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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시간동안 벼르던 일이었다.
워낭소리를 알고 난 후, 처음으로 영화라는 것이 보고 싶어졌고, 미루고 미뤘던 일을 기어히 해낼 수 있었던 시간은 명절의 마지막 날이었다. 예고편만을 인터넷으로 본 상태였는데, 명절에 이곳저곳에 가서 원없이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떠오른 모습이 워낭소리에 나오는 소의 모습이었다. 주어진 일들을 원망없이 하자. 끝도 없는 일들을, 내 육신이 버텨내는 한, 그냥 하자. 교통사고로 늘 허리의 통증이 아무도 몰래 찾아와 나를 괴롭히는 시간, 그 시간이 견뎌지는 때까지는 그래,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그냥 하자. 열심히. 말없이. 워낭의 소처럼... 그렇게 명절을 지내고 나니 명절의 끝시간 만큼은 온전히 나에게 휴식으로 찾아와 주었다.
아마도 처음 일이 아닌가 싶은데, 내 스스로 영화가 보고싶어 예매를 하다니. 그것은 까닭없이 그저 소가 좋아서, 지나가는 소를 보면 차를 세우거나, 소를 따라 차를 몰거나 했던 나의 행동이 그대로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소띠 해라서 였을까. 소의 영화가 1월에 방영되다니. 아무튼 반가운 나는 처음부터 설레였고 무척이나 기다렸던 시간이었다. 사람은 가끔 마음을 주지만 소는 전부를 다 준다는 멘트가 낯설지 않았던 것은 내가 늘 품었었던 생각이었기에 그리하였고, 성서에서 조차 하나님은 소를 선택하셔서 소란 그 자신의 전부를 바쳐 주인을 위하여 죽어가는 순한 짐승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시지 않는가.. 싶은 마음에 갑작스레 흰두교가 떠오른 것도 그렇게 나쁜 연상만은 아니었으리라.
2.
그것을 어떻게 잡았을까. 눈물이라니. 그것이 궁금하였다. 시각에 예민한 나로서는 늘 표정에 가장 관심이 집중되었고 감독인 이충렬님의 시선이 몹시 궁금했다. 유독 소를 좋아하던 나는 그 순한 눈매에 깃든 순종의 의미를 소의 천성으로 느껴 가장 닮고 싶은 동물로, 가장 한국적인 동물로 주저함없이 소를 늘 마음 속에 그렸던 터. 소의 눈물을 필름에 잡았다는 뉴스가 더욱 궁금해져 갔다. 유독 소라는 짐승은 자신이 죽을 시간이 임박했다는 것을 안다는 영특한 짐승이라 하여 영물이라고도 하지만 누군가는 '단지 피냄새를 맡아 죽음을 예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왜 워낭소리에서 농부의 진한 사랑을 받는다는 소가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농부와의 이별? 소는 왜 눈물을 흘렸을까?
다큐라는 소리에 가족들과 함께 본 영화, 예매라는 것도 처음 해보았는데, 회원가입을 안하면 예매조차 되지를 않아 투덜투덜. 명절의 일 끝이라 허리의 통증을 참고 예매를 시작, 신촌이라는 대강의 장소만 알고 부랴부랴 한 예매가 알고보니 우리 큰, 작은 두딸이 다니고 있고, 다닐 대학 안에 있는 극장이었다. 이런, 그런 것조차도 모르고 무작정 한 예매가 이런 결과를 낳다니. 둘째 경원이는 특히 기뻐하였다. 엄마인 내가 다녔고 큰 아이가 다니고 있고 이제 3월이면 둘째가 다닐 학교 안에 있는 극장이라니. 마치 알고 한 예매인 듯. 신이 난 큰 아이, 예원이는 뛰어 다니며 가이드를 하였고 오랜 만에 학교에 들른 나는 신세계가 되어있는 모교를 바라보며 한편은 의아해하며 한편은 안쓰러운 마음을 가질 수 밖에. 굉장히 유명한 건축학자가 설계했다는 그곳 ECC. 신세계는 루부르 박물관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지하를 이용한 건물 설계가 단박에 유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땅이 좁으니 지하를 생각할 밖에 다른 수가 없었겠지만 그래도 파헤쳐 나갔을 그 땅, 내가 아니 그 많은 선후배들이 밟고 다녔을 그 땅이 파헤쳐졌을 그 때를 생각하니 늘 문명은, 늘 발전이라는 이기적 단어는 이렇듯 인디언, 그들이 말하는 어머니의 대지를, 그 대지를 품고 태어난 무수한 생명인 나무들을 자르고 태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인가를... 잠시 떠올리게 하였다...
