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도신스님 입니다.
1집 ‘도신의 국악가요’ 10만장 판매, 노래하는 5집 가수 '도신 스님' |
3500명의 지역민과 함께하는 ‘제1회 서광사 봄맞이 산사음악회’ 개최 |
|
백보국 기자 4572@inewspeople.co.kr |
|
지난 5월 10일 충난 서산시 대한불교조계종 서광사(http://seogwangsa.or.kr)에서는 서산 시민을 위한 ‘제1회 서광사 봄맞이 산사음악회’가 개최 되었다.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산사음악회를 서산지역 대표 포교당인 서광사가 최초로 주체하여 불자들만이 아닌 서산 시민과 함께하는 동지역의 새로운 포교의 장을 만들었다.
제1회 서광사 봄맞이 산사음악회
|
|
|
|
▲ 서광사 도신 주지스님 |
| 서광사를 뒤로 돌아오는 길, 도신스님이 전해 준 그의 일집 앨범 ‘도신의 국악가요’을 틀었다. 노랫말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 닿는 순간 차안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맑고 슬프며 아름다웠다. 도신스님의 험난했던 삶의 여정에서 배운 수많은 이야기들은 오늘도 기타소리와 함께 세상의 많은 이들의 귓가에 울리며 포교로 다가가고 있을 것이다. 지난 5월 불교가 직접 사회에 다가가야 한다는 취지로 거행된 ‘제1회 서광사 봄맞이 산사음악회’에는 서광사 주지인 도신스님과 연합합창단인 서광사 룸비니(지휘 유훈석), 수원 가르빙가, 첼로앙상블, 서광사 유치원 합창단을 비롯해 대중가수인 V.O.S, 김현정 및 타악 뮤지컬 공연팀인 야단법석, 선무용단(이영빈 외), 지역 명인 김배옥, 조명애, 박만진 시인이 출연 하였다. 도신스님은 “처음 주위에서는 산사에서 대중가수를 부르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스님들도 있었다. 허나 서산지역은 그동안 불교의전파가 미흡한 곳으로 이를 계선하기위한 방안으로 본 행사를 강행 하였다. 우리는 서산 시민들에게 장소를 제공해 주는 것 뿐 이다. 산사음악회는 그동안 불교전파에 미흡했던 서산지역민과 소통할 수 있는 문화의 장으로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과거처럼 절제를 통한 사찰의 권위만을 내세워서는 지역민과 소통할 수 없다. 먼저 다가가는 사찰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정신의 핵인 행복감을 좀 더 쉽게 전달해 줄 수 있고 이는 곧 진정한 포교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도신스님의 뜻은 제1회 산사음악회 시행결과에서 나타났다. 본 행사에는 3500여명의 관객이 몰렸다. 이후 지역민이 사찰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연히 바뀌었고 이는 서산 시민을 위한 음악회로 불자들만의 행사가 아닌 지역민에게 다가가는 포교의 장으로 탈바꿈 된 것이다. 이외에도 서광사는 지역민과의 소통 프로그램으로 이주여성들을 위한 한글교실, 다도교실, 서예교실 등을 무료로 제공해 주고 있다. 또 외국인들을 위한 팀플스테이 운영으로 전통사찰생활(전통복장, 악기, 음식 등)을 배우고 참여하는 문화체험을 비롯해 불교음악을 접할 수 있는 불교명상을 통한 소리 선을 통한 운영 프로그램 시행·준비 하고 있다. 특히 도신스님과 함께하는 기와 소리로 전하는 ‘참지혜’는 ‘첫째, 사찰에 머물며 자연과 함께 휴식을 취하자. 둘째, ‘참 나’를 발견하고 삶의 법칙을 찾자. 셋째, ‘불교문화’를 체험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밖에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실질적 예절과 체험 중심의 인성교육 실현(다도교실)하고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는 인간교육 강화하여 잠재력 개발을 위한 창의성 교육(바둑교실)을 실시하는 ‘서광유치원’을 부설 운영하고 있다.
