 될 인물이 못 된다고 판단해 죽기 전 묘의 6자 뒤쪽 혈을 잘라버렸다. 나중에 묘를 파 보니 날개 달린 잉어가 죽어있었고, 결국 김자겸은 왕이 되지 못했다. 풍수를 말할 때 성지대사, 남사고와 함께 조선 3대 풍수가로 꼽히는 도선국사를 빼놓을 수 없다. 또 도선의 풍수사상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비보사탑설이다. 도선국사는 지리산 밑자락에 절을 짓고 무쇠 3천근으로 만든 부처를 땅 속에 앉히고 절을 세웠다. 우리나라의 기(氣)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한 비보사찰인 것이다. 도선국사는 우리나라가 배(舟)가 운행하는 형세이니 각 지역에 사탑과 불상을 세워 비보진압(秘補鎭壓)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지역 화순의 운주사는 배(腹)에 해당되기 때문에 천불천탑을 세웠다. 도선은 이 곳을 진압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운세가 일본으로 흘러가게 된다고 보고, 하룻밤 사이에 도력으로 천불을 세워 사공으로 삼고 천탑을 노로 삼아 비보진압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쬐끔 재미나게.......
1. 호남의 명산 회문산 다섯 신선 바둑 두는 ‘음기의 땅’ 다섯 신선이 바둑판을 둘러싼 형국의 명당(五仙圍碁穴)
전북 임실, 순창, 정읍 3개 군에 자리한 호남의 명산 회문산은 인근 사람들의 의지처이자 피난처였다. 이곳 사람들은 회문산이라 하지 않고 회미산이라 불렀다. 그보다 50년 전인 대한제국 말에는 동학군과 항일의병이 이곳을 의지해 싸우거나 숨어들었다. 회문산은 이념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이곳을 찾아드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코 살아서 나가게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음기가 강한 산의 성격 탓이었다. 비극의 현장으로서는 회문산보다 지리산이 더할 것이다. 그런데 지리산과 달리 이곳 회문산에는 풍수와 관련된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조선의 명당, 24개의 명당이 있는 곳, 다섯 신선이 바둑판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의 명당(五仙圍碁穴)이 있어 발복이 되면 59대 후손까지 잘 살게 된다”는 등 회문산과 관련해 인근 마을 사람마다 다양하게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19세기 초 홍경래의 풍수 스승으로 알려진 일이승(一耳僧)이나 전라도의 전설적인 명풍수 홍성문(홍문대사 혹은 홍석문 등으로 불리기도 함)이 ‘회문산 명당도’를 남겼는데, 그 비결(秘訣)이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도 숱하게 많다. 몇 년 전 고등학교 교사라고 밝히는 한 지관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필자에게 ‘홍성문이 지은 회문산가 24혈’이란 비결을 보여주었다. 붓으로 쓰고 그린 고서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모필한 최근 작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24개 명당이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했는데, 자신이 찾아서 광주와 전북 사람들에게 몇 곳을 소개한 적이 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회문산 능선을 오를 적마다 지금도 여전히 무덤이 쓰여지는 것을 보면 계속 수요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잡초가 우거진 무덤들이 더 많다. 그래서 풍수 공부에 좋은 현장이 되는 곳이다. 회문산 ‘자연휴양림’ 입구에서 헬기장까지 개설된 비포장 임도(자동차 이용 가능)를 지나 회문산 정상(830m)으로 가는 능선에서 수많은 무덤들을 만나게 된다. 바위 위에다 관을 놓고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것, 바위 사이에 무덤을 쓴 것, 바둑판이라고 생각한 너럭바위 아래에 무덤을 쓴 것, 산 정상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무덤을 쓴 것 등 제각각 24명당 혹은 오선위기혈임을 확신하고 쓴 무덤들이다. 너무 많은 무덤이 들어서 골칫거리가 되자 최근 산림청에서는 ‘무연고 무덤 정리’를 공지할 정도가 되었다. 풍수 정설에 따르면 “명산(名山)에 명당 없고, 고산(高山)에 명당 없으며, 악산(惡山)에 명당 없다”고 했다. 회문산은 명산이자 고산이며 악산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설일 뿐 예외가 많다. 여러 가지 괴혈(怪穴)들은 명산이나 악산에도 많다. 이곳의 무덤들은 모두 괴혈임은 확신하고 쓰여진 자리다. 괴혈의 전시장인 셈이다. 회문산은 잠시 머물다 갈 자리이지 영주할 곳이 아니다. 음기가 강한 까닭에서이다. 음기의 정수를 표출하듯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10분 정도 오르다 보면 등산로 한가운데에 소나무(赤松)가 서 있다. 동양 최고의 여근목(女根木)이다. 필자의 주관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이웃 나라 여근목이란 여근목은 모두 찾아다닌 어느 분의 말씀이다. 그분 말씀으로는 일본에 이것이 소개되면 단체 관광객이 몰려들 곳이라고 극찬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필자에게 이 여근목은 회문산 음기의 상징으로 보였다.
