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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석지엄(釋智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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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엄은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스무 살에 출가하였다. 부지런함과 정성스러움으로써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납의(納衣)만을 입고 좌선하며, 오래도록 나물밥으로 살았다. 늘 자기 나라가 텅 비어 황량하다고 생각하였다. 널리 이름난 스승을 섬기고 경전의 가르침을 많이 구하고자 뜻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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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서역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다. 계빈국(罽賓國)에 도달하여 마천타라정사(摩天陀羅精舍)로 들어갔다. 계빈국에서 불타선(佛馱先) 비구에게 선법(禪法)을 묻고 배웠다. 점차로 깊이를 더하여 3년이 지나자, 그 공은 10년 세월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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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선은 그가 선정(禪定)에 조예가 있음을 알고는, 특별히 그의 재능을 남다르게 여겼다. 여러 승려와 세속인들은 그 소문을 듣고는 감탄하여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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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땅에도 도를 구하는 사문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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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중국인들을 경시하지 않고 먼 곳에서 온 중국 사람들을 공경히 대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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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라는 비구 역시 그 나라 선(禪)의 종장(宗匠)이었다. 지엄은 곧 법을 중국에 전하고자 하여, 그에게 동쪽으로 가자고 요청하였다. 불타발타라는 그의 지극히 간절한 뜻을 가상히 여겼다. 마침내 함께 동쪽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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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사막을 건너고 위험을 넘어 관중(關中)에 도착하였다. 항상 불타발타라를 따라 장안대사(長安大寺)에 머물렀다. 얼마 후 불타발타라가 뜻밖에 중국 승려들에게 축출을 당하였다. 지엄도 헤어져서 산동(山東)의 정사(精舍)에서 쉬면서 좌선하고 경을 외우며, 힘써 정진하여 배움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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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東晋)의 의희 13년(417)에 유송(劉宋)의 무제(武帝)가 장안을 공략하여 승리하였다. 개선하는 도중에 산동을 통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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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흥공(始興公) 왕회(王恢)가 무제의 어가를 호종하고 산천을 유람하다가, 지엄이 있던 정사에 왔다. 함께 거주하는 세 사람의 승려가 각기 새끼로 맨 의자[繩牀]에 앉아 고요히 선정에 든 것을 보았다. 왕회가 다가가 한참 동안 있어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에 손가락을 튀기자 세 사람이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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떴다. 그렇지만 잠시 후 도로 눈을 감아버려,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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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는 마음속으로 그들의 기이함을 존경하여 여러 노인들을 찾아가 묻자, 모두들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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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분 승려는 숨어살면서 뜻을 추구하는 고상하고 깨끗한 법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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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는 즉각 송 무제(武帝)에게 이 일을 아뢰었다. 무제는 그들을 맞이하여 도읍으로 올라오기를 요청했으나,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번 간청한 뒤에야 두 사람이 지엄을 추천하여, 지엄이 무제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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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는 도를 생각함이 평소 독실하고, 예로써 섬김이 매우 성대하였다. 지엄이 도읍에 올라오자 즉시 시흥사(始興寺)에 머물렀다. 지엄은 성품이 텅 비어 고요함을 사랑하여, 시끄러운 티끌세상을 피하고 싶어하였다. 왕회는 그를 위하여 동쪽 성문 밖 끝에 다시 정사를 건립하니, 곧 지원사(枳園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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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엄은 전에 서역에서 가져 온 범본(梵本)의 여러 경전들을 미처 번역하지 못했다. 원가 4년(427)에 사문 석보운(釋寶雲)과 함께 『보요경(普曜經)』· 『광박엄정경(廣博嚴淨經)』·『사천왕경(四天王經)』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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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엄은 절에 있으면서 별다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상 탁발하여 생활하니, 도력의 교화가 이승과 저승까지 끼쳐서 모두 다 감복하였다. 어떤 귀신을 본 자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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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西州)의 태사(太社)에서 귀신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엄공(嚴公)이 오면 피하여 숨어야 한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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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정확히 못하였다. 갑자기 지엄이 이르렀다. 그의 성명을 묻자, 과연 지엄이라고 하였다. 묵묵히 그를 알아보고는 남몰래 특별히 예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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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동(儀同) 난릉(蘭陵) 소사화(蕭思話)의 부인 유씨(劉氏)가 병이 들었다. 늘 귀신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무서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 때 지엄을 맞이하여 설법을 청하였다. 