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검사의 정도관리 그리고 두 병리사
‘이 하나의 작은 책이 검사결과를 생명으로 하는 우리 임상병리사들에게 다시없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검사결과의 신뢰도는 물론 수준을 향상시키고 정도관리를 더욱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984년도에 발행된 ‘임상검사의 정도관리’ 교재의 머리말에서 ‘불철주야 직접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김약수 선생님을 위시한 이주섭, 서덕규 선생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는 대한임상병리사협회 학술부의 인사말을 접했을 때는 임상화학 검사실의 책임자가 막 되어서 책장을 정리하던 2008년도 무렵으로 기억한다.
불철주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그 간절한 바램은 무엇 이였을까? 그 궁금증으로 교재를 살펴보면서 ‘마음이 통하는 검사’ 등을 비롯하여 임상검사실에서 필요로 하는 검사자의 자세와 태도를 감동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후 살펴본 웨스트가드 박사의 ‘Basic Q.C Practices’ 에서 ‘그대가 중요한 이유’ 등 에서도 그 일맥상통하는 태도를 발견하고서 더욱 선배님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궁금해졌다.
김약수 선생님은 1948년 해군에 입대하여 1952년 전쟁 통에 진해 해군병원에서 부상으로 입원치료를 받는 동안에 당시 해군 의무기술직 중에 임상검사 기술을 배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운명적인 생각으로 지원하여 검사실로 배속을 받게 되었다.
이때 검사 업무에 능숙한 22세의 서덕규 선생님을 만났다. 비록, 본인은 계급도 높고 나이도 많은 처지지만 업무 초년생임을 마음에 새기고 되물어가면서 업무를 배워 나갔다. 진심 어린 태도에 서덕규 선생님이 전폭적으로 신뢰하였고, 이후 1954년 해군 군의학교 고등반 임상검사 전수반 교육과정에서 서덕규 선생님이 1등, 김약수 선생님이 2등으로 수료를 하였다. 얼마 지난 후에 서덕규 선생님은 서울의 성모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였고, 김약수 선생님은 제대를 앞둔 시점인 1965년 4월에 보사부에서 실시하는 제 1회 의료기사 면허시험에 나란히 응시하였고, 두 분이 동점으로 수석 합격을 하였다.
김약수 선생님은 이후 미국 Brown 대학의 Dept. Medical Bio-Med Science 에서 해군 시절에 인연을 맺은 차승만 교수를 따라 3년간 연구 업무를 돕다가 서덕규 선생님이 새로 개원하는 필동 성심병원의 임상병리과장으로 가시는 안부호 교수님를 따라 이직을 하게 되면서 서덕규 선생님의 추천으로 서울의 성모병원에서 정년까지 봉직하였다. 서덕규 선생님은 이후 서울아산병원에서 정년퇴임 후, 김약수 선생님의 추천으로 SCL 기술이사로 봉직 하였고, 김약수 선생님도 이후에 SCL 검사실에 합류함으로서 병리사 인생의 시작과 마무리를 같이 하였다고 들었다.
요약하자면 진심으로 배우길 원했고, 젊은 날 좋은 선생이자 동반자를 만나서 선의 경쟁을 했다. 긴 세월 서로가 떨어져 있었지만 그립고 신의로 대한 것처럼 느껴진다. 대한임상병리사협회 초창기에 두 분은 여러 면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고 특히, 국시를 비롯한 학술활동에서 태두를 이루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상검사실에서 정도관리를 논할 때 ‘복잡한 통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일상검사를 하면서 기른 경험과 노력으로 설정한 판단기준이 있으며 이것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하여 공식화한 것이 통계적 방법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험과 노력으로 설정한 판단기준” 그렇다. 태도와 자세는 정도관리의 요체라고 밝히고 있다. 믿음직한 태도와 자세는 신뢰감을 주지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삶으로써 정도관리의 요체를 보여주신 두 분의 선구자께 무한한 존경을 올립니다.
2021.08.7 대한임상화학검사학회장 차경호
첫댓글 우리 학회의 역사적인 의미도 있는 좋은 글입니다. 김약수, 서덕규 선생님, 두 분은 임상화학검사학회 창립 멤버이시기도 합니다. 서덕규 선생님은 작고하시고, 김약수 선생님은 생존해 계십니다(95세). 그리고 이 글은 중앙회 60년사 발간 기념 에피소드에 응모되어 우수상을 받은 글입니다. 차경호 회장님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