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산 신씨
평산신씨는 전체 신씨의 70%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현존하는 신씨 가운데 대본이며,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들도 평산신씨의 후손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신씨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대를 잇는 역사의 흐름 속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신(申)씨 본관은 평산(平山) ·고령(高靈) ·아주(鵝州) ·영해(寧海) ·은풍(殷豊) ·천안(天安) ·이천(利川) ·신천(信川) ·곡성(谷城) ·삭녕(朔寧) ·창주(昌州) 등 50여 본이 전한다. 그 중 평산신씨가 약 70 % 이상, 고령신씨가 약 20 %를 차지한다. 조선시대에 11명의 상신(정승), 5명의 대제학, 20명
의 판서, 302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참고로 같은 한글의 신씨는 영산, 영월 신씨(靈山, 寧越 辛氏), 거창 신씨 (居昌 愼氏) 등이 있다
신씨는 198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62만 950명(평산신씨460,238명)으로 전국 인구 구성비는 1.5 %로 274성 중에서 제12위였다.
시조 장절공
우리 평산 신씨(申氏)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고려 태조 10년, 서기 927년)이시다. 신숭겸 시조는 광해주(지금의 춘천)사람으로 초명은 능산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그분은 본래 전라도 곡성(곡성현 목사동면 구룡리 현,용산제)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다
공(公)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장대(長大)하고 천성이 용맹스러웠으며 신령(神靈)한 자품(資稟)과 기민한 지략(智略)에다가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나 백발백중(百發百中)하였다. 참으로 장수다운 인재(人材)였던 그분은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워 마군 장군에 올랐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의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菩薩: 靑光菩薩·神光菩薩)이라고 칭하는 등, 백성을 괴롭히고 많은 신하를 희생시키며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무고한 많은 양민들과 신료들을 철퇴로 쳐죽이며, 처자를 불로 지져 죽이는 등 학정이 계속되자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모의하여 고려 태조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개국원훈 대장군에 올랐다.(918년) 신씨 성은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홍씨, 복씨 성도 왕건에게서 받았다.
고려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이 된 그분은 다른 공신들과 함께 고려의 국력신장과 민족통일 작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고려태조 10년(서기 927년) 10월,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경상 북부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불현듯 회군하여 영천을 가로질러 경주를 침공한다. 이때 신라왕(제55대 경애왕)은 종친과 신료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서 놀이하다가 문득 적병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두 함몰되었으
며, 이에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앉혔다.
견훤의 경주 침략 소식을 들은 왕건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며 제사하게 하고서 직접 정예한 기병 5천을 친히 거느리고 군대를 통솔하여 경주로 향한다. 하지만 그때 견훤은 이미 경주에서 퇴각하여 돌아가고 있었다. 왕건은 별수 없이 공산무주(대구의 팔공산)에 진을 쳤고 이는 곧 지금의 동화사
(桐華寺)이며, 여기서 견훤을 맞아 기다렸는데 견훤이 반드시 이 길을 지나 회군을 할 것을 간파하였다. 그 이유는 동화사와 파계사가 모두 견훤 세력과 깊이 밀착되어 있는 진표율종(眞表律宗) 즉 백제계 법상종에 속한 사찰로 신라 영토내의 견훤 세력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이에 고려군은 공산 동수에 이르러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견훤을 갑자기 들이쳐 격파하니 처음에는 견훤군이 갈팡질팡하였으나 워낙 수가 많은 후백제군은 점차 수습되면서 형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여 도리어 왕건군이 포위 속에 들게 되고 형세가 몹시 위급하였다.
병력이 열세했던 고려군은 점점 대패하였으며 태조와 장수들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허사였다.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왕건이 목숨을 보전한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신숭겸의 지략과 충심 덕분이었다. 이곳의 마을 이름이 지묘동(智妙洞)인 것도 신숭겸 장군의 지혜가 교묘했다는 데서 연유하고 있다.
대장(大將)이던 신숭겸의 얼굴이 태조와 흡사하였는데 그 전쟁의 형세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되자 신숭겸께서 몸으로써 대신 죽음을 할 것을 자청하면서 태조의 수래(御車)에 갈아타고 태조와 갑옷을 바꿔 입고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견훤의 군사는 신숭겸을 태조
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아나니 포위했던 군사가 조금 풀리어 태조는 겨우 단신(單身)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공산전투가 치러졌던 팔공산 일대에는 신숭겸과 왕건의 관련된 전설과 지명이 많이 관련되어 있다. 팔공산도 공산 이였던 것을 고려 태조 왕건이 동수대전시(桐藪大戰時)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전이갑(全以甲) 전의갑(全義甲) 등 팔장(八將)의 순사(殉死)로 인하여 팔공산(八公山)이라 했다는 얘기가 있다.
아! 이때에 신숭겸께서 죽지 않았더라면 포위는 풀리지 않았을 것이요. 포위가 풀리지 않았더라면 싸움도 이기지 못하였기에 저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500년의 왕업(王業)을 이어받게 한 것은 신숭겸의 충절의 공(功)이 여기 있었기 때문이지 아니한가!
