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산행 일정 : 10월 20일 20시 40분 출발, 10월 20일 23시 51분 벌재 도착, 21일 0시 5분 산행시작. 10월 21일 13시 53분 죽령 도착. (총 산행시간 : 13시간 48분 소요)
3. 종주자 명단 : 최현찬(산행부대장, 경주교도소), 권종훈(산행부대장, 경주월성중학교), 이의부(경북연맹 감사)
4. 운전자 : 임종진(사모님)
5. 차량 제공 : 임종진
6. 도움 주신 분들 : 김칠원, 권오훈, 손정락, 최병윤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잠시 쉬다가 저녁(18시)에는 권오훈 부회장님이 대간팀에게 몸보신을 시켜준다면서 장어구이 집으로 오라 하셨다. 산행준비를 해서 시간에 맞추어 장어구이 집에가서 여러회원들과 연락이 되어 몇 분이 출발시간과 장소를 묻기에 식당으로 오시라해서 제법 많은 회원이 참석하여 장어구이를 안주 삼아 소주도 한잔했다.
어제 마신 술로 인해 오늘은 조금만 마실려고 했는데 산행대장님이 자꾸 권해서 제법 취기가 오를 정도로 마시다 보니 출발할 시간이 되었는데 자꾸 늦어진다.
그리고 이번 구간에는 특별히 귀한 손님 한분이 같이 가기로 했기에... 바로 대한산악연맹 경북연맹 감사님으로 계시는 이의부님께서 함께 가기로 연락이 되어 동대구 IC에서 21시에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같이 종주를 하던 손승락 회원이 어제 저녁 늦게까지 함께 마신술로 인해 하루종일 몸이 불편해 하더니 도저히 못가겠다 한다. 그러면 다음에 보충수업을 하기로 하고 오늘은 우리끼리 가기로... 그러나 이후 손승락 회원은 결국 너무 많은 아쉬움을 남겨둔 채 백두대간 종주를 포기하게 되고...
어찌보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직 초보자 입장에서 밤잠을 일체 자지 않고 그 긴구간을 산행하기란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야간 산행은 7시간, 낮에는 10시간 정도 걸으면 지친다고 하는데 밤낮 구분없이 하루에 16-7시간을 거의 쉬지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으면서 걸었으니 무리가 따를 수도 있지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회원들을 식당에 남겨둔채 대간팀은 20시 40분에 따뜻한 배웅을 받으면서 출발하여 약속 시간보다 약간 늦은 21시 20분경 동대구 IC에서 미리 나와 계시던 이의부 감사님을 만났다.
가다가 칠곡휴게소에 잠시 들러 우동을 한그릇씩 먹고 다시 출발하여 벌재에 도착하니 23시 51분이다. 거의 대부분 연결구간 도로에서와 마찬가지로 늦은 시간이라 인적은 끊어지고 다니는 차량조차 보이지 않는다. 배낭을 챙긴 후 0시 5분 산행을 시작했다. 오늘은 구간도 짧고 연세가 많으신 감사님이 참석하셨기에 모처럼 휴식을 많이 취하면서 산행을 하기로 하고 천천히 산자락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어둠을 뚫고 헤쳐나가는 세사람 앞에는 고난의 시간이 되겠지만 무엇하나 두려울 것이 없으며 오랜만에 뵙게된 감사님과 함께 산행을 하다보니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소로길을 한참 올라가니 묘가 나오고 0시 19분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곳을 통과하게 되었으며, 계속 진행을 하다보니 0시 29분에는 작은 재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곳을 지나 계속된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니 823m봉에 오르게 되고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떠 있으며 금방이라도 별들이 떨어질 것만 같다. 소시적 시골에서 무수히 쳐다보던 밤 하늘의 모습을 고등학교 시절이후에는 별로 하늘을 쳐다볼 기회가 없었다.
기껏해야 등산가서 야영을 하면서 가끔씩 날씨가 걱정이 되어서 한번씩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대간을 종주하면서부터는 대간 가는 날이면 밤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맑은 날씨가 계속되기를 기원해 보곤 한다.
어둠속에서 보이는 것은 멀리 동로면의 불빛들만이 깜빡거리고 있으며 그 어둠속을 뚫고 세개의 봉우리를 지나면 문봉재가 나오고 1시 20분이며 다시 1시 38분에는 1081m의 옥녀봉에 오르게 된다. 옥녀봉은 뚜렷한 정상은 없고 작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단하게 옥녀봉이라는 팻말만 있다.
