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대담 -대구 보광선원 조실 화산(華山)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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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요즘 선방에서 해제비를 주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공부가 망한 원인입니다. 공부는 그런 게 아닙니다. 예로부터 배부르면 삿된 생각이 나고, 배고프고 추워야 도 닦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사진 안병인, 월간 불교와문화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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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노릇 하고 가자는 게 수행입니다…
재개혁을 완수하지 못했으니 지금의 불교가 온전할 리 있겠습니까?"
막속급호 막속급호(莫速急乎 莫速急乎)라
화산(華山)스님을 뵙기 위해 주석하고 있는 대구 보광선원을 찾아가는 필자의 발길은 몹시 설레었다. 그간 시절인연을 못 만나 이제야 처음 찾아뵙는 큰스님이기에 더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날 불가피한 개인 일정과 맞물려 잠을 늦게 청한 터, 이른 새벽부터 서두른 대구행이 몸을 무겁게 짓눌렀지만 마음만은 새신랑의 설렘과 다르지 않았다.
2월 24일(2005년), 동안거 해제일 다음날이었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니 대구까지 가는 길이 한결 쉬웠다. 보광선원에 도착하자 선원 살림을 맡고 있는 자혜심 총무보살이 필자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보광선원은 대구시내 아파트단지를 주변에 두고 있는 주택가 속 포교 일번지다운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일평생 깨달음을 구하고 대중을 교화하겠다는 화산스님의 일대서원과 숨결을 도량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필자 일행은 먼저 법당에 들러 부처님께 삼배의 예를 올린 후 큰스님께 친견례를 올렸다. 예를 마치고 막 자리에 앉으려니, 가슴 철렁한 큰스님의 말씀이 귓전을 때렸다. 대담을 요청하면서 보내드린 필자의 대담질의서를 소상히 살펴봤다는 큰스님의
소감이었다.
“정론을 구현하겠다는 기획 의도를 잘 알겠는데, 한국불교의 현실을 거론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비방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상대가 갈라져 있을 땐 말할 수 있겠지만, 조계종에 몸담고 있는데…. 잘못된 점을 본인들에게 말할 수 있을지언정 제3자에게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알고 차 한잔 하면서 한담이나 나누지요."
차나 마시고 서울로 올라가야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큰스님의 서두 말씀은 필자 일행이 보광선원을 찾은 근본 취지를 궁색하게 만드는 전언임에 분명했다. 내심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랬다. 본 기획 ‘장로대담'은 분명한 기획 의도를 갖고 출발했다. '한국불교에 수행은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명제를 축으로 수행이 무너진 근본원인과 한국불교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방안은 결국 수행 회복에 있다는 보편타당한 논리를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리자는 취지였다. 새삼스런 주제는 아니나, 이 같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되짚어보기 위함이었다.
하여 한국불교의 희망과 원력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길라잡이가 필요할 터, 활안의 선지식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허나, 급하다. 우리 시대 몇 남지 않은 선지식들의 성성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천4백여 년 전 원효성사가 《발심수행장》에서 목놓아 외친 ‘막속급호 막속급호(莫速急乎 莫速急乎)'의 메아리가 새삼 우리 시대 대중의 귓전을 강하게 때리는 것도 이미 오래 전 무너져버린 수행 회복의 절실함 때문일 것이다.
