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에 사랑하고픈 사람들은 정안으로 오라. 복잡한 회색의 도시를 탈출하여 공주 정안의 무성산으로 가보자. 나른한 계절을 훌훌 털어버리고 지친 가슴에 새로운 활력을 얻을수 있는 곳이라고 좋다.
천안에서 공주를 향해 지난해 개통된 차령을 뚫고 나오면 온 산하가 하얀세상이다. 주변을 돌아보지만 삼십리 정안골이 온통 하얗기만 하다. 우리나라 최대의 밤의고장 정안이 만들어 내는 밤꽃의 향연이다. 여기서부터 창문을 내리고 천천히 달려보자. 이 세상의 벌이란 벌들은 다 모여 식량공수에 여념이 없고 산골짝 다람쥐들이 빨아먹고 남은 여진의 향기로도 어느새 몸속 깊숙이 흠뻑젖는다.
해마다 초여름이 시작되는 스무날은 어김없이 웅장한 차령산 줄기가 밤꽃 향기를 풀어놓는다. 온통 꽃잔치가 펼쳐지는 하얀세상.. 누구나 이곳에 닿으면 저절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워질터, 온몸, 온마음이 하얗게 열리게 된다.
대자연이 그려내는 풍경, 밤꽃을 만들어내는 진원지인 무성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차령터널에서 공주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병풍을 길게 드리운 산이 무성산(해발 613m)이다. 무성산 가는 길은 3곳. 공주시내에서 가까운 우성면 한천 저수지길도 있고, 정안면의 고성저수지를 통해 가는 길이 좁게 나있지만 그래도 운치있는 곳은 평정저수지 길이 더 좋다. 더구나 평정 저수지는 연예인들이 즐겨찾는 낚시터이기도 하다. 23번 국도를 따라 전평이나 모란이라는 곳으로 들어서야 한다.
여기서 낚시터까지 시골길은 그대로 차량을 타고 갈 수 있기도 하지만 어린시절의 추억이 그대로 살아있는 길이다. 작은 계곡을 따라 가다보면 찰랑 찰랑한 다랭이 논두렁에는 들꽃이 흐트러지게 피어있고 맑디 맑은 개울에는 피라미, 가재가 가득한 곳이다. 그런가 하면 돌담과 돌담이 이끼 끼어 이어지고 수백년된 정자나무 그늘속엔 덩그러니 메어있는 그네줄과 널판지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다가 찔레꽃 덤불과 장다리꽃 사이로 비탈밭 쟁기질에 흙냄새가 진동하고 개구리와 소쩍새가 이중창으로 울어대면 개똥벌레가 레이지 빛을 쏘며 초여름 밤이 깊어만 가는 그런 곳이다.
사방 어느곳을 둘러보아도 역시 밤꽃이 모든 산속을 점령하고 있다. 시퍼런 잎파리 사이로 하늘로 솟구치는 있거나 진주목걸이 처럼 길게 늘어뜨린 밤꽃, 모두다 남성의 상징이다. 그래서 사랑이 부족하거나 못다한 사랑을 만들어 주는 꽃이라고 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짙은 향기를 뿜어내고, 장미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청초하고 품위가 넘쳐 흐르는 꽃, 황홀한 멋은 없지만 주변을 모두 장악할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을 갖춘 꽃이다.
이윽고 평정저수지가 나온다. 능애 낚시터다. 저수지가 축조된지 15년이 되었건만 산속에 묻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처녀지. 그러다가 지난 4월부터 KBS드라마 "왕건"에서 견훤의 동생 "능애장군"이었던 탤런트 전병옥씨가 직접 경영하는 낚시터다. 그래서 토·일요일만 되면 연예인들이 줄을 잇는다. 2만여평의 아담한 저수지에 불과하지만 무성산의 맑은물과 깊은 골짜기, 아직 때묻지 않은 대자연의 신선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화사한 밤꽃으로 둘러쌓인 호수, 토종붕어와 잉어들이 은비닐 햇살을 퉁겨내고 낚시꾼들의 발길을 잡는다. 무엇보다도 이 낚시터의 매력은 매운탕이다. 깨끗한 물에서 자란 물고기이기도 하지만 인기탤렌트가 직접 끓여 주기 때문이다. 부부탤렌트다. 부인 한진주씨는 KBS탤렌트 12기로 대하드라마 "토지"의 별당아씨로 출연한 적있는 미모인데다 맛 또한 인류 요리사를 뺨치고 있다. 낚시터 옆에 붙어 조그마한 조립식건물내의 식당다운 면모를 아직 갖추지는 못했지만 연예인답지 않게 검게 그을른 시골 아줌마, 아저씨의 순박한 모습 그대로고 언제 찾아도 미소로 맞아준다.
