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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읍은 영월군 동쪽에 있으므로 '상동(上東)'이라고 하였다. 백운산과 두위봉 등 산이 높아 마늘, 감자, 옥수수 등의 밭농사와 고랭지 채소 재배를 많이 하였다. 한때는 상동중석광산을 중심으로 세계 제일의 중석 매장량을 자랑하며 호황을 누리던 곳이기도 하다. 상동중석광산은 1916년 흑색 철·망간·중석이, 1917년 회중석(灰重石)이 발견된 이래 1923년 일본인이 개광(開鑛)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미군정(美軍政) 직할 기업체로 운영되었고, 1952년 대한중석광업(주)이 인수하여 국영체제로 운영하다가 1969년 이후 민영화되었다. 과거에 상동광산의 중석 수출액은 한국 총수출액의 80%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1974년 순수익이 무려 53억원이었으며, 종업원만도 1천800여명이었다고 한다. "대한중석 종업원이면 셋째 첩이라도 딸을 주겠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값싼 중국 중석이 수입되면서 1993년 폐홰되었다. 상동중석광산의 폐쇄 이후 삶의 생동감이 넘쳐 급팽창하던 영월군 상동읍 중석광산촌은 그 날의 번성함은 사라져 버리고 삭막감만 맴도는 황량한 촌락으로 전락해 버렸다. 중석고비는 상동중석광산이 활발하게 가동될 당시에, 꼴두바위 앞에 흐르던 하천부터 그 아래 지역에서 하는 중석채취 작업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은 거의 복개를 해서 꼴두바위 광장이 되었지만 예전에 상동중석광산에서 중석을 채취하고 남은 슬레그를 물에 흘려보내면 주민들은 하천에 법구와 광목 등을 가지고 내려가서, 떠내려 오는 중석 슬레그 곧 용해물에서 중석을 채취하였다. 이것이 중석고비고, 중석을 채취하는 과정을 놀이로 새롭게 만든 것이 중석고비놀이다. 중석고비놀이는 중석을 채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마을 주민들이 중석고비놀이 준비를 한다. 이어서 중석 슬레그를 짐통에 담아 채에 붇는다. 중석 슬레그에서 채로 굵은 알맹이는 걸러낸다. 거친 알맹이를 제거하고 난 중석 슬레그를 건져서 법구로 옮긴다. 광목을 깔아둔 법구에 중석샌드를 흘려보낸다. 일꾼들은 무거운 입자가 광목에 흡수되도록 하면서 나머지 찌꺼기를 제거한다. 중석이 흡수된 광목을 물에 빨아 중석을 털어낸 후 중석을 채취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끝나고 나서는 놀이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와 한바탕 어울려 논다. 2005년의 경우 상동읍 구래 1리 주민들이 재현하였다. 놀이를 하면서 중간에 부르는 소리는 '아라리'다. 마을 주민들이 부르는 아라리 중에서 "꼴두바우 중석허가는 년년이 나는데 처녀 총각 잠자리 허가는 안나"라는 대목에서 마을 사람들이 많이 웃었다. 축제 기간 중 재현되는 놀이로서 개발한다면 충분히 즐길거리가 될 수 있다. 다만 진행과정과 순서가 조금더 유기적으로 움직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 |
첫댓글 아 옛날이 생각납니다 복구 중석하던 사람들 많았는데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꼴두바우생활좀해봐서 더 생각나내요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