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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장군 영정 |
- 저는 상감마마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딸랑~
이러면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갖은 아양을 다 떨어야 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도망다니기 바빴던 이일 역시도 이때쯤 해서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기 시작했는데(이때 당시 대장군 자리에까지 올라서게 된다)
- 나는 왕실과 조정을 위해 이 한 목숨 다 바칠 것이요!! 나의 이런 마음은 열성조가 다 알 것이외다 !!
이런식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었다.
의병들은? 말 그대로 부대를 해산하고 한번 살아보겠다며 바짝 엎드리거나 산으로 도망가야 했었다. 왜 그랬을까?
그렇다. 바로 선조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선조의 두려움
선조...그 인간 두려움이 많았다. 아들인 광해군에게 쏠리는 권력의 미묘한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 임진왜란 그 난리통에서도 심심하면 양위(讓位)를 하겠다며 쌩쑈를 부려 정부 기능을 올스톱 시켜버리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자 여기서 일단 접고 들어가야 하는 부분이 선조가 서울을 포기하고 몽진(蒙塵 :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다)길에 오른 것에 대하여 선조를 욕하는 의견이 있는데, 이 부분은 선조의 판단이 옳았다 할 수 있겠다. 만약 선조가 끝까지 수도방어를 외쳤다면 조선왕조는 그때쯤 끝이 났을 거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 당시 왜군들은 서울을 함락하면 전쟁은 끝이 난다는 생각으로 올라갔다가 선조가 도망간 것을 알자 허탈감에 휩싸였다. 그들의 전쟁 상식으론 수도가 떨어지면 전쟁은 끝이고, 일국의 수장 정도 되는 이라면 수도성벽을 베개삼아 결사항전을 하다가 아싸하게 사라지는 것이 정당한 모습인데, 선조는 그런 그들의 일반상식을 깨버리고 도망을 가 버렸기에 왜장들은 뻥진 표정으로 임진강 너머를 바라봐야 했다. 다만, 몽진 자체는 올바른 판단이었다 해도 그 각론에 들어가 몽진 방법론쪽에선 욕을 얻어먹을 만 하긴 하다.
어쨌든 임금이 종묘와 사직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는 자체는 정권의 정통성에 치명적 타격을 주는 행위였고, 몽진의 첫 번째 코스였던 평양땅에서 백성들은 임진왜란 터지고 처음으로 선조의 권력을 위협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던졌다.
- 세자를 왕위로 올리시고, 상왕으로 물러나십시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분조(分朝)를 이끌고 나간 광해군이 백성들의 신망을 얻게 되자 선조는 예의 그 ‘양위’ 발언으로 광해군을 괴롭혔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눌수 없는 것이라 했던가? 뭐 젊은 왕세자에 대한 권력의 쏠림... 레임덕에 대한 견제로 늙은 왕이 왕세자를 때려죽이거나 기타의 제재조치를 취하는 건 다반사이니 광해군에 대한 견제 조치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만한 사안이라 할 수 있겠다.
자, 광해군의 위협은 ‘혈육’이라는 특수관계이니까 그렇다 쳐도, 그 외의 문제가 새로이 도래하게 되었다. 바로 ‘전쟁영웅’의 등장이었다.
왕이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간 사이에 그 밑에 있는 장군들이 목숨걸고 나라를 구하고, 이름모를 의병장들이 백성들을 규합해 왜군과 맞서 싸운다... 중앙정부로선, 아니 선조로선 그리 기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뭐 임진란 초기 때에는 찬밥 더운밥 가릴 겨를도 없었고 후일을 기약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서울을 탈환 한 후 환도(還都)하고, 명군도 오고, 관군도 재정비 되면서 이야기가 묘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의병들의 활동은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정의 내리자면, 임진란 초기에 의병들의 활동이 없었다면, 조선이란 나라의 장래를 기약할 수 없었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일단 왜군들은 겨우 30만... 그 중에 임진란 1차 출병 때 나갔던 병력이 16만 조금 안되는 병력이었는데, 이 병력으로 조선을 먹겠다는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였다. 이 부분은 ‘롬멜’이 끝나고 다음 연재로 나올 ‘임진왜란’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당시 일본군이 부산포를 거쳐 동래, 문경세제를 넘어 한성까지 쭉 따라 올라가는 진격로와 점령지는 말 그대로 ‘선’의 결합이지, 면적의 확보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 교통로이자 보급로를 의병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되었고, 후방을 방어하기 위해 왜군들은 전방에 나갈 병력을 쪼게야 했고, 보급로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기에 보급수송에 상당수의 호위병력을 붙여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여기에 수륙병진정책으로 서해안을 돌아 보급과 진격을 병행하려 했지만, 이걸 막은 것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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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 곽재우 영정 |
그렇다. 선조가 버린 조선을 의병장들과 몇몇의 전쟁영웅들이 구해낸 상황이다.