학원에 간 막내를 제외하고 예원, 남편, 경원, 그리고 내가 넷이서 나란히 앉아 내가 예약한 영화를 기다리는 시간, '엄마, 그렇게 이 영화가 보고 싶었어?' 경원이는 나의 손을 잡으며 물어왔다. '에구, 우리 엄마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우리 엄마가 처음 있는 일이네~'
3.
이런, 영화 극장 스크린에 익숙하지 못한 터라 갑자기 내 눈이 알러지를 일으키는 것인지. 어마어마한 큰 스크린이 내 시야에 들어오질 않았다. 예약된 자리는 아주 좋은 곳이었는데도 난 처음 시작할 때, 영화를 처음 보는 초보처럼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야를 힘들어 하였다. 내 한눈에 다 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할수록 안타까워 해야했고... 차츰차츰 느림보 스튜디오의 철학이 느껴지기 시작. 끝무럽이 되어서야 겨우 익숙해진 스크린 사이즈가 감당하기에 적당해져 있었다.
이런 것을 공양드리러 간다고 하는 것인가. 두 노인부부가 지친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 절을 한다? 나보다 더 힘겨울 허리를 붙들고 일어섰다 절하러 다시 무릎을 꿇어 손을 내밀며... 그리고는 시작되는 워낭소리. 최원균할아버지와 주인공 늙은 소는 정말 한몸이었다. 그리고 또 한분, 귀여운 할머니의 모습이 정겹게 펼쳐진다. 풍경과 대사의 촌스러움은 더없이 따뜻한 영화임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다큐가 주는 감동이 남다를 수 밖에 없음을 실감하였다. 보는 시간 내내 마음 속 잔잔하게 일었던 평화로움. 현대를 벗어난 듯 긴장감이 풀어지고 그저 평화롭게 펼쳐진 초록의 푸르름이 너무 좋았다. 큰 비가 내리던 시골의 풍경, 초가의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들. 무엇하나 빠뜨리지 않고 내 시선에 담느라 행복했던 긴장감... 그러나 두 노인부부는 그나마 말을 한다지만 들리지 않는 소의 대사는 느낌으로 알아야하는 터. 눈으로 들어야하는 소의 소리들을 표정으로 읽어야 하기에 더욱 바짝 긴장하고 보았던 행복했던 시간.
