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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복음비판 스크랩 레이 윤겐,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 (요약1)
한산 추천 0 조회 152 11.07.14 10:4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레이 윤겐,『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부흥과개혁사, 2009

 

오늘날 “영적 훈련” 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교회 안으로 고대의 신비적인 수행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 책은 동양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비주의가 토머스 머턴, 헨리 나우웬, 리처드 포스터 등을 거쳐 최근의 이머징 교회까지 침투해 들어온 과정을 파노라마식으로 보여 준다.

 

1 장 보이지 않는 교단

 

“기독교”요가, 영적 제자도, 영적 훈련, 신성한 공간 그리고 관상기도, 당신은 이 어느 것 하나라도 친숙하게 들리는가? 이런 용어들이 당신의 교회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뉴에이지 영성이 이미 상당수 교회 안에 스며들었고, 복음주의의 방향을 비틀어 놓으려는 시도가 대부분의 신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뤄지고 있다. 내로라 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제 명상 기법들을 연마하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있다. 뉴에이지, 신비주의 영성은 수많은 교회, 청소년 단체 그리고 기독교 교육기간의 중심부에 둥지를 틀고 있다.

 

아래 인용문들을 보라.

미국의 모든 초등학교 5학년 교과목으로 선불교를 가르쳐야 한다

- 스콧 펙, ‘가지않은 길’의 저자

 

나는 요가, 중국의 무술인 태극권 그리고 비파사, 초월 명상과 만트라 명상 등 세 종류의 명상훈련을 한다.- 잭 켄필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의 저자

 

나는 예수 말고도 여러 근원에서 영감 넘치는 메시지를 찾는다. 우리에게 오는 구도자들은 석가, 무함마드-- 요가난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 등과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 그리고 영적인 지도자들을 통해 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켄블랜차드, ‘일분 경영’의 저자

 

나는 제자화가 곧 ‘기독교라는 종교에의 고착’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도록 하면서도 불교, 힌두교 혹은 유대교적인 상황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많은 경우 바람직할 수 있다- 브라이언 맥클라렌, 이머징 교회 운동 지도자

 

우리는 우주적인 그리스도에 더 눈뜰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모든 존재가 그 안에 그리스도의 빛이 있음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 매튜 폭스, ‘우주적 그리스도의 오심’의 저자

 

신비주의 영성이 정말로 교회에 스며들어 있는가? 이 책은 합리적인 문헌들의 지지를 받는, 그리고 거침없는 논조로 이 질문에 답변하고자 하는 나의 시도를 담고 있다. 이 신비주의적인 영성이 어떻게 교회로 유입되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우리는 먼저 뉴에이지의 기층을 이해함으로써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여러 곳에 스며들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비즈니스, 의학, 교육, 정치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등 사회의 모든 면에 뉴에이지의 영향이 스며들었다. 독자가 이 책을 다 읽고 덮을 쯤 될 때, 교회가 위험에 빠져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뉴에이지의 범위

 

1980년대에 뉴에이지라는 용어는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혐오감을 자아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 반동이 잦아들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위협적으로 보였던 요소에 대해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뉴에이지 운동이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이 운동의 양상을 알면 많은 기독교인이 놀랄 것이다. 새로운 천 년이 다가올 무렵, 뉴에이지는 서구 문화에 조용히 침투해 많은 기독교인이 뉴에이지와 동양적인 영성에 익숙해질 정도였다. 이 책은 이러한 새로운 영적 패러다임의 원래 모습을 벗겨 내고 이 패러다임이 취하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모양들을 밝힐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4:1)

 

미혹의 영들은 동양적인 신비주의 수련을 도입함으로 기독교를 자기 마음대로 다시 만들고 있다. 신비주의 수련이 아무 의심 없이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폭넓은 영성(이런저런 신앙들을 한데 섞는)을 선호하고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할 수도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새로운 영성은 널리 알려진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에서조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먼저 뉴에이지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보자. 데이비드 스팽글러는 1965년에 이 운동에 대해 “이러한 비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고찰하는 분야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25년 후인 1992년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안토니오는 같은 운동을 이렇게 말한다.

 

캘리포니아 대학 센터 바바라 캠퍼스의 사회학자들은 1,200만명의 미국인들이 적극적인 수련자들이고, 3,000만 명은 뉴에이지 운동에 상당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뉴에이지 운동 참여자들은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종교 집단이다.

 

2002년경, 브래들리 대학 종교 연구소의 로버트 풀러 교수는 미국 인구의 20퍼센트(4000만명 이상)가 뉴에이지 운동을 받아들인다는 수치를 발표했다. 이 가르침의 수요는 시장의 법칙에서 볼 때 확실하게 있다. 규모가 있는 미국 체인 서점들에서 뉴에이지로 분류한 서가의 수는 70개에서 80개에 달한다. 많은 경우에, 뉴에이지 관련 서적들은 기독교 서적들이 꽃힌 서가들의 수와 맞먹거나 더 많다. 그리고 어떤 서점들에서는 뉴에이지 관련 서가가 스포츠에 맞먹는다.

 

다양한 뉴에이지 치유 수련이 사소하게 볼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섰다는 증거 또한 많다. 레이키(Reiki)는 치유 수련 방법의 하나로 1970년대에 일본으로부터 미국에 들어왔다. 수련자가 50만명을 넘어서는 데 25년이 걸렸다. 당시 미 육군에 복무하는 전체 사병들의 숫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2005년에는 미국에서만 100만명이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기록할 만큼 천정부지로 늘었다! 어떻게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됐는가? 이에 대한 답을 하면, 인간 역사에서 가장 천재적이고 공교한 풀뿌리 종교 조작의 하나와 당혹스럽게 마주치게 된다.

 

뉴에이지라는 이유

 

물병자리 시대(1960년대에 시작, 2000년 동안 지속된다는 천문학적 시대) 혹은 새로운 시대는 인간이 황금기로 들어가는 시대를 의미한다. 많은 점성술가, 신비 예언가들은 물병자리 시대가 인간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오래 전부터 떠들어 왔다. 물병자리 시대는 우리 무두가 인간이 신임을 깨닫게 되는 시기다. “물병자리의 주제는 신의 내재다. 물병자리 시대의 목표는 이 사상을 의미 있는 현실로 가져오는 것이다.”

 

가장 좋은 설명은 ‘신비주의 사명’이라는 책이다.

