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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땅콩의 블로그(여주) 원문보기 글쓴이: 땅콩
세종대왕릉(英陵)
능역을 들어서는 입구부터 세종대왕의 위엄이 압도하는 느낌이다
대형 주차장은 그야말로 벌판이라 칭할 수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세종대왕 의 발명품 옥외전시 와 세종전이 있고 우측으로는 세종대왕 동상이 있으며전면으로는 능역 대문이 있다 실로 세종대왕의 위엄이 압도하는 능역이다.
영능(英陵)은 세종대왕(世宗)과소헌황후(昭憲)의 합장능이다. 세종(1397~1450)은 조선조 4대왕으로 1418왕위에올라 1450년에 승하하니 재위 32년에 춘추 54세였다.
천문학과 아악을 정립라고 북방의 야인(野人)을 정벌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정하고 대마도(일본) 를 징벌하여 국방을 튼튼이 하였다.
작통권 환수와 더불어 떠들어대는 수구꼴통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그림설명에서 덧붙이기로 한다
찾아가는길: (우측에 명성황후 생가지가있다)약3키로정도 더가면 여주 터미날사거리가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조금더가면 우측에 세종대왕능이란 표지판이 있다 안내에따라 가면 거기에 장엄함이 있다. 이곳에는 영능과 녕능이있다 영(英)능은 세종대왕능이고 녕(寧)능은 효종대왕능이다.
★주차장 사진에 나온것은 한쪽 구석에 지나지 않는 그야말로 광장 같은 주차장이다 아마 축구장 만 한가? ★영릉개략도 ★세종대왕능 정문 정숙이라고 조그맣게 써있는 안내판이 필요없을 정도로 들어서면 바로 세종대왕의 위압감에 스스로 위축되는 느낌이든다 ★세종대왕동상 문에들어서면 오른쪽에 위치한다 비분내용은 세종대왕의 업적이 적혀있다 ★박정희 의 기념식수 란다 박정희 대통령각하 기념식수 1977년 10월 9일 이라 표기 되어있다 딱 시해 2년전이다 뒤편의 건물이 세종전이다 ★재실(齋室)현재는 훈민문 앞쪽에 위치함 홍살문 밖에 위치하는건물로 제관이 머물며 제사를 준비하던 집이다. 없어졌던 것을 1977년 이곳에 복원하였다.(박정희의 세종대왕 사랑이 였보인다) ★훈민문 능역 정문이다 ★능역 전경 한여름의 더위쯤은 한방에 날려 버릴듯 아주 시원한 정경은 물론 한여름의 피서겸 ?아갈 곳이며 어린이 들 에게는 공부의 귀감이 될만한 장소이다. ★금잉어 훈민문 왼쪽 바로옆 연못에 물반 고기반이다 먹이 파는곳이있다 ★홍살문과 신도(神道) 신성한곳을 알리는 징표로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을 말한다 홍문(紅),홍전문(紅箭)이라고도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 한다 홍살문과 정자각에 이르는 길인데 참도라하여 참례하거가는길을 뜻하고 가운데 높은 길을 신도라하여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만 지날수 있는길이다 ★배위 ★정자각 건물이 정(丁)자 같이 생겻다 하여 붙힌 이름이다 제사때 제물을 진설하는 곳이다 ★수복방(守僕) 제기를 보관하거나 능지기또는 관리인이 거처하던곳이다. 터만 남아있던것을 1977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수라간 다른능에서는 볼수 없는건물이며 주기적으로 드나드는 제사나 입금의 친행이 있을때 제물을 마련하던 곳이다. 1977년에 복원하엿다 ★영능비 세종대왕능은 광주 헌능 지금의 내곡동 에 있었는데 1469년 에종 원년 이곳으로 이장 소헌황후와 합장되었다. 비각도 이때 세워졌으며 비문에는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형황후 부좌라 새겨있다(부좌란 왼편을 뜻함) ★영릉비 ★예감 정자각 서쪽뒤편에 위치하며 철상(제사 음식 치움)하며 축문을 태우는곳이다 ★대형향로 실제는 사용하지 않는 조형물이다.용두 용미의 조각 ★는올라가는 왼편게단 ★세종대왕 합장능 경계석과 장군석 해태석이 한눈에 보인다 다른 능에 비해 규모가 웅장하다 ★능전면 ★선비석과 장군석 능에 서있는 수호신적 상징물이다 선비석과 장군석의 비교가 확영하다 ★수호석
건릉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비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되고, 1762년 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2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
(孝章世子 : 뒤의 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775년 11월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키려
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우며 반대했으나, 그해 12월 대리청정의 명을 받았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대보(大寶)를 세손에게 전하라는 유교(遺敎)에 따라 즉위했다.
