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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오광대는 경남 통영시에서 전승되어 온 가면극으로서,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통영시 동호동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통영오광대는 1900년 무렵 창원오광대를 본떠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창원에서 오광대를 놀던 이화선(李化善)이 통영으로 이사 와서 전파했다고 한다. 이화선은 1900년경 통영시 명정동에 거주했는데, 명정동은 무당과 쟤비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통영오광대의 성립에는 무계(巫系)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다. 통영오강대의 할미가 헤어진 영감을 찾기 위해 용왕산제(龍王山祭)굿 등 무당이 하는 짓은 다 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처음에 의흥계(義興契)를 조직해서 이 가면극을 놀았는데, 의흥계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통영에 위치한 수군톤제사의 동제영(統制營)의 부속관아인취고수청(吹鼓手廳)의 악공 출신이었다. 취고수청은 악공들의 관청이었다. 이 악사들은 물론 통영 지방의 세습무 집안 출신이다. 취고수청은 숙종13년(1687) 제64대 통제사인 류중기(柳重起)가 건립했는데, 군악대가 있던곳이었다. 통제영은 마지막 통제사인 제208대 홍남주(洪南周)가 1895년 병사(病死)함으로써 해산된 셈이다. 따라서 취고수청도 그때 해산되었는데, 그 시기(1895년)가 통영오광대를 놀기 시작한 때(1900년 무렵)와 딱 들어맞는다. 취고수청이 해산된 이후 몇 년 뒤에 그곳에 소속되었던 악공들을 주축으로 통영오광대를 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취고수청의 악공들 가운데, 관현악기를 연주하던 사람들은 주로 승전무(勝戰舞)를 전승하게 되고, 타악기를 연주하던 사람들은 주로 통영오광대를 전승하게 되었다고한다.
더구나 통제영이 설치되어 있던 시절에 해마다 그믐날 통제사의 동헌에 들어가 밤 늦게까지 매구를 치고 가면극을 놀았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물론 이때의 가면극은 섣달 그믐날 관아에서 잡귀를 쫓아내기 위해 거행한 나례의식 가운데 구나의식(驅儺儀式)의 일부로 연행한 것으로서, 현존하는 통영오광대와는 다른 것이다. 이때 각도에서 소집되어 수군(水軍)에 배치된 악공들 삼십여 명을 동원해 매구를 친 것으로 전해진다. 바로 이 악공들은 취고수청의 악공들일 것이다. 이들은 이미 통제영의 나례에서 구나의식의 일부로 가면극을 놀아 본 경험이 있으므로, 창원오광대로부터 가면극을 배워 와서 놀기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세습무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후 1910년대에 장용기(張容基)가 중심이 된 난사계(蘭社契)가 통영오광대를 전승했고, 다시 1920년대에 장재봉(張在奉,1896-1966)이 중심이된 춘흥계(春興契)가 계승했다. 이렇게 형성된 통영오광대는 거제오광대와 고성오광대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의흥계는 정월 2일부터 14일까지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매귀, 즉 지신밟기를 해 주고 받은 기부금으로 가면극을 준비해, 정월 14일 밤에 파방굿과오광대가면극을 거행했다. 의흥계의 정기총회는 정월 14일 외에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열렸는데, 이때도 오광대놀이를 놀았다. 특히 4월초 봄놀이에는 사또놀음의 일부로 가면극을 연행했다.
사또놀음의 행차는 깃발, 통인, 삼인, 폭죽 떨어뜨리는 팔선녀, 사인고, 가마, 나졸들, 아전들, 말 네 마리, 사또가 타는 팔인고 가마, 춤추는 팔선녀, 포졸들, 풍물꾼, 동네 사람들, 오광대 탈놀이꾼들의 순서로 행진했다. 사또행차는 세병관(洗兵館)에서 출발해 명정골을 거쳐 미륵산 용화사 뒤 잔디밭에 도착한 후, 모의재판을 열어 죄인을 다스리고나서 밤새도록 가면극을 놀았다.
놀이내용은 제1과장 문둥탈, 제2과장 풍자탈(양반과장), 제3과장 영노탈, 제4과장 농창탈(영감,할미과장), 제5과장 포수탈로 구성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