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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공격이냐, 기습남침이냐
(조갑제 홈페이지에서 퍼온글)
[한미공조는 추억거리]
한미공조는 이제 문서상의 추억거리로 남게 되었다.
김씨 왕조가 스스로 믿고 싶은 거짓말을 반세기 동안 계속한 결과 일방적인 하향식 의사소통밖에 없는 북한만이 아니라 '민족과 평화'라는 아름다운 명분에 혼을 빼앗겨 반공국가의 대명사였던 한국마저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미국의 대북한 선제공격을 믿게 이르렀다. 클린턴의 1994년 북폭 계획이 폭로된 것과 9·11 테러 이후 부시의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 전략이 중동에서 두 번이나 검증된 것이 초강력 복합 화학비료로 민족공조의 토양에 살포되어, 50년 이상 줄기차게 뿌린 미제 침략이란 선전선동의 씨앗이 어느 날 갑자기 우르르 발아해서 순식간에 사람 키보다 더 무성하게 자라나게 되었다. 과히 늦바람 난 농부가 내버려 둔 문전옥답에 장마철에 잡초가 겁나게 자라듯이, 김씨 왕조의 선전선동 잡초가 확 웃자라서 드문드문 애처롭게 서 있는 진실의 곡식은 도리어 살랑 바람에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형편이다. 수확은 이제 아예 그르쳐진 듯하다. 확 갈아엎고 새로 곡식을 심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거짓말 공화국의 기습북침설]
북한은 지금도 6·25는 미제와 그 앞잡이 '남조선 괴뢰도당'이 기습북침으로 발발한 것이라고 시종일관 주장한다. 천만다행하게도 '민족의 태양' 김일성이 절체절명의 그 위기를 도리어 조국해방전쟁의 기회로 역전시켜 낙동강까지 바로 짓쳐 들어갔으나, 음흉한 미제의 대규모 개입으로 민족해방 일보 직전에 물러났지만, '김일성 대원수의 영명한 지도력'에 힘입어 전열을 가다듬어서 '거의 필요 없었지만' 공산국의 형제애를 보여 주겠다는 중공군의 간청에 못 이겨 그 도움을 '살짝' 받아 기어코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을 물리친 것으로 50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주장한다. 북한에선 수령님과 당의 말은 절대 토를 달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은 거의 100% 그렇게 믿는다. 뿐만 아니라 미제는 전혀 뉘우치지 않고 정전 후에 아예 휴전선 이남을 강점하고 호시탐탐 '지상낙원'을 노리기 때문에 '3백만 명이 아니라 1천만 명이 굶어 죽어도' 전쟁 준비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고 강변한다.
[적반하장은 북한의 최대 무기]
이미 1960년대 초 부터 북한은 전 국토를 요새화하고 전 인민을 무장하고 전군을 간부화하고 현대화하여 110만 군인은 물론 14세 이상 60세 이하 남녀 745만 명이, 전 인구의 30%가 연간 160시간에서 500시간 하루 종일 군사훈련만 받는다. 일대 일로 맞붙으면 뜨거운 차 한 잔 식을 시간이면 무릎 꿇릴 '남조선 괴뢰도당'은 전혀 문제가 안 되지만, 세계최강 미제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고 내친 김에 미제의 식민통치에서 '남조선 인민'을 해방시키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어떤 고난도 이겨내야 한다고 총력을 기울여 어버이 수령님과 장군님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군사력을 기르지 않을 수 없다고 6·25후 5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다그쳤다. 그러나 '적반하장'을 최고의 전략으로 구사하는 북한은 이전의 한미 합동 훈련을 통합하여 1976년부터 실시된 팀 스피리트는 그들에게 절호의 선전선동 빌미가 되었다. 김영삼 정부 이래 팀 스피리트 훈련이 흐지부지되자 이제는 미군 철수가 최우선 선전선동 과제다.