적막한 현실, 선지식도 고독하다
화산스님을 찾은 까닭이 그것이었다. 인과법칙을 굳이 앞세우지 않아도 오늘날 한국불교가 수행을 잃어버린 원인은 분명 있을 것이고, 그 까닭을 구명(究明)해야 비로소 잘못된 결과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즉, 한국불교의 현실을 거론할 수 없다는 큰스님의 서두 말씀은 필자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기에 족했던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묘안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내 큰스님의 이어지는 말씀에서 안도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퇴물승입니다. 모두가 잊어버리고 있지요. 처음에는 다 아는 사실인데 물을 게 뭐 있겠나 싶어 대담에 응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사실, 나보다 몇 배 더 나은 분들이 많았는데 그땐 묻지 않고 이제야 보잘 것 없는 나한테 물으려고 하니 한편으론 송구스럽고 당신네도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디다. 도반인 서옹·덕암·석주스님을 비롯해 선배들은 이미 다 가셨으니, 내 처지를 생각하면 적막하고 서운하지요. 참 한심하다 싶기도 하구요. 그런 내 마음을 먼저 알기나 하고서 궁금한 거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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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대구 보광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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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적막한 현실을 곱씹고 있던 터였다. 그러고 보니 큰스님의 세납이 87세다.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세수이기에 현재 생존한 도반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다. 그래서였을까. 필자 일행을 맞는 시절인연에 다시한번 당신의 적막한 처지를 떠올렸고, 한편으론 반가움의 소식을 그렇게 전하고 있는 듯싶었다.
큰스님의 속내를 알고서야 필자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여, 이제부터 지혜를 빌리고자 큰스님 가까이 다가서니 정말 반가운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다. 앞서 보내드린 대담질의서 횡간에 큰스님께서 손수 정리한 글씨가 필자의 눈을 초롱처럼 만들었다. 허니, 큰스님의 서두 말씀은 문외한 필자를 시험한 것이었다.
“참사람이 되는 일, 그게 수행"
먼저 필자 일행과 대한불교진흥원을 소개했다. 큰스님은 메모지에 필자 일행의 이름 석자를 적었다. 불교진흥원 사무국장 최명준 법사의 군승 시절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무소처럼 당당한 발걸음과 사자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 잔글씨도 쉬이 읽고 써내려 가는 밝은 눈과 손놀림은 세납 87세를 무색하게 했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큰스님께서 먼저 길을 열었다.
대담에 앞서 한국불교의 현실을 구명(究明)하고자 한 취지를 다시 밝혔다. 종단을 비방하거나 치부를 들춰내고자 함이 아니라, 까닭을 바로 알아야 오늘을 바로 살피고 보다 나은 내일을 담보할 수 있다는 삼세인과(三世因果)의 근본을 드러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아예 본론부터 여쭈었다.
-한국불교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직업적 성격의 성직(聖職)이란 말이 보편화되어 어느새 불교집안에도 수행보다는 성직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유의 개념이 강하고 종권을 축으로 빚어지는 갈등과 반목과 단위 사찰의 주지 다툼 등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폭력성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범계(犯戒)는 이미 예삿일이 되어버렸고, 삭발득도(削髮得度)한 목적 또한 마치 먹고살기 위한 수단처럼 되어버린 듯합니다. 곧 수행의 회복을 절실히 요구받는 까닭이지요.
“수행이라 함은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중(僧)이 됐거들랑 그 본뜻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부터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덜 되면 중이라고 할 수 없지요. 사람이 뭐냐? 옷깃 단정함을 예의라 하지만 예의라 하지 않고, 서로 도와줌을 어짐(仁)이라 하지만 어짐이라 하지 않고, 나라에 몸 바침을 충성이라 하지만 충성이라 하지 않고, 굳게 약속 지킴을 신의라 하지만 신의라 하지 않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일을 은혜라 하지만 은혜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상(相) 없이 살다가 후세에 이름도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그것을 일러 진인(眞人), 곧 참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온전한 사람입니다. 보편적 통론(通論)마저 망각하고 잊어버리는 그것이 무여열반(無餘涅槃)의 도리이지요. 그렇게 사람노릇 하고 가자는 게 수행입니다."
역시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만암(曼庵)스님이 평소 강조한 중(僧)의 개념과 상통하고 있었고, 도반 서옹(西翁)스님의 참사람운동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수행은 그렇게, 우리시대 선지식이라 할 수 있는 큰스님들의 호흡과도 같았기에 의미 또한 통념(通念)이 되어 있었다.