지엄이 처음 사랑채에 도착하자마자, 곧 유씨는 떼 귀신들[群鬼]이 흩어져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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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엄이 나아가 유씨 부인을 위하여 경을 설하니, 병이 곧 나았다. 이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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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5계(戒)를 받고, 온 가문이 불법을 소중히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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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하고 소박하여 욕심이 적었던 지엄은 보시를 받으면, 그것을 그대로 남에게 베풀었다. 어려서부터 사방을 행각하여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이 허심탄회하고 겸손하였다. 스스로 밝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운 행실이 많았지만 세상에 모두 전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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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지엄이 아직 출가하지 않았을 때에 5계를 받았지만, 계율을 범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나, 항상 계를 받지 못했다고 의심하였다. 번번이 그 때문에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선관(禪觀)을 닦았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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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재차 바다를 건넜다. 또 한번 천축국에 가서 지혜가 밝게 통달한 분들에게 여쭈었다. 나한(羅漢) 비구를 만나 그 일을 갖추어 물었다. 나한은 감히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곧 지엄을 위해 선정에 들어, 도솔궁에 가서 미륵에게 여쭈었다. 미륵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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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를 받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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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엄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리하여 도보로 돌아오다가, 계빈국에 이르러서 병 없이 돌아가셨다. 그 때가 78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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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의 법도는 평범한 승려와 득도한 승려의 화장 장소를 각기 달리 했다. 지엄이 비록 계행에 대한 지조로 고명하기는 했지만, 실지의 수행은 아직 판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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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시신을 평범한 승려의 묘지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신이 무거워서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변경하여 성인의 묘지로 향하자, 바람에 날리듯 저절로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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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엄의 제자인 지우(智羽)와 지원(智遠)이 짐짓 서역에서 돌아와, 이 상서로운 조짐을 알리고는 모두 외국으로 돌아갔다. 이 일을 가지고 지엄이 참으로 득도한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아직 4향(向)3)과 4과(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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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승들이 닦는 네 가지 계위(階位). 증과(證果)를 향하여 수행하되, 아직 과(果)에 이르지 못한 동안. 수다원향·사다함향·아나함향·아라한향. |
4) 소승 증과(證果)의 네 계위. 과(果)는 무루지(無漏智)가 생기는 지위. 수다원과·사다함과·아나함과·아라한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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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서 얼마나 깊고 얕은지를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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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석보운(釋寶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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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보운의 씨족(氏族)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전하는 말에 양주 사람이라고 한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워 배움의 행실이 있었다. 뜻이 운치 있고 굳세며 깨끗해서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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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려서부터 바르고 곧으며 순수하고 깨끗함으로 이름이 났다. 법을 구하는 데에 간절하였다. 도를 위해 죽을 각오로 몸을 희생해서라도 몸소 부처의 신령스런 자취를 보고, 널리 중요한 불경들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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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동진(東晋) 융안(隆安, 397~401) 초에 멀리 서역으로 떠났다. 법현(法顯)·지엄(智嚴)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따랐다. 고비사막을 건너고 설령(雪嶺)을 넘으면서, 온갖 괴로움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어려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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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우전국(于闐國)과 천축국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두루 신령스러운 이적을 보았다. 곧 나찰의 들을 지나면서 하늘의 북소리를 들었다. 석가모니께서 남긴 자취를 우러러 예배한 것이 많았다. 보운은 외국에 있으면서 두루 범서를 배워, 천축국 여러 나라의 말과 글의 뜻을 모두 갖추어 알았다. 뒷날 장안으로 돌아와 불타발타라 선사를 따라 선(禪)을 일삼아 도(道)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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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되지 않아 불타발타라 선사가 뜻밖에 후진의 승려들에게 축출 당하였다. 그의 제자들도 모두 그 허물을 같이 하여, 석보운도 달아나 흩어졌다. 그 때 마침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이 불타발타라가 추방당한 일을 해결하였다. 불타발타라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 도량사에 편안히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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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승려들은 보운의 뜻과 힘이 굳고 단단해서, 죽음의 지경[絶域]인 아주 먼 외국까지 가서 도를 널리 폈다고 생각하였다. 