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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文寸馬島ㆍ대마도)를 찾는 한국인이 연간 10만 명선을 넘는다고 한다. 300~360인승 쾌속선이 화요일 빼고 매일 한 번씩, 주말에는 두 차례 거의 만원인 상태로 대마도를 왕복 운항하고 있으므로 간단히 계산해도 한 달이면 1만여 명, 1년이면 12만 명이다. 이들 중 절반 정도가 대마도 최고봉 시라다케나 아리아케 등산을 겸하고 있다.
대마도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이렇듯 많은 한국인이 몰려가고 있을까. 대마도 전문여행사인 부산 크루즈투어의 박영호 과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단 1시간30분이면 가닿고 왕복 뱃삯은 홍도나 거문도ㆍ백도 다녀오는 것 보다 조금 더한 정도인 13만 원이면 되죠. 이렇게 싼 비용, 짧은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해외여행지로 아마 대마도만한 데가 없을 겁니다. 거기다 면세점 면세품도 살 수 있고-. 다시 말해 얼마 안 들이고 짧게나마 해외여행 하는 기분 한 번 제대로 낼 수 있다는 거죠.”
그런 단순한 이유 이외, 대마도가 과거 우리 땅이었다는 사실도 큰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고 박 과장은 말한다.
“한단고기에 보면 삼국시대 상대마도에는 신라촌과 고구려촌, 하도에는 백제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광개토대왕비문에도 서기 400년에 대왕이 대마도를 점령한 후 치소(治所)를 대마도에 두었다고 밝혀져 있지요. 고려시대에도 만호를 파견해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구요.”
1945년 일본 패망은 우리가 이 대마도를 되찾아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실기하고 말았다. 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그 후 속 좋은 한국인들은 대마도의 존재를 가맣게 잊고 살다가 2000년 들어 일본이 독도 문제를 들먹이면서 다시 대마도가 과거 우리 땅이었음을 상기하게 된 것 같다고 박 과장은 말한다. 이 무렵부터 급작스레 대마도를 찾는 한국인 수가 늘어났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추측은 그럴듯하다. 최근 일본 문부과학성은 중학교 사회과목의 신(新)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라고 새롭게 명기하기로 방침을 굳혔다고 하는데, 우리는 대마도에 대해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등산로 따라 기분 나쁜 가시철망 길게 이어져
대마도가 곳곳에 절경을 안고 있는 아름다운 섬이란 사실에서 과거의 태만에 대한 안타까움은 더한다. 세세한 득실은 잘 모르되, 독도를 줘버리고 대마도를 되찾아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까지도 한 번 해보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연세대의대 출신 의사들의 등산모임인 세브란스산악회는 이 대마도가 한눈에 뵌다는 시라다케 산정에 오르는 것으로 100회 정기산행의 의미를 더하기로 했다.
세산회가 대마도 가는 날, 대한해협엔 파랑이 제법 세게 일었다. 펑, 펑 하는 소리가 나도록 뱃전을 때리는 파도의 충격은 멀미약으로 유발된 독한 졸음기조차 몰아내곤 한다. 1시간20여 분 운항 끝에 쾌속선이 가닿은 곳은 부산항에서 50km로 가장 가까운 곳인 대마도 북쪽의 히타카츠항. 일제 때 이곳 대마도 사람들은 위급한 병이 나면 130km나 떨어진 일본 본토보다 한결 가까운 부산의 병원으로 건너갔다.
지문까지도 스캔해 검사하는 일본 입국 수속 후 버스 안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운 뒤 시라다케(白嶽·519.2m) 입구로 이동했다. 달리 말하면 대마도의 2대 명산이라 할 북쪽의 시라다케와 남쪽의 아리아케(有名山) 중간 지점이다. 히타카츠항에서 이곳까지는 제법 멀어서 섬내의 구불구불한 도로로 1시간 이상 가야 했다. 도중에 대마도의 윗섬과 아랫섬을 가르는 운하인 만제키(万關) 운하를 지났다.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대마도는 이 운하의 개통으로 상대마, 하대마로 나뉘었다.
이전에도 멀리서 보기에 대마도는 워낙이 두 개의 분리된 섬 같았다. 쓰시마라는 지명은 그래서 우리말 두 섬에서 온 것이라 해석하는 음운학자도 있다. 두섬→두서마→쓰시마로 음운변천했다는 것이다.
