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택수선수의 밝은 모습..보기에는 순해 보여도 사실은 엄청난 "악바리"랍니다.
김택수-명예의 전당 1 (Prologue)-출처 : 후추 명예의 전당(http://www.hoochoo.com/ )
Prologue
후추 명예의 전당 제20호 헌액자 이호 선수를 인터뷰하러 1년 전에 태릉 선수촌에 갔던 일이 있다. 선수촌 입구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저녁 식사를 끝낸 각 종목의 대표 선수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저녁 외출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참 눈에 익은 선수 한명이 츄리닝 차림으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필자 쪽을 지나쳤다. 김택수였다. 그때 필자는 이미 마음 속으로 약속을 했다. '머지 않은 시간 내에 저 사람을 인터뷰하러 꼭 다시 올 것이다' 라고 말이다. 후추의 명전이 꽤 많은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조명하고, '국내'에서도, '비 올림픽 해'에도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각인 시켜가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탁구란 종목이 누락되었었다. 사실 누락될 종목이 아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또, 탁구란 종목만큼 '비인기'와 '인기'의 중간에서 번지수를 헤매던 종목도 없었다.
이미 30여년 전인 1973년 '이에리사-정현숙''사라예보 쾌거'로 한반도를 들끓게 했었고, 그 후로도 수많은 대한의 '탁구 귀신'들이 녹색테이블을 수놓았다. 당시 스포츠 언론에서는 탁구에 대한 특집 기사, 기획 기 사, 선수 인터뷰 등, 국제 대회 전후로 최소한 반 페이지 이상의 공간을 할애했었다. '한국 탁구의 황금기'를 설계하고 건설했던 동아건설의 최모 회장이 서서히 세력을 잃어가던 즈음, 한국 탁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 다시 말해 언론의 초점 역시 '부도 처리'가 되어갔다. 한국 탁구의 설계와 건축까진 좋았는지 몰라도 유지 보수 과정에서는 실패했다. 1 00년을 내다보고 짓는다는 건축물은, 아니 '한국 탁구 아파트'는 결국 부실 공사가 되어 버렸다.
탁구란 종목의 한 인물을 선정해서 후추 명전에 올리는 일이란… 마치 눈 감고 뺑뺑 이 돌려서 아무나 걸리는 한명을 헌액 하더라도 누구도 후추의 선택을 욕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선택의 폭은 넓고 다양했다. 이에리사, 정현숙, 윤길중, 박미희, 이수자, 양영자, 김완, 김기택, 현정화, 안재형-자오즈민, 그리고 유남규… , '소 한 마리 잡으면 버릴 데가 없다'는 축산업자의 말이 떠오를 정도로 우리 탁구의 중흥기 및 황금기를 장식한 별들은 누구 한명도 '버릴 데가 없다'. 개개인의 흥미롭고 독특한 스토리가 담겨져 있고 실력으로 따져도… 아니다, 실력으로 우열을 가리는 발상 자체가 유치하다. 그들 모두 위대한 선수였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후추는 김택수를 선택했다. 김택수가 한국 탁구 사상 최연소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16년째 태극 마크를 달고 '고군분투'란 말의 새로운 정의를 내려줬기 때문도 아니고, 일본의 한 탁구 용품 회사에선 '김택수 라켓'이란 제품을 상품화할 정도로 그를 인정해 줘서도 아니다.
후추가 수많은 대한민국의 '탁구 신(神)' 중에서도 굳이 김택수를 택한 이유는… 그는 우리 팬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회'란 자다가도 벌떡 깰 만큼 지겹도록 들어온 '중국의 벽'을 깨뜨릴 수 있는 '기회'도 아니고, 누굴 만나서 악수하기조차 싫어지는 유럽의 '쉐이크 핸더(Shake Hander)'들을 물리칠 수 있는 '기회'도 아니다. 김택수가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의 현역 생활을 보다 관심 있게 지켜보고 박수와 축하로 그를 떠나보낼 수 있는 '기회'를 뜻한다. 평생 한번도 찾아보지 못한 탁구 경기장을 '김택수 출전'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한번 가 볼 수 있는 그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세계 탁구계의 열손가락 안에 든 'World Class Athlete' 김택수의 경기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버스는 떠나고 신작로에는 먼지만 뽀얗게 일고 있다'는 아쉬움이 이젠 지겨워서 김택수를 선택한다. 수많은 우리 탁구 영웅 중에 그 누구를 선택해도 무방하다면 (객관성, 주관성을 다 떠나서 얘기해도 무방한 건 사실이다) 후추는 '아직도 늦지 않은' 김택수를 택한다.
