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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동아대학 국문학과 학생들과]
‘그리운 치밭목’, 지리산을 사랑한 강영환 시인을 만나러 가다.
박성희/ 산에다 하나하나 별명을 붙여서 제목을 만든 것 같다. 혼자가보기 아까운 가장 마음이 가는 봉우리는 어디인가요?
강영환/거대한 지리산에는 숱한 봉우리들이 있지요. 그 이름들을 외우기까지는 숱한 발걸음이 필요하게 됩니다. 태극 모양으로 구부러진 주능선에 있는 봉우리에는 열 번도 더 넘게 발자국을 찍었던 숱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봉우리마다 사연이 있고 아름답지요. 그 중 어느 한 봉우리를 선택하라면, 다른 봉우리들이 섭섭하다할 것입니다. 그래도 멋진 봉우리를 꼽으라면 반야봉을 꼽을 수가 있지요. 반야봉 일몰, 멀리서 보면 두 봉우리가 여인의 둔부 모양으로 생겨 산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도 하죠. 그러나 그 산에 들면 남성다운 기개가 넘쳐 나지요.
박성희/ 시에 보면 의인화시키거나 비유한 표현이 굉장히 많던데, 이는 시를 지으면서 기법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인가요?
강영환/ 시는 비유법을 빼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 법이 아닐까요? 의미, 리듬, 표현이 서로의 무게를 같이하면서 한 편의 시가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그 중 어느 것이 기울어진다면 맛과 멋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 산 시들은 직접 발로 다니면 쓴 작품이기에 비교적 비유법 즉 은유가 많이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기법이 앞서면 다른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박성희/ 시를 지을 때 비유나 심상 같은 기교들이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시는지?
강영환/ 시는 결국 이미지를 전혀 배제하고 리얼리티만으로는 구성할 수가 없습니다. 지독한 리얼리즘 시라 하더라도 이미지나 은유를 등한시 할 수가 없습니다. 시가 될 수 있는 요건이 있습니다.
시가 문학예술로서 성립하기 위한 첫째 조건으로서 시적인 표현을 들 수 있습니다. 시가 시적인 표현을 획득하지 않았을 때는 비록 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해도 그것은 시로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를 감각적 특수성 혹은 감각적이고 심미적인 연속체로 보는 것입니다. 이 점이 시를 음악과 회화에 연결시키며, 철학과 과학에서 분리시키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둘째로 시를 비유법의 세계로 보는 것입니다. 이 점이 시를 간접적 담화의 세계라고 주장케 하며, 또한 은유와 환유를 통해 말해지는 세계임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휠라이트의 표현에 따르면 기호(sign)이면서 대상(object)이며, 비서술적 유형으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시를 하나의 주체에서 분리된 객체로 본다는 말이며, 상호주관성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시적 표현을 획득 할 수 있는 요건으로 세 가지 기본적인 틀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격, 허구성, 언어의 비유적 사용이 그것입니다.
박성희/ 가장 영향을 받은 시인이 있는지?
강영환/ 스승 없이 독학으로 시를 공부했기 때문에 선고 시인들 대부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상과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인 랭보에 한 때 심취했던 적이 있습니다. 시를 배우면서 체계적이지 못한 이유로 잡식성이 강하여 모든 시인들로부터 영향을 다 받았다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게 저의 불행이지요.
성진아/ 산행 중 시를 쓰신 것인지…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지… 시상이 산행을 통해 떠오르시는 지?
강영환/산행 중에는 힘듦 때문에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길을 걸을 뿐이지요. 다녀 와서 되돌아보면 그때 만났던 산유화나 바위돌, 냇물소리 이런 것들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지요. 그때 영감도 떠오르고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싶은 욕심이 생겨나지요. 제 산 시는 그런 것들의 명명 작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성진아/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되셨는지…
시라고 하는 것을 처음 써 본 것은 고 1때입니다. 고3때 교내 한글백일장에 입상하고부터 전적으로 매달렸죠. 그때 접하게 된 시인이 이상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첫 대학입시에 실패하게 된 이유입니다.
성진아/ 시가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셔서…?
강영환/시는 영혼의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들려오는 심상에 푹 빠져버리는 것이죠. 종교보다 앞서는 의미 이전의 의미, 절대 선이라 할까?
천은영/ 선생님에게 시란 어떤 존재인가요?