시라다케는 일본 큐슈(九州)의 100명산에 들어가는 명산이라는데, 카미자카(上見坂) 등산로 입구에서는 인공조림한 삼(杉)나무숲 이외, 아무 것도 뵈지 않았다. 오후 2시, 숲 사이로 낸 임도를 따라 세산회원들은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언뜻 보기엔 ‘쇠약한 노인’들인 허상보 원장(66), 이재승 고문(65), 김세종 회장(64) 등 65세 안팎의 노년층이 대부분 선두그룹으로 나섰고, 한결 젊었어도 역시 불룩 배를 가진 중장년층이 맨 뒤로 처진다. 그것도 길을 잃을까 걱정될 만큼 멀리-.
언제 이렇게 열성으로 심은 것일까. 주위는 거의 모두 연갈색의 곧은 줄기를 가진 삼나무들뿐이다. 저 깊은 속까지 남김없이 삼나무다. 어떤 곳은 워낙 밀집하여 연갈색의 평면처럼 공간이 메워지기도 한다. 오래지 않아 이 단조로운 숲 풍경이 지겨워지고 만다.
그런데, 혹여 누군가 나물이라도 뜯으러 길을 벗어나 내려갔던 것일까. 좁은 등산로 바로 옆 급사면과의 경계선으로 가시철망이 계속 따라온다. 한 걸음만 실족하면 바로 팔이나 허리를 긁히고 찔릴 것이다. 역시, 인술을 다루는 의사들이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요새는 짐승 가두는 울도 가시철망은 쓰지 않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하며 어느 세산회원이 혀를 찬다.
어린아이에게는 눈높이이니 절대로 아이들은 데려가지 말 일이다. 철조망은 팽팽히 당기지도 않고 마구 되는 대로 깔아서, 어떤 것은 불룩하게 길쪽으로 휘어져 나와 있다. “피 나도록 긁히지 않고 싶으면 길을 벗어나지 말아!” 하고 협박하는 것 같다. 페인트칠도 벗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설치한 지 기껏해야 2~3년도 안 되었을 것이다.
대마도 관광객의 90% 이상은 한국인이라고 한다.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 탐방객이 90% 이상이어도 대마도 관리들은 이런 철조망을 깔았을까. 일본인들의 사랑하는 산 북알프스에서는 등산로 어디서건 가시철망을 본 기억이 없다.
서암봉 정상 조망의 쾌감은 환희에 가까와
세산회원들은 1시간20여분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곧장 시라다케 신사(白嶽神社)가 있는 삼거리까지 내처 걸어갔다. 도중에 단 한 곳도 멋진 경치가 뵈는 조망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급경사길로, 정상에 올랐다가 되내려와야 한다.
굵은 뱀들이 뒤엉킨 듯한 형상으로 수많은 수목 뿌리들이 드러난 비탈길을 몇 명씩 그룹을 지어 올라갔다. 신사~정상간은 입구에서 신사까지 걸어온 거리 5km의 10분의 1도 되지 않지만 급경사여선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 손으로 바위턱이나 나무줄기를 부여잡아야 할 만큼 가파른 홈통 같은 구간을 지나 작은 고갯마루에 오르자 갑자가 강풍이 몸을 휘감는다. 고개 양쪽으로 모두 가파른 바위능선이 시작되고 있다. 이중 왼쪽 암릉을 감아돌아 올랐다.
저 위로 하얗고 거대한 집채만한 바윗덩이가 뵌다. 희고 둥글어서 흡사 만개 직후의 목련꽃 같은 형상이다. 그 꼭대기에 두어 사람 먼저 올라선 이들이 뵌다. 거기가 시라다케 정상의 두 암봉 중 서쪽 것인 세이칸보(西岩峰). 동쪽 맞은편에 그야말로 피어나기 직전의 꽃봉오리, 혹은 예각의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토칸보(東岩峰)가 솟았으나 이 암봉은 암벽꾼이 아니면 쉽사리 오를 수 없다.
그간의 다소간 시시했던 여정의 지루함은 감수할 만한 것이었다며 우리는 조심조심 정상 암봉을 내려선다. 10명 이상은 머물기 어려운 곳이기에 뒷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려가 주어야 한다. 더 있기도 어려운 것이, 워낙 심하게 몰아치는 바람결에 얼이 빠질 것 같다.