큰스님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세속의 인연과 은혜와 모든 상(相)을 벗어나는 것, 도를 닦아 본래의 자기자리를 얻는 것을 출가라 하는데, 작금의 현실은 허망한 것 가운데 허망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에 집착하고 있다는 질책이었다. 이 도리를 황천(黃泉)가는 객이 일러주고 가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옹다옹하고 있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그것은‘무착일점심(無着一點心) 화중생연화(火中生蓮華)라는 수행의 도를 일러주고 있음이었다.
준비없는 개혁, 정화(淨化)의 오류
내친 김에 재차 본질적인 문제를 여쭈었다.
-많은 불제자들은 법계가 무너지고 수행이 없다는 현실을 걱정합니다. 오늘날 수행이 무너진 원인은 무엇이며, 수행의 회복 방안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 원인과 회복 방안 또한 광복 이후 이른 바 교단정화운동과 불가분의 역학관계가 있을 듯합니다만….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요즘 선방에서 해제비를 주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공부가 망한 원인입니다. 공부는 그런 게 아닙니다. 예로부터 배부르면 삿된 생각이 나고, 배고프고 추워야 도 닦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당시 교단 정화도 그렇습니다. 목적을 달성했지만 준비없는 개혁을 하다 보니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요. 이제라도 착실히 공부한 스님들이 원력을 세워야 하는데, 공부로 과시할 생각은 안 하고 지위를 찾고 조직과 힘을 모으는 일에 열중하니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중 이전에 사람이 먼저 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염치도 있고 체면도 알아야 하는데 그것도 없어요. 광복 이전에는 그래도 치열하게 공부하는 스님이 많았고, 의리와 정도 살아 있었는데…."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담스님도 잘못된 정화를 인정하고 재개혁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걸로 압니다.
“맞아요. 그랬습니다. 허나 원력을 이루지 못하고 돌연 돌아가셨지요. 재개혁을 완수하지 못했으니 지금의 불교가 온전할 리 있겠습니까? 반세기가 지났으나 인적 쇄신은 물론 종단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구조마저 안돼 있으니 걱정입니다."
표현은 완곡했으나 분명 통분(痛忿)을 숨기지 않음이었다. 이내 필자에게 보여준, 당신께서 소장하고 있던 한암(漢巖)스님의 친필교지(親筆敎旨)는 그러한 속내를 대변해 주었다. 하나는 출가승의 본분을 적시한 중국 원나라 중봉선사(中峰禪師)의 법어를 옮긴 것이었고, 하나는 금언(金言)이었다.
특히 한국불교의 현실을 예견한 듯한 한암스님의 금언은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의 예지를 보는 듯했다.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말세비구(末世比丘)
형사사문 심무참괴(形似沙門 心無慚愧) 모양은 중이나 마음은 부끄러움조차 모르고
신착법의 사염위진(身着法衣 思染僞塵) 몸은 법의를 걸쳤으나 생각은 거짓에 오염돼 있고
구송경전 의억탐욕(口誦經典 意憶貪慾) 입으로는 경전을 외우나 마음은 탐욕만을 생각하니
주탐명리 야취애착(晝貪名利 夜醉愛着) 낮에는 명리를 탐하고 밤에는 애착을 취한다
외표지계 내위밀범(外表持戒 內爲密犯) 겉은 지계를 말하나 안으로는 범계를 일삼고
상영세로 영망출리(常營世路 永忘出離) 항상 세상일에 관심두니 길이 출가한 뜻을 잊었구나
편집망상 기척정지(偏執妄想 棄擲正智) 망상에만 집착하니 바른 지혜를 던져 버렸도다
그래서였을까. 큰스님은 1994년 개혁종단 출범 당시 2백자 원고지 16쪽에 달하는 ‘조계종 개혁 방안을 몸소 작성해 총무원에 보낸 일이 있다. 절망감 이면에 애틋한 애종심을 살필 수 있는 이 개혁 방안은 △삼권분립제도 △본말사제도 △재적본사승제도 △수도승과 교화승제도 △수도·교화승의 특전법(特典法) △의회제도 △계율운영제도 △승려의 의상 및 분한규제 등 총 8개 항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랬다. 큰스님은 항상 개혁을 추구했고 잘못된 현실을 보고 결코 눈감지 않았다. 광복 직후 불교혁신운동을 주도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한 사실도 그걸 잘 말해주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용명·김대월 스님과 함께 통도사 3대 나발승(喇叭僧)으로 불리며 대중교화에 앞장섰다. 훗날 TV가 제작되고 연극·영화 등도 대중화될 것이라며 그에 대비한 포교전략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화 ‘부설거사'의 변사를 맡고, 연극 '목련존자'를 제작·공연한 일도 있었다.