비학(occultism)은 신비한 진화의 학문으로 규정할 수 있다. 감취진(즉, 비의) 인간의 능력으로 숨은 본질을 규명하도록, 즉 만유 안에 있는 만유인 신을 보도록 운용하는 것이다.

 

이 신비한 능력이 뉴에이지 운동에서 크게 두드러지는 표지다. 단순한 신념 혹은 신앙이 아니라 신비한 인지 능력인 것이다. 명상 지도가인 앤 와이즈는 말한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가 12년동안 매일 한 시간씩 명상을 했다고 한다. 다른 묵상가와 대화하면서 자신의 묵상 방법이 잘못됐음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것들을 하나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묵상하고” 있는 그의 뇌파를 검사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12년 동안 그저 잡생각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특정한 명상 방법이 일반적으로 침묵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조용한 상태에 있다고 해서 침묵이 아니라 신비한 능력을 향해 열린 빈 마음이 내적 침묵인 것이다. 한 뉴에이지 사부는 말한다. “명상의 적은 마음이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보통 명상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뉴에이지 명상은 정반대다. 생각을 정지 혹은 중립의 상태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사람의 모든 생각을 비우도록 하는 것이 뉴에이지 명상이다. 사고의 느슨한 흐름이 멈추는 명상을 하는 동안에는 번잡한 생각이 그치고 의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마음에 일체 생각이 없고 비워진 상태, 공백이 될 때까지 작용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무념무상의 단계로 이끌기 위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호흡 수련과 만트라다. 호흡 수련은 호흡에 집중한다. 만트라는 단어 혹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다. 기본적인 방법은 집중과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잊을 정도의 집중 유지다. 한 대닷에 집중하여 반복하면 공심이 만들어진다.

 

만트라는 이런 명상에서 중심적이다. 따라서 이 용어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산스크리트어로 만은 “생각하다‘는 의미이고, 트라는 ”자유로워지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만트라란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다“라는 의미다. 큰 소리 혹은 조용히 만트라를 반복할 때, 단어 혹은 문구는 처음 의미를 잃는다. 의식적인 사고 과정이 점점 변화된 의식 상태가 이뤄질 때까지 이어진다.

 

한 여인이 1984년에 신비 수련에 접하게 됐을 때 일어난 일을 ‘라이프 타임즈’의 기고문에 적었다.

이 경험은 1984년에 시작됐다. 그대 나는 처음으로 명상을 배웠다. 기도란 신에게 말하는 것이고, 명상은 신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는 글을 읽고, 마음이 열렸다. 하지만 명상이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다.

 

오래지 않아 명상 중에 내 몸에 예전과 같지 않은 느낌이 느껴짐을 알게 됐다. 어떠 에너지가 내 몸 안에 흐르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이 좋고 힘이 넘쳤다. 모래가 고운 백사장에서 햇빛 아래 졸고 있는 듯 온몸에 온기가 흘렀다. 이 감각은 점점 더 강해 졌고, 얼마 후에는 마치 전류가 내 몸 안을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들이 욱신거리고, 손바닥이 저렸다. 어느 날 밤 불가사의한 꿈속에서 내가 치료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야 이 에너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됐다.

 

이와 같은 역동 경험이 사실은 뉴에이지가 말하는 모든 것이다. 어떤 강력한 임재와 개인적으로 밀접한 접촉을 하는 것이다. 신비가인 디온 포춘은 “의식의 전환이 모든 신비 수련에서 중요한 열쇠”라고 인정한다.

 

명상 노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양된 자아라는 개념에 있다. 고양된 자아는 우주의 신적 본질에 연결된 개인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이 목표는 고양된 자아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고양된 자아가 물질 영역으로 출현함으로써 수련자는 신의 인도와 이끌림을 받게 된다. 뉴에지에서는 이런 연결을 자각, 변혁, 계몽, 자아실현, 우주적인 의식 그리고 초의식이라고 부른다. 뉴에이지를 왜 초월 지식이라고 바꿔 부르기도 하는지 설명해 준다. 초월 지식은 물질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세계(보이지 않는 영역)을 뜻하는 말로 일반적인 오감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실용적인 신비가들 그리고 비밀 종교의 영향

 

복음주의 학자 데이비드 스미스는 말한다.

기독교 시대가 동트기 시작할 때의 영지주의 외에 정통 기독교에 스며들어와 위협적인 요소가 된 것은 뉴에이지 운동 외에는 없다. 이 운동의 개념이 건드리거나 방향을 바꾸어 놓지 않은 삶의 영역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지경이다.

 

신비가는 신비주의를 세속적인 목표의 보조물로 소개하고, 또한 이상한 것과 낯선 것에 대한 대중의 자연스러운 거절 충동을 완화하는 데 뛰어난 사람이다.

탁월하고 영향력 있는 강사며 세미나 인도자인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직장에서 “생산성, 활동과 결과를 이끌어 올리기 위해” “초의식적인 마음”(즉 고양된 자아)의 사용을 장려한다.

 

미국 서북부 중요 일간지에는 대학 교수 한 사람이 전통적인 선불교 명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컬러 사진을 크게 실었다. 그는 불교에 귀의하지는 않았지만, 동양 명상을 통해 마음의 상태를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인기 있는 아침 대담 프로그램이 “배우자와 잘 지내는 법”을 내세워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유명한 뉴에이지 저자인 웨인 다이어를 초청해 배우자에게 화가 날 때 “침묵의 인도”를 받으라고 시청자들에게 권한다.

 

삶을 개선하는 도구로서 수련되고 있는 명상의 몇 사례를 나열한 것 뿐이다 실용적인 신비 운동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그들이 어떤 프로그램을 추천하든 간에 겉보기에 유익이 있을 것처럼 보이는 명상 방법을 얹어만 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어떤 교의를 믿으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수련 방법만 소개하면 된다는 것이다.

 

뉴에이지 출판인인 타춰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을 적절한 언어와 행동으로 표출하는 법을 배우면 된다. 이런 일은 두려움 혹은 저항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명상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서구 사회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면서 아주 현실적이다. 이제 신비주의는 서구 세계의 구석구석에 퍼져 있다.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대중을 사로잡은 책은 샥티 고웨인이 쓴 ‘창조적인 심상화’다. 이 책은 신비가들을 위한 실용적인 경전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초월 지식을 접하게 됐다고 한다. 1978년 초판이 나온 이래 이 책은 수백만 부가 팔렸고 심리학, 공중 보건, 비즈니스 그리고 체육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창조성, 직업적인 목표, 관계, 건강의 증진, 그리고 소박한 긴장 완화와 평온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다.