다시 숲속으로 들자 죽은 듯 사위는 고요해진다. 신사로 내려서서 40명 일행을 확인한 박 과장은 하산길로 접어든다. 아까의 오름길과는 사뭇 다른 숲 경치가 전개된다. 오름길에 비해 한결 굵고 의젓한 삼나무들이 역시 아름드리인 느릅나무 등의 활엽수목들과 어울려 시원스런 공간미를 보이고 있다. 꾸준히 간벌하며 다듬은 숲은 정갈하고도 아름다워 걸음이 저절로 느려지게 한다.
숲 풍치에 취해 걷다보니 이우정 박사와 기자가 맨 뒤다. 문득 앞이 훤해진다. 커다란 등산로 안내판이 섰고 콘크리트 도로가 와닿은 등산로 입구다. 그러나 그 뒤로도 길 양쪽은 울창하게 아름드리 삼나무며 전나무들이 하늘을 가린 멋진 길이다. 서둘러 빠져나갈 이유가 없다며 여유로이 걷는데 저 앞에서 이창섭 등반대장이 얼른 내려오라며 손짓한다. 축지법 쓰는 듯했던 노년층의 선배들이 이미 버스에 올라 기다린 지 오래 된 모양이다.
어느덧 오후 6시. 4시간여의 시라다케 탐승에 이어 소박하고도 깨끗한 온천장에서의 온천욕, 그리고 해물바비큐로 이어지며 대마도에서의 첫날은 만족스레 마무리 되었다.
아리아케 오름길은 후박·당단풍·굴피 등 거목숲
버스로 이즈하라항의 숙소로 가 하룻밤을 보낸 뒤 새벽 일찍 아리아케(558.2m) 등행길에 나섰다. 지난 밤 가라오케에서 밤을 새다시피 한 주당 몇 사람만 빠졌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분다. 숙소 앞 이즈하라항으로 흘러나가는 하천변의 도로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산길을 향했다. 시가지 주도로를 서쪽으로 가로지른 뒤 두어 번 건물 모퉁이를 돌아 언덕길로 접어든다.
어둠속에서도 어딘가 익숙한 모양의 솟을대문 같은 문이 나섰다. 에도시대에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고려문이다. 그 건너편에 길가에서 큼직한 조선통신사비가 얼굴을 드러냈다.
도쿠가와 막부 260년간(1603~1867) 조선은 12차례에 걸쳐 다시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관계 회복이 절실해진 도쿠가와 막부의 요청에 의해 재개된 교류였다. 통신사(通信使)란 말 그대로 서로 신의를 통해 교류한다는 뜻을 가진 사절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근세에 들어 다시 배반했다. 우리에게 일본은 여러 번 배신의 나라였다. 신새벽의 어둠과 바람이 공연히 섬뜩하다.
민가지역이 끝나고, 울울창창한 우거진 숲 사이로 가지런히 갈색 계단이 뻗고 있다. 새벽 운동 삼아 오를 만도 할텐데 우리 일행뿐, 일본인들은 전혀 뵈지 않는다. 100여m 계단길의 끝에서 뒤처진 이들을 기다렸다가 왼쪽의 소로로 접어들었다. 아리아케 북동쪽에 있는 동생격의 산 나리아이산(408m) 능선을 따르는 것이다.
아리아케의 숲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더 가깝기에 우리나라 심산유곡인듯 낯설지가 않다. 시라다케와는 달리 삼나무보다는 후박나무, 당단풍나무, 굴피나무 등의 거목들이 숲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허리가 꺾이며 쓰러져 속이 암갈색으로 썩어든 거목, 진초록의 이끼가 일부러 칠한 듯 두텁게 덮인 고사목 등 우리의 지리산 칠선골과 비슷한 원시적 분위기다.