물론 그 같은 진보적 행보는 무엇보다 시대상을 꿰뚫어보는 혜안(慧眼)과 비판 의식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사회현실에 부화뇌동하기보다는 주체적 자각을 통해 옛 선인들이 보여준 지도자적 통념을 우리 사회에 실현하고자 하는 몸짓과 다름 아니었다. 대담하는 시간 내내 큰스님이 보여준 열정과 포효(咆哮)는 노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여전히 몸과 마음의 성성함을 확인시켜 주었다.
“지금 한국불교는 춘추전국시대"
큰스님은 다시 만해(萬海)스님의 ‘불교유신론'을 주제삼아 말을 이었다. 불교혁신운동에 참여했던 당시의 상황도 회고했다. 불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당시 인사들의 이름을 줄줄이 기억해냈다. 그리고 이 모두를 실현하지 못한 조선불교의 비운(悲運)을 마음 속 깊이 삭이고 있었다. 1954년 이승만 정권의 정화 유시로 촉발된 비구-대처승 분규, 곧 교단정화운동은 그렇게 준비없이 추진되었고 결국 잘못된 결과로 드러난 현대불교사의 큰 상처로 남았다.
“지금은 한국불교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을 잃어버린 난립 시대 말입니다. 뜻있는 불제자들은 탄식을 하나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화 이전 시점에서 날개를 다시 달고 새로운 혁신을 추진해야 하겠지요. 이맘때쯤이면 만해스님 같은 분이 다시 올 듯싶은데, 아직 오지 않았는지 소식이 적막합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한번 더 중이 돼야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는지…."
-그래도 희망과 원력은 버릴 수 없는 생명과도 같은 명제일 겁니다. 일대사인연의 큰 포부를 잃지 않는, 그래서 자기본분을 찾고 대중교화를 위한 부단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는 초발심을 다시 세우는 일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수행회복은 거기서 출발하지 않을까요? 물론 선행돼야 할 것들이 있겠지요.
“사실, 불교 계율은 오늘날 지킬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신앙'으로 봉대할 수 있을 뿐이지요. 요즘 스님들을 보면 계를 범하는 것도, 지키는 것도 자기 맘대로잖아요? 그래서 정말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계율을 5계 중심으로 새로 제정하자는 겁니다. 그런 연후 엄하게 관리하자는 거지요. 중(僧)을 받아들일 때 처음부터 이판(수도승)·사판(교화승)·학승(교의연구)의 길을 선택해 출가시키는 방안도 필요합니다. 참선 수행만이 마치 출가승의 임무인 것처럼 쫓지 말자는 겁니다.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와 계율을 중시하는 승려사관학교를 세워 인재를 배출하는 일도 급합니다. 중앙승가대학이나 사찰강원 등 지금의 승가대학은 뭔가 잘못 가고 있어요."
