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답사에 나서던 6월 4일 그 날처럼 오늘도 새벽 2시쯤 눈이 떠졌다.
뭔가에 긴장하면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빨딱 일어나게 된다.
수첩에 가득 적었던 메모들과 대전지도를 펴들고
다시금 기억 속의 답사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자, 다들 준비되셨나요?
구질구질하니 기~~인 글이니 각오들 단단히 하고 보셔야 합니당.^^
사탕 한 쪽이라도 가볍게 나눠먹을 것을 준비해오라시던
안여종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마침 집에 있던 참외 몇 개를 깎아 4시 40분까지 약속장소로 나갔다.
신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답사장소인 유등천 상류로 가는 차안에서
서로 인사말을 나누게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가만 있으면 어색하다고
안선생님이 적극 소개하는 시간을 갖게끔 유도하셨다.
덕분에 그 날 처음 뵌 분들과 골고루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익힐 수 있어 좋았다.
안선생님 옆 조수석에 앉으셔서 맨 처음 자기소개를 하셨던,
자전거로 가족들과 유등천을 달려본 멋진 경험을 가진 고현주님,
그 추운 새벽에 민소매 차림으로 열정을 과시하셨던 YMCA의 멋쟁이 정은영 간사님,
말씀이 거의 없으시고 조용하신 유등천 주변에 사신다는 이승숙님,
정림동 사시는 환경운동가시자 하천생태해설가이신 이정님 선생님,
나와 같은 전민동에 사시는 동화읽는 어른의 전수경님과 남편이신 김종훈님.
모두 이렇게 새벽답사를 통해 만나뵙게 되어 정말 반가웠습니다. ^^
그 외에 모퉁이 어린이 도서관 오솔길 2기인 안은주씨와 홍주영씨,
모퉁이 도서관 관장님이신 박미라씨도 반가웠습니다.
김밥까지 싸놓고 준비하셨는데 새벽에 못 일어나
결국 참가하지 못하신 류귀애씨 넘 안타까웠어요.
박미라씨는 처음에 같이 오기로 하셨던 남편분(오재환씨)에게 사정이 생겨서
대신 작은 아들 세훈이(이름 맞나요?)를 데려오셨는데
잠이 덜 깼는지 첨엔 뾰루퉁한 표정으로 말도 없이 있다가
나중엔 어찌나 재밌게 잘 노는지 정말 귀여웠어요.
세훈이 그 날 학교에 늦진 않았지요?
등교할 시간에 늦으면 학교 안 가겠다고 무지 퉁퉁거렸는데,
답사를 하면서 누구보다 신나하고 즐거워해서 보는 어른들도 참 즐거웠습니다.
저두 나민이가 조금만 더 크면 꼭 답사에 동행하고 싶더라구요.
조만간 그럴 날이 오겠지요? ^^
둔산동 시립미술관 주차장에 들러서 유등천을 향해가기 시작.
한밭대교, 용문교를 지나 수침교에서 좌회전하여 오른쪽에 유등천을 끼고 달리며
안선생님은 운전하시랴, 설명하시랴 1인 2역을 분주히 하셨다.
태평동 버드내아파트를 지나면서는 저 자리가 원래 조폐공사가 있던 자리인데,
면섬유로 화폐를 만드는 조폐공사의 특성상 입지조건이 불순물이 없는 깨끗한 물이 필수여서 이 옆을 흐르는 유등천 물이 당시에 맑고 수량도 풍부해 조폐공사가 들어섰다는 이야길 해주셨다. 왼쪽의 태평동을 지나 쭉 가니, 오른쪽이 도마동으로 유등천을 지역사람들은 흔히 유천냇가라고 많이 불렀으며 여름엔 멱도 감고 다이빙도 하며 신나게 물놀이할 수 있는 곳이었단다. 도마동을 지나면, 복수동이 나오는데 이곳은 종숫자가 70개나 되는데 각기 그 모양이 다르고, 하루 세 번 종으로 연주하는 음악이 아름다운 종탑이 있는 혜천대학이 소재한 곳이다. 유등천 바로 옆으로 작년 여름에 분양을 마친 복수지구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는데, 그 앞의 복수교가 예전엔 다슬기와 버드나무가 많고 물이 맑기로 유명했던 곳이란다. 복수교에서부터 다음 다리인 안영교까지는 생태지구로 정해져있다고 한다. 다시 왼쪽 동네로 가서, 안영교까지 가는 동안 왼쪽에 보이는 동네가 사정동과 산성동인데, 이 동네의 유래가 바로 그 곳에 위치한 사정성이라는 산성때문이란다.(지금은 석성으로 바뀌었다. * 참고 1) 삼국사기에 따르면 사정성은 동성왕때 지어진 성으로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에 대비했다고 한다.(* 참고 2)
이 사정성을 끼고 있어서, 동네이름도 사정동, 산성동이 된 것이다. 동네 이름의 유래를 알아가는 건 참 재미난 일이다. 아하~~!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니 말이다. 아까 지나왔던 용문교 근처의 삼천동도, 대전의 3대 하천인 대전천, 유등천, 갑천이 만나는 동네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지 않은가!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즐거운 깨달음이다. 이 사정동에 있는 동물원을 지나 8.8km를 더 가면 단재 신채호의 생가가 나온다고 한다. 동물원은 왼쪽으로 빠지고, 우리는 유등천 상류에 가기 위해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는데 보문산 자락의 언고개(지도엔 ‘연고개’로 표기)를 지나게 됐다. 