이 낚시터가 또 다른 마음을 유혹하는 것은 퉁퉁한 붕어처럼 물속에 잠겨있는 무성산이다. 숲이 무성하다고 해서 무성산, 머리 위로 우뚝 솟아 있다. 조선 세조때 홍길동이 이곳에서 웅거하며 탐관오리와 토호들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며, 6.25후 피난민이 정착했던 산이다. 홍길동 바위도 보고 마음을 씻어내어 짙은 밤꽃 향기로 취해보고 싶다면 느진목 계곡을 따라 올라가 보자. 계룡산이 여러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는 여성스런 산이라면 무성산은 펑퍼짐하고 우직한 남성같은 산이다. 바위돌을 씻어 내리는 계곡수 물소리가 우렁차고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풋사내 같은 원시림 그대로다. 밤꽃향기에 노루며, 토끼며 이름없는 수목들까지도 흠뻑 취해 사랑을 즐기고 있다.
마치 강원도의 깊은 산속에 온 기분이 든다. 현재 산중턱에는 3가구가 살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숯을 구워가며 생계를 유지했던 구곡산중이다. 지금은 군데 군데 남아있는 집터만이 옛날을 대변해 주고있다. 40분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산 허리를 차고 뚫린 임도가 나온다. 승용차가 서로 비킬수 있는 제법 잘 다듬어진 넓은 길이다. 북쪽으로 가면 마곡사로 가는길이고 남쪽으로 가면 공주나 홍길동 성재로 가는 길이 나온다.
임도따라 2㎞쯤 걷다보면 "홍길동 성재"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40분가량 무성산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는 거다. 자연 그대로의 환상적인 숲속 길이다. 인간이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이며 생명의 보고다. 눈에 띄는 화려한 꽃은 없는데 밤꽃 향기는 여전히 그윽하게 풍겨온다. 가는 곳마다 많은 숲들이 개발되고 파헤쳐져 가고 있으나, 아직 덜 훼손된 숲들이 남아있어 큰 위안을 준다. 가는 도중 군데 군데 산짐승들이 금방 다녀간 흔적들이 보인다. 울창한 수목은 허파 깊숙이 까지 밀려오는 산림욕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 숲속으로 이따금 깊숙이 스며드는 햇살에선 태고의 신비감 마저 느겨진다.
바람에 땀을 식히는가 했더니 이윽고 홍길동 산성이 나타났다. 축구공만한 돌들이 산등으로 수북하게 무리지어 뻗쳐 검푸른 이끼를 키우고 있다. 어림잡아도 길이가 200m쯤 될 것 같다. 옛성곽, 잘 쌓였던 돌이 세월을 못이기고 다소 무너진듯 측은한 감이 돈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수목만 우거지고 돌들은 없는데 어디서 이처럼 엄청난 돌을 누가 가져다 놓았단 말인가? 이 높은 산에 포크레인,중기차,헬기를 다 동원해도 한 일년가량은 족히 넘을 공사, 그옛날 홍길동이야기 말고 달리 말할수 없다.
「옛날 홍길동과 누이동생이 살았다. 어느날 서로 힘을 겨루기로 했다. 홍길동은 서울까지 갔다오고 동생은 성을 쌓는 내기를 정했다. 동생이 거의 성을 다 쌓을 무렵, 어머니는 아들이 질것을 염려하여 딸에게 먹을것을 주며 잠시 쉬라고 하였다. 그 사이 홍길동은 서울에서 도착하였고 동생은 결국 내기에서 졌다. 이때 동생이 쌓았던 성이 바로 홍길동 산성」이라고 한다.
성곽을 디디고 숲을 헤치면 낭떠러지 위에 홍길동 굴이 보이고 약수터가 나타난다. 제법 산길이 가파른 곳도 있지만 하루 산행길로 이만한 곳도 없다. 여느 이름난 관광지나 명산처럼 가꾸지도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 드러 내놓지 않은 산길이며 전설속에 묻혀있는 무성산 밤꽃 향기를 짙게 뿜어내는 무성산이 초여름에 지친 마음을 사로 잡는다.
"유월에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아 정안으로 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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