시대적 가치와 저마다의 근기(根機)에 맞도록 수행의 개념을 바꾸고 제도화하자는 고언이었다. 부처님의 삶을 올곧게 배워 실천하고 교단의 약속(계율)을 지키는 일이 곧 수행이요, 그에 맞는 사람을 양성하자는 취지였다. 출가의 기본덕목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구현하는 일은 비로소 예서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일전에 총무원에 보낸 개혁 방안이 여전히 유효함을 말하고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불가와의 인연, 특히 출가는 일대사인연이라고 했다. 적어도 광복 이전까지는 출가 동기가 분명했고, 그것은 곧 출가 이후 수행자로서의 위의(威儀)를 잃지 않는 초석이 되었다. 나라는 잃었어도 민족정신은 살아있었듯, 세속은 버렸으나 삼라만상을 모두 껴안은 사자의 포효는 뭇 중생을 제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화산스님도 그랬다. 입산출가한 까닭이 분명했고 포부도 컸다. 출가 전에는 ‘학문을 많이 배워 높은 자리에 앉으면 돈도 많이 벌고 대우도 받는다'는 세속적 논리에 가득 차 있었다. 허나, 어느 날 싯달타 태자가 부귀공명을 마다한 채 출가한 사실을 전해 듣고 '하,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구나. 나도 그걸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번뜩 사무쳐 발심했다. 당시 양산 통도사에는 젊은 학인들이 불교소년회(어린이법회)를 조직해 불교교의를 가르치고 있었다. 화산은 불교소년회 열성회원이었고 일대사인연은 그렇게 다가왔다.
눈구덩이서 홀연 깨닫다
화산스님은 1919년 음력 11월 17일 경남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 신평마을에서 평택 임(林)씨 집안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달(正達). 수계법명도 정달이고, 화산은 당호다. 부친의 함자는 성식(成植), 모친은 김해 김(金)씨 순분(順粉)이다.
세속의 포부를 버리고 통도사 자장암으로 입산한 때가 1935년 10월, 나이 17세였다. 예서 은사 허몽초(許夢草) 스님을 만났다.
“몽초스님은 당시 경학에 능해 대강백의 칭호를 받았으며, 주역 등 음양서에도 일가견을 이루신 분입니다. 당시 글 잘 알고 율사였던 해담스님, 글씨를 잘 썼던 구하스님과 더불어 통도사 3대 인물로 손꼽힌 당대 큰스님이었지요."
이듬해 사미계를 수지했다. 3년간 은사를 시봉하며 《사집》을 비롯한 일대시교를 배웠다. 특히 동산양개(洞山良价) 선사가 출가에 즈음해 속가 부모님께 보낸‘사친(辭親)의 서(書)를 배울 때는 다시금 출가의 본분을 사무치게 깨달았고, 또한번 크게 발심했다.
곧 걸망지고 만행길에 올랐다. 1940년 나이 22세였다. 목적지는 금강산 마하연. 당시 수좌라면 필히 거쳤던 고등선원으로, 사형인 성학스님과 성철·자운스님 등 50여명의 납자가 정진 중이었다. 목적지로 가는 노정에서 처음 도착한 곳은 서울 선학원이었다. 때마침 당대의 고승 만공스님이 올라와 있었다. 만행길을 알리고 인사를 올렸다. 만공스님께서 걸망 진 화산을 보더니 대뜸 물었다.
“참선은 왜 하려고 해?"
“생사(生死)를 면하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허허, 그래. 잘 한번 해봐! 잘 해봐!"
서울서 금강산까지 5백리 길이었다. 당시 전차가 운행됐으나,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걷기를 선택했다. 해질 무렵 소요산 자재암에 당도했다. 마침 염불방에서 한 노장스님의 아미타불 염송을 듣고 우러나는 신심을 확인했다.
필자는 익히 들은 일화가 있어 사실 여부를 여쭈었다.