옥녀봉을 그대로 지나치니 내리막이 시작되고 잠시 후인 1시 41분에는 바위지대를 통과하게 된다. 2시경 단양축협 소백산 관광목장(콘도미니엄과 여관이 있음)의 불빛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후 왼쪽에 목장 불빛을 두고 2시 15분에 고개를 하나 지나면 다시 옛고개가 나오는데 동로면 석항리(돌목)사람들이 저수재라 부르는 곳으로 돌목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예쁜 순우리말 이름이며 2시 24분이다.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묘가 나오고 이곳에서는 직진을 하면 헬기장이 나오고 길은 용두산으로 가기 때문에 묘 있는 곳에서 좌측길을 따라 내려가면 저수재로 갈 수 있다. 직진하여 헬기장에 도착하니 이정표에는 저수령 300m, 용두산 정상 700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는데 저수재로 쉽게 갈려면 묘 있는 곳에서 좌측길로 바로내려 가면 된다.
어둠속에서 잠시 헷갈려 용두산 가는 길로 잘못 접어 들었다가 되돌아 와서 내리막을 계속 내려가니 밧줄이 설치되어 있고 절개지가 나오며 저수재에 도착하니 2시 48분이다. 저수재에는 휴게소가 있지만 아직 너무 이른시간이라 불이 꺼져 있으며 휴게소 마당에는 버스 한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저수령(저수재)에는 경상북도에서 세운 대형의 저수령 유래비가 있는데 그 내용은 이곳은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와 충북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를 경계로 한 도계 지점으로 경북과 충북을 넘나드는 이 고개 이름을 옛부터 저수령(해발 850m)이라고 불리어 왔다.
저수령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도로를 개설하기 이전에는 험난한 산속의 오솔길로 경사가 급하며 지나다니는 길손들의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뜻으로 불리워졌다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저수령에서 음풍곡까지 피난길로 많이 이용되어 왔는데 이 고개를 넘는 왜적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도로는 지방도 927호로 1994년도에 개설 완료하여 충북과 서울, 강원 지방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광 및 산업도로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남쪽(예천 방향) 1.6km 아래 지점에는 멀리 학가산이 바라보이는 아늑한 산자락에 경상북도와 예천군에서 쾌적한 휴게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을 지나는 많은 길손들의 쉼터로 제공되고 있다. 1997년 10월 29일 건립 경상북도지사 예천군수 글씨 초정 권창륜이 적힌 비가 있다.
대간길은 커다란 표지석 옆으로 오르막이 시작되며 잠시 올라서면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 나오며 그 철조망을 따라 한참 올라가다 보면 용두공원 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1081m의 촉대봉(촛대봉)에는 3시 23분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나무 기둥만 하나 세워져 있으며 정상 앞 바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주위 조망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멋있는데 낮이면 전망이 무척 뛰어나고 좋을 것 같다.
마침 바위에 올라서서 저수재 휴게소 쪽으로 내려다보니 소청산악회에서 오신분들이 저수재 휴게소에서 서서히 움직이는 후레쉬 불빛들 모습이 보이니 이제 산행을 시작하는가 보다. 밤중에 높은 곳에서 바라보이는 꿈틀거리는 후레쉬 불빛 행렬을 보니 개미가 줄을 지어서 움직이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대간상에서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참 보기가 좋은 것 같다.
촉대봉과 싸리밭 가는 이정표를 지나 3시 40분 1080m의 소백산 투구봉(감투봉)에 올라서니 표지목이 세워져 있으며 3시 46분에 폐헬기장을 통과하고 3시 58분에 시루봉(시리봉)에 올라가니 좌측으로는 장정마을 가는 길이 있으며 우측으로 돌아 4시 5분에 1084m봉에 도착하는데 여기서도 좌측 소로길을 내려가면 단양유황온천이 있는 남조마을 가는 길이다.
잣나무 숲 지대를 지나 4시 21분에 다시 헬기장이 나오고 계속해서 나아가니 4시 42분 배재에 도착하였으며 표지목에는 싸리재 950m, 투구봉 2.6km, 오른쪽으로 야목마을 2.5km라 적힌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안부다. 배재에서 가파르게 올라서니 1053m봉이며 다시 내려서니 싸리재에 도착하게 되고 5시 10분이다.