위기를 모면한 태조는 태조가 본진에 돌아와서 곧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어졌으므로 이를 분간할 수 없었더니 대장 유금필 등이 말하기를 『신장군의 왼발 아래에 사마귀의 무늬가 있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습니다』하는지라 이 근거로 과연 찾아내었다. 이에 목공에게 명하여 머리와 얼굴을 새겨
만들게 하니 마치 생시의 모습과 같았다. 조복을 갖추어 자리에 앉게 하여 태조가 친히 제례를 행하고 통곡하였으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장지(葬地)를 도선대사가 태조 왕건자신의 묘터로 정한 곳인 광해주 소양강 비방동(現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예장(禮葬)하게 하고, 태조묘정(太祖廟庭)에 배향(配享)
하였으며, 곡성(谷城)의 양덕사(陽德祠), 대구(大丘)의 표충사(表忠祠), 춘천(春川)의 도포서원(道浦書院), 평산(平山)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제향(祭享)하였다. 또한 돌아가신 그 자리에 단(순절단 殉節壇)을 모으고 절(智妙寺)를 지어 장절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申公의 묘소(춘천)
공산무주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여 많은 뛰어난 장수들을 읽게 되는데, 특히 개국공신 신숭겸의 죽음은 왕건에게 커다란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태조왕건은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벽상호기위 태사개국공 상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지정공신(壁上虎騎衛 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翊戴 匡衛怡輔砥節
底定功臣)에 추봉하고 장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태조는 장절공의 아들 보장에게 원윤으로 삼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었다.
태조가 매양 팔관회(고려 때 불교에서 유래한 국가 제전의 하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교환(交歡)할 적마다 유독 전사(戰死)한 공신들의 반열에 있지 않는 것을 측은히 여기어 신숭겸과 김락의 상(像)을 짚으로 묶어만들게 하여 조복을 입혀서 반열에 따라서 앉게 하고 임금이 더불어 함께 즐기면서 술과 음식을 내리기를 명하니 술이 문득 닳아 마르고 가상(假像 : 짚으로 만든 상)이 일어나서 춤을 추는 것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이로부터는 연회를 여는 행사에는 항상 이들의 자리를 만들어 두도록 하였다.
이러한 행사가 이어져 공(公)께서 돌아 가신지 약 200년 후인 1120년(예종 15)에는 예종대왕이 서경(西京: 평양)에 행차하여 <팔관회>가 열렸을 때 이였다. 가상(假像) 둘이 관복과 무장(武裝)을 갖추어 말을 타고 뜰을 뛰어 달리며 다녔다. 임금이 이상히 여겨 이를 물으니, 좌우에서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 두 분은 신숭겸과 김락으로,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신성대왕(神聖大王 : 고려 태조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다. 그래서 그 공을 높이고자 태조 때부터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태조는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풀로 만든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랬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임금(예종)이 초연히 감개(感慨)하여 두 신하의 후손을 물으며 경, 유비, 명부(5, 6, 7세 조고:祖考)에게 벼슬과 상(하사품)을 내렸고, 이어서 한시(漢詩)와 함께 <도이장가>를 지어 신숭겸과 김
낙(金樂)의 공을 추도하였다.
오호! 사람이 누가 살기를 싫어하고 죽기를 좋아하는가! 난리를 당하여 내 몸을 잊고 위급(危急)을 보고 목숨을 바칠 자가 이 세상에 몇 사람이 있겠는가! 오직 장절공이야말로 지략(智略)으로써 매사를 잘 대처하고 충의(忠義)로써 그 임금을 받들고 용맹으로써 그 몸을 잃었으니, 안으로는 어질음(仁)을 근본으로 하고 밖으로는 의(義)에 이바지하였다.
아! 장절공의 공적은 태산이 우뚝하되 이보다 높지 못하고, 장절공의 이름은 천추에 뚜렷하여 능히 없어지지 못할 것이며, 가위 만고에 뛰어난 열장부(烈丈夫)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장절(壯節)로써 시호함이 진실로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우리 시조의 충훈(忠勳)과 장절(壯節)이 저와 같으니 이를 널리 알리고 우리 가슴에 새기면, 어찌 이 나라 백성이 되어 불충(不忠)한 자가 부끄럽지 않겠으며 자손이 되어 불효자가 깨우치지 않겠는가?
장절사 제실
추모비 최근묘소
장절공의 묘소에는 봉분이 셋인데 장절공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면서 혹시 엿보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봉분을 셋으로 만들었다고도 하고, 또는 부인을 합장한 것이라고도 하나 어느 봉분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제향은 중앙의 봉분앞에서 행하고 있다.
묘소는 도굴꾼들이 수 차례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그 때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모두 잡혔다고 하고, 일제시대에는 일본장교가 말을 타고 묘소 앞을 지나자 말발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내려서 분향 후 지나갔다고 한다.
장절공 신숭겸의 묘역은 춘천 박사마을로 유명한 서면에 있으며 풍수지리학의 묘터로도 유명하다. 이 묘역은 우리나라 4대 명당지(明堂地)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으로 울창한 소나무가 좌우에 도열하고 있는 듯 있으며 묘역을 비롯 영정각,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한다.
가는 길은 경춘국도를 달려 강촌, 등선폭포를 차례로 지나면 의암대교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건너기전 좌측 길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실제 도로는 우측으로 빠져 의암대교 밑을 지나간다. 여기서 길을 놓치고 의암대교, 의암터널을 지나면 되돌아와야 한다. 의암대교 밑을 지나 북한강을 끼고 잠깐 달리면 우
측으로 의암댐이 나온다. 의암댐을 건너지 말고 계속 직진할것. 의암댐부터 이어지는 길이 403번 지방도로로 환상의 드라이브코스이다. 의암호 건너편에서 봉의산과 춘천 시가지를 볼 수 있어 이 고장이 물의 고장이며 호반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한다. 호수의 여기저기에는 울긋불긋한 낚시꾼들의 좌대와 낙엽처럼 떠있는 재첩잡이 나룻배가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 고인돌, 적석총 등 청동기 시대 문화유적의 보고인 중도를 바라보며이 도로를 5분쯤 더 달리면 길 좌측으로 성어촌이란 식당이 있고 식당 옆으로 현암교라는 작은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자마자 묘소입구간판을 따라 좌회전하여 실개천을 끼고 잠시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울창한 송림안에 신숭겸 묘역(강원도 지정기념물 21호)이 있다.
