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들로르므 신부님의 마르코 강의 ("예수님의 제자되기 II") 일부
육지로 돌아옴 (6, 53-56)
<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제사렛 땅에 이를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담이 있다. 그러나 땅으로 되돌아와서 군중을 발견한다. 이 일련의 이야기 끝에서,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이 다시 육지로 돌아온 곳을 알아차리고, 예수님께서 이동하는 곳 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이 가시는 곳 마다 그분께 데려왔다고 얘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중단 없는 일종의 반복진행(séquence: 하나의 연속적 단위)이라는 것을 본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 마다 어디든 반복된다. 사람들이 그분께 환자들을 데려와서,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간청한다. 따라서 하혈하던 여인의 행동을 다시 하는 것이다. 그를 만진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 (56절).
앞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V.G 배 안에 피신해 있던 군중에 의해 예수는 괴롭힘을 받았다), 사람들이 하도록 예수님이 내버려두는 것을 우리가 보는 것은 여기서 처음이다. 예수님을 만지려는 사람들이 예의를 차리는 것도 처음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청’하기 때문이다.
빵과 몸 : 과다(넘치는 것)의 근원(source de la surabondance)
그리고 반응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하도록 내버려두는 예수님, 일종의 수동화된 그분을 우리가 보는 것도 처음이다 - 예수님께서, 그분을 만지기를 청하여 그분을 만진 모든 사람들이 구원되는, 이동하는 몸이 된다. 찬미와 함께 일단 떼어져서, 모든 정상적인 비율에 맞지 않게, 군중을 먹이고도 남은, 말하자면, 넘치는(충분하고도 남는) 빵들과 이루는 일종의 유사함이 있다. 음식의 선물이 넘치듯이, 마찬가지로 이동하는 예수님의 몸과 함께 구원의 선물도 넘친다. 이 둘 사이에 유사함이 있다.
이것이, 이야기를 관찰하면서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접근시킬 수 있는 그러한 방법으로 얘기된다. 곧 예수님의 몸은,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마치 고갈되지 않는(무진장한), 그리고 또 넘치게 많은 어떤 양식을 의미하는 빵과 같은 무진장한 구원의 운반자다.
내 생각에 이것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빵과 예수님의 몸 사이에 수립되는 한 관계를 보기 시작한다.
우리가 그다음 최후 만찬을 접할 때 (connaitre), 그것은 말하는 것이 되는 어떤 것들이다. 이것이 예언, 성체성사의 준비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떼어져서(쪼개어져서) 무궁무진한 양식이 된 빵들과 함께 일어났던 것은 예수님의 최후 만찬과 성체 성사를 세우심을 초월하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성체성사가, 부족한 수의 빵들이 군중을 배불리 먹인 수수께끼 같은 이 이야기의 열쇠라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무한정의 양식으로서 결국 넘치게 되는 이 부족한 (결핍된) 빵들에서 밝혀지는 것이 성체성사다.
빵의 부족으로 시작된, 무진장한 양식의 표징은 기억해야 할 어떤 표징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5000명을 먹인 식사 이야기, 그것이 이야기된 대로의 (그리고 이 이야기가 그러했던 순간에서의) 이 이야기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그리고 바다 위를 걸은 예수님 이야기는 더더욱 그렇다. 그것은 수수께끼다. 이 모든 것이, 그것이 수수께끼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걸려들지 않는) 비유 안에서 (그리고 비유로서) 그들에게 이르는 (다가가는) 것을 우리는 잘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려움에 부딪치며,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귀찮은 것을 없애버리자!
귀찮은 것을 없애버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 말하자면,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 그건 전설이야. 그것은 사후(일이 지난 후)에 이야기된 것이야. 기억해둬야 할 아무 것도 없어” 등 등. 없애버리기 위해 원하는 모든 방법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당신들에게 그것에 대해 회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두 번째를 다시 시작하고, 이 두 번째 것에 대해 제자들이 질문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여러분이 그 귀찮은 것을 없애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며 오히려 고집한다. 그러나 열쇠는 주지 않는다.
이야기의 열쇠들?
열쇠들은 이 이야기에게 청해야 한다. 빵들과 예수님의 몸 사이에 다양한 형태로 서로 끊어지며 또 다시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 발생한, 이와 같이 사건들.
그리고 일어나는 (발생하는) 또 다른 것들이 있다. 곧 땅에서처럼 걸을 수 있는, 퀘백 사람들이 말하듯이 <marchable: 걸을 수 있는> 것이 된 바다가 있다. 말하자면, 육지와 바다 사이에 더 이상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혼돈의 상징으로서의 바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직 무엇이 있는가? 무진장의 빵들이 있는데, 그것은 말과 같다. 말은, 그것이(이 말이) 처음에 처음의 상태를 전혀 상실하지 않고서 끝없이 감속될(démultiplié소비될?) 수 있다. 말을 하는 이는 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 저녁 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이고, 따라서 나는 말을 상실하지 않는다! (말은 해도 해도 상실되지 않는다)
빵이 말(씀)처럼 작용하기 시작한다. 바다가 육지처럼 기능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세상인가? 이것은 그러므로 변화된 어떤 세상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무엇을 할지를 잘 모른다. 복음서를 계속해서 잘 읽어 보자. 아마도 여러분이 끝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이 변화된 세상은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우리 가까이 있을 것이다.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들이 저장되어 있다.
어떻게 이것이 비유처럼 기능(작용)하는지 잘 이해되시는지? 비유들은 저장되어 있는 말과 흡사하다 (la parole en réserve).
첫댓글 제 인터넷 사정으로 제 때에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