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반을 하다보면 유달리 관심을 가져주는 고맙고 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평소 특별한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가 의사소통이 자연스럽고, 그가 후미로 처지면 자연스레 뒤 돌아보아지는 것이다. 어쩌면 단체 등반에서의 서먹한 분위기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산악회와의 관계가 개선되고 신뢰가 두터워짐을 느끼게 된다.
나도 언젠가 시내 산악회를 가면 유달리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어 매우 좋았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안내도 해주고, 먹을 것도 나누어 주는 그들 때문에 한동안 그 산악회를 가게 되었었다.
우리는 콤비란 말을 한다. 다른 말로는 짝패, 짝쿵, 단짝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우리는 등반을 함에 있어 서로를 아껴주고, 동행해 주는 그러한 단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생살이에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이길 바라면서...
일과를 마치고 부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저께도 어머님 생신 때문에 부산을 다녀왔었는데, 오늘은 친구들의 모임에 가기 위해서이다. 방학이라 그런지 버스엔 생각보다 승객이 제법 많다. 시내를 빠져 나오면서 두 번씩이나 승용차가 우리가 탄 버스 앞을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러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순간 버스기사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았다.
참으로 그 사람들이 아찔하게 운전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모르긴 하지만 승용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아직 젊고 가족이 있을 텐데 저렇게 무모한 운전을 할까? 만약에 버스가 속력이라도 내었다면 그들은 중환자실이나 영안실로 가야 하였을 것 같았다. 한 여름 더위를 먹어서 그런 것 일까???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갈아타고 서면역에서 내렸다. 경남공고 부근이라고 했었다. 해거름의 도심 거리는 많은 젊은이들로 붐빈다. 특별히 이곳에다 예쁜 사람들만 풀어 놓은 것도 아닐 텐데.
대로변을 따라 걷다가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학교 위치를 알고 있으니까 근처에서 찾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얼마를 지나자 모임의 장소인 식당 간판이 보였다. 나는 마치 네비게이션을 따라 온 것처럼 한 걸음의 망설임도, 오류도 없이 모임장소에 도착한 것이었다.
식당에는 벌써 열 명 남짓한 친구들이 와 있었고, 멀리서 왔다며 나에게 따뜻하게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장소를 못 찾아서 전화를 하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장소를 찾다 지쳐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더운 여름 날씨에 거리를 헤맨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준비된 음식을 먹으며 그동안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한 달에 한번쯤 얼굴도 보고, 돈이라도 조금 모아 여행을 같이 하자는 취지의 모임으로 나는 올 연초에 가입을 하였었다. 직장생활에 관한 이야기, 사업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자녀들의 출가나 자신들의 주변이야기들로 먹는 즐거움과 듣는 즐거움으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와 머리를 맞대고 앉은 친구는 예전엔 산속에서 산사람처럼 생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이젠 하산을 하여 도심지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매주말 마다 산을 간다니 산을 좋아하는 그 마음은 못 버린 것 같다. 이 친구가 하산을 하고나서는 다른 친구가 배내골의 펜션으로 올라가 몇 달째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나니 아홉시가 가까웠다. 날씨가 더워 2차에 관한 계획도 없어 다들 헤어지려는 순간 총무가 전화를 받는다. 친구 하나가 지금에야 온다고 하는데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모두들 이제 전화를 하고 와서 저녁을 먹는다면 자신들이 얼마를 더 하릴없이 기다려야 할 것이냐는 표정들이다.
그래도 친구가 온다는데 어쩌랴? 나도 사실은 돌아와야 할 처지라 자꾸만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재어보곤 한다.
10여분이 지나자 헐레벌떡 그 친구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얼굴을 보니 동네 친구였다. 우린 서로가 반가워서 얼싸 안았다. 이 얼마만이던가? 그 친구 말이 늦어서 안 오려고 했는데 내 얼굴을 보려고 왔단다.
서로들 인사를 나누고는 우리 일곱만 남고 나머지는 집으로 갔다. 늦게 온 동네친구는 저녁은 먹고 왔고 술을 먹자고 하여 다시 자라에 앉아 맥주 몇 병을 먹었다. 그리고는 가요방을 가자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먼저 나서서 설치는 친구가 아니었는데 성격이 변한 것 아닌가 싶다.
식당 주인아저씨가 알려주는 가요방을 향했다. 사실 난 자꾸만 돌아 올 버스시간에 마음이 쏠렸지만 나른 만나려고 나왔다는 친구를 두고 그냥 올수는 없었다.
나이는 같은 또래지만 노래의 성향은 각기 달랐다. 어떤 친구는 나이에 걸맞게 목소리를 깔고 흘러간 가요를 구성지게 뽑는가 하면, 다른 친구는 언제 주워들었는지 요즘 젊은 세대들의 노래를 불러댄다. 나를 포함한 몇몇은 어정쩡하게 이쪽으로 쏠렸다 다시 저쪽으로 쏠리기도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늦게 온 동네친구와 나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 친구와 나는 한마을에서 자랐다. 국민학교 시절에 중학교를 갈 학생들은 6학년이 되면 방과 후에 남아 보충수업을 하였었다. 그런데 유독 그 친구와 나는 매일 정규수업이 끝나자마자 도망을 쳐서 담임선생님에게서 꾸지람도 많이 들었었다.