 

어떤 형태의 명상이라도 결국에는 당신 자신을 원천으로 혹은 당신의 고양된 자아로 보게 하는 경험으로 이끈다. 명상을 하는 동안 당신의 의식에 “클릭”이 일어나고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을 마침내는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혹 당신을 통해 흐르는 엄청난 에너지 혹은 몸에서 따듯한 광선이 타오르는 느낌을 경험할 것이다. 이 현상은 당신이 고양된 자아의 에너지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고웨인은 유대인, 가톨릭, 혹은 개신교도를 유지하면서도 이 책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신이 하는 일이라고는 자아를 계발하는 것이지 종교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고웨인은 이런 책들의 홍수에서 첫 빗줄기였다. 줄리안 캐머런의 ‘예술가의 길’이 있다. 이 책은 “고차원적인 창조성에 이르는 영적인 길”에 대한 것인데 200만부 이상이 팔렸다.

 

이런 접근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미국의 서부 해안 대도시에서 스트레스 해소에 대한 책, 테이프 그리고 비디오를 파는 회사다. 의사, 심리 치료사 그리고 교사들이 경영진들에게 와서 도움을 구한다. 이들을 찾는 고객들은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개인 성장에 관심이 많은 사업가들이다.

 

일반 서점의 건강, 자기계발 그리고 회복에 대한 서가들은 이제 뉴에이지의 초월 지식적인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뉴에이지는 껍데기가 아니다. 이것은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상업적인 출판의 주류는 이제 뉴에이지다.” 일반 서점의 서가에서 자기계발과 개인 성장을 찾아보면, 뉴에이지 신비주의가 미국의 영적 전망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함을 알 수 있다.

 

오늘 뉴에이지 작가들 중 잘 나가는 작가들의 도서 판매대를 눈여겨보라. 단 두명의 일급 작가인 웨인 다이어와 디팩 초프라의 책만 5천만 권이 팔렸다. ‘신비한 예언’의 저자 제임스 레드필드는 장장 2천만권을 팔았다. 닐 도널드 월시는 ‘신과의 대화’로 가볍게 7백만권을 팔았다. 뉴에이지 운동은 우리 사회 전체를 영향권에 두고 재조정하려는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대의 마법사

 

실용적인 신비주의의 파도는 우리 사회에 좀 더 괴상한 형태의 영성이 번창하도록 길을 터 주었다. 마술교 혹은 좀 더 널리 알려지기로는 마법교가 참여자들을 놓고 일부 주류 교단들과 경쟁을 벌리는 입장이 될 정도다. 스콧 커닝햄이 지은 ‘은둔 수련자들을 위한 마법교’는 1988년 발행 이후 40만권이 나갔고, 첫 판 이후 37쇄를 찍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뉴에이지에 대한 대중의 깊은 인식과 전폭적인 수용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것이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에 상당히 위험한 도전이 됨은 불 보듯 뻔하다. 한 신비가는 말한다. “명상은 당신과 더불어 누군가가 있다 혹은 당신은 홀로가 아니라는 그럴듯한 자각을 가져다 준다.” 다른 여인은 명상 수련 중 받은 교훈을 나눈다. 그의 안내자가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 빛에 거하라. 내 사랑에 거하라 나를 신뢰하라. 나는 너의 주님이다.” 나는 이것이 레위기 19:31이 경고하고 있는 전형적인 현상이라고 믿는다.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마법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알고 있는 자’라는 점을 유념하라. 뉴에이지 신비가 재클린 스몰은 이렇게 선언한다. “내면적인 길을 통해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는 자가 된다.” 본질상 뉴에이지 추종자는 마법사다!

 

뉴에이지 신비주의는 고대의 신비 학교라고 불린 가르침들을 반영하고 있다. ‘비밀 종교(occult)’라는 용어는 신비 종교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제들과 숙련자들은 우주의 감춰진 진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신비 사상은 다양한 지리적인 거리와 문화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행복하고 복 받은자, 당신은 유한한 자가 아니라 신적인 존재가 되었도다”.

 

한 여류 뉴에이지 영성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권유한다.

기독교인들이 “당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가:”라고 물으면, “우리의 신적인 가능성을 완벽하게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명상과 변용된 의식의 상태를 통해 꾸준히 펼쳐 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라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가장 높임받는 뉴에이지 고수 중 한 사람인 스와미 묵타난다는 자신이 고양된 자아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이다.

네 자신의 자아에 무릎 꿇으라. 네 자신의 존재에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라.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늘 네 안에서 울려 나오게 하라. 네 자신의 자아를 묵상하라. 신은 너의 모습으로 네 안에 거한다.

 

묵타난다가 1983년에 죽자, 그의 최측근 추종자 한 명이 폭로했다. 자신의 사부는 “매일 밤 은혜와 자아실현의 약속을 미끼로 독실한 소녀들을 침실로 유혹한 정신 이상자, 가학증적 독재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자아실현은 고사하고 이는 성경의 진리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사례였다.

 

십자가 그리고 고양된 자아

 

뉴에이지는 실현된, 우주와 합일한 자아 교리를 지지한다. 그들은 그런 자아를 신이라고 보지만 실제로는 귀신들의 영역이다. 반면 기독교인들이 믿는 복음은 은혜를 통한 구원을 인간에게 제시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종교는 인간이 원래 선하기 때문에 인간의 완전성 혹은 더 좋은 표현으로는, 인간 자신이 지닌 신성의 구현을 통해 스스로 하늘로 향하는 길을 얻을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 자신의 죄성과 오류 가능성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마침내는 은혜를 통한 구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정반대 견해를 강조하여 제시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2:8~9).

 

구원은 철두철미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희생을 믿는 누구에게나 선사되는 은혜의 선물이다. 모든 것은 고양된 자아를 외치느냐 아니면 십자가를 외치느냐로 귀결된다. 어떤 신념 체계가 십자가의 전파를 권하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다. 기독교는 시대를 따라 오가는 명상 선생과 실용적인 신비가에 맞서 서 있는 요새와도 같다. 하지만 믿기지 않게도 가장 성공적으로 보이는 실용적인 신비가들이 기독교 자체에서 출현하고 있다. 이 운동을 더 돋보이게 뒤에서 결정적으로 밀어주는 형국을 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뉴에이지 영성 자체의 동력이 아니라 우리의 교회들이다. 어떤 영적 수련 방법은 교회에 깊이 들어와 진치고 있다. 영적 수련 방법들은 마치 빙산처럼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2 장 서양의 요가

 

어떤 서점의 종교 부문 서가는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왼쪽에는 ‘영성: 뉴에이지’라고 돼 있었다. 오른쪽에는 ‘유대-기독교’라는 분류표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양쪽 서가에는 모두 뉴에이지 운동의 기본 원리를 제시하는 책들이 진열돼 있었다. 카톨릭 저자 윌리엄 존스톤의 글이다.