눈치빠른 권율이나 이일 같은 장군들과 곽재우 같은 이들은 몸을 사리기 시작했지만, 이순신은 말 그대로 고지식한 원리원칙주의자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좌천이 되던 백의종군이 되던 무덤덤하게 눈만 껌벅거리며, 조정의 처사만 기다리겠다며, 일신의 안위에 대해 무감각했던 것이다.
선조가 이순신을 죽여야 할 이유는 충분했었다. 선조가 이순신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명량해전 직후였을 것이다. 칠천도에서 원균이 대패하고, 이순신이 한산도 수영에서 3년동안 정성스레 조련한 조선수군의 대부분이 날아가 버린 상황에서 불과 12척으로 130여척의 토도함대를 박살낸 명량해전... 거북선도 없었던 그 상황에서 이순신은 왜군을 박살냈고, 이순신의 승전보와 함께 백성들이 다시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이순신은 수개월만에 수십척의 전선을 다시 건조하였고,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미와 전쟁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하였다. 불과 수개월만에 조선수군은 부활하였고, 노량해전에 이르러선 한산도 시절의 조선수군 규모를 상회하는 규모로 다시 조선수군을 키워냈던 것이다.
선조가 보기엔 모골이 송연해질만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당시 민심은 이순신이었다. 한산도 시절에도 백성들은 그에게 모였고, 명량해전 이후로도 백성들은 그에게 향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살펴봐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백성들 중 ‘전라도’ 백성들이 이순신을 따랐다는 점이다. 전라좌수사 시절부터 전라도와 인연을 맺은 충무공이 아니던가?
(무슨 지역감정을 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 오해마시길 빈다. 원래 물산이 풍부해 예향의 고장으로 불리었던 전라도. 곡창지대이며 물산의 중심지라 어쨌든 전라도만 먹으면 전쟁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는다는 계산하에 왜군은 죽을둥 살둥 진주성을 치려고 덤벼들었지만, 김시민장군이 6일간에 걸친 사투끝에 왜군을 격퇴해 전라도를 지켜냈다. 임진란을 이길 수 있었던 승리 비결은 진주성에서 육군을, 바다에서 수군을 막아내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시킨 덕이라 할 수 있다.
덕분에 정유재란때 풍신수길은 모든 병력을 다 이끌고 가서라도 진주성을 함락하라고 명했고, 제2차 진주성 싸움은 왜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진주성에 대한 이야기도 할 이야기 많은데, '전쟁이바구 임진왜란 편'에서 찐하게 해보겠다. 롬멜 끝나길 기다리시길...어여 롬멜 끝내야 하는데...)
어쨌든 전라도가 지켜지는 것 까지는 좋은 일이었지만, 전라도가 순식간에 조선의 ‘병참기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냥 먹고 살기도 힘든데, 전쟁물자와 군량미를 충당해야 했다. 전라도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그 당시 왜군의 침략을 받은 지역보다 훨씬 피폐해졌다. 농사는 농사대로 지어야 했고, 장병은 장병대로 징병되어 끌려갔고, 물자는 물자대로 갖다 바쳐야 했던 전라도 백성들은 말 그대로 수탈의 극한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이런 피폐해진 민심속에 전라도민들의 희망으로, 아니 조선백성의 희망으로 이충무공은 자리잡은 것이었다.
김덕령의 죽음...
충청도에서 이몽학이 민란을 일으켰다. 민란을 일으킬만 했다. 아니 민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선조 집권의 조선은 부정과 무능과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고, 임진란이 터지며 이미 선조는 그 정치생명을 다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임진란이 끝나고 나서 조선사회는 극도로 경직된 유교문화로 치달았다는 점이다. 갑자기 효와 예 충을 더 강조하였고, 열녀와 효부, 효자를 띄워주며 사회적인 분위기를 엄격한 성리학을 기초로 한 유교엄숙주의로 몰고간 것이었다. 그래야만 정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강한 가부장주의는 이 당시 정치상황의 영향이 컸다.