2. 벌명당과 생태계 파괴 지관을 3代하면 絶孫 … 자연의 응징 벌고개임을 알려주는 봉현(蜂峴) 표석.반남 박씨 시조 묘
전남 나주시 왕곡면과 공산면을 잇는 23번 국도 중간 지점에서 반남면 면소재지로 이어지는 작은 지방도로가 있다. 이곳을 따라가면 ‘반남 고분군(古墳群)’ 표지와 함께 거대한 무덤들을 볼 수 있고, 다시 몇 백 미터를 가다 보면 작은 고개가 나온다. 이곳이 ‘벌고개(蜂峴)’인데 고갯마루 한쪽에 ‘蜂峴’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봉현’ 표석은 어느 이름 모를 지관을 위해 반남 박씨 문중에서 세워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때는 고려 왕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 반남면 일대의 호족이었던 박응주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의가 인근 지관에게 묏자리 소점(터 잡는 일)을 부탁했다. 지관이 묏자리를 잡아주긴 했는데 어쩐지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지관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의는 한밤중에 지관의 집에 몰래 들어가 지관 부부의 대화를 엿듣는다. “박 호장님(박응주) 댁 묏자리를 잡아주셨어요?” “잡아주기는 했는데, 사실 그 자리보다는 큰 버드나무 아래가 더 좋아.” “그러면 왜 그 자리로 잡아주지 않았어요?” “그 자리로 잡으면 내게 큰 화가 닥쳐서….” 이 말을 들은 박의는 다음날 지관이 말한 자리를 파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지관이 새파랗게 질려 빌면서 말했다. “제발 제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묏자리 파는 것을 늦춰주십시오.” 지관의 부탁을 듣고 잠시 기다렸던 의는 지관이 자기 집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생각될 즈음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땅속에서 큰 벌들이 나와 고개 쪽으로 날아갔다. 벌들은 고갯마루를 넘어가던 지관을 쏘아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이 일이 있은 뒤 사람들은 박응주의 무덤을 ‘벌명당’, 지관이 숨진 고개를 ‘벌고개’라고 불렀고 그 자리에 ‘蜂峴’이라 새긴 표석을 세워놓았다. 이후 반남 박씨는 벌명당의 발복 덕분에 후손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높은 벼슬은 말할 것도 없고 큰 학자도 부지기수로 배출했다. 박세채, 박세당, 박지원 등 교과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학자들뿐 아니라 대한제국 정치인 박규수에서 최근 철학계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는 박찬국(서울대 철학과) 교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 벌명당의 후손들이다. 물론 벌명당의 전설은 반남 박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 사당동 동래 정씨, 전북 완주 산정마을 진주 소씨 선영도 이와 비슷한 벌명당 전설을 가지고 있다. ‘벌명당’이란 뒷산(주산)의 우뚝 솟은 봉우리가 멍덕(재래식 벌통 위를 덮는 뚜껑. 짚으로 틀어서 바가지 형태로 만듦) 모양이면서 주변 형세가 꽃의 이미지를 띤 것을 말하는데, 이곳에 무덤을 쓰면 벌떼처럼 자손이 번창하고, 또 그 벌떼들이 부지런히 꿀을 모으듯 재물과 명예가 엄청나게 쌓이는 소응(昭應·감응이 또렷이 드러남)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현대 생태사상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벌명당을 잡아준 지관의 죽음이다. 반남 박씨뿐만 아니라 진주 소씨, 동래 정씨를 위해 벌명당을 소점해준 지관은 모두 벌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 만물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집이 있다. 인간만 좋은 집터를 가지란 법은 없다. 동식물도 각기 천혜의 명당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관이 그러한 동식물의 집터를 빼앗아 인간이 차지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생태계 파괴자’가 된 셈이다. 집을 빼앗긴 벌들이 ‘생태계의 파괴자’를 가만두지 않았다는 것이 벌명당 전설에 깃든 교훈이다. 조선조 최고 풍수사들 사이에 ‘지관(풍수)을 3대 하면 절손(絶孫)한다’는 말이 있었다. 생태계 파괴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라고 여겨진다.
