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동안 찌뿌렸던 날씨가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맑아졌다.
변덕스런 날씨의 설레발은, 에펜네 고쟁이 뒤집어지대끼 지 맘대로다.
집안행사로 고향에 오겠다던 진이가 맨처음 하던 말이 “구수산”오르자던 말이었다. 구수산은 법성에서 보면 포구건너 백수의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인데 법성사람들은 일명 “톱산”이라 부르는 산이다.
어려슬때부터 앞 톱산하면 험준한 산으로 봐온터이고, 무릅이 시원찮하던터라 대답을 못하고있다가 나즈막한 홍농 봉대산으로 권하여 산행을 하게되었다. 법성에서 부터 걸어서 가자던 녀석을 달래어, 자동차로 칠암폭포까지 이동하고 그곳에서부터 산을 타기로 하였다.
홍농의 산은 봉대산이라 부르는데, 우리는 금정암이라는 절이 옛날에 있어서 금정산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기냥 봉대산이요, 금정암은 없어진지 오래다.
칠암폭포로 들어가는 입구의 “산새가든”이라는 식당이 우릴 먼저 반긴다.
이 식당은 유황오리 옭닭으로 소문이 나있는 곳인데, 경선이 친구의 의형제
집으로 우릴보면 반기는 곳이다.
칠암부락은 칠암저수지와 동네사이의 논밭에 지석묘 7기가 있어,
일곱 개의 바위라 하여 동네이름을 칠암부락이라 부른다한다.
폭포로 가는 길목에는 이미 가을걷이가 끝난 밭데기들이, 파장난 장터의
상흔처럼 밭고랑에 가을걷이 부스러기들이 뒹굴고 있다.
폭포 밑은 단풍이 어우러져 제법 연분홍 치마저고리 새색시 볼마냥 붉어있다. 여름철에는 작은 계곡과 숲으로 그늘이 져 가족들끼리 올만한 곳이다.
조용한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 대낄이다.
우리는 칠암폭포의 좌측으로 난 소로의 가파른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대덕산 오르는 가파름보다 심한 경사이나 오를만하다. 오늘의 봉대산 산악조는 동진. 동현. 나 셋이다.
오르기 시작한지 20분이나 되었을까 능선의 넓적한 마당바위에 오르니 멀리 법성의 후등이 보인다. 그리고 법성의 숲쟁이와 인의산 뒤편과 이곳의 홍농 봉대산사이의 구암천은 동북쪽의 공음 마래부터 시작해서 널따란 들판을 가로지르는데 법성의 수왕,세민애,화천리,명당개미앞, 뒷개,흰다리를 돌아 수문통까지 휘돌아가는 물돌이동이다.
우리는 능선을 따라 계속해서 행군이다. 원자력발전소가 있는곳이라 그런지 산의 이곳저곳에는 고압 송전탑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내 두갈래의
등산로가 나타나는데 한쪽은 원자력발전소가있는 성산리방면으로 가는곳이다. 우리는 바다를 보려 가마미 뒷산 부엉이바위쪽을 택했다.
산의 능선에 붙으니 철조망이 나타난다. 이게 웬 철조망이냐 !
원자력의 보호시설 철조망인가부다. 철조망너머로 발전소 돔들이 나타난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원자력발전소는 최근 6호기까지 건설되어 운영되고 있다. 영광원전이 들어서면 수조원의 예산이 투자되어 몇 년 후면 인구가 늘어 이곳은 영광시가 된다던 이야기는 봉이 김선달 대동강 물팔아먹는 이야기였다.
영광원전이 홍보책자와 영상물을 만들어 그렇게 선전하던 “기적의 역사, 낙원의 땅” -첨단의 과학문물과 문화가 어울어져 함께하는 미래의 땅은 어디에 있는가 ? 희대의 사기극 한편이었다.
우리 지역민의 목숨을 담보로한 사업에 지역의 발전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보상도 받지 못하고 말았던 다 지나간 잘못된 정치와 역사의 한 장이었다.