자 다시 역사를 돌려 이몽학이 민란을 일으켰던 때로 가 보자.
- 나? 내 뒤엔 말이쥐 병조판서 이덕형도 있고, 도원수 권율도 있어...이거 왜이래!! 충용장 김덕령도 나랑 같이 붙기로 했어!!
이걸 누가 믿을까? 믿었다...누가? 선조가. 그는 이참에 김덕룡을 죽이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권율의 명을 받아 김덕령은 병력을 이끌고 이몽학의 민란을 진압하려고 출진하다가, 중간에서 회군하게 되었다. 왜? 이몽학의 민란이 진압되면서 김덕령은 그렇게 다시 진주로 돌아갔다가 진주목사 성윤문에게 체포당한다. 그 이후에 김덕령은 20일 동안의 혹독한 고문과 문초끝에 억울함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사사된다.
선조는 김덕령을 시범 케이스로 잡았고, 그 효과는 확실하게 드러났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은둔자로 변했고, 선조를 위협하던 행주대첩의 권율이 알랑방구를 뀌기 시작하였다. 위협이 되던 수많은 다른 의병장들이 저마다 몸을 사리는 판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걸림돌이 바로 이순신이었다.
무술년 11월 19일 새벽의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은 언제나,
-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라는 클로징멘트와 함께 끝이나는 역사였다. 우린 그렇게 배워왔다. 일단 이 점에 대해선 할 이야기가 많다. 과연 이순신 장군은 적탄에 의해 돌아가신 것일까? 일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알아보자
이것이 조총... 여기에 맞아 돌아가셨을까?
1> 이순신 장군 위장병 악화설
거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회자되는 사망설인데,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수 차에 걸쳐 속이 안좋다, 위산이 쏠린다 등등의 글을 남기셨다는 걸 근거로 이순신 장군이 위궤양이나 위산과다로 속병이 도져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심각하게 들었을 때는 타임머쉰이 있다면 겔포스나 몇박스 사 들고 과거로 달려가 전해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뭐 농담이었다.
(솔직히 이순신장군께서 위장병 걸릴만 하시다. 워낙 원리원칙에 충실하시고 공명정대한 분인데, 주변에서 태클 들어오지, 툭하면 시기하고, 조정에선 옆구리 찌르고, 왕이란 녀석은 어떻게 한번 죽여버릴까 폼잡고 있지, 잡아다 두들겨 패고, 4성장군을 훈련병으로 강등시켜 참전 시키질 않나, 그것도 모잘라 호시탐탐 이순신 장군을 역모로 몰아넣을까를 고민하고 앉아있으니 말이다...차라리 왜놈들하고 싸우는게 더 속편하셨을 것이다. 위장병 충분히 걸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2> 이순신 장군 자살설
앞전에 언급한 숙종대의 문신 이민서(李敏敍)가 주장했던 내용처럼 김덕룡의 죽음과 선조의 경계에 의해 이순신이 죽음을 택했다는 것인데,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선 생각할 부분이 좀 있다.
첫째, 이순신 장군이 총탄을 맞을 상황이었냐는 것인데, 일각에서 이순신장군은 원거리포격전을 위주로 한 아웃복싱 스타일을 즐겨 구사한다는 점.
둘째, 이순신 장군은 지금으로 치자면 해군 참모총장 정도의 위치인데, 그렇게 선두로 나설 수 있느냐는 주장.