싸리재 이후부터는 한동안 평탄한 길이며 이곳을 지나면서 뒤따라 오던 소청산악회 종주대들이 우리를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대간산행에서 다른 팀은 아예 우리를 따라 오지를 못하고, 거의 대부분 팀을 추월했지만 오늘 처음으로 다른 팀에게 추월을 허용한다. 그것은 이번 구간이 짧은 구간인데다 여유있는 산행과 함께 감사님의 산행 속도와 연세도 생각을 해야 되기 때문에...
5시 24분에 1033.5m봉을 통과하여 5시 46분에 흙목정상에 도착한다. 흙목정상 이정표에는 싸리재 1.2km, 헬기장 2km, 임도 550m라 적혀 있으며 다시 밧줄이 매여 있는 내리막을 내려가게 된다.
6시 9분 송전탑을 지나고 6시 37분 헬기장이 있는 뱀재를 지나면서 일출을 기대해 보지만 구름으로 인해 별로 신통치 못하다. 1102.8m의 솔봉을 지나면서 또 걸음을 멈춘다. 야간 산행을 하다보면 여명이 밝아오면서부터 시작해서 해가 솟아 오를때까지 특히 잠이 많이 쏟아지는데 이제 이의부 감사님이 다소 피곤해 하는지라 쉬는 회수도 빈번해지고 낙엽위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이몸은 산행기를 기록한다.
7시 21분에 모시골 정상에 도착하니 이정표에는 헬기장 1.95km, 묘적령 1.7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모시골 정상에서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계속 진행하니 8시 45분에 묘적령에 도착하게 된다. 묘적령에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며 모시골 정상 1.7km, 우측으로 모래재 1.95km가 적혀있다.
낙엽송 숲 지대를 지나고 주변에 드문드문 암릉이 있는 바위봉우리를 8시 57분에 올라서니 전망이 참 좋다. 그런데 이곳에서 누군가가 고사를 지낸 모양이다. 아마 무사 산행을 기원하기 위해서 지낸 것 같은 데 뒷마무리를 좀 잘하고 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현장이다. 고사를 지내고 난뒤 술 한잔과 음식을 남겨 두었으며, 바로 옆에는 술병과 쓰레기를 그대로 방치해 두고 간 것을 보니 가슴이...
계속해서 오르막을 올라가니 9시 29분에 묘적봉에 도착하게 되고 정상 좌측에는 소나무가 있고 우측에는 철쭉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져 있으며 전망도 좋으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있어서 약간은 처량함을 느끼게 한다. 정상에는 돌탑과 표지목, 그리고 동판 이정표에는 도솔봉 묘적봉 1148m와 묘적령 저수재 방향표시와 영주시청 백두회가 표시되어 있으며 바위에 박아두었다.
이곳 묘적봉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소백산 국립공원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죽령 남쪽에 있다. 그리고 도솔봉을 비롯하여 묘적봉 일대에는 취나물과 철쭉이 주능선상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묘적봉에서 잠시 내려가다 다시 오르막을 올라가니 앞서 지나간 소청산악회원 일부가 도솔봉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이며 도솔봉의 근사한 암벽이 보이기 시작한다. 10시 25분 도솔봉 암벽 바로 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난 후 로프에 의지하여 암벽지대를 통과하여 10시 42분 헬기장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검은 화강암 표지석 앞면에는 도솔봉 1314m 충청북도 단양군이 적혀있고 뒷면에는 죽령 4.7km, 묘적봉 2.5km, 대강면 13.6km가 기록되어 있다.
사진을 촬영하고 잠시 조망을 즐기다가 좌측 바로 옆에 있는 도솔봉(도솔천 - 첫째 : 불교에서 慾界六天의 넷째 하늘로서 內外의 두 院이 있는데 내원은 미륵보살이 살면서 석가의 교화를 받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며 외원은 天衆의 환락 장소라 함, 둘째 : 도가에서는 太上老君이 있는 곳이라 일컫는 하늘)정상에 올라서니 10시 55분이다.