강영환/종교보다도 더 높은 차원이라고 말씀 드렸듯이 시는 제 영혼을 지배하는 폭군 같습니다. 폭군 앞에 엎드린 불쌍한 한 인간이 스스로 가장 행복한 척 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시를 포기하지 못하고 40여년 써오고 있다는 사실에는 노예계약과 같은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걸려 있는 것 같아요. 가족보다 앞서는 존재, 애인보다 더 멋진 존재, 그래서 대학 때 연애한번 못해 본 것을 시 때문이라고 돌려 세우기도 곧잘 하지요.
천은영/ 지리산의 어떤 부분이 선생님에게 영감을 많이 주어서 시집을 3권이나 출판하셨는지?
강영환/ 시집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지리산은 이웃의 아픔과 우리 민족의 역사와 자연 생태계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거대한 서사공간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처음에는 산 그 자체가 좋아서 갔지만 자꾸 들어갈수록 산에 묻어 있는 아픔들이 나를 불러들이고 또 그곳에 잠겨있는 역사와 종교와 민속들이 나를 불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지리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거리는 걸 보아 아마도 깊은 사랑에 빠져 있나 봅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천은영/ <그리운 치밭목>에서 "불륜으로 땀 젖은 옷은 언제나 집이 낯설기만 하다"은 어떤의미인지?
강영환/ 불륜이라는 말에 과민 반응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 말이 툭툭 튀는 느낌이기에 호기심이 제일 먼저 가는 것으로 압니다. 저도 그 점을 노린 것이니까요. ㅎㅎ
생각해 보세요 불현듯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훌훌 떠나는 남편을 바라보는 젊은 아내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지리산을 가는 것이 꼭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드는 것으로 생각하겠지요. 집을 떠나 지리산에 갈 때마다 아내보다 지리산을 더 많이 사랑하는구나 생각했죠. 돌아오면 집이 낯설게 느껴지고 이내 다시 지리산으로 가고 싶어지는 것이죠. 그런 마음을 슬쩍 비춰 보인 것입니다.
천은영/ 그리운 치밭목에서 "산을 먹고 돌아온 날 밤에 아이를 낳았다"에서 아이는 어떤 의미인지?
강영환/ 제가 낳은 아이는 바로 시입니다. 너무 뻔하고 재미없는 답인가요?
천은영/ 선생님의 시집 가운데 이 가을에 추천해주고 싶은 시집은?
강영환/ 제 시집 19권 중에는 추천하고 싶은 책이 없네요. 어렵기도 하고 뭐 특별한 감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꼭 하라면 ‘뒷강물’ 과 ‘푸른 짝사랑에 들다’ 정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천은영/ 선생님이 좋아하는 시인, 시집은?
강영환/ 제가 좋아하는 시인은 고인이 된 박재삼 시인입니다. 삼천포 태생으로 독학으로 시를 공부하였고 시와 시조에 다 능하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암송하는 그 분의 시에는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이라는 명시가 있습니다. 시집으로는 ‘춘향이 마음’ 이 있지요.
천은영/ 선배시인으로서 새내기에게 전하는 조언은?
강영환/ 시대는 늘 변화합니다. 그렇기에 새내기들은 그들의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맞는 것이지요. 그들의 감수성이나 표현은 나이 든 선배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수성은 언젠가 점차 소멸해 갈 것이고 표현도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진부하게 낡아지겠지요. 그래서 새내기 시인들에게 굳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이나 기교로서 보다는 의미와 진정성을 담는 노력을 많이 해 보라는 뜻을 전하고 싶네요. 기교는 뒤에 오는 또 다른 새내기들에게 점령당하게 되고 그것이 시를 깊이있게 만들지는 못하니까요.
천은영/‘지리산 사람들’과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셨고 어떻게 그분들의 시를 쓰게 되셨나요?
