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리
<위치 및 환경>
도리원 소재지에서 동북방향으로 5번국도를 따라 안동방면으로 2Km 좌측에 봉양초등학교 뒤편
산기슭 양쪽에 고색 창연한 와가가 보인다. 옛날에는 금뢰면 구호라고 하였다.
마을 앞산에 거북이 꼬리와 비슷하다고 구미(龜尾)라고 불렀다.
논이 700여 두락 되며 일제 합병 후 구안도로를 낼 때 마을앞을 통과토록 측량하기에 마을 사람들이
적극 반대하여 마을에서 500m 떨어진 앞쪽 동서로 내었다. 마을 형성이 남향이라서 안온하고
따뜻하여 도로에서 보면 짜임새가 있어 보인다.
마을 뒷산을 가메봉, 앞으로는 천방산, 금산, 삼보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탑리로 가는 국도가 있어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곳이다. 의성에서 내려오면 남대천과 탑리에서 내려오는 쌍계천물이
구미마을 앞 섬개들에서 합류하여 위천으로 흐른다
< 마을이름(지명) 유래>
1612년 7월에 종가를 지키던 종손 신병철씨의 14대조인 오봉선생(휘 지제 선조조 증 이조참판)이 터를 잡은
후(귀장지에 기록) 36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오봉선생 재종인 방산 지문, 홍산훈도가 대를 이어 거주하고 있다.
시조 이후 거제도에서 나와 4세까지 경남 거창 5세 우때는 상주 망경산 아래(지금의 의성군 단밀면)로 옮겼고,
6세 때는 읍파(광부 )와 귀파(광귀)로 이대 분파, 9세 때는 안동군 풍북면 정사동으로 이사를 했고,
10세 개보는 의성군 봉양면 상리동으로 옮겼다가, 14세 오봉공이 57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현재 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이 마을 신씨의 70여호는 귀파이고, 의성읍 주변엔 읍파들이 살고 있다.
오봉공은 여러곳에 영주할 터를 물색하던 중, 산수가 수려한 이곳을 택했는데,
당시의 명칭은 금뢰면 귀호이었으나, 마을앞 산의 모양이 거북의 등과 꼬리를 닮았다 해서 구미로 명칭이 바뀌었다.
입향 당시에 기술된 동지인 귀장지에 의하면 오봉공은 이곳의 들과 푸른강, 매화, 기러기, 갈매기 등을
찬미한 흔적이 있고 마을 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신복구장일묘관 평임벽간배창만
력경차족공기포 소구연감도서한
이죽광매존수계 환구화로탁동환
종금노이무여사 불신인간도로난
<새로 구미에 복거하니 넓은 들과 푸른 산에 가리었다.
힘써 갈고하니 주리는배를 채우는데 족하고,조그마한 집은 찬것과 더위를 감내할 만하다.
대나무와 매화를 옮겨 심어 숙계를 이루니, 갈매기가 서로 즐기도다.
이제 늙으니 할일이 없고, 인가 생활이 험난함을 알겠도다.>
공이 정착이후 마을 앞 남대천에 보를 만들었는데 최근까지도 그 공을 인정받고 있다.
<주요 사건 및 자랑>
봉양면 구미동 255번지 256번지와 수백 평 현 대지 위에 정침은 접판간과 하사랑은 아홉간으로서,
우아하고 단정한 자좌 방향의 와가건물이 바로 종택이니, 휘 지문,자 은경, 호 빙산, 홍산 훈도공이
임진란시 피우선방산 하에서 전란안정 연후 정착, 처음 복거한 곳이다. 그후 현 15세손 신병곤에 이르기까지
세거후예 세대수도 수백호를 이루고 있다.
현 종택은 서기 1944년 갑신년에 중건하였다. 일제 36년 간의 참혹한 식민착취 약탈의 최종 말년이라,
우리 겨레의 그 그 삶은 지금으로서는 필설로 형용하기 조차 어렵다. 바로 중일 전시라,
생산 오곡은 공출이라 하여 강제수탈 징발하여 갔고,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지날 때였다.
주위 산림의 껍질과 자연생 산속 풀들로 주곡에 보태어 끼니를 이었고, 종택 건축시의 동량연목용재 일체는
구미동 후산 종중림 3~1번지에서 직접 벌채한 목림뿐이었다. 현재와 같은 편의한 용기는 전무하고
4인 또는 6인 목도로 운반하고, 목공수가 먹줄을 놓아 용재 윤곽을 도끼로 다듬어서 큰 짜구로 다시 손보아
대패로 정리하였다.