북한에는 일본의 패망 후 소련군이 진주하여 김일성 도당 50여명의 권력 기반을 확고부동하게 마련해 준 다음 일찌감치 6·25 전에 떠나고 중공군도 6·25 후에 곧 떠났기 때문에, 김씨 왕조는 그것을 미군이 주둔하는 한국과 비교하여 자주독립국가임을 만천하에 자랑하는 근거로 내세운다. 실은 소련과 중국은 미국이 버티고 있는 한 한국을 공산화하는 것은 무모하고 설령 한국을 공산화시킨다고 해도 일본까지 그렇게 할 수는 절대 없어서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또한 제 앞가림하기에도 급했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6·25도 김일성의 간청에 의해서 스탈린과 모택동이 끌려 들어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소련은 유엔안전보장회의 상임이사국이었지만, UN군이 한국에 참전여부를 결의하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소련이 주도적으로 6·25동란을 일으켰으면, 소련군이 대대적으로 참전하지 않았을 리도 없고, 만장일치가 아니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는 상임이사국 회의에서 당당히 참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스탈린은 그렇게 노회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자국이 피해보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신식 무기를 대 주되 극소수 군사 고문단과 조종사만 보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지더라도 얼마든지 오리발 내밀 장치를 해 둔 것이다. 다만 스탈린은 미국이 그렇게 신속하게 한국전에 참전할 줄은 잘 몰랐던 듯하다. 김일성이 서울을 점령한 다음에 머뭇거리지 말고 곧장 밀고 내려갔으면 한국은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적화 통일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이 아마 김일성의 한계였을 것이다. 그는 전혀 대장의 그릇이 아니었다. 중공군의 팽덕회가 왔을 때, 김일성이 군사 지휘권을 갖겠다고 하자, 팽덕회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동북 삼성의 총사령관이었을 때 당신은 중국의 동북항일연군에서 겨우 소대장 역할이나 맡고 있었다. (네 따위가 전쟁에 대해 뭘 안다고 나서느냐? 네가 전쟁을 지휘하는 것을 보니, 전략은커녕 전술의 초보도 모른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스탈린의 기만책과 모택동의 고육책]
공업이 고도로 발달하고 무기가 현대화한 소련의 스탈린과 달리 장개석과 피 말리는 내전을 치러서 간신히 승리한 직후에 겨우 한숨을 돌리던 중국의 모택동은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통일되어 미군이 압록강에서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면, 상처투성이인 중국의 안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때문에, 여차하면 대만으로 몰아낸 장개석이 미국의 도움으로 중원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UN군과 한국군이 압록강 물에 손을 담그며 감격에 겨워하자, 몇 번 경고 후에 모택동의 장기인 유격전에 무시무시한 인해전술을 가미하여 UN군과 한국군에 맞서게 된 것이다. 만약 모택동도 이 당시 소련처럼 무기가 현대화되어 있었고 경제력이 튼튼했으면 한국전에 몸으로 때웠을 리가 없다. 사실 모택동은 이 때 미군의 현대 무기에 간이 콩알만 해지도록 혼이 났기 때문에 6·25가 끝나자마자 상해를 비롯한 연안의 모든 공장을 모조리 뜯어서 내륙지방으로 옮겼다. 언제 미군의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공업이 거의 와해되었다. 등소평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모택동이 지레짐작 내륙으로 공장을 이전한 것이 희대의 비극적인 희극임을 깨닫고 연안 지방에 경제특구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여 대대적인 경제건설에 나섰다.
[북한의 선군 정책은 국내정치용]
6·25는 김씨 왕조에게 기회에서 위기로 위기에서 기회로 요동친 대사건이다.