아, 카메라는 이렇게 잔인하였던가. 최할아버지의 얼굴에 박힌 숨구멍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콧 속에 들어있는 누런 물과 콧털의 갯수까지도 그대로 잡아내는 카메라. 눈썹에는 白과 黑이 공존하고 말라서 더욱 튀어나온 광대뼈의 모습. 그러나 무엇보다 가슴아팠던 장면은 할아버지의 왼쪽 다리의 가녀림. 어릴 때 침을 잘못 맞아 그리되었다는 그곳은, 그래서 그렇게 소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할아버지의 슬픈 운명을 시작하게 만들었으리라. 자신의 장애를 통하여 더욱 더 늙고 비루한, 더우기 한쪽 다리를 자신처럼 잘 가누지 못한 이 늙고 아픈 소를 더욱 더 껴안고 자신처럼 돌보며 함께 동행했던 한몸의 행복한 공존의 운명체. 그 아픈 소를 위하여 자신의 짐을 소에게 건네지 못하고 대신 짐을 지고 서로 걸어가던 장면은 인디언들이 말하던 친구의 운명, 자신의 허리에 지고 갈 짐을 서로 나누어 지고가는 자를 친구라고 한다는 풀잇말을 떠올리게 하였던 감동의 장면이었다. 서로 절룩거리며 서로 나누어 지고 서로가 하나가 되어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오는 두 그림자가 주는 감동적인 장면은 내내 잊혀지지 않는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거기서 떨어지던 나의 눈물... 서로가 아픈 자들이었기에 서로가 보듬을 수 있었던 관계가 되어, 아픈 운명들이었기에 어쩌면 그래서 행복할 수 있었던 할아버지와 늙은 소의 운명이 감동의 다큐로 만들어져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서로에게 공존하는 아픔이 이유가 되어 감동으로 하나된 그들의 언어가 집요한 감독을 만나 장면화 되었기에 세상 속 아픔이 꼭 슬픔의 언어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고, 슬픔도 서로 나누면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삶의 존재 이유가 되어가고 그래서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눈물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4.
배고픈 인간이 될 지언정 배부른 돼지는 되지 않겠다는 그 말을 알 턱도 없는 슬픈 늙은 소가 몸값을 불리기 위해 인공 사료의 강제 사육당하는 육중한 몸매의 튼실한 소에 비교되는 이 영화는 문명과 이기를 빗대어 말하고 결국 미친 소를 강제로 수입할 수 밖에 없는 슬픈 우리나라의 현주소도 보여주고 있었다. 소를 통해 소와 함께 짓는 고집스런 인간적 농사. 기껏 농사 지어 놓은 쌀알이 더 많이 떨어진다고 사람이 베어야지 하시는 말씀에 담긴 우직함을 그저 미련스럽게만 보여질 이 시대에 보여주고 있는 슬픈 영화 워낭소리. 어찌 단순히 소가 죽는다고만 하여 농약을 안쳤을까, 그것은 곧 추수하여 보내야 하는 당신 자식들과 우리 모두를 무언 중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몹쓸 것이라 여긴 탓이 아니겠는가. '일일히 대답하지 않아도 그것들을 왜 몰라...' 하시는 할아버지의 깊은 음성을 놓치지 않는다. 무엇때문에 농사를 짓는데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결국은 자식을 위하여 짓는 농사가 자식들을 알게 모르게 죽어가게 만드는 못된 농약을 쳐야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그냥 무심히 지나칠 일인가 하시는 음성. 그 들리지 않는 음성들이 할아버지의 깊은 눈동자 안에 박혀있는데, 어찌 그 소 한마리에 국한된 이야기겠는가 하며 곱씹어 보아야하지 않을까. 할아버지의 고집스런 손농사법을...
지식이 깨달음이 되려면 앎 이상의 느낌이 계속적으로 공존해 다가와야 한다. 생각하고 알아야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순전한 고집이 동행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기계와 농약의 편리성을 모를까마는 결국 서해안에 기름유출이 되는 것이 할아버지 농토에 유출되지 않으리라는 법 없고, 농약의 피해가 농토의 고동과 다슬기를 다 잡듯이 결국은 우리 인간을 잡을 것이 뻔한 것을 단순히 편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해야 할 것인가 라고 할아버지는 생각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날마다 일어날 때마다 아프고 아픈 육신을 다시 일으켜 새벽녁부터 쇠죽을 쑤는 것으로 '일일이 사람이 하는 깨끗한 노력의 농사, 그 지긋지긋한 노력의 댓가인 농사, 그 한톨의 추수'를 늙은 소의 힘을 빌려 아니, 소가 힘들어 하면 자신이 직접 기어가면서라도 손으로 땅을 파고 일구어 내는 미련한 고집. 도데체가 순전한 '고집' 외에 무엇으로 이 수고를 감당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자신도 한순간 인간의 잘못으로 인하여 평생을 절룩거리며 살아야하는 아픔을 간직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안되야아...' 라는 대사로 들리던 '아. 머리 아파...'
