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에게나 한가지 이상 인생의 그림자는 있기 마련이다.
시간과 사물에 따라 그림자의 모양이 여러 가지이듯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 역시 여러 가지이다.
가난과 질병, 이별의 아픔, 실업과 사업실패 등등...
누구에게나 인생의 그림자는 있다.
이 인생의 그림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절망하여 삶을 포기하는 것과
그것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희망을 창조하는 것이다.
성수대교가 붕괴된 지 10년째 되는 작년 10월 모 일간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연재되었다. 먼저 19일에는 “울다가 울다가...딸 따라간 아빠들”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사망한 희생자는 32명. 이 가운데 9명은 시내버스로 등교하던 무학여중고 학생들이었다. 세상은 망각을 통해 아픔을 흘려보냈지만, 가족을 가슴에 묻은 유족들의 상처는 시간이 갈수록 곪아 들어갔고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① 1994년 10월 21일. 가장 이식천(당시 46세)씨는 하늘나라에서 보낸 딸의 편지를 받았다. 딸 연수(당시 16세․무학여고2)가 아침 등교 도중 성수대교와 함께 추락한 16번 시내버스 안에서 숨을 거뒀다는 비보를 들은 지 몇 시간 뒤, 빗물과 강물에 젖은 채 돌아온 가방 안에는 소소한 잘못으로 아빠에게 매를 맞고 눈물로 쓴 편지가 고이 접혀 있었다. “사랑하는 아빠 보세요. 아빠! 저는 요즘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아빠가 저를 때리셨을 때 제 마음보다 100배, 1000배나 더 마음 아프실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빠! 저를 때리신 것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제 속에 있던 나쁜 것들을 때려서 물리치신 거라 생각하세요....아빠! 저를 위해 한번 더 마음을 풀어주시지 않겠어요?” 딸을 잃은 후 자책할 아빠를 안쓰러워하듯, 편지는 “아빠도 파이팅 이예요! 94년 10월 20일 아빠를 사랑하는 연수가 드려요”로 끝을 맺었다. 이날 아빠는 딸아이 가방을 가슴에 품고 엉엉 울었다.
그 후 10년. 수소문해 찾아간 아파트에 연수 가족은 없었다. 이웃들은 사고 이듬해인 95년 서둘러 이사를 했다고 전했다.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아파트 창문에서는 새로 단장한 왕복 8차로의 화려한 성수대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때는 허리가 잘린, 그리고 딸을 삼킨 흉물스런 다리였을 것이다. 불과 몇 백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사한 집은 한강이 보이지 않는 아파트였다. 어머니는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성수대교 사고 직후 굴지의 대기업 이사로 스카우트될 만큼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했지만 2년 후 힘없이 숨을 거뒀다고 했다. 착한 딸 연수의 “파이팅” 당부를 들어주지 못한 회한을 남기고. “(연수 아빠는) 아침에 일어나면 멍하니 눈물을 흘리고, 퇴근해서 집에 오면 울고, 회사에서도 남 몰래 울었어요. 밥을 먹다가도 통곡을 하고, 잠이 안 와서 뒤척이는가 보다 하고 바라보면 훌쩍훌쩍 울고 있고...., 그렇게 2년을 살다 중병에 걸려 돌아가셨지요.” 아버지는 경기도 용인시 천주교 묘지 딸 연수의 묘지 인근에 안장됐다.
