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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춘추의 첫번째 정치적 위기 - 대야성 함락
충남 부여 백마강.
서기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는 700년의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역사에 패자가 있으면 승자가 있는 법.
그해 8월 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백제 수도 사비성에 입성했다.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던 김춘추의 오랜 열망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며
드디어 삼국시대를 마감한 신라의 삼국통일.
그 중심에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있었다.
김춘추은 탁월한 외교력으로
당을 끌여들여
통일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하지만 이 대목은 우리 역사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이라는 외세를 끌여들여 이룩한 통일이라는 비난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춘추의 외교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는 왜 그토록 외교에 집착했을까?
우리 역사에 가장 극적이고 가장 활발한 외교를 펼쳤던 김춘추의 외교의 실상을 알아보자.
경주 태종무열왕 추향대제.
해마다 추석 이틀전 9월 23일
후손들은 김춘추의 위업을 추모하는 제향을 올린다.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김춘추에 대한 첫 기록은 대야성(大耶城)이라는 지명과 함께 나온다.
대야성은 지금의 경남 합천.
진흥왕때 이 지역을 차지한 신라는
도독부를 설치, 이곳을 관활했다.
천혜의 자연지형을 이용해 만든 대야성은 난공불략의 요새이다.
"만약 신라가 이 합천을 함락 당하게 되면,
고령, 대구, 경산 앞까지 바로 뚫려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형적으로 봐도 합천은 적은 군사로 방어가 가능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 조원영 학예연구사(합천박물관)
대야성은
백제에 대항하여 방어하는 신라의 최고 요충지였다.
642년 8월.
백제 의자왕은 윤충 장군을 보내 대야성을 공격했다.
당시 대야성 전투와 관계해서 비석 하나가 지금도 합천에 남아있다.
백제 침공에 맞서 싸웠던 신라 장군 죽죽의 비석이다.
끝까지 백제에 항전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죽죽.
'신라충신죽죽비문'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내가 어찌 항복하겠느냐.
꺽일 순 있어도 굽힐 수는 없다"
그런데 품석(品釋)이란 인물이
백제에 항복했다는 기록이 뚜렷하다.
품석은 당시 대야성의 도독, 즉 성주였다.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그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고, 백제인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품석과 그의 아내는 현장에서 처형당했다.
백제군은 그들의 머리를 잘라 부여로 보냈다.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부여(사비)에 보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년(642)>
품석은 왜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이는 품석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품석이 부하 검일의 아내가 미색이 있음을 보고 빼앗았다."
- <삼국사기 죽죽 열전>
대야성의 도독 품석은 자신의 부하 검일의 아내를 탐내 빼앗아버렸다.
이를 안 검일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백제가 쳐들어오자 검일은 그들과 내통했다.
창고에 불을 질러 신라군을 혼란에 빠트리게 했고
이에 품석은 항복하고 만 것이다.
"검일이 백제와 내통하여 창고에 불을 찔렀다."
- <삼국사기 죽죽 열전>
그런데 문제는 품석과 그의 아내가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라는 점이다.
김춘추 사위 김품석,
김춘추 딸 고타소
대야성에서 딸과 사위가 죽고,
그 시신까지 빼앗긴 김춘추는 개인적으로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눈앞에서 사람이 지나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탄에 잠겼다고 한다.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
嗟乎 大丈夫 豈不能呑百濟乎
(차호 대장부 기불능탄백제호)"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화랑들이 그들의 맹세를 새긴 <임신서기석>(보물 제1411호)
화랑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목숨처럼 여겼다(臨戰無退-임전무퇴).
"나라에 대란이 있을 때에는 기꺼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화랑교육과 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가 알 수 있는 금석문입니다."
- 박방룡 학예연구실장(국립경주박물관)
그런데 김춘추 사위 품석은
이런 화랑정신을 외면한 채 백제에 항복하고 만 것이다.
대야성 함락은 신라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대야성 함락의 비난이 김춘추에게 쏟아졌다.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김춘추에게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다.
"중앙에서의 김춘추의 위상이 현격히 저하되어가는,
견제와 균형이 깨어져가는 상황에 당도했습니다.
실권될 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입니다."
- 주보돈 교수(경북대 사학과)
김춘추는 이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당시 왕이었던 선덕여왕을 만났다.