정상에는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돌탑이 있으며, 바닥에는 이정표가 그려진 동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왼쪽으로는 장정리가 내려다 보이고 오늘 하산지점인 죽령고개와 휴게소 그리고 맞은편 산에는 천문대와 연화봉과 소백산 연봉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우측으로는 풍기읍이 내려다 보인다. 정상 부근에는 낙엽이 떨어진 나목들이 7부 능선상에 있는 오색 찬란한 옷으로 갈아 입고 있는 절정의 동지들을 바라보며 쓸쓸함을 달래고 서 있으며 죽령고개 근처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조망이 얼마나 좋은지 주변으로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뒤를 돌아보면 우리가 한걸음 한걸음 걸어 온 능선들이 저 멀리서부터 아스라히 바라다 보이는(묘적봉, 황장산, 문수봉, 대미산) 백두대간의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으며, 다음 구간인 죽령휴게소에서 연화봉까지 오르막 구간을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조금은 걱정이 앞선다.
차가 천문대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 해도 오늘 천문대까지 올라가면 좋을텐데... 이렇게 자연의 풍요로움에 젖어 있자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고 마음은 행복감으로 넘쳐 흐른다. 아! 우리의 산줄기 백두 대간이여...
정상에는 소청산악회원 네명이 소주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우리가 도착하니 홍일점이신 정여사라는 분이 먼저 인사를 한다. 이것 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선두는 벌써 내려갔으며 자기는 1차 종주때에는 뛰어다닐 정도로 빨리 다녔지만 지금 2차 종주를 하면서 부터는 뒤에서 조망도 즐기고 구경할 것은 다 하면서 여유있게 산행을 하고 있다면서 천천히 내려가도 하산 시간내에 충분히 도착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들 보고는 짧은 기간 동안에 그렇게 빠른 속도로 여기까지 온 것을 대단하다고 하신다.
바닥에 있는 동판에는 백두대간 도솔봉 1314.2m, 그리고 정상, 죽령, 헬기장, 전구리, 묘적봉, 사동리 가는 방향표시가 되어 있으며 영주시청 백두회라 적혀있다.
도솔봉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이의 도계를 이루는 산으로 국망봉과 비로봉 그리고 연화봉과 함께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하며 북쪽 기슭의 죽령을 넘는 중앙선은 루프식 터널을 통과하여 영주에 이르게 되고 희방사가 유명하며 서쪽으로는 단양팔경이 있다.
옛사람들은 남이 알아주든 말든 무슨무슨 팔경을 꼽기를 좋아했지만 단양팔경은 관동팔경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경승지이다. 단양의 풍광은 산과 물이 어울려 보기 드물게 빼어나며 제 1경인 하선암과 2경인 중선암, 3경인 상선암은 월악산 동북쪽 기슭에서 흘러나와 남한강으로 합쳐지는 단양천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며 자리잡고 있다.
기암절벽과 청계옥류는 말 그대로 차고 맑은 계곡물이 멋진 바위들과 조화를 이루어 선경을 연출하며 일찍이 이곳을 찾아왔던 퇴계 이황은 하선암의 절경을 묘사하면서 봄이면 철쭉꽃이 노을과 같고 가을이면 단풍이 비단과 같다고 하였다.
제 4경인 사인암은 단양팔경 가운데서도 으뜸이며 깎아지른 암벽이 하늘에서 내려뜨린 병풍처럼 서 있고 그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흐르며, 단양사람으로서 고려 때 경사역학의 대가였던 역동 우탁이 사인 벼슬을 지낼 무렵 여기에 와서 노닐었는데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재광이 그것을 기려 사인암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암벽 아래 너럭바위에는 바둑판과 장기판이 새겨져 있고 이황, 이인상, 이윤영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제 5경인 구담봉과 제 6경인 옥순봉은 단양과 제천시 청풍면의 경계를 이루는 장회리에 있다. 구담봉은 남한강가에 깎어지른 듯 장엄하게 치솟은 기암절벽 위에 거북 묘양의 바위가 있어 구봉, 물 속의 바위에 거북무늬가 있다 하여 구담이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이며 옥순봉은 희고 푸른 암봉들이 비온 후 죽순 솟듯이 미끈하고 우뚝하게 줄지어 있어 소금강이라는 별명을 지녔다. 조선 명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황준량은 그 광경을 바위벼랑에는 군데군데 단풍이 물들고, 서리가 내리니 가을물은 더욱 맑아 조각배에 탄 사람은 병풍 속으로 들어가더라... 하고 읊었다 한다.
