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집 할아버지
내가 태어 난 새미실 마을은 옥씨네 집성 마을이었다.
산등성이 하나씩 사이에 두고 윗 새미실 아랫 새미실로 불리어 졌는데 위 아랫마을 각각 이십여 호의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초가 일색인 이 마을에 단 하나 우리 문중 할아버지 댁만 함석지붕이었다.
50년대 초에 벌써 초가의 탈을 벗고 지붕개량을 한 걸 보면 할아버지 댁은 재산이 넉넉하였거나 아니면 할아버지께서 상당히 개화되신 어른이었던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 댁을 양철집이라 불렀고 그래서 그 양철집이 할아버지 댁의 택호가 되었다.
내가 할아버지를 의식할 나이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환갑의 노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환갑의 나이면 굉장히 장수하셨던 것으로 마을의 어른이었고 종문의 어른이기도 하였다.
생존해 계신 종문 중에서는 제일 항렬(行列)이 높으셨고 연세도 높으시니 어른대접은 당연한 것이었다.
옥씨네 후손들이 대체적으로 얼굴이 긴 골상이기는 하지만 양철집 할아버지는 유독 길어서 동네 사람들은 마상(馬像)할아버지라 부르기도 하였다.
여름철에는 하얗게 바랜 모시 한복에 꼭 모시 두루마기를 입으셨고 봄 가을 이면 무명 바지저고리에 무명 두루마기. 겨울에는 솜을 넣은 명주 바지저고리에 까만 세비로 두루마기를 정갈하게 입으시고 외출을 하셨다.
동네 안 나들이에도 항상 옷을 갖추어 입으셨는데 한 손에는 삽괭이를 장죽(杖竹)삼아 짚고 다니셨다. 그 삽괭이야 말로 만능이었다.
그냥 걸으실 때는 지팡이였고 간혹 당신의 전답근처를 지날 때는 막힌 물꼬를 터주는 괭이였고 길가에 나무 가장이나 돌멩이가 딩굴어 아이들이 걸려 넘어질 위험이 있으면 끌어내 치우는 연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삽괭이는 할아버지의 상징이요 위엄이었다.
나는 양철집 할아버지가 쟁기질을 하거나 지게를 지고 농사일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도 마당의 우케를 채 덮지 않는다고 양철집 할머니는 늘 푸념이셨다.
그렇다고 할아버지께서 학문이 높은 것도 아니셨다. 할아버지께서 한서를 읽거나 시조를 읊조리거나 그도 아니면 상가에서 만장을 짓고 쓴다거나 목소리를 가다듬어 읽는 것을 나는 본 일이 없다.
그런 자리에서는 언제나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약주를 드시면서 다른 손님들과 환담이나 하시면서 딴청이었으니 아마도 요즘 노래방에 끌려간 내 꼴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는 조상을 섬기시는 일에는 관심이 많으셨고 또 가장 적극적이셨다.
문중의 대소사를 의논하기 위하여 양철집 할아버지는 종종 우리 집에 오셨다.
할아버지께서 헛기침 한번 하고 삽괭이 짚는 소리가 좀 크게 들리도록 탕탕거리며 사립 안으로 들어서면 아버지께서는 하던 일을 멈추시고 정중히 할아버지를 모셨다. 반사적으로 어머님은 부엌에서 술상준비를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담담하게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종사를 논 하셨는데 의논이라기보다는 할아버지의 뜻을 일방적으로 아버지께 전달하고 강요하시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또 집안 누구네 집에 기제사가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 댁을 찾으셨다.
제사음식 준비하는 것을 점검하고 미리 준비된 안주로 약주 대접을 받고 가셨는데 그럴 때면 꼭 제사음식의 질과 량에 대한 잔소리를 하시기로 자부나 손부 되시는 분들이 늘 불평을 하셨다.
해마다 시월이면 모시는 시제에서도 제물준비의 불성실함을 트집 잡아 가탈을 부리고 야단을 치기도 하여 아랫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드시곤 하였다.
특히 아이들이 버릇없이 굴 때는 매우 근엄하긴 얼굴로 나무라셨는데 어린시절 할아버지 앞에서 꾸중을 들을 때면 우리는 얼굴한번 쳐들지 못하고 길고 긴 할아버지의 훈도를 들어야 했다.
이처럼 양철집 마상할아버지는 문중의 감독자였고 가문의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오늘 조간신문에는 서울 송파구청에서 마을마다 연세가 높으신 어른들을 골목호랑이 할아버지로 임명하여 생활의 질서를 지키지 않는 마을 사람들과 버릇없는 마을 아이들을 훈도하는 “골목호랑이할아버지”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퇴근길 지하철 전동차의 노약자석에 버젓이 앉아 신세대 애정표시에 이성을 잃고 있는 분별없는 젊은이들을 보며 반세기 전 세상을 떠나신 양철집 마상할아버지를 떠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