이같은 우여곡절에서도, 많은 종친 사람들은 보국대니 징용이니 해서 강제로 일본국에 동원되어 가고,
부족한 그 매사의 환경에서도 노력과 지성의 결과는 이월 초순부터 시작된 대역사가 11월 말경에야 겨우
새모습의 종택을 보게 되었다.
창호문같은 세공품은 젊은 두사람이 대구까지 답보로 가서, 3일 만에 양어깨에 문짝을 매고 피로에 싸인
쇠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신발이 허술해서 발이 매우 다쳐 있었다. 이로부터 어언 54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고, 지나온 자취가 화목과 정성에서 나온 화수지정이 깊은 감명과 흔적을 곰곰이 생각게 한다.
<역대의 인물>
상계의 인물들을 제외하면 이 마을의 입향 시조인 오봉공부터 살펴본다. 공은 조선 선조때 사람으로
호는 오봉, 관직은 승지에 이르렀다.
선조 22년 1589년에 중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정언, 예조좌랑, 문학, 전주 판관 등을 역임했다.
임란때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동맹 창의로 의병을 모집하는데, 공을 세워 전후엔 선무 호성훈 1등 공신으로
추앙되었다. 1613년에 창원부사로 나가 백성들은 괴롭히던 도적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전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인조때는 승지가 되었다.
인조조 홍망(호:고송관지평)은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46년 정언으로 사헌부 재직중 직언을 하다가
탄핵을 받고 벽동에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정두경(당시 사간원 정언)의 소론에 의거 평해로 장소를
옮겨 귀양살이를 하다가 곧 환향하였다.
그후 효종 3년에 풍기군수, 울산부사, 전주판관을 역임했다. 울산시청 동헌에 지금도 그의 청덕 선정비가 서
있고 전주 역전에도 그의 부친인 오봉과 고송 부자의 선정비가 한비석에 앞뒤로 새겨져 있었다.
그 후에도 체인(호회병)도와 정주같은 학자를 비롯 과환과 문한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오봉의 6세손이자 협성교육재단 이사장 신진욱의 고모부인 체인의 저서 숭경록은 공경을 주제로
엮은 진귀한 것으로 오늘날 학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일반 문집과는 달리 요순이래의 중국 및 우리나라의 고금에 걸친 도학군자의 경에 대한 주장과
이론을 체계있게 정리하고, 거기에다 자신의 사상을 가미한 논문형식 통권 4권으로 된 숭경록은 주경지결,
주경연원, 지결통집증성록 등 7개부문으로 나눠 경을 갈파하고 있어서 현재 주창되고 있는 충효교육과
깊은 연관을 지을 수 있는 자료이다.
유명대학 도서관 등에서 이를 찾는 경우가 많아 이 마을에서는 숭경록 친필원본은 복사판 500부를 낸 바
있고, 유정기교수가 번역한 완역판도 반질되었다.
○ 신지제 : 1562년 명종 17년 봉양면 상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순부 호는 오봉, 관은 아주다.
학봉 김성일, 유일제,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급제, 예안현 감재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안 안동 겸관으로 의병을 모집,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동맹창의 항쟁하였다. 인조반정 후 동부승지,
63세로 타개하고 1676(숙종 2년)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장대 금산서원 에 봉향하고 있다.
○ 신지문 : 선조 2년(1539년)에 태어남. 자는 은경, 호는 방산. 충청도 홍산훈도를 역임했다.
만오 달도공 외 많은 분과 장천원에서 시선 교유, 효우가 지극하고 문사가 전아했다.
종가사당에 봉향, 달도 만오공의 만사에 약하기를 우리집안이 심히 침체하여 모두가고 몇 사람이나
생존하였는고. 장천서원에서 일찍이 자리를 함께 하였고, 절집에서 서로 곡차도 마셨네.
또 일생이 꿈길과 같으니, 뒤에 죽은 사람의 혼이 상하네. 화수회 할 다른 날에 옷장자의 말씀듣기가 어렵겠네. 라고 하였다.
♠♠ 열부
유인 성산이씨 순절기념비. 유인의 성은 이씨요 성산인이니 연담인세의 후라. 부는 이영철이요 모는
청주한씨라. 18세에 신영하의 장남 성열에게 출가하였다.
이 한많은 단기4295년 8월 6일 15년 간의 고결한 수절채로 님의 뒤를 따라
낙동강 맑은 물에 투신 자결하였으니, 이날은 바로 부군이 사거한 15주년 기일이었다
장하다. 일편단심 후세에 길이 빛나리로다. 이제 작은 표석을 세워 사적의 일단을 기하고 길이 명복이
있기를 빈다. 단기 4296년 월 일 친가부 이영철.
방년 20에 청상의 몸이 되단 말인가. 하물며 일점혈육 없으니 더욱 애닯고나.