"신이 고구려로 가 친히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臣願奉使高句麗請兵 以報怨於百濟
(신원봉사고구려청병 이보원어백제 )"
- <삼국사기 선덕여왕 11년, (642)>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고구려행이었다.
이제 백제는 김춘추에게 복수의 대상이 된 것이다.
김춘추의 정치적 결단이자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노력의 시작이었다.
경주의 <통일각>.
김춘추, 김유신, 문무왕 등 삼국통일의 세 주역을 모신 곳이다.
그러나 김춘추시대 신라는 세 나라중 가장 큰 곤경에 처해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끊임없이 신라를 침략해오고 있었다.
친백제계 왜 역시 신라를 적대시했다.
실제 왜는 신라를 치기 위해 대군을 준비하기도 했다.
"내목황자로 신라를 공격할 장군으로 정하고 군사 2만 5천명을 주었다."
- <일본서기, 스이코천황 10년(602)>
한강을 둘러싼 쟁탈전도 치열했다.
6세기 120년간의 나제동맹을 깨고
진흥왕때 백제의 한강을 독차지한다.
7세기초 신라는 한강을 두고
다시 고구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북한산성 진평왕 25년(603)
우명산성 진평왕 30년(608)
낭비성 진평왕 51년(629)
칠중성 선덕여왕 7년(638)
한강은 신라에게 생명선이나 다름없었다.
한강유역의 당항성(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은
신라가 당과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 당항성을 지키기 위해 신라는 군사력을 집중했다.
"신라가 육로를 통해서 대당 문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강유역의 당항성을 통해 대당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거점을 만들 수 있었던거죠.
물론 백제나 고구려도 이곳이 굉장히 중요했었고,
당과 신라, 고구려, 백제 등의 각축 속에서
신라가 당으로 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해상교통로였습니다."
- 김진원 학예연구사(화성시 문화홍보과)
백제와 고구려는 연합하여 이 당항성을 빼앗으려 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공모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가 당으로 통하는 길을 끊으려 했다."
- <삼국사기, 선덕여왕 11년(642)>
"한반도내에 한모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백제와 고구려 주변의 두 강대국을 막아야 했으니까
결국 고전을 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 강종훈 교수(대구카톨릭대 역사교육학과)
바로 이러한 시점에 김춘추는 적대국 고구려로 가서 군사력을 청해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2. 김춘추의 첫번째 위기탈출 시도.
고구려행, "반드시 백제를 멸하리라”
김춘추
- "나는 공과 일심동체요.
지금 내가 만일 고구려에 들어가 해를 당한다면
공이 무심할 수 있겠소?"
(吾與公同體 今我若入彼見害 貝公其無心乎
오여공동체 금아약입피견해 패공기무심호)
김유신
- "공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 백제 두 왕의 궁전을 짓밟을 것이오."
(公若往而不還 즉僕之馬 跡必於麗濟兩王之庭
공약왕이불환 즉복지마 적필어려제양왕지정)
김춘추
- "내 짐작에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약 그 기간내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우리는 두번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것이요."
(吾計日六旬乃還 若過此不來 즉無再之期矣
오계일육순내환 약과차불래 즉무재지기의)
김춘추의 고구려행.
그것은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기세등등했다.
연개소문이 정변(642)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한편 당은 고구려와 끊임없는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춘추가 고구려행을 단행한 것은
당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행보였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외교를 양면적으로 해석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실패했을 경우에도
김춘추는 차후 당 태종과의 외교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고구려에 대한 정보력을 자신이 쥐게 될 것이고,
고구려와도 연계할 수 있다는 것을 내세움으로써
당 태종을 장기적 안목으로 압박할 수 있는 외교적 제스츄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 박순교 박사(<김춘추 외교의 승부사>의 저자)
고구려로 간 김춘추는 연개소문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인물됨됨이를 파악하려 했다.
그 만남은 팽팽한 긴장 속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김춘추를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자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신라 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은 아마도 우리의 형세를 살펴보려는 것이오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을 없게 하소서."
-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김춘추는 마침내 보장왕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군사력을 요청했다.
"백제가 무도하여 신라 강역을 번번히 침략하고 있습니다.
이제 고구려 군사를 얻어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今百濟無道 以侵車失 我封疆 寡君願得大國兵馬 以洗其恥
금백제무도 이침거실 아봉강 과군원득대국병마 이세기치)
"지금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마목현과 죽령은 고구려땅이다.
