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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출발하는 천태산 국청사 성지순례에
금불대 29기 법우님들과 함께 하지 못함을 아쉬워 하며....
지난 5월15일부터 5박6일의 일정으로 큰스님일행과 성지순례를 떠나기전
자료 수집차 이곳 저곳 눈팅하다 보관해 두었던 자료입니다.
이번 금불대 성지순례 떠니시는 법우님들 참고가 되었으면 하고
올려봅니다.
잘 다녀오십시요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를 찾아서
천태산 국청사, 과거 옛 스님들이 얼마나 참배하고 싶었던 절이던가
우리나라 스님들, 일본스님들, 정말 가슴에 사무치고, 목이 메이고 절이름만 들어도 눈에 눈물이 맺혔던 절 아니던가? 그런 절을 지금은 너무 쉽게 찾아가니 감동도 사무침도 너무 적은 것 같다. 하지만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듯, 타는 논 밭에 물을 대듯, 나의 정수리에 한산 습득의 살아있는 법향을 한없이 붓고 싶었다.
과거 국청사에는 우리나라 스님들도 다투어 와서 살았는데 고구려 반야(波若)스님 신라의 오공(悟空), 도육(道育), 고려의 의통(義通) 제관(諦觀)이며 현광(玄光) 연광(緣光) 지종(智宗) 경양(競讓) 탄유(坦幽)의 스님과 대각국사 의천스님도 국청사에 와서 천태지자선사의 육신보탑에 예배 올리고 고려에 돌아가면 천태종을 개창하갰다고 맹세 했다고한다. 그리고 국청사 앞에는 신라스님들이 거주한 신라원(新羅院)이 있었다.
일본의 원인(圓仁)스님은 45세 때인 서기 838년, 두 명의 제자를 데리고 당나라에 갔다. 그것은 스승 최징(最澄)이 꼭 천태산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라고 언명을 하였기 때문이다. 최징은 천태산에서 수행하여 일본에 최초로 법화경을 전한 스님이다. 그러나 중국의 정세가 불안하여, 당 조정에서는 원인스님의 일행에게 천태산 성지순례의 허가증을 발급하지 않았다. 결국 북쪽에 있는 오대산(五臺山)으로 통행증을 만들어 주었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으로 국 내외 많은 사람이 성지참배를 하는 곳이다. 오대산을 참배하고 수도 장안에서 3무 1종의 법란을 만나고, 약 10년의 세월에 한 명의 제자가 잃고 파란만장한 성지순례를 마치고, 847년, 천태산 국청사는 가슴에 묻은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책을 저술한다.
항주에서 승용차로 3시간 정도 달리면 천태현IC가 나온다.
그리고 국청사 쪽으로 10분정도 가면, 도심 한 가운데 제공(도제)스님의 고향 집이 있다. 중국 정부에서 제공스님의 생가를 복원하여 일반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제공스님이야말로 서민의 고통과 민중들의 슬픔을 치유할려고 가장 노력했던 스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스님을 외면 할 수 있으랴.
다시 10분을 더 달리면 천태산 국청사가 나온다. 수목이 우거지고 국청사 옆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우리나라의 어느 사찰 같은 분위기이다. 국청사 옆에는 호텔이 있는데 우리는 그 호텔에 승용차를 주차하였다.
절 입구에는 수대고찰(隋代古刹)이라 적은 담장이 있는데 수나라시대에 창건되어온 아주 오랜된 사찰이라는 의미이다. 그 옛날 축담유선사가 천태산에 들어 왔지만 국청사를 개창한 분은 천태지자 대사이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가면 국청강사(國淸講寺)라는 현판이 보인다. 중국의 사찰에는 선종(禪宗)이면 국청선사(國淸禪寺) 율종(律宗)이면 국청율사(國淸律寺) 교종(敎宗)이면 국청강사(國淸講寺)라 부른다. 국청사는 법화경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부처님을 가르침을 선양하는 교종의 사찰이라는 의미에서 강사(講寺)라 한 것이다.
수나라 시대의 고찰답게 포대화상을 모신 전각위에는 편액에 시환희상(示歡喜相), 개대환희(皆大歡喜)라 적었다. 중국의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법구이다. 포대화상은 항상 웃는 모습이다. 시환희상은 항상 웃고 계시는 포대화상이고 개대환희는 우리 모두 웃고 살자라는 법구이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웃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과거에 가난한 시절을 비교하면 우리는 현재 얼마나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물질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궁극적 행복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국청사는 과거 당나라 시대에는 한산 습득 풍간이 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교훈을 주었다. 그 중심주제는 물질이 아니고 마음이며 결국 웃고 살자는 메시지이다.