구담봉과 옥순봉 사이의 소석대(농암)에는 이인상의 글씨 유수고산(流水高山)과 함께 구담봉의 장관을 노래한 퇴계의 시가 새겨져 있으며 옥순봉에도 이황의 글씨로 단구동문(丹邱洞門)을 새겨 놓았지만 지금은 충주호 물에 잠겨서 가뭄 때나 물 밖으로 살짝 드러나며 옥순봉, 구담봉, 사인암 등은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등에 의해 진짜 그림으로도 남아 있다.
제 7경은 도담삼봉으로 매포읍 도담리 남한강 가운데 봉우리 세개가 떠 있어서 삼봉이고 또 섬이 있는 물이므로 도담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매포읍 도전리 출신으로 수학하던 시절에 자주 찾던 이곳을 사랑하여 자신의 호를 삼봉으로 지었다고 한다.
세 봉우리의 모양 때문에 생겨난 전설에 따르면 셋 중에서 가운데 있는 것이 남편, 북쪽 것이 아내, 남쪽 것이 첩 봉우리이다. 그런데 남편과 아내는 사이가 좋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남편은 첩을 얻었고 곧 아기를 가진 첩은 남편 쪽을 향해 자랑스레 배를 내밀며 배시시 웃고 앉았고 아내는 눈꼴이 시어 등을 돌리고 앉았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이 세 봉우리는 강원도 정선에 있었는데 어느 해 장마 때 흘러흘러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정선땅 관리들이 삼봉을 찾아 이곳까지 와서는 원래 자기들 것이라면서 해마다 세금을 거두어 갔다. 그러던 어느 해 정선에서 관리들이 세금을 받으러 오자 한 아이가 나섰다.
'저 삼봉은 우리가 부른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온 것이니 그렇게 중요하다면 도로 가져가시오'하니 그 후로는 도담사람들은 삼봉에 대한 세금을 물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제 8경은 도담삼봉에서 상류로 조금 거슬러 오른 곳 강가에 있는 석문이다. 넓이가 15-20m, 높이가 25m에 이르는 천연 석문이 산 위에 걸쳐져 있으며 훌륭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정상의 남쪽과 서쪽은 낭떠러지라 소청산악회원 네분과 함께 바위 험로지역으로 이루어진 북쪽 경사지대를 내려가니 대구에서 오신 많은 산꾼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물론 이분들은 대간종주자들이 아닌 단풍철을 맞이하여 도솔봉에 산행을 온 팀들이었지만 고향 근처 사람들이라 무척 반가웠다.
한참을 내려가니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진 삼형제봉이 나오고 소청산악회원들은 바로 내려가고 우리는 삼형제봉에 올라서니 11시 22분이다. 삼형제봉에는 대구에서 오신 세사람이 휴식을 취하다 우리가 가니까 자리를 비켜주신다며 도솔봉으로 향해 올라가고 우리는 잠시 조망을 즐기다 봉우리를 내려온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도솔봉을 향해 올라가고 우리는 1286m봉을 향해 다시 올라가다 보니 암벽지대가 나오고, 바위사이로 구불구불 늘어뜨려져 있는 밧줄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곳을 올라서니 도솔봉 1.7km, 죽령 4.3km라 표시되어 있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며 11시 55분이다. 여기서 또 다시 소청산악회원들을 만나고 전망이 무척 좋아 피곤한 다리를 잠시 쉬게 하기 위해 다시 휴식을 취한다.
12시 15분 또하나의 봉우리를 넘고 12시 44분 1286m봉 정상을 좌측에 두고 대간길은 8부 능선으로 지나가다 삼거리에서 죽령을 향해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삼거리 이정표에는 도솔봉 2.7km, 죽령 3.3km라 적혀 있으며 감사님은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우리는 좌측길을 따라 산죽을 헤치고 올라서니 1286m봉 정상(대간길 아님)이며 정상에는 묘가 자리잡고 있으며 여기서 도솔봉 정상까지는 암릉으로 이루어진 능선의 장쾌함을 감상할 수 있다. 잠시 조망을 즐기는데 단양쪽에서 두사람이 올라왔다.
정상을 뒤로 두고 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면서부터는 죽령까지는 내리막길이며 한동안 계속되는 엄청난 산죽지대를 내려오게 된다. 13시 13분 첫번째 헬기장에 도착하니 헬기장을 만드신 높은 분들의 이름이 적혀 있고 13시 16분 두번째 헬기장에 도착하니 이정표에는 도솔봉 4.2km, 죽령 1.8km가 적혀있다.