흉금을 터놓고 의견을 물으면서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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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운은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을 번역해 냈다. 후기에 나온 여러 경전들은 대부분 보운이 바로잡아 정리한 것이다. 중국어와 범어에 모두 뛰어나, 음과 뜻이 알맞고 올곧아서, 보운이 정리한 것은 대중들이 모두 믿고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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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관중(關中)의 사문 축불념(竺佛念)은 선역(宣譯)을 잘하여, 부견(符堅)과 요흥(姚興)의 2대에 걸쳐 여러 경전들을 번역하였다. 그런 강북과 상대적으로, 강남에서의 범어 번역은 보운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동진(東晋)과 송나라의 시기에 법장(法藏)을 크게 유통시켰다. 사문 혜관(慧觀) 등이 모두 벗으로 여기고 친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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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운의 성품은 그윽한데 머물기를 좋아하여, 한적(閑寂)함을 늘 유지하였다. 마침내 육합산(六合山)5)의 절로 가서 『불본행찬경(佛本行贊經)』을 번역해 내었다. 산에는 기근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많았다. 습속이 좀도둑질을 좋아하였다. 보운이 설법하여 잘 이끌어 가르쳤다. 그러자 대부분 허물을 고쳐서, 예로써 섬기고 공양하는 자가 열 집에 여덟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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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죽음에 임하여, 보운에게 서울로 돌아와 절 일을 맡아 다스려 줄 것을 청하였다. 보운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가서 1년 남짓 도량사에 머물렀다. 다시 육합산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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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26년(449)에 산사에서 돌아가셨다. 이 때 나이는 74세이다. 그가 외국을 돌아다닌 것에 대해서는 따로 전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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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구나발마(求那跋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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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마는 중국말로 공덕개(功德鎧)라고 한다. 본래 찰리종(刹利種)6) 출신으로 여러 대에 걸쳐 왕이 되어 계빈국(罽賓國)을 다스렸다. 조부인 가리발타(呵梨跋陀)는 중국말로 사자현(師子賢)이라 한다.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유배를 당하였다. 아버지인 승가아난(僧伽阿難)은 중국말로 중희(衆喜)라 한다. 산림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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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마의 나이 14세가 되자, 예리한 식견으로 사물의 이치를 환히 알고, 깊이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덕을 숭상하며 착함에 힘썼다. 그의 어머니가 일찍이 들짐승의 고기를 장만하여 구나발마에게 이를 요리하도록 하였다.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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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소성(江蘇省) 육합현(六合縣) 서남쪽 강포현(江浦縣) 경계에 있는 산. |
6) 범어 ksatriya의 음역으로 인도의 사성 가운데 바라문 다음가는 왕 및 무사 계급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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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있는 무리는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목숨을 요절시키는 일은 어진 사람의 할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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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화를 내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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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죄를 짓는다손 치더라도, 내가 마땅히 너를 대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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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마가 훗날 기름을 끓이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데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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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대신하여 고통을 참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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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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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몸에 있는 고통을 내가 어떻게 대신할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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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마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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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고통도 오히려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삼도(三塗)7)의 길에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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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이에 잘못을 뉘우쳐 깨달아, 죽을 때까지 살생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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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가 되자 점을 치는 사람이 보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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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나이 30세가 되면, 큰 나라에 군림하여 어루만지고 남면(南面)8)하여 제왕의 존귀함으로써 일컬어질 것이다. 만약 세상의 영화를 즐기지 않는다면, 마땅히 성인의 과보[聖果]를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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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20세에 이르러 출가하여 계(戒)를 받았다. 9부를 밝게 꿰뚫고 4아함[含]에 두루 밝았다. 그리고 백여만 글자에 이르는 경전을 암송하였다. 율품(律品)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선(禪)의 요의(要義)에 있어서도 신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에 다들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그의 나이 30세에 이르러 계빈왕이 죽었다. 왕을 계승할 후사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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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마는 왕실의 맏아들이며, 재주가 밝고 덕이 높다. 환속시켜서 국왕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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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화도(火塗)인 지옥도(地獄道), 도도(刀塗)인 아귀도(餓鬼道), 혈도(血塗)인 축생도(畜生道)를 말한다. |