본관유래
본관의 유래는 어느 날 태조가 여러 장군들과 평주(평산의 고호)에 사냥 나갔다가 마침 하늘을 나는 세 마리의 기러기를 보고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출 수 있겠는가?"하고 물으니, 여럿 중에서 숭겸께서 말하기를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까?"하니 태조께서 "셋째 기러기의 왼쪽날개를 쏘아라"하였다.
신숭겸께서 몸을 번뜩여 공중을 쳐다보고 과연 화살 한 대로 단번에 날아가는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아 떨어뜨리니 태조께서 탄복하여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날던 땅 삼백결(1결=15석을 생산할 수 있는 면적단위, 15석=300두, 1두=2말)을 하사하여 별업(別業)으로 하게 하고 궁위전(弓位田)이라 이름하였으며 본관을 평산으로 삼게 하였다.
평산은 황해도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 때 대곡군 또는 다화실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영풍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에 평주로 하였고 1272년(원종 13) 부흥군에 합쳤다가 충렬왕 때 다시 복구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평산으로 바꾸고 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고종 때 군이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들 .
평산신씨는 조선후기에 세력을 떨쳐 조선의 대표적인 명벌(名閥)가문(家門)으로 알려졌다.
평산신씨 파계는 시조의 15대손에서 19개파로 갈리는데, 문희공파(文僖公派)가 30%, 사간공파(思簡公派)가30%, 제정공파(齊靖公派)가 25%를 차지한다. 평산신씨는 조선 후반기에 세를 떨친 명문으로 상신(相臣:영의정,좌의정,우의정)8명, 대제학(홍문관과 예문관의 장) 5명, 판서 20명, 문과 급제자 302명을 배
출했다.그 중 문희공파(文僖公派)」 정언공파(正言公派)」 사간공파(思簡公派) 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문희공파
문희공파의 대표적인물로, 문희공 신개는 세종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고려사(高麗史)> 수찬(修撰)에 참여했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 분의 주요이력을 열거하면,
문희공 신개 (文僖公 申개; 1374공민왕 23 ∼ 1446세종 28)께서는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격(字格), 호는 인재(寅齎), 대재학 신집(申집)의 손자, 아버지는 고려 때 종부시령(宗簿寺令)을 하시고 고려가 망하자 태조 이성계가 수 차례 벼슬에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평산 황의산에 은거하신 신안(申晏;이성계가 좌의정에 추종함)이시며, 어머니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임세정(任世正)의 딸이다.
1390년(공양왕 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393년(태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로 발탁되었는데, 당시 태조가 실록을 보자고 할 때 그 불가함을 강력히 논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 후에도 자주실록 열람을 원하는 임금들에게 간(諫)하는 신하들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이어 감찰·문하습유(門下拾遺)·좌정언·형조좌랑·호조좌랑을 거쳐 충청도도사 나갔다가 다시 헌납·이조정랑·사인(舍人)·예문관제학·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등을 역임하고, 1413년(태종 13)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 발탁되는 동시에 춘추관편수관·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주장한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의 폐지는 다음해에 실현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병조참의·충청도관찰사·한성부윤
을 역임하고 1417년에 공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이 해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즉위 후 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역임하고 형조참판(刑曹參判)·진주목사·우군총제·좌군총제·예문관대제학·전라도관찰사·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433년(세종 15)에는 야인이 자주 변경을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히자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벌을 강력히 주장하여 야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이조판서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라 지춘추관사를 겸임하면서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고, 1436년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후 세자이사(世子貳師)·집현전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439년에 우의정에 올랐으며, 1442년에는 감춘추관사로 권제 등과 더불어 편찬한 《고려사》를 완성하였다.
1444년에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공법(貢法)·축성(築城) 등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불편한 것은 이를 건의하여 시정하도록 하였다.
공(公)은 자준(自準 : 관찰사를 역임), 자승(自繩 : 대사성을 역임), 자형(自衡 : 집의를 역임) 세 아들을 불러놓고 대대로 물려내릴 가훈을 다음과 같이 정하여 가르쳤다. <언충신, 행독경, 소심익익, 대월상제(言忠信, 行篤敬, 小心翼翼, 對越上帝)>의 유훈을 받은 3형제는 모두 벼슬길에 나가 관직을 지내며 후대에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평산 신씨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73세에 세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묘소는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광평리에 있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 《인재문집》이 있다.
신개의 증손 신상은 중종 때 호당을 거쳐 판서를 지냈는데 이 파의 주요 인물은 모두 그의 후대에서 나왔다. 상의 손자 신잡(申잡)은 선조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에 봉해졌고, 그의 아우가 임진왜란 때 명장인 충장공(忠壯公) 신립이다. 신립의 아들 경진(景진)·경유(景裕)·경인(景인) 3형제가 모두 무과 출신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우고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다. 특히 충익공(忠翼公) 신경진은 병자호란 때의 명장으로서 인조 때 영의정에 올랐다. 조선조에서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까지 오른 사람은 그와 순천박씨의 박원종(朴元宗) 두 사람뿐이다. 문희공파에서만 장신이 14명이
나왔으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장공(文莊公) 신완(申琓), 조선 후기의 서화가인 자하(紫霞) 신위(申緯)·애춘(靄春) 신명연(申命衍)부자도 문희공파의 인물이다. 특히 문희공파는 임진왜란 때 명장 신립(申砬) 장군을 대표로 하는 <무신 집안>으로 특징지어진다.
