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날 새벽까지 술먹고 달리느라고 정말 고생했었습니다.
수업도 아침에 들어가느라 1시간정도 자고... 하지만 그 몽롱한 정신에도
영주가 힘들게 준비해 올 '비둘기'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더군요.
얇은 책 '비둘기'를 펴 들고 빠르게 읽어나갔습니다. 거의 환각상태였지만
저의 의식상태와 비슷한 듯한 인상을 받아 공강시간내에(약 1시간반) 다 읽을 수 있었죠.
기본적으로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이 소박한 스토리로 100페이지 분량의 활자를 채워
넣을 만큼 세밀한 상황과 심리묘사를 했다는데에 영주와 의견을 같이합니다.
또한 어이없는 상상력과 감정이입에 묻어있는 그의 '괴짜다운 유머'도 인상깊죠.
-저는 바지가 찢어지고 아드레날린을 운운하는 부분에서 참 많이 웃었습니다...ㅡ,.ㅡ
그의 문장은 제가 좋아하는 '건조한 어휘, 촉촉한 내용' 스타일에 걸맞아 읽는
내내 거북하지 않았습니다. (이어령씨 타입의 글을 볼땐 매스껍기도 하죠)
조나단이라는 특징적인 케릭터에 공감할 수 있었던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예민한부분' 을 제가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쥐스킨트가
저를 모델로 글을 썼다면 '가로막는 행인' 이라는 책이 나왔을 겁니다.
저는 길에서 제 앞을 막는 행인을 보면 참을 수 없으니까요.
아래는 권빛나라는 한 네티즌이 쓴 쥐스킨트에 대한 예찬글입니다. 팬으로서의 편중된
글이지만 그냥 참고로 읽어보시라고요.
어떤 스타일의 소설들에 대해 신물이 난다.
등장인물의 아름다움을 극찬해댄다든지,
도대체가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미사여구가 도배되어 그 장면을 상상하고 있노라면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쇼가 연상된다든지,
비범한 인물의 훌륭한 내면이 엄청나게 돋보인다든지,
페이지 구석구석마다 음모가 가득 들어차 있다든지,
삶의 소박한 멋이 지나치게 강조된다든가,
'환타지' 라는 장르 안에서 주인공들의 국적불명의 서양식 이름, 또는 '파이어볼! 라이트닝 볼트!' 하는 식의 뻔한 마법 주문,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지칠줄 모르고 계속해서 밀려온다든지...
쥐스킨트는 그렇지 않다. 특별하다.
언제인가 꽤 오래 전에 책방에서 그의 소설 [향수]를 집어들고, 표지를 한번도 덮지 않은 채 완독해버린 그때부터, 나는 표지에 '쥐스킨트' 라고 써있는 책이라면 닥치는대로 사서 읽어댔고, [비둘기]를 읽고 난 후에는 두번이나 책을 그대로 베껴 써 보기도 했다.
매스컴과의 접촉을 일체 거부하고, 모든 문학상 수상까지 거부해버린 이 괴짜.
그가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것은, 자신의 이름이 달린 굵직한 소설 몇편과 어리숙해보이는 프로필 사진 한장, 이것 뿐인것 같다.
이런 그의 괴상한 습성은 약간의 냉소와 결벽증을 담고 있는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과 매우 닮은 소설을 쓴다.
그를 '천재 작가' 라거나 '문학계의 거장' 이라는 엄청난 말들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있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한다.
쥐스킨트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원초적인 본성을 거부감 없이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다.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는 자신의 천재성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사기치고), 살인을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다가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선택했다. 얻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세상을 가지고 놀았다.
[좀머씨 이야기]의 좀머는 귀찮고 싫은 모든것을 버리고, 제 멋대로 걷다가 소리없이 사라져갔다. 그에겐 과거의 좋고 나쁜 기억들이나, 이웃의 호의, 편한 휴식 등등이 모두 귀찮았을 것이다. 그래서 다 버렸겠지.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 하고 외치면서.
[비둘기]의 조나단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것은 곧 완전한 소유가 될 자신의 작은 방 한칸이었다. 일평생 정직하게 근무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그는, 소박하지만 거대한 단 하나의 즐거움 - 자신의 방을 미련없이 버렸다. 왜? 자신의 방 복도에 나타나 평범한 일상에 점 하나를 흐트러뜨리는 비둘기가 그렇게 무서웠기 때문에.
[콘트라베이스]의 연주자는 안타깝다. 오케스트라에서 자신의 위치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인데 드러나지 않는다. 사랑은 이룰 수가 없다. 그래서 좁은 방에서 중얼대며 신세한탄을 한다.
[승부]에서의 체스마스터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도전장을 내민 젊은이에게 겁을 먹고 지나치게 긴장했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 끝에 허무하게 승리 해 버린 이후로 체스에 넌더리를 치게 된다. 그 젊은이는 왕 초짜였다.
[깊이에의 강요]의 화가는 '깊이가 없다'는 평론가의 말에 오랜시간 고통스러워 하다가 결국 자살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그렇잖아. 소유하기 위해 빼앗고 싶고, 다 귀찮아서 멀리 도망치고 싶고, 아무 생각도 하기 싫고, 사소한 일상 하나에 여지껏의 평생을 부정해버리고 싶어지고, 낮은곳에 서면 서글프고, 높은곳에 오를수록 지겨워지고, 악평받으면 죽어버리고 싶고.
우리는 우리의 그런 나약한 본성들을 이겨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마치 '나는 전혀 그렇지 않은듯' 생각하게 될 정도로 잊기도 하지 않는가.
가끔 '나 상처받았어!' 하고 외쳐댄들 무슨 소용일까. 이러한 본성들이 세상에 속해있는 동안에는 당연히 받을 수 밖에 없는 상처인걸.
사실 대단한것도 아닌 본질적인 내면을 새삼스러운것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그의 소설이 너무 좋다.
왠만하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러면서도 마음속 어딘가엔 꼭 감춰져있는 그런것들을 들여다 보는 재미도 너무 크고,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지도 않고.
어쩌면 까닭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올지도 모른다.
굳이 뭐 학교숙제 독후감쓰기 식으로 교훈을 얻고 그럴 필요도 없다.
독특하고 특별한 문장들을 즐기고, 받아 들이자 그냥. 그리고 읽는 동안이라도 인정하자구.
그럼 훨씬 속이 시원하고 너무너무 재미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