언고개는 왼쪽의 동물원과 오른쪽의 뿌리공원을 잇는 도로를 짓느라 확장공사중이었는데, 자연스럽게 고대로 있으면 더 좋았을 언고개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멋대로 파헤쳐져 제 모습을 잃어가는 현장이 안타까웠다. 인간들은 언제까지 자신들만의 편의를 위해 자연을 파괴해갈 것인지... 이런 공사 때문에 야생동물들이 제 삶의 터전을 잃고, 이동통로마저 훼손당해 점차 수가 줄어드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인데... 만성산 자락에 있는 뿌리공원(*참고 3)을 오른쪽으로 내려다봤는데, 말로만 들어오던 뿌리공원의 새벽 이내에 잠긴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작은 강이 흐르는 위에 만성교가 있는 모습도 무슨 동양화에서나 봄직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만성교엔 모든 성씨가 한 곳에 모인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 뿌리공원이 보이는 곳에서부터 벚꽃길이 펼쳐지는데, 봄이면 아주 멋진 장관을 연출한단다. 아직 사람들에게 안 알려져있고, 도로도 한적한 편이라니 내년 봄엔 꼭 이곳으로 벚꽃나들이를 와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답사차량에 타고 있던 모든 분들이 그 생각 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산내까지 연결된 이 도로는 보문산 남쪽을 휘감아 도는 길로 대전의 중남부에 위치한다.
언고개를 넘어서 침산교를 지나 우회전하면 바로 방아미(지도엔 ‘방아뫼’로 표기) 마을이 나온다.(낮은 산의 모양이 방아미-디딜방아처럼 곡식을 찧는 방아의 끝부분, 혹은 다듬잇돌이나 곡식이나 궤짝 따위를 땅바닥에 쌓을 때, 밑에 괴는 나무모탕-같이 생겼다 하여 방아미라 불리우는 모양이다. 이 때문에 마을이름도 침산‘砧山-방아 혹은 다듬잇돌 모양의 산’동이 된 거 같음.) 방아미, 점말, 놋점골의 3개 마을로 구성된 대전 중남쪽의 끝마을인 침산동은 방아미 마을 뒷산에 단칸 기와집으로 된 산신당에서 음력 섣달 그믐날 산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더 들어가 오른쪽에 보이는 마을이 점말(지도엔 ‘점촌’으로 표기)이라고 예전에 장승제를 지내던 탑이 있는데, 1967년엔 이곳에 수력발전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단다. 직진하면 수련교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방아미 2길로 유등천으로 통하는 길이다. 둥구나무 거리에 들어서면 보호수로 지정된 거대한 느티나무가 오른쪽에 보인다. 이 동네의 허한 부분을 보하기 위해서 느티나무를 천변에 쭈욱 심어놔 장관인데, 느티나무는 이렇게 허한 지형을 보하기 위해 많이들 심는다고 한다. 성북동 방동저수지에서 우회전하면 나오는 잣띠마을의 수령이 2~3백년된 느티나무들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처음에 심어졌단다. 한편 갑천변의 야실마을에선 소나무를 심어 허한 지형을 보했다고 한다.
어른 서넛이 들어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무쇠솥이 걸려있다는 개고기집 입구에 차를 대놓고 모두 내려 유등천 상류를 향해 걸어걸어 올라갔다. 물안개가 여리게 서린 유등천의 상류는 꼬마물떼새와 중대백로 쇠백로가 분주히 아침을 열고, 알싸한 밤꽃냄새가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 코를 간질이며 조용히 우리를 맞았다.(이정님선생님께서 물꽃 얘기를 하셔서 뭔가 궁금해 사전을 뒤적여봤더니,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물꽃이 물안개와 비슷한 그 무엇이 아니라 전혀 다른 거더라구요. *참고 4를 보세요.)
개고깃집 앞의 인공보를 건너 수영금지 표지판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으로 난 산길이 있는데, 경운기 바퀴 자국이 있는 걸로 보아 경작로로도 이용이 되는 모양이다. 이 길의 왼쪽 윗편이 바로 놋점골로 침산동을 이루는 세 마을 가운데 가장 큰 마을이란다. 놋점골이란 이름은 놋그릇을 만들어 팔던 점방이 있어서 그렇다는 사료가 있는가 하면,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아오신 할아버지 말씀으론 마을의 형태가 놋젓가락 모양을 닮아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놋점골은 50~60 세대 정도가 모여 촌락을 이루며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 침산동 다른 마을의 제사 있는 집 가운데는 집에 놋그릇이 없어 놋점골로 유기며 제상을 빌리러 오곤 했단다. 그런데 우리가 찾은 오늘의 시점엔 딱 한 가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깊은 쓸쓸함을 느끼게 했다. 먼 시골까지 가지 않아도 6~70년대부터 가속화된 도시화로 인해 빚어진 심각한 이농현상과 버려지고 있는 고향을 확인하는 안타까운 자리였다.