김일성은 사실을 하나에서 열까지 왜곡하여 유일사상을 확립하는 데 악용한다. 민생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고 군사력 강화에 사활을 건 것은 권력을 강화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실은 권력 강화가 유일무이한 목적이다.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해이면 해마다 전쟁이 일어난다며 수시로 비상을 걸어 전 주민으로 하여금 한두 달씩 지하생활을 하게 했지만, 50년 동안 미제는 휴전선에서 한 걸음도 북쪽으로 내딛지 않았다. 흉내를 낸 적도 없다. 쳐들어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 왕조도 쳐들어갈 의사가 전혀 없었다. 미군의 무서움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더 이상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군과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한 까닭]
중국과 러시아는 군사대국이지만, 미국과 같은 경제대국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같이 작은 나라에, 괴이한 '봉건 왕조'에 군대를 파견하여 미국과 맞붙어 쓸데없이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소련군과 중공군이 철수하고 손을 뗀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김씨 왕조는 이를 희한하게 해석하여 마치 외국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 것은 자주독립국임을 내세우는 유일무이한 기준이라도 되는 듯이 날마다 주한 미군을 들먹이며 '남조선'은 미제의 식민지라고 반복 학습시키며 미제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세계 최강의 국가와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 총알 하나 더 만들기 위해 영광의 그 날을 위해 '거지 떼'가 우글거리는 '남조선'을 해방하는 그 날까지 허리끈 한 칸 더 줄이자며 끝없이 전쟁의 공포심을 조장하여 만경대 김씨 가문의 독재 권력기반을 다지는 데 혈안이 되었다.
[300만 명이 굶어 죽어도 김씨 왕조가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까닭]
그렇게 함으로써 인도와 중국도 옛날에 해결한 기아 문제를 끼니마다 쌀밥이든 강냉이밥이든 국수든 배불리 먹는 문제를 해방 60년이 지나도 해결 못한 것을 김씨 왕조의 최대 악정이라고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정일 정권 이후 식량 사정이 더욱 악화되어 3년간의 6·25 동란 때 희생된 사람과 엇비슷한 무려 3백만 명이 굶어 죽어도,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책임을 떠넘겼다. 이 말 속에는 북한의 국정 목표가 너무도 선명하게 잘 드러난다.
-(중차대한) 군대 문제와 외교 문제만 해도 벅찬데, 어찌 (사소한) 경제 문제에까지 신경 쓸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은 아랫것들이 알아서 '짐'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잘 챙겨야 하지 않느냐?)
[두 번의 기습남침 기회-미군보다 무서웠던 박정희]
그러면 기습남침은 생각도 않았던가? 대미·대남 적개심을 조장하여 전쟁 공포를 뼛속 깊이 새겨서 날마다 일제말의 전시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고 전쟁 준비에 총력을 기울여 다른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오로지 독재 권력 강화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을 뿐인가? 천만에! 여기에 엄청난 함정이 있다.
미군 타령이 바로 문제의 열쇠이다.
평화통일 자주통일 민족통일 타령이 바로 문제의 열쇠이다. 미군만 없으면 바로 북한식 흡수통일 곧 적화통일이다. 그럴 기회가 이전에 두 번 있었다. 한번은 월남에서 손을 떼기 시작하면서, 닉슨이 한국에서 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하면서부터 월남이 패망할 무렵이었다. 만약 이 때 밀고 내려왔으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일성은 미군도 무서웠지만 박정희가 그 못지않게 무서웠다. 박정희는 김일성과 달리 대위 출신이 아니라 육군 소장 출신이었다. 전술전략 어디에도 빈틈이 없었다. 경제개발에 성공함으로써 국방비를 넉넉히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월남전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미국의 도움으로 군 장비를 현대화한데다가 수십만 명이 공산군을 상대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은 미군보다 훨씬 못한 무기로 전투에선 도리어 미군을 압도하여 귀신 잡는 따이한으로 용맹을 떨쳤다. 공산군과 유교문화의 생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민군은 감히 내려올 수가 없었다. 김일성은 기껏 무장공비를 내려 보내 박정희의 약을 올렸지만, 박정희는 도리어 예비군을 창설하여 김일성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반공교육을 더욱 강화시켜 김일성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박정희는 노련한 외교로 더 이상의 미군철수를 막았다. 오히려 박정희는 미군 철수를 계기로 자주국방을 기치로 내걸고 대대적인 방위산업을 일으켜 1966년 KIST를 설립한 이후로 비약적으로 발달시킨 과학기술과 세계가 놀라는 경제성장을 이용하여 북한의 무기를 능가하는 무기를 속속 개발했다. 김일성이 '함부로 까불면' 일거에 평양을 접수할 수도 있을 정도로 군사력이 역전되었다.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사태]
절호의 기회는 한 번 더 왔다.