셋째, 이순신 장군이 이전에 있었던 사천해전에서 선두에 서다 총탄을 맞았고, 그에 대한 자책성 멘트도 많이 날리고 난중일기에도 기록을 했다는 점. 즉, 다시 그렇게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의 이런 점을 들어 이순신 장군이 일부러 적의 총탄을 기다렸다는 것인데, 과연 그랬을까 싶다....일단 이순신 장군이 원거리 포격전을 즐겼다는 건 사실이다. 문제는 노량해전의 처음 진행은 왜선들을 관음포쪽으로 몰고들어가는 몰이형태였고, 후반부로 갈수록 뒤엉켜서 접점으로 들어간 난전형태로 빠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둘째, 이순신 장군이 선두에 서서 기함을 돌출시켰다는 점인데, 이순신 장군의 총 18차례에 걸친 함대 지휘 중 이순신장군이 선봉에 서서 독전을 한 전투가 3번 있었는데, 첫째가 사천해전...이때 이순신 장군이 조총에 피격 당했다. 두 번째가 앞에서도 언급한 명량해전이었는데, 이때는 뭐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독전이 필요했던 때이니 넘어가자. 그리고 노량해전인데, 이때의 경우도 임진란 7년 전쟁기간동안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해전이고, 관음포쪽으로 몰아넣어 섬멸전을 하는게 주 전략목적이었기에 이때에도 선봉에서의 독전이 필요했으리라 본다. 즉, 이때의 경우도 선봉에 설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공교롭게도 3번의 선봉지휘 중 2번의 조총공격을 받아 두 번다 총탄에 맞았다는 사안이 터졌다는 것이다. 자살로 치기에는 주변상황이 별로 안 도와주고 있다.
그러나 자살설에는 이미 충분한 동기 제공이 앞전에서 거론되었다 할 수 있겠다. 살아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장렬히 산화해 그 이름을 만고에 알리겠다는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이런 자살설의 경우는 [선조]란 녀석이 얼마나 저열하며, 우리의 민족적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내외적으로 핍박받아 왔는지를 잘 표현해 주는 ‘사망관련 음모설’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본 필자 역시 자살설에 대해선 나름대로 수긍이 가는 것이, 고의든 고의가 아니었든 이 충무공 스스로도 노량해전 이후에 어떠한 방식이든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덮칠거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무술년 11월의 그날 조선의 백성들에게 유일하게 신망을 얻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었다. 백성의 신망을 한번 더 받을때마다 죽음에 한발자국 더 다가가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물론 이순신 장군의 그동안의 모습, 즉 부하들의 목숨을 최대한 존중하던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역사에서의 평가와 화려한 최후(!)를 위해 1만 7천 장병들의 목숨과 120척의 조선수군을 걸었다는 건 임진란 7년동안 보여준 이순신장군의 행보와 비교해 볼때 약간 문제가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더 걸리는 것이 노량해전은 조선 수군 혼자의 단독작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비록 소수지만 명나라 수군 2,600명이 63척의 전투함을 끌고 왔던 것이다(배는 많은데 인원이 작은 건 명나라 수군이 끌고온 배가 작았다는 거겠지?)
여기서 더 웃기는 것이 명나라 애들이 잘 싸웠냐하면 또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인데, 노량 앞바다에서 이 녀석들은 조선수군의 발목만 잡은 인간들이었다. 명나라 애들이 포위되었을때 조선수군이 이걸 구해내느라 뺑이를 쳐야 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명나라군을 구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이 기함을 움직였고, 기함의 노출과 동시에 왜군들이 기함에 대한 집중사격으로 이충무공이 흉탄에 맞았다는 주장이 ‘은봉야사별곡’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명나라 장군이 발목을 잡아 이순신 장군의 기함인 판옥선이 돌출되었고, 이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적탄 앞에 노출되었다는 주장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다시 설명할 부분이 은봉야사별곡을 쓴 은봉 안방준이 임진랑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일단 조정과 선조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상대적으로 이순신에 호의적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진린을 위해 부하장군의 공을 그쪽으로 돌려주고, 따로 장계를 띄워 조정에 보고할 정도로 이순신은 명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그 나름의 처신을 보여주었는데, 진린이 포위된 상황이라면 이순신으로선 선택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과연 이순신장군은 자살했을까?
3> 이순신 장군 은둔설
갑론을박이 많았던 부분이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이 거의 끝날 무렵 작은 협선을 타고 해역을 빠져나가 산으로 도망가 숨었다는 주장이다.