유등천 상류를 되짚어 올라가는 길엔 그야말로 뽕나무 천지였다. 푸른빛, 붉은빛을 거쳐 검붉은 빛으로 익어가는 오디를 수선스레 따먹으며 사진도 찍고, 안선생님이 재미삼아 해주신 거북이와 뽕나무 이야기의 교훈이 무얼까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1/3쯤 가서 잠깐 멈춰 2002년 대전일보에 나온 ‘유등천에 수달 서식’이란 기사를 보여주시며, 이곳 어디쯤에 수달이 살고 있는 거 같은데, 여기 사시는 분께 여쭤보니 진짜로 저녁 해 질 무렵에 바위 틈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는 수달을 보신 적이 있단다.(이 사실은 우리끼리만 알아야 되는 건데, 말해도 되나?) 기사에 따르면 2002년 당시에 발견된 수달은 안영교 밑에서 차에 치여죽은 6개월짜리 어린 수달이었는데, 수달은 가족단위로 서식하고 하룻밤에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동거리가 긴 동물이라 그 할아버지 말씀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신단다. 수달은 이곳 말고도 대전의 갑천과 신탄진의 무슨 댐(대청댐은 아니었던 거 같고... 뭐였죠, 안선생님?)에서도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흔적이 뭐냐고요? 바로 수달 똥이랍니다. 흐흐흐^^) 상류로 가는 길에 만난 징검다리가 놓인 여울. 신발을 벗고 맨발로 가는 분들도 계셨지만 뒷감당이 안 되어 그냥 신발 신고 가는 분들도 많았는데 난 신발 신고 아슬아슬하게 징검다리를 통과했다. 징검다리를 지나 올라가면서 하천생태해설가이신 이정님 선생님 옆에 꼭 붙어서 자연생태형 하천이 어떻게 생긴 거고, 왜 그런 자연형 하천이 필요한지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열띤 강의를 들었다. 격주 토요일마다 유등천을 도보로 답사하는 프로그램이 환경연합의 소모임인 하천해설가 메뉴로 들어가면 있다고 하니 꼭 가보고 다음에 신청하기로 했다.(사무실 : 331-3700) 보랏빛 엉겅퀴와 자잘한 지칭개, 주렁주렁 열린 오디들, 연분홍 메꽃, 이제 잎이 패이기 시작한 갈대숲, 멋진 위용을 과시하는 느티나무 등을 지나쳐 칼등바위에 도달했다. 이 바위를 경계로 대전과 금산으로 나뉜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바위가 있는 지점에서부터 눈을 위로 돌리니 허수아비가 서있는 인삼밭이 쫘악 펼쳐져 있다.
두견이가 신비롭게 우는 사이 파랑새, 꼬마물떼새, 중대백로, 멧비둘기, 산까치 들이 아침을 분주히 준비하는 모양이 보인다. 산소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물살이 센 여울가에 돗자리를 깔고 새벽참을 먹었다. 안선생님 사모님께서 정성스레 준비해주신 따끈따끈 맛난 국수와 전수경님의 메이플시럽으로 마무리된 꿀떡과 참외, 박미라씨의 다종다양한 떡세트, 정은영간사님이 준비한 걸로 여겨지는 연양갱과 사탕, 젤리, 방울토마토,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먹을거리들로 배부르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참을 맛나게 먹은 뒤에 고현주님이 여울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해주시며, 보와 달리 여울은 인공이든 천연이든 만들어만 진다면 생태하천을 만드는 데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셨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새소리’(CD포함)이란 책과 ‘늦잠 자는 까치, 일찍 일어나는 까마귀’(다카하시 作)에 나오는 새에 관한 내용을 짤막하게 소개해주셨는데 꼭 읽어보리라고 다짐했다. 새벽산에서 울리는 두견새 울음을 소쩍새 소리와 혼동해버린 나의 무지를 씻어버리기 위해서라도 꼭!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며 이름은 잘 모르지만 자주 보는 풀꽃들을 사진에 담았다.
나중에 들꽃사전을 뒤적여서 반드시 이름을 알아내도록 해야지.
징검다리에 이르러선 세훈이의 장난끼로 인해 박미라씨와 홍주영씨가 온 몸이 물에 젖는 물싸움이 터져 한바탕 신나게 웃기도 했다. 오솔길 초입 무렵에 와서, 노란색 흰색 꽃이 어우러져 피는 인동초를 보았다. 자주 봤는데 이것이 인동초였는 줄 이제야 알게 됐다.
산에서 야영할 때 모기 쫓을 때 이용한다는 산초나무(* 참고 5)도 보았는데, 손가락으로 비비면 뭔가 형용할 수 없는 아리까리한 독특한 향이 피어올랐다. 모기가 싫어할만도 하지. 베트남인가 하는 나라에선 모든 음식에 어떤 향료를 넣는데, 이 향을 모기가 싫어해서 모기가 접근을 하지 않는다는 소릴 들었는데(관광 간 외국인들만 잔뜩 헌혈봉사하고 온댄다) 어쩜 그 향료가 이 산초향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베트남 갈 때 산초잎 몇 개를 떼어가서 함 비교해볼까? ^^
다시 차에 타고 돌아오며, 유등천에 대대로 자리잡고 살아온 고려시대 호족이었던 부안 임씨와 합천 이씨ㅡ> 충주 박씨/ 밀양 손씨(사위) <ㅡ 부안 임씨에 이르는 계보와 가장동, 내동에 터를 잡아서 무수동에서 세도를 떨친 안동 권씨에 대한 안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이 부분은 문화유산자료실에 안선생님이 올려주신 자세한 글(* 참고 6)이 있어 아래 퍼왔으니 참조하시길.