3. 전남 화순군 능주 하늘이여 아! 개혁이여 못다 핀 조광조의 이상 기묘사화에 휘말려 최후 맞은 곳 … ‘봉서루’ 유명한 경관 詩로만 남아 ‘비운의 천재’ 조광조의 한이 서려 있는 능주목이여. 멀리 무등산이 아스라이 보이는 능주는 과거의 영화를 잃어버린 채 한가롭기만 하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개혁 사상가였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고장. 그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휘말려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은 곳이 바로 능주면 남정리다. 지금도 지역 곳곳에는 조광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천재이자 당대의 풍운아였던 조광조에 대한 이야기도 적잖이 전해온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광자(狂者·미친 사람) 혹은 화태(禍胎·화를 낳는 사람)라고 불렀다 한다. 적당히 머리 조아리며 요령껏 사는 이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홀로 원칙을 지키려 하는 그를 미덥지 않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앞장서 실천하는 이는 ‘미친 사람’ 취급받으며 화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당대 천재이자 풍운아 … 원칙 실천 ‘미친 사람’ 취급 하지만 조광조가 초년 시절부터 ‘광인’으로 일컬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젊은 날은 승승장구의 연속이었다. 평북으로 귀양 가 있던 김굉필에게서 열일곱 어린 나이에 성리학을 배운 그는 성리학만이 당시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새 시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이념이라고 확신했다. 어린 나이에 관직에 등용된 뒤에는 중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고, 30대 젊은 나이로 사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헌에 오르면서 개혁의 강도를 높여나갈 때까지 그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 가운데 흠이 있는 사람들을 골라 명단에서 빼려 한 ‘개혁 작업’이 훈구척신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조광조 천하는 막을 내리고 만다. 중종 14년인 1519년 11월15일 밤 훈구척신파 일원이던 홍경주가 은밀하게 임금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지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정국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벌을 주라”고 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중종은 홍경주의 주청을 받아들였고, 조광조 개혁의 강력한 동반자였던 사림에 대한 견제 심리까지 더해지면서 조정에는 기묘사화의 광풍이 불고 말았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가 줄줄이 잡혀 들어갔고, 결국 그해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면서 그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훗날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하늘은 그의 이상(理想)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면서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냈을까?’라고 말할 정도로 조광조의 실패를 안타까워했다. 이이는 조광조에 대해 ‘자질과 재주가 뛰어났음에도 학문이 부족한 상태에서 정치 일선에 나아가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조광조는 그해 12월20일 죽음을 예감한 듯 ‘신하 한두 사람 죽이지 못한다고 해서야 임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뇌까린 뒤 바로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여덟 살. 조광조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임금을 어버이같이, 나랏일을 내 집 일같이 걱정하였노라. 밝고 밝은 횃불이 세상을 굽어보니 거짓 없는 이 마음을 훤히 또 비추리’라는 시 한 수였다고 한다. 