강영환/ 지리산의 역사나 아픔이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고 사람을 쓰는 일이 바로 지리산의 역사를 쓰는 것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역사적인 인물들을 빼고는 한번 또는 그 이상 함께했던 시간들이 있는 분들이며 지리산을 나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허혜정/ 요즘 “시를 읽는 독자보다 시인이 더 많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강영환/ 시인들도 독자입니다. 고급 독자들이지요. 실제 일반 독자들보다는 시인들만이 독자로 남게 되는 게 현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의 시 밖에 읽지 않는 시인들도 있겠지만 시가 난해해지고 즉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 기법으로 쓰여질 때 독자들은 멀어져 갑니다. 그런다고 시인이 자신의 세계를 포기하고 독자의 기호에 맞게 아부한다면 그런 시인은 존재 이유가 없겠지요. 왜냐면 시인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할 사명을 가졌기 때문에 말입니다. 시인도 독자라는 생각일 때 독자보다 시인이 더 많을 수는 없겠지요. 시인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닙니까. 진정 좋은 시를 창조하는 시인들 말입니다.
허혜정/ 자신이 지은 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무엇인가요? 왜 그 시가 가장 마음에 드나요?
강영환/ 시집 19권 중에는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 여럿 있습니다. 가장이라는 테두리에 갇히다 보니 고르기가 쉽지는 않군요. 애착이 가는 시는 첫시집에 ‘황씨의 카메라’라는 시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시대 상황과 개인이 처한 현실을 의미있게 담아냈다고 생각이 듭니다.
허혜정/ 자신의 시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강영환/ 저는 이웃에 관심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지만 격동의 80년대를 거쳐 오면서 작품을 쓰다 보니 그쪽으로 흘러간 것 같습니다. 가까운 이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경과물이겠지요. 산에 관한 시는 산을 가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세권의 지리산 시집을 출간했지만 제 작품의 기조는 도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제 시를 그것이 ‘산복도로’란 시집에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제 시를 도시 빈민시라고 부르기도 합디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 여하튼 소외받은 이들에 대한 눈뜸과 애정이 버무러진 결과물이겠지요.
허혜정/ 등단한지 삼십년이 넘었는데 정착된 문학관이나 세계관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강영환/ 아직도 흐르는 물입니다. 어느 한 곳에 정착되지 못하고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웃 사랑과 자연주의, 자연과 사람, 이런 것들에 변함없이 발걸음이 가는 거겠지요. 소심한 휴머니즘 정도라고나 할까요. 제가 줄곧 가다듬어 오고 늘 그렇게 앞세우는 것들입니다.
허혜정/ 자신이 가지는 시인의 시선으로 요즘 사회를 바라봤을 때 뭘 느끼시나요?
강영환/ 요즘엔 정말 이민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땅의 현실들이 너무 답답하고 가슴 아픈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연에 대한 생각은 그대로가 가장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 개발행위들이 정말 아니라고 복 있지요. 새만금 사업, 고속철도 사업, 강을 죽이는 4대강 개발 사업, 무분별한 택지개발사업 등등... 개발론자들이 벌이는 무자비한 행위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캄캄합니다. 그리고 지사는 아니지만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과 혜택들이 자본주의의 극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 아픕니다.
허혜정/ 일상에서 소재를 발견하시는 방법은 혼자 터득하신 건가요, 아니면 가르쳐주신 분이 따로 있는 건가요?
강영환/ 눈과 귀와 발이 있는 곳, 그것은 곧바로 체험일 것입니다. 시인이 체험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되겠지요. 어느 시인ㅇ게나 체험은 가장 소중한 소재일 것입니다. 일상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가장 전달이 쉬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혜정/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시인이 있으신가요? 왜 좋아하시는 건가요?
강영환/ 앞에서 박재삼 시인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가진 성실성, 한 편의 작품을 퇴고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시를 적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퇴고를 하는데 접은 모서리가 닳아 헤져서 조각으로 떨어지기까지 한답니다. 요즘처럼 컴퓨터나 타이핑하기 그 이전이지만 시인이 가져야 할 자신의 작품에 대한 태도로서 귀감이 되지 않을까요. 쉽게쉽게 시를 발표하는 시인들은 없겠지만 그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허혜정/ ‘그리운 치밭목’이 세 권 째에 이르는 지리산 연작시집 중 마지막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리산이 시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합니다.
강영환/ 처음 시작했을 때는 세권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지리산을 계속 다니다보니 지리산에 사는 많은 것들에 대한 조책감이 들어서 그들에 대한 사죄를 하기위해 앞으로 지리산에 관련한 시집 한 권 더 내고 싶고요. 지리산에 관한 서사시 한 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갈망을 했습니다.