8) 임금이 조정(朝廷)에서 신하에 대하여 남쪽으로 향해 앉는 자리. 전(轉)하여 임금의 지위를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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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신하들 수백 명이 두세 차례 간곡하게 청하였다. 그러나 구나발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법사의 자리를 사양하고 무리들을 피하였다. 산간에 들어가서 계곡물을 마시고, 산과 들에 홀로 노닐면서 인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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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사자국(師子國)에 이르러 풍속을 살피고 교화를 넓혔다. 진리를 아는 무리들이 모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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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초과(初果)를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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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가짐과 차림새로도 남들을 감화시켜, 그를 본 자들은 마음을 내어 불법에 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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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사바국(闍婆國)에 이르렀다. 처음 도착하기 하루 전에 사바왕의 어머니가 밤에 꿈을 꾸었다. 한 도사가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飛舶]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과연 구나발마가 와서 이르렀다. 왕의 어머니가 성스러운 예식으로 공경하고, 이어 5계(戒)를 받았다. 왕의 어머니가 왕에게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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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맺은 인연으로 해서 어미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다. 나는 이미 계를 받았다. 그렇지만 네가 믿지 않는다면, 후생의 인연에는 오늘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질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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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에 시달려, 곧바로 명을 받들어 계를 받았다. 차차 감화에 젖어듦이 오래되자, 정신을 전념하여 점점 독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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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서 이웃 나라의 군대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구나발마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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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이 힘을 믿고 침범을 하려 합니다. 만약 상대해서 전투를 한다면 반드시 다치고 죽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만약 이를 막지 않는다면 장차 위태로워져 멸망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오로지 존귀하신 스승님의 명을 따르고자 합니다. 무슨 계책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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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마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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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악한 적이 공격을 하면, 의당 그 사나움을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자비심을 일으켜서,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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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고 겨루었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문득 적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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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 흩어졌다. 왕이 빗나간 화살을 맞아 다리를 다쳤다. 구나발마가 그를 위하여 주문을 외운 물로 상처를 씻어 주었다. 이틀이 지난 뒤 평상시처럼 회복되었다. 왕의 공경스러운 믿음이 더욱 충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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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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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법문에 몸을 의탁하려 한다. 경들은 다시 총명한 임금을 뽑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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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들이 모두 절을 하고 엎드려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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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께서 만약 나라를 버리신다면, 자식 같은 우리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또한 적국이 흉악하고 강성해서, 험한 형세를 의지하여 대치하는 상황입니다. 만일 왕께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잊는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떤 처지에 놓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하늘 같은 자비로움으로 가엾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감히 죽기로 청하노니, 그 진실한 마음을 펴도록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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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차마 굳이 거역하지 못하였다. 