무엇인가 강력한 것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 전반에서 엄청난 영적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 새로운 신비주의 유파가 발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매년 확대되고 있다.

 

만유 안에 있는 신?

 

뉴에이지라는 말을 만든 유명한 신비주의 여선지자인 엘리스 베일리의 말이다.

기독교인 지자들의 수행과 동양의 형제들의 명상을 연결해 주는 많은 구절들을 발견하기란 물론 쉽다. 이 양자는 방법에 있어 똑같은 효능을 증거한다.

 

모든 것 안에 있는 신을 보도록 하는 것. 힌두교에서는 이를 사마디 혹은 정신적 개화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이 요가 명상의 최종적인 목표다. 즉, 신은 모든 것 안에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해 힘 혹은 능력이 흘러나온다.

 

윌리엄 존스톤은 이러한 경험이 기독교 안에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내가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서구의 영성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늘 차지해 온 하나의 기독교적인 사마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기독교적인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저명한 심리학자인 칼 융은 이 체계가 서양의 요가일 수 있으리라고 예견했다. 기독교적 선 운동을 볼 때 유사한 술어 하나를 발견한다. 실용적인 목적 전체를 놓고 볼 때는 같은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용어는 바로 만유 내재신론, 즉 신이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것이다. 신뢰할만한 <복음주의 신학 사전>은 내재신론을 일종의 세계관으로 정의 내린다. “이 신론은 고적적인 유신론의 강점을 고전적인 범신론의 강점과 결합하고 있다. 내재신론은 인격적인 신을 모든 창조세계 안에 있는 신의 임재와 합쳐 놓는다. 달리 말해서 내재신론에서 신은 인격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포섭하는 실재다.

 

이 책의 신뢰성은 내재신론이 정통 기독교에서 합법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생사를 가르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내재신론은 신비주의적인 기도에 전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본이 되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영국성공회의 사제이며 신비 기도를 가르치는 교사인 켄 카이쉬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을 발견함’에서 이점을 선명하게 언급해 놓았다.

명상은 마음과 감정을 안정시켜 신적 존재를 곧장 경험하게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 사이에는 깊은 연계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신비가들은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이 신적 동력을 경험한다. 모든 창조세계는 신적 동력 안에 살아 있고 활성한 임재로서의 신을 품고 있다. 단지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이 세계관이 지닌 신학적인 의미는 몇 가지 이유에서 성경적인 기독교와 정면으로 맞선다. 오로지 한 분 참된 하나님이 존재하시되, 그분의 정체는 모든 사람 안에 있지 않다. 하나님 정체의 충만함은 그 육체적인 형태로는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에게만 나타나 있다!

 

성경은 사람 안에 신성이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선명하게 가르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거듭나지는 않는다.’ 즉 ‘하나님의 영을 모시지는 않는다’(요32장)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그러나 내재신론자들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이 자신 안에 신적 정체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9~10)

 

윌리엄 존스톤은 강조한다. “신은 내 존재의 중심이고 모든 존재의 중심이다.”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길인 복음 신앙을 근본적으로 제거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매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9절)

 

성경은 하나님이 권능의 말씀으로 온 세상을 붙들고 계시나, 온 세상의 실재가 되심으로써 이렇게 하지는 않으신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그(그리스도)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 이 말씀은 그분이 우리와는 따로 떨어져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임재하여 계시는 분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온 세상에 계시다는 이론은 이단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인격적 본질을 삼위일체 밖의 누구 혹은 어떤 것과도 나누지 않으실 것이고, 나누실 수도 없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이지 그것을 애초부터 소유한 자들은 아니다(벧후1:3~4).

 

베드로는 신자가 성령님의 일하심에 참여함을 인정한다.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단어는 지분 획득자 동료 혹은 파트너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독교인은 성령의 정결하게 하시는 약속에 참여하고, 타락한 악한 세상으로부터 따로 떼어 불러냄을 받고 있다. 게다가 참여자는 믿음을 통해 거듭난다. 반면 소지자는 무엇인가를 이미 소지한 자다. 내재신론과 범신론의 경우, 소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이다. 내재신론과 범신론자들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지 않는다. 이미 와 있는 것에 대한 각성만이 있다.

 

윌리기스 제이거의 말이다.

물리적인 세계, 인간 존재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인 실재의 이런저런 형상들이다. 신의 이런저런 표현들이다. 모두가 “아버지와 함께 하는 한 사람”일 뿐이다

 

제이거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이것은 힌두의 사마디에 기독교적인 스프레이를 뿌려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수 신비가들의 명상은 고차원적인 신비가들의 기도와 똑같다.”

 

침묵은 신의 언어인가?

 

관상 기도가 실제로 무엇을 포함하는지는 다음 글이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관상 기도의 좀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가면, 조만간 공, 빔, 무를 경험한다--심원한 신비의 침묵--무념무상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황당하게도 나는 이 “신비한 침묵”이, 뉴에이지 수련자들이 침묵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똑같은 방법들, 즉 만트라와 호흡법에 의해 이뤄지는 것임을 알게 됐다! 관상 기도는 이성이 아니라 심령이 신을 관조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기도의 말 혹은 거룩한 언어를 반복하는 것이다. 제이거는 이 점을 드러낸다.

단어의 뜻을 숙고하지 말라. 사고와 고찰을 그쳐야 한다. 모든 신비주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저 그 말을 고요히 “소리내라” 모든 감정과 생각은 떨쳐 버리라.

 

약간이라도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은 이 가르침이 역사적으로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그리고 노리치의 줄리안과 같은 인물들로 수 세기 거슬러 올라가는 것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가장 널리 알려진 글 가운데 하나는 14세기, 무명의 저자가 쓴 ‘무지의 구름’이다. 관상기도로 초심자들을 인도하는 책이다.

