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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그 푸른 그늘에 들어
-제17회 문학기행에 다녀와서
허 소 미
매화와 목련꽃이 지고 새순이 돋는 4월 4일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문학 기행에는 박형철 한림문학 발행인, 이명재 교수, 손광은 교수, 이돈배 평론가, 문학춘추작가 회원 등 50여명이 참석하였다. 광주문화전당역 버스 정류장에서 천사 버스를 타고 8시 50분에 제 17회 문학기행에 나섰다가 오후 다섯 시에 광주에 도착하였다. 문학기행은 문학춘추작가회가 주관하는 연례행사이다. 문학기행의 취지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맞아 문학과 관련된 장소에 찾아가서 보고 듣고 느끼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번 문학기행을 주관한 임인택 회장을 비롯하여 임원진들이 나눠주는 주전부리와 <제17회 찾아가는 문학기행>이라는 안내 책자를 들고 버스에 올라 기행의 여정에 들었다. 박형철 발행인이 문학춘추작가 회원들을 한 분 한 분 모시는 듯 소개해주셨고, 이어 김경희 시인이 문학 기행지에 대한 간단한 문화해설이 이어졌다. 김경희 시인의 해설을 들으면서 시서화(詩書畫)에 능했다는 고산과 공재의 문화 예술적 생애를 떠올렸고, 70~80년대의 극한 상황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다 간 김남주와 고정희 시인의 문학적 생애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어느덧 <고산윤선도유적지>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이현숙 문화해설사와 녹우당 뒷산인 덕음산 비자나무숲에서 불어온 푸른 비바람이 알싸하게 맞아주었다.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라는 별호를 가진 고산 윤선도 가문은 조선시대의 정치와 삶의 철학이었던 유교사회의 도덕규범인 『소학』을 가훈으로 대대로 물리며 몸과 마음을 닦고 근검절약과 적선을 생활의 실천 윤리로 삼았다(충헌공 고산윤선도의 가훈인 『기대아서』). 고산 윤선도의 위민 사상을 알 수 있는 증좌로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있는 몽고항쟁의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 사당 경내에 이곳 어민들을 위해 제방을 축조하게하고 많은 것을 가르쳐주어 크나큰 은혜를 입어 감사드린다는 요지의 고산 윤선도를 기리는 비(碑)가 있다. 과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경주 최씨 못지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가문이다. 근검절약과 위민 그리고 학문 정진에 힘쓰는 사대부답게 고산은 우리나라 시가문학사에 정철과 쌍벽을 이룬다. 문화해설사를 따라 전시관 입구에 들어섰더니 <<고산유물전시관>>이라는 글자가 보이고 해설사는 「어부사시사」의 고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귀띔한다. 고려 때부터 전해오던 '어부사'를 이현보가 '어부가'로 고친 것을 바탕으로 고산은 초장과 중장 사이에 "닷 들어라, 닷 들어라" 일의 진행을 알리는 후렴구와 중장과 종장 사이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라는 배를 젓는 의성어를 후렴구로 두어 노를 저어가는 바다로 나아가는 돛단배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종장에서 "낚싯대는 쥐어 있다 탁주 병은 실었느냐(춘사 2)"로 생업으로 가진 어부로서가 아니라 가어옹(假漁翁)임을 깨닫게 해준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살았던 공재는 당시 청나라로부터 들어온 실학사상을 접하여, 우리나라의 강산을 직접 보고 그리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개척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은 서양화의 입체화 기법도 받아들인 국보 240호로 지정된 <자화상>에서 정점을 찍는다. 클로즈업된 얼굴처럼도 보이는 <자화상>은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정면기법의 강한 눈빛에서 강직한 선비의 기상이 엿보인다.
