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룽(뒷줄 왼쪽 두번째), 원슈(뒷줄 왼쪽 세번째), 탕스샤(오른쪽 첫번째)를 데리고 꽃구경 나온 근비(瑾妃). 1921년 무렵. 자금성 어화원(御花園)으로 추정. [사진 김명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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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쉐량의 말이 입소문을 타자 싱거운 호사가들이 분주해졌다. “탕스샤가 분명하다. 아직도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모른다. 어떻게 생겼기에, 민국 4공자 중 두 사람인 장쉐량과 루샤오자(卢筱嘉·노수가)의 정부(情婦)였는지, 한번 봤으면 원이 없겠다. 장쉐량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지막 황제 푸이와 동생 푸제의 여인들이 화제의 인물로 등장했다. 세 살 때 황위에 오른 푸이는 광서제(光緖帝)의 황후 융유태후(隆裕太后)와 태비(太妃)들 틈에서 성장했다. 자식이 없던 태후는 푸이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 항상 혼자서 끼고 돌았다. 태비들은 융유의 기세에 눌렸다. 젖먹이 황제에게 장난감 쥐어줄 때도 태후의 눈치를 봤다.
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4명의 태비들이 푸이를 놓고 각축전을 벌였다. 근비(瑾妃)가 나이도 많고 친정이 든든했다. 근비는 친정 조카들을 궁궐로 끌어들였다. 조카들 중에는 예쁜 여자애들이 많았다. 탕스샤가 돋보이자 다른 애들은 출입을 금지시켰다. 탕스샤는 시(詩)·서(書)·화(畵)에 능했다. 요리 솜씨도 뛰어났다. 근비는 소문난 미식가였다.
궁중에서 자란 탕스샤는 어릴 때부터 푸이와 친했다. 푸이도 두 살 위인 탕스샤를 누나라 부르며 잘 따랐다. 푸이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태비들은 긴장했다. 근비가 건재하는 한, 황후감은 탕스샤가 가장 유력했다.
“탕스샤가 황후가 되면 자금성(紫禁城)은 근비의 손에 들어간다”며 3명의 태비가 힘을 합쳤다. 근비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다. 생각지도 않았던 완룽(婉容·완용)을 황후에 추천했다. 태비들은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푸이는 같은 날 완룽과 원슈(文繡), 두 명의 여인과 결혼했다.
근비는 황후를 꿈꾸던 탕스샤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너는 방탕한 게 흠이다. 황후감은 아니다. 너보다 세 살 정도 어린 남편감을 구해주마.” 약속도 지켰다. 탕스샤가 20세가 되자 푸제에게 출가시켰다. 당시 푸제는 열 일곱살이었다.
탕스샤는 동서들(푸이는 같은 날 완룽과 원슈 두 명의 여인과 결혼했다)끼리 원만하게 지냈다. 남편과는 결혼 첫날부터 삐걱거렸다. “황실은 망해 싸다. 무슨 남자들이 쓸데없는 교양으로만 가득차 있다. 게을러 터진 것들이, 먹고 마시고 치장하는 것 외에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골동품 들고 황제에 복귀할 꿈만 꾸는 한심한 사람들”이라며 투덜거렸다. 난세에는 총 가진 사람이 제일이었다. 신문에서 청년 원수 장쉐량의 사진을 볼 때마다 침을 꼴깍 삼켰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결혼 2년 후인 1926년 봄, 푸제와 함께 베이징 반점에 춤추러 갔다가 28살짜리 장쉐량이 들어오는 것을 먼발치에서 봤다. 동북군들의 경호가 어마어마했다. 살벌할 정도였다. 다가갈 엄두도 못냈다. 장쉐량이 제 발로 인사하러 오자 당황했다. 남편이 장쉐량과 친구 사이인 줄을 비로소 알았다.
탕스샤가 장쉐량을 집으로 초청했다. 장쉐량은 이 날의 일을 구술로 남겼다. 푸제도 이 날을 잊지 못했다. 훗날 회고록에서 상세히 기술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는 ‘거친 남자’ … 툭하면 내시들 매질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84>
푸이(가운데 안경쓴 사람)와 푸제(맨 뒤)는 동생들과 우애가 깊어 여동생들을 끔직히 챙겼다. 뒷줄 오른쪽이 윈잉(韞潁). 1926년 텐진. [사진 김명호]
푸이(溥儀·부의)와 푸제(溥杰·부걸)는 연년생이었다. 생긴 것도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비슷했다. 쌍둥이로 착각하는 외국인이 많았다. 성격은 판이했다.