어쩌면 그 농약 때문에 그 기계 때문에 농업은 스스로 망하여 갔고, 수고를 덜어준다고, 편리하게 손쉽게 해낼 수 있도록 기계를 사용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일일히 벌레를 잡아주고 잡초를 뽑아주지 않아도 되게끔 농약을 개발하여 그것을 기계를 이용하여 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여, 결국은 농업을 값싼 것으로 대체해 버리고 도시적인 것들을 더 높은 상품화 전략으로 마케팅화 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가장 중요한 인간의 먹거리를 위하여 피땀흘려 농사짓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의 그 비싼 노동력을 농업의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기계화, 농약화 하고 그대신 쌀값은 싸게 쳐주어도 되어버린 세상. 피땀흘려 농사지어 도시로 보내도 그 자식들조차 그 고마움을 너무 가볍게 여겨도 전혀 죄의식이 없을 정도로 농산물을 값싸게. 그거 힘들지 않도록 농약의 혁신적인 개발, 몇 번만 쳐주면 절대 벌레가 살아남을 수 없도록, (그래서 캘리포니아 지역 특히 건포도가 다량으로 생산되는 곳의 직경 2Km내에는 그 어떤 벌레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농약이 살포되어 깨끗하고 무결점의 최고 상품성을 자랑하는 건포도가 생산, 우리나라의 아이들 백일 돐잔치 백설기에 꽂혀 나오는 대부분의 건포도가 되어 간다고 얼마전 읽었던 기사가 생각난다.) 전 농업 생산활동의 기계화 역시 허울좋은 편리성으로 결국은 농산물 가격을 하락시키는데 최고급 공신이 되었는데 모든 기계는 휘발유 기름의 유출이 언제든 가능하고 공업화되는 농사는 또 다른 생태계를 마음놓고 파괴시키고 있다.
차라리 값비싼 노동력의 댓가를 정정당당히 쳐서 농업의 진정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먹거리를 위한, 그래서 더 이상의 아토피와 광우병과 유전적 장애를 예방하고 모든 인간의 순전한 노력의 댓가를 진정으로 보답해주는 현실이 농촌에 도래하기를 소망해 본다는 것은 이미 이룰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일까. 농사, 그 지긋지긋한 노력의 댓가를 그에 상응하는 가격의 쌀값으로 대신할 수 있는 미래는 도무지 불가능하고 증권이나 주식, 펀드 등, 미국의 월가가 점령한 돈놓고 돈벌기와 복권이라는 요행심 기대기 등... 힘든 제조업이나 농사 등은 미개국에게 할당되고 가격은 오르지 못하게 막아둔 채... 더 이상 진도 나가면 더 슬픔만 커지겠지...
5.
아이들도 나도 모두 울었다. 요즘 본 영화 중 최고라던 아이들이 고마웠다. 웃기려고 그랬을까? 남편은 솔직히 8000원이 아까웠다고 하였다. '엄마, 5백만원을 부른 것은 팔고 싶지 않아서였을 거야, 그치?' '할머니도 할아버지랑 같은 마음이었는데 표현만 그러셨을 거야, 그치?' '그렇게 뭐라뭐라 하면서도 결국 할머니는 할아버지 죽으면 같이 죽을 거라고 하셨어, 그치?' 아이들은 끝나고 나오면서 내내 영화 이야기만 하였다. '엄마는 그저 저 소처럼 살고 싶어...' 나지막히 이야기 하니 아이들이 칫~!! 해버린다. '엄마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잖아~' 그런가? 정말 저 소처럼 충직하게 나는 살아내고 있는가? 내 삶을 저 소처럼 순전하게 살아내고 있는가? 아들 이삭을 시내산에 데리고 갔던 아브라함처럼 할아버지는 소를 끌고 장으로 데리고 가고, 소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는데 결국은 이삭을 다시 되돌려받고 함께 돌아오듯이 할아버지는 소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의 장면... 아, 소는 그래서 울었었구나. 예수의 외로움처럼 소도 진한 배반에, 진한 외로움에 울었었구나. 현실은 늘 울음이구나. 늘 눈물이구나... 팔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은 팔기로 작정하고 나선 길에서 소는 눈물을 떨구고 할아버지는 울음을 삼키고...