1979년, 눈엣가시 박정희가 죽은 것이다. 핵무기까지 개발하던 박정희가 죽은 것이다. 대대적인 중화학공업육성으로 경제와 군사 양면이 한 차원 높아지면서 어느 면이든 북한을 압도할 준비를 다 갖춰놓고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전 국민을 하나로 묶어, 김일성의 선전선동이 씨알도 먹히지 않게 해 두었던 박정희가 부하에게 시해된 것이다. 남침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스스로의 힘을 알고 미국의 힘을 알았다. 매우 신중했다. 희망의 싹은 '80년의 봄'이었다. 민주화의 거센 바람에 공산주의의 마약을 은밀히 띄울 수 있었다. 광주사태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도 만만찮았다. 아마 이 때 광주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광주전남이 왕년의 '파리 코민'처럼 독립구가 되었더라면, 민주화 세력과 은밀히 손을 잡고 폭동을 일으키는 한편 기습남침을 감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런 상황이 도래했어도 모험을 감행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여 나라의 치안이 거의 확보된 데다가 군대의 안보 태세가 확고했고, 주사파는 그 때까지만 해도 대학 외에는 어디에도 발을 못 붙였기 때문이다. 미국도 이렇게 안정된 나라는 절대 모른 척하지 않을 게 틀림없었으니까.
[80년의 봄-주사파의 거점 확보]
전쟁은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국내 여론이 사분오열되었을 때 일어난다.
80년 봄에도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김일성은 내려오지 못한 것이다.
1980년은 그러나 김일성이 마침내 희망의 서광을 본 해이다.
광주사태와 더불어 대학생들이 급격히 자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사회주의에서 주체사상으로 돌아선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반공전선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긴 것이다. 대신에 반미 전선이 작지만 단단하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민주화 세력에 은밀히 스며들기 시작한 주사파는 조직력과 계율이 신흥종교 이상으로 무시무시했다. 대한민국의 자중지란! 이 무렵부터 김정일이 혁혁한 공을 세우기 시작한다. 대남 첩보전을 총지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등 테러도 불사했다. 한국의 대학생 주사파들은 북으로 팩스를 직접 보내고 김정일은 지령을 직접 내렸다.
[YS, DJ, 노빠]
YS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지만, 주사파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 사이에 주사파는 정권 깊숙이 교두보를 확보했다. DJ는 그 속을 누구도 모른다. 공산주의자라면 지금도 펄쩍 뛴다. 그러나 하나에서 열까지 통일의 깃발을 앞세우고 그가 세운 정책을 보면, 철두철미한 친북파이다. 햇볕정책이란 그럴 듯한 말을 내세워 김정일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대북 정책을 세웠다.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절로 무너지면서 한국에 흡수통일 되었을 북한에 흡수통일 반대를 공언하면서 달러를 주고 쌀을 주고 비료를 주어 김정일 정권을 기사회생시켜 주었다. 또한 친북파들이 민주화의 가면을 쓰고 대거 정권에 참여하게 했다. 그들의 위선은 북한 주민의 인권과 탈북자의 인권을 교묘하게 외면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는 순간 좀 과장하면 아예 청와대를 386 주사파들이 접수해 버렸다. 4·15(김일성 생일) 총선에선 전대협 의장단이 대거 국회로 진출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국정원과 통일원은 각기 6·15(서해 1차 교전 첫돌) 공동선언의 칼과 펜을 휘두르고 KBS와 MBC은 6·15 공동선언의 나팔을 불고 있었다. 이제 '황제의 용안'을 펴드리는 일은 진보와 민족과 평화와 통일의 이름으로 불리고, '황제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은 수구냉전과 사대주의와 전쟁과 분열의 이름으로 불린다.
