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월의 뼈아픈 상처를 더듬으며 ---
1993.06.10 글 / 김종갑 향우회 고문
압구정은 배 과수원과 맑은 샛강을 가지고 마을 사람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온 아름다운
고향이지만 6월이 돌아오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향사람들이 환란을 당한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40여년이 지난 얘기라 제게는 기록도 문헌도 없이 빈약한 기억을 더듬어서 뼈아픈 난리 속에
고향사람들이 지내온 날들을 적어 보려 합니다.
미비한 점과 생존해 계신 가족들의 마음을 다시 아프게 해 드릴 것이 염려되기도 합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일정시대 대동아전쟁이 한창인 때에 윤한식씨. 라학선씨. 이유남씨. 조기행씨.가
징용을 나갔다가 8.15 해방이 되어 세분은 돌아왔으나 조기행씨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역시 일정시대에 병정으로 김병선씨. 이기종씨. 김해수씨. 등이 출정 나갔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돌아왔습니다.
일본이 망하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 국군으로 이중국씨. 이재석씨. 조동한씨. 임구현씨 정상군씨.
임일현씨가 출정 나갔으나 6.25난리를 겪고 이중국씨. 이재석씨만 돌아왔을 뿐 나머지는 애석하게도
영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6.25난리 때는 인민군이 순식간에 서울까지 진격해 들어와 피난을 떠나는
서울시민들로 말죽거리길이 온통 메어졌습니다. 서울사람들이 다 빠진 후에 압구정 사람들이 피난길을
나섰는데 학동 가는 길에는 전사한 국군의 시체가 수 십 명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피난을 멀리 간 사람은 온양. 안중. 등지로 가까이 간 사람은 옛골. 고등리. 판교. 태자. 신갈. 등지였는데
피난 가는 피난민 보다 인민군이 벌써 앞질러 가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방송이나 신문을 접할 수도 없어 무성한 소문에만 귀 기울일 때입니다.
인민군이 부산 멀지 않은 곳까지 진격을 해서 정부가 제주도로 이동한다느니. 얼마 지나서
이승만 대통령의 주선으로 유엔군이 반격. 대대적인 비행기 폭격으로 낙동강 전투에서 대승.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과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진격했다느니.
또 얼마가 지나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남하한다는 소문과 함께 이북에 살던 주민들이 수십만.
수백만 명이 남쪽으로 피난 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언주면에서도 당시 37.8세 이하의 남자들은 모두 남하하라는 명령으로 김병선씨가 언주면 전체 책임자로
인솔하고 압구정리 청년단장 전동환씨가 청년들을 인솔하여 남하하였습니다. 당시에 듣기로는 김병선씨의
도움으로 취사반에 들어가 배고픈 슬픔을 달랜 사람들이 많았다고도 합니다.
당시 공산정권으로 바뀐 동네에는 조덕행씨 주관으로 이중필씨등이 일을 보다가 그 관계로 나중에
월북했고 이우석씨가 당시 대학생으로 재학 중 월북했습니다. 그 후 나와 이차종씨가 동네일을
보았지만 통일이 되면 그 사람들을 반가운 마음으로 상봉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 입대한 사람들
중에 이중만. 이명현. 이중범. 전갑수. 박순양. 임칠현. 김상천.이 있는데 모두 장교들이다.
그때 가슴 아픈 있었으니 공회당에서 피난살이를 하다가 김종권씨 누이동생 김종순이가 17세 처녀로
애석한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또 전염병이 극성을 부려 영일이 할아버지. 윤억석씨. 이강로씨. 김희준씨.
전응길씨가 돌아가시고 김종갑이도 오늘 저녁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소문이 동네에 돌기도 했답니다.
1951년도에는 정신없는 난리 통에 보리밭에 비료도 못 주었는데 대 풍작이고 과수원에도 소독한번
못했는데 충치하나 없이 역시 대풍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사람이 없어 배를 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피난 갔던 장사꾼이 와서 사자고 하길 레. 농사 비용이안 들었으니 싸게 팔아 부지로
2백만 원을 받고 밭 채로 넘겼습니다.
그 장사꾼은 2배를 팔아 1,400만원 즉 7배나 이익을 남겼다고 나중에 술을 사주며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언뎅이 배 밭은 8백만 원에 팔았는데 소문에 4~5천만 원이 풀렸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인해전술로 남하한 중공군이 평택부근 37도 선에서 유엔군과 접전하다가
후퇴하다가 오산. 광주. 분원등 산속에서 무수히 중공군의 시체를 남겼습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밤이면 영등포방면에 건물마다 폭탄에 불이나 밤하늘이 환하게 비치었습니다.
중공군 인민군이 후퇴할 때 노량진다리가 끊어져 건널 수 없게 되자 압구정 용목꾸미(뚝섬 수원지 앞)
여울목에다 물속에 철로레일을 겹겹이 다리를 놓아 탱크. 자동차. 달구지. 군인들이 도강을 하느라고
낮에는 아군들. 밤이면 적군으로 교차되어 법석을 이루었습니다.
아군비행기가 여기다 폭격을 하자니 우리 동네사람들이 다칠까봐 폭격을 못하고 어느 날은 군 트럭이 와서
압구정주민들을 태워 신갈쪽으로 가서 부려놓고는 2~3차에 걸쳐 압구정 집에다 불을 질렀습니다.
어쩌다 남아있던 사람이 다소 가재도구를 꺼낸 집이 있었으나 거의가 불타버렸습니다.
불이 붙은 용진씨네 집 불을 달려들어 끄던 피난민이 유엔군에게 총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큰말 박순석씨 아버님 박한진 노인이 당시 70여세로 중병으로 거동을 못해서 불붙은 집안에서
불타 돌아가신 것을 그 후에 알았습니다. 동네집들이 모두 불타고 공회당. 선진씨네 집. 완종씨네 집.
종업이네 집 보존이 되었습니다.
그 후 40여일을 전투가 계속 되었는데 말죽거리 쪽에서 포탄이 날아다니는 속에서 살았습니다.
비행기 사격. 박격 폭탄. 대포 탄에 맞아 과수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이 상처투성이로 남았습니다.
어언 전쟁이 끝나고 남하했던 청년들이 귀향하며 전염병에 큰 고생들을 하고 피난 갔던 사람들과 만나
함께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우리 상천이도 병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나원목씨와 이종운씨가 극진히
간호하여 살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돌아온 청년들이 불타버린 집터에 흙벽돌을 찍어 말리고 낮이면 농사일하고 밤이면 돌아가며 집짓는
집에 지경을 다지고 서로서로 도와 집을 지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전후 복구사업으로 면에서 집 건
축자재가 세 채 분이 나와서 제비뽑기로 임재문. 나학범. 김종갑. 세집이 결정되어 집을 지었는데
그 후에 그것도 끊겨 버렸습니다.
전투가 다소 평온해져서 서울 피난민들이 집이 궁금하여 서울에 가려해도 경찰은 도강을 막아 밤이면
몰래 용목꾸미는 배를 건너느라 성시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6.25동란으로 당한 고통에서 벗어나 소박한 삶의 터전을 이루아가는 시기에 현대아파트 건립으로
우리는 고향을 송두리째 잃었습니다.
당시 못난 제가 향우회장을 지내면서 생각 부족으로 공회당 판돈으로 향우회관으로 이용할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한 점 여러분께 용서를 빕니다.
지금이라도 회원들의 소박한 힘을 모아 향우회사무실을 장만하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첫댓글 김종갑님은 돌아가셨으나 우리에게 지금도 압구정 마을의 역사를 들려 주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