한산시에 “마음 잘 쓰면 부처님이니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不解審思量(불해심사량) 깊이 헤아려 생각할 줄 모르고
祗道求佛難(지도구불난) 부처님 찾는 공부가 어렵다고만 하네.
廻心卽是佛(회심즉시불) 마음 한번 돌리면 곧 부처님이라
莫向外頭看(막향외두간) 멀리 밖으로 구하지 말라.
呵呵呵 하하하 허허허 웃으며 살라 시네.
포대화상이 있는 금강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이 나오는데 우화전(雨花殿)이라되어 있다. 그 옛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 법화의 꽃비를 맞으며 국청사 대웅보전으로 들어간다. 대웅보전에는 중심에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이 밖에 여러 전각이 있으며 그 전각마다 스님들이 배치가 되어 찾아오는 불자를 환대하고 있었다.
1. 축담유(竺曇猷)선사
천태산은 축담유(竺曇猷) 선사로부터 시작한다.
축담유는 혹 법유(法猷)라고도 한다. 원래는 천축의 사람으로 돈황(燉煌)에 상인으로 왔다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후에 강남을 떠돌다가 시풍(始豊)의 적성산(赤城山) 석실로 자리를 옮겨 앉아, 음식을 구걸하고 좌선을 하였다. 전하는 말에 사나운 호랑이 수십 마리가 담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담유가 경을 외는 소리는 전과 같았다. 한 호랑이가 졸자, 담유는 짐짓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물었다.
“왜 경을 듣지 않느냐?”
이윽고 호랑이 무리가 모두 떠났다. 그러자 얼마 후에는 굵은 뱀들이 다투어 나왔다. 길이가 10여 아름이나 되는 것들이 빙빙 돌면서 오갔다. 머리를 치켜들고 담유를 향하다가, 반나절이 지나자 다시 떠났다.
천태산에는 외로운 바위가 구름에 닿을 만큼 빼어나게 홀로 서 있었다. 담유는 돌을 치고 사다리를 만들어 그 바위에 올라가 좌선하였다. 그러면서 대나무를 이어 물을 옮겨, 일상생활에 공급하였다. 선을 배우려고 찾아온 사람이 10여 명이 있었다. 왕희지(王羲之)가 소문을 듣고 짐짓 찾아가, 봉우리를 우러르며 높이 인사하여 경의를 다하고 돌아갔다.
적성암(赤城巖)은 천태산의 폭포와 영계(靈溪) 사명산(四明山)과 나란히 서로 연속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천태산은 까마득한 절벽과 드높은 산마루가 하늘을 끊는다.
축담유는 태원 연간(376~396) 말기에 산의 석실에서 세상을 마쳤다. 시신은 그대로 편안하게 앉아 있었으나, 몸이 온통 녹색이었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 말기에 은둔한 선비 신세표(神世標)가 이 산에 들어가 바위에 올라갔다. 짐짓 담유의 시신을 보았는데 썩지 않았다. 그 후 그곳에 가서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구름과 안개에 헷갈려서 엿볼 수가 없었다.
2.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
천태종을 크게 일으킨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는 형주(荊州)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지의’이고 자(字)는 ‘덕안’이다. 천태지의 선사는 18세 때 출가하였고, 23세 때 혜사(慧思)스님 문하에서 ‘법화삼매’를 배웠다. 혜사스님에게 법화삼매를 배운 지 14일 만에 〈법화경〉 ‘약왕보살품’의 한 구절에 이르러 몸과 마음이 문득 고요해지는 선정을 체험했다고 한다.
스승 혜사는 천태지의의 이러한 선정체험에 대해 그 의미를 인정해 주었다. 천태지의 선사는 31세 때 진나라의 수도 금릉으로 나왔고 여기서는 주로 불교 경학을 공부하였다. 선사는 금릉에서 명성은 얻었지만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38세 때에는 천태산으로 들어가서 11년 동안 수행 정진 하였다. 천태지의 선사는 천태산에서 실참공부가 더욱 원숙하고 완성도를 높혔다.
천태지의는 48세 때에 천태는 진나라황실의 요청으로 인해 다시 금릉으로 내려왔다. 천태는 그 동안 공부한 힘을 발휘해서 ‘천태의 삼대부’라고 불리는 〈법화문구〉, 〈법화현의〉, 〈마하지관〉을 강의하였다. 52세 때 진나라가 수나라에 의해서 망하자 천태는 여산에 은둔하였다.