지리산 시들은 내게 리얼리즘의 깊이를 더하게 해 주었습니다. 현실을 떠난 작품은 공감을 주기에는 어렵다는 걸 알게 해주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보다 현실감 있게 내가 체험한 것들을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나다 보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리얼리티를 잃지 않기 위하여 산을 계속 갈 것입니다.
허혜정/ 또한 소재를 시화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셨는지? 시집에서 순서를 정하셨는지…
강영환/ 산에 갈 때는 모든 것을 놔두고 갑니다. 시도 놓고 마음도 놓고 오직 육체적 고통을 안고 묵묵히 산을 걸어갈 뿐이지요. 몸으로 산을 체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어폐가 있지만 시를 잊어야 시가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다녀오면 산의 이미지가 가득 가슴에 넘치게 되는 거죠. 그리고는 묵혀서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시집에 순서는 남쪽 지리산, 북쪽 지리산, 동쪽 지리산, 서쪽 지리산 이렇게 분류를 하는 거죠.
허혜정/ 마지막으로 동아대 후배들에게 들려주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강영환/ 전 동아대 경영학과 출신입니다. 그러니 글 쓰는 국문과 후배를 갖지 못했지요. 그러나 전체를 아우르는 입장에서 한마디 한다면 사소한 주제에 얽매이지 말라는 거죠. 시는 여성성이라고들 하지만 더 깊고 더 높고 더 먼 의미를 천착하는 버릇을 가지는 것도 좋은 시를 쓰는 한 방편이 아닐까요. 그런다고 주제를 너무 앞세우지는 말고…
백종미/ 시론의 첫 시간: “시란 00000 이다”라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의“ 시란 0000이다”라고 정의를 내리신다면.
강영환/ 시를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체험적 시론이 되기 때문이지요. 굳이 말해야 한다면 ‘시는 피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피 안에는 선조의 모든 유전자가 들어 있기도 하고 따뜻한 사랑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시는 앞선 선고 시인들의 세계를 안고 가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피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안고 있기도 하죠.
백종미/ 선생님의 시 관점은 모방론, 표현론, 효용론, 구조론ㆍ존재론 어디에 해당하시는지?
강영환/ 딱히 어느 관점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 것들을 조금씩 거의 다 수용하기 때문이지요. 조심스럽게 그 중에서 비중이 크다고 할 부분은 표현론이 아닐까 쉽네요.
백종미/ ‘그리운 치밭목’을 읽으면 지리산에 대한 사랑… 아니 연모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에게 지리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강영환/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젊은 아내를 팽개쳐(?) 두고 (표현이 이상해졌죠) 들어가는 산이었으니까 아내보다 더한 연인, 애인, 그들과 나누는 불륜, 우정, 애증과 분노 이런 복합적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나의 거대 공간일까요 아니면 소우주일까요. 그곳에서 배우고 느끼고 사는 행복이 가장 갖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내 고향이 지리산을 안고 있는 산청이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향수도 많이 작용한 것 같아요.
백종미/ 시집 그리운 치밭목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앉을 자리][그리운 치밭목][은자의 섬][눈산에서] 제일 기억 남습니다. [그리운 치밭목]에서 마지막 연에서 “아버지가 그리운 사생아”이 부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를 가지고 쓰셨는지…
강영환/ 아들이란 표현은 시를 의미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불륜을 통해 낳은 아이이고 그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지리산입니다. 지리산은 언제나 떨어져 있고 시는 그 지리산이 늘 그리운 것입니다. 어찌 보면 깊은 짝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백종미/ [은자의 섬] 시의 어떤 배경이 있는 것 같은데요... 너무 궁금합니다.
강영환/...
백종미/ 시를 쓰는 작업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가 궁금합니다.