그 땅을 돌려주면 군사를 내어줄 수 있느니라."
(마목현여죽령 본아국지 여약환서북지지 병가출언
麻木峴與竹嶺 本我國地 汝若還西北之地 兵可出焉)
보장왕은 군사동맹 댓가로 영토를 요구했다.
즉 소백산맥 이북 옛 고구려땅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신라로써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곳이었다.
바로 한강 상류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신라왕의 청을 받들어 원병을 청하러 왔거늘
어찌하여 대왕께선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달라 하십니까"
(臣奉君命乞師 俱威却行人 以要歸也
신봉군명걸사 구위각행인 이요귀야)"
협상은 결렬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의 감옥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다.
미리 고구려 신하 선도해를 매수해두고 있었다.
그의 치밀함이었다.
김춘추를 찾은 선도해는 토끼와 거북이의 설화를 들려줬다.
당장 위기극복을 위해 약속이라도 하라는 우회적인 충고였다.
김춘추는 이를 받아들였다.
"마목형과 죽령은 본래 고구려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면 우리왕께 청하여 돌려드리겠습니다."
(二嶺本大國地 令臣歸國 請吾王還之
이령본대국지 령신귀국 청오왕환지)
한편 신라땅의 김유신도 행동에 들어갔다.
김춘추가 억류되자 별동대 3천명을 고구려 국경에 집결했다.
"지금 이 나라의 어진 재상이 고구려에 붙들여 있는데
어찌 두렵다하여 반격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김춘추가 자기의 어떤 정치적 기반이 와해 되어가는 상황에서 자기 죽음을 불사하고 간거죠.
그것은 신라를 위한 자기희생입니다.
그런 제스츄어를 취함으로써 신라 진골귀족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줄 수 있었습니다."
- 윤선태 교수(동국대 역사교육학과)
자신의 기지와 김유신의 무력시위로 김춘추는 무사히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고구려행이었다.
3. 김춘추와 김유신 만남, 수어지교(水魚之交)
김춘추의 목숨을 건 고구려행은 별 성과없이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대야성이 함락당하고 신라가 국가적 위기에 처했을 때
선덕여왕과 진골귀족은 걱정만 할 뿐
누구 하나 적절한 타결책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김춘추가 움직인 것이다.
<일본서기>에도 김춘추에 대한 짧은 기록이 나온다.
"춘추는 얼굴이 잘 생겼고 말을 잘했다."
고구려에 다녀온 김춘추는 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왜에는 백제계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따라서 김춘추의 일본행 역시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길이었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말겠다는 그의 각오가 일본행을 감행케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외교에 골몰했던 김춘추.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경주시 교동 김유신 집터.
김유신은 자신의 집으로
김춘추를 자주 불러 축공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김유신의 집에 드나들던 김춘추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눈이 맞았고
급기야 문희는 혼전임신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은 부도덕한 여동생을 태워죽이겠다며 마당에 불을 피웠다.
때마침 남산에 오른 선덕여왕이 연기를 보고 그 사연을 물었다.
"그 누이가 남편도 없이 몰래 임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김춘추가 크게 당황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에게 문희와의 결혼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김춘추의 사람됨됨이를 알아본 김유신의 계책이었다.
김유신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경남 산청 금서면 <구형왕릉>.
금관가야 마지막왕 구형왕.
그는 법흥왕때 금관가야를 법흥왕에게 바치고 귀순했다.
이 금관가야의 마지막왕 구형왕이 김유신의 증조부다.
신라로 귀순한 김유신 가문은 숱한 전공을 세운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은 진흥왕과 더불어 신라의 정복사업에 큰 공을 세웠지만
아버지 김서현은 충북 진천, 신라의 최변방으로 좌천되었다.
신라 주류 사회는 정통 진골귀족이었다
김유신 가문은 신라사회에서 여전히 비주류였다.
김춘추 역시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 진지왕은
유부여 도화랑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비형이란 아들을 낳았다.
진지왕은 즉위 4년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국인, 즉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서 좇겨난다.
그가 김춘추의 할아버지다.