아리아케~나리아이산 능선 위에 다다른 뒤 길은 완경사로 변하며 일부러 잡목을 쳐낸 것처럼 넓어진다. 방화선을 내둔 것일까. 아무튼 환하고 넓은 능선길을 따라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자 어느덧 아리아케 정상이다. 이 산 정상은 흡사 수평으로 뭉텅 잘라낸 듯 거의 널따란 평원에 가깝다. 우리의 선자령 정상과 흡사한 분위기다. 풀밭 가운데 세워진 정상표지목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을 끝으로 다들 서둘러 발길을 되돌렸다. 별다른 조망도 없고, 시라다케 정상에서와 진배없는 강풍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이곳 정상에서 곧장 북진하여 어제 시라다케 산행을 시작했던 지점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그러나 조선통신사비쪽의 숲길은 내려가며 한 번 더 즐겨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대마도
한때 우리 땅이었던 ‘두 섬’
대마도는 동서의 폭이 약 18km, 남북으로 길이가 약 82km쯤 되는, 울릉도 약 10개만한 큰 섬으로 일본에서는 세 번째로 크다. 인구는 약 4만으로, 이중 가장 큰 마치(町)인 이즈하라 마치에 16,000여 명이 살고 있다. 부속도서가 유인도 5개를 비롯해 107개로, 아름다운 해상 풍경을 이루고 있다. 해발 519m의 시라다케가 유명하지만, 최고봉은 야타테야마(648.5mㆍ矢立山)다.
대마도는 시대에 따라 한일간 교류의 교량이었다가 우리를 괴롭히는 교두보로도 역할했다. 왜구가 대마도를 근거로 우리 해안 곳곳에서 출몰하자 조선조는 귀화 등의 유화정책을 펴다가 세종대엔 이종무 장군을 파견,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했다. 대마도에서는 이러한 한일간의 크고 작은 교류의 흔적을 돌아보는 감회가 유다르다.
현립박물관으로서 조선통신사 행렬도, 초량 왜관도 등 다양한 유물과 쓰시마 야마네코(산고양이), 쓰시마 사슴 등 천연기념물로 가득 차 있는 역사민속자료관, 대(對)조선국 외교기관으로 1611년 건립된 이테안(以酊庵)이 있는 서산사(西山寺), 조선 고종의 왕녀로서 한일합방 후 1931년 대마도 번주 소우 타케시(宗武志) 백작과 강제로 정략결혼을 해야 했던 비운의 덕혜옹주와 관련된 비(이씨왕조 종가 봉축결혼기념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정읍으로 내려와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된 후 음식을 끊고 운명한 면암 최익현 선생을 기리는 순국지비(殉國之碑)가 모셔진 수선사(修善寺ㆍ슈젠지) 등은 반드시 들러볼 곳이다. 최익현 선생은 적의 땅을 밟기 싫다며 버선 바닥에 조선의 흙을 깔고 다녔다고 한다.
대마도 거주 일본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이중적인 것 같다. 한국인 관광객들을 어떻게 해서 더 많이 끌어들이겠다는 것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시 가장 중요한 공약이면서도 정작 한국 관광객들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아리아케 등산로 입구 어느 민가의 철망형 쓰레기통 위엔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가 아니라 ‘버리지 마라!’라고 반말로 느낌표까지 찍은 한글 팻말을 붙여 두었으며, 관광객들 사이를 지나는 일본인 차량에서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일본 체험’을 한 번 실감나게 해본다는 데 의미를 둘 때 비로소 가볼 만한 곳이 대마도라고 할 것이다. 시라다케나 아리아케는 사량도 지리산이나 거제 망산 등 남해안 지방 명산 풍치엔 한참 미치지 못하니, 산만 바라보고 가기엔 좀 뭣하다.
부산항에서 대마도행 여객선은 평일엔 오전 9시50분, 주말엔 오전 8시30분과 11시에 각각 한 차례 뜬다. 1박2일 패키지 여행비는 토~일요일은 4끼 포함, 28만9천원, 평일(수ㆍ목ㆍ금) 출발은 24만9천원, 일~월요일은 22만9천원이다.
100회 정기산행 맞은 세브란스산악회
전 회원이 의무요원…어떤 산 가도 든든, 안심
세브란스산악회(회장 김세종)는 한국 최고 수준의 세브란스의대 출신 의사들 모임이니 지구상 어딜 가도 걱정 없을 것이다. 내과,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 각 분야별로 회원이 골고루 섞여 있어 어떤 산을 가도 든든, 안심이다. 단 치과는 치과대총동창회가 따로 있듯 세브란스치대산악회도 따로인데, 이 아픈 거야 며칠쯤 참아도 별 문제 없지 않나 싶다.