가끔 김택수를 TV에서 볼 때 마다 필자는 눈물이 난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두 광대뼈,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유니폼 상의, 속이 허옇게 들여 다 보일 정도로 심해진 부분 탈모 증세, 그리고 두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길고도 허무한 한숨… 하늘 같은 선배들 사이에서 약관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김택수 돌풍'을 일으킨 장본인이 어느덧 대표팀의 최고참으로 중국이면 중국, 유럽이면 유럽 의 최강 'Number 1 시드 (Seed)'들과 격돌해서 분전하는 김택수의 모습을 보노라면, 솔직한 심정으로 딱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김택수의 취재를 결정하고 나서 필자는 '고군분투'란 말을 다시 한번 사전에서 찾아보게 되었다. '수가 적고 후원이 없는 외로운 군대가, 힘에 겨운 적과 용감하게 싸움. 적은 인원의 힘으로 도움도 받지 않고 힘겨운 일을 그악스럽게 해냄'. 필자가 잘못 알고 있지는 않았다. 김택수와 한 조를 이루고 있는 현역 파트너들을 과소평가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그냥 김택수를 보면 '혼자 싸운다'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럴 것이다. 스웨덴의 발드너에서부터 중국의 류궈량까지… 김택수의 16년 국대 시절동안 맞붙어야 했던 '세계 1위'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한 명의 '세계 1위'를 겨우 따라 잡을만하면 또 한명의 '세계1위'가 왜 그리도 금세 등장하는지, 김택수가 출전하는 승부는 '2-3' 이란 스코어가 왜 그리도 많은지… 세계 탁구계의 '톱 클래스'는 세대교체다 뭐다 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허구한 날 '김택수'가 결정을 지어줘야 하는지…
'이제 그만 접고 편하게 살아라' 란 말이 입안에서 맴돈다.
누가 붙여줬는지 필자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김택수의 '순둥이'란 별명… 그저 착하기 그지 없고 뽀얗게 생긴 그의 외모만 보고 단정지은 '부당한 별명' 임엔 틀림없다.
깡마른 체구 어디에서 그런 웃기지도 않는 힘이 솟아나오는지, 그 많은 탁구 전형 중에도 김택수가 '파워 드라이브'를 고집하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그는 '순둥이'와는 거리가 멀다. 서양인들과 체력 싸움에서 안 되는 동양인들이라면 '기교파, 두뇌파'가 훨씬 더 어울릴텐데, 김택수는 그들과 아주 제대로 맞짱을 떠 왔다.
'힘 대 힘', ' 테크닉 대 테크닉'으로 말이다.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 그가 보여준 '6시간 투혼의 남북대결'을 누가 잊으리요, 얼마 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보여 준 '32구 환상의 랠리'를 보고도 누가 감히 김택수를 '순둥이'라 하리요…
오히려 김택수의 행동 거지를 살펴보면 '청부 살인자(Hitman)' 쪽에 가깝다. 우리가 보아온 그 어떤 탁구 선수보다도 김택수는 냉철하고 묵묵하고 절제된 행동의 소유자이다. 어지간한 승부처에서도 그는 '쇼맨쉽', '오바'라곤 없다. 현란한 푸트 워크와 어마어마한 궤도와 스피드의 와인드업, 그리고 통렬한 스매싱… 김택수의 '명중' 뒤엔 짤막한 '주먹 불끈' 밖에 찾아볼 수 없다.
'20세기 최고의 펜홀더', '펜홀더의 교과서' 그리고 '영원한 세계 Top 10' 김택수를 후추 명예의 전당 27호 헌액자라 부른다.