대전 시내 오는 방향으로, 침산교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작은 오솔길이 보이는데 쭉 따라가면 산내면허시험장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길 위에 ‘유회당’이라고 별당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유산이 있다고 한다.(* 참고 7)
대전엔 참 가볼 곳도 많다.^^
이렇게 해서 왔던 길을 되짚어 8시 10분쯤 전민동에 도착했다.
언제 오냐는 신랑의 전화가 불이 나게 울려대고 부랴부랴 집에 도착하니, 8시 16분.
22개월 된 딸 나민이가 깨어서 엄마 찾느라 울어서 그런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맞이하고,
간밤의 회식으로 아직도 술이 덜 깬 신랑은 후다닥 출근하느라 바톤 터치!
나민이 우유먹여 달래놓고, 그동안 미뤄온 여름옷 꺼내기 대행사를 마치고도
여전히 여유만만한 오전 10시.
하루를 일찍 시작해도 집안에만 있으면 좀 무기력해지기 십상인데,
이렇게 자연의 새벽정기를 듬뿍 받으며 유등천 답사를 하고 오니 ]
힘이 펄펄 남아돌아 신랑이 퇴근하는 오후까지 나민이랑 신나게 놀았다.
다음 기회에도 형편만 된다면 또 참가해야지! 아자! ^^
즐겁고 유익한 새벽시간을 마련해주신 안여종 선생님과
하천의 생태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켜주신 이정님 선생님께
(이 두 분은 어제부터 시작한 대전문화자원봉사 교육장에서도 뵀네요.^^)
깊은 고마움을 전하며 길고 지루한 글 마치겠습니다.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어염. 호호호.^0^
주소 : 대전광역시 중구 사정동(창평부락)
지정 : 기념물 14호
시대 : 삼국 시대(백제)
종류 : 성(산성)
◦ 유적내용 : 대전시에서 안영동을 거쳐 금산, 진산에 이르는 국도변에 위치한다. 산성동의 산성국민학교를 지나 약 2.5km 지점의 표고 160m의 산위에 축조되었다. 형태는 테뫼식 산성으로 석축산성이다. 석축으로 된 둘레 약 350m의 성벽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현재는 윤곽만 확인할 수 있다. 성의 내부는 서향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성내 동남우의 고지에는 추정 건물지가 있다. 성은 대전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요로(要路)를 지키기 위하여 축조된 듯하다. 남쪽으로는 흑석동 산성과 북으로는 유성 산성 등과 연결되고 있으며 대전 동쪽의 산성들과도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1990년 5월 28일 지정.
참고문헌 : 《대전시사》; 《대전시 문화유적총람》
* 참고 2 : 동성왕과 사정성
백제시대 문주왕과 그의 아들 삼근왕이 불과 2∼3년 만에 시해되는 등 불안정한 왕권을 확고히 한 사람은 24대 동성왕이다. 일단 왕권의 안정을 위한 동성왕의 치적을 통해서 미약했던 백제왕권의 강화를 짐작할 수 있다. 웅진 천도 이후 허약하던 백제 왕권은 동성왕대에 이르러 비로소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된다. 동성왕은 나제동맹을 맺었지만 신라의 급성장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라를 방어할 목적으로 왕 8년에는 우두성( 지금의 서천군 한산 ?)을 쌓았으며, 왕 10년 7월에는 사현성과 이산성을, 왕 20년 7월에는 사정성(지금의 대전 사정동 뒷산)을 쌓고, 23년 7월 탄현(대전 식장산 부근)에 목책을 세워서 신라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대전지역 산 능선인 계족산성을 비롯하여 탄현 ·질현성(질현은 사깃재라고도 하며, 동구 가양동에서 비룡동을 넘는 고개 위의 산성으로서 시 기념물 제8호) ·능성(대전 가양동에서 비룡동을 넘는 비름들 고개 북쪽의 성으로서 시 기념물 제11호) ·갈현성(대전 용운동에 있는 성으로서 시 기념물 제12호)등과 옥천 부근에 있는 환산성 ·서산성 등 30여 개에 이르는 많은 성을 축조하여 사후에 "동성왕(東城王)"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 개 요 : 중구 보문산과 방화산 사이에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갖춘 뿌리공원이 있다. 뿌리공원은 바로 효를 바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알게 하여 경로효친 사상을 함양시키고 한겨fp의 자손임을 일깨우기 위해 세운 공원이다.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일원 6만2천여 평의 부지에 세계 최초로 성씨를 상징하는 조각품 및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효를 주제로 1997년 11월 1일 개장한 테마공원이다. 뿌리공원은 충효사상 및 주인정신을 함양시키는 교육공원이면서 가족 단위의 다양한 이벤트 행사가 마련된 가족친화공원이다. 또 심신수련, 건전한 청소년 육성의 체육 공원이자 천혜의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서의 특색을 잘 나 타내고 있다. 공원 정상의 삼남기념탑은 공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서 영.호남, 충청도의 화합과 상부상조를 기원하는 의미의 상징성을 부여한다.