천태지의선사는 전쟁을 피해 여산에 칩거하지만 수나라 진왕 광의 간곡한 초청으로 591년 양주로 가 진왕 광에게 보살계를 주고 자신은 ‘지자대사’란 칭호를 받게 된다. 이후 고향인 형주로 돌아가 옥천사를 건립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사상을 펼치게 된다. 따라서 593년 〈법화현의〉, 594년 〈마하지관〉이 탄생하게 된다. 옥천사는 대통신수가 거주하며 자신의 선법을 펼치는 사찰이며, 그의 사리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595년 진왕 광의 초청으로 다시 양주를 방문하게 되며, 이곳에서 진왕을 위해 〈정명현의〉를 저술하여 증정하게 된다. 이후 천태산으로 은퇴하며, 597년 60세를 일기로 적멸상을 보이게 된다.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는 천태산 도처에 수행의 유적을 남겨 놓았다. 고명사(高明寺) 만년사(萬年寺) 선흥사(善興寺)이며, 국청사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천태지의 선사가 팔만대장경을 두루 섭렵하시고 당신의 예지로 법화경(法華經)을 선양하면서 경중에 최고의 경이라고 극찬하시고, 부처님의 교설을 구분을 지어서 설명하였다. 당시의 다른 스님들의 교상판석(敎相判釋:부처님의 가르침(敎相)을 분류하여 해석하는 일)도 있지만 천태지의 스님의 교판(敎判)이 가장 유명하며 이것을 지금까지 불교 교판의 지남(指南)으로 여기고 있다.
阿含十二方等八아함십이방등팔 아함경은 12년 방등경은 8년
二十一載談般若이십일재담반야 21년을 반야경을 설법하셨다.
終談法華又八年종담법화공팔년 법화경, 열반경은 함께 8년 설법
最初華嚴三七日최초화엄삼칠일 화엄경은 21일간 교설하셨다.
是卽名爲一代敎시즉명위일대교 이것이 부처님 일생의 가르침이다.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는 중국에서 최초로 천태종의 종파불교를 제창하였고, 그 후에 화엄종 법상종 삼론종 율종 밀종등이 나타났다.
3. 오비이락(烏飛梨落)의 교훈
우리 속담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오비이락 (烏飛梨落)이라는 말이 있다. 이 이야기는 천태지자 선사의 해원석결 (解寃釋結) 이란 유명한 법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 양무제때 선지식으로 이름을 날리고 법력이 높았던 지자대사가
어느날 지관 삼매에 들어계셨다. 산돼지 한마리가 몸에 화살이 꽂힌채
피를 흘리며 지나간 후 곧 이어 사냥꾼이 뒤를 쫓아와 “산돼지 한마리가 이곳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때 대사가 그를 보고“엽사여! 그 활을 던져 버리시오”하며 다음과 같이 법문을 하셨다.
오비이락파사두 (烏飛梨落破蛇頭) 까마귀 날자 배 떨어져 뱀의 머리에 맞아 뱀이 죽다.
사변저위석전치 (蛇變猪爲石轉雉) 뱀은 산돼지 되고 돌을 굴러 뀡을 죽이다.
치작엽인욕사저 (雉作獵人欲射猪) 뀡이 죽어 사람되고 다시 산돼지를 죽이려 한다.
도순위설해원결 (導順爲說解怨結) 지자대사가 삼세의 과보를 일러주고 해원을 인도한다
三生前에 까마귀가 배나무에서 배를 쪼아 먹고 무심코 날아가자 나무가 흔들리는 바람에 배가 떨어져 그 아래서 빛을 쬐이고 있던 뱀의 머리를 때려 죽고 말았다. 이렇게 죽게 된 뱀은돼지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뱀을 죽게 한 까마귀는 생을 마치고꿩으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숲속에서 알을 품고 있었다. 이때 돼지가 칡뿌리를 캐먹다가 돌이 굴러 내려서 꿩이 죽었다. 이렇게 죽음을 당한 꿩이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사냥꾼이 되어 그 돼지를 활로 쏘아서 죽이려는 순간 지자대사가
이들의 지난 삼생사(三生事)를 내다 보시고 더 큰 원결과 악연으로 번져가지 못하도록 사냥꾼에게 이같은 해원(解怨)의 법문을 설해주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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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
천태산 국청사
항주에서 천태산 국청사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에서 자주 보던 크고 작은 산들이 고속도로를 따라 이어진다. 항주에서 3시간 이상 가면 천태현IC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국도로 30분정도 달리면 천태산 국청사가 나타난다. 천태대사의 말씀처럼 늘 푸른 소나무가 산세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수나라시대 최고의 고승 천태대사가 수행하고 도를 이룬곳이며 대사와 그후 제자들의 전법도량으로 대가람이 자리잡고있다. 대표적 사찰인 국청사가는길은 고목과 계곡의 풍경이 삼매의 즐거움의 향기를 품고있는듯 하다.