② 연수 양과 함께 16번 시내버스 속에서 숨을 거둔 장세미(당시 무학여고3)양. 무학 여고는 사고 이듬해인 95년 2월 세미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취업반에 들어간 세미였다. 졸업식 날 딸 대신 명예 졸업장을 받은 아버지 장영남(당시 49세)씨는 “나중에 야간대학에 들어가 교사의 꿈을 이루겠다고 했는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4년 후인 99년 8월 18일. 성수대교 북단에 세워진 “성수대교 사고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아버지는 농약을 마시고 세상을 등졌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본 희생자 위령비에는 딸 “장세미”라는 이름이 20여㎝ 크기로 새겨져 있었다. 그는 유서도, 가족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가족들은 어떻게든 세상을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세미양 오빠(34)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누구나 사고를 당할 수 있는 것이고 세미는 좋은 곳에 갔을 것이다....낙담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 근황을 묻자 “어머니의 평정심을 건드리는 행동은 하지 말아 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기자도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평정심”은 삶을 지탱하는 팽팽한 끈과 같으니까. 아버지 시신은 세미가 그랬듯 화장됐지만 뿌려진 자리는 달랐다. 오빠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③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숨진 황선정(당시 16세․무학여고1)양은 가족이 강남구 일원동 근로자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성수대교를 건너 통학했었다. 환경 미화원인 아버지(50)는 기자와 만나 “8학군 욕심에 이사를 갔다가 그렇게 됐어. 부모 잘못 만나서...”라며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10년이 지나도 부모는 당시의 작은 기억까지 모두 상처로 품고 있었다. “죽는 순간 얼마나 억울했을까. 버스 떨어지는 순간....우리 아이가 맨 나중에 발견됐어. 너무 억울해. 내 목이 터지는 거 같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그날 비가 왔어. 선정이가 그때 자기 우산을 가져가지 않고 다른 가족 우산을 가져갔어. 지금도 아내가 그래. ‘그때 아이를 붙잡고 우산을 바꿔줬어도, 단 1초만 지연시켰어도 살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울음) 1초만 빨랐으면, 1초만 늦었으면, 그놈의 시간이 왜 그렇게 원망스럽냐.” 그는 다시 자책했다. “내가 그때 그놈의 강남 근로자 아파트 딱지만 받지 않았어도(울음). 난 비록 청소부지만, 똑똑한 내 딸을 위해 8학군이네 뭐네로 이사 갔어. 근데 이사 간 기간이 짧아 배정을 못 받고 성수대교 건너가게 된 건데....”(정부는 성수대교 사건 이후 강 남북 거주 학생의 ‘교차 배정’을 중단했다.) 선정이 아버지는 자신이 “위암 초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죽어도 상관없어 병원 안 간다”고 했다.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만난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 앞에서
한결같이 죽음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한 사람도 있었다.
④ 18일에는 “성수대교 붕괴 10년, 女大生딸이 일기장에 남긴 14가지 소원...”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1994년 10월 21일 아침. 서울교대 국어교육과 3학년 이승영(여․당시 21세)씨는 성수대교 상판과 함께 20여m 아래로 떨어진 16번 시내버스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교생 실습을 위해 강북 초등학교에 버스로 출퇴근한지 닷새만의 일이었다. 사고 직후 오열 속에 딸의 유품을 챙기던 어머니 김영순(56)씨는 승영씨가 남긴 일기장을 읽어 내려갔다. “내가 일생동안 하고 싶은 일”이란 구절 밑에 빽빽히 적어놓은 14가지 소원. “장학금을 만든다, 이동 도서관을 강원도에 만든다, 복지 마을을 만든다, 한 명 이상을 입양한다, 맹인(시각장애인)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11개월 전 군인이던 남편을 과로사로 잃고 흔들리던 어머니였다. “승영아, 네 소원을 이 애미가 모두 이루어주마.” 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④-1. 어머니는 딸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죽으면 장기를 남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생각했다. 하지만 딸 시신이 제대로 수습된 것은 장기 기증을 위한 시한인 “사망 후 6시간”을 넘긴 뒤였다. 어머니는 대신 고려대 의과대학에 시신을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했다. 딸의 소원을 절반만큼이라도 들어주고 싶어서였다. ④-2. 손에 쥔 보상금 2억 5000만원 전액은 교회(남서울교회)에 장학금으로 기부해 “승영 장학회”를 만들었다. “장학금을 만든다”는 딸의 소망을 이룬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도 전도사가 돼 호스피스(죽음을 앞둔 사람을 돌보는 봉사자)에 뛰어들었다.
그 후 10년... 그 동안 형편이 어려운 신학 대학원생 50여명이 승영씨의 목숨과 바꾼 장학금을 받았다. 장학생 중에는 청각장애인이면서 같은 처지의 장애인을 모아 공동체를 꾸리는 사람, 암을 이겨낸 뒤 말기 환자 병동에서 기타로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④-3. 인천시 부평구 산곡 1동 백마마을 산곡 중학교 뒷골목. 이곳에서 승영 장학금을 받아 2003년에 뒤늦게 신학대학원을 마친 최만재(47)씨는 “작은 손길 공동체”를 만들었다. 무허가 월세 건물이지만 파지를 주워 연명하는 65세 이상 노인 11명을 모아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는 공동체다. “복지마을을 만든다”는 승영씨의 소원은 이렇게 장학생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누가 연락하지 않아도 승영씨의 기일이 되면 해뜨기 전 고려대 의대 뒤편의 감은탑(感恩塔)에 모여 꽃을 바치고 고개를 숙인다. 두 손을 모은 모양의 탑에는 “이승영”이란 이름이 10㎝ 크기로 새겨져 있다. 최씨는 “‘승영’이라는 이름은 ‘오늘은 내가 무엇을 부족하게 살았나’하고 되묻게 하는 이름”이라며 “마음이 지칠 때마다 성수대교를 찾아 자신을 채찍질한다”고 말했다.