# 주요 시설물 : 만성교(모든 성씨가 한 곳에 모인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 뿌리공원 표석, 만남의집 관리사무소,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를 담은 비(碑)가 있다. 전문조각가가 성씨별 씨족의 유래를 나타낼 수 있는 조형품을 만들었다. 전면에는 조상의 유래, 뒷면에는 작품설명 및 기타 참고 자료가 조각된 성씨별 조각 품 72점이 설치되어 독특한 공원 이미지를 전해주고 있다. 공원 중심에는 잔디광장이 조성되어 각종 행사장으로 활용이 가능하며, 잔디광장 주 변의 순환도로를 이용한 어린이 교통안전교육장은 유치원 및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 으로 미니카를 직접타면서 현장체험을 통한 올바른 교통문화를 습득하는데 도움을 준다. 수변무대와 수변스탠드에서는 야외공연, 각종 문화행사 및 야외결혼식에 적합하다.
# 기타시설 : 자연관찰원, 장미터널, 유실수단지, 정글짐, 시소, 분수, 평행봉 등의 운동 및 유희시설, 초막, 평상, 벤치, 소폭포등 각종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음.
참고사항 : 앞으로 모든 성씨에 대한 족보 등의 자료와 자신의 뿌리를 찾으며 옛 선조들의 생활모습 등을 관람할 수 있는 민속박물 관이 건립될 예정이다. 또 아들바위 부근의 인공폭포, 인근 보문산에 조성될 동물원 과 연계한 출렁다리를 개설할 계획이며 남부순환 고속도로 상당 복개지를 이용한 다 목적 광장 및 등산로 개설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명실상부한「충효정신」함양의 요람이 되도록 공원을 지속적으로 확충할 계획이다.
# 교통편 : (시내버스) 310,315번 : 비래동 시점으로 대전역을 경유하여 공원 앞까지 운행 (3분 간격) 320, 321번 : 공원입구 경유 운행 (10분 도보) (대전역에서 대둔산 방향으로2-30분 소요) 310-1번 : 한빛고등학교까지 운행 (5분 간격)
# 주변명소 : 보문산성, 비파산성, 계족산성, 보문사지, 봉소루, 충절사
(작성기준일: 2003.10.29)
* 참고 4 : 물꽃 water bloom
호수와 같은 담수(淡水)에 물의 흐름이 없어, 플랑크톤이 대량으로 발생하여 거품모양으로 물 위에 떠 있는 것. 수면에 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 하여 물꽃이라고 부른다. 조류(藻類)·규조류(硅藻類)·쌍편모조류 같은 식물성 플랑크톤이 번식을 하면서 개체군의 폭발적 증가를 주도하는 경우에 나타나는 일이 많다. 물꽃은 보통 질소·인 등의 염류(鹽類)가 늘어난 경우에 잘 나타나므로, 호수 등이 부영양화(富營養化)한 표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또 계절적으로는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이러한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식물성 플랑크톤이 이상적으로 발생하면 수면 가까이는 용존산소(溶存酸素)가 과포화되고 깊은 곳은 산소가 결핍되므로 어류 등에 영향을 미친다. 이 점에서 바다에 적조(赤潮)가 발생하는 것과 비슷하다. 국지적으로 발생하는 일이 많아서 큰 강의 웅덩이진 곳이나, 작은 호수, 못 등에 흔히 나타난다.
* 참고 5 : 산초나무 (山椒- Zanthoxylum schinifolium)
쥐손이풀목 산초과의 낙엽관목. 겉모습은 조피나무와 비슷하지만 특유의 냄새가 나며, 작은가지의 가시는 마주나지 않고 1개씩 떨어져 붙기 때문에 구별할 수 있다. 자웅이주이며 잎은 어긋나고 홀수깃꼴겹잎이다. 작은잎은 13∼21개로 거의 마주나며, 종이질이고 바소꼴 또는 긴 타원모양 바소꼴이다. 길이 1.5∼3.5㎝이며 가장자리에는 작은 톱니가 있다. 잎의 주맥에 가는 털이 있다. 여름에 줄기 끝에 길이 3∼8㎝의 산방꽃차례를 이루며 연한 녹색의 작은꽃이 많이 핀다. 꽃은 단성화이다. 열매는 길이 4㎜로 약간 공모양의 대과(袋果)이며 끝에 짧은 돌기가 있고, 자홍색으로 익으며 속에 검은색의 광택이 있는 종자가 있다. 열매는 향미료로 쓰며, 과피는 건위·치통·이질 등의 치료제로 쓴다. 한국·중국·일본에 분포한다.