아무튼 세산회 산행 스타일을 보건대는 꼭 그렇게 각 분야별로 전문의가 동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게 고강도다. 걷는 속도는 속보경기하듯 빠르며, 산악회 고참들의 뒤처진 이에 대한 배려는 안타까운 수준이다. 시라다케 산행에 동행해보니 늘 선두 그룹을 이루는 60~70세 전후의 노년층 선배들은 ‘평소 체력단련을 게을리한 자는 버리고 갈 수밖에 없다’는 듯 냉정했다. 그저 잠시 서서 기다려주다가 “곧 오겠지, 뭐” 하고는 다시 휙 내달려버렸다.
그러나, 실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늘 맨 뒤에서 지친 이들을 추스르며 오는 이가 있었다. 이근행 전 등반대장. 그는 마라톤 풀코스를 놀랍게도 3시간20분만에 주파하는 건각이며 정형외과 전문의다. 등산 경험도 다양한 그가 언제나 후미를 관리하기에 노선배들은 부담없이 앞만 보고 내달릴 수 있는 것이다. 그간 수많은 회원들이 낙오하여 공포 속에 숲길을 헤맸을 것 같다는 추측은 그야말로 추측이었을 뿐이다.
하여튼 세산회 산행이 유달리 센 것만은 사실이다. 60여 명 회원 중 50세 이하의 젊은 회원이 두어 명에 불과한 것은 그간 노년층 선배들이 사뭇 견디기 어려운 모욕감, 수치심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뻘의 60~70대 선배들이 순식간에 그림자도 뵈지 않게 앞서 내달려간 다음 앉아쉬면서, 지난 밤 폭음에 퉁퉁 부은 눈으로 불룩 나온 배엔 구슬땀을 뚝뚝 흘리며 숨 넘어갈듯 헐떡이며 오르는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일이 반복될 때 어떻게 다시 세산회 산행에 동참할 수 있겠는가.
결국 정기산행 참여자 수는 초기 40여 명 수준에서 최근 20명 선으로 반 토막 났다. 여의사는 거의 매주말 산행을 거르지 않는 72학번 동기 윤기영, 탁미진희, 황연미 3인방을 비롯해 겨우 몇 명만 잔류에 성공했을 뿐이다. 이에 최근 노년층 선배들은 “알고 보니 원인은 우리 회장ㆍ고문단의 초고속 산행이었다”며 크게 반성 후 산행 강도를 대폭 낮추고 젊은 의사 후배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중이다. 산행을 통해 형성된 친밀감으로 병원 내 협진의 밀도와 효율을 높이는 일 또한 무시해선 안 될 세산회의 모임 목적이기 때문이다. 코스가 길고 힘들 때는 산행을 A, B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하기도 한다.
매월 둘째 주말 정기 산행 때의 미적지근한 기분은 세째 주말의 ‘쓰리엠시(3MC)클럽’ 산행으로 화끈하게 풀어낸다. 3MC란 메디칼, 마라톤, 마운티니어링 세 가지를 모두 추구하는 클럽이란 의미. 그런 만큼 3MC의 산행은 ‘3MC를 하루에 3개 산을 넘는 클럽’이란 뜻으로 오인할 만큼 무섭다. 서울 근교의 불수사도북(불암~수락~사패~도봉~북한산) 당일 종주는 기본이니, 등산경력이 좀 있다고 하여 함부로 명함을 내밀지 말 일이다. 이근행 세산회 전 산행대장이 현 3MC 회장이며, 마라톤 풀코스를 23회 완주한 세산회 이경두 회장, 220회 완주했으며 3시간대에 주파하는 이경두 박사, 작년도 실버원정대 때 ‘팀닥터만 아니었다면 제일 먼저 등정했을 것’이라 소문났던 이재승 박사 등이 주력 멤버다.
세브란스산악회는 이재승 박사를 비롯해 김세종, 이근행, 이창섭, 서경 회원 등이 99년 창립했으니 올해로 만 8년이 넘었다. 의사들 모임답게 대마도 산행 참여 회원 40명 중 담배 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이창섭 등반대장이 배낭 바닥에 항상 소주팩 8개를 기본으로 깔고 다녀야 할 만큼 애주가들 일색이다.
로봇 수술의 선구자인 이우정 박사는 카메라 수집이 취미인 이로, 세산회 기념사진 촬영은 거의가 그의 몫이다. 그는 그간 모아둔 80여 대 의료 및 일반 카메라를 세브란스병원에 기증했는데, 워낙 귀중한 것들이라 병원측은 박물관을 따로 마련해 전시해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