[노태우의 북방정책]
김일성 왕조는 노태우 정권 때 절망의 낙조를 보았다.
경제 우선의 한국과 군사 우선의 북한이 오랜 체제경쟁 끝에 한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경제 우선의 미국에게 군사 우선의 소련이 총 한 방 못 쏘고 항복한 것과 흡사했다. 노태우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북방정책으로 김일성이 비빌 두 언덕 소련과 중국을 동시에 허물어 버렸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 남북기본합의서와 UN 동시가입으로 세계의 이목을 흐리고 시간을 버는 한편 더욱 세찬 대남공작으로 때를 기다렸다. 민주화의 혼란은 반공전선을 무너뜨리고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김씨 왕조는 핵과 미사일로 미국에겐 동반자살의 무기를 과시하고 한국에겐 민족적 자부심(좌익)과 공포감(우익)의 무기를 전시하는 한편, 1980년 광주사태에서 비롯된 반미친북 정서가 대한민국의 다수 여론이 되도록 치밀하고 집요하게 대남 심리전을 벌인 끝에 드디어 한국과 미국을 이간시키는 데 거의 성공했다. 미군만 철수하면 북한이 연방제의 허울로 한국을 흡수통일 하는 것은 여반장이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 잠시 방사포 세례를 퍼붓고 미사일 몇 방 날리고 무인지경의 바다와 귀신도 모르는 땅굴로 해안과 육지에 거점을 마련한 후 청와대와 방송국과 국방부를 장악하면, 일주일 안에 '김정일 통일 대통령'이 탄생하게 된다.
좌익의 90%는 스스로 진보세력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저간의 사정을 알 리가 없다. '그 날'에 '진보파'가 순수한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선제공격이냐, 기습남침이냐?]
선제공격이냐, 기습남침이냐?
기습남침이다. 미국이 선제공격하려면 중국과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동북아는 중동이 아니다. 6·25때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만주와 상해를 원자탄으로 폭격하지 못한 것은 중국과 소련을 동시에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소련에도 원자탄이 있었던 것이다. 월남전에서도 월맹을 원자탄으로 폭격하지 못한 것은 중국과 소련에 원자탄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선 동양의 작고 가난한 나라 한국과 월남을 위해서 그런 모험을 감행할 이유가 없었다.
선제공격이냐, 기습남침이냐?
기습남침이다. 한국으로부터 작년에 이어 올해도 40만 톤의 쌀을 받아 각각 2년 치의 군량미를 확보하였지만, 예비전력 745만 명을 동원하려면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무엇보다 유류가 턱없이 부족하다. 천만뜻밖에도 2002년 10월 북한이 농축우라늄 개발을 내놓으면서 새로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자마자, 미국이 1995년 1월부터 제공해 오던 중유 50만 톤을 그 해 12월분부터 바로 끊어 버렸다.
1994년 제네바 협약에서 북한이 거둔 최대의 성과를 단번에 무산시켜 버린 것이다. 국제적 약속도 전혀 지키지 않고 그 책임을 도리어 덮어씌우는 데 도가 튼 북한이지만, 이 단호한 조치에 약속 위반이니 어쩌니 아무리 떠들어야 아무 소용없었다. 다행히 2003년 10월에 중국의 오방국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방북하면서 중유 50만 톤과 식량 20만 톤을 제공하기로 약속해서 한숨을 돌렸지만, '에너지 때문에 망한 북한'은 다시 1년간 에너지 때문에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연간 도입 원유의 30~40% 차지하는 공짜 중유 50만 톤이 1년간 딱 끊겼다가 중국의 선심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지만, 북한의 에너지난은 전 공장의 80%가 문을 닫을 정도로 심각하다.