일단은 이충무공 자신이 수차에 걸쳐 전쟁이 끝나면 시골촌부처럼 살겠다는 걸 수차에 걸쳐 밝히셨다는 점, 아들이었던 면이 정유년(1597년) 9월에 아산에서 전사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때의 상심으로 전쟁에 대한 환멸과 함께 낙향에 대한 희망을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로 자주 회자되는 것이 바로 이순신 장군 분묘의 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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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에 있는 충무공의 묘 |
무술년 11월 19일 새벽녘에 왜군의 흉탄에 명을 달리 하신 이순신 장군의 시신은 이로부터 20일 후에 아산으로 옮겨지게 되고, 장례는 다시 이로부터 80일이 지난 이듬해 2월 11일에 치러진다. 문제는 1614년 다시 한번 장례를 치루었다는 것이다.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일단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보고가 선조에게 올라간 것이 1월 23일날이었고, 이때벌써 이순신 장군의 추증(追增)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12월 4일날 우의정에 증직 되었다. 여기에 더해 나라에서 이충무공의 장례비용을 대주었는데도 80일이나 지나서 장례절차를 밟았다는 점은 아무리 봐도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다. 더군다나 15년이 지난 뒤에 묘를 이장할 때 원래의 묘에서 불과 600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장하였다는 사실이 의구심을 자아낼만 한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1599년과 1614년까지의 15년간의 텀을 후세의 사가들은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의 근거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즉,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 막바지였던 무술년 11월 19일날 새벽에 전투가 거의 종결지점에 이르러서 배를 타고 기함에서 탈출, 그 이후로 명목상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죽었고, 안빈낙도를 즐기는 인간 이순신이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내다 1614년에 그 천수를 다 누리며 생을 끝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힘을 더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순신장군의 측근들이 노량에서 ‘전사’하였다는 것이다.
조방장 이영남과 돌격당 이언량 등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전쟁영웅으로 그 이름을 떨치던 이들이 이때 ‘전사’를 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노량에서 조선수군의 피해가 격심하였다면 이해 가능한 대목이었겠지만, 노량해전은 말 그대로 섬멸전을 목적으로 하였고, 조선 수군 역사상 최대규모의 해전이었다는 점, 당시 해전이 끝나고 조선수군의 피해가 왜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하였다는 점등을 본다면 이들 전쟁영웅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르러선 뭔가 의구심이 들법도 하다.
물론 왜군들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덤벼들었고, 자칫 잘못하면 조명 연합군이 역포위될 위험성도 있었다. 시마즈의 수군이나, 고니시의 육군이나 이 노량해전에서 필사의 탈출을 위한 최후의 발악을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과연 백전노장들이자 해전에서의 경험이 풍부했던 그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수 있을 상황이었을까?
4> 이순신 장군 전사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그대로이다. 노량에서 이충무공은 선봉에 서서 분전하다가 적탄을 맞고 돌아가셨다는 주장인데, 현재까진 가장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다. 물론 허점도 많고, 그러니까 자살설이니, 은둔설이니 하는 각종 설들이 ‘난무’한다 할 수 있겠는데, 일단 이 이순신 장군 전사설의 맹점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하자,
첫째, 과연 조총탄에 맞고도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클로징 멘트를 할 여력이 있었냐는 것이다. 이부분에 대해선 설명이 가능할 듯 같은데, 이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말은 후세에 각색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조총의 위력이란 것이 참나무 방패 3장과 쌀 두섬을 뚫고 들어가 사람을 죽일 위력인데 말이다.
여기서 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이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말이 나오는 출처가 이충무공 행장록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이분(李芬)인데, 이 사람이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완의 친형 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노량해전때 참전했을까? 아니다. 참전 안 했다.
그럼? 당시에 이순신 장군을 모셨던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았을 때 이순신 장군을 호종하던 인물은 아들 희와 조카 완(이분의 동생) 그리고 종인 김이 였다. 이 세사람이 급박한 상황 속에 이순신 장군을 방안으로 모신다음 이순신 장군의 유지를 받들어 조명 연합군 총수 2만에 육박하는 대병력을 지휘했다??
둘째, 완과 희가 지휘를 했다손 치더라도 과연 이순신 장군의 기함에 있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라는 대목이다.
판옥선 평균 승선원이 120~188명인데, 이중 노군이 56~120명이라면 전투요원은 68명 수준, 이중 방포장 요원이 23~40명수준이라면, 망루 위와 갑판 위에도 꽤 많은 인원이 있었다는 결론이다. 이건 평균적인 판옥선의 경우이다. 그렇다면 기함의 경우에는 어떠할까?
전라우수영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장선에는 항상 90명의 기를 든 나졸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이순신이 있던곳에도 60명의 군사들이 있었다 한다. 자 그렇다면 최소한 60명의 군사들이 쳐다보는 와중에 전선의 최고 지휘관이 적탄에 맞아 남몰래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고 말하고 조카인 완과 아들인 희, 그리고 종으로 부리는 김이가 다른 군사들 눈을 피해 군사를 지휘했다? 이 부분에서 상당부분 의구심이 들만하다.