김춘추는 폐위된 왕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 진지왕릉(경주 서악동)
* 진지왕(폐위) --- 지도부인
ㅣ
김용춘 --- 천명부인
ㅣ
김춘추
"폐위된 진지왕의 혈통,
김춘추 같은 경우 성골에 해당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김춘추는 왕위계승에서 멀어져 있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강종훈 교수(대구카톨릭대 역사교육학과)
신분적, 정치적 한계를 지닌 두 사람은
혼맥을 형성,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은 것이다.
두 가문의 유대관계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진덕여왕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여덟명의 백제장수를 사로잡은 김유신은
백제 포로와 품석부부의 유골 교환을 제안한다.
"대야성 전투에서 죽은 우리 성주 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가 너희 백제 옥중에 묻혀있다.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보내 너희 목숨과 바꿔가는 게 어떻겠느냐?"
결국 이 제안으로 김춘추의 딸과 사위 유골은 신라로 돌아온다.
6년만이었다.
이런 관계를 유지한 김유신과 김춘추 앞에는 공통의 과제가 있었다.
대구 동구 신무동 <부인사>.
이곳에는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선덕여왕이 모셔져 있다.
신라 26대 진평왕은 '진골중에 남자가 없다(진골남진)'는 명분을 내세워
첫째딸 덕만을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즉위시켰지만
7세기 백제 의자왕의 거듭된 공격속에
신라왕권은 불안정하기만 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왕권을 지키는 데 주력했다.
"진골귀족들의 합의속에서 왕권이 반석을 굳혀야만 안정이 될 수 있는데
가장 주류였던 진골귀족들이 여왕의 집권에 대해 계속 불안감을 가집니다.
불안감을 더 깊어지게 했던 것은 당 태종의 언사였습니다."
- 윤선태 교수
당 태종은 선덕여왕의 즉위를 인정치 않으려고 했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주변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 <삼국사기 선덕여왕 12년(643)>
심지어 황제일가를 신라에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배경으로 진골귀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선덕여왕 16년(647) 상대등 비담의 난이었다.
선덕여왕은 큰 충격을 받았고 다음날 사망한다.
김유신이 이들 제압에 나선다.
"(반란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군대 전투는 어떠했습니까?)"
"김유신의 관군은 평지성인 월성을 중심으로 했고
비담의 군대는 명활산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유신에 비해 비담이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 김호상 박사(신라문화유산조사단)
김유신은 불리한 전제를 역전시켜 이들을 평정했다.
상대등 비담을 비롯, 반란세력은 모두 처형되었다.
"비담 등이 패주하니 쫓아가 목을 베고 구족을 멸하였다."
-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김춘추는 정치권을,
김유신은 군사권을 장악했다.
4. 김춘추의 두번째 위기 탈출,
바다 건너 목숨을 건 '대당외교'
이제 두 사람은 신라의 신흥세력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파트너와 함께 신라 정치의 중심이 된 김춘추.
하지만 과제가 아직 남아있었다.
반드시 백제를 멸하리라 맹세했지만
백제는 여전히 건재하여 끊임없이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고 있었다.
이에 김춘추는 대당외교에 나선다.
신라는 당나라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김춘추는 나당동맹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김춘추의 나당동맹 성사.
여기엔 치밀한 외교전략과 치밀한 심리전이 있었다.
그러나 대당외교 역시 목숨을 건 일이었다.
전북 김제시 금구면 <사현사>.
봉성 온씨들의 사당.
여기엔 대당외교에 나선 김춘추의 목숨을 구해준 인물을 모시고 있다.
온군해의 단(壇).
온군해는 김춘추의 대당외교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대당 외교길.
김춘추는 고구려군에 포위되었다.
이때 온군해가 대신 김춘추의 옷을 입고 대항하는 사이
무사히 사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해상에서 고구려군사를 만나 위급한 찰나에
재빨리 김춘추의 옷을 갈아입고 대신 죽임을 당하고
김춘추는 쪽배를 타고 도망갔습니다."
- 온영복(전북 김제시 금구면)
경주 -> 당항성 ->내주 ->낙양 -> 장안...
김춘추의 당나라 길은 이처럼 수천리 험난한 길을 가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당나라 수도 서안.
당에 도착한 김춘추는 당 태종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은 당 태종은
광녹경(光祿卿), 유정(柳亭)을 외곽까지 보내 김춘추를 마중하게 했다.
당시 외교관례로 볼 때 이례적인 것이었다.
"당 태종은 춘추의 외모가 영특함을 보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런 환대에는 배경이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와 수차례 전쟁을 치룬 상태였다.