‘도신이가 노래 한 대요’ 도신스님이 노래를 하게 된 것은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 되었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생활이 어려웠던 도신스님가정은 스님을 큰집으로, 세 명의 여동생은 해외로 입양 보내어 모든 가족이 흩어지게 된다. 1969년 8살 대던 해 대가족으로 형편이 어려웠던 큰집에서 스님은 다시 충남예산 수덕사로 보내지게 된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스님은 사찰에 들어오게 되며 이질적인 곳에서 살며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계를 접하게 된다. 스님이 거주하던 정혜사 암자에는 전기는 물론 전화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 동자승은 산 아래의 큰절에서 1.5kg가 넘는 쌀을 직접 지게로 지어 오른다. 헤어진 어머니가 그리워 울면 스님들의 꾸중을 듣고 이불속에 숨죽여 엄마와 형제에 대한 그리움으로 흐느껴야 했다. 어느 순간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염불을 흥얼거리는 습관이 생겼고 이는 도신스님이 노래를 부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도신 스님은 “엄마란 누구나 특별한 애정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춘기시절 어머니를 찾아 헤매다 어머님이 돌아가신걸 알고 많은 방황을 했다. 길거리는 물론 아무 곳에나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어린 시절부터 돌보아주신 법장스님은 본인이 잘못된 길로 갈까봐 많이 걱정하셨고 일곱 개의 기타를 분지르실 정도로 엄한 꾸중을 하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 같은 법장스님의 걱정과 애정이 없었다면 올바른 승려의 삶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5집 가수인 도신스님을 음악가로만 보았을 때 작사, 작곡을 직접 하는 싱어 송 라이더로서 1991년 발표한 1집만 무려 10만장 이상 판매고를 올린 스타가수이다. 이는 홍보가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앨범으로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성과로 그의 노래와 기타 실력은 음악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록음악의 대부 작곡가 신중현 선생으로부터 직접 수개월간 기타와 작곡을 배웠고 국내 베이스기타의 거장 ‘사랑과 평화’의 이남이 선생에게도 전수를 받은 내실 있는 음악가이다. 이는 가수로서는 영광으로 여기는 음악계의 대부들에게 지도를 받았단 것만으로 그의 실력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신스님은 1979년 수덕사에서 노래를 부를 때 ‘걸레스님’으로 유명한 작고한 중광스님(1935~2002)을 처음 만나게 된다. 도신스님이 재능을 알아본 중광 스님은 그를 제자로 삶아 서울로 데리고 간다. 도신 스님은 “중광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기에 지금의 자리에서 노래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절 지하에서 드럼과 기타를 치면 동네에서 경찰을 부를 정도로 사찰에서의 악기소리에 이웃주민들은 많은 놀라움과 반발이 있었다. 주위 스님들도 반대가 심했고 몰매를 맞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중광스님이 동네에 떡을 돌리며 본인의 방패막이 되어 주시곤 했다. 또 5집 앨범 표지로 실린 ‘도신이가 노래 한 대요’라는 그림과 글귀를 직접 만들어 주실 정도로 주위모두가 말류 하는 가운데에서도 본인의 든든한 힘이 되어 주셨다. 중광스님이 아니었다면 노래하는 도신은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도신스님은 의의를 갖고 묵묵히 본인이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여 후 주위에서 그 결정이 오른 것이었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이 큰 기쁨이자 보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노래하는 스님이란 말 자체는 아직도 생소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도신 스님의 주변 또한 이러한 그의 행동에 이질감과 질타도 많았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일 것이다. 도신 스님은 이러한 음악적 편견을 깨고 심금을 울리는 좋은 음악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포교를 지향한다. 도신 스님은 “법문을 10시간하는 것보다 몇 분에 짧은 시간동안 노래로 전하는 감동은 포교의 방법으로 활용하기가 너무도 좋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포교의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구석구석 스며들어갈 수 있는 것이 노래이다. 적절하게 스님으로서 마음가짐에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음악을 통해 세상 많은 이들에게 포교를 전하는 것이 본인 노래의 책임이다”라고 피력했다.