푸이는 세 살 때 등극했다. 어릴 때부터 궁중의 예의범절을 익히고 “황제는 겸허하고 자애로워야 한다”는 교육을 받다 보니 첫인상은 좋았다. 하지만 실제 생활은 거칠었다. 유아독존이 몸에 배 있었다. 내시들에게 몽둥이 찜질하기를 좋아했다. 핑계거리는 만들면 됐다. 엉뚱한 명령을 내릴 때도 많았다. “너희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개다. 개처럼 네 발로 걸어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시들은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멍멍 소리가 작으면 푸이의 몽둥이가 춤을 췄다.
푸제는 형과 달랐다. 겸손하고 말수가 적었다. 내시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부인 탕스샤(唐石霞·당석하)는 남편의 이런 성격을 싫어했다. 미덕이 아니라며 떨어져 사는 날이 많았다. 속으로 청년원수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흠모했다. 장쉐량에 비하면 남편이나 푸이 따위는 성에 안 찼다. 옆에 붙어다니는 황족이라는 것들도 무능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인력거 끌거나 전당포 출입할 날이 멀지 않아 보였다.
장쉐량을 흠모하기는 푸제도 마찬가지였다. “1926년, 20세 때 장쉐량을 처음 만났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사건이었다. 나는 이 청년 장군을 하늘처럼 우러러봤다. 일거일동을 주시했다.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것을 보고 대장부는 저래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순전히 무력 때문이었다. 우리 집안이 지난날의 영광을 회복하려면, 총잡이들부터 장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자 장쉐량을 찾아갔다. 군인이 되고 싶다고 털어놨다.”
장쉐량도 푸제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푸제는 사람이 괜찮았다. 나를 잘 따랐다. 나도 남처럼 대하지 않았다.” 탕스샤에 대해서는 험담과 칭찬을 오락가락했다. “훔쳐먹는 과일이 더 맛있는 법이다. 푸제의 첫 번 째 부인은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고약한 여자였다. 뒷맛이 씁쓸했다. 매력은 당대에 따를 만한 여자가 없었다. 황후 감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금방 들통이 나서 그렇지, 연기력도 뛰어났다. 정치가가 되었더라면, 세상을 우롱하고도 남을 여자였다. 방탕하고 음탕했다며 비난하지만 처신 하나만은 훌륭했다. 방탕이 문제지, 음탕한 건 흠이 아니다.”
군인이 되고 싶다는 푸제의 청을 장쉐량은 선뜻 들어줬다. “군인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야 하는 직업이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백정과 비슷한 사주팔자를 갖고 태어나야 성공할 수 있다. 그래도 하고 싶으면, 사관학교에 들어가라. 동북에 가면 강무당(講武堂)이 있다. 나도 그곳에서 군사학을 배웠다. 우리 아버지가 세운 군사학교다. 입학은 내가 책임지마. 입학만 하면, 동북의 영화관은 모두 무료다.”
탕스샤는 남편 푸제와 함께 베이징 반점에 갔다가 장쉐량을 처음 만났다. 푸제가 옆에 있건 말건 장쉐량을 집으로 초청했다. 거절할 장쉐량이 아니었다. “다음날 푸제의 집으로 갔다. 마침 여동생들도 와 있었다. 하나같이 귀태가 넘쳤다. 범접하기 힘들었다. 특히 막내 여동생 윈잉(온영·韞潁)은 도도하기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내게 눈길 한번 안줬다. 부인이 비단 보자기에 싼 두툼한 물건을 선물이라며 내게 건넸다. 선물을 풀어본 나는 경악했다. 몇 년간 신문에 실린 나에 관한 기사들이 예쁘게 정리돼 있었다. 이 여자가 내게 생각이 있다고 직감했다.”
장쉐량이 탕스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탕스샤도 살짝 눈을 흘기며 화답했다. 푸제는 장쉐량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시를 한 수 지었다며 화선지와 씨름하고 있었다.