왕위에 오르자 바로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했으며,
세손 때부터 그를 보호한 홍국영(洪國榮)을 도승지로 삼고 숙위대장(宿衛大將)을
겸직시켜 반대세력을 숙청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주한 숙의 문씨(淑儀文氏)의 작호를 삭탈하고,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사가(私家)로 방축했으며, 문성국(文聖國)은 노비로 만들고,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과 홍인한을 경원과 여산으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남용하자 조신들의 탄핵에 따라
1779년 9월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전리(田里)로 돌려보내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어제봉안(御製奉安)의 장소로 마련했던 규장각(奎章閣)을 9월에 준공,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했다.
1777년 12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외각(奎章外閣)이라 하고,
1782년 2월 강화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신축했다.
규장각에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을 각신(閣臣)으로 선발해 후한 녹봉을 주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으며, 정조 자신도 이들과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각신의 양성은 당파의 인물을 멀리하고 참신하고
유능한 신진들을 길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었다.
1779년에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으로 재주있는 인사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했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활자에 깊은 관심을 갖고 1772년 임진자(壬辰字),
1777년 정유자(丁酉字), 1782년 한구자(韓構字), 1792년 목활자인 생생자(生生字),
1795년 구리로 정리자(整理字), 1797년 쇠로 춘추관자(春秋館字) 등
도합 80여 만 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비치해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했다.
금원(禁苑) 안에는 규장각의 부설기관으로 봉모당(奉謨堂)·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서고(西庫)·이안각(移安閣) 등을 두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활발한 서적편찬 작업이 이루어져 1781년 〈어정성학집략 御定聖學輯略〉·
〈어정팔자백선 御定八子百選〉, 규장각 소장 3만 여 권의 분류목록인
〈규장총목 奎章總目〉, 1782년 〈동국문헌비고〉를 증보한 〈증보동국문헌비고〉
(146권), 〈국조보감 國朝寶鑑〉, 1784년 〈규장각지 奎章閣志〉·
〈홍문관지 弘文館志〉, 1785년 〈대전통편〉·〈태학지 太學志〉, 1786년 〈갱장록 羹墻錄〉,
1787년 〈문원보불 文苑黼黻〉·〈어제춘저록 御製春邸錄〉·〈전율통보 典律通補〉,
1788년 〈동문휘고 同文彙考〉, 1789년 〈해동읍지 海東邑誌〉,
1790년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 1794년 〈주서백선 朱書百選〉,
1796년 〈규장전운 奎章全韻〉·〈어정사기영선 御定史記英選〉, 1797년 〈오륜행실 五倫行實〉,
1798년 〈오경백편 五經百編〉, 1799년 정조 자신의 문집인〈홍재전서 弘齋全書등이 편찬·간행되었다.
그밖에 1776년 궁방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던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금지했다.
도망노비를 추쇄(推刷)하는 노비추쇄법을 폐지했다. 1782년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재위중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어 사회문제가 되었으나,
서학의 발흥은 정학(正學)인 주자학이 융성하면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보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리하여 1791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신주를 불지르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났으나,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두 사람만을 처형함으로써 사건을 더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또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장헌세자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그 묘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했으며, 묘호(廟號)를 경모궁(景慕宮)이라 하고,
1789년 18만 냥을 들여 경기도 양주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이듬해 용주사(龍珠寺)를 개수·확장해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게 했다.