---> 비교 : 초피나무 (Zanthoxylum piperitum)
쥐손이풀목 운향과의 낙엽활엽관목. 높이 약 3m. 잎은 어긋나기하며 홀수깃꼴겹잎이다. 작은잎은 9∼13개로 달걀꼴이며 가장자리에 4∼7개의 둔한 톱니가 있고 중앙부에 황록색 무늬가 있으며, 향기나는 기름샘이 있다. 잎자루는 끝의 작은잎에만 있고 옆의 작은잎에는 없다. 꽃은 자웅이주이며, 5∼6월에 황록색으로 총상꽃차례를 이룬다. 꽃덮이조각은 5개이며, 수꽃에는 5개의 수술이 있고 암꽃에는 떨어진 씨방과 2개의 암술대가 있다. 열매는 진한 갈색의 삭과이며 검은 씨가 있다. 특유한 향기와 신맛이 있어 어린잎과 과실은 향신료로 쓰인다. 한방에서는 가을에 열매를 따서 햇빛에 말려 씨는 제거하고, 위한·심복통·설사·이질·위염·소화장애·회충구제 등의 약으로 쓴다. 또 민간에서는 동상치료제로, 이 나뭇가지를 삶아낸 물에 찹쌀을 넣고 끓여 식혀서 쓴다. 한국·중국·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대개 충청도 지역의 안동권씨들은 晩悔 權得己와 炭翁 權 로 대표되는 저명 가문이며, 흔히 남인계열로 분류된다. 그리고 대전과의 인연이 탄옹 대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내력을 캐어 보면, 안동권씨 가문이 대전지역과 인연을 맺는 것은 이보다 앞선 조선초기의 참의공 權齡(1441∼1509) 때였다. 그는 충주박씨 朴光理의 손자인 朴信 의 사위로 대전지역과 맨 처음 연고를 맺었고, 이로부터 150∼200년이 지난 만회·탄옹 대에 은진송씨, 파평윤씨, 남원윤씨, 전주이씨 등과 사돈·겹사돈의 연혼을 맺어 명실상부하게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사족 가문으로 발돋움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초기 안동권씨 權齡의 대전지역 이거 과정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합천이씨 李春啓이다. 그는 고려말엽 戶部尙書와 吏部侍郞을 지냈던 인물로 권문세가의 한 사람이었다. 즉 그의 부친은 樞密院副使 上護軍을 역임했고, 조부는 태자태사, 상장군, 문하시중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杜門洞 72인의 한 사람으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일족을 이끌고 대전 유등천변의 무수동 지역에 은거한 것으로 기록된다.(「李春啓墓碣銘」) 권문세족이었던 이춘계는 이곳에 이거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사위로 충주박씨인 朴光理를 맞이한다.
그런데 이 朴光理가 또 형조전서와 호서백을 지낸 부안임씨 林騫과 사돈지간이 되면서, 박광리의 아들인 朴 이 임건의 사위가 되었다. 부안임씨 역시 누대에 걸쳐 영상, 좌상, 판서를 배출한 고려의 권문귀족이었고, 이로서 합천이씨와 부안임씨, 밀양손씨, 충주박씨가 인척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동권씨는 바로 이러한 인척관계의 한 고리인 충주박씨의 사위로 이 지역에 연고를 가졌던 것이다.
) 최근묵, 「17세기 대전지방 사림의 기반」, 『도산학보』 4집, 1995.
안동권씨로서 대전지역에 맨 처음 연고를 마련한 권령은 처가인 충주박씨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십분 활용하면서 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충추박씨는 처가인 부안임씨로부터 많은 토지를 분재받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忠州朴氏家乘』 朴光理條에 작은 기록이 엿보인다. 즉 고려말 권신 임견미가 탐내어 뺏기를 좋아해서 그 종족 林騫와 田民을 놓고 訟事를 벌이게 되었는데 박광리가 마침 관장으로 올바로 처단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뒤에 박광리의 아들 朴 이 林騫의 사위가 되게 되자, 그가 말하기를 "兎山의 전민은 우리집 유물인데 의랑공(박광리)의 힘을 입어 오늘에 보존되게 하더니 하늘이 의랑공의 아들로 하여금 나의 사위가 되게 하였다. 특별히 이 전민을 주노니 다른 자녀들은 이를 의논할 바가 아니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동권씨로 대전지역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權齡(1441∼1509)은 바로 충주박씨 朴 의 네째 아들인 朴信 의 사위였다. 權齡은 權溥의 6세손으로 문음으로 관계에 진출하여 진위현감 등을 역임하고 공조참의에 이르렀던 인물
) 權齡 墓碑(1511년).
로 그의 묘소는 현재 대전시 서구 괴정동에 있다. 權齡이 처가인 충주박씨가로 부터 분재받은 토지가 바로 지치울(지금의 대전시 탄방동, 괴정동) 일원의 넓은 토지라 전해진다. 이와 관련되는 기록으로 탄옹의 친필유서
) 이 자료는 권태원 교수가 제공한 자료『曾王考炭翁府君遺書』로 경신년 8세손 永頀의 添記가 있다.
에서
유성의 전택은 參議府君(權齡) 때에 마련된 것으로 반드시 외손에게 전하지 말고 방매하지도 말라. 이는 오로지 우리 집안의 家傳世業으로 삼도록
하라고 유훈을 하고 있다.