이날 이후, 탕스샤는 장쉐량의 거처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푸제와는 차도 같이 안 마셨다. 탕스샤가 장쉐량의 정부라는 소문이 베이징 시내에 짜하게 퍼졌다. 푸제 한 사람 외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던 사람들은 푸제만 나타나면 입을 닫았다. 헛기침하며 키득거렸다.
장제스의 북벌군이 베이징을 압박했다. 장쉐량은 동북으로 철수할 준비를 서둘렀다. 푸제가 전화로 칭얼거렸다. “네가 떠나면, 동북 강무당 입학을 의논할 사람이 없다. 방법을 일러주기 바란다.”
장쉐량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인과 함께 톈진으로 가라. 프랑스 조계에 가면 내 둘째 부인이 있다. 그곳에 머무르면 내가 연락하마.” 푸제는 시키는 대로 했다. 탕스샤도 군말이 없었다.
몇 달 후, 장쉐량이 인편에 편지를 보냈다. “내 둘째 부인과 함께 동북으로 와라. 지금은 전시다. 여자 두 명과 함께 이동하는 것은 위험하다. 둘째 부인은 내가 전쟁터에만 데리고 다닌 전쟁부인이라 겁이 없다. 네 부인은 톈진의 내 집에 머무르게 해라.” 동북으로 가던 푸제는 다롄에서 억류됐다. 그 사이 톈진으로 온 장쉐량은 탕스샤와 동거에 들어갔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탕스샤는 호화판 억류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푸제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푸이가 일본의 괴뢰로 전락하고 푸제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자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이라며 황실과 완전히 결별하고 이혼을 요구했다. 그 틈을 일본 군부가 파고들었다. 푸제와 일본 여인의 결혼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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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 년 전 전국시대 4공자
맹상군(孟嘗君)·신릉군(信陵君)·평원군(平原君)·춘신군(春申君)
명말(明末) 4공자 : 방이지(Fang Ichih, 方以智), 후방역(侯方域), 진정혜(陳貞慧), 모양(冒襄)방이지의 증조부 방학점(方學漸)과 조부 방대진(方大鎭), 부친 방공소(方孔炤)
청말(淸末) 4공자 : ?
‘민국 시대’ 4공자(7명)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 장쭤린(張作霖)의 아들 장쉐량(張學良), 돤치루이(段祺瑞)의 아들 돤훙강(段宏綱), 장젠(張健)의 아들 장샤오뤄(張孝若), 우창칭(吳長慶)의 아들 우바오추(吳寶初), 루융샹(盧永祥)의 아들 루사오쟈(盧少嘉), 장전팡(張鎭芳)의 아들 장보쥐(張伯駒)
1900년대 초기 ‘민국4공자
장보쥐(張伯駒)
원래는 부인이 둘이 있었다. 한 명은 전통적으로 봉건 가정의 부모가 정해준 부인이었고, 한 명은 처음에는 관계가 좋았으나 취미가 달라서 오래지 않아서 헤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눈에 반한 세 번째 부인이 바로 이후의 저명한 ‘청록산수화’의 대가였던 판수(潘素)여사였다. 미모가 뛰어났던 판여사를 당시는 모두 ‘판비(潘妃)’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미인이 많다는 쑤저우 출신이었다. 비파를 아주 잘 탔으며, 일찍이 상하이 시장루(西藏路)와 산터우루(汕頭路)가 교차하는 곳에 일품향주점(一品香酒店)이라는 곳에 있었다.
그녀가 처음 상하이에 왔을 때는 글도 잘 읽지 못할 정도였지만 자태는 매우 예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이곳에서 서서히 재능이 들어나면서 ‘쑤저우 출신’답게 그림에도 재능을 발휘했다. 상하이 사교계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장보쥐는 염업은행의 총감사였지만 은행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종일토록 서화 수장과 경극감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보쥐가 일 년에 두 차례씩 염업은행 상하이 분점 감사를 갔다. 이 기회에 상하이에서 우연히 판여사를 만나게 됐다. 그들은 마치 ‘영웅이 영웅을 알아보듯’ 서로가 한눈에 반했다. 그러나 ‘판비’는 당시 이미 이름이 나있었던 인물이었고 이처럼 ‘아름다운 꽃’은 반드시 주인이 있는 법, 그 주인은 국민당의 장쭤(臧卓) 중장의 애인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장쭤는 일품향주점에 그녀를 ‘연금’했다. 그러나 장보쥐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장쭤 장군의 경호원을 매수해 그녀를 구출해 부인으로 삼았고 평생을 해로했다 장보쥐가 1930년대 자신이 살던 총벽(叢碧)산장에서 꽃에 둘러싸인 채 서 있다.