국청사는 천태대사가 설계를 완성하고 그 둘째 상자인 장안 관정스님께서 수양제에게 불사를 부탁하였으나 양제는 거절하였다. 얼마후 대사가 열반에 들어 그때야 큰스승의 떠나심을 후회하고 대사에게 지자대사라 사찰과 함께 보은사를 불사하였다
국청사연우전은 점안식때 장안관정스님께서 기도을 하셨는데 꽃비가 내려진 이야기를 일리고 있다. 향료는 서태후60번째 선물받은걸 이곳에 두고 법당주불은 6.8m로 동으로 조성되었으나 용안은 0.8cm두께로 개금되 모셔져 있다. 양옆 18나한은 나무로 조성돠었고 제공화상의 어머니가 이곳에서 기도하는 중 나한상하나가 넘어지는태몽을 꾸고 화상을 나았다고한다. 중국에서 제공화상은 나한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옆으로 이동하면 매정이 있는데 최고의 명당으로 문화혁명시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보이는 나무로 이곳의 매실열매는 통조림으로 하여 당에 보내진다고 한다.
위로 올르면 일본 조동종기념비가 있고 천수관음전을 지나면 한국천태종에서 불사한 한중천태종전이 있다. 가운데에는 천태대사가 모셔졌고 보는방향 오른쪽엔 의천대사사 왼쪽에는
상월원각대사가 모셔졌는데 이 사찰에서 2번째 명당지리라 한다.
이곳에서 내려오는길 사찰의 여러 지붕의 종과 침니 기와들이 만들어 내는 산사의 풍경이 한컷 품어낸다. 잠시후 한산습득상을 해악적으로 모신곳 법당에 들리고 다시 이동하면 조사전에 지자선사를 위시한 천태종의 법계보를 위패로 모셔농았다.
대웅전 앞에 중국 신도들이 법회를 위해 많이 모여있었는데 경전을 읽는 보살님들도 눈에 띄인다. 국청사에서 30분 산으로 오르면 천태산의 여러봉들을 굽어볼수있는곳에 이르러 차에서 내려 차밭길과 산길을 따라 이동하면 옛사찰터가 나오는데 천태대사께서 처음에 천태산에 오셔 처음불사를 하셔 그후 많은 대중들이 사셨으나 현재는 논밭과 민가다. 국청사에서 얼마전 땅을 사들여 불사를 준비중이라고 한다. 이곳오른쪽 산자락에 천태대사의 육신을 모신 지자탄원이 있다. 근래 불사의 새로운 흔적없이 소박한 사찰의 분위기가 정겹다. 법당안에 대사를 모진 탑이 있어 1200년 그리움이 반야심경으로 울려퍼진다. 법당내에 3면에는 당대 천태종대사들의 영정이 그려져 있다. 그중 신라스님 보살칭을 받으시며 많은 교화를 하셨다 한다.
화정강사
지자탑원에서 고원의 마을과 논밭 산세를 배경으로 30분을 이동하면 대사께서 득도를 하신 화정강사가 나온다. 배경대에서 깨치심 법화삼매3일시 영산미산 3일간 영산회상이 나투화여 대중이 함께했다한다. 시간과 공간이 초월한 경이로울때 스승인 혜사선사가 말하시기를“부처님 재세시 같이 법을 듣던 우리가 이제 이곳에 함께해 그대가 아니면 이법을 누가 설할것이며 내가 아니면 누가 증명할것인가?” 깊은 즐거움을 찬탄하였다 한다. 그러한 각성큰스님의 말씀에 나또한 지자대사의 영산회상당시가 느껴지는것 같았다.
대사의 법문은 관정장엄거사께서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졌는데 그의 위업은 아난존자와 다름이 없다한다. 굽이굽이 내려오는 길을 화두삼아 천태산을 내려왔다.
영파에서 구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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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 지역은 국청·석양경구(國淸·石梁景區)로 지정돼 중국에서 중점 개발하는 여행구역이라 한다. 천태대사 유적과 관련해 반드시 가봐야 할 곳으로는 국청사를 중심으로 한 국청경구(國淸景區), 상방광사에서 하방광사까지와 석양이 있는 석양폭포 지역, 화정봉 화정사를 중심으로 한 화정봉국가삼림공원과 만년사 지역, 적성산의 적성경구, 빼어난 천태산 풍경을 볼 수 있는 경대선곡(璟台仙谷), 천태대사 은거 득도지로 알려진 천호경구(天湖景區) 등을 꼽을 수 있다.
