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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 속의 비범
1957년 3월에 우리 13회 동기들은 부산고에 입학을 했다.
이 좋은 대학가기 위한 첩경이라 생각한 사람은 극소수이었다. 부산중 졸업자의 거의 절반이 자동적(시
험을 쳤지만)으로 입학할 수 있었고, 다음으로 부산과 경남 일원 중학교의 수재들이 명문고등학교라고
소문난 학교라서 입학했을 뿐이다.
물러 상대적으로 시골의 수재들이 많이 입학할 수 있었다.
‘초량’이 언덕배기에 목초지가 있어 이름지어졌다지만 농촌 출신의 학생이 많아서 초량농고라는 별칭을
가졌고 우리는 그것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였다.
우리는 일제말기 전쟁중에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과 대동아전쟁중이었으니 대개 1939년생에서
1942년생까지 연령의 폭이 넓었다. 식량난으로 초근목피와 콩밥, 보리밥, 고구마밥, 무밥, 개떡의 맛을
아는 세대이다. 광복과 한국동란, 4·19와 5·16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구비구비를 모두 체험
하였다. 살아남아 있음이 대견할 따름이다. 쉽지 않은 세월을 함께 견뎌왔기에 우리 끼리의 만남도 더
애틋하고 찐하다.
1960년 2월 우리들은 부산고를 졸업하였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고작 3년의 부산고 재학이 평생을
관통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까까머리로 만나 이제 머리가 빠져 다시 까까머리이거나 반백의
노인이 되는 동안 우리는 도처에서 시시때때로 만났고 만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서로가 매인 몸이 되었
다. 이름이나 본적을 바꿀 수는 있어도 학연의 줄을 끊거나 바꿀 수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그래서 우리
의 만남은 운명적 만남이었다.
우리가 입학하자 10회 선배님들이 빨간색의 배지를 물려주고 졸업하였다. 11회, 12회의 선배님들과 14
회, 15회 후배님들과 1-2년씩 동시기에 교문을 드나들었다. 11회, 12회의 선배님들이 서울대학에 전체
수석이나 단과대학의 수석으로 입학하고, 입학 숫자가 경남고를 앞질렀다해서 우리들의 자긍심을 한껏
부풀렸고, 일면 우리들을 주눅들게도 했었다. 우리 13회 동기들은 서울대학에서의 수석입학은 못했으
나 숫자는 경남고에 못지않게 많이 입학하였다. 육사나 공사, 간부후보생으로 우수한 동기들이 지원하
여 서울대학의 입학숫자가 상대적으로 줄어 들었지만 국군의 동량으로 우뚝섰으니 빼놓을 수 없는 자랑
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서울대학 입학률로 명문고교를 재는 잣대로 삼았기에 거론하지 않을 수 없
음이다. 부산대학의 전체수석이나 단과대학의 수석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에의 입학에서 두각을 나타낸
동기들도 가정사정으로 서울행을 포기함이 적지 않았다.
운동부로는 럭비부, 축구부, 야구부, 탁구부, 송구부, 체조부, 유도부, 태권도부 등이 있었는데 우승했다
는 기억은 없지만 후배들의 기량을 증진시킴에 일조하여 16회부터 야구의 전국제패에 기틀을 만들었음
을 확신한다. 부산중에서 전국 중학교 배구대회 우승을 이끈 박무, 서반석, 박상원, 정영철 등의 배구부
가 3년 연속 전국 고교 배구대회에서 우승한 것이 우리 13회가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다. 그들은 모두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실업팀 감독으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미국, 카나다, 멕시코 등 해외로 진출
하여 국위를 선양한 동기로 늘 우리를 흐뭇하게 하였다.
특활반 활동으로 문예반, 미술반, 음악반, 웅변반, 생물반, 물리반, 화학반에 들어가 각자의 취미와 재주
를 살리기도 하였다. 공부에만 매진한 충실파가 있었고, 광복동 칸타빌레에 출몰한 음악감상반도 있었
고, 문무겸전의 주먹파와 끽연과 음주를 일찌감치 배워 선생님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눈 숙성파도 있었
는 데 이들 중 하나에도 못낀 동기들은 모두 순진무구파였다. 6·25와 1·4후퇴 때 피난와 눌러앉은 월남
파, 아버지 직장따라 온 호남파, 거제, 남해, 고성, 삼천포, 하동, 진주, 산청, 함양, 합천, 함안, 마산, 창
원 등 서부 경남파, 기장, 언양, 밀양, 삼랑진, 울산, 울주, 경주, 포항 등 동부 경남파, 가야, 사상, 구포,
김해, 양산까지 포함한 부산파로 구분되는 출신 지역의 다양함으로 생소한 경험을 서로 나눌 수 있었고
어려움을 극복함에 서로 도와줄 줄 아는 인성을 배양하였을 뿐 지역갈등 같은 것은 아예 눈을 씻고 보아
도 찾을 수 없었다.