고절 15년에 송죽같이 굳은 지조 놀라운 정열이여 길이 빛나리라. 영령이여 명복을 누리어라.
단기 4296년 4월 시부 신영하.
경주 김효주 근서 열부순절 비문은 방년 20세 청상에서 1962년 8월 6일 15년 간의 고결채로 부군기일에
낙동간 투신자결 그 정렬 지조는 퇴속세간의 구감이라 하였다.
● 유적과 유물
이 마을은 택생리를 잘한 탓인지 유적과 유물이 여타 마을에 비해 잘 보존되고
후손들에 의해 원형이상으로 잘 가꾸어지고 있다. 오봉공(입향조)를 모신 사당은 문화재 자료 187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가 봉안된 장대서원, 고송의 서당인 낙선당은 인조때 창건 2차의 중건을 거쳐
, 1970년 후손 신정기의 주창으로 중수를 했다.
60년 전 이 마을에 국민학교가 건립되기 전까지 줄곧 후학을 양성하는 학교의 역활을 했다.
좌측에는 오봉 신선생 신도비가 서 있다. 이밖에 체인(오봉의 7세손)의 서당인 금연정사(금산서원으로 승격)
가 남대천 건너편 금산에 자리하고, 삼지당(오봉의 손자) 한걸서당이 지네에 있어,
종택과 이 마을을 찾아오는 이의 눈길을 끌고 있다.
<오늘날의 구미리>
외형상으로는 옛날 어느 때보다도 요즈음의 이 마을이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그만큼 선조들 못지 않게 후손들이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을앞 5번국도와 탑리쪽으로 연결하는 교량, 마을안에 있는 소학교, 마을 진입로며,
지붕과 마을의 짜임새가 보통이 아니다. 대추, 감, 포도, 자두 등 과일나무가 많은데다 동네안에 있는
커다란 연못마저 풍요함을 더해주고 있다. 상수도, 전기, 전화 등 문화혜택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어졌고,
이 마을 출신들이 왕래하는 자가용 차량도 드나들며, 그만큼 시골 티를 벗어났다.
아쉬운 것은 젊은 사람이 없고 노인만 있으니!
● 구미보
1610년 9월 광해 2년 구미보 신장 도목완의에 본즉, 오봉 선생 아주 신공이 소축한 것이다.
공은 구미에 복거하면서 축보한 것이 길부촌 전부터이다. 여기에 거주하는 이는 모두 몽리자이다.
이 근방에 사는 7개동의 주민이 살수 있는 관개사업이며 자자손손 모두가 주관하며, 돌아가면서
도감을 역임, 출역하여 수축하며 영구히 공유할 것이다.
아랫마을 웃마을 각자가 같이 회합하여 조약을 정하고 ,그 조약대로 출역, 물의 관리를 할 것을 완의한다.
상, 중, 하, 도합 427두 진도이며, 특히 천동의 강세원의 증조 유훈어본보자이다는 기록이 있고,
조약 절목 10항이며, 경술(1610) 9월에 관에서 낙관된 기록이 있다. 토목설계 등 발달되지 않은
그 시대에 길부에서 구미까지 근 4km나 되는 공사를 완공함은 놀라운 일이며, 1970년대 농지정리
되기 전까지 360년간 이용한 수리시설이다.
그 흔적은 길부촌 전부터 현 호상동까지 그 수로가 유지되고 있으며, 오늘날도 이용하고 있다
. 아쉬운 것은 구미보 유허라는 표석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구미못
도와 신정주의 구장지를 저술한 연대는 1820년대인데, 그때 촌락별명을 기록한 것에 지내촌,
지외촌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그전부터 구미못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못을 처음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가로 120m,세로150m, 깊이는 2m~8m이며, 세구 연심하여 깊이가 줄어 신차수가 구미 수리계장을 할 때
1993년에 준설사업을 하여 수량이 많아졌으며, 모내기를 할 때와 한발에 대비 요긴하게 쓰여지고 있다.
<주요지명>
○ 구미리 : 지형이 굽어져 있으므로 구미, 굽이 있어 구미, 거북이 꼬리와 닮은 형태여서 구미라 한다.
○ 가매봉 : 못안 북쪽산
○ 갓 배랏골 : 못안 동북쪽 꼴짜기
○ 금산(검산) : 서부서 남쪽산, 금연정사, 금산서원 있음
○ 배나무 고개 : 못안에서 노매실로 넘어가는 고개로 배나무가 있음.
○ 삼보산 : 동부 남쪽 산의 전설에 의하면 보물이 있는곳.
○ 섬개들 : 구미 남쪽들로 남대천과 쌍계천인 합류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