정언공파
정언공파에서는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20세손)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인조 때 영의정 을 지냈는데,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4대 문장(四大門章)으로 꼽힌다. 그의 아우 감(鑑)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왕조실록 복간에 공이 컸고, 흠의 아들 문충공(文忠公) 신익성(申翊聖:16세손)은 인조 때 <병자 척화 5신(丙子斥和五臣)>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잡혀갔었다. 그의 아우 익전(翊全)은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으로 이름난 당대의 문한(文翰)이었다. 이 밖에 숙종 때의 명신 문숙공(文肅公) 신정(申 晸)은 익전의 아들이고,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내고 봉조하(奉朝賀)가 된 문경공(文敬公) 신응조(申應朝)는 정(晸)의 6대손이다. 정언공파는 <문신집안>으로 특징지어진다.
사간공파
사간공파의 인물로는 세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사간공(思簡公) 신호(申浩)의 6대손 신점(申點)·신암(申암)형제가 있는데, 점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구원병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선무공신(宣武公臣)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직손(直孫)인 신율(申慄)이 광해군 때 대북파(大北派)에 가담, 소북파(小北派)를 숙청하는 옥사에 관여하는 인조반정이후로는 쇠퇴했다. 반면 신암의 후대에서는 많은 인물이 나왔다. 그의 아들 민일(敏一)은 대사성 을, 현손 사철(思喆)이 영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사철의 아들 만(晩)·회(晦) 형제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역사상 형제 영의정은 그들과 안동김씨의 김수흥(金壽興)·수항壽 恒) 형제,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 형제 등 셋뿐이다. 근세 인물로는 고종 때 참정대신(參政大臣)을 지낸 문헌공(文獻公) 신기선(申箕善), 독립운동가로 건국 후 국회의장 을 지낸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 숭겸의 11세손 연(衍)의 아들 중명(仲明 : 도관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 자명(自明: 봉익대부로 춘천부사를 역임), 헌주(憲周 : 상호군을 역임) 3형제 대에서 가세가 크게 융성하여 명문의 기틀을 마련했다.
도관(都官) 중명(仲明)의 아들 집(輯)은 고려조에서 전리판서(典理判事)와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군평(君平)은 공민왕 때 좌대언(左代言)과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라 당세에 학자로 추앙되었던 막내 현(賢)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편 대제학 집의 셋째 아들인 안(晏)은 고려 말에 봉선고 판관(奉先庫判官)을 거쳐 종부시령(宗簿寺令)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평산의 황의산에 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1417년(태종17)에 죽으니 시인(時人)들이 그의 절의(節義)를 높여 그가 살았던 곳을 배록동(排祿洞)이라 하였으며 후에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개( )가 뛰어났다. 문희공 개는 위에서 언급하여 생략하고, 개의 아우로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한 효(曉)는 우정언(右正言)을 거쳐 세종 때 교수관(敎授官)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영(瑛)이 김식(金湜)의 문하에서 을 배우고 중종 때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어사대부(御史大夫) 군평(君平)의 손자로 공양왕 때 지신사(知申事)를 역임한 호(浩: 한림 혼의 아들)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옥새를 부둥켜안고 이성계 일당에 항거했으나 역부족으로 실패하자 고향인 평산으로 내려가 은거하였고, 전리 판사(典理判事)의 벼슬을 내려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 1천 여 명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 조광조의 구명을 상소했던 명인은 항상 울분을 품고 <풍류광객>이라 자칭하며 전국을 방랑하다가, 거창에 은거하던 스승 김식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시신을 거두어 충주에 장사지냈다. 당시 김식이란 이름만 입에만 담아도 역적시 당했던 때인데, 그 시체를 운반했던 명인의 용기에 세상사람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장송도중 <조송옥사(弔宋玉辭)>라는 애도 시를 지어 자기의 뜻을 밝히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시주(詩酒)로 일생을 마쳤다.
명인의 아들 익(翌)은 명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함평 현감(咸平縣監)으로 나가 치적을 쌓았고, 선조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순천 부사(順天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본래 남대문 밖 청파의 배다리 근처에 살았다. 하루는 집 근처에서 길 건너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병조판서 류전(柳琠)의 행차를 범하여 전도하는 하인에게 끌려가 욕을 당했다. 익은 모르고 범한 것인데 너무 지나치게 욕을 보였다 하여 이 하인을 번쩍 들어 도랑에 내던져 버렸다. 이 소란을 보고 있던 류전은 익을 장하게 보고 임금에게 대장부 하나를 발견했다고 아뢰어 선전관(宣傳官)에 특채되었으며, 명종이 서교(西郊)에 나갔을 때 거센 돌풍에 어막(御幕)의 끈이 끊겼는데 익은 그 끈을 붙잡고 어막이 넘어지지 않도록 혼자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개의 증손 상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연구하여 조광조(趙光祖)·이자(李 자)와 더불어 뜻과 지론을 같이했으나 그들의 혁신정치에 저항을 느껴 중도사상을 지녔으며, 중후한 인격으로 추앙을 받았다. 일찍이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어 평산부(平山府)의 아관(衙官)을 지날 때 본관 마을이라 하여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갔다고 한다.
개의 현 손녀인 사임당(師任堂)은 조선의 여류 문인·서화가이다. 진사(進士) 명화(命和)의 딸, 감찰(監察) 이원수(李元秀)의 부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어머니, 강원도 강릉(江陵) 출신.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침공(針工)·자수(刺繡)에 이르기까지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 뛰어나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思親(사친)」 등의 한시(漢詩)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것이고,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화풍(畵風)에 독특한 섬세 정교함을 더하여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 화가라는 평을 받았다. 어린 시절 어느 날 꽈리나무에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렸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림 속의 메뚜기를 닭이 와서 쪼아 버렸다고 한다. 그림 중 산수(山水)·포도·풀·벌레등을 잘 그렸으며,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 양처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선조 때 명장으로 유명했던 입(砬 : 상의 손자)은 1583년(선조 16) 온성 부사(穩城府使)가 되어 북면에 침입해 온 니탕개(尼湯介)를 격퇴시키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하자 선조 임금은 교외에까지 직접 마중을 나가 전포에 핏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어의를 벗어주었으며 장군에게 혼기에 닥친 딸이 있는 것을 알고는 신성군(信城君 : 선조의 넷째 아들)의 아내로 삼아주는 등 극진히 해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손수 불러 보검을 내리며 왜군 토벌을 부탁했으나 빈약한 병력으로 출전하였으며 병사들이 왜병을 두려워하여 도망자가 많아 문경세제에 주둔하지 못하고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결하다 참패하자 부하장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했다.