'탁구'였더라면 굳이 김택수가 아니더라도 무관했겠지만 후추는 꼭 '탁구의 김택수'만을 고집하고 싶다. 김택수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세계선수권 우승자도 아니지만, 한국 탁구의 자존심을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서 지켜온 외로운 승부사이기 때문에 그를 명전에 초대한다. 김택수마저 은퇴한 다음에 후추가 '뒷북' 쳐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필자는 아마도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김택수의 '고군분투'는 이 글로 영원히 날려 보내고 싶다. 앞으로 경기 전 락커룸에서 라켓 고무 커버에 풀칠을 하고 있는 김택수의 머리 속에 더 이상은 혼자가 아니란 생각,
그리고 비록 눈에 보이는 '아군'의 숫자는 적을지언정 김택수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열렬 후추인'들의 성원의 함성 소리를 잠시라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후추 명예의 전당 안 김택수의 자리는 언제나 빛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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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수-명예의 전당 2 (10-10 클럽)-출처 : 후추 명예의 전당(http://www.hoochoo.com/ )
10-10 클럽
5월14일 발표된 세계 테니스 랭킹을 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의 이형택 선수가 당당히 67위에 올라 있었다. 작년 여름, 4대 테니스 그랜드 슬램 중 하나인 US Open에서 이형택이 16강에 진출한 소식은 아직까지도 사실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아니, 어쩌면 있어선 안 될 일이란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 국민들처럼 테니스란 종목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나 사회적인 저변이 열악한 나라의 특정 선수가 그런 '획기적인 사고'를 자꾸 치다 보면, 혹자는 또 그런 생각을 가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이형택이 좀 봐… 인프라가 어떻고 저변이 어떻다 하더라도 열심히 하니까 되잖아? 투자고 뭐고 다 필요 없어. 하고자 하는 개개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 이형택의 승승장구는 어찌 보면 세계 탑 랭커들을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서 엄청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외국 테니스 협회측에 대한 최대의 '부정 행위' 일 것이다. '67 Lee, Hyung Taik - KOR'이라고 쓰여진 랭킹 페이지에 Top 10 랭커들을 한 번 보았다. 쿠에르텐, 사핀, 애거시, 샘프라스, 카펠니코프, 페레로, 휴잇… 등의 쟁쟁한 스타들이 Top 10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형택이 세계 67위에만 올라도 이처럼 광분하는 우리들에게 과연 세계 Top 10 랭커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저 '넘을 수 없는 산' 정도의 느낌이랄까? 아니면, '인간이 치는 테니스가 아님' 정도??
같은 날 필자는 세계탁구연맹의 홈페이지인 ITTF.COM을 찾았다. 그리고 현재 세계 랭킹을 검색해 보았다. 1위부터 573위까지의 세계 랭킹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탁구 랭킹도 장난이 아닌데… Top 10만 정하는 게 아니네?' 명예로운(?) 573위의 자리는 몰타 출신의 '부티기에그' 선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테니스의 경우 (공간이 모자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1,319위까지 랭킹이 정해져 있었지만, 탁구 마저(?) 100등 이하까지의 랭킹을 정한다는 사실에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규모의 탁구 커뮤니티에 감탄했다. 그리고 김택수의 이름을 보았다. '7 Kim, Taek Soo- KOR' 우리가 테니스의 세계 탑 랭커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그런 막연한 부러움과 신기함을 몰타의 '부티기에그' 선수나 그의 팬들도 김택수의 탁구를 바라보며 느끼겠지?
우리 테니스가 세계 랭킹 100위권에 '걸맞은 나라'라면, 탁구 랭킹 100위권에 '걸맞은 나라' 처럼 보여지는 쿠바, 이집트, 싱가폴… 이런 나라의 탁구 팬들은 김택수의 환상의 랠리를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이 들까… '코리아의 김택수는 미친 인간이다' 라고들 하겠지. 음하하하…
김택수는 1986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에서 북한을 물리치고 2관왕(단체전, 복식)을 차지하며 한국 탁구계의 '차세대 주자'로 급부상한다. 일찌감치 '떡잎'을 알아본 대한탁구협회는 당시 전무했던 '유망주 유학 프로그램'을 가동, 김택수를 1986년 9월부터 87년 1월까지 유럽 탁구의 본고장 스웨덴 스톡홀름의 벨링비 마을로 보낸다. 수많은 사과나무와 자두나무, 마치 에덴의 동산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보이던 벨링비 마을, 그리고 빙하의 자취가 남아있던 키루나 마을에서 보낸 사춘기 소년 김택수의 스웨덴 조기 유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김택수의 탁구 인생에 분수령으로 작용했다.