조광조의 유배지에는 우암 송시열이 그를 기려 세운 ‘조광조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가 있고, 그가 거처했던 초가집 안 사당에는 조선 선비 같은 조광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한 점이 모셔져 있다. 사실 능주는 조광조가 유배 오기 훨씬 전부터 명맥을 이어온 고장. 백제시대 이 지역의 이름은 이릉부리(爾陵夫里) 혹은 죽수부리(竹樹夫里)였다. 신라 이후 능성현(綾城縣)으로 불리다가 고려 초기에는 나주, 조선 태종 16년에는 순성현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인조 10년인 1605년에는 대비 인헌왕후 능성 구씨의 관향(貫鄕)이라는 이유로 ‘능주목’으로 승격돼 한때 번성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에 의해 화순군에 편입된 뒤 면이 되고 말았다. 필자는 지금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남정리 냄평(남평)거리를 거닐고 있다. 정자가 있어 ‘정재물’이라고 불렸던 이 마을은 능주성의 북문이 있어 ‘북문거리’라고도 했다는데, 오늘날 북문이나 정자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구름만 껴도 물이 불어난다’고 하여 ‘구진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다리도 이제는 당시의 풍광을 잃어 아무리 비가 와도 큰 피해를 볼 것 같지 않은 모양새다. 자연스레 발걸음은 남정리를 지나 관영리에 이른다. 관영리는 능주목의 관청이 있던 곳으로, 번성했던 능주의 중심지였다. 지금의 능주면사무소 자리에 능주현의 관아가 있었고, 동헌에는 능주목의 정문인 죽수부리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 자리에 있던 ‘봉서루(鳳棲樓)’의 경관은 유명해서, 조선 전기 문신 성임은 누각에 오른 뒤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날마다 달려 잠시도 한가하지 못한데, 여기 오르니 다시 한번 근심스런 마음 풀리네, 마을이 바다에 가까우니 봄은 항상 이르고, 소나무와 대나무에 닿았으니 여름에도 춥네. 발을 걷으니 산 빛이 그림기둥에 침노하고, 햇살이 비끼니 꽃 그림자가 난간에 올라오네. 길손 되어 무한히 집을 생각하는 마음, 글 구절을 가지고 억지로 스스로 위안하네.’ 하지만 이제는 어디에도 동헌이나 봉서루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두리번거리며 바라본 길 옆으로 광주선의 기차가 머무는 자그마한 능주역이 보일 뿐이다. 그 아래로 난 길을 따라가면 또 다른 정자인 영벽정(映碧亭)에 이른다. 영산강 지류인 지석강의 상류 강변에 있는 영벽정은 조선시대에 수목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흘러 뱃놀이하기 좋은 곳이었다 한다.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직은 영벽정에서 바로 위의 연주산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연주산 위의 달은 소반 같은데, 풀과 바람 나무 없고 이슬 기운 차네. 천 뭉치 솜 같은 구름 모두 없어지려 하고, 한 덩이 공문서도 보잘것없다. 시절은 다시 중추(中秋) 아름다운 것을 깨닫겠는데, 길손의 회포 누가 오늘 밤 위안될 줄 알았으리. 갈 길은 또 서쪽 바다 따라 돌아가나, 손가락 끝으로 장차 게 배꼽이나 뻐개리라.’ 영벽정 건너편 산 아래에는 조광조를 모신 죽수서원이 있고, 연주산 자락에서 바라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능주의 진산인 운산이 제대로 보인다. 죽수서원의 돌 계단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해장죽(시누대) 잎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고 오는 세월을 회상하다가 지석강의 발원지인 쌍봉사로 향했다.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가 산수의 수려함을 보고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그런 탓인지 가장 빼어난 신라의 문화재 가운데 하나인 ‘철감선사 부도’(국보 제57호) 등 그와 관련된 여러 점의 문화유산이 있다. 깊은 신심이 아니라면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부도 옆에는 보물 제170호로 지정된 ‘철감선사 부도비’가 비신(碑身)이 없어진 채 서 있다. 이 절에는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목탑인 대웅전(당시 보물 제163호)도 있었는데, 84년 4월 초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지금 새로 복원된 탑이 서 있지만 아쉽기만 하다.
