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서 기원(起源)한 범죄조직.
설립연도 : 19세기경
구분 : 범죄조직
소재지 : 미국
주요활동 : 살인, 밀주, 매춘, 마약 거래
마피아의 어원은 ‘아름다움’이나 ‘자랑’을 뜻하는 시칠리아섬의 말로, 사라센어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범죄세계에서는 범죄조직 중에서 시칠리아적(的)인 것을 가리키며, 범죄조직의 별명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마피아는 원래 19세기의 시칠리아섬을 주름잡던 산적(반정부 비밀결사)조직이었다. 그 조직의 일부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이나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에서 범죄조직을 만들었으며, 1920년대의 금주법(禁酒法)으로 자금원(資金源)이 생기자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마피아 내부에도 질서가 생겼으며, 합의제(合議制)인 위원회가 조직을 운영하게 되었다. 재원(財源)은 매음·도박·마약·사금융(私金融) 등이지만, 노동조합과 회사도 손을 잡고 보호라는 명목으로 이익을 올리고 있으며, 최근에는 ‘범죄 컹글로머리트(복합기업)’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피아의 역사
이탈리아 마피아는 조직범죄단체로서 유럽에서 가장 크며 세계에서 가장 중대한 범죄조직이다. 더욱이 이탈리아 의회보고서, '1984년-1990년 기간 이탈리아의 마피아와 정치'에 따르면, 마피아는 단순한 범죄조직이나 반국가단체에 그치지 않고, ''합법적 권력을 가진 범죄조직''이기도 하다. 마피아는 곧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는 ''재선되고 존중받는 효율적인 두려운 정부''이다.
대표적인 마피아조직으로는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 느드랑게타('ndranghetta) 그리고 카모르라(Camorra)가 있다. 물론 아풀리아(Apulia) 주에서 조직된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Sacra Corona Unita)와 같은 작은 조직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조직들은 대개 위의 거대 조직들에 다시 소속된다. 뿐만 아니라 느드랑게타('ndranghetta)와 카모르라(Camorra)의 경우도 그 두목급들은 가장 큰 조직인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의 조직원이다. 최대규모의 마피아조직인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는 19세기 초 시칠리아(Sicilia)에서 조직되었다.
한편 자신의 관할구역 밖에서 마피아는 국내정치와 국제성의 결합이라는 범죄단체의 또 다른 특수성도 띈다.
마피아는 대개 국가 남부 정책의 소산이었는데, 그 왜곡된 공공지원으로 인해 이탈리아 남부는 중앙정치와 국가기관에 종속되어 왔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중앙정치는 강력하지도 안정적이지도 못했다. 곧 이탈리아의 정치는 후견주의(clientelismo)를 통해 사유화되어(privatizzata) 온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마피아의 발생과 창궐의 온상이 되었던 것이다.
마피아와 정치는 국내무대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서도 활동하는 프리메이슨(massoneria) 조직인 '롯제(logge)'에 의해 매개된다. 가장 큰 롯제는 피아짜 델 제수(Piazza del Gesu)와 비밀조직인 P2가 있으며, 이 롯제들은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도 있다. P2가 전 총리 베를루스코니(Berlusconi)를 후원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에까지 이르는 마피아의 발생과 창궐의 역사는 마피아와 국가 정치와의 관계에 따라 다음과 같이 7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1단계: 1943 - 1950
1단계는 코사 노스트라가 노동조합을 적대시하는 반사회적, 반공 단체로서 정당화되는 시기이다. 노조와 공산당이 매우 강력한 상황에서 당시의 정치 헤게모니 그룹은 이러한 조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2) 2단계: 1950 - 1963
2단계에서는 코사 노스트라의 첫 번째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토지와 시설에 대한 투자를 주 내용으로 하는 '팔레르모(Palermo: 시칠리아의 주청 소재지)의 도시화'의 기간이기도 하다. 코사 노스트라는 이 때 활동의 거점을 주변부에서 팔레르모 시내로 옮겼다.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재임했던 팔레르모 시장 살보 리마(Salvo Lima)는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의 하나인 본탄테(Bontante)와 관련이 있었으며, 시공무장관 비토 챤치미노(Vito Ciancimino) 역시 다른 시칠리아 마피아인 코를레오네시(Corleonesi)의 조직원이었다. 이로써 기업 특히 건설업체 및 개별 정치인과 마피아의 연계가 시작되었다. 팔레르모 시의 마피아는 이후 남부 전역에 걸쳐 범죄조직의 모델로 자리를 굳혀 나갔다.