그곳 '앵비 탁구 클럽'에서 같이 생활하며 훈련하던 선수들이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세계 탁구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불리던 얀 오베 발드너, 페르손, 그리고 에펠그린 등이었다. 이듬해인 87년, 그러니까 김택수가 18살 되던 해 그는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자신의 '세계선수권 첫 경험'을 하기 위해 뉴델리로 향한다.
'약관 김택수'는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같이 연습하던 스웨덴의 발드너 선수와 풀세트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2-3으로 분패하지만, 이 대회를 통해 세계 탁구계는 '코리아의 무서운 아이 - 김택수'를 주목하게 된다.
서울에서 열렸던 88 올림픽. 대표팀 막내 김택수는 1년 선배 유남규의 '금메달 돌풍'에 철저히 밀려난다.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김완, 김기택과 같은 선배들을 실력으로 물리친 바 있었던 김택수지만, '민족의 향연' 88 올림픽에서 만큼은 실력과는 무관한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용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대표팀 엔트리에 올라 있었지만, 88올림픽은 결코 김택수의 몫이 아니었다.
안방에서 열렸던 올림픽에서의 '들러리 신세'를 뒤로 하고 89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유로-아시아 대회에서 김택수는 사상 첫 세계대회 우승을 경험한다. 대회에 출전했던 각국의 선수 중에 최연소의 나이로 팀 선배 김기택 선수를 3-1로 물리치고 정상에 오른 것이다. 김택수의 시대는 그렇게 막이 오른다.
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에서 김택수는 유남규와 한 조를 이루어 동메달을 따냄으로써 중국을 5-0으로 완파하며 '쉐이크 핸드 전성시대'를 예고했던 스웨덴에게 '펜홀더의 자존심'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90년 북경아시안 게임 남자 단체전… 국민들의 가슴 속에 김.택.수.란 이름 석자를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린 북한과의 피 말리는 일대 전쟁. 이 대회를 통해 김택수는 명실공히 한국 탁구의 대들보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 정상의 자리에서 정확히 10년을 버텨왔다. 87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이후, 김택수는 무려 8번의 세계 선수권 대회(격년제)에 출전했고, 4번의 올림픽과 3번의 아시안 게임에 나가서 김택수 특유의 힘과 투혼을 발휘한다. 비록 이에리사, 유남규, 현정화처럼 세계 선수권이나 올림픽 금메달 사냥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유독 김택수에겐 '뒷심 부족'이란 말도 심심찮게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김택수는 그 긴 세월을 한결같이 한국 탁구의 간판으로 군림해 왔다.
김택수는 말한다. 하루이틀 만에 우승여부가 판가름 나는 단기전에선 세계 그 어떤 탑 랭커들과 맞붙어도 이길 자신 있다고… 자신이 추구하는 선이 굵고 체력 소모가 심한 파워 위주의 탁구가 워낙 사람 진을 빼 놓아서 그렇지, 반나절 동안 2-3명 꺾고 우승하는 대회엔 언제 나가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말이다. 그의 말은 '뻥'이 아니었다. 지난 91년 일본에서 열렸던 IOC 회장컵 ('사마란치 컵') 세계 8강 초청경기에서 김택수는 그야말로 펄펄 난다. 세계 8위 안에 드는 중국, 유럽 권의 최강자들을 상대로 한명씩 아주 개박살을 내며 결국 결승에서도 발드너를 가볍게 3-1로 따돌린다.