일단 이런 의구심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전사설이 은둔설이나 자살설 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첫째, 노량해전의 성격이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란 7년동안 18차례의 해전을 치루는 동안 그때까지 벌였던 전투와 노량해전은 차원이 다른 전쟁이었다. 그 동안의 이순신 장군의 남해 제해권 확보를 위한 기본적인 전략은 출항통제(出港統制)와 협수로통제(狹水路統制) 전략이었다.
출항통제 전략은 일본의 소함대나 길 잃어버린 미아함대 등을 공격해 격침시키는 가랑비에 옷젖기 전략이었다면, 협수로통제 전략은 말 그대로 임진란 자체의 운명을 뒤바꾼 최대의 전략이며, 조선에게 있어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럼 이 협수로통제 전략이 어떤 전략인가? 간단히 말해서 왜의 수군들이 남해나 서해의 수로를 따라 진격하는 걸 좁은 해협을 통제하는 전략이다. 이충무공이 한산도 달 밝은 밤에 하시면서 한산도에 진을 치고 3년 7개월 동안 앉아 있었던 이유가 한산도 앞의 견내량이 천혜의 방어 요지여서 였던 것이고, 명량에서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고 적선을 막아낸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였다.
보면 이순신 장군이 선택한 전략이 공세적인 성격의 전략전술은 아니란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이다. 상당히 수세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일단은 전략전술에 있어서 이순신은 조선해군의 약점은 최대한 감추며 강점에 대해선 최대한 부각시키는 전법을 택했던 것이다.
조선해군의 강점이라면 역시 긴 리치를 활용한 원거리 포격전이었다. 사거리가 200미터 내외이고, 제대로 된 조준사격을 위해선 50미터 정도가 고작인 조총 앞에서 포격전을 한다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순신은 섬멸전의 유혹은 과감히 떨쳐버리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섬멸전을 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접근을 하게 되고, 전공을 위해서 적병의 목을 따서 장계와 함께 올려보내야 하는데, 이순신은 그런 유혹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적선을 격침하고, 적의 수역에 들어가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음엔 미련없이 빠져나오는 히트 앤 런에 일가견을 보여주었다. (원균은 목을 따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보여주었지만 말이다)
조선군의 주포 천자총통
문제는 노량해전의 성격 자체였다. 어찌보면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의 대패와 함께 두 번째로 조선수군 최대 병력을 있는대로 다 끌어모아 공세적인 입장으로 치고 들어간 두 번째의(이순신 장군에겐 최초의) 공격전이었던 것이다.
일단 왜군들도 있는 힘을 다했고, 그들이 노량에서 막히면 그길로 고향땅 밟아보긴 글렀고, 타국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는 생각에 목숨을 걸고 덤벼들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둘째, 노량 해전의 시각이다. 당시 조명 연합수군은 1~3시 사이에 노량에 도착. 4시부터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선들과 일전을 벌렸다. 문제는 어스름 새벽녘에 이르던 무렵을 지나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에 이르러선 난전이 되어 조선수군은 육박전까지 뛰어들게 되었다.
문제는 이 무렵이 되자 왜군들이 돌출된 기함을 향해 집중사격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 해가 떳으니 말이다. ‘이순신과 히데요시’의 저자인 가다노 쯔기오는 이때 이순신이 저격 당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당시 돌출된 기함에 대한 공격...그것도 망루의 지휘부에 대한 집중사격은 당연한 상식 아니냐는 것이다. 맞다 맞는 말이다. 나라도 적의 지휘부를 공격 할 것이다.
즉 이순신 장군이 왜병의 적탄에 돌아가신건 그닥 ‘신기한’ 일이 아니란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전사설은 옳은 것일까?