천태산은 천태산 여행발전유한공사에서 발행한 전단지에 ‘전국 AAAA급 여행구'라고 소개하고 있다. 천태산 전체가 관광지로 부각되면서 이곳은 방문할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천태현 시내는 도로가 정비되고 대형호텔 등 위락시설이 속속 들어서고 중심가에는 아파트 단지와 학교 시가지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허름했던 옛모습은 사라지고 말끔한 현대도시로 새단장하고 있다.
천태 유적을 두루 살펴 보려면 최소한 이틀 이상 숙박해야 하는데, 숙소로는 시내의 호텔을 이용하거나 국청사 옆 호텔을 이용할 수 있다. 국청사 오른쪽 있는 호텔은 요즘 신축한 시내의 호텔 시설에 미치지 못하지만,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아서 조용하고 아늑하다. 더욱이 국청사와는 불롱에서부터 내려오는 시내 풍간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이 호텔에 묵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불롱쪽으로 천태산 계곡을 산책하면서 천태산의 맑은 아침공기와 소나무숲을 직접 감상할 수 있다.
《천태산지》에 의하면, 천태산의 사찰은 정식 사찰만 62개소, 암자가 14개소, 원(院)들이 9개소, 그밖에 도량(2) 당(堂) 2개소, 관(觀) 5개소, 궁(宮) 5개소 연사(蓮社) 1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중 천태대사가 세운 천태산 사찰만 18개나 된다고 하고(王士性入天台山志), 천태대사의 12사찰을 꼽기도 하지만, 어떤 사찰이 여기에 속하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이중 현재 천태산에 남아 있는 사찰은 국청사를 비롯해 진각강사, 화정사, 만년선사, 고명사 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또 천태산은 도교와도 무관하지 않아서 강남 도교의 시원지인 동백궁(桐柏宮)을 비롯한 도원 12개소 도암 3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과거칠불탑과 수대 고탑
국청사를 중심으로 왼쪽 전면에는 적성산(赤城山)과 산 위에 적성탑이 보이고, 오른쪽 도로 변에는 과거 칠불탑과 그 위쪽에 수대고탑이 자리한다.
과거 칠불탑은 속칭 ‘칠지탑(七支塔)'이라고도 한다. 과거칠불을 존중하고 숭상하는 기념탑으로 수대고탑 아래에 일자형으로 늘어서 있다. 천태산지에도 이 탑이 언제 건립됐는지 언급돼 있지 않고, 다만 1973년 정비하고 수리했다고 한다. 탑신은 백색이며 여기에는 과거칠불의 명호가 차례로 새겨져 있다.
이 과거칠불께 귀의한다는 의미에서 칠불에 각각 나무(南無)를 붙여서 ‘나무비바시불' ‘나무시기불' ‘나무비사부불' ‘나무구류손불' ‘나무구나함모니불' ‘나무가섭불' ‘나무석가모니불'이라는 명호를 붙였다. 진각강사에 천태 대사를 ‘동토가문(東土迦文)'이라 해 중국의 소석가라고 지칭했던 것을 보면 아마도 과거칠불이 천태산 국청사에 와 계신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천태종의 역사를 기록한 《불조통기》에서도 삼세부처님의 출현을 과거장엄겁에 천불, 현재인현겁 천불, 미래성수겁 천불로 모두 삼세 삼천불이 출현하신다고 한다. 이 삼세삼천불의 중심에는 과거칠불이 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도로변에 방치돼 있어 안타까웠는데, 근래에 말끔히 정비돼 있어 다행스럽다.
수대고탑은 천태산 국청사의 상징처럼 돼 있다. 이 탑은 국청사를 창건하고 나서 이를 기념해 수나라 개황 18년(598년) 무렵 세워졌다고 한다. 지자대사 입적 후 수양제가 지자대사를 위해 사마왕(司馬王)을 보내 건립했다고도 한다. 천태산 상운봉 아래, 칠불탑 오른쪽 산록 암반 위에 9층 6각형으로 황색 벽돌로 건립한 전탑(塼塔)이다. 높이가 59. 4m이고 실제 가까이에서 보면, 더 높아보이는 수직 상승감을 느낄 수 있다. 이 탑도 회창법란을 비껴가지 못해 손실을 입어 수차례의 수리가 이뤄졌다고 한다. 1천500여 년 가까운 풍상을 겪은 고탑 난간과 탑신에는 잡초와 이끼가 서려 있는데, 꿋꿋이 서있는 고풍스런 탑에서는 웅흔한 천태의 기상이 전해 온다.