92년부터 출전했던 '월드 올스타 서킷', 이 역시 세계 탑 랭커들을 초청해 세계 전역을 순회하며 1, 2, 3차 우승자를 가린 후 최종 우승자를 결정하는 단기전 성격의 승부. 이 대회에서도 역시 김택수는 지난 10여년 동안 통산 9번의 우승을 차지한다. 우리가 '모르는 세계 대회', 우리가 '안 본 세계 대회'에서 김택수의 진가는 나타난다. 우리보다 외국 탁구팬들이 김택수를 더 인정하고 감사해 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10-10 클럽'…
야구에는 '30-30 클럽', 그리고 축구에도 '50-50 클럽'이 생겨나는 판국에 왜 탁구에는 '10-10 클럽' 이란 말이 생기지 않는 건지 필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10-10 클럽'이 뭐냐고? '10년 동안 세계 10강'의 자리를 지켜온 실력, 꾸준함, 그리고 체력의 결정체를 뜻한다. 탁구에는 왜 그런 눈에 확 들어오는 용어 하나 만들면 안되나… 필자의 친한 친구는 한국 탁구를 보면서 종종 그런 말을 했다. '김택수가 아무리 잘 해도 빅 게임에선 유남규가 나가야 된다'고 말이다. 아시안 게임이다 올림픽이다…
소위 'TV 중계 되는 큰 대회'에선 유남규가 죄다 쓸었으니 전혀 근거없는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김택수의 끈질긴 생명력을 간과할 수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소위 '빅게임에 강하다는 그들' 모두가 떠난 이 자리에도 김택수만은 남아있다. 발드너다 왕따오다 유남규다… 그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도 김택수만은 아직도 라켓을 쥐고 있다. 10년을 세계 탑 클래스에 속해 있다는 사실…
즉, 절정의 실력을 꾸준히 유지하는 선수의 진정한 가치를 필자가 아무리 목 터져라 외쳐 봐도, 칼 립켄 주니어 혹은 최태원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소귀에 경읽기' 밖에 안 된다.
김택수의 질긴 생명력과 자기 관리…
어쩌면 그를 칭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에 가장 으뜸으로 꼽아야 할 '김택수만의 저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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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수-명예의 전당 3 ('The Vintage 김택수)-출처 : 후추 명예의 전당(http://www.hoochoo.com/ )
"The Vintage 김택수"('90 & '98 아시안 게임 Replay)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은 김택수 본인에게는 물론, 유남규란 '올림픽 스타'에게만 의존하던 당시 한국 남자 탁구계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남자 단체전 결승에서 북한과 맞붙은 한국은 유남규의 뜻하지 않은 부진에도 불구하고 김택수의 3전 전승, 그리고 복병 박지현의 2승에 힘입어 종합 전적 5승4패로 북한을 간신히 따돌리고 대망의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수비 탁구의 귀재'라고 불리던 북한의 이근상, 유남규를 꺾고 졸도까지 한 김성희, 그리고 약관 18세의 '겁없는 아이' 최경섭을 차례로 물리치고 금메달 획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택수의 마지막 경기는 1구 1구에 온 국민의 손에 땀을 쥐게 하고도 남았다.
한국 시간으로 밤 8시, 북경의 노동자 체육관에서 시작된 북한과의 단체전 결승은 새벽 1시가 넘어서 끝이 났고 김택수는 마지막 세트까지 피를 말리는 접전 끝에 최경섭을 2-1로 제치고 영웅이 되었다. 최경섭과의 마지막 9차전… 후추가 Replay 한다.
90 북경 아시안 게임 남자 탁구 단체전 결승 : 김택수 (한국) vs 최경섭 (북한)
단체전 스코어 3-4로 궁지에 몰렸던 한국 남자팀은 이근상을 2:0으로 이긴 박지현의 수훈에 힘입어 전체 스코어 4:4…
김택수의 '마지막 한판'으로 희비가 엇갈리게 되어 있었다.
김택수는 이날 이미 2경기에 출전, 이근상과 김성희를 각각 2-0으로 셧아웃 시킬 정도로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김택수와 격돌하는 최경섭은 18살의 나이로 '무서울 게 없는' 다혈질 쉐이크 핸더였다.
1세트… 국제 무대 경험이 비교적 부족한 최경섭을 압도하기 위해 김택수는 초반부터 파워 넘치는 드라이브와 속공 스매싱으로 최를 몰아 부치기 시작한다. 17-7까지 앞서 나가는 김택수의 일방적인 리드…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김택수의 '약점'은 초반 상승세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저하되고 '뒷심 부족'을 이유로 역전패를 곧잘 당하곤 했는데, 1세트를 여유롭게 리드해 나가는 김택수에 대한 유일한 우려는 '막판 뒤집기' 밖에 없을 정도로 초반 분위기를 압도해 나갔다. 김택수의 맹공에 기가 꺾인 최경섭은 연속되는 서브 리시브 실수로 쉬운 점수를 내주며 1세트를 21-13 란 점수로 패한다.