장보쥐(張伯駒)는 난쉰의 팡쉬원과 함께 대(大)수장가였다. 두 사람을 일컬어 ‘난팡베이장(南龐北張)’이라고 부르지만 장보쥐 이름 앞에는 ‘민국 4공자(民國四公子)’ 중 한 사람이라는 또 다른 수식어가 늘 붙는다.
푸동
푸동은 마지막 황제 부의(溥義)의 집안 형으로 도광(道光) 황제의 증손자였다. 별명은 ‘홍두관주인(紅豆館主人)’이였다. 그는 7세 때 이등진국장군(二等震國將軍)에 임명됐지만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른바 ‘태어나면서부터 한가한 인물’이었다. 시, 서, 화에 능하고 문물 감정에 정통했으며 황친귀족이었다. 경극, 곤극(昆劇) 예술을 공부하면서 저명한 예술인들과 친교했고 별칭으로 ‘표계대왕(票界大王:아마추어 연극)’이라고 불렸다. 일찍이 한 차례 경극 공연에서 5명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서 그 명성이 높았다.
위안커원(袁克文)
위안스카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한담을 즐겼고 일생동안 정치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시사대련(詩詞對聯), 금기서화(琴棋書畵), 문물감상 등에 무소불위였다. 더욱이 ‘행·초·예·전서’ 등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던 인물로 당시 서예실력은 최고의 수준이었다. 장쉐량은 사람들이 모두 잘 아는 인물이었다. 일찍이 여러 차례 중국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그의 문물감상 분야는 조예가 깊었다. 다만 그와 다른 ‘4공자’와 비교해 보면 조금 차이가 있었다면 전통문화에 대한 소양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대체로 그가 당시 풍운인물이었기 때문에 ‘민국4공자’에 끼었다고 할 수 있다. 장보쥐는 ‘민국4공자’와는 모두 왕래가 있었고 특히 위언커원과는 의기투합해 매우 친밀했었다.
장쉐량(張學良)
샤오솨이(小帥)라고도 한다. 장쉐량은 만주지방과 북중국 일부를 지배한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맏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군사적 경험을 쌓았으며, 19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군대에 들어갔다. 빠른게 승진을 거듭하여 1922년에 아버지 휘하 부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1928년 일본 장교들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하자 만주지역을 통치했다.시안(西安) 사건(1936)을 일으켜 장제스[蔣介石]에게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전시(戰時) 동맹을 체결하도록 요구했다. 만주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일본인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난징(南京)에 새로 결성된 민족주의 정부와 손을 잡았다. 이때 일본이 그의 군대를 만주에서 몰아내고 이 지역을 점령하자, 그는 군대를 중국 북서부에 있는 산시성(陝西省)으로 철수시켰다.
1935~36년 장제스는 산시 성 옌안(延安) 근처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군사적 소탕작전을 위해 장쉐량의 부대를 이용했다. 그러나 점차 애국적 입장을 취하게 된 장쉐량은 자신과 민족주의자들의 부대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같은 동포인 중국인들이 아니라 일본인 침략자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1936년 장제스가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일으킨 민족주의 전쟁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기 위해 산시 성 시안에 있던 장쉐량의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장쉐량은 그를 체포했다. 장쉐량은 그가 일본인들에 맞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 동의하자 비로소 풀어주었다. 어리석게도 장제스와 함께 난징으로 되돌아간 장쉐량은 곧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49년 장제스 정부가 타이완(臺灣)으로 달아날 때 장쉐량 역시 타이완으로 옮겨져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는 장제스가 사망한 지 2년후인 1977년에야 그를 연금상태에서 풀어줬다. 1993년 국민당 정부로부터 거주이전의 자유를 허락받자, 그는 미국 하와이에 정착했다.
술과 담배를 포함해 여색까지 밝힌 장쉐량( 張學良‧1898년 6월4일~2001년 10월15일)은 103세를 일기로 3세기를 살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