현재의 탑은 송대에 대대적으로 수리·재건됐다고 한다. 원래 탑의 중심에는 3m 6각의 감실이 있었고, 그의 전면에 통로가 있어 오를 수 있게 돼 있었으나, 지금은 오를 수 없도록 돼 있다. 1920년 일부 수리할 때는 2층 부분에서 법화경석각비와 불상 석비 작은 석상 등이 발견됐다. 현재 국청사 진열실에 전시됐다고 한다. 수대 고탑은 결국 《법화경》을 모신 탑임을 알 수 있다.
단구(丹丘)의 첨삭(添削)과 법화현의석첨이 이뤄진 붉은 산 적성산
적성산은 천태산 가장 남쪽에 별도로 있는 구릉 형태의 산(306m)이다. 절벽에는 곳곳에 천연 동굴이 있고 층층마다 절벽을 이용해 마치 제비집처럼 절집을 지어 특수한 건축군을 형성하고 있다. 소나무숲 사이로는 붉은색 절벽과 절집이 매우 인상적인 풍경을 이루는데, 산의 흙이 붉은 빛을 띠고 있어 단구(丹丘), 멀리서 보면 붉은 바위가 성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해 ‘적성(赤城)'이라 부르는가 보다. 산 정상에는 하얀색 탑이 우뚝 솟아 있어 천태산에 들어올 때 멀리서도 가장 먼저 보인다.
특히 저녁노을에 물든 하늘과 붉은 암석들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적성산의 탑의 모습은 천태산 십경가운데 하나로(혹은 천태 8경 중 하나) 꼽힌다.
적성산에는 여러 동(洞)이 있다. 천태산지에는 10동이 있었다고 하고, 일본인이 1938년에 펴낸 답사기에는 5동을 들면서 이곳 어디에 결집암과 석첨암이 있는지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우리도 열심히 그 흔적을 찾아보고자 했으나, 크고 작은 많은 동굴들이 있어 안내자의 설명 없이는 자세히 파악하기 힘들다.
동굴은 3단으로 되어 있다. 가장 아래는 자운동(紫雲洞)이라 한다. 중간에 양운동은 관음보살을 모시는 절집이고, 그 옆으로 서하동(西霞洞)은 도교의 재를 지내는 곳이다. 여기에 있는 오공동(悟空洞)은 천태 9조인 형계존자 담연(湛然·711~782)이 《법화현의》의 주석서 《현의석첨》을 썼던 곳이다. 바위에는 전서체의 글씨로 된 ‘釋籤(석첨)'이라는 글씨가 새겨 있다. 이곳이 아마 담연의 석첨암이 아닐까 한다. 《천태산지》에는 이곳에 형계(荊溪)의 석첨암(釋籤巖)과 장안(章安)의 결집암(結集巖)도 있었다고 하지만, 결집암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천년이 넘는 풍상 탓이거나 후대 도교가 성행했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면 적성산을 천태삼대부의 결집처라고 한 것도 틀리지 않는 말이다.
법화문구》 서품 맨 앞에는 관정(灌頂)이 다음과 같이 법화문구가 이뤄진 유래를 적고 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기 어렵고, 부처님이 이를 설하시기 어려우며, 이를 전하여 번역하기 어렵고, 스스로 깨달음 얻기 어려우며, 스승의 강의 듣기 어렵고, (들은 것을) 한 편이나마 기록하기 어렵다. 내가 27세에 금릉에서 강의를 듣고 69세에 단구(丹丘)에서 첨삭하여 후세 현인들에게 남겨주니 함께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기를 기약한다.”
여기에서 단구는 곧 이곳 적성산을 가리킨다. 이 내용은 《법화경》 방편품에서 법화경과 같은 위대한 설법이 이뤄져 이를 듣고 깨닫기 어려움을 잘 밝힌 것인데, 여기에 관정은 “경을 듣고 기록하기 어려움”을 추가하여, 그가 69세까지 심혈을 기울여 스승 천태대사의 골수가 담긴 《법화문구》를 정리하고 다듬은 심중을 잘 표현했다. 후대의 담연은 이 부분을 《법화문구기》에서 이른바 법화경의 육난(六難)이라 했다. 담연 또한 이곳에서 법화경의 교학체계를 밝힌 《법화현의석첨》을 저술했다고 하니, 이곳이야말로 천태사상을 전승하고 중흥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한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지금 이곳이 더 유명해진 것은 송대 도제(道濟·1130~1209)가 이곳에서 갖가지 기행으로 교화행을 펼쳤기 때문이다. 도제는 제공으로 통하고 ‘살아있는 부처 활불(活佛)'로 불렸다고 한다. 그의 교화모습은 제공원(濟公院)에 그대로 만들어 놓았다.