晩悔 權得己家 分財記 硏究 67 68 道山學報 (第7輯)
이렇게 하여 충주박씨와 인연을 맺으면서 대전지역에 터를 잡은 안동권씨들은 참의공 權齡 이후 연이어 관로를 개척하였으니, 이우성이 만회 권득기를 설명하면서 "부친의 형제 克禮(이조판서), 克智(예조판서)가 모두 고관을 역임하면서 재경사족으로 화려한 혼척기반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하듯이
) 이우성, 「17세기 정치사회적 상황과 만회·탄옹의 역사적위치」, 『도산학보』 창간호, 1992.
장자 弘 : 문과, 대사헌, 전라감사, 개성유수
차자 博 : 문음, 공주목사, 상주목사
손 德裕 : 문음, 종묘서령
증손 克仁
克義 : 문과, 호조좌랑
克禮 : 문과,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 이·호·예조판서,
충청·함경·경삼감사
克智 : 문과, 대사간, 대사헌, 병·형조참판
) 이 시기 안동권씨 가계의 묘도문자를 많이 찬술한 月沙 李廷龜는 克智의 사위였다.
克寬 : 문음, 선공감역
등으로 괄목할 인물들이 이 가문에서 연이어 배출되었던 것이다.
중구 사정동을 지나 언고개를 넘으면 왼쪽으로 굽이들어 바로 근래에 세운 유회당 입구비(入口碑)가 있다. 그 비에서 약 500m정도 떨어진 보문산 남쪽 기슭 구억말에 유회당이 보인다.
유회당은 1707년에 유회당(有懷堂)권이진(權以鎭, 1668~1734)이 선천인 증(贈) 찬성(贊成) 권유(權 )의 묘(墓)를 후, 부모 묘소의 첨배소(瞻拜所)로 제사를 지내고 아울러 독서(讀書), 강마지소(講磨之所)로 쓰기 위해 세웠다. 그리고 시묘소(侍墓所)인 삼근정사(三近精舍)와 지금은 장판각으로 쓰이는 별묘(別廟)를 지으니 모두 선친을 생각하는 뜻, 즉 유회이인(有懷二人:부모를 생각함)이라는 뜻으로 집을 짓고 스스로 호를 유회당이라 하였다〈본래의 호는 (수만헌(收慢軒)이었다〉. 권이진의 자는 자정(子定), 시호는 공민(恭敏)이다.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는 증조이고, 탄옹(炭翁) 권시(權 )가 조부이며, 권시의 둘째 아들인 권유의 셋째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은 그의 외조부이다. 권이진은 22세까지는 외조부 송시열에게 사사하고, 명재(明齎) 윤증(尹拯)은 그의 부친 권유와 오랫동안 교분을 나누었고 권이진과는 사승(師承)관계로 연결된다.
당명(堂名)인 "有懷(유회)"는 명나라 말기 전목재(錢牧齎)의 "明發不상 有懷二人"(二人은 부모를 지칭)이란 시에서 취해 쓴 것인데 이름그대로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런 마음을 늘 품고자 하는 뜻이다. 현재 남아 있는 현판의 글씨는 권이진의 도의지교(道義之交)인 주암(朱庵) 박순(朴洵)의 글로 밝혀졌다. 당(堂)내부의 대청에는 우측에 구시재(求是齎)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권득기의 십자훈(十字訓)과 권시의 "사필구시(事必求是)"훈계(訓戒)에서 따온 것이다. 좌측에도 "불사재(不斯齎)"의 현판이 붙어 있다. 이외에 1720년 권이진이 지은 「명당실기(名堂實記)」현판도 달려있다. 기궁재(寄窮齎)는 선친 묘소의 재실(齋室)로 안동권씨가 아닌 관리인이 종토(宗土)를 경작하여 제사를 모실 준비를 하는 공간이었다. 예전에는 산(山)의 관리인이 따로 있었으나 근래에는 재실 관리인이 산의 관리도 함께 한다. 기궁재 상량문에 의하면 1920년에 중건한 기록이 있다.
장판각(藏板閣)은 원래 1734년에 별묘로 지어 1822년 중건되었는데, 현재 유회당 권이진의 문집 판목(板木)246판이 보존된 유회당의 부속건물이다. 판목은 유회당의 증손인 좌옹(左翁)권상서(權尙恕)가 왼손으로 써서 순조초(1807~1827)에 판각한 전 12권으로 배나무와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이 문집에는 시(詩)·소(疏)·장계(狀啓)·의서(議書) 등이 실려 있으며, 유회당이 재임하던 시기(1700~ 1734)의 사료가 많이 실려 있다. 특히 대일본외교사료(對日本外交史料) 및 성리학 관계 자료는 당시의 학문과 국제정세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근정사(三近精舍)는 유회당이 부모(父母)의 은덕을 생각하여 1715년(숙종 41) 부모의 묘소 가까이에 시묘소(侍墓所)를 세웠다. 「삼근정사(三近精舍)」,「수만헌(收慢軒)」,「하거원(何去園)」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삼근(三近)"이란 물이 가깝고 산이 가깝다는 뜻이며, 수만헌(收慢軒)은 범석호(范石湖) 시(詩)의 "송초영기고궁방방 천석종수만낭신(松椒永奇孤窮 泉石終收慢浪身)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고, 하거원(何去園)은 춘추전국시대에 타국으로 망명가다가 선영(先塋)에 돌아오는 고사(故事)를 본받아 선영을 지키라는 뜻에서 지은 명칭이라 한다. 전형적인 민가풍(民家風)의 가옥이다.