말을 적게 하라. 두 음절보다는 한 음절이 낫다--이 말로 망각의 구름 아래로 모든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

 

이 말의 근거는. 진정으로 신을 알기 위해서는 신비주의를 연마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성은 가라앉아야 하고 꺼버려야 한다. 그래야 신의 임재가 기다리고 있는 무지의 구름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수련하는 자들은 만약 그 거룩한 말들이 기독교적인 것이면, 수련자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고 믿는다. 방법이 신비주의 혹은 동양적인 수련론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의도일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인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안되는가? 왜 이런 신비주의 기도법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면 안되는가?” 이 질문의 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의 어떤 구절은 신비 경험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나온 신비주의를 인정한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정당한 신비 경험은 언제나 하나님이 일으키신다. 그것도 어떤 사람들에게 특정한 계시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결코 의식의 전환과 같은 방법에 의존하지 않았다. 행 11:5에서 베드로는 기도 중에 비몽사몽에 들어간다. 그러나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황홀경을 일으키신다.

 

반면 신비가는 정의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성을 활성화하기 위한 시도로 틀에 박힌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런 방법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신의 허가 혹은 보호 없이도 어떤 황홀경에 스스로를 끌어넣는다. 대단히 위험한 접근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의 어디에도 이런 신비한 수련을 하라는 명령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반응을 사전에 얻어 내는 방법을 수련하지 않아도 영적인 선물을 수여하신다.

 

관상 기도 지지자들은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그러면 시편 46편 10절은 무엇인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관상 기도 지지자들은 이 구절을 자주 내세운다. 표면적으로는 이 논쟁이 정당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잠잠하다”는 말의 의미를 관찰하고 나면, 어떤 관상적인 연결도 차단된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의미는 속도를 ‘늦추다’, ‘중단하다’ 혹은 ‘감하다’이다.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어쩔 줄 몰라 하지 말고 느긋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 문맥의 정황이다. 마음을 편하게 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라.

그 앞의 두 구절을 읽으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고 창을 끊으며 수례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 말씀은 어떤 변화된 의식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중생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동이다. 성령님이 한 때 죽은 영을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 있는 영이 되도록 거듭나게 하신다. 하나님이 개인을 변화된 의식상태로 놓지 않고 이 일을 이루신다.

 

행 2장에 기록된 오순절에도 모인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을 그때, 정신없이 중얼거리거나 만트라와 같이 공허한 반복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황홀경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고 하였다.

 

따라서 신약 성경에서 가장 신비 경험에 까까운 사건으로 기록된 두 사건(중생과 오순절)을 볼 때, 의식의 변용을 추구한 흔적도 없고 그런 것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사실 신 구약 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하면, 그 수혜자가 온전한 정신 상태를 하고 있지 않아도 체험하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딱 두 부류의 경험이 있다. 하나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환상이다. 그런데 이 각각의 경우에서도 경험은 하나님이 주도하신다. 반대로 성경에서는 자기 주도적인 황홀경은 하나님께서 예외를 두지 않고 정죄하시는 것을 아래 성구들을 통해 간단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신 18:9~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위 구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의 히브리적 의미를 살펴보면 상당수가 주문 외우는 일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문맥에서 주문은 황홀경을 뜻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께서 무의식 상태로 이끄실 때는 꿈 혹은 환상 가운데서이다. 그러나 사람이 황홀경으로 들어가는 것은 주문 혹은 최면의 형태를 빌려서다. 한편 성경은 어디에도 침묵이 “하나님의 능력”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확고부동하게 “십자가의 메시지”(고전1:18)이다.

 

관상적인 영성의 범위

 

많은 기독교인이 실용적인 기독교 신비운동이 존재하는지, 관상적인 영성으로 향하는 하나의 명백한 흐름이 수면 위로 부상해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신비 기도 운동의 영향은 이제 일반인에게까지 미쳤다. 1992년 ‘뉴스위크’지는 “신에게 말하다”는 제목으로 표지 기사를 실었다. 마치는 말이다.

침묵, 적절한 몸의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복 기도를 통한 마음 비움은 모든 세계 고등종교에서 신비자들이 수련해 온 방법이다. 이런 방법들은 대부분의 현대 영적 지도자들이 신에게 더 가까이 가길 원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기본 바탕이 되고 있다.

 

2005년 9월 ‘뉴스위크’지는 <미국의 영성>이라는 특별 기사를 실었다. “영적인 것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장장 17페이지에 걸쳐 나갔다. 기독교 신비 운동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이 기사는 기독교 신비 운동이 존재할뿐더러 잘 활성화해 있고 믿기 힘들 정도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증거였다. 기사는 오늘날 관상기도 운동의 기원을 다루면서 시작하는데, 이 운동을 크게는 카톨릭 수사인 토머스 키팅이 시작한 것으로 평가한다.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사인 그(키팅)에게 명상은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었다. 키팅은 선승으로 유명한 로쉬 사사키를 초청해 수도원에서 피정을 인도하도록 했다. 키팅은 교회에서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인 영성 수련법을 평신도들에게 제공한 전례가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같은 수도회 소속인 윌리엄 메닝거는 1974년 어느 날 14세기 관상 안내서, ‘무지의 구름’ 한권이 먼지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운동의 가장 명백한 통합 형태는 로마 가톨릭에서 발견된다. 가툴릭 서적 출판사 협회의 전 회장인 마이클 리치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많은 사람이 뉴에이지 운동에 깔려 있는 영적인 원리들이 가톨릭 신앙의 주류로 곧 편입, 아니 재편입될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이런 일이 바로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관상 기도 지도자인 바실 페닝턴은 이처럼 성장하는 세력을 노골적으로 인정하면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거대한 공동체의 일부다-- 우리는 군대다.” 이름난 가톨릭 메체사는 말했다. “관상 기도는 다시 한 번 기독교 사회에서 공통 관심사가 됐다.” 윌리엄 섀넌은 관상적인 영성이 이제 옛날의 가톨릭을 광범위하게 대체할 정도가 됐다고 말한다. 가톨릭교회의 저변에 깔려 있는 많은 영적 이념이 이제 방향을 관상으로 틀었다는 것이다. 한 수녀는 ‘무지의 구름’이 이제 거의 모든 가톨릭 영성의 기본이 되었고, 관상 기도는 전 세계에 퍼져 나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신비 기도운동은 가톨릭 최고위층의 인증을 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이 운동 확산의 주체임을 한 인터뷰 기사를 읽고 알게 되었다. 토머스 키팅은 1970년대에 요한 바오로 6세와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간부들과의 만남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털어 놓았다.