특히 태종 자신이 직접 참여한 안시성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전을 당한 직후였다.
이제 당나라는 신라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입장에서 고구려 군사력 분산을 위해서라도 신라가 필요했다.
태종의 김춘추 환대에는 이런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었다.
"일거에 대군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킬려고 하다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장기전으로 고구려를 공략하고 고구려의 방어력을 분산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신라의 전략적 가치와 군사력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래서 김춘추에 대해 의도적으로 환대했던 것입니다."
- 노태돈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났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김춘추는 의외의 발언을 한다.
"지금 당의 국학에 수많은 학자와 학생이 구름같이 몰려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국학에 나가 석정과 강론을 하고 싶습니다."
김춘추는 군사동맹이라는 핵심적인 내용 대신 유학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의 전략이었다.
"김춘추는 처음부터 자기가 갖고 있는 속마음을 다 내놓지 않고
상대방이 궁금해 할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보면
외교관으로서 아주 탁월하고 비상한 면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 강종훈 교수(대구카톨릭대 역사교육과)
태종의 허락으로 김춘추는 당나라의 유교행사 등을 참관하였다.
얼핏 한가한 행보로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당에는 수많은 신라유학생이 있었다.
김춘추는 이들을 만났다.
유학생들에게 당의 정세를 듣고 분석하기 위한 의도였다.
김춘추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초조해진 쪽은 오히려 당 태종이었다.
그는 결국 김춘추를 다시 불렀다.
말을 먼저 꺼낸 쪽은 당 태종이었다.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
"백제가 굳세고 교활하여 침략을 맘대로 하고
더구나 얼마전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깊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하고 입구에 길을 막았으니,
만약 흉악한 백제를 물리쳐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다 사로잡혀 바다 건너 조공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 태종은 나당동맹을 수락했다.
김춘추의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당 태종은 삼국의 주변 정세에 대해서
전운에 의존하고 있었고 실지 소상한 정보를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김춘추가 자세한 상황을 알려줌으로써
당 태종과의 외교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고,
그것은 말 그대로 국가 대 국가의 외교가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김춘추의 외교적 자질은 새로운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 박순교 박사(<김춘추 외교의 승부사>의 저자)
5. 드디어 왕이 되다 - '태종무열왕 김춘추'
그렇다면 나당동맹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직접적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사기> 문무왕편에 보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당 태종이 백제땅을 신라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내가 (당 태종)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 토지는 다
그대 신라에게 주겠다."
"신라는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당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사실은 백제 병합만으로도 신라가 당시 충분히 만족할 상황이었다고 보여집니다."
- 주보돈 교수
치밀한 전략과 심리전으로 나당동맹을 이끈 김춘추.
반드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그의 염원을 실현시킬 조건을 마침내 갖추게 된 것이다.
김춘추의 외교 행보를 다시 보면
경주에서 평양으로, 다시 왜로, 다시 서해를 넘어 당의 수도 장안까지 향한다.
이렇듯 김춘추의 외교는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활발한 것이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나당동맹을 이끌어낸 김춘추.
이것은 김춘추 외교의 승리이자 백제를 멸망시키고야 말겠다는 집념의 결과였다.
그러나 나당동맹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외교관계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관계란 없는 것이다.
나당동맹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김춘추.
그에게는 새로운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당동맹 결성으로 김춘추는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굳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에게는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동지가 있었다.
날개를 단 김춘추는 빠른 속도로 신라사회를 개혁해나갔다.
그 증거가 <경주 용강동 고분>에 나타난다.
지난 1986년 발굴에서 의외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로 추정되는 토용(土俑-진흙인형).
복식이 모두 중국풍이다.
당나라 복식을 한 신라 토기. 당나라 복식을
한 신라 토기. 당과 신라의 긴밀한 관계를 말해준다.
김춘추는
나당동맹 성공 1년후
당나라 의관을 전격 수용했다.
당과의 관계를 확고히 하려는 태도였다.
"진덕왕 3년(649)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입기 시작하였다." - <삼국사기>
"당이 신라를 믿게 하는 중요한 절차들이었습니다.
그런 절차들에 대해 신뢰를 줌으로써
신라는 당나라에게 외교적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 윤선태 교수(동국대 역사교육학과)
진덕왕릉(경북 경주시 현곡면)
김춘추가 신라의 실권을 쥐어가고 있는 동안
진덕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신라는 새로운 왕을 결정해야 했다.
