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東源 통일부 장관 해임 건의안이 통과된 지 사흘 뒤인 9월6일 롯데호텔 내 한 식당. 자민련의 고위 당직자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金鍾泌 명예총재(JP)는 동석한 李完九 원내총무를 가리켜, 『번개가 치면, 먹구름이 올 지 벼락 천둥이 칠 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올해 52세인 李총무는 자민련의 林장관 자진사퇴 요구~林장관 해임 건의안의 국회 통과~DJP 공조의 붕괴로 이어진 3주 동안 숨가쁘게 돌아간 일련의 정치 상황 전개 속에서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강하게 밀어붙이는 듯하다가도 마지막 순간 으레 한 발짝 물러서던 자민련이 이번 사태를 「독하게」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李총무라는 평가도 따른다.
그러나 그는 이런 평가나 충고를 매우 부담스러워 한다. 그는 『내 역할은 소용돌이의 모퉁이에 서서 JP의 신념을 왜곡없이 받든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실제 그는 자민련이 林장관 해임을 요구한 이래, 줄곧 JP의 곁에서 의중을 헤아렸다.
일본을 다녀오기 위해 공항을 오가는 JP의 승용차에는 늘 李총무가 동석해 자신이 분석한 정국 흐름과 원내 대책을 보고했었다.
지난 8월28일 일본에서 돌아온 JP는 林장관 거취 문제에 대해 『中庸의 길이 있다』고 했다. 이때 당내에선 『李총무가 지나치게 자진사퇴 요구·해임안 찬성쪽으로 분위기를 밀고 나간 데 대해 제동을 건 것』, 『JP가 한발 물러나겠다는 신호』라는 해석이 많았지만, 다음날 JP는 기자들에게 『中庸之道란 「자진 사퇴」를 말한 것인데, 그걸 못 알아듣는다』고 짜증을 냈다.
李총무는 성균관大 법대 3학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해,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그가 옆에서 배웠던 선배 사무관들이 李根植 행정자치부 장관, 鄭在龍 자산관리공사 사장 등. 당시 기획국장, 예산국장은 姜慶植 前 경제부총리였고, 과장은 陳稔 재경부 장관이었다. 그는 이 시절을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기획력을 키우던 20代』로 기억했다.
이후 활동적인 적성에 맞을 것 같아 옮긴 경찰에서, 그는 전국 최연소 서장(홍성), 최연소 경무관으로 승승장구하면서 44세에 충남 경찰청장을 지냈다. 그는 5共 시절 치안본부 정보 파트(사회과장)를 맡으면서 전국에서 집결되는 정보를 취급해 감각의 예민성을 키웠고, 6共 때는 서울시경 3부장(형사부장)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치렀다.
1991년 한 해에만 명지대생 강경대 군 폭행치사 사건, 외대생들의 鄭元植 총리 폭행, 성균관大 김귀정 양의 시위 도중 질식 사망 등 정권의 命運과 연관된 사건들을 지휘하면서 신속한 판단력과 치밀성을 다졌다고 한다.
李총무는 또 1982~1984년의 미시건 주립大 유학(형사정책학 석사), 1986~1989년의 LA 총영사관 내무 영사 근무 시절을, 『미국의 36개 州를 여행하면서 견문을 쌓고 유연한 사고 방식을 길러 지금의 리버럴리스트 성향을 습득한 시기』로 소개했다.
40代 중반 정계에 입문한 그는 자민련이 충청도를 휩쓴 15代 총선에서 유일하게 신한국당 출신으로 충남 청양·홍성 지역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이때 『사막에 떨어뜨려 놓아도 물동이를 들고 나타날 사람』이라는 농 섞인 평을 받았다. 16代 총선에선 영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최고 득표(70%)를 했다.
신한국당 시절에는 李洪九 당대표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李대표가 金泳三 대통령에게 주례 보고할 때는 으레 청와대에 동행해 李源宗 당시 정무수석을 만나며 권부 핵심의 메커니즘을 들여다 봤다. 자민련 대변인 시절에는 朴泰俊 당시 총리의 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주례 보고를 수행하면서 7개월 간 朴智元 공보수석, 李康來 정무수석을 통해 권력 내부 움직임을 감지했다. 그는 『20代 경제관료-30代 치안관료-40代 정치인으로 일한 경력과 미국 생활에서 쌓은 국제 감각이 정치적 판단에 큰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