교황 성하께서는 교회가 관상의 전통을 재발견하지 않으면, 갱신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분은 구체적으로 수도원들을 거명하셨는데, 수도원들이 관상적인 삶을 살고 있으므로 평신도들과 다른 종교인들이 자신의 삶에 이러한 차원을 열어 가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관상 기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교권을 이용하여 신자들에게 권장한 가톨릭교회의 최근 공식 신앙 고백을 보라. 이 새로운 신앙 고백은 이렇게 확고하게 진술하고 있다. “관상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관상 기도는 침묵이다.” 교황 바오로의 권고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는 한 유명 가톨릭 서점의 서가들 사이에서 알게 됐다. 영성 서가들에 꽂힌 책들의 10에서 90퍼센트가 신비적 기도에 대한 것들이었다. 신비적 기도는 압도하는 주제임이 틀림 없었다.

 

관상 영성은 가톨릭교회의 담장 밖 너머로 퍼졌다. 주류 개신교단들(성공회, 연합감리교, 장로교, 루터란,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등)이 관상이라는 물줄기 앞에 양분됐다. 20세기 개신교 자유주의 전통과 사회정치적인 행동주의는 영적 체험에 영적으로 너무 고갈되고 목말라해 왔다. 실용적인 신비주의라는 이 유파는 영적으로 목말라하는 자들에게 영성이라는 감각을 선사한다. 그러면서도 자유주의적인 정치적인 올바름 또한 그들에게 허용한다. 오리건 주립 대학의 종교문화 교수 보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부 주류 교단에서는 떠오르는 패러다임인(관상적인) 기독교인이 주종을 이룬다. 기독교인이 되는 이 두 가지 방법 사이에서 다른 것들은 동등하게 나뉜다.

 

이 주류 교단에 납품을 하는 한 서점의 영업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즉 관상 기도가 개신교 주류 교단에 큰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목회자가 이 수련에 개방적이라고 한다. 또한 일부 목회자들이 저항감을 보이기는 하지만, 관상으로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는 것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많은 개신교도가 서구적인 관상 전통으로 회귀함으로써 만족을 얻으려 하고 있다”는 한 출판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한 대학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내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전형적인 중년에 중산층 감리고, 장로교, 회중교회 그리고 침례교인으로서 자신들의 출석 교회에서 평신도 지도자로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외형적으로 학생들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그러나 정말 학생들 각각 한 사람이 여러 형태 중 하나의 뉴에이지를 이미 접했고, 신비 사상에 매료됐음을 발견했다.

 

관조적인 영성은 심오한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또 수련자들에게 소위 전통적인 기독교인을 끌어오고 있음을 보여 줘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이 점이 이 수련 운동의 정통성을 의심할 수도 있는 사람들의 망설임을 희석한다. 관상 기도 운동의 범위와 유포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국제 영적 지도자들이라는 조직에서 낸 통계를 봐야 한다. 200년 회원 목록에는 성공회 652명, 장로교 239명, 감리교 175명, 루터교 239명, 그리고 2,386명이나 되는 로마 가톨릭이 들어 있다. 다른 40개 교단 혹은 “전통들”을 포함하면 합은 6,648명이다. 이 목록에는 불교, 영지주의적 기독교, 힌두교, 무슬림, 유대교, 싯다 요가 그리고 페이건/위컨(일종의 범신론을 신봉하며 요술, 마법 등을 수행하는 신흥종교집단)까지가 포함되어 있다.

 

동양에서 빌려 온 사막 교부들

 

가톨릭 사제인 윌리엄 섀넌은 자신의 책 ‘평화의 씨앗’에서 인간이 처한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논한다.

우리는 신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 망각은 단지 개인적인 경험만은 아니다. 이것은 인류의 집단 경험이다. 사실 여기서 원죄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신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낙원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

 

섀넌의 관점은 전체 관상 기도 운동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세계관이다. 힌두교의 구루 혹은 선불교의 선승도 같은 설명을 제시한다. 이런 결론은 관상 기도의 뿌리를 파헤쳐 들어가면 오히려 논리적이다. 이 수련의 기원을 살펴 보자.

 

중세 초기 중동 지역의 광야에 은자들이 살았다. 이 은자들은 역사상 ‘사막 교부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다. 이 은자들은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고립된 작은 마을에 기거했다. 관상 운동은 만트라를 기도 도구로 권장한 이 수도사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한 명상 학자는 아래와 같이 말함으로써 둘의 연결 관계를 밝혔다.

이 초기 기독교 수사들의 명상법과 생활규칙은 동방의 몇 개 왕국에서 볼 수 있는 힌두교와 불교 고행 수행자들의 기법과 상당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초기 기독교 수사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채용한 명상 기법들은 동양에서 빌려 온 것이든지 아니면 자발적인 재발견일 것이다.

 

특별히 뛰어난 열심 있는 소유자들인 많은 사막 교부들은 그저 시행착오를 통해 하나님을 추구했다. 알려진 한 관상 기도 교사는 사막 교부들이 수련에서 얻은 우연한 방법임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때는 영적 방법이라는 면에서 중요한 실험의 시기였다. 다른 수련법을 여러 가지 시도했지만, 그 중 일부는 현대인들에게는 너무 가혹하거나 극단적이다. 사막 교부들은 많은 기도의 방법을 고민하고 연구했다.

 

비밀 종교의 신비 수련을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시도는 결국 재앙으로 이를 수밖에 없다. 이집트의 사막 교부들은 신에게 획기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당시 상당히 위험한 지형에 모여 살았다. 사막 교부들이 이렇게 한 이유에 대해 한 신학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기독교의 명상 수련의 지적, 철학적 그리고 신학적 기반의 상당 부분 역시 헬레니즘과 로마와 이집트의 신학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이 다양한 영지주의적인 사변과 접촉한 곳이 알렉산드리아였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많은 학자는 영지주의적인 사변의 뿌리가 동방, 아마도 인도였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 사막 교부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진지한 이상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 어떤 것도 동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힌두교도들이 그들의 신에 다가가기 위해 썼던 방법이 있다면, 기독교 만트라도 예수께 나아가기 위해 쓰일 수 있다. 그들의 말이다.