-마하연까지 맨발로 걸어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요. 자재암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늦게 강원도 철원 부근에 도착했으나, 마땅히 절을 만나지 못해 울도 담도 없는 여염집에 신세를 청했습니다. 헌데, 다음날 길을 나서려니 신발이 없어졌더군요. 아마도 등짐장수가 지나는 길에 헌신을 바꿔 신고 간 듯하더이다. 마땅히 돈도 없고 살만한 곳도 찾지 못해 맨발로 마하연까지 걸어가게 된 거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산 고행을 연상케 하는 여정이었다. 마하연에서 한 철을 나고 장안사·유점사·신계사·표훈사 등 금강산 4대 사찰을 돌며 안거에 들었다. 배급제 양식이 부족했던 당시 유점사 선원에 방부(榜付)를 들일 수 있었던 것은 대강백 설하(雪河)스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허나, 금강산에서 몇 철을 지내며 화두를 챙겼으나 밝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오대산 한암스님 회상을 찾기로 마음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금강산 개잔령(犬嶺)을 넘어가는데 일순간 눈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 고개는 9, 10월부터 눈이 내려 이듬해 3, 4월에나 녹는 곳이었다. 걸망은 걸망대로 몸은 몸대로 나뒹굴었다. 아찔한 순간에 정신이 홱 돌아오는데 세상이 환해짐을 보았다. 아는 소리가 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열감(法悅感)을 느꼈다.
설만건곤 의무로(雪滿乾坤 疑無路) 하늘과 땅에 눈이 가득하여 길이 없나 여겼더니
안비청천 성락처(雁飛靑天 聲落處) 푸른 하늘에 기러기 날아 소리 떨어지는 곳에
목마장명 석인무(木馬長鳴 石人舞) 나무말은 길이 울고 돌사람은 춤을 추는구나
등한일소 월정명(等閒一笑 月正明) 무심하게 한바탕 웃으니 달이 한창 밝았더라
오도송(悟道頌)이었다.
조각배로 중생을 건네주다
오대산 상원사에 당도해 한암스님을 친견하고 오던 길에 있었던 일을 고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희열을 계속 느낍니다. 공부가 잘못된 겁니까? 아니면 이런 길도 있습니까? 바로 가르쳐 주십시오."
한암스님이 일렀다.
“네 성품자리가 어디에 있는고?"
“어느 곳에 있다고 할 수도 없고 행주좌와처(行住坐臥處)를 떠나 있지도 않습니다."
“자성을 알면 바야흐로 생사를 벗는다고 했는데, 눈감아 죽을 때는 어떻게 벗는고?"
“본래가 본분인데 뭐를 입고 뭐를 벗는 게 있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네 길은 네가 가도 좋겠구나."
인가였다. 화산은 그 자리에서 게송을 읊고 물러나왔다.
천년고총아 사모누흔간(千年古冢兒 思母漏欄干) 천년 묵은 무덤 속 어린애가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마르누나
지피석인지 운횡만리풍(只彼石人知 雲橫萬里風) 다만 저 돌사람만 알뿐인데 구름은 만리풍에 빗겼도다
화산은 예서 3년간 한암스님을 시봉했고 비구계를 수지했다. 또한 한암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오대산을 오가며 소식을 점검받았다. 일본 임제전문학교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때가 이즈음, 1944년이다. 광복 후엔 통도사 강주를 역임하고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한때 납의(衲衣)를 입고 부산 해동고등학교와 울산중학교에서 교편도 잡았다.
대중교화에 본격 나선 것은 이때부터다. 그 세월이 50성상이다. 대구지역을 거점으로 ‘만인의 이익을 위해 각지로 떠나라'고 하셨던 부처님의 부촉(付囑)을 그대로 실천했다. 부처님의 고행과 깨달음과 맨발교화의 일생을 닮고자 서원했고 그 길을 걸었다.
대담 끄트머리에 한 말씀을 청했다.
-큰스님, 90평생 살아오신 생애가 어떻습니까?
눈을 지그시 감더니 게송으로 당신의 삶을 정리했다.
야선도진 무수인(野船度盡 無數人) 조각배로 무수한 사람을 건네주노라니
만강풍우 자종횡(滿江風雨 自縱橫) 강에 가득 비바람이 이리저리 몰아치네
백로다망 경운거(白鷺多忙 耕雲去) 백로는 바쁘게 밭 갈듯 구름을 지나는데
만리백운 공차단(萬里白雲 空遮斷) 만리의 흰 구름이 헛되이 가로 막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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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와 화산스님.
2006년 10월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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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