적성산 정상에는 적성탑이 있다. 높이는 20m이상으로 보인다. 양나라 악양왕 소예(蕭譽)가 후비를 위해 세웠다고도 하고 악양왕비(岳梁王妃)가 대동 4년(538)건립했다고도 한다. 예전에는 세 개소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오직 한 곳만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불사리가 49과가 안치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예사 탑이 아니다. 천태 5대 덕소국사가 중수할 때 28여 과가 나와 분산 안치했다고 한다. 이때 나온 사리중 2과는 국청사 안에 있는 전탑을 세우는 데 안치했다고 한다. 적성산에 오르면 사방이 확트여 천태산과 천태현 시내까지 한 눈에 다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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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 국청사
한산 스님은 중국 당대의 스님으로 정확한 생몰년대는 알 수 없으며 전설화되어 실제 인물이 어쩐지는 불명입니다. 절강성 태주부 천태현 북쪽에 있는 천태산에서 주석하였으므로 천태한산이라고도 하며 천태습득과 천태풍간 세 분을 국청3은 이라고 칭해집니다.
한산스님에 대한 자료는 <<경덕전등록>>에도 보이며, <<조당집>>16, <<송고승전>>2에는 위산영우를 천태산에서 만난 기록이 있고, <<고존숙어록>>14와 <<천태산국청선사삼은집기>>에는 조주종심과 만나 문답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당나라 말기 두광정의 <<불전습유>>에는 한산이 천태산에 은거했던 일 등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산스님을 언급하자면 습득과 풍간 스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에 저희 계승사카페에서 선문화를 다루면서 <한산습득도>라는 유명한 선화(禪畵)를 언급하면서 게시한 내용 일부를 올려드립니다.
한산 습득은 唐나라 太宗의 貞觀(627~649)에 天台山 國淸寺에 살았던 인물들로 정확한 생몰년대를 알 수 없다. 당시 국청사에 豊干禪師라는 도인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이 세 사람을 국청사에 숨어 산 세 聖者라는 의미로 國淸三隱이라고 불렀다. 이 세 사람이 聖者라고 부르는 이유는 풍간선사는 아미타불의 후신이요, 한산은 문수,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고 하는데서 기인한다. 이러한 주장은『전등록』등에서 한결같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보살의 화현이지만 이분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언행을 이해하지 못하여 멸시하고 천대하였다.
한산은 국청사에서 좀 떨어진 寒巖이라는 동굴속에서 살았기에 사람들이 한산이라고 불렀다. 그는 항상 떨어진 옷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식사 때가되면 국청사에 와서 대중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을 모았다가 주면 먹곤 하였다. 가끔 回廊을 거닐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리를 지르거나 하늘을 향해 욕을 하기도 해서 국청사 스님들이 막대기를 들고 쫓으면 손뼉을 치고 큰소리로 웃으며 가버리기도 하였다.
습득은 풍간스님이 산 속을 거닐다가 길옆에서 보자기에 싸여 울고 있는 것을 주어와 길렀으므로 습득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부엌에서 불을 지피거나 그릇을 씻는 일을 하였는데 설거지를 한 뒤에 남은 밥이나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한산이 오면 먹도록 내어 주곤 하였다. 하루는 습득이 마당을 쓸고 있었는데, 주지스님이 다가와 “너를 습득이라고 부르는 것은 풍간 스님이 너를 주워와 길렀기 때문이다. 그럼 너의 본래 姓 은 무엇이며 어디서 살았느냐? 라고 묻자 이 말을 들은 습득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놓고 두 손을 맞잡고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이를 바라본 주지스님은 넋을 잃고 바라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붙이고 말았다. 이로 인해 禪門에서는 ‘叉手而立’이라는 話頭가 생겨나게 되었다.
또 한 편 국청사에는 절의 외진 곳에 伽藍神을 모신 祠堂이 있었는데 별로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지저분했다. 습득이 청소를 하고 巳時供養을 올려놓으면 지켜보던 까마귀가 내려와서 마구 쪼아 먹는 것이었다. 하루는 이를 지켜보던 습득이 가람신에게 달려가 지팡이로 마구 때리며 “네 밥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가람을 지켜! 이 못난 놈아!”하며 꾸짖는 것이었다. 이 날 저녁 주지스님의 꿈에 가람신이 나타나 말하기를 “보현보살께서 내 밥도 못 지킨다고 저를 마구 때리니 죽을 지경이요. 내 집의 문을 달아 주든지 아니면 공양 올리는 일을 보현보살에게 맡기지 말아 주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 이상한 꿈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하니, 대중들도 모두 똑 같은 꿈을 꾸었다고 소란들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습득인 줄 알고 더욱 신기해하였다.