입(砬)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경진은 혼탁한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인조반정의 주모자로 선두에서 공을 세우고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에 책록되어 공조 참의와 병조 참판을 거쳐 병조 판서에 올라 훈련(訓鍊)·호위(扈衛)·포도(捕盜)의 3대장을 겸하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수비를 담당했다.
특히 그는 아버지가 투신해서 죽은 강의 물고기를 어찌 먹을 수 있겠느냐 하며 평생동안 물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이르러, 정사이등공신(靖社二等功臣)에 봉해진 아우 경우(景裕), 동성군(東城君) 경인과 함께 의절의 무맥(武脈)을 이었다. 신립의 형 급은 임진왜란 때 모친과 함께 이천으로 피난을 가다가 도중에 적을 만나 모친이 벼랑에 투신하자 그도 따라 뛰어들어 모친을 구하고 자신은 죽었다.
개성 도사(開城都事) 승서(承緖)의 아들 흠(欽)은 인조 때 영의정에 올라 정주학자(程朱學者)로 문명을 떨쳤으며 장유·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졌고,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아우 감(鑑)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인조로부터 "신하가 모두 이 같으면 걱정이 없겠다"고 칭찬을 받았던 감은 용양위 부사직(龍 衛副司直) 겸 춘추관 기주관(春秋官記注官)이 되어 앞서 임진왜란에 불타 없어진 <왕조실록(王朝實錄)>의 재간(再刊)에 참여했고, 남원부사(南原府使)와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를 역임했다.
흠의 아들 익성(翊聖)은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지고 광해군 때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전리(田里)에 방축되었다가 인조반정 후에 재등용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여 청군(靑軍)과 계속 싸울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화의가 성립된 후에도 계속 척화를 주장한 <척화오신(斥和五臣)>중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에 붙잡혀 갔다.
영의정 흠의 손자 최(最 : 동양위 익성의 아들)는 효종(孝宗) 때 봉교(奉敎)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인조실록(仁祖實錄)>편찬에 참여했으며 문장에 능해 <해동사부(海東辭賦)>에 시부(詩賦)가 전한다.
참판 익전(翊全 : 흠의 아들)의 아들 정(晸)은 현종 때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거쳐 대사성을 역임했고, 숙종 때 좌우참찬(左右參贊)과 예조 판서(禮曹判書)·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냈으며 시문(詩文)에 능하고 글씨에 뛰어났다.
영의정(領議政) 흠의 증손 만(曼)은 17세 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부모와 처를 데리고 강화(江華)에 피난 갔다가 그 곳에서 어머니와 처 홍씨(洪氏)가 해를 입고 죽자 그 울분과 치욕을 가눌 길 없어 죽으려 하였으나 아버지가 살아있어 못 죽고 있다가 난이 평정되었다.
그는 그 치욕을 몸에 입고 한양의 성문 안에 들어 설 수 없다고 하여 회덕(懷德)의 송촌(宋村)에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학업을 닦고 부안(扶安) 백연동(白蓮洞)과 진잠(鎭岑) 구봉산(九峰山)에서 야인생활을 지속하였다. 그 후 송시열이 입조(入朝)하여 나라의 중요한 기획에 만의 지혜를 참작하고자 여러
번 불렀으나 성(城) 안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서 서신(書信)으로서 정사에 참여했고, 전국 각처에 흩어진 명학자들을 찾아 방랑하고 명소마다 찾아가 놀면서도 국정에 참여했으므로 <야인판서(野人判書)>로 불리웠다.
그는 임종 때도 왜놈과 한 하늘에 살다 죽으니 지하에 가서 선친에게 고할 말이 없다고 원통해하며 숨져 갔다고 한다.
철저한 배청숭명주의자인 민일(敏一)의 아들 상(尙)은 병자호란 때 왕족의 호위직을 맡아 강화도에 피난 갔는데 적이 임박해오자 호의의 신들이 모두 도망가고 혼자 세자빈을 지키고 있었다.
이 때 청병이 세자빈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장신에게 배례 시킴으로써 굴복의 예를 갖추도록 강요하자, 표정하나 흐트리지 않고 서있던 그는 빈의 시종에게 화구를 달구어 오라 시키고 그것을 빈이 협박받고 있는 연(筵 : 임금이 타는 가마의 하나) 속에 넣어주며 자결을 권하였다. 그리고 빈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 자기도 따라 자결할 작정이었다.
많은 부녀자들의 자결을 보아온 청병은 이에 겁을 먹고 그 굴욕배례를 단념하고는 그저 신변만을 보호토록 시켰다.
이렇게 세지빈을 구제해낸 상(尙)에게, 세자빈에게 죽음을 강요했다는 모략까지 곁들여 죄목을 씌우려 하자 스스로 유배길을 택하여 원주로 내려가 초가 두 칸을 짓고 사람의 내왕을 사절했다고 한다. 그는 그 곳에서 『부음록 』3권과『 휘언』두 편을 저술하여 후손에게 전했다고 하며, 상의 아들 직간(直諫)
으로 당대에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던 명규(命圭 : 현종 때 집의를 역임)이다.
