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국어교사 연구회의 문학 답사를 안내하고 기관지 "글누리"에 발표한 글입니다. 2회로 나누어 올립니다.
평창 봉평
시인 姜 基 玉 (한국자유시문인협회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백두대간을 이루는 한반도의 등줄기가 힘차게 남으로 뻗어 내리다가 강원도 오대산 부근에서 남서쪽으로 곁가지를 친다. 차령산맥이다. 지도로 보면 차령산맥은 백두대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 있는 모양인데 두 산맥이 만나 삼각을 이루는 지점의 바깥은 동해안의 속초와 강릉이고 그 내륙의 안쪽이 평창이다. 그 안과 밖은 지형적으로 차이가 있는 만큼 생활하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속초 강릉은 어업에 종사하여 바다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많고 평창을 중심으로 한 내륙지방은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며 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많다. 이들의 생활에 특징을 지워주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설악산과 오대산의 차이 때문이다. 설악산은 바위가 많은 골산(骨山)이다. 골산은 바위층의 절리 현상에 의해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높은 봉우리를 이루고, 봉우리는 그 높이만큼의 깊은 골짜기를 이루어 맑은 물을 흐르게 한다. 그에 비해 오대산은 흙이 많은 육산(肉山)이다. 육산은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에 흙이 쓸어내려 깊은 곳을 메우기 때문에 산봉우리도 부드러운 능선을 이룬다. 그래서 오대산은 아무리 깊게 들어가도 마을 산에 오른 듯한 편안한 느낌이 드는데 설악산은 조금만 들어가도 금방 깊은 곳에 들어 온 느낌이 든다. 태기산과 황병산 등 산악인들이 즐겨 찾는 준봉들이 많아 평균 해발이 500M를 넘는 평창. 그 곳에는 국어 선생님들이 꼭 찾아야 할 문학의 현장이 있기에 지난 9월 18일과 19일에 1박 2일로 답사 여행을 다녀왔다. 봉평의 이효석 생가를 비롯하여 월정사와 상원사, 그리고 오대산 중대의 적멸보궁을 집중적으로 답사했는데 주제가 문학답사였던 만큼 봉평의 문학을 조명해 본다.
봉평의 메밀꽃
봉평은 이효석 때문에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그는 “메밀꽃 필 무렵”에 봉평의 정경을 서정시처럼 묘사하여 봉평을 메밀꽃의 성지로 승화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시절 산골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구황식품 메밀, 그 메밀이 하얗게 소금을 뿌려 놓은 듯 숨막히게 피어 있는 달밤의 정경으로 살아나 메밀꽃은 독자의 가슴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피어났다. 그래서 가을이면 전국의 관광객들이 봉평으로 몰려든다. 여기에서 필자는 이효석과 봉평과의 관계에 치중하여 그의 애향심에 대한 논의를 고찰해 본다.
메밀꽃은 그렇게 아름답거나 향기가 고와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내는 꽃은 아니다. 그것들이 떼 지어 피어있을 때 소복한 조선 여인의 한을 품고 있는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새로운 느낌을 줄 뿐이다. 굳이 메밀꽃을 보려면 차라리 전라북도의 고창에 있는 메밀밭이 더 아름답고 화려하다. 선운사 동백과 고인돌로 잘 알려진 고창. 그 곳의 남단 공음면에는 12만평의 구릉지에 청보리와 메밀꽃이 파란 하늘과 어울려 새 세상을 열어 놓는다. 오월이면 청보리의 초록 물결이 일렁이는 지상의 바다로 변하하여 출렁이고 구월이면 메밀꽃이 또 하나의 눈꽃 세상을 열어 닥터 지바고의 시베리아 설경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서편제의 청보리밭이나 봉평의 메밀밭은 규모가 작아도 작품 속에서 주제를 부각시키는 매체로 살아 있기 때문에 잊혀지지 감동으로 남아 있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다.
이효석은 봉평에서 태어나 4살에 서울로 올라 갔고 5-6세에 어머니와 사별한 후다시 봉평으로 내려와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이후 다시 상경하여 경기중학교(5년제)와 서울대학교를 다녔다. 절대빈곤의 시절에 한성사범을 나온 아버지는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봉평에서 진부면장을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백 리 밖 평창 읍내에서 하숙을 할 만큼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이효석은 서구지향적인 삶을 살았고 고향에 대한 절절한 향수를 작품에 표현하지 않았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계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와도 각별하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고향 상실증을 보이며 살았다. 그렇다면 이효석은 애향심이 없는 사람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작가나 평론가들의 논란이 있었다. 그에게도 애절한 애향심이 있었다고 강조하는 유종호 교수의 평론과 그와 상반된 의견을 개진한 이상옥 교수의 의견이 대표적인데 우리는 효석의 작품을 종합적인 입장에서 비평해야 한다고 본다. 너무도 짧은 생애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현론이나 효용론, 또는 반영론이나 절대주의적인 방법으로 효석의 문학을 논하는 것보다 그의 일대기까지 살펴보는 종합주의적인 관점에서 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우선 “메밀꽃 필 무렵”에서 동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나 허생원이 성처녀를 그리워하는 것도 어린 시절 계모 밑에서 자란 한과, 원만하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상쇄해보려는 의도에서 그려낸 작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에 대한 작품을 많이 쓰지는 않았다. 영문학을 한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는 서구취향이었다. 그러나 영서삼부작(메밀꽃 필 무렵, 산협, 개살구)에는 고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데 주목할 만한데 “영서의 기억”이라는 수필에는 “영서에 내려가 볼 때 뿌리 깊은 두고 온 친척이 없는” 곳으로 표기하고 있어 그의 향수를 의심하게 한다. 실상 이효석은 봉평에 살가운 피붙이가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함경도에서 이 곳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효석이 봉평에 머문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네살 때까지와 여섯살에 서울에서 내려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열네살까지가 전부다. 더구나 효석은 죽어서도 봉평을 떠나 있다. 그가 죽은 후 이곳 진부에 묻혔는데 영동고속도로 확장 공사로 장평으로 옮겼다가 다시 1998년에 파주 공원 묘지로 이장해버렸다. 효석은 죽어서도 봉평에 대한 애향심을 논의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그의 외모를 보면 문약에 빠진 허약한 모습이다. 강단이 있거나 뚝심이 있어 남과 대립할 것 같지도 않은 성품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문단의 시대적 흐름을 동반자적인 자세로 어정쩡하게 극복해냈다. 더구나 대학을 졸업하고 경무국 도서과 검열관으로 취직해 있을 때 이갑기라는 친구로부터 “너도 개가 다 됐구나”라는 욕설을 듣고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는 이야기는 이효석의 인간됨을 알게 한다.
36세의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이효석을 애향심이 없었다는 말로 단정해버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가 50이나 60대까지만 살았어도 그의 작품은 메밀꽃 필 무렵을 능가하는 고향의 작품을 남겼으리라.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충분히 나타났으리라. 요절한 효석의 애향심은 이미 메밀꽃 필 무렵에 충분히 녹아있다. 봉평과 이효석은 이미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을 보면 그의 인생을 재조명해봐야 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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