일찍이 여구윤(呂丘胤)이라는 사람이 이 고을의 刺史로 부임해 왔는데 병에 걸려 앓게 되었다. 유명한 의사들을 불러 온갖 약을 다 써보았으나 무슨 병인지 알지도 못하고 차도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풍간스님이 자사를 만나기를 청하자 자사는 자신의 병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풍간스님은 그의 말을 듣고 깨끗한 그릇에 물을 받아 주문을 외우면서 그에게 뿌리자 언제 앓았더냐 싶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자사가 크게 사례하고 설법하기를 간청하자 풍간 스님은 사양하며 “나 보다 문수 보현께 물어보시오.”라는 것이었다. 자사는 다시 “그 두 보살은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묻자 풍간 스님은 “국청사에서 불때주고 그릇 씻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라고 답하고는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자사는 곧 예물을 갖추고 국청사의 한산 습득을 찾아갔다. 마침 한산과 습득은 화로를 끼고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자사가 가까이 다가가서 절을 올리자 무턱대고 마구 꾸짖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스님들은 깜짝 놀라며 “大官께서 어찌하여 이 미치광이들에게 절을 하십니까?” 라고 말하자 한산이 다시 자사의 손을 잡고 웃으며, “풍간이 실없는 소리를 찌껄였군. 풍간이 아미타불인줄 모르고 우릴 찾으면 뭘하나!” 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선 뒤로는 다시 절에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자사 여구윤은 못내 아쉬워하며 약과 옷 등의 예물을 갖추고 한암굴로 다시 찾아가 예배올리고 말씀을 기다리는데 “도적놈아! 도적놈아!” 라는 말만 남기고 한산 습득은 굴속으로 들어가 버리니 돌문이 저절로 닫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각기 노력하라!”라는 말이 울리고는 돌문이 완전히 닫혀 버렸다. 자사 여구윤은 聖者를 친견하고도 좋은 법문을 더 듣지 못한 것을 섭섭하게 여기며 숲 속의 나뭇잎이나 石壁 혹은 촌락의 벽 등지에 써 놓은 사람의 詩 三百首 를 모아 책으로 편집하였다. 이 시집을『三隱集』이라고 하며,『寒山詩』라는 제목으로 유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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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 국청사로 찾아 가노라면 멀리 몇리밖에서도 높직하게 탑 한개가 보인다.
수나라때에 세워진 탑이라 해서 그냥 隨塔이라 불리 우는데 높이는 59.3메터이고 6면9급으로 된 구조인데 독특한것은 탑지붕이 없어서 탑안에서 하늘을 올려다 볼수 있다는 것이다....탑이 세워지고 1300년이 지난 지금껏 옜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해서 인근의 사람들한테는 神物로 받들리우는 모양이다.
그렇게 국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대웅보전에서 지장전으로 빠지는 한켠에 또 큼직한 쇠가마가 놓여 있는데 그 가마와 수탑하고 연관 된 재밋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국청사가 지어진후 국청사에 모셔진 오백라한이 모여서...밤새에 탑 한개를 세워 국청사의 위엄을 널리 알리자고 생각을 모았다.그래서 벽돌이랑 돌멩이랑을 열심이 나르며 분주하게 돌아치고 있는데,남해관음보살이 마침 천태산을 지나다가 석교산의 두봉우리 사이로 천길폭포가 날아내리는 정경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으며 금상첨화격으로 그곳에 다리를 놓을려고 생각 하였다.
마침 국청사 앞에 벽돌과 돌멩이들이 산더미처럼 무져 있는것을 보고 남해관음보살이 국청사의 오백라한보구 그것들을 좀 빌려 쓰자고 했는데 오백라한이 승낙하지 않았다.또 가마를 빌려 밥을 지을려고 하니 오백라한이 가마 밑에 구멍을 내버린것이다.
그 모든것을 알아차린 남해관음보살이 살짝 법술을 써서 향긋한 밥을 지어 내었으니...나중에 오백라한이 보니... 그 구멍으로 모래알만 빠져나가고 쌀알은 빠져 나가지 않으니 그로부터 그 가마를 "漏砂锅"로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밤새에 오백라한이 탑을 다 지어 놓고 탑 꼭대기에 塔斗를 올릴려고 하는데,남해관음이 그 塔斗를 땅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법술을 써 놓았으니 오백라한이 새벽을 알리는 닭소리가 울릴때까지 애를 썻지만 끝내는 塔斗를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탑 아래에서 아무리 하늘을 쳐다봐도 탑꼭대기는 안 보이네...ㅎㅎㅎ
첫댓글 가시는 분도 참고하시지만
못가는 저도 많은 참고가 될것 같습니다.
부회장님,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