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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보제자 원문보기 글쓴이: 원정
중국 정토종 13조 인광대사 중국 근대스님 중 태허 스님과 인광 스님은 중국근대불교를 대표하는 큰스님이시다. 특히 인광 스님은 정토사상을 홍양하신 분으로 학문과 수행을 겸비하고 평생을 염불수행으로 일관하셨는데, 스님은 열반 하신 후 백만 자로 이루어진 주옥 같은 내용의 인광대사 전집을 남기시어 오늘날 대만과 중국본토에서 스님들과 불자님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참다운 수행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당시의 중국에 있어 인광 스님의 출현은 목마른 중국불교의 한 줄기 감로수와 같은 존재였다. 인광 스님은 당시 승려들이 수행을 게을리 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시고 당신의 방 벽에 “사死”자를 적어 걸어 두시고 젊은 수행자들을 경책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도道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에 순간순간 이 글자의 뜻을 잊지 않는다면 도道는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하셨다. 스님의 이러한 수행정신은 현대중국에 있어 수많은 스님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스님은 평생 사원의 주지소임을 살지 않았으며 또한 출가제자는 두지 않았으나 세속제자는 10여만 명을 헤아리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러한 점은 스님의 독특한 승려관의 일부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국운이 쇠퇴하고 정치는 부패하며 설상가상으로 외국세력의 침입으로 민족생존을 우려하는 총체적이며 국가적인 대난국을 맞이한 청나라 말기의 중국에 있어 전통불교마저 참다운 수행자상을 찾아보기 어렵게 쇠퇴하는 현상과 더불어 기독교 사상을 이용한 홍수전의 태평천국 동란중 장강 남쪽의 사원은 심한 파괴와 박해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역사의 안목으로 헤아려 본다면 인광 스님이 홍양하신 정토염불 법문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이것은 당시의 사회환경과 승가의 실제상황을 혜안으로 관찰하신 결과이니, 청나라 말기의 전란으로 많은 생명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일반법문으로는 빠른 시일 내에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없다 판단하시고 오직 극락왕생의 정토염불 법문만이 당시의 사부대중을 구제할 방법이라 생각하셨다. 그 후 중국불교는 새로운 서광과 생기를 맞이했으니 이것은 스님의 시대에 맞는 방편법문과 언행言行이 일치하는 높은 수행력의 결과로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존경하며 배우고 싶어하는 부분이기도 하였다. 인광 스님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백성은 불안하여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며 불자님들 또한 염불할 때 마음은 온갖 걱정과 번뇌망상으로 이것을 생각하고 혹은 저것을 생각하기도 하며 마음을 한곳으로 전념하기가 힘든데, 이때 스님께서 몇 가지 염불기도 방법을 말씀하시며 마음을 다스리고 생활하는 데 도움을 삼으라고 하셨다. 첫째 염불할 때는 항상 정성스러운 마음과 공경스러움을 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집안의 어른에게 인사를 드릴 때도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추며 공경심을 내는데 하물며 부처님과 대승보살님들의 명호를 부르는데 마음을 경박하게 하며 속으로는 잡스러운 생각을 품고 입으로만 소리내어 염불한들 복이 될 수가 없다. 옛날 성현의 말씀에도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으니 지극한 정성과 공경으로 하는 기도는 복을 부르고 경솔하고 나태한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오히려 화를 부르기 쉽다 . 둘째 염불할 때는 입으로 정확하게 소리내어야 하며 귀로는 스스로의 염불소리를 정확하게 들어야 하며 마음으로는 염불을 정확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여 마음과 귀와 입이 하나로 삼위일체가 되고나면 염불하는 사람의 눈동자는 이리저리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보지 않게 되고 코는 밖의 모든 냄새에 이끌리지 않아 각종 냄새에 민감하지 않고 몸은 자연히 안정을 찾게되니 마음 또한 온갖 번뇌망상에서 벗어나 쉽게 다스려지게 된다. 셋째 염불할 때는 십념十念 단위로 염불하라. 이 방법은 염불을 한번부터 열 번까지 분명하게 염불하고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으로 열 번을 모두 부르고 나면 다시 되풀이하여 염불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되풀이하여 계속 염불하면 기도처에서 기도할 때 염주가 필요 없고, 염주가 필요 없으니 자연히 염주 돌리는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며 제일 편리한 것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떠한 시간 어떠한 장소에 상관없이 염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은 세 가지 방법은 평상시 조금만 신경 써서 노력하고 습관 들이면 누구나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기도방법이라고 본다. 스님은 또한 열심히 그리고 정성들여 염불하면 어떠한 불치병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셨는데 이것은 당신의 경험이 근거가 되고 있다. 스님은 젊은 시절에 눈병으로 고생하시다가 거의 실명하시게 되었을 때 염불왕생 정토법문이 고통에서 벗어나 생사를 해탈하는 근본임을 깨닫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여 실명의 위기에서 벗어나 눈병이 완전하게 쾌차되는 불가사의 염불공덕을 받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지성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불보살님의 대자대비심으로 질병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는 것을 당신의 체험으로 증명하여 주셨다. 스님은 스스로 부르기를 “상참괴승常愧僧”이라 하셨으니 이것은 승려로서 항상 부끄럽고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수행자의 한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어떤 보살님의 꿈에 대세지보살님이 상해에서 홍법활동 하는 것을 선몽받고 꿈속에서본 장소로 달려가 보니 그분이 바로 인광 스님이셨고, 대세지보살의 화신이 오신 것을 깨닫고 자기의 꿈 내용을 다른 이에게 말하였으며 이 소식은 오래지 않아 인광 스님의 귀에 들어갔고 이 소문을 퍼뜨린 보살님은 스님으로부터 크게 혼났으니, 이 또한 스님의 별호에 어울리는, 항상 스스로를 낮추며 겸허하게 살아가는 수행자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인광 스님은 일상생활에서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시어 하루에 두끼를 드시고 오후불식을 하셨으며 평상시에도 끊임없이 염불 정진하시면서 일흔이 가까우신 연령인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옷빨래부터 시작하여 크고 작은 일들을 직접 처리 하셨다고 한다. 스님은 수행뿐만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는데 화재나 수재 등으로 생활이 어려운 난민이 생기면 법회를 하시는 도중이라도 즉석 모금운동을 벌여 어려운 사람을 돕고 또한 고아원을 짓는가 하면 염불방생 도량을 만들었다. 인광 스님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3년 뒤 1940년 11월 서방을 향하여 단정히 앉으신 채 입적하셨다. 스님의 시신은 다비 후 수많은 오색찬란한 사리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연꽃모양의 정골사리와 구슬모양과 곡식모양 등 가지가지 모양의 사리가 있었는데 특히 치아 사리 32과는 그 모양이 완전한 채로 모습을 나타내어 중국의 유명한 역경승려 구마라집대사의 혓바닥 사리에 비유되기도 하며 다비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환희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중국의 공산화 정책과 문화대혁명으로 수많은 불상과 사원들이 피해를 입었으나 다행히 스님의 사리와 유품은 무사히 보존되어 스님의 사리는 장쑤성 쑤조우 영암산 인광대사 사리탑에 안치되어 있고 유품은 인광대사 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현재 영암사는 염불수행도량으로 인광 스님의 사리탑에 참배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을 쓰신 성원 스님은 現在 中國 南京大學 中國哲學專攻 博士科程에 在學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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