엄마, 그거 알아? 어느 아파트 이야기 였대. 할머니가 자살한 이야기인데, 할머니는 자식들이 효도한다고 고향에서 모셔다가 그저 한순간도 일하지 않으면, 가만히 지내기만 하면 오히려 아파하시는 할머니를 자식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효한다고 욕먹어 먹는다고 아무 것도 못하게 하고 편하게, 편하게 지내시라고 돈드리고 어디 놀러만 다니시라고 그렇게 사정사정 하였대. 할머니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아파트 단지 조그마한 땅에다 농사짓는다고 물줘야 한다고 다니고 싶어하시는데 자식들이 제발 사정하면서 노인분들을 그렇게 일하시게 만들면 안된다고 아무 것도 못하시게 만들었대.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자살을 하셨는데 모두가 쉬쉬... 하면서 노환으로 병사하신 것으로 대신하려하였는데 부모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하는 것을 듣고 아이들이 그것을 동화로 적어냈던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졌는데... 엄마, 그거 알아? 아마 저 두분도 아파트에 모셔다가 자식들이 그렇게 요구하셨다면 자살하셨겠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이미 그 대답을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보았기에.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 아직은 자신이 할 수 있고 그래서 아직 살아있다고 존재감을 느끼며 인생의 가치를 만들어 가는데, '나중에 엄마가 하려는 것들을 너희들의 잣대로 판단하여 막으려 하지마, 알지?'
소의 무덤에 넋이 나가버린 할아버지의 앉은 자태가 마지막 장면이었다. 평생 함께 일구던 논의 한 가운데에 소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이제는 홀로 남아 그 무덤 앞에서 덩그마니 남겨진 자신의 초라한 육신을 바라보며 도저히 혼자서는 일굴 수 없는 농토를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평생을 주고 간 늙은 소의 무덤 앞에서 그 진한 우정 앞에서 감독은 남겨진 땔감 나뭇단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래 살라고 남겨두고 떠났다고 이야기해주던 할머니의 따스한 시선. 고맙다고 고맙다고 소에게 고마움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다만 그 높디높은 계단을 올라 돌에게 절하며 손내밀어 공양 올리던 늙은 두분의 구부러진 손, 그 손톱에 남겨진 흙때의 흔적들. 지금, 나의 생이 되어있는 아주 오래된 선조들의 노동력들이 그 영화에 녹아있다. 함께 한 소의 평생도 동행자로서 남겨져 다큐 영화로 남아있다. 워낭소리.
6.
내가 아무런 고심없이 그저 좋아 그렸던 소의 모습,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인생을 은유화하여 표현했던 눈물의 한맺힌 소의 표정들이 떠오른다. '체험을 강요당하는 소'라는 제목으로 그려진 소의 눈물은 한지에 먹물로 표현하여 한국성을 강하게 각인하려 했고 그 찐한 한맺힘을 상기하며 참 많이 울면서 그렸던 작품들로 떠오른다. 틀리지 않았었구나, 나의 선택이.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유독 강하게 떠올랐던 한국적 동물, 한국민에게 가장 친근하게 다가온 순전한 동물로 소를 표현해 냈던 것이 어쩌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강한 민족성이 아니었던가 싶어진다. '끌려가는 소'라는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백의의 한민족, 누이들의 끌려간 억울한 죽음... 우리의 것들을 우리가 지켜내지 못했을 때 당해야했던 설움들과 강대국들의 당연한 이치-적자생존에게 대항했던 그림... 모두가 다시 떠올랐던 워낭소리.
