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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아펜젤러가 안식년으로 한국을 떠난후 제물포지방 감리사이면서 내리교회를 담임하게 된 존스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그는 1895년 온전히 인천지역 선교에 몰두하기 위해 멕시코화 6백달러를 들여 우각리 40번지와 41번지 일대의 토지 3천4백평을 매입한다. 그후 땅 일부를 조선정부에 매각하기도 하지만 그곳에 1897년 존스는 직접 공사감독을 맡으면서 목사관을 건립하는 한편 교회당을 건축 애즈버리라 명명했다.
1771년 요한 웨슬레에 의해 미국에 자진하여 파송을 받은 선교사 애즈버리(Francis Asbury 1745~1816)-곧 미국 감리교회의 주춧돌을 놓은 애즈버리 감독의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벽돌로 지은 단층에 방 일곱 개가 있었다고 한다
존스 선교사가 내리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시내의 중심지를 선교기지로 활용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그리고 변두리 지역으로 결정한데는 그럴만한 안목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몇가지 이유가 성립된다.
첫째는 내리 일대가 개항 직후 외국인 조계와 경계하고 있어 땅값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인간 철도가 개설되면서 우각리의 알렌 별장 인근에 철도역이 설정되자 경인철도의 이용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셋째는 내리교회 우측의 언덕이 청일전쟁의 청군 전사자들을 매장한 의장지여서 한국인의 심성상 묘지 인근을 꺼려함을 참작했을 듯하다.
1905년 우각리 42번지에 여선교사 기숙사를 신축한다. 고풍스런 르네상스식의 아름다운 건물이었으니 이것이 오늘날 교회 경내에 있는 인천시 지방문화재 18호의 선교사 숙소이다.
3동의 서양식 건물- 남선교사 숙소와 여선교사 숙소 그리고 아펜젤러의숙소가 비로소 우각리 언덕에 자리
제일 먼저 건축된 것이 오늘의 동인천세무서 청사로 되어진 남선교사 기숙사였고 그 다음이 오늘의 변전소가 되어진 소위 아펜젤러 사택이며 맨끝에 여선교사 합숙소였던 오늘의 기독교사회관이라고 최준수옹은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서 들려주었다. 아펜젤러 목사와 존스 박사의 사택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는 언덕 윗집은 한때 세브란스 의전 출신의 젊은 의사 박용균씨가 병원으로 개업한바 있었고 1925년경 경전(오늘의 한국전력)에 매수되어서 변전소로 개축되었다.
남선교사 기숙사는 1942년경 정미업자 주정기씨가 매수하여 거주한바 있었으나 다시 조선알루미늄 공업주식회사에 전매되어 그 합숙소로 사용되던중 해방을 맞이하였고 경기도경찰국전문학교 교사 혹은 그 교장 사택으로 이용되었으며 1955년경 신설된 동인천세무서 청사로 개축되었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오는 여선교사 합숙소는 미군에게 징발되어 오던중 1956년경 이를 해제받고 기독교사회관으로 갱생되고 있다.
이 지역을 좀더 정리하자면 오늘날 창영교회의 후문을 벗어나 70년대 오걸 선교사의 주택까지 올라가면서 우측은 남선교사 사택의 경내로 정원이었다. 좌측의 넓은 공지에는 잡초가 우거져 인근에서 끌어다 먹이는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던 곳인데 한켠으로 훗날 몇채의 알루미늄 회사 관사가 입주하고 해방후에는 일반에 불하되어 그 한 채에 금곡속의 김홍걸(金傑1980년 1월 소천) 장로가 거주했다.
그리고 오걸 주택에서 지금은 세계성서침례교회가 된 변전소 까지 경성전기에서 조성한 일본인 신사가 있었는데 8∙15 해방을 맞자 동리 사람들이 나서서 파괴했으며 그 자리에 3동의 관사가 지어졌다. 그 밑으로 수도국산으로 향하는 세로를 건너창영초등학교 교장(50년대 조석기교장 부인과 자녀들이 창영교회에 출석했으며 금곡속에 속했었다) 관사와 학교 후정(지금은 산업고등학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 그 언저리의 골목길은 소방도로로 넓혀지고 선교사 주택 정원에도 소들이 노닐던 풀밭에도 모두 주택이 빽빽이 들어서 예전의 형태를 전혀 알아 볼수 없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