부산중·고 60년사에는 우리 13회의 지나온 48년의 세월이 점철되어 있다. 재학 3년만의 세월이 아니고
졸업후의 우리들 삶도 용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바쁜 일상에 경주마처럼 앞만 쳐다보고 달려왔지만
각자의 입지에서 모교와 동창, 동기라는 공기를 마시고 살아왔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대인 관계에서나
맡은 일을 수행하면서 손가락질 받는 언행을 삼가하고 모교에 대한 칭송의 말을 들을 때에는 어깨가 으
쓱해짐은 자율신경의 조건반사나 마찬가지다. 썩은 짚으로 성한 새끼줄을 꼬을 수 없듯 우리 13회 동기
들의 면면들이 나름대로 충실한 삶을 살아왔고 모교의 명예에 조금도 손상을 끼치지 않고 나라와 사회
각 분야에서 훌륭한 재목으로 제몫을 다하여 왔음을 의심치 않는다.
다듬어 지지않은 원석들을 갈고 닦음이 없으면 보석을 만들 수 없다.
튀어나온 부분을 정으로 쪼고 내재된 개성들을 손상하지 않고 갈아내고 닦아냄이 어디 수월한 일이련
가? 정련과 연찬으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석공이며 대장장이들은 누구인가? 한국동란이 휴전되고 얼
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직장 구하기가 어려워 대학에 계실 분들이 소위 하방되어 우리들을 조련하셨
으니 우리들의 행운이 아니고 무엇인가?
선·후배님과 공유함이 있겠지만 여기에 거명하여 다시 한번 당시를 재생하며 고인이 되신 선생님께는
묵념을, 생존하신 선생님께는 늘 마음속에 담고 있음을 표시하고 싶다.
강정용 교장, 홍금술 교감, 강성복 교무주임, 최재례 학생주임, 신덕화, 이덕주, 박노헌, 최을림, 박용성,
권오신, 김영택, 박경용, 김호동, 김태홍, 서길덕, 박문규, 박내일, 한보현, 유수현, 윤종태, 박운백, 김상
진, 허순철, 하영진, 이주호, 장갑상, 홍영식, 김형태, 추세민, 송영각, 김석환, 김수석, 김영교, 이상근,
김점덕 선생님 등이 우리를 가르치셨다.
3학년 담임으로는 1반 서문경, 2반 이창규, 3반 정춘수, 4반 임재규, 5반 정두진, 6반 김성권, 7반 황덕
조, 8반 장여태 선생님이었다.
훗날 대학교에서 총장, 대학원장, 교수로서 고매한 인품과 전문지식으로 많은 제자들을 키우셨지만 왕
성한 의욕으로 우리들을 조련하셨던 때가 연령적으로 한창 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우리들 또한 돌이
라도 씹어 소화시킬 때였으니 선생님들의 열성적인 분출과 우리들의 물불 가리지 않은 흡수의 조화가
오늘 우리가 이나마 반듯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했음이 아닐까?
원래 우리는 부산고 9회로 졸업했지만 1967년 2월부터 부산중·고 13회로 바뀌어 숫자놀음에서 손해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양사람들이 싫어하는 숫자라서도 좀 찜찜하지만 놀음판에서 1과 3을 잡으면 족
보에도 없고 합하면 네끝이라 그냥 죽어야 하는 별 볼일 없는 패라서 우리들의 사회생활에서도 연관지
어 늘 기죽어 살아야 하지않나 우려함이 없지 않았다. 이렇게 기수의 변동이 있었음을 모른 어느 동기가
바뀐 기수로 통성명한 선배에게 오히려 선배로서 행세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더러 있었다.
소학에 자식이 훌륭하게 되어 공명을 얻으면 곧 부모를 현저케 함이라는 말씀이 있다. 모교를 명예롭게
하고 동창들의 자긍심을 고양시킴은 모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자들의 책임이다. 선·후배님들이 각계각층
에서 훌륭한 업적들을 시현하며 모교를 빛내고 있음에 우리 13회 동기들은 정말 기죽어 평범한 소시민
으로서만 자족하고 있었는가? 우리 동기들은 어디에서 무엇들을 하고 있었나 한 번 짚어 보자.
우리 동기들 누구든 시인묵객 아닌 자가 없다. 중학교 시절에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동기가 여럿 있었는
데 등단한 김철과 오랫동안 잠수한 이동욱, 고 주영돈, 공청길을 지금도 시인이라 부른다. 화가반열에
오른 정시화(국민대 조경대학장)는 산업디자인의 선구자다.
수석입학한 이종길(삼성전자 기흥연구소장)은 반도체 발전의 공로자이고, 활짝 피지를 못했지만 초기
태양열 박사로 영입된 손병찬, 대기화학의 박순웅(서울대 교수)이 산학협동에서 활동하였다. 재계에서
는 가업과 관련하여 성한경(신한여객 회장)과 고 장세창(동일제강 회장)이 있고 거개가 자수성가한 중
소기업형의 회사들을 꾸리는 정도이며, 금융 쪽으로 심훈(한은 부총재, 부산은행장)이 활동 중이고, 고
학봉(포스코개발 사장), 구창남(동양나이론 사장), 김동욱(제철화학 사장), 김호성(대림건설 부사장), 박
태웅(대우 부사장), 안용(한일건설 사장), 이건채(SK 부회장), 정정시(삼성자동차 부사장)가 개인적으로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그룹사의 CEO가 되었다.