공재의 손자인 윤영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가채를 쓴 머리에 두 손이 닿아있는 <미인도>는 윤영이 죽은 후에 태어난 신윤복의 <미인도>와 다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 직업적인 화가였던 신윤복의 그림과 취미로 그리는 문인화(사대부들이 그린 그림)와 태생부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화일여(詩畵一如)의 문학관을 지닌 중국 당나라 왕유로부터 처음 시작했다고 전하는 선묘와 담채 그리고 수묵을 위주의 그림을 남종화라 부르는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 때 들여온 <고씨화보>를 보며 연습하여 남종화를 문인화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공재 윤두서는 모방에 벗어나 사생과 관찰을 중시하는 사실주의적인 회화 관을 지녔다(조선 후기 문인인 남태응의 수필 『청죽화사』). 그런 공재의 회화관이 있기에 세밀하고 사실주의적인 <동국여지도>가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 보다 150년 앞서 그려졌지 않았을까. 추사 김정희와 초의 선사의 공동제자였던 나중 남도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도 공재의 그림을 묘사하면서 배웠고, 공재의 <자화상>을 보고 ‘자기 모습이 외증조부를 닮았다’고 한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어 있던 18년 동안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 권의 『여유당전서』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도 녹우당이 보유하고 있던 책들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초은 공파의 시조이며 고산의 4대조 할아버지인 윤효정이 세 아들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것을 기념하여 집 앞에 심었다는 은행나무(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해서 사대부 가문이나 향교에 심어졌다)가 보이고 효종이 자신의 사부였던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경기도 수원에 있던 집을 뜯어 배에 실어와 옮긴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의 현판인 ‘녹우당’은 공재 윤두서와 ‘동국진체’를 만들었던 옥동 이서의 글씨이다. 이서는 워드의 바탕체인 신명조체처럼 쓰였던 그 당시 왕희지체를 기반으로 동국진체를 창시하였으니 이 시대 뒤의 김정희가 만든 추사체와 더불어 우리만의 독특한 서체로 민족적 자긍심을 가져본다. 살림집을 포함한 윤선도 고택 전체를 부르는 이름으로 굳어진 ‘녹우당’ 기와 지붕 위로 불쑥 솟구쳐 나온 ‘까치 지붕’은 연기가 잘 빠져나가게 하기 위한 굴뚝이다, 이 굴뚝은 절이나 궁궐에서 쓰던 굴뚝 방식으로 생활에 유용하면 쓰는 녹우당의 실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좋은 예로 보인다. 명종 때에 충헌공으로 추증되어 불천지위(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 고산 사당 앞에서 고산이 부르면 지금이라도 달려올 듯 지근거리에 포진하고 있는 듯한 고산의 다섯 벗(「오우가」)소나무, 대나무, 물, 바위와 밤이면 임처럼 찾아들어 화룡점정을 찍을 달과 조우하고 있는 고산 윤선도를 상상으로 만났던가. 임인택 회장과 임원진들이 충헌각 마당에 차려놓은 간식을 들며 회원들과 담소를 나누다 문학강의를 듣기 위해 충헌각 영상 자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돈배 문학평론가는 자연의 질서는 오래전부터 창조와 예술의 토대가 되어 왔다면서, ‘나무’라는 자연물을 소재로 하여 쓴 조이스 킬머의 「나무」에서 시의 현대성과 의인법과 시적이미지의 영향을 받은 김현승 시인의 「나무」를 예시로 들며 번역시가 기표가 사라진 기의로만 전해지는 예를 들어보였다. 이어 이돈배 문학평론가는 옥타비오 파스가 『활과 리라』에서 한 말을 인용하여 현대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적어보면, 시의 내용은 주관적이지만 시언어의 특성상 타자의 것이기도 하니 보편타당해야 하고, 시인의 말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솔로몬의 말처럼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쓰인 적 있는 말의 역사적 사실을 갖고 있으며, 시의 성격은 시대 상황 속의 민중의 삶을 지향해야 하고, 시의 재료인 언어는 항상 처음 쓰는 말 같아야 한다는 낯설게 하기를 말하고 있다. 아들을 잃은 참척의 슬픔을 정서로 한 박완서의「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소설과 김현승의 시 「눈물」등을 예시로 내러티브가 있는 소설이라는 장르와 언어의 함축미와 절제미를 가진 시라는 장르의 차이를 대별하여 보여주었다. 작품에는 작가 자신의 삶이 들어있으며 작품이 지향해야 할 바는 사랑이 목마를 때나 지칠 때 위안이 되는 데에 있다는 마무리로 이돈배 평론가의 문학 강의는 끝나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버스에 올라 이동한 곳은 해남군청 옆 식당이었다. 식당에서 소고기 전골로 점심을 먹고 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우중 속에서 오후의 일정을 소화하기에는 힘들 것 같다면서 문학기행의 나머지 일정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마저 하지 못한 기행지의 아쉬움에 답사하던 날들의 여정을 되새겨 본다. 한 달 전 답사하던 날 고산윤선도유적지를 구경하고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고정희 생가 가는 길에 만난 용두리 고분은 나주의 반남고분군에서 보았던 장고형 무덤과 같았다. 6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방 호족의 가족이나 군신묘로 추정된다고 하였던가. 왜의 무덤이라는 이견도 있지만, 용두리 고분을 보며 죽음도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면서, 장례문화가 시작된 때부터를 인류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는 시각도 있다는 것을 되새기며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 있는 고정희 생가로 발길을 돌렸었다.