강영환/ 앞에서 말했듯이 종교 이전이라고 했습니다.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종교인데 그 보다 더 앞선 생각이 시라는 거죠. 시는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신의 소리를 받아쓰기하는 것이라 생각하죠. 머리나 가슴을 번쩍이며 지나가는 칼날같은 에스프리를 순간 포착하여 백지에 받아쓰기하는 것 그것이 시 쓰는 작업이라고 볼 때, 시인은 기다리는 일이 제격이지요. 언제 지나갈지 모르는 심상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머릿속을 비우고 가슴을 비워 두는 일이 시 쓰는 일이지요. 그러기에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시를 생각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은 지치지도 않는가 봅니다. 30여년을 기다리고도 다시 또 기다릴 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백종미/ 개인적인 질문 2가지를 할까 합니다. 제가 지금 제2의 성장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도 그런 때가 있으셨는지… 만약 있었다면 어떻게 지혜롭게 보내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강영환/ 어렵고 힘든 것이 성장통입니다. 처음 고등학교 때 왜 사람은 사는가? 라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몇 달간 계속된 물음에 대한 답이 생각나지 않아 몸도 아프고 성적도 떨어져 형편없이 되었지요. 책도 읽혀지지 않았고 만사가 귀찮은 것, 그것이 첫 번째 찾아 온 성장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40에서 50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불어 닥쳤는데. 센티멘탈해져 모든 게 슬퍼 보이고 이뤄 놓은 것 없는 나 자신이 미워 죽었지요. 그때 필요한 게 친구였습니다. 노래방에도 같이 가주고 산행도 함께 해주고 그런 부분에서 지리산 또는 여타 산들은 힘든 과정을 벗어나게 해주는 벗이었습니다. 다른 일을 찾아 몰두해 보는 것도 성장통을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백종미/ 선생님이 생각하는 “친구란”
강영환/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좋은 친구를 가질 수 있는 요건입니다. 서로 나누는 마음이 더 클 때 아름다운 우정이 되는 것이죠. 멀리 있어도 늘 마음이 가는 친구,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가지 않는 친구, 이제 나이 들면 그런 경계심이 사라지게 되는 거죠. 나이 들면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어렵다고들 하죠. 그래서 고등학교 때 친구가 제일 친한 친구로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백종미/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시는지?
강영환/ 바라는 바가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한편이라도 내 시를 읽어 본 독자들에게 욕심이랄까 그런 것이 남아 있다면 이웃을 늘 생각하고 열심히 시를 탐구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백종미/ 강영환 시인께서는 ‘산 시’ 에 명명작업을 한다고 하셨는데 대표적인 예 또는 구절을 추천해주세요.
강영환/ 제가 명명 작업이라고 한 것은 <시에서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상식적인 사물이나 위치의 이해가 아닌 내 자신의 특별한 의미를 갖다 붙임으로서 그 사물이나 장소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겠지요. 그렇게 볼 때 내 ‘산시’에 나오는 대부분의 위치장소나 사물들이 거기에 해당 된다고 보지요.
아주 흔하게 만나는 어떤 시에서도 다 그렇습니다만 시는 명명 작업이 잘 되어야 좋은 시가 되는 것이지요. 내 ‘산 시’에서 예를 하나 들자면…, 아주 흔한 일이지만
이슬에도 깎이는 고개가 있다
흙과 돌이 닳아서 낮아진 길
허가 없이 산에 들어 오래 잊힌 길은
달빛 아래 낮아지지 않았다
광대골 오르막 숲 그늘 속을
음정 바람은 수월하게 넘어 가도
다른 길이 없어서 화개나루
천년 소금이 주저앉은 눈물이
달빛에 그을려 질기기만 하다가
하얀 이슬로 마루턱에 내린다
「소금길―벽소령」전문
첫 행에서 고개에 대한 새로운 명명은 지리산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벽소령이라는 고개를 <이슬에도 깎이는 고개>로 나만의 해석을 갖다 붙이는 것이지요. 그런 방법으로 이 시를 해석해 나간다면 벽소령이라는 고개는 시인 나름의 해석으로 새롭게 갖다 붙인 이름이나 별칭이 바로 시가 되는 것입니다.
백종미/ 강영환 시인께서 제일 애착이가는 시중 ‘황씨의 카메라’는 어떠한 시입니까?
강영환/ 내 시‘황씨의 카메라’는 부조리한 현실, 단절의식을 구체화했다고 생각합니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의 의도와 그것을 현상한 사진을 보는 사람의 시각 차, 그런 것이겠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간격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특히 80년대 초에 나타난 시각차에 의한 엄청난 현실들, 광주민주화 투쟁이나 그것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보수 정권과 진보의 대립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도 그런 시각차를 좁힐 수 없기 때문이죠. 그 시는 첫시집 ‘칼잠’(1983년 발행)에 실린 작품으로 80년대 초반에 씌여진 작품입니다. 그 시대의 단절의식, 또는 갈등구조를 카메라라는 문명기기를 통해 구체화 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