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강진(强震)에 쌍계사 진감선사비, 금이 가다" (1936년 7월 4일)
하동지진피해(河東地震被害)는 수만원(數萬圓)의 거액(巨額)
국보 진감선사비석(國寶 眞鑑禪師碑石) 대이상(大異狀)
쌍계사 대책대회(雙磎寺對策大會)
<매일신보> 1936년 7월 11일자
[하동] 경남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慶南 河東郡 花開面 智異山)을 중심(中心)으로 그 부근 일대는 지난 4일 오전 6시 5분에 약 30초간 지진(地震)이 일어나 대폭성(大爆聲)을 일으키면서 가옥(家屋) 원장(垣墻) 교량(橋梁) 등 수십 처가 파괴(破壞)하였으며 괴암(壞岩) 전석(轉石) 지열(地裂) 산괴(山壞) 등 놀랄 만한 대변동(大變動)이 있어 사람도 두명이나 중상을 당하엿다는 것은 기보한 바이나 그 중심지대(中心地帶)인 쌍계사 국내(雙磎寺 局內)에만 하여도 피해(被害)가 수만 원에 달한다는 바 이제 그 상세한 내용을 듣건대 대웅전(大雄殿) 팔상전(八相殿) 육조정상탑전(六祖頂上塔殿) 기타 불전(佛殿) 원장(垣墻) 축석(築石) 등 50여 개소를 진파(震破)한 중 건물(建物) 전복(顚覆)된 것은 없으나 길이 흩어지고 기와(瓦)가 깨어지고 벽(壁)이 탈락(脫落)되고 주초(柱礎)가 물러앉고 도장(道場) 축석 다리 등 수십 처가 전부 붕괴(崩壞)되고 기타 남은 것도 전부 동요상태에 있으며 조선근대사(朝鮮近代史)에도 보지 못한 대사변일 뿐 아니라 그 피해(被害)는 수만 원에 달하며 현상 미봉(彌縫)만으로도 2, 3천 원을 요하게 되어 6일 오전 10시에 상계사전산대회(雙磎寺全山大會)를 열고 그 선후책을 강구중이라 한다.
특히 조선불교어산초전사(朝鮮佛敎魚山初傳師)인 진감선사대공탑비(眞眞鑑禪師大空塔碑)는 최고운선생(崔孤雲先生)의 친찬친필비명(親撰親筆碑銘)을 가진 사대비(四大碑)의 하나이며 총독부(總督府) 지정부물(指定寶物)로 편입되었던 바 금번 지진에 망상(網狀)의 파선(破線)이 수없이 생기고 수개의 파편(破片)이 떨어졌는데 이 금후 남북방향(南北方向)으로 소분(小分)의 미진(微震)만 있어도 곧 전복(顚覆)될 형편이므로 이를 본부(本府)에 보고하고 그 수리여하를 기다리는 중이라더라.
▲ <매일신보> 1936년 7월 11일자에 수록된 '쌍계사 지진관련' 후속보도이다.
▲ 조선총독부관측소가 정리한 <(소화 11년 7월 4일 지리산 남록) 쌍계사강진보고(雙磎寺强震報告)>에 수록된 '쌍계사강진 피해사진'의 일부이다. 이때의 지진으로 최치원(崔致遠)이 남긴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한 진감선사대공탑비가 큰 피해를 입었다. 진감선사비와 관련한 사진의 설명문에는 '국사비에 균열이 생겨난 가로의 일선은 이번의 지진에 따라 생겨난 것'이라고 적고 있다.
▲ 조선총독부관측소가 정리한 <(소화 11년 7월 4일 지리산 남록) 쌍계사강진보고(雙磎寺强震報告)>에 수록된 '쌍계사강진 피해사진'의 일부이다. 이 가운데는 지진에 흔들려 상륜부 쪽이 땅에 떨어진 석탑의 모습도 보인다.
▲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의 모습이다. 이것은 세키노 박사 일행이 1910년에 경남, 전남, 전북 지역 일대를 조사할 때 촬영한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보면 비면에 우측으로 흘러내리는 균열이 있는 것은 완연하나, 비면을 가로지르는 균열은 아직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왼쪽은 <국보도록> (1957년)에 수록된 쌍계사 진감선사탑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문화재청에서 제공하는 쌍계사진감선사탑의 사진자료이다. <국보도록>의 것은 언제 촬영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지진으로 인해 생겨난 가로 균열이 있는 것으로 미뤄보아 1936년 이후의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현재 진감선사비에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철테가 둘러져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건 언제 설치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정리 : 2005.10.21,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첫댓글 이런 귀한 자료를 수집해서 정리하시는 제자리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덕분에 앉아서 귀한 자료를 읽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