오늘날 활짝 열린 성령 연합 운동의 입장에서, 우리는 겸손히 특정 동방 종교에서 배워야 한다-- 특정 수련을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 기원이 아니라 의도다--우리의 영적 자원을 너무 협소하게 정의함으로써 그것을 빈곤하게 하려는 기독교인들 앞에서 이 점은 중요하다. 우리가 인류라는 가족을 하나님의 영 가운데 있는 하나로 본다면, 이런 역사적 상호는 놀랄 일이 아니다-- 동방의 영성 수련에 선택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활짝 피어나는 기독교적인 삶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전개하고 있는 추론을 파악했는가? 영적인 성장을 도와주는 비기독교적인 보조 수단들도 기독교인의 삶에서 전적으로 정당하다. 기독교인들이 오직 성경에만 근거를 두고 기독교를 추구한다면, 자신의 영성을 빈곤하게 만들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막 교부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관상 기도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경고를 하셨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마6:7)

 

만트라 명상 혹은 거룩한 기도의 말이 “중언부언”에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로 그 의미에 정확히 걸림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이럼에도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만한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인 신비주의는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 있기에 다른 형태의 신비주의(동방 혹은 비밀 종교 등)와는 다르다는 말을 함부로 뱉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따르라는 그분의 교훈을 무시할 때, 결국은 이교도들의 길을 따르게 된다. 이스라엘이 이런 일을 수없이 자행했다. 아니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여러 면에서 사막 교부들은 가인과도 같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은 있었지만 교훈을 순순히 듣고 옳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막 교부들의 경건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별력의 부족은 비난받아 마땅하다.(요약자 주-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도, 제시펜 루이스의 ‘십자가의 도’도, 귀용 부인의 영성에도, 이런 신비 사상이 많이 깃들어 있다. 그들이 만난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 체험들이 과연 진짜인지 의심스럽다. 삶의 현장과 관계를 떠난 구도, 신비주의 추구 자체가 벌써 귀신을 불러 들인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으로 사람을, 현장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사역이셨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법도와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다. 거기에 참된 영성이 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인 예배이다. 신비 사상은 말씀을 도외시한 채 가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참된 영성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는 사람 답게 그분의 말씀대로 성품과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따르지 않으면’ 멸망의 길로 간다. 토저의 책들도, 교회사에서의 잘못된 경건주의 전통도 깊은 것 같지만 이런 신비사상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참된 성령의 역사와 분별하여야 한다.)

 

뉴에이지 기독교인?

 

관상 기도가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뉴에이지 운동의 한 요소이다. 뉴에이지 심리 치료사인 재클린 스몰의 말이다.

일종의 기독교적인 명상, 그리고 수련자들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내면의 상징에 초점을 맞추도록 훈련을 받는다-- 수련자들이 이런 명상법에 깊이 빠지면, 자가 최면과 비슷한 깊은 황활한 상태에 들어간다.

 

‘뉴에이지 저널’의 편집자들이 ‘위로 그리고 아래로’라는 책을 엮었다. 이 책은 편집자의 세계관에 따르면 “영적인 갱신으로 가는 길‘에 대한 안내서였다. 샤머니즘, 여신숭배 그리고 통전적인 건강에 대한 장들에 이어서 관상 기도에 대한 장이 나온다. 이들은 과감하게 선언한다.

초월명상을 수련한 사람들은 기독교가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온 자체의 만트라 명상이 있는 것을 알면 놀랄지도 모른다-- 만트라에 의존하는 전통은 기독교 안의 신비 경전에서 오랜 역사를 두고 있다.

 

뉴 에이지 저자 타브 스파크스는 다양한 신비 사상 그리고 동방의 수련법들에서, ‘영적인 기독교’라고 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 기독교의 어떤 형태가 영적인 능력과 함께 살아 있는 것들이 있음은 좋은 소식이다.”

 

워싱턴 D.C.에 자리잡은 명망 높은 샬렘 연구소의 설립자 틸덴 에드워즈는 그의 책 ‘영적인 친구’에서, 관상 기도를 수행하는 사람들과 “영적인 발전”에서 “역동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신비운동가 로베르토 아사기올리의 책, ‘정신 합치’의 내용으로 돌어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기독교인들을 이 기도의 유형으로 끌어들이길 바란다. 그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영적 발전”을 기독교인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이 신비주의 흐름(관상기도)은 서구를 극동의 영성에 연결하는 교량이다.”

 

의도는 좋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막 교부들과 그 영적 후배들의 시도에 대한 답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찰스 스펄전의 깊이 있는 관찰을 보자.

인간의 지혜는 십자가 교리를 손질해서 타락한 본성의 변질된 기호에 좀 더 부드럽게 다가가고 잘 맞는 체계가 되게 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육적인 지혜는 복음을 증진하기는커녕 복음을 오염시킨다. 아니 다른 복음이 되게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것이 되게 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어떤 형태로든 변경하고 수정하는 것은 오염이고 수욕이다.

 

기독교 쿤달리니

 

쿤달리니는 힌두고 영성에 저류로 흐르는 신비한 능력 혹은 힘이라는 용어이다. 힌두교에서 쿤달리니는 보통 뱀의 힘을 말한다. 약물중독 전문 상담가이고 열성있는 가톨릭 평신도 사목위원인 성 로메인은 ‘쿤달리니 에너지와 기독교 영성’이라는 책을 썼고, 그는 정신을 개입한 기도를 “비생산적인”것으로 매도하면서 마음의 작용을 끊고, 자신이 정신적인 수동성이라고 지적한 상태로 기도를 정의한다. 그가 맞부딛친 변화는 냉수를 들이킨 심정으로 우려하게 만든다.

그때 빛이 내게로 왔다! 그 순간 금빛 소용돌이가 더 심하게 치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나를 사로잡아버린 형상으로 금빛 소용돌이는 변했다-- 이런 소용돌이가 언제나 네다섯번 일어났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가 쏟아졌다. 빛은 더 밝아지고 눈이 부셨다. 나는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

 

이런 일이 일어난 후 성 로메인은 “지혜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고, “다른 이에게서 메시지를 받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또한 이 침묵의 기간에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정수리가 “따끔거렸고” 그때 “에너지가 쑤욱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이런 감각은 며칠 동안 계속 됐다. 성 로메인이 체험한 신비 경험의 극치는 불 보듯 뻔하다. 당신이 기독교 요가 혹은 기독교 선을 하면 성 로메인처럼 기독교 사마디로 끝날 것이다. 성 로메인은 이렇게 선언한다.

더 이상 소외감은 없었다. 내 존재가 그리로 흘러들어가는 대지와 모든 창조의 실제는 같기 때문이다. 세계 모든 종교의 신비가들은 이 변화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성 로메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아마 이 작업의 중요성은 기독교와, 뉴에이지 영성으로 대표되는 동양적인 신비주의의 형태 사이의, 대화에 기여하는 가능성에 있다.