④-4. “이동도서관을 강원도에 만든다”는 소원도 이루어졌다. 군인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전방 부대를 다닌 어린 시절 기억이 만든 소원이다. 2003년 8월 승영 장학회는 강원도 인제군 서흥리의 한 포병연대에 전천후 이동도서관 차량을 기증했다. 이 차량은 7개 부대 500여 장병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휴전선 바로 아래까지 식료품을 나눠주러 가는 “무료 PX” 역할도 했고, 군 생활을 힘겨워하는 사병들의 이동상담소 역할도 했다. 부대 조준묵(55) 군목은 “여대생이 남긴 사랑이 10년 후, 여기 강원도 오지까지 미치는 모습을 보면 ‘이것이 기적’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④-5. 어머니는 사고 직후인 95년 초등학교 때 딸이 쓴 시(詩)를 “연기는 하늘로”란 제목의 책으로 묶어 출간했다. “신앙소설을 쓴다”는 소원도 이렇게 실현됐다. 이 때 받은 인세 400만원은 김장김치가 돼 장애인 재활시설 4곳에 골고루 전해졌다. “맹인을 위해 무언가 한다”는 소원 역시 장학회가 조만간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책 보급을 시작하면 이루어진다. ④-6. “한 명 이상의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소원은 2004년 초 결혼한 동생 상엽(29)씨가 “내가 실천하겠다”고 약속한 상태다. 상엽씨는 “누나는 인생을 길게 볼 수 있는 눈을 주고 갔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승영씨가 남긴 14가지 소원 중 실현됐거나 곧 실현될 소원은 대략 7가지. 이를 실천한 어머니 김씨는 자신의 모든 것을 딸의 소원 실현을 위해 바치고 교회 근처 연립 8평 원룸에 혼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찾아간 기자에게 “나는 한 일이 없기 때문에 해 줄 말이 없다”고 했다. “세상에 대한 미움 따위도 없다. 세상에 사랑이 이어지고 있으니 우리 딸, 아직 살아 있는 것 아니냐”는 말만 남기고 현관을 닫았다. 더 이상의 질문도, 사진 촬영도 응하지 않았다.
승영씨 가족은 똑같은 인생의 어두움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보통 사람들이 이룰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승영씨 가족들이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 앞에서
절망을 선택하지 않고 희망을 선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말씀한다.
여기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판타 쉬네르게이에이스 아가돈”이다.
이를 직역하면 “모든 것이 선을 위해 함께 역사 한다”로
“만물 또는 모든 일이 선을 목표로 서로 협조한다”뜻이다.
그래서 본 절이 나타내는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만물로 하여금 선을 위해 역사 하도록 하셨다”이다.
그런데 롬8:27절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고 말씀함으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룰 수밖에 없는 원동력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 하신다는 사실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포함되어 있다.
만물은 성령 안에서 선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도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궁극적으로 선을 이룬다.
그렇다. 믿음의 사람들이었던 승영씨 가족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로 포기하고 싶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믿음으로 희망을 선택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대로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가고 계신 것이다.
결론 김필곤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인생의 그림자”를 노래했다.
아침부터 그림자가 생겼다고 하루 종일 길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오가 되면 짧아지고 황혼이 되면 긴 그림자도 사라집니다.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로 절망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빛이 있고 사물이 있으면 어디에나 그림자는 생기며
그림자가 어두울수록 어디엔 가 밝은 빛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평생을 함께 하는 인생의 그림자를 항상 나쁜 것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큰 그림자는 그늘이 되어 지친 나그네를 쉬게 하고
짧은 그림자일지라도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아이들에게 시간을 알려 주듯이
껍데기만 보여주는 인생의 그림자일지라도 삶의 한계를 깨닫게 해 줍니다.
끝없이 좇아 다니는 그림자로 괴로워하거나 힘겨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빛에 가까이 가면 그림자는 커지지만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커진 그림자는
밝은 빛에 의해 희미해져 보이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그림자가 생겼다고 하루 종일 길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오가 되면 짧아지고 황혼이 되면 긴 그림자도 사라집니다.
황혼이 되면 그림자도 사라집니다.
정말로 실력 있는 화가는 검정색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롬8: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한다.
무슨 말인가?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다른 무엇을 아끼겠는가!”라는 외침 아닌가?
성도의 위치가 얼마나 존귀한 지를 너무도 잘 보여주는 표현아닌가?
이제 선택만 남았다.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 앞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쉬운 말로 선택은 자유이다. 그러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믿자.
오늘 우리에게 주신 것이 하나님의 최선임을 믿자.
우리가 오늘 만나는 사람들, 일하는 환경들, 일어나는 사건들이
우리의 인생을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색깔임을 믿자.
가장 조화로운 색임을 믿자.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 그림자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