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중심부가 보여 주는 한 가지 특징은 그 구성원에게 고급 문화가 대량으로 공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그것이 원래 만들어진 사회로부터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간접적이고 사소한 기능을 발휘할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로테르담이 불타고 있는데 그들은 사스크리어의 동사형을 연구하고 있다.
이와 전혀 다른 현대세계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이른바 사회적 세계의 구조 개혁을 위한 프로젝트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회구조는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은 사회 참여의 학문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실천지향적 이론화 작업이라 부를 수 있다.
어떤 학자가 칼뱅주의에서 유래한 세계 형성적 기독교의 비전을 포착했다고 가정해 본다면 인간역사는 샬롬을 증진하는 세력과 저지하는 세력이 싸우는 각축장이며 이 싸움에 차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학자들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제 3 세계의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를 위해 헌신한 해방신학자들이 요구하고 또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이런 유의 이론화 작업이 아닌가?
내가 호소하는 것은 기독교적 신념이 이론화 작업의 지배적 관심이 되도록 양자간의 통합을 이루라는 것이다. 나는 상황신학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이 용어는 에컨데 아르헨티나에서의 강조점은 미국 LA에서의 강조점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학을 지향하는 이들은 흔히 정의라는 주제가 다수의 청중에게 특별히 적실한 것이어서 그것이 부각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요청하는 것은 정의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이론화 작업이 아니라 정의를 위한 투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론화 작업을 요청한다. 이 대목에 딱 맞는 칼 마르크스의 말이 있다. 바로 "목표는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꾸는 것이다" 상황화된 학문의 목표는 세상을 잘 설명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실천지향적 학문의 목표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막스 호르크 하이머는 "전통적 이론과 비판이론"이라는 유명한 글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강령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법칙론적 이론에 '전통적 이론'이란 이름을 붙인다음 자신과 동료들이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비판이론'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인간을 모든 형태의 지배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이 이론은 사회적 실천행위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인 만큼 내가 실천 지향적 이론이라 부르는 것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철저한 해방을 이룩하기 위해 지배력을 비판하는 반면, 나는 샬롬을 이룩하기 위해 불의와 권리박탈을 비판한다.
나는 신칼뱅주의적 비전의 핵심에 삶과 이론 사이의 연결고리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도여베르트는 이론이란 이른바 자율적이 아니라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이론화 작업은 학문 영역 바깥에 놓여 있는 그 이론가의 삶의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천지향적 이론가의 경우 이론과 실천간의 결정적 연결고리는 사회적 신념이 학자의 이론화 작업에서 지배적 관심사가 되는데 있는 반면에 신 칼뱅주의자의 경우 그 결정적 연결고리를 종교가 학자의 탐구활동을 지배하는 통제원리로 작용하는 데서 찾는다. 신 칼뱅주의자의 주장은, 어떤 이론화 작업이 기독교적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기독교가 그 학자의 이론 수용을 통제하도록 허용되는 경우라는 것이다.
신칼뱅주의적 개념을 고전적으로 정립한 인물은 헤르만 도여베르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이론가의 목표는 법칙론적 학문을 정립하는데 있다. 도여베르트가 보기에 어떤 것을 절대시하는 문제를 거론할 때는 이미 종교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나는 신념, 지식, 학문의 형성에 관해 성찰하려면, 반드시 우리가 정상적 인간으로서 다양한 신념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8세기 영국 철학자들이 즐겨 말했듯이 '귀납'의 결과인데 그들이 흔히 들었던 예는, 마차를 볼 때마다 거기서 나오는 어떤 소리를 '항상 함께'듣게 되면 한참 후에는 처음에는 마차가 눈에 보여가 마차가 한 대 지나간다고 믿었다가 나중에는 그 소리만 듣고도 그렇게 믿게 된다. 이와 같이 신념 성향을 얻게 되는 과정은 소위 고전적인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에 해당하는 경우다.
이 밖에 이른바 조작적인 조건화도 새로운 신념적 성향을 낳는 작용을 한다. 혹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부여받는 것들을 수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아주 어릴 때는 타인들이 일러 주는 말을 믿는 성향이 있는데 그 믿게 된 것 가운데 일부는 거짓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발견하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애초의 무조건적 성향이 수정되어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조건 아래서 특정 문제를 이야기하면 더 이상 믿지 않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인간의 신념 구조를 형성하는 토대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새로운 차원을 덧붙인다면 인간의지의 차원이다.
우리에게는 신념 성향이 작동하는 것을 여러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어떤 부부 문제에 관여할 때 양편 이야기를 다 들을 때까지는 그 진상에 대해 최종결론을 내리는 것을 스스로 억제할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제어를 수용제어라고 부르자. 이 밖에 신념 성향을 제어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는데 이를 방향제어라 부르자. 이는 내가 인지적 신념 제어의 작동을 전혀 바꾸지 않고도 내가 차를 둘러보면서 타이어에 바람을 더 넣어야 하는지를 살펴볼지 말지 결정할 수 있다.
이를 요약하자면 인간의 신념 형성의 바탕에는 신념성향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선천적인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조건화의 결과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 이런 성향의 작동에 대한 제어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수용제어와 방향제어로 구분할 수 있다.
<신념과 학문의 관계에 대한 신칼뱅주의자의 이해와 실천 지향적 이론가의 이해의 차이점>
신 칼뱅주의자의 주된 논점 가운데 하나는 수용제어 및 그에 따른 의무와 관련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학문들의 경우 종교적 신념과 학문의 결과가 서로 상충될 경우, 합리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수정함으로써 그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 신칼뱅주의자는 상상력과 용기를 동원하여 상당히 도발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즉 때로는 합리적인 인간이 자신의 이론적 결론을 수정함으로써 조화로운 상태를 회복할 권리와 의무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천지향적 이론가의 입장에서는 주요 논점이 방향제어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탐구방향이 그로 인한 지식이 사회적 실천 행위에 장차 쓸모가 있을 것인지 여부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자간의 배타적인 입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을 모두 포용할 수 있을 만큼 다원적인 학문을 추구해야 한다.
끝으로 <전략의 문제>를 집고 넘어가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관심을 쏟은 주제는 이른바 우리의 사회적 목표, 반감, 배경 등이 우리의 신념 성향(및 이런 성향의 수용제어)의 작동을 어떻게 왜곡시키는가 하는 점이었다. 사회적 배경이 미치는 영향에 관한 그이 사상을 일부 인용하면 이렇다.
궁핍하고 소외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사법적 관계와 사회적 규제를 보는 눈은 풍족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목표나 관심이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 말하기를 "사물을 보는 우리의 관점도 수많은 개인적 이해관계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마르크스가 규명했던 이데올로기는 카이퍼가 논의한 주제의 구체적인 사례다. 개개인이 사회에서 불의한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인식할 때 그들은 어떤 신념 구조를 채택하게 되는데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해 주는 구조를 택한다는 것인데 그는 이런 신념구조를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카이퍼는 마르크스와 달리 이런기형 배후 어딘가에 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의 신념 성향에 내제하는 기형과 관련된 하나의 문제는 신뢰성의 문제다. 이런 요인들이 작동할 때 거기서 나오는 신념은 잘못될 경우가 너무 많다. 그 신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와 사회적 배경이나 목표 혹은 공감하는 바가 달라서 현 상황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다.
우리가 자기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할 수 있도록 돕는 또 하나의 방법은 자기 기만을 철저히 벗겨내는 성경의 선지자적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그것은 멸시받는 범죄자로 처형되기까지 겸손한 순종의 길을 걸으셨던 그 분, 곧 샬롬의 왕이 하시는 말씀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