4. 미인의 고장 ‘소강남(小江南)’ 순천 땅 좋고 물 좋으니 인물도 좋을 수밖에… 미인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순천. 흔히 전라남도를 소개할 때 언급되는 글귀가 있다. ‘글 잘하기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고, 예절 바르기로는 보성만한 곳이 없으며, 지세 좋기로는 순천만한 곳이 없다(文不如長城 禮不如寶城 地不如順天).’ 또 시쳇말로 ‘여수 가서 돈 자랑 말고, 순천 가서 미인 자랑 말며, 벌교 가서 주먹 자랑 말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순천은 지세 좋고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흔히 순천을 삼산이수(三山二水)가 어우러진 빼어난 경치 때문에 중국의 강남에 버금간다 하여 ‘소강남(小江南)’이라 부른다. 순천 태생인 작가 서정인씨는 순천에 미인이 많은 까닭은 물이 좋기 때문이다. 여수 큰아기(처녀)들이 순천으로 목욕을 하러 올 정도다. 그리고 차지철(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 김재규(박정희 대통령 당시 중앙정보부장), 차범근씨(축구감독)의 부인이 모두 순천 출신이다. 땅과 그 땅 위에 사는 인간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신토불이(身土不二)’가 풍수의 핵심 관념이긴 하지만, 한(漢)나라 초기 사상이 집대성된 ‘회남자(淮南子)’에서도 ‘땅은 각각 그 땅과 유사한 것을 낳으며, 사람이란 모두 그가 사는 곳의 기(氣)를 닮는다’고 했다. 이 같은 관념은 모든 풍수 관련 책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으로, 풍수 고전 ‘지리신법’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산이 아름다운 형상이면 거기에는 아름다운 기가 있고, 그 산의 기를 받는 자는 아름답게 마련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미인이 나올 만한 조건을 갖춘 땅으로, ‘살아 숨쉬는 흙(息土)’이라고 단정했다. 물이란 본래 자신의 맛이나 청탁(맑음과 흐림)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지하는 땅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살아 있는 땅’에서는 당연히 ‘생수(生水)’가 흐르게 마련이다. 순천의 물이 좋아 미인이 많다는 말은 곧 순천의 땅이 좋다는 뜻이다. ‘지세 좋기로는 순천만한 곳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와 반대되는 땅, 즉 죽은 땅에서는 어떤 인물이 나올까? 당연히 미인과 반대인 추한 사람이 나온다고 ‘지리신법’은 적고 있다. 개발이란 이름 아래 땅이 파괴되고, 각종 오염원에 의해 죽어가는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는 어떤 인물이 나올까? 당연히 파괴적이고 추악한 인물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풍수는 땅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여기고, 살아 있는 땅을 아름답게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그 땅 위에 사는 인간들이 아름다운 품성을 지녀 상생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순천이 미인을 많이 배출하는 아름다운 땅이라 해서 완벽한 땅은 아니다. 풍수에서는 제아무리 아름다운 땅이라도 흠이 있다고 본다. 그렇게 아름다운 순천에도 흠이 있다면 과연 그게 무엇일까? 순천의 풍수적 흠을 말해주는 문화재가 몇 있는데, 현재 순천시청 앞으로 옮겨져 있는 ‘장명석등(長明石燈)’과 순천경찰서 뒤 ‘향림사’가 대표적이다. 몇 년 전 순천시청 앞 장명석등을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순천의 지형이 좋기는 하나 약간 험하고 어둡다는 풍수적 견해가 있어 순천남초등학교 옆 오거리에 세운 것이다’고 쓰여 있었다. 최근 바뀐 안내판에는 ‘험하고’라는 표현이 삭제됐다. 아마도 ‘험하고’라는 표현이 좀 거슬렸던 듯하다. 그러나 ‘험하고 어둡다’는 표현이 있어야 두 문화재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다. 순천 향림사 입구에 서 있는 비문에 ‘순천의 지형 지세가 여기저기 서로 부딪치고 쏘는 듯한 감(沖射之嫌)이 없지 않아 이를 진압하기 위해 향림사를 세웠다’고 적혀 있어 ‘험하다’는 의미를 잘 읽을 수 있다. 또 순천의 옛 지명 가운데 하나가 구덩이 감() 자(字)를 써서 ‘감평군’이었던 점을 보면 순천의 지형을 꺼진 것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지형이 꺼져 있으니 어두울 테고, 이를 드러내기 위해 석등을 설치했을 것이다. 전형적인 비보풍수(향림사와 장명석등) 흔적이다. 이미 옛사람들은 순천의 문제점을 알고, 비보풍수로 후손들에게 그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던 듯하다. 순천시청 앞의 장명석등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다시 설치하고, 실제로 그곳에 불을 밝혀두는 게 어떨까?
더 많은 미인이 배출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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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