그리고 중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그의 아버지가 영어선생님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신지 오래 되었지만, 그분의 별명은 ‘돼지마구’였었다. 수업시간이면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여 답변을 못하면 돼지마구에 들어가라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수업시간엔 자기 아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불러 세운다.
‘홍길동 일어서!’
‘예!’
‘방금 내가 읽은 것을 해석을 해봐!’
‘.........’
‘야 이! 돼지새끼야! 그것도 못 하나? 홀딱 벗고 돼지마구에 들어가 버려라!’
순간 교실은 소리없는 웃음바다가 된다. 학생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자기 아들이 돼지새끼면 자신은 돼지 아버지가 되는 것인데...ㅋㅋㅋ
아무튼 그 친구와는 군 입대도 같이 하였었다. 공교롭게도 입대 전에 둘 다 무릎을 다쳤었다. 훈련소에서 무릎 때문에 군번을 늦게 받을까 염려되어 상처에다 흙을 발랐었다. 그땐 군번을 못 받으면 군복무기간으로 계산해 주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나는 3일 만에 하사관에 차출되어 뺑이를 쳤고, 그 친구는 무릎의 상처 때문에 2주일을 수용연대에 머물렀었고,철원의 제일 꼭대기 북한 인근부대에서 군대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내가 제대를 하자 그의 어머니는 같이 입대를 했는데 자기 아들은 같이 제대를 못하여 몹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을 보았었다.
둘 다 부산에서 직장을 구하고 결혼도 하였었는데, 나는 공무원으로 들어왔고, 그는 민간 기업으로 들어갔었다. 그 후에도 내가 부산에 10년 가까이 생활하는 동안엔 자주 만나서 술도 마시고 하였었는데, 내가 진주로 이사를 하고 나서는 매우 건강하던 그 친구가 몸이 많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나도 이곳생활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간간히 들리는 소식으로만 알고 서로 간 연락을 끊고 살았었고, 그 친구도 다른 친구들의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갔었다.
심야버스를 타야하는 부담감 때문에 노래도 하지 않고 연신 시간을 체크하며 술잔만 비우는 나에게 자꾸만 노래를 권하였다. 그래도 분위기는 맞추어야지 생각하며 노래를 한곡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 친구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직장이야기, 자식들이야기, 그 외 가정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이야기 할 것이 없었다. 전해 듣고, 미루어 짐작하면 답이 나오기 때문이었고, 그 보다 문제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스레 서로의 노후와 건강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 친구는 10년 전에 두 번이나 쓰러졌었다는 것이었다. 건강하던 자신이 쓰러져 어이도 없고 해서 부산의 대학병원들을 다 다녔었지만 별다른 진단이 나질 않아 서울로 갔었고, 그곳에서 가까스로 진단을 받았었는데 스트레스성...라는 것이었단다.
공대를 졸업한 그는 직장이 장소를 이전 하고, 계속된 확장사업으로 주어진 업무가 매우 중요하고 과중했었다 한다. 그로부터 그 친구는 담배와 술을 끊고 절제된 생활을 11년 동안이나 해 왔다고 하며 근래는 완치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하였다 하면서 술도 마시고 인생을 즐겁게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하였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마음에 남은 모든 찌꺼기를 다 버리고 살자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남은 시간 오로지 건강을 위하고, 즐겁게 살기위해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건강한 삶이란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는 날까지 육신을 정신과 함께 묽어 두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단련도 중요하지만, 육신을 허황된 곳으로 인도하지 않도록 정신의 수련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 옛날처럼 콤비가 다시 되어 자주 연락도 하고 만나자며 술잔을 부딪쳤다.
재미있게 놀고 있는 그들을 뒤로하고 가요방을 빠져나왔다. 헤어지는 아쉬움이 컸지만 집사람에게 오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을 하였기 때문이다. 밤거리의 눈부신 네온사인 지대를 벗어나 지하철역을 거쳐 롯데백화점 건너편에서 마지막 심야버스를 탔다. 왠지 여자승객들이 많아 보인다.
‘밤늦은 시간에 여자들이...’라고 했다간 큰 코 다치는 세상이다. 시내에서도 늦은 시간을 활보하는 건 여자들이다. 운동을 한다든지, 집안일을 본다든지...
그렇다면 이 시각 남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단짝과 어울려 술집에서...고스돕판에서...아니면 집에서 홀로 텔레비젼을 보거나 꿈나라로 향하고 있을 런지???
(어젯밤은 술을 마시고 늦게 잔 탓으로 두 시간도 제대로 못 잔 것 같다. 그래도 잠은 다음에 실컷 잘 기회가 많고, 영원히 잠들 기회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