각오를 새롭게 한 최경섭은 2세트 시작과 함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전법으로 초반부터 엄청난 공격을 시도한다. 기회만 생겼다 하면 무조건 파워 넘치는 드라이브 공격, 김택수는 당황한다. 초반 0-7까지 리드를 당하던 김택수는 기가 오른 최경섭의 멘탈 게임에 교란되어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 1세트를 넘겨준 최경섭의 반격에 체육관을 찾은 중국 관중들가지 '최경섭'을 외치며 일방적인 응원이 시작된다. 1, 2 포인 트 따라간다 싶으면 최경섭의 과감한 속공에 무릎을 꿇은 김택수는 15-21로 2세트를 내준다. 1세트와는 판이하게 다른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지막 3세트…
'물불을 가리지 않는 최경섭의 총력전'은 3세트 초반에도 주효, 0-5까지 점수차를 벌인다. 그렇지 않아도 2세트의 '원 사이드'한 승리에 제대로 힘을 받은 최경섭은 3세트 초반마저 자신의 페이스 대로 경기가 풀리자, 완전히 자신감을 얻은 모습… 한국 측 벤치는 초조와 긴장 속에 침통한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해설자마저 이미 경기를 포기한 듯, "아쉽다'는 말만 반복한다. 경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 정도로 북한의 최경섭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3세트 스코어 1-8… 패색은 짙었다. 공격이 성공할 때마다 최경섭은 기쁨에 길길이 날뛰었고 앳된 모습의 김택수는 코 앞에까지 왔다가 멀어져 가는 아시안 게임 금메달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때…
김택수의 일대 반전은 시작된다. 피 말리는 롱 랠리 한방으로 4-9로 점수 차를 좁히더니 그 후 다섯 점을 연속 득점… 마치,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김택수는 최경섭의 헛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김택수의 반격에 당황한 최경섭은 실수를 연발했고 점수는 어느덧 9-9 동점…
이때부터 김택수와 최경섭의 숨막히는 각축전은 시작된다. 김택수가 14-10 까지 치고 나가면 곧바로 최경섭은 따라 붙었고, 14-12, 14-13, 14-14, 15-15… 양 선수는 경기 도중 룰에도 없는 타임을 불러 라켓을 놓고 땀을 닦으려 하지만 심판 아저씨가 브레이크… 결국 두 선수는 '갈 데까지' 간다.
19-16 상황에서 김택수와 최경섭은 다시 한번 총력을 다한 랠리를 펼친다.
김택수 승리… 승부의 쐐기를 박는다.
이 포인트를 진 최경섭은 격분해서 라켓을 집어 던지고 김택수는 특유의 '주먹 불끈'…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다.
탈진 상태까지 간 두 선수는 20-19까지 승부를 몰고 가지만 김택수는 21-19 란 간발의 차이로 금메달을 한국팀에 안겨준다.
김택수의 3승 째가 결정되는 순간, 한국 벤치 인사불성 북한 벤치 망연자실…
마지막 9차전을 앞두고 "만약 한국팀이 진다면 나 때문에 진 것이다" 라고 얘기했던 유남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연출한 김택수와 얼싸안고 깡충깡충… 김택수의 아시안 게임 신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98 방콕 아시안 게임 남자 단식결승전: 김택수 (한국) vs 류궈량 (중국)
필자가 기억하는 많지 않은 '탁구 명장면' 중에 하나가 바로 김택수와 중국의 류궈량 이 펼쳤던 98 아시안 게임 남자 단식 결승에서의 '32구 랠리' 일 것이다.
그 장면을 하일라이트로 보면서 넋을 잃었다. '저게 대체 사람인가?' 중국의 세계 1, 2위 공링후이와 류궈량을 차례로 꺾고 8년 만에 다시 한번 아시안 게임 정상에 오른 김택수의 분전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김택수 탁구의 모든 것이 아마도 이 한 포인트에 축약되어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