 

많은 사람은 성 로메인이 경건한 기독교인이라고 믿는다 성 로메인은 자신이 예수를 사랑하고 구원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 로메인의 감각이다. 그는 말한다.

내면의 충고자의 승낙 없이 나는 어떤 결정도 나 자신을 위해 내릴 수 없다. 충고자의 목소리는 내가 필요할 때 너무도 또렷하게 내게 말한다.-- 어떤 내면의 눈이 내 두 눈을 통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또렷하게 든다.

 

성 로메인은 “내면의 충고자”를 정녕 하나님과 연결하는 것인가? 이러한 기도 방법이 기독교계 전반에 널리 퍼져 있는 실정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마땅히 던져야 한다. 이러한 수련은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 주류 교단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리고 이제는 영역을 넘어 보수적인 교단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로메인은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진정한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난 자들이 어떤 면에서 이 전체 여정이 어떻게 될지 미리 모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나를 찾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세상은 얼마나 놀라운 곳인지. 그러나 그럴려면 문화를 재구성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겨우 이런 사명을 깨닫기 시작한 단계라고 믿는다.

 

‘초월 지식 입문: 초월 지식 이해 안내’라는 책은 뉴에이지 운동의 기본 범칙과 원리를 이렇게 요약 소개한다.

당신은 신과 하나다. 온 인류와도 하나다-- 온 세상은 다른 만물과 하나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 신성의 표현으로서 에너지를 온 세상 안으로 스며들게 한다.

 

성 로메인의 진술은 이렇다. “내 존재가 흘러나온 근본(신)은 모든 창조의 실체와 똑같다.”

이 두 견해가 일치한다! 성 로메인은 선, 요가가 아니라 이런 수련의 기독교 형태인 보통의 관상 기도를 통해 이러한 견해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빛은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독교 저술들은 요가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한 경험의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있다. 초기 사막 신비가 중 하나인 성 엔소니는 기도 중에 자주 낯선, 대로는 위협적인 정신 물리학적인 힘에 사로잡히곤 했다.

 

유감이지만 이 경험은 성 앤소니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 세기에 걸쳐 이 경험은 신비한 깨달음으로 가는 일반적인 절차가 됐다. 한 신비 수련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불교 수행자들, 힌두교 구루들, 기독교 신비가들, 원시적인 무당들, 수피교의 수장들 그리고 히브리 신비가들이 진술하는 고전적인 깨달음의 경험은 발광하는 빛과 창조세계와 합일하는 경험이라는 두 가지 보편적 요소로 특징지어진다.

 

신비주의적인 연결이 없으면 합일이 일어날 수 없다. 합일은 언제나 신비주의적인 연결에 포함된다. 여기에 신비 종교의 핵심이 있다. 영적인 지도자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많은 개인이 복음주의적인 교회를 점점 더 많이 찾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다수가 신비 기도의 메시지를 가르친다.

 

혼합 영성

 

관상 기도의 최종적인 결과는 혼합적인 영성이다. 혼합 영성의 배후에 있는 전제는 신성이 온 세상 안에 들어 있고, 신의 임재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온 세상은 서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신비 사상(명상)을 통해 이런 신성의 상태를 느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전제는 한 사람을 성경의 건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로 연결하는 일종의 자기 최면적인 황홀경 상태에 근거를 두고 있을뿐더러, 그 경험에 의해 유지된다.

 

뉴에이지 전도사였던 브라이언 플린은 ‘역풍을 맞으며 달리기’라는 책에서 혼합 영성을 신비주의라는 공통의 실마리를 통한 세계 종교의 연합으로 설명하고 있다. 디즈데일이 “혼합 영성이란 세계 종교 가운데 존재하는 영적인 공통분모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 디즈데일은 보편적인 교회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교회 또한 인류의 화해에 교량 역할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성령은 힌두교도, 불교도, 무슬림, 시크교도, 자이니교도, 도교도, 유교도, 그리고 토착 신앙인 모두에게 문을 여는 시대의 표상을 통해 교회에 영감을 붓고 있다. 모체(하나의 결합체)로서 교회는 다른 전통의 신봉자들을 더 이상 교회 밖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교회는 이 전통에 대한 연구를 촉진하고, 공통되는 근거와 나란히 통찰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존 맥아더목사는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신앙’에서 말한다.

지난 20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의 합의는 명백하게 달라졌다. 전체적으로 우리의 메시지는 교리에 대해서는 짧아지고 경험에 대해서는 길어졌다. 사고가 감정보다 점점 덜 중요해지고 있다-- 언제나 복음주의의 특징으로 손꼽히던 건전한 가르침에 대한 열정은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게 됐다. 여기에 신비주의의 약물을 투여하라. 그러면 불치의 영적 재앙을 만드는 공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선명했다. 하나님이 구세주를 보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신비 기도 실천 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은 완전한 헛수고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문제는 많은 선의의 사람들이 내재신론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너무나 좋게 들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좀 덜 완고한 분으로 보이게 된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모두를 신과 연결한다. 이 메시지에는 큰 매력이 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인간에게 보편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와 반대로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그리스도가 전하시는 메시지는 내재신론이 말하는 구원론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사마디, 선, 쿤달리니 혹은 관상적인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이다!

미국인들이 실제로 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놀랄만한 결과가 나왔다. ‘영성과 건강’이라는 잡지에서 이름난 여론조사 기관과 계약을 맺고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4퍼센트가 신이 “어디 누군에겐가”가 아니라 “어디에나 그리고 모든 것 안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 말은 이제는 내재신론이 좀 더 인기 있는 신관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다가 이런 신비주의 혁명이 득세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이런 시각이 그토록 퍼져 나갔는가? 답은 이렇다. 지난 30년 혹은 40년 전에 몇몇 저자들이 기독교계의 수많은 독자와 구도자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내놓았다. 이 저자들은 이제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의 생활을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방법으로까지 보고 있는 관조적인 견해를 드러냈고 동시에 퍼뜨렸다. 신비주의 운동은 사람들이 관상적인 수련에 빠져들도록 부추겼다. ‘빛’과 ‘내면의 충고자’를 경험하도록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그들의 메시지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81P

 

 

신비주의기독교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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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1.16 14:42

    첫댓글 정리해 주신 귀한 글 감사를 드립니다.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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