---> 유회당 기궁재
유회당 좌측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는 재실(齋室) 건물로서
평면이 ㄱ자형으로 자획되었는데
건물의 중앙 부분에 2칸 통간(通間)의 넓은 대청을 들였다.
대청의 우측으로는 1칸씩의 건너방과 웃방이 있고
좌측에는 1칸반 규모의 안방과 1칸의 웃방
그리고 안방 옆으로 꺽이어 1반칸의 부엌을 들였다.
구조(構造)는 자연석으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석(柱礎石)을 놓고 민흘림 방형(方形) 기둥을 세웠는데
주상부(柱上部)에는 초각(草刻)이 없는 장방형의 양률을 결구하였다.
가구는 전후 평주위에 대량을 걸고
위로 양편에 동자주를 세워 중도리와 종량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수법이나
여기서는 종량도 생략되었고 중도리도 대량 위에 직접 놓고 있다.
따라서 체형대공을 대보위에 직접놓아 종도리와 함께 지붕 하중(荷重)을 받도록 하였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기궁재 상량문에 의하면 庚申年(1920년)에 중건한 기록이 있다.
--> 유회당 유물(有懷堂 遺物)
지정 번호 : 문화재자료 제 17 호
시대 분류 : 조선시대
유적 위치 : 중구 무수동 94
권이진의 자(子)는 자정(子定)이고 호(號)는 유회당(有懷堂), 만수헌(漫收軒)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명제 윤증(明齊 尹拯)의 문인이며 글씨에도 능했다.
1693년(숙종1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94년(숙종20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와 사서(司書) 동래 부사(東來府使) 등을 역임하고
1723년(경종3년)에는 사은(謝恩)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갔었다.
1728년(영조4년)에 호조판서를 지내고 후에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공민(恭敏)의 시호(諡號)가 내렸고 유회당집이 세전(世傳)한다.
대표적인 유물은 홍패, 척패, 인장, 군 사령기, 군도, 친필일기, 교지류 등이다.
칼등 바위 사진은 찍지도 않았는걸요? 그나저나 내 사진 봤다고 이인숙씨 사진 안 올리면 반칙이징.... 그리고, 후기.. 기대했던대로 아주 꼼꼼히, 잘 남겨주셨네요. 프린트 해서 나중에 가족들과 찾아 갈때 유용하게 써먹어 볼라고 합니다. 애쓰셨어요! 화이팅~ (왠 화이팅 ㅋㅋ)
우와~~~~!!!! 대단하세요. 저의 소감은..... 좋았습니다. ^^ 그냥 행복했어요. 유등천 아름다운 물안개를 마음 가득 담기엔 한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고 새벽을 나누며 뜨는 해를 본다는 자체가 황홀했습니다. 다음번엔 새벽밥을 지어서 나가볼랍니다. 김치랑^^
첫댓글 아참, 사진은 홍주영씨가 넘 멋지게 잘 찍어주셔서 제 껀 안 올리기로 했습니다. 다만 칼등바위 사진을 잘못 올리셨길래 그거하고 산초잎 사진만 올릴게요. 혹시 사진 더 요청하시는 분 계시면 봐서 더 올리도록 합지요.^^
칼등 바위 사진은 찍지도 않았는걸요? 그나저나 내 사진 봤다고 이인숙씨 사진 안 올리면 반칙이징.... 그리고, 후기.. 기대했던대로 아주 꼼꼼히, 잘 남겨주셨네요. 프린트 해서 나중에 가족들과 찾아 갈때 유용하게 써먹어 볼라고 합니다. 애쓰셨어요! 화이팅~ (왠 화이팅 ㅋㅋ)
여보세요... 이렇게 자세히 많이 쓰면 어떻게 합니까? 다른 사람 기죽어 기행후기 쓰겠습니까... 대단합니다. 가본 곳은 유등천 뿐인데 주변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도 풍성하여 별거아닌 새벽답사가 대단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우와~~~~!!!! 대단하세요. 저의 소감은..... 좋았습니다. ^^ 그냥 행복했어요. 유등천 아름다운 물안개를 마음 가득 담기엔 한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고 새벽을 나누며 뜨는 해를 본다는 자체가 황홀했습니다. 다음번엔 새벽밥을 지어서 나가볼랍니다. 김치랑^^
칼등바위 사진을 안 찍으셨군요. 착각해서 죄송해요, 홍주영씨^^ 사진 곧 올릴게요. 안여종선생님과 숲속으로의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근데 숲속으로님은 누구시져?
와우 대단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물안개중 물꽃이라고 불리우는게 있다고 어른들이 예기했던게 생각나서 말씀드렸는데...... 물꽃에 대해 다른 의미도 있군요.
아, 어쩐지~` 그때 말씀하신 것은 좀 다른 거란 생각이 들긴 했는데. 검색한 자료엔 이거만 나와서요. 좀 더 찾아봐야겠네요. 제가 지금 서울 시댁에 와있어서 이번 일요일에나 사진 올릴 수 있겠어요. 쪼매만 지둘려주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