1989년 출장소를 개설하려 영광군에 갔을 때 인구현황이 10만 4천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6만명을 채우느냐 마느냐로 영광군은 고민중이다. 인구비례하여 중앙정부의 교부금을 타오는데 이 일을 어찌하랴 ! 그런데도 우리의 세금으로 지어준 원자력 사원아파트는 텅텅 비워 있다. 사모님들께서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인근의 광주로 나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고급아파트들은 직원들이 회식이어서 한 잔하시고 광주집에 못가실 때 주무시는 별장용아파트로 변모된지 오래다. 한달이면 며칠 주무시는 이 아파트를 오래됐다고 리모델링해주는것보면 울화가 치밀어올라 제명에 못살일이다.
우리들 모르게 우리나라의 한쪽은 이렇게 썩어가고 있다.
우리는 봉대산 부엉이 바위위에 섰다. 봉대산은 해발 286 미터라는데 지금
이곳이 정상은 아닌 것 같다. 부드러운 봉우리는 서해바다를 따라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서해낙조와 풍광이 가히 환상적이란다.
칠산바다
초대 지도군수 오횡묵은 (지도군 총쇄록) 5월 13일자 기록에서 칠산바다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위도에서 부터 나주까지 경계가되고
이곳의 바다를 통칭 칠산바다라 부르는데, 해마다 고기가 많이 잡혀 팔도에
서 수천척의 배들이 이곳에 모여 고기를 사고파는데 오고가는 거래액이 가히
수십만냥에 이른다. 가장 많이 잡히는 것은 조기인데, 지금도 그물이
바다에 설치되었고 배들이 빽빽이 모여있다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그는
칠산어장이 백여리라고 적고있다.
어느해 여름 가마미 뒤편 방파제옆의 능선횟집 2층 테라스에서 술한잔하고 있었다. 칠산바다의 붉게물든 낙조가 온 바다를 휘감아 물들임에 감탄하여 넋을 놓는데. 반대편의 봉대산(당신이 아는 금정산)암벽이 붉은 낙조에 반사되어 빠알갛게 타오르는게 아닌가 ! 양쪽의 타오르는 불꽃놀이에 내 발목이 타들어가는가 깜짝 놀라 다리를 만져보았다.(!) 칠산바다 속으로 해가 빨려들어가자 이제 불이 사그라지는가했더니, 웬걸 뒤편의 원자력발전소 돔에서 훤한 전등불들이 일제히 피워오르기 시작한다.
아 나는 젓가락에 집어든 사시미 한점이 삼면의 불에 익어, 구이 한점을 입에 넣는구나 !
부엉이바위는 원래 명칭이 그리한게아니라 우리가 즉석에서 그리 불렀다.
지금까지의 오는 길은 “옥당골 돌대가리”라는 등산인이 일러준 표식을 따라왔는데 부엉이바위에서 하산하는 길은 길이 없다. 돌대가리님은 오던 길을 되돌아 갔을 터......
우리는 가마미바다쪽으로 내려오려다보니 길이 없는 곳을 택하고 말았다.
“막는 것 산이거든 무는 곳 못가랴 파도건 눈보라건 박차헤치자”
백골부대 수색대출신 김병장 앞세우고, 인천 해안초소 박병장 보초세우고,
26사단 남궁병장 군가부르며 내려온다.
중앙슈퍼 아직도 있다. 지금도 있다.
목이 말라 물 한 병 사면서 젊은주인한테 물으니 “ 가게 50년도 더 됐을걸요 한다.” 지금도 음료수며 빵이며 술이며 잡화를 취급하고 있다.
옛어르신은 지금 광주에 사신단다. 참 세월 무상하다.
중앙슈퍼 따님이 참 예뼀는데, 아는 사람은 안다.
이로서 우리들의 두시간 반동안의 짧은 산행은 끝이 났고, 점심은 상원이가
달려와 “녹향”에서 석갈비로 맛납게 묵었다. 서빙하는 아짐이 참 살갑다.
홍농 대포리포구는 이미 없어져버린지 오래고, 법성포의 항구기능도 점차 가마미 선착장으로 옮기게 될 것 같다. 가마미선착장은 접안시설을 계속 확장하고 있다.
이미 안마도 송이도 여객선 출항지도 이곳으로 옮긴지 오래다.
아 법성포여 ! 칠산바다여 !
2009년 11월 13일 칠산갈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