졸업앨범 속에서 본 웅변반의 동기들이 나섬직한 정치계엔 오직 최병국(2선·한나라 국회의원)이 고군분
투하고 있다. 청백리상을 받은 이철수(재무부 기획관리실장), 오랜 감사원 봉직으로 사무총장, 감사원
감사위원을 거친 노우섭과 황용하 경찰청장이 대표적인 국가기관의 공직자이다. 부산중·고 총동창회의
선·후배 모든 기수를 통털어 국가의 간성이라는 국군에서 장군배출이 제일 많은 기수가 우리 13회다. 김
종배(중장·3군단장), 박정근(소장·법무관리관, 변호사), 배기준(공군준장, 삼성건설고문), 배양일(공군중
장·참모차장, 로마교황청 대사), 유정갑(중장·국방정보본부장), 장호경(소장·대통령 경호실차장), 조희진
(소장·육군항공사령관), 고 차기준(소장·53사단장), 고 한승희(중장·수방사령관, 육사교장) 등의 이·취임
식엔 약방의 감초처럼 우리 동기들이 무리지어 참석하였고 한 때나마 장군이 된냥 우리들은 대리만족의
뿌듯함을 즐기곤 하였다.
교육계에는 부산시교육감 출신으로 청와대 교문수석비서관과 아시안게임조직위원장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정순택과 대학에서 학장을 거친 김우환(동의대), 손해식(동아대), 이준동(부산대), 천병태(부산
대), 김길수(이화여대), 김종표(단국대), 이균성(외국어대)외 30여 명의 교수들이 아직도 현직에서 후학
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초·중·고의 교장과 교사로서 평생을 봉사하고 이제 나래를 접고 만년의 여백
을 즐기는 동기 또한 적지 않다.
의·약업계에 진출한 동기들도 많다. 동아대 의과대학장을 마치고 현재 세계로병원장인 김상순, 광혜병
원장인 이광웅, 한양의대 부원장의 김재홍, 서안복음병원장이며 목사인 민성원, 국립의료원장의 이세
일, 서울치과의사회장의 안박 등 40여 명의 의사와 대형약국을 경영하는 20여 명의 약사들이 동기회 모
임의 주축으로 항상 재정적 뒷바침을 해왔다.
언론기관으로 방송계의 박기대(KBS 진주·울산방송국장, 감사)와 윤정건(방송작가), 신문사의 김두겸
(중앙일보 논설위원)과 김영하(조선일보 논설위원), 고광용(연합통신 국장)이 우리들의 눈과 귀를 어둡
지 않게 해 주었다. 끝으로 부산에서 신영길, 이운조, 서울에서 반헌수, 윤규한이 변호사로서 우리 동기
들이 실생활에서 부닥치는 제반 어려움을 해소해 주고 있다.
광이불휘(光而不輝)랄까. 밝게 빛나되 휘황찬란하지 않는 보석들로 가득한 13회 우리 동기들을 나열해
보았다. 여기에 보이지 않은 동기들은 지면이 모자라 등재치 못함이다. 타산지석 가이공옥(他山之石 可
以功玉)이라 했다. 다른 산의 하찮은 돌이라도 옥돌을 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보석같은 동기
들의 배출은 다른 동기들의 물심양면의 도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몇 안되는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터에 기백명 혹은 기십명의 동기들을 모으는 일이 보통 힘든
일인가? 부산 본회의 고문 29명과 재경동기회의 고문 25명은 역대회장들로서 1967년 9월 3일 동기회
창립이후 오늘까지 동기회 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해 왔음에 동기들 모두가 감사하고 있다. 특
히 부산에서의 20주년 기념행사(정순택회장, 조근덕회장), 30주년 기념행사(성한경회장, 고 장세창회
장)와 속리산의 35주년(이광웅회장, 고 주영돈회장)그리고 통영의 40주년 기념행사(조장래회장, 송건정
회장)는 인생행로의 이정표에 따른 우리 동기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거울에 비친 자화상들을 그린 기
회였었다. 이제 현직에서 다들 은퇴하였고 할아버지 소리에 놀라지는 않지만 아직도 젊다는 오기를 부
리며 50주년 기념행사와 60주년 기념행사까지 치룰 각오로 오늘을 열심히 다듬고 있다. 2005년도 부산
본회는 배주호 회장, 재경동기회는 고학봉 회장이 징검다리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우리 동기들은 503명이 졸업을 했는데 80여 명이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였고 소식을 알 수 없는 동기들
이 근 20명이나 된다.
지금도 병마와 싸우고 있는 동기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아무리 인명재천이라고 체념하기에는 아
쉽고 아까운 동기들이 근년에 너무 빨리 떠나고 있다. 고인들에 대한 명복과 투병중인 동기들의 쾌유를
두손 모아 빈다.
(박정일) 부산중고재경 동창회 홈페이지(http://www.busango.or.kr/)에서 퍼옴 |
첫댓글 박정일형! 과연 글솜씨가 명불허전이요.저희 경남중고14회도 50주년행사를 준비하고 있사오니 서로 정보교환 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