계속되는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도솔봉 4.7km, 죽령 1.3km가 적힌 이정표가 나오고 앞에는 산에서 운명을 달리한 악우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무덤)가 있고 우측에는 샘이 있고 산꾼 몇분이 휴식을 취하면서 물을 마시고 있지만 우리는 샘터에 들리지 않고 바로 지나친다.
13시 42분 작은 봉우리를 우측으로 돌아나가면 커다란 무덤과 작은 무덤이 나오고 이곳을 통과하여 13시 53분 드디어 죽령에 도착한다. 죽령에는 영남관문 죽령 경상북도 여기까지 영주시 입니다라는 대형 표지석이 있고 바로 옆에는 죽령 주막이 있다.
죽령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는 689m이며 대재라고도 한다. 소백산맥이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길목에 해당하며 삼국시대 이래로 봄, 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죽령사라는 산신 사당이 있었다.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역에서 풍기읍 희방사역으로 빠지는 중앙선 철도가 길이 4500m의 똬리굴(죽령터널)을 통하여 죽령 산허리를 통과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풍기 - 단양간 5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지금은 중앙고속도로 개통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4600m의 죽령터널이 통과하고 용부원리 쪽 죽령터널 입구부근에 제 2단양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령폭포가 있다.
죽령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면 먼저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의 술종이라는 사람이 기병 삼천을 거느리고 삭주(강원도 영서지방)의 도독사로 부임하던 도중 죽지령(죽령)에 이르매 한 거사가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술종이 큰일을 하는 거사를 아름답게 여기고 거사도 술종의 당당함에 서로 마음이 통했다.
술종이 임소에 부임한지 한달쯤 될 무렵 거사가 술종의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날밤 그의 아내도 같은 꿈을 꾸어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알아본 즉 꿈을 꾸던날 거사가 죽었다고 하였다.
술종이 말하기를 아마 우리집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과연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매 죽지라 이름하였다. 그 아이가 자라서 화랑이 되어 김유신을 도와 삼국통일에 크게 활약하고, 대신이 되어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4대를 섬겨 나라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죽령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689m) 소백산 허리 구름도 쉬어 간다는 아흔아홉굽이 죽령은 영남과 기호를 넘나드는 길목 가운데서도 가장 유서깊고 이름난 중요한 관문이다. 이 고개는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에 신라사람 죽죽이 길을 개설하였으며 죽죽은 이 고갯길을 닦은 후 지쳐서 죽었다고 하여 죽령이라 불리어 왔으며 한때는 고구려와 국경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와 조선조 시대는 청운의 꿈을 안은 선비들의 과거길이였고 온갖 문물을 나르던 보부상들과 나그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숱한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죽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임종진 회원과 사모님이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죽령 휴게소 앞 표지석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차를 타려는데 마침 도솔봉 정상에서 만났던 정여사라는 분이 자기들한테 와서 밥과 술을 한잔하라 하신다. 체면 불구하고 대추술만 몇잔 얻어 마신 후 서정호 총무님, 정여사님과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음 구간 들머리를 확인하는데 원래는 죽령주막 옆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죽령주막 뒷편에 군부대가 설치되어 있어서 지금은 죽령휴게소 옆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차에 올라탔다.
또 한구간을 무사히 마쳤다는 즐거움과 산꾼들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보고 느낀 기쁨을 가슴 가득 안고 살아온 인생을 반성하고 살아갈 인생을 생각하면서 차는 죽령을 출발한다. 먼저 저희들과 마지막까지 투혼을 발휘하시면서 산행하신 이의부 감사님께 경의를 표하며, 최현찬 산행부대장, 임종진 회원, 그리고 사모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특히 단풍철이라 새벽에는 잠자리 구하러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느라 힘이 드셨을텐데, 결혼 5주년 기념일인데도 불구하고 부부가 함께 운전을 해주신데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합니다.
죽령을 출발한지 40여분 후부터는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으며 낙동강 휴게소에 들러서 점심겸 저녁을 먹은 후 대구에서 감사님과 작별을 하고 경주에 도착하니 1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도움을 주신 모든 회원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첫댓글 다시 와서 읽어보니 그 때 생각이 눈앞을 어른거리내요. 전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