당대의 유종으로 예학의 거두였던 석학(碩學)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을 연마하여 서인으로서 숙종 때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던 완(玩 : 여정의 아들)은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희빈 장씨의 처벌을 주장했고 북한산성의 축조를 건의하여 왕의 승낙을 받았으나 일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영의정에 올라 평천군(平川君)에 봉해졌다.
영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했던 만(晩)은 정자를 거쳐 실록청 도청낭청(實錄廳都廳郎廳)이 되었다가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득세하자 파직 당했으나 다시 등용되어 이조(吏曹)와 호조(戶曹)의 판서를 역임하고 편수당상으로 『천의소감』을 편찬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에 이르러, 역시 영의정을 역임한 기로소에 들어간 아우회(晦)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숙종 때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지내고 문장과 시문에 탁월했던 유한(維翰)과 영조 때 대사헌을 역임한 위(暐)가 유명했고, 어영대장(御榮大將)을 거쳐 공조 참판을 지낸 대겸(大謙)과 청안한 문장과 서예로 명망이 높았던 작(綽)은 시서화에 능하여 삼절로 이름났던 위(緯 : 참판 연승
의 아들)와 함께 이름을 떨쳤으며, 판관(判官) 광온(光蘊)의 아들 재식(在植)은 헌종 때 대제학을 역임하여, 고종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에 오른 명순(命淳), 좌의정 응조(應祖: 동지돈령부사 상현의 아들), 판삼군부사(判三軍府使) 헌(櫶), 임오군란의 책임을 지고 임자도에 위리안치 되었던 정희(正熙), 비서원승(秘書院丞)과 동지돈령원사(同知敦零院事)를 지낸 두선(斗善), 대동학회장과 수학원장을 역임한 기선(箕善), 영남지방의 의병장 돌석(乭錫)께선 을사조약 이듬해 의병을 일으켜 당시 영남지방의 의병장중 가장 활약이 컸고, 현상금을 탐낸 김자성의 집에 초청되어 독한 술을 먹고 도끼로 찍혀 살해되었다. 경북 의용단장 태식(泰植)(가은 민지 출신) 등과 함께 명문의 가통을 지켰다.
한말에 와서는 재호께서 판소리 연구에 전념하여 종래에 계통이 없이 불러왔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가루지기, 타령, 토끼타령, 박타령>등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 세워 독특한 창의로 판소리 사설문학을 대성하였고, 이들을 창극화했으며 명창을 양성하고 시문집이 전해진다.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팔균(八均)이 토비의 습격을 받고 순절했으며, 3·1절 기념방송 사건과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복역중 6·25 때 총살당한 석구(錫九)는 곡성 출신의 의병 정백(正栢), 내장사에서 재기를 도모하다가 사형당한 덕균(德均), 광복회 초대회장 덕영(德永),『심경』이란 잡지를 발간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현구(鉉九), 광복군 참리부 내무사랑 우현(禹鉉)이 대표적이며,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초대 부의장(副議長)을 지내고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최고위원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야당을 영도했던 익희(翼熙 : 장례원경 단의 아들)는 자유당 독제치하에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大統領)에 출마하여 명문 평산 신씨의 가맥을 더욱 빛냈다.
문경 가은의 신씨
우리가문이 문경 가은 무두실에 정착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가문이 문경 가은에 정착한 것은 지금부터 500년 전 1498년 연산무오사화 때에 문장(文章)과 행의(行誼)가 당세(當世)에 고명(高名)하신 학자 한천처사공(문희공의 손자:신숙빈)께서 벼슬을 버리고 령(領)을 넘어 문경 가은에 오셨다. 이후 중종이 여러 차례 공(公)을 조정으로 청하였으나 『내가 대대
로 큰 벼슬한 명문으로 혼조(昏朝)를 만나서 어진이들을 죽여 없애던 날에 능히 한마디 말로 바르게 구해내지 못하였는데 마침 성명(聖明)을 만나서 도리어 사명(思命)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죄이다』하시며 고사 하시였다. 처사공께서 문경 가은(전곡리 소양)에 사신 이후 지금까지 자손이 이어지면서 20여세가 지났다.
처사공께서는 자손을 다섯 분을 두시어 후손들이 전곡리, 민지리 및 농암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19세할아버지 계(示契)께서도 농암 가실목(加項)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사시며 자손들을 가항파(加項派)라 하였다. 우리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군과의 싸움에서 순절한 700의사의 묘(금산, 칠백의 총)에 계신 22세할아버지 좌승지 경일(慶一)의 셋째아들 탁(鐸)으로부터 계속 14대까지 종손으로 이어져 14대 종가(재선)집으로 이르고 있다.
농암 가실목(현 농암초등학교 터)에서 잘 사시던 중 선조님께서 묘소를 정할 때였다. 지관이 두 명당자리를 추천하였는데 한 장소는 "여기에 묘소를 정하면 자손들이 만석지기로 부자가 될 것이요." 다른 장소는 "이후 8대손 후손에서 혈식군자(혈식천추 도덕군자(血食千秋 道德君子) :선도문화가 꽃피었던 고조선시대 이후로 도덕군자가 되고자 뜻을 세운 이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피를 섞어 나누어 마심으로써 영원토록 그 의지가 흔들리지 않도록 다짐한 군자)들이 추앙하는 인물이 배출되나 집안의 자손이 귀하게되며, 집안의 부는 가난이 극에 달할 것"이라 하였다. 선택은 부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한 선조께서는 후자 쪽으로 택하시였다.
이후 정말로 자손은 독자만 나오든지 아니면 양자를 들여야 하였다. 또한 집안에 불이 발생하여 가옥이 전소되고 소 십여 마리가 불타는 등 재난이 시작되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에 재난을 피하고자 31세할아버지 국희(國熙)께서는 식솔만 이끌고 문경일대를 사시다가 무두실로 이거하시어 정착하게 되였다.