비운의 명장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은 사후에 선무일등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죽은자에겐 어떤 명예라도 아낌없이 내줄수 있다는 것이었을까? 이후 인조21년(서기1643년) 우리가 알고 있는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충무란 시호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본 필자가 앞전에 떠들었던 이순신 장군의 사망에 관한 여러 ‘설’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학계 관계자들이 한번쯤은 제기한 문제를 한번 정리한 내용들이니 그닥 특이한 점이나 내세울만한 새로운 이론은 없다. 그런데도 지금 이순신 장군 탄신일을 맞이하여 이렇게 묻혀졌던 이야기들을 들고 나온 이유는, 우리 역사에서 몇 안되는 영웅으로 기록되는 이순신 장군의 죽음 이면에 가리어진 남루한 정치의 때를 이야기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산도에서 3년 7개월간 조련한 병사들과 둔전을 해서 거둔 군량미 9,914섬, 초전법으로 양산해낸 화약 4천근과 300문의 화포를 고스란히 후임인 원균에게 넘겨 준 이순신... 그가 한산도에서 일궈낸 전력과 군수품만으로도 이순신의 죄가 무엇이든 간에 충분히 그 죄를 감해줄만한 내용이었다. 당시 조선의 정세 하에서 4천근의 화약과 300문의 화포가 어디였던가? 거기에 그가 지난 임진란때 보여준 공은 또 무엇으로 말해야 할까? 단순히 요시라의 이간계에 넘어갔다 하기엔 의혹이 남는 부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웅의 최후는 비참하다. 특히 살아남은 영웅의 삶은 죽음을 친구로 한 아슬아슬한 줄타기 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 이순신은 이런 정도가 훨씬 심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이 그러하였고, 용렬한 군주였던 선조의 콤플렉스가 또 그러하였다. 이순신은 어차피 노량해전이 끝나고 나면 얼마못가 죽을 운명이었지 모른다.
명량해전 직후 백성들은 이순신을 군신(軍神)으로 떠받들었고, 전란의 와중에 민중의 희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선조로선 불안했을 것이다. 이몽학의 민란이야 시골촌부의 일탈적인 에피소드로 볼 수 있었겠지만, 이순신의 존재는 이야기 자체가 달라지는 사안이었다. 오죽하면 학계 일각에선 전쟁 직후 이순신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했다는 ‘이순신 반란설’까지 들고 나왔을까? 이순신은 그저 불씨만 되어주면 되었던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의 말처럼 이순신은 조선의 조정과 왜군들 사이에 끼어 두개의 적과 싸워야 했던 존재였다. 선조의 용렬함 덕분에 전후의 공신책봉에서 원균과 같은 일등공신 서열에 올라야 했던 이순신...선조는 이순신을 깍아내리기 위해 원균을 들고 나왔고, 지금의 우린 이순신을 올리기 위해 원균을 깍아내리고 있다.
(선조의 용렬함을 보여준 사례 중 하나가 임란 후의 공신 책봉에 있어서이다. 선무일등 공신 3명은 권율, 원균, 이순신 인데, 셋다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원균은 이등으로 책봉되었는데, 선조가 일등으로 올렸던 것이다. 임란 7년동안 공을 세운 이가 한둘이 아닌데, 선무일등공신이 고작 3명이라는게 말이 되는가? 더 웃긴건 이름 자체도 웃긴 호종공신의 녹공 건인데 선조의 몽진길을 따라나섰다는 이유로 60여명이 넘는 이들에게 공신자리를 내려 준 것이었다. 1594년의 송유진의 난이나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던 이유는 이 녹공책봉 과정만 봐도 이해가 간다. 선조는 임금이 되어서는 안될 자였다)
정치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다만 그 영웅은 죽어있는 영웅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는 것일까? 선조는 이순신을 두려워 했었고, 이순신은 자신을 노리는 두개의 적과 맞서싸우며 차라리 자살을 택하던가, 산으로 도망을 가던가 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만약 '전사'가 이순신장군 죽음의 정답이라면, 그 쓸모를 다하고, 험한꼴 당하지 않게 명예로운 죽음을 안겨준 하늘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이야기일 것이다.
이충무공 탄신일날 이것저것 잡생각이 많아져 글을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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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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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이덕일. 이화근 저/ 김영서/ 1999
징비록/ 유성룡 저 김흥신 역/ 서해문집/ 2003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정광수/ 정신세계사/ 1998
한민족 전쟁사/ 온창일/ 집문당/ 2001
칼의 노래/ 김훈/ 생각의 나무/ 2001
임진왜란과 토요토미 히데요시/ 국립진주 박물관/ 오만, 장원철 공역/ 2003. 12
조선역사 바로잡기-가람역사 41/ 이상태/ 가람기획/ 200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