[김정일의 방중과 용천역 참사]
2004년 4월 김정일의 방중 제1 목표는 어쩌면 원유 확보일지 모른다.
정유시설이 시원찮아서 중유와 경유, 휘발유 형태로 지원을 요청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중국에게도 밝히지 않았겠지만 전쟁용일 것이다. 중국한테는 경제용이라고 둘러대고 미국과의 관계를 일깨우며 철저한 보안을 요구했을 것이다. 전투기와 전차에 쓸 기름이 확보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최우선으로 배정하지만, 북한은 유류난으로 군사 훈련도 잘 못한다. 1주일분만 확보하면 나머지는 한국에 가서 조달하면 되니까, 북한은 충분히 기습남침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장시설이 태부족하여 한 달 치 이상은 확보하기 힘들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의 선제공격을 묵인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핵과 미사일 때문이다. 이건 양날의 칼이라서 미국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도 용납 못한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서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손을 들어 주면서 미국을 견제하지만, 대내외적으로 물증이 확실히 드러나면 더 이상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도 시차만 있을 뿐, 김정일의 목을 노린다는 말이다. 겉보기에는 국내에서 2300만이 김정일에게 절대 충성을 보이는 듯하지만, 김정일이 자신의 행차를 1호 행사라 하여 국가 최고의 기밀 사항으로 취급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2300만이 잠재적인 적이다. 2300만 누구나 김정일의 목을 노린다는 말이다. 용천역 참사에서 드러났듯이 그가 지나가는 시각과 최소 15분 최대 9시간 차이밖에 안 나는 만큼 김정일은 상상을 초월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독재자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는지 가장 잘 안다. 그래서 자기 목숨 지키는 데 가장 신경을 많이 쓴다.
[이판사판의 김정일]
사방에서 무엇보다 바로 안방에서 그의 목을 조여 온다. 만약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 정권을 교체하는 선에서 미국의 선제공격을 묵인하는 상황이 오면, 김정일은 하늘로 솟을(중국으로 망명) 수도 없고 땅으로 꺼질(기습남침) 수도 없다. 하루에 1500회 출격하면, 아무리 지하에 요새를 구축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영리한 폭탄(smart bomb)'과 '귀여운 핵(mini nuclear bomb)'에 의해 전 요새와 전군이 잿더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 때에 곳곳에 폭동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목 없는 뱀의 꼬리 흔듦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의 살 길은 막판 뒤집기뿐이다. 기습남침뿐이다.
[힘의 균형이 깨진 1989년]
1989년 이전만 해도 힘의 균형이 유지되었다. 그래서 북한도 한국을 도모할 수 없었고 한미 연합군도 북한을 도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 후 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종식되면서 중국에 이어 소련도 자본주의 국가로 변호함으로써 힘의 균형이 완전히 깨어졌다. 북한이 살 길은 50년 거짓(공산봉건독재)을 버리고 참(자유민주와 시장경제)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거짓 공화국'은 참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렸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최후의 막판 뒤집기를 노리고 끈질기게 버텼다. 핵(군사력)으로 미국과 맞서고 대남 공작(심리전)으로 한국을 서서히 접수하기 시작했다. 멀쩡한 300만의 생명을 잃고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최후의 영광을 위해서 15년을 버텼다. 작전은 성공 직전이다. 무엇보다 한미 이간에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한국에는 친북 세력이 민주와 진보를 독과점하면서 '민족·자주·평화'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세력이 장마철의 잡초처럼 우거졌다.