결국은 죽어야 끝이 날 노동의 마침은 인생의 가장 행복한 동행의 수단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 노동의 가치가 모두에게 평등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나는 그렇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영화관을 나왔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동행자를 만나 한평생 서로 핥아줄 수 있는 상처가 있음 또한 감사하면서 그렇게 나의 일생을 어떠한 죽음으로 마쳐지든지 내 입술로는 감사함으로 마쳐지기를 순간순간 기도하리라 다짐해본다. 어쩌면 그 소가 나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아닐까. 외로움에 외쳐대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음성. 이충렬 감독은 어쩌면 사람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기에 순전한 소를 통하여 잡아낸 것은 아닐까. 나부터 이기적임을 부인못하며 누구에게도 기대기 힘든 평생의 동반자. 그래서 사람은 가끔 모든 것을 주지만 소는 전부를 다 준다고 멘트를 달아낸 것은 아닐까. 이 시간 나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갈 수 있는 그 누구를 그려낼 수 있는가? 아니 내 자신이 그 누구를 위하여 다 주고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동행해 줄 수 있는가.... 묻는다. 왜 마음은 원이로되, 나는 이기적인 나를 버릴 수 없는가... 왜 나는 소처럼 예수처럼 나를 다 줄 수 없는가? 과연 없는가?
당신은 그 누구에게 저 늙고 비루한 소처럼 평생을 같이 동행하여 아픔을 나누고 슬픔을 견디고 함께 살아가는 대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묻고 있는 영화. 소를 보고 당신 자신을 바라보라는 감독의 음성. 우리는 아무도 저 소처럼 될 수 없기에 작가는 멘트를 달아두고 있다. 사람은 가끔 모든 것을 주지만 소는 자신의 전부를 다 주고 갑니다... 그저 외마디 비명처럼 나도 한마디 덧붙일 수 있으려나. '나도 저 소처럼 살고 싶어.......' 나에게 나를 위한 민들레 약꽃 풀들을 뜯어다 주는 사람을 위하여, 나에게 나를 위하여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농약을 치지않는 그 사람을 위하여, 나에게 나를 위하여 내가 힘들 때 나의 짐을 나누어 들어주는 나처럼 다리 불편한 장애를 지닌 그 사람을 위하여...
그러나 내가 먼저 민들레 약풀을 뜯어다 주고,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위하여 절대 농약을 치지 않고, 내가 먼저 그가 힘들 때 그가 지고 가는 무거운 짐을 아무리 내가 아파도 나누어 질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소가 웃으며 말하여 주겠지.
언제나 시작은 남이 아닌 너에게서 부터라고.
7.
영국은 이 영화를 향하여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어떻게 소가 40여년을 살 수 있느냐고. 그러나 세상의 모든 불가사의는 모두 '사랑으로 부터 시작된 기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기적을 믿음이 절대 아니요, 사랑을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낸다고. 그래서 세상은 사랑으로 인하여 살 맛나는 세상이 되는, 때로는 멋진 세상이라고.
워낭을 떼어주고, 코뚜레를 떼어내주고 '잘 가거래이....' 외치던 할아버지, 대답하듯 마지막 큰 눈을 뜨고는 이내 고개를 떨구던 늙은 소의 죽음. 그리고는 함께 농사짓던 땅의 한가운데 묻어주고 망연히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외로운 앉은 자태... 그렇게 영화는 끝을 냈지만 끝나지 않은 내 가슴 속 워낭의 소리.
소는 전부를 주고 갑니다....
8.
나도 소처럼 나의 전부를, 나의 전부를 이 세상을 향하여 다 주고 갈 수 있기를...
첫댓글 개봉 한 달 전부터 엄마에게 같이 꼭 보자고 입방정 떨었는데 개봉관이 적더라구요. 작년 겨울에 인공관절수술하셔서 많이 걷기 불편하셔서 멀리 갈 수도 없구 말이지요. 아마 엄마의 귓전에 워낭소리가 멀리서 들릴 듯도 합니다.
혼자서라도 보시어요^^ 좋은 영화입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해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