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동양문화권에서는 유명한 역사서로 잘 알려져 있다.
중국 한 나라의 무제가 즉위한 지 5년 후의 일이다.
천문과 역법을 관리하는 직책인 태사령 사마천은 흉노에게 항복한 장수 이릉(李陵)을 변호했다.
“이릉은 항상 부하들과 고락을 함께 했으며, 불행히도 포로가 된 것은 후일 조국에 다시 봉사하겠다는
충정에서 였을 것입니다. 비록 일시적이라 해도 흉노의 대군을 격파한 공적은 천하에 알려 표창할 만한 것입니다.”
사마천은 한무제에게 이릉을 위한 변호를 하였다. 그는 이릉 장군을 두둔하여 총사령관이던 이광리 장관을
깎아내린다는 오해를 받고 궁형에 처해졌다. 결국 황제로부터 궁형을 명받는다.
궁형이란 남성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선비들에게는 사형보다 더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다.
이 치욕의 궁형을 받게 되면 사대부로서는 목숨을 끊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궁형을 당한 다음 깊이 생각해 보았다. 공자는 천하 주유의 고난 속에서도 '춘추'를 지었고,
굴원(屈原)은 추방된 뒤 걸작의 장시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을 실명한 뒤 '국어'(國語)를 편찬했다.
이처럼 인간이란 마음에 불만이 쌓이고 자유가 구속될 때 과거를 돌아보고 앞날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그 굴욕을 역사 편찬으로 극복하려고 했다.자신의 전기 '사기열전' 권 70)에서 사기를 편찬하게 된 이유를 술회하고 있다.
환관으로 일하면서도 그는 『사기』의 저술에 몰두했다.
사마천은 서기전 91년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집행을 기다리던 한나라 무제 때의 장군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절절한 통곡의 심정을 전했다.
‘일개 사관(史官)에 지나지 않는 사마천이 편지 올립니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사람의 지혜란 수양의 깊이에 의해 알 수 있고, 인(仁)은 동정심의 유무(有無)에 의해 알 수 있으며,
의(義)는 주고 받음의 정당성에 의해 나타납니다. 또한 용기란 염치를 얼마나 아는가에 달려 있으며,
행(行)이란 이름을 어떻게 떨치느냐에 의해 평가된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덕을 갖춰야만 군자로 처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천은 “가장 추한 행동은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며, 치욕으로서 으뜸가는 것은 궁형을 받는 일”이라면서
“궁형 받은 자를 인간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는 관습은 까마득한 옛날부터”라고 자신의 신세를 다시금 한탄하면서,
“지금 조정에 인재가 없다 하여도 나 같은 자가 어찌 천하의 인재를 추천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반문했다.
사마천은 “저는 어려서부터 이렇다 할 재주도 없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고향 사람들의 찬사 한 마디 들어보지 못한 채
아버님 덕분에 폐하의 부르심을 받아 궁중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는 말로 자신의 과거를 언급했다.
“저는 봉후의 영예나 특별한 포상을 받은 적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사란 직업은 무당이나 점쟁이에 가깝고, 이른바 폐하의 우롱을 받는 악공이나 배우 등과 같은 부류에 속할 뿐이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경멸하는 대상입니다.이러한 제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저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微物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직 나쁜 말 하다가
큰 죄를 지어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 사람 예양은 범(范)씨와 중항(中行)씨를 섬겼으나
두 사람은 예양을 그다지 예우하지 않았다.
마음이 상한 예양은 그들을 떠나 지백(智伯)이란 사람을 섬기게 됐다.
지백은 진나라 육경의 한 명으로 세력이 강성하고 교만한 성품이었으나 예양을 극진히 예우했다.
그런 지백이 범씨와 중항씨를 제거하고 조양자(趙襄子)를 공격했는데
오히려 한, 위와 연합한 조양자에게 패해 땅은 셋으로 공중 분해되고 후손까지 끊어졌다.
이 정도로 분이 풀리지 않은 조양자는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소변용 변기로 삼았다.
이 와중에 살아남은 예양은 다짐했다.
“무릇 선비란 진실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하는 법.
여자가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을 위해 항상 용모를 단정히 하고 화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는 자백에게 인정받고 후한 대접을 받았으므로 반드시 그를 위해 목숨을 던져 양자에게 복수를 할 것이다.”
그는 이름을 바꾸고 일부러 죄를 범해 성기를 거세하는 형벌인 궁형을 받고
조나라 양자의 궁궐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 벽을 바르고 있었다.
가슴 속에 비수를 품고 있다가 조양자를 찔러 죽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조양자도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알아보니
바로 예양이 몸에 비수를 품고 자신을 죽일 기회를 노린다는 것이었다.
그를 붙잡아오게 해 문초하자 예양은 죽은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랬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주위에 있던 자들이 그의 목을 베려 하자 조양자는 그를 의로운 사람이자 천하의 현인이라며 풀어주었다.
그러나 예양은 다시 복수를 결심하고 이번에는 몸에 옻칠을 한 문둥이로 분장하고 숯가루를 먹어
목소리까지 바꾸어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한 채 시장을 돌아다니며 구걸했다.
그의 아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어느 날 예양이 오랜 친구를 찾아가니 그 친구만은 예양을 알아보고
"아까운 재능을 썩히지 말고 조양자의 신하가 된다면 분명 대우를 받을 것"이라며
"정 그를 죽이고자 한다면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을 텐데 왜 이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느냐"고 충고했다.
그러나 예양은 친구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조양자가 측근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외출해 다리를 건너려 할 때 말이 갑자기 놀랐다.
그러자 본능적으로 예양이 다리 밑에 숨어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사람들을 시켜 찾도록 하니 과연 예양이 숨어 있었다.
조양자는 예양을 호되게 꾸짖으며 "왜 범씨와 중항씨를 섬겼다가 지백에게 몸을 맡기고,
지백이 그들을 멸망시킬 때는 가만있더니
죽은 지백을 위해 이토록 끈질기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예양은 "범씨와 중항씨를 섬긴 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은 날 보통 사람으로 대접했으므로 나도 그에 맞게 처신했다.
그러나 지백은 날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로 예우했으므로 그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