오호! 안타깝구나. 이후 자손 8대에 거의 이르러(약 6대정도) 그 명당자리가 성묘가 힘들다고 후손들이 이장을 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어른들은 이장을 못하도록 부랴부랴 묘소를 찾아갔으나 이미 때는 늦어 산밑에 다다랐을 때에 개장을 하여 묘소 위치에서 흰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과연 기운이 하늘로 솟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명당이거늘 생각이 부족한 너희들로 인해 애석한 일이 되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8대손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분묘를 이전한 8대후손의 그분들은 모두 머리는 명석하였으나 길을 잘못 들어 일본에서 화폐위조범 사기범 등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옛 영화는 찾지 못하였지만 어느 정도 자손도 번창하고 가문을 일으키면서 평산신씨 가문의 그 정신은 뚜렷이 계승하여 매사 하는 일은 주위의 표본이 되고 마을의 중심이 되어 내려 왔다. 기나긴 세월을 지나온 사이 선조분께서는 교목(喬木)세가(世家)의 후예로서 명예를 지키고, 이 고장 주민으
로서 빛나는 자취를 남기셨다. 가은에 오신 한천처사공께서는 중시조 문희공의 손자이므로 문희공 이후세대의 우리집 직계 선대의 약전(略傳)을 보면 더욱 교목세가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문희공이후 직계 지역약전(地域略傳)
자승(自繩, 1397 ∼?): 자는 장언(長彦)이요, 호는 동호거사(東湖居士)니 문희공 개의 둘째아들이다. 진사를 거쳐 세종갑자(144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 지평(持平)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겸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를 두루 거치고 예종기축(1469년)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사가 서거정(徐居正)과 깊이 사귀어 정의가 두터웠으며 동호집(東湖集)이 있으나 실전했다.
숙빈(叔彬, 1457∼1520): 호를 한천처사라 하며 대사성 자승의 여섯째아들이다. 음직으로 사헌부 감찰(監察) 거창현감(縣監)을 지내셨다.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제3녀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외손(外孫)으로 연산무오(1498년) 사화에 선비들이 일망타진됨을 보시고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사직(司直) 안귀손공(安貴孫公)과 더불어 가족을 이끌고 남하하여 소양의 양지에 복거(卜居)하시며 정자를 짓고 스스로 처사라 호(號)하셨다. 향방(鄕邦)의 후진(後進)들과 원근(遠近)의 사우(士友)들이 바람처럼 듣고 책상을 지고 찾아오는 이가 많으니 선생께서 더욱 겸손하셔서 사도(師道)로써 자처하시지 않으시고 자세하게 가르치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얼마 안되어서 중종(조선 11대왕)이 등극하시어 여러 차례 부르고 벼슬을 권하면서 사례(思禮)가 갖추어 이르렀으되 고루 하신 지개(志介)는 한결 같으셨다. 돌아가실 때 말하기를 『나 죽은 뒤에 묘 앞에 작은 돌로 처사신모지묘(處士申某之墓)라고만 쓰고 지문(誌文)과 행장(行狀)을 지어서 나의 죄를 무겁게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세헌(世憲): 한천처사 숙빈의 둘째 아들이다. 벼슬은 직장(直長: 종7품)을 지냈다. 생년과 졸년은 기록이 없다.
계(示契): 한천처사 숙빈의 손자이며 직장 세헌의 맏아들이다. 벼슬은 건원릉(健元陵, 이태조의 릉) 참봉(參奉)이다.
응개(應凱, 1537∼1627): 자는 경행(景行)이니 한천처사 숙빈의 증손이며 참봉 계의 맏아들이다.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이다.
의(誼): 자는 의중(宜仲)이니 한천처사 숙빈의 고손이며, 동추 응개의 둘째아들이다. 목사(牧使)를 지내시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경일(慶一, ? ∼ 1592): 자는 서경(瑞卿)이니 한천처사 숙빈의 5세손이며 목사 의의 맏아들이다. 중봉 초헌선생에게서 수업하고 임진왜란에 금산에서 순절하니 좌승지에 증직되고 금산 700의총에 묻히다.
의동(儀東, 1803∼1882): 자는 맹립(孟立)이니 좌승지 경일의 7세손이며 유학 광육의 아들이다. 수직으로 통정대부(조선시대의 관계. 정3품의 상계이다) 부호군(副護軍)이다. 그 분의 묘소에 있는 묘갈명(비석문)을 아래에 적는다.
주철(周澈, 1910∼1974): 자는 무길(武吉)이니 한천처사 숙빈의 17세손이며 통정대부 부호군 의동의 5대손이고 유학(幼學) 현승의 맏아들이다. 행의(行誼)가 세상에서 추앙(推仰)을 받았고 의(義)와 덕(德)을 겸비하였다.