1800년 6월 개혁의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현륭원 동쪽 언덕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1821년 효의왕후가 죽자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조선왕조 22대 보위에 올라 세종대왕 다음가는 성군으로 추앙받는 정조대왕에 건릉(健陵)을 둘러보았다.
▲ 능원 부지내에는 이처럼 소나무가 울창 합니다. 여담이지만 요기에 보이는 소나무에 관련된 재선충, 솔잎혹파리 기타 병충해 방제와 수목관리을 위해서 매년 문화재청 산하 능원관리사업소에서 약제(농약)구매를 공개입찰 합니다. 대부분 본 인에 소속회사가 낙찰을 받은지라 원님덕에 나팔부는 격으로 계약관계며 기타 업무상 웬만한 조선왕릉은 거의 한번쯤은 답습했다고 자랑아닌 자랑을 해도 될런지요...ㅋㅋㅋ ▲ 융릉에서 나목(裸木) 길을 따라 10여분 산책을 하면 영조대왕 건릉입니다.
▲ 22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능이라고 명기 되었내요. 드라마 이산에서 착하디 착한 첫째 왕비지만 후손을 잉태하지 못해 부득이 도화서 송연이를 둘째 왕비로 적극 추천하지요.
▲ 신성한 지역임을 고지하는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입니다.
▲ 제례를 올리는 정자각 입니다. 정(丁)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초헌관이 동쪽계단을 이용하여 올라와서 제례를 올리고 서쪽 계단으로 내려간다고 하여 동입서출(東入西出) 기본예법 불문율 이라고 합니다. 사당이나 종중 재실같은 기타 민간 제례의식에서도 마찬가지 라내요. 참고로 조상에게 절은 재배를 하며, 부처님께는 삼배, 임금에게는 국궁사배(鞠躬四拜)라 하여 사배를 올린다고 합니다. 부처님 보다 국왕이 더 높다는 뜻일까? 아무튼 한 수 제대로 배웠습니다.
▲ 정자각 내부 제례의식을 행하는 부속시설 입니다.
▲ 혼유석(魂遊石) : 제례를 올리는 정자각이 없을시는 제물을 올리는 상석(床石)이라고 칭하지만 정자각이 있다면 혼령이 나와서 쉬는 장소로 글자 그대로 혼이 유랑하라는 뜻에 혼유석 이라고 한다내요. ㅋㅋㅋ...오늘 무척 많이 배웠습니다.
▲ 문.무인석 입니다. 우째 융릉 보다 좀 못생겼지 않나요~ㅠㅠㅠ
▲ 365일 물샐틈 없이 철저하게 사주경계를 펼지는 석호,석양,석마, 망주석 입니다. 석양은 융릉에서 언급했고..... 석호(石虎)는 능을 지켜주는 호랑이로 오직 왕릉에서만 설치할 수 있다고 하며 망주석은 육신을 떠나 떠도는 혼백이 나중에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표시하는 일종 등대 격이라내요 암튼 알면 알수록 궁금증이 유발되며 재미있내요.
▲ 장명등 석주 문양입니다. 아무리봐도 융릉에 비해 세기가 부족한것 같내요. 그만큼 정성이 부족하다고 할까?
▲ 건릉 후면입니다.
▲ 비각과 비문입니다 고전체로 "대한 정조선황제건릉 효의선왕후부좌" 라고 광무3년 고종황제가 건립했다고 명기되었습니다.
▲ 정자각과 비각 측방 모습입니다.
▲ 홍살문 방향에서 정자각으로 진입하였을시 자세히 보면 바닥에 깔린 박석 가운데 구분된 두개의 길에서 왼쪽 것이 조금 넓으면서 높게 보이지 않나요. 이유인즉, 왼쪽은 신(神) 즉 영혼이 다니는 길이고 오른쪽은 참배객 다시 말하면 후대 왕이 선왕 제례시 걸는 어도(御道)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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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캬 역시 왕은 죽어서도 왕인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