자연이 소리를 노래하는 ‘새벽 혼’
|
|
|
|
▲ 서광사의 지난해 새로 건축된 대웅전은 전통적인 사찰의 모습에 현대적인 시절이 복합된 웅장하면서도 고풍적인 품격을 갖춘 지역명소로도 각광받고 있다. |
| 도신스님을 잘 아는 주변 지인들은 그를 보며 ‘새벽 혼’ 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말 그대로 도신스님은 새벽 산사를 통해 음악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도신스님은 “새벽길을 걷다보면 낮에는 듣지 못하는 소리들을 느낄 수 있다. 새벽 산 나무 잎 사이로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에서 음정을 듣는다. 그 소리는 아무리 크게 들려도 거슬리지 않으며 미세한 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음악적이다. 가장 음악적인 것은 사람의 감정을 다치지 않고 다스려 준다. 클래식을 예로 좋은 음악은 자연소리와 같이 영혼을 다스리고 듣는 이에 따라 다른 의미를 느낀다. 새벽산사를 통해 본인만의 노래세계를 열어간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다. 산이 밟히는 소리 바로 이전에 산이 나의 발에 의해 밟힌다는 표현 못할 느낌이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산이 깨면 안 된다는 느낌으로 걷는다. 음악이란, 노래란, 아주 고요한 가운데서 나오고 사람의 심성을 어루만져주는 자연이 소리와 같아야 한다.”라고 피력했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회봉사에 매진하고 있는 도신스님은 주지로 있는 서광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사찰이라는 새로운 시도로 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서광사는 타 사찰과는 다르게 서산시 내 중심가인 읍내동에 위치하여 지역민들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해 새로 건축된 본 사찰 대웅전은 전통적인 사찰의 모습에 현대적인 시절이 복합된 웅장하면서도 고풍적인 품격을 갖춘 지역명소로도 각광받고 있다. ‘서광사’는 본래 ‘삼선암’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으나 1986년 돌아가신 법장 스님이 동 사찰에 주지로 오며 ‘서광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법장 스님은 고향이었던 서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고 그동안 서해권역을 대표하는 사찰로서 많은 준비를 해왔다. 후 수덕사 주지 가시기 전 이 같은 뜻을 도신스님에게 남기(주지)게 된다. 도신스님은 ‘때론, 음악을 하며 주지를 한다는 것이 힘든 일이지만 사람구실을 하게 만들어 주신 법장스님의 뜻이기에 스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다시 맘을 다 잡는다.’고 말하며 법장스님의 뜻을 받들어 향후 서해지역 최대의 열린 포교당이 될 수 있도록 불철주야 최선의 노력하고 다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도신 스님은 소외된 이웃돕기를 목표로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해오던 거리공연 모금을 통해 심장병 어린이 돕기, 불우이웃, 교소도 등의 다양한 계층에게 도움과 힘이 되어주고 있다. 또 최근에는 미얀마와 쓰촨성의 재난에 대한 성금모금을 위한 거리공연을 계획·시행하고 있다.NP
-서광사 도신주지스님(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실장)인터뷰-
사랑도 놓고, 미움도 놓고, 얽혔던 정도 놓고, 마음을 걸망에 무상을 담아 고행 길을 떠난다. -무상中
|
|
|
|
▲ 도신 스님은 동자승시절부터 염불을 배울 때 쓰이는 방법인 ‘어산(물고기가 바닷 물 안에서 노는 소리)’을 통해 잉어가 조그만 연못 안에서 노는 모습에 맞추어 염불을 해오며 남다른 발성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
| 8살, 사찰에 처음 들어온 후 환경이 바뀐 탓에 자주 이불에 오줌을 싸곤 했다. 이런 나를 돌보아 주던 20살 연상의 보살님이 있었다. 홍성병원, 나의 손을 잡으며 동자님 잠시 다녀오겠다며 눈을 감은 보살님은 말뜻을 어린 동자승은 알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 법장 스님께 ‘보살님이 안 오는데 언제 돌아옵니까?’라고 묻자, 법장 스님은 ‘이미 와 있다.’고 말하셨다. 그 답변은 계속 본인을 묶어놓았다. 다른 길을 찾지 않고 스님 곁에 있게 만든 계기(불자)가 되었고 노래를 더 집중해서 하게 되었다. 이별이, 이별이 아니고 만남이,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뜻을 닮아 ‘무상’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과거 대학로에서 인파에 둘러싸여 노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주위에서 탁발를 하던 스님이 놓여 진 본인의 모금함을 가지고 간다. 