신라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제도, 화백회의가 있었다.
진골귀족들이 왕의 추대나 폐위를 만장일치로 정하는 의결기구였다.
표암(경북 경주시 동천동).
진골귀족들이 화백회의를 했던 바위다.
"삼국유사에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신라의 화백회의는 다수결이 아니고 만장일치제였기 때문에
박혁거세를 추대하거나, 진지왕을 폐위하는 결정적 의결기구였습니다."
- 김호상 박사(신라문화유산조사단)
진덕여왕 다음 왕을 결정하는 화백회의가 열렸다.
바로 그 중심에 김유신이 있었다.
그는 김춘추를 추대했고 김유신의 위엄에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김춘추가 신라의 왕이 되었다.
"모든 공들은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을 했다." - <삼국유사 진덕왕>
654년 김춘추가 즉위했다.
신라 제 29대왕 태종무열왕이 된 것이다.
김춘추가 왕이 되었으나
백제와 고구려는 끊임없이 신라를 침공해왔다.
"즉위 다음해는 고구려, 백제,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침략했다."
-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2년(655)>
신라는 큰 위기에 빠졌다.
나당동맹을 성사시켰지만 당나라의 지원병은 오지 않았다.
"당에 청병(請兵)한 회보가 없으므로 왕이 근심했다."
-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6년(659)>
군사를 청했으나 응답이 없자 김춘추는 큰 근심에 잠겼다고 기록은 전한다.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던 그의 열망은 무산되는 듯 했다.
낭보가 날아들었다.
드디어 당의 소정방 13만 군대가 출정한 것이다.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을 목표로 공격하였다.
백제 계백장군이 결사항전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660년 7월 백제의 의자왕이 항복했다.
보름후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사비성에 입성했다.
김춘추는 소정방과 함께 높은 곳에 앉았다.
그리고 의자왕에게 술잔을 치도록 했다.
승자의 쾌감을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백제를 멸하리라는 열망에 성취감에 젖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순간 대야성에서 죽은 딸과 사위의 얼굴이 떠올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춘추의 복수는 철저했다.
대야성에서 백제와 내통했던 검일의 사지를 짖어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삼국사기).
나중에 문무왕이 되는 아들 법민(문무왕)도 복수에 가세했다.
그는 의자왕의 태자 융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묻어둔 적이 있다.
그 일로 20년 동안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오늘 너의 목숨이 내 손안에 있구나"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여부왕살아매 매지옥중 사아이십년간 통심질수 금일여명재오수중)
-<삼국사기>
6.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의 야욕
그러나 백제를 멸망시킨 기쁨도 잠시, 당나라의 야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
정림사지5층석탑에는 소정방이 새긴 글귀가 남아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을 기념한다는 글귀다.
"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
당은 의자왕과 함께 12,000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그리고 백제에 5도독부를 설치, 직접 통치에 나섰다.
신라와 김춘추가 얻은 건 없었다.
심지어 당나라는 신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실제 당나라는 백제보다도, 고구려보다도 훨씬 강한 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을 끌어들이고 난 다음에,
그들이 어떤 형태로 행동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늑대를 몰아내려고 하다가 호랑이를 불러들인 격입니다."
- 노태돈 교수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당은 신라까지 넘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 김춘추는 죽음을 맞이한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지 1년만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돌아가셨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김춘추에게 당나라는 어떤 존재였을까?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꼭 필요했지만, 한편 목에 가시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
결국 김춘추는 당의 야욕을 저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김춘추는 자신의 맹세대로 백제를 멸망시켰다.
개인적으로는 백제에 대해 복수한 셈이다.
그후 그의 아들은 고구려까지 멸망시켜 통일시대를 열어간다.
이러한 김춘추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다.
신라 입장에서 최선을 다한 외교지략가인가?
아니면 외세를 끌어들인 사대주의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치 않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있다.
백제에 대한 지독한 복수심 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 상황을 외교를 통해 극복하려 했던 김춘추의 선택은 추효했다.
또한 백제를 제압하려던 그의 여망도 실현했다.
적지 않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김춘추는
외교로써 역사를 움직인 탁월한 외교가이자
비주류에서 왕위에까지 오른 풍운아였다.
- <한국사 전(傳)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