부호군평산신공묘갈명(副護軍平山申公墓碣銘)眞成 李原榮 지음
공(公)의 휘(諱)(돌아가신 조상 또는 높은 어른의 이름)는 의동(儀東)이요 자(字)는 맹입(孟立)이며 성은 신씨이니 시조되시는 휘(諱) 숭겸께서는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원훈(開國元勳)이 되시어 시호를 장절이라 하시며 그 뒤로 대대로 잠영(簪纓, 관원이 쓰던 비녀와 갓끈)이 연이어 동방의 명망 높은 거족(巨族)이 되었다. 이조(李朝)에 휘(諱)를 개라 하시고 호를 인재(寅齋)라 하시는 분은 맑고 빛나는 벼슬길을 두루 밟으셔서 관(官)이 좌의정에 이르시고 세종(世宗)묘정(廟廷)에 배향 되셨으며 시호를 문희라 하신다. 2대를 전하여 휘(諱) 숙빈에 와서 혼탁한 조정때인 무오(戊午, 1498년)에 거창현감으로써 벼슬을 버리고 문경의 소양에 오셔서 은거하시며 스스로 한천처사라 호(號)를 하셨으며 한천사(寒泉司)에 배향되시였고 3대를 전하여 휘(諱) 경일(慶一)에 이르러 조중봉(趙重峯) 헌(憲)의 문인(門人)으로써 왜란에 의병으로 금산(錦山)에서 순절하셨다. 휘(諱) 필국(弼國), 사익, 종악, 광육이 고, 증, 조, 약고 이시
다. 어머님은 상산 김씨 주관(胄寬)의 딸이며 순조계해(1803년)에 공(公)을 진곡리(辰谷里, 현 공평4리) 집에서 낳으셨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명랑하셨으며 재주와 지혜가 사람들에게 넘치였고 가정에서 배워 선비들 벗 중에서 명망이 높았으며 행의(行誼)를 도타웁게 힘써서 향당(鄕黨, 살고 있는 한지방)의 모범이 되시어 솔치마 흙집에서도 분수를 지키고 편안하게 사시면서도 가난하다는 이유로써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셨다. 늙어서 마성의 화산에 한곳을 정하여 옮겨 살게되니 넉넉하게 보내시어 80세를 사셨고 수로 통정(通政)의 품계(品階)를 받게되니 가히 써 인덕(仁德)의 남김이 있음을 알겠도다. 고종임오(1882년) 10월 25일에 돌아가시어 잠드시니 년세가 80세였다. 각서병전유좌지원(各西餠田酉坐之原)에 장례하였으며 배(配)는 진성이씨 억(憶)의 딸이며 1남을 낳으시니 기회(奇會)이며 기회의 3남은 국희,
택희, 복희이고 국희의 남은 세균(世均)이며 택희의 사남(嗣男)은 병균이고 복희의 3남은 명균, 동균은 출계(出系)하고 호균(昊均)이며 세균의 4남은 현승(鉉承), 현창, 현상, 현민이고 병균의 1남은 석후이며
명균의 3남은 익현, 성현, 우현이고 호균의 1남은 현풍이니 이하는 모두 기록치 못 한다.
슬프다. 공(公)의 세상은 이미 100년이 지났는데 묘(墓)에 예의에 따른 물체가 없더니 고손인 석후(錫厚)가 나에게 명(銘)을 하기를 구하니 사양함이 없이 가하다고 하면서 드디어 그 래장(來狀)을 당겨서 약간의 수윤(修潤)을 가하여 우와 같이 차례로 서술하고 이어서 명(銘)을 하니 명(銘)하여 이르기를,
인자유수(仁者有壽) 어진이는 수를 하니
수자통정(壽資通政) 수를하여 통정(通政)에 오르고
인자유후(仁者有後) 어진이는 뒤가 있으니
후손창성(後孫昌盛) 후손들이 창성하도다.
유미병전(有美餠田) 아름다운 병전(餠田)이 있어서
산창수경(山蒼水鏡) 산은 푸르고 물은 거울 같구나
참사수부(讒辭樹否) 글을 새겨서 돌을 세우니
추백교영(楸栢交暎) 노나무 잣나무 서로 밝게 비치네.
6대손(孫) 상대 1987. 4.쓰고 10월 세움.
우리 조상님께서는 시조부터 나의 아버님까지 훌륭하게 사시며 우리고장의 주인역할을 하셨다. 그 한분 한분 업적을 논(論)하려면 글로 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만능의 현대에서 조상의 전통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으나 선대의 훌륭하신 뜻과 업적을 새기면 나의 긍지와 자부
심을 가지게되며 나의 뜻이 또한 바르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의 뿌리 평산신씨의 가문을 알리고 아는 그 자체가 우리의 문화이며 그 문화를 후손에게 전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산업사회로 급속하게 발전하는 복잡한 환경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선조께서 힘써서 쌓으시고 남기신 그 높은 뜻과 자취를 잃어버릴 수 있으므로, 자라나는 자손들이 그 뿌리를 알고 선조께서 남기신 뜻과 자취를 알아 바른 언행을 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임을 깨 닫아야 하며 선조께서 쌓으신 공덕을 허무
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선조께서는 우리의 고향에 사시면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전쟁 등의 외우와 사색당쟁의 내환에서 굳굳하게 나라를 지키고 집안을 보전하신 그 정신과 지혜를 본 받아 우리의 지표로 삼았으면 한다.
항렬표
32세/균(均) 규(圭) 노(老) 곤(坤)
33세/현(鉉) 언(彦) 윤(允) 종(鍾)
34세/철(澈) 식(湜) 순(淳) 영(泳)
35세/동(東) 상(相) 영(榮) 주(柱)
36세/섭(燮) 용(容) 항(恒) 환(煥)
37세/재(載) 숙(璹) 기(基) 배(培)
38세/호(鎬) 진(鎭) 일(鎰) 련(鍊)
39세/제(濟) 준(濬) 원(源) 홍(洪)
40세/근(根) 화(和) 병(秉) 집(集)
41세/성(性) 충(忠) 찬(燦) 덕(德)
42세/용(用) 익(翼) 중(重) 식(軾)
43세/원(元) 완(完) 극(棘) 욱(旭)
44세/필(弼) 우(雨) 남(南) 설(卨)
45세/단(段) 승(承) 제(齊) 녕(寧)
46세/무(武) 빈(斌) 성(成) 무(茂)
47세/홍(弘) 세(世) 경(卿) 기(起)
48세/염(廉) 용(庸) 경(慶) 강(康)
49세/재(宰) 화(華) 상(常) 행(幸)
50세/정(廷) 승(升) 연(延) 성(聖)
51세/규(揆) 등(登) 계(癸) 봉(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