고정희 시인의 서재에 들어섰을 때 생전의 시인이 삶의 금과옥조로 여기고 살던 ‘고행, 묵상. 청빈’이 마주하였다. 1975년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 「부활 그 이후」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고정희 시인은 첫 시집『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를 포함하여 10 권의 시집을 상재한 시인이다. 고정희 시인은 자신의 문학적 삶에서 광주와 수유리, 그리고 ‘또 하나의 문화’와의 만남인 ‘세 개의 행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광주에서 시대의식을 얻었고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시절의 만남을 통하여 민중과 민족을 얻었고, 그 후 ‘또 하나의 문화’를 만나 민중에 대한 구체성, 페미니스트적 구체성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가부장제 아래의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 눈을 돌린 앙가주망적인 사회참여 시를 썼을 뿐 아니라 치유의 일종으로 『초혼제』,『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장시집으로 문학적 살풀이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삶을 재충전하기 위해 자주 찾던 지리산 등반길에서 실족사 했다. 고정희 생가에서 김남주 생가는 가까웠다.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진혼가', '잿더미'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민족시인이라는 칭호가 붙는 김남주 시인은 오랜 영어의 생활 때문에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췌장암으로 48세에 타계했다. 시인은 시는 ‘전사로서의 사회 운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오는(「시의 요람 시의 무덤」)것이라면서 어느 해 추석 무렵 귀성객이 되어 아들과 고향의 들길을 걷는 정경을 그린 「추석 무렵」이란 서정성 짙은 시를 쓰기도 했다. 이번 문학기행은 자연인 다섯 벗을 소재로 순수 서정시를 쓴 「오우가」와 「어부사시사」의 윤선도 고택 녹우당과 시대의 극한 상황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참여시를 쓴 김남주와 고정희의 생가를 찾아 그들의 문학적 생애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여정이었다.. 고정희의 유고 시집인『아름다운 사람 하나』 연시집이 출판사를 바꿔가며 출간되고 있다고 한다.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인가 보다. 그런 사랑은 어떠해야 된다고 김남주는 말하고 있는지 그의 「사랑1」을 옮겨본다.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이 세상의 모든 상처와 어둠을 씻어내고 희망을 가지고 내일의 꿈을 꾸며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수 서정시와 참여시의 접점을 이루는 시라고 볼 수 있다.
녹우당 그 푸른 그늘에 들어 고산 윤선도 가문의 적선지가의 면모와 학문적 성취,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떠올리다 보니 그새 광주 시내에 들어섰고 광주터미널에서 내리니 빗발이 우루루 달려든다. 녹우당 뒷산 덕음산 비자 숲에서 불어오던 푸른 비바람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옥고 잘 읽고 갑니다. 그날의 감동이 생생한 듯합니다.ㅎ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날이 생생하게 지나갑니다.
와1 그날의 기행기록!! 이렇게 생생하고 구체적이고 문학적이라니!!!
감격, 그리고 감탄입니다. 허시인님 대단한 역량이시고 문력이시고 고맙습니다.
문학기행을 참여하지 못했지만 생생한 기행문 덕분에 실감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