그를 잡을 수도 있으나 나는 계속 노래했다. 노래 이외의 것은 들어오지 않아야 진정한 노래가 된다는 경험을 통해, 이후 지금도 공연 중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노래를 한번 시작하면 모든 것을 잊고 노래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음악가는 예술의 느낌을 대중한테 전달해주지 못하면 안 된다. 정말 뛰어난 사람들은 저절로 살아지고 인정받는다. 문화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노래는 물론 승무, 서예, 법회를 하는 스님들은 보여주는 예술을 하는 것이기에 그 행위동안은 혼연일체가 되어야 대중에게 올바른 예술의 가치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살아라! 내가 행복해 지려면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주위는 물론, 나 자신에게 항상 되 내이는 말이다. 나는 어제 괴로웠으나 오늘 동료를 만나 웃으며 인사하는 상대방을 보며 다시 기분이 바뀌게 된다. 서로 좋은 인사를 통해 한사람이 웃는 모습만으로 상대방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 그 사람을 통해 내가 행복을 느낀다. 나의웃음의 남을 다시 기쁘게 할 것이다. 상대방이 불행하면 내가 행복해 질수 없다. 내가 보려하는 부처님은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이 되어야 하며 여기에서 오는 행복감은 엄청나다. 봉사도 마찬가지이다. 전 세계적으로 허래 허식과 의식적인 봉사가 너무 많다. 진정한 봉사란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그 행복에서 나 자신이 행복해 지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미얀마나 쓰촨성 지진사태를 보더라도 이 같은 재난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을 똑같이 공감할 수 있는 운동을 통해 세계인 모두가 봉사하는 마음가짐을 갖기를 희망한다. 노래는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본인만의 이론과 경험을 토대로 체계화된 나만의 음악세계를 만들고 싶다. 더 나아가 음악봉사를 통해 세계 소외지역 지원에도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그저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노래하고 싶다. 뜻이 있는 좋은 노래 친구들을 만나서 거리에 무대를 만들어 지역 및 국내는 물론 더 나아가 세계의 소외된 계층에게 도움이 되는 모금 활동에 앞장서고 싶다. 또 의식 있는 음악인들이 세계 봉사의 취지를 갖고 다양한 공연 수익을 통해 불우이웃을 도와주기를 희망 한다. 다양한 계층의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으로 사회를 회복시키는 봉사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도신 스님 약력- 1969 충남예산수덕사 입산 1976 춘성큰스님을 계사로 법장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77 법주사 승가대학 1983 세광음악학원에서 악기와 노래수업 1984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 선생과 사랑과 평화 이남이 선생과 인연으로 기타 기법과 작곡을 배움 1985 이교숙 선생에게서 작곡법 시사 1990 세종문화회관 "슬기동과 스님들의 만남" 최초 국악가요 공연 1991 서울음반에서 1집 '도신의 국악가요'출반 1992 kbs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특집 방송 1993 서울음반에서 2집 '용서 그리고 구도'출반 1996 연강홀에서 단독 콘서트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공연 1996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박험훈 서생과 부모은종송 2회 공연 1997 3집 '도신의 국악가요 2'출반 1997 양로원, 교도소 등 50여 곳 무료 전국위로공연 시작 2000 특별 귀족계수계 2001 충남 서산 서광사 주지 취임 2003 4집 '세상속으로'출반 2005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호법호 조사국장 역임 2006 '노래하는 도신의 사부곡'출판 2007 5집 '도신이가 노래한데요'출반 현 충남 서산 서광사 주지 및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실장 |
|
2008년 06월 30일
|
첫댓글 나무.관세음보살.나무.관세음보살.나무.관세음보살.나무.관세음보살.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성불하십시요.절.절.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