3) 3단계: 1963 - 1968
이 시기에 비로소 경찰의 대응조치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정확히 1963년 6월 30일 자동차에 장치된 폭탄에 의해 그 뇌관을 제거하려던 다섯 명의 경찰과 두 명의 군인이 폭사한 챠쿨리(Ciaculli) 사건이 있은 후였다. 수많은 수사가 실시되었고, 수백 명의 혐의자들이 보호 수감되었다. 그러나 60년대 말경이 되어서는 불과 몇 명만 감옥형에 처해졌을 뿐, 대부분은 석방되었다. 이로 인해 코사 노스트라는 재기의 기회를 잡았다.
4) 4단계: 60년대 말 - 70년대, 마피아의 황금기
마피아 근대화의 제2단계인 이 시기에 시칠리아 마피아는 마약 거래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조직 내에서는 권력 분쟁이 일어남으로써, 마피아 조직들은 외부인사들에 대한 폭행을 통해 조직내부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그 일 탄이 1970년 9월 16일 저널리스트 데 마우로(De Mauro)의 살해였다. 이어 1970년 5월 5일에는 마피아 조직원 릿조(Liggio)가 팔레르모 검사 스칼료네(Scaglione)를 저격했으며, 1979년 9월 25일에도 수사위원장 체자레 테르라노바(Cesare Terranova)와 그의 동료가 폭탄 살해되었다. 이 시기 마피아의 무력과 경제력의 팽창은 가히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황금기는 1979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5) 5단계: 1980 - 1987
5단계는 대마피아 조치의 2단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경찰이 아니라 검찰에 의해 주도되었다. 마피아의 창궐이 곧 공세의 조건을 부여했는데, 1980년 마피아 소탕을 위해 싸우던 세 명의 검사가 살해된 것이었다. 이 경험으로 인해 대마피아 투쟁을 위한 검사들의 조직이 생겨났으며, 이 조직은 실제로 마피아 두목들에 대한 중형 선고를 가능하게 ?다.
6) 6단계: 1988 - 1992
80년대 말 이탈리아 의회는 반마피아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검사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검사들은 전직을 당해야만 했다. 그와 동시에 마피아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적지 않은 검사들과 저널리스트들이 살해되었다. 1988년에서 1992년에 이르는 여섯 번째 단계는 곧 마피아 근대화의 세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마피아는 마약과 무기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세탁하고 투자하기 위해 국제 금융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989년 8월 한 방송국기자가 당시의 내무부 장관 안토니오 가바(Antonio Gava)에게 정치와 마피아의 연계에 대한 의심을 품고 그 여부를 질문한 적이 있는데, 이 장관은 마피아의 내통으로 결국 체포되었다.
7) 7단계: 1992년 가을 이후
이 단계는 다시 대마피아 조치가 강력하게 시행된 세 번째 단계이다. 대마피아 의회위원회는 마피아와 정치 및 프리메이슨 조직의 연계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마침내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 느드랑게타('ndranghetta), 카모르라(Camorra) 세 거대조직의 두목들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학생들과 공공 및 시민의 반마피아 운동단체들의 성명과 시위가 잇따랐고, 그 중에서도 노동조합들과 시칠리아의 레테(La Rete: 반마피아 운동단체)는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마피아는 비단 범죄현상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적 현상이자 정치적 현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피아 문제는 경찰이나 검찰의 대응조치만으로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정치적 해결을 동반하는 사회운동의 노력을 통해서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