[초읽기에 들어간 미국과 북한]
미국과 북한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9·11 사태 이후 핵을 절대 포기할 리가 없음이 드러난 북한을 상대로 미국이 현상 유지(status quo)를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여기에 큰 변수가 두 개 생겼다. 하나는 한국에서 친북 세력이 득세하게 된 것과 중국의 등장이다. 2008년은 중국의 개혁개방 30년이요, 북경 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이다. 중국은 새 천년에 접어들면서 실질구매력으로 일본을 물리치고 세계 제2위의 경제강국이 되었다. 이것은 군사와 외교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바로 중국이 드디어 외국에 군대를 보낼 여력이 충분하다는 말이다. 2002년 만주에서 건국 후 처음으로 중국은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중국과 북한 국경에 1만 5천명의 군대를 배치했다.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2200년 중국의 대외 정책을 미루어 보면, 그 노림수는 분명하다. 그것은 북한을 접수하겠다는 것이다. 400년 중국의 내란을 종식시킨 후 동북아는 당과 신라, 일본, 발해가 들어섬으로 비로소 안정되었다. 중국의 재통일이 삼국 통일과 일본 건국으로 이어졌다는 말이다.
[중국의 부활은 현상 유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산업화에 뒤진 '병든 獅子'가 150년의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산업화에 성공함으로써 '과거의 영광'에 다가가고 있다. '황룡'은 2008년을 영광의 원년으로 삼길 원한다. 연호를 새로 짓고 만세력을 새로 제정해 아시아의 변방에 나눠주길 원한다. 중화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준 오랑캐는 모조리 '동물원의 원숭이'로 만들었지만, 오직 한 족속 고구려의 후손은 아직도 숲에서 뛰논다. 다행히 숲은 갈라져 있고 그들은 눈이 밝지 못하다. 식량과 원유로 사실상의 중국 식민지가 된 평양은 오로지 동족을 죽이기 위해 군사력의 99%를 서울로 향하고 있다. 귀신이 씌운 서울은 결정적 순간에 평양을 회복하고 중원을 견제할 막강한 친구를 제 발로 걷어차고 있다. 비위만 좀 맞춰 주어도 통일시켜 줄 친구를 내쫓고 있다.
"통일? 누구 마음대로! 초강대국 미국이 우리보다 열 배 잘 사는 얄미운 한국과 함께 올라오면 어쩔 수 없지만, 다행히 GI가 한 명도 안 올라오면 중화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준 고구려의 젖줄 살수를 절대 양보할 수 없지. 우리 살람, 1300년을 기다려 왔단 말이다!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에게 당한 치욕을 씻으려고!"
성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무너뜨려도 깃발을 꽂지 못하면, 승리는 내 것이 아니건만 그걸 모르고 서울은 함께 깃발을 꽂을 친구를 내쫓고 있다. 평양이 기습남침의 불장난을 하면 후방을 든든히 지켜 주겠다며 압록강을 건너면 되고, 워싱턴이 선제공격의 불을 지르면 불 끄러 간다며 압록강을 건너면 된다.
역시 제일 약삭빠른 나라는 뱀같이 영리한 일본이다. 앞으로 벌어질 사태를 거의 다 짐작하고 미국에 바짝 붙는다. 한국에 쏟던 애정까지 다 차지하고 아시아 나아가 세계를 '섬돌 아래(陛下)' 무릎 꿇리려는 황룡 중국을 견제한다. 어부지리로 최소한 동해는 차지할 듯하다.
[청룡의 비상]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잠시 잠들었던 '청룡'이 밝음을 제일 무서워하는 '도깨비'를 밝은 눈빛 하나로 물리침과 동시에 토라진 '독수리'를 어루만져 함께 '황룡'을 물리치고 동쪽 하늘에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동해의 빈 섬에서 혀를 날름거리던 '독사'도 얼른 물속으로 자맥질해서 제 소굴로 기어들어 갈 것이다. 뼈도 못 추릴 것 같으니까. (2004.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