이어 군신들에게 나아가서 세 가지 바람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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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허락한다면, 마땅히 머물러서 나라를 다스리겠다. 첫 번째 바람은 무릇 왕국의 경계 안에서는 똑같이 스승님[和尙]을 받드는 것이다. 두 번째 바람은 다스리는 경내 안에서는 모두 일체의 살생을 금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바람은 소유한 재물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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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들은 기뻐하여 모두가 한결같이 공경하며 받아들였다. 이에 온 나라가 모두 따라서 계를 받았다. 왕이 후에 구나발마를 위하여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다. 몸소 건축에 쓸 재료를 끌고 가다가, 왕이 발가락을 다쳤다. 구나발마가 또다시 주술로 치료해 주었다. 얼마 안 되어 회복되었다. 인도하고 교화하는 소문이 원근으로 퍼져나갔다. 이웃 나라에서 풍문을 듣고는 모두 사신을 보내어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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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서울에는 덕으로 이름 높은 사문 혜관(慧觀)과 혜총(慧聰)이 있었다. 멀리에서 훌륭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가르침을 받고자 생각하였다. 원가(元嘉) 원년(424) 9월에 문제(文帝)에게 직접 아뢰어, 구나발마를 맞이해 오기를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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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곧바로 교주(交州) 자사에게 칙명을 내려, 배를 띄워 맞이하여 들이도록 하였다. 혜관 등이 또 사문 법장(法長)·도충(道沖)·도준(道雋) 등을 보내어, 그에게 가서 보살펴 주기를 청하였다. 아울러 구나발마와 사바왕인 파다가(婆多加)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송나라 국경에 왕림하여 불도의 가르침을 퍼뜨려주기를 희망하였다. 구나발마는 성스러운 교화를 마땅히 넓히고자 함에 있어서, 먼 곳으로 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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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이미 상인 축난제(竺難提)의 배를 타고서, 어떤 작은 나라로 향하고자 하였다. 마침 순풍을 만나 드디어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그의 유언장[遺文]에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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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행(業行)의 바람에 나부끼어 인연 따라 송나라에 이르렀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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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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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文帝)는 구나발마가 이미 남해(南海)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주군(州郡)에 칙명을 내려 비용을 내어 서울로 오게 하였다. 시흥(始興)을 경유하는 길에서 멈추어 1년쯤을 보내었다. 시흥에는 호시산(虎市山)이 있는데 형세가 우뚝 솟고 봉우리와 산마루가 높고 가파랐다. 구나발마가 그것이 기사(耆闍)9)와 방불하다고 하여, 그 이름을 영취산(靈鷲山)이라고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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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취산 절의 바깥에는 별도로 선실(禪室)을 지었다. 선실은 절에서 몇 리쯤 떨어져 있어 경쇠 소리[磬音]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양 건치[椎]소리가 이를 때마다 구나발마가 이미 이르렀다. 간혹 비를 무릅쓰고 왔지만 젖지 않았다. 혹은 진흙을 밟고 왔지만 습기가 차지 않았다. 당시에 많은 도인과 속인이 숙연하게 더욱 공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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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는 보월전(寶月殿)이 있었다. 구나발마가 보월전 북쪽 벽에 손수 나운상(羅云像)10)과 정광(定光)11)·유동포발(儒童布髮)12)의 형상을 그렸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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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Grdhrakuta의 음역으로 마갈타국(摩竭陀國)에 있는 산 이름이며, 영취라고 번역한다. |
10) 라후라. 석존의 아들. 사미의 시초. |
11) 정광불(錠光佛) 또는 연등불(燃燈佛)이라 번역. 과거 구원(久遠)한 옛적에 출현하여 석존에게 미래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고 한다. |
12) 유동은 범어 마납박가(摩納縛迦)의 번역. 정행(淨行)을 닦는 젊은 보살. 그 보살이 과거 인행시에 부처님께서 진흙을 밟지 않으시도록 자기의 머리카락을 풀어 엎드려서 부처님께서 그 머리카락을 밟고 지나시게 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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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 606] 쪽 |
상을 그려 놓은 뒤로 매일 저녁에 빛을 발하였다. 빛을 발하기를 오래한 뒤에야 그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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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始興)의 태수인 채무지(蔡茂之)가 깊이 더욱더 존경하여 우러렀다. 후에 채무지가 장차 죽음에 이르자, 구나발마가 몸소 가서 보고는 설법을 하여 편안하게 위로하였다. 후에 채무지의 집사람이 꿈속에서, 채무지가 절 안에서 여러 승려와 함께 법을 강론하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구나발마가 교화하여 인도한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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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에는 본래 호랑이로 인한 재앙이 많았다. 구나발마가 이곳에 거주한 이후로는 밤낮으로 오갔다. 그러면서 혹시 호랑이를 만나더라도, 지팡이로 호랑이 머리를 두드리며 희롱하고 지나갔다. 이에 산길을 가는 나그네와 물길을 가는 객들이 오가는 데 막힘이 없었다. 구나발마의 덕에 감동하여, 교화에 귀의하는 자들이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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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마가 일찍이 별실에서 선정(禪定)에 들었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절의 승려가 사미를 보내어 살펴보았다. 사미는 한 마리 흰 사자가 기둥을 타고 올라가고, 하늘 끝까지 가득히 푸른 연꽃이 널리 퍼지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사미가 놀라고 두려워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가서 사자를 쫓았으나, 휑하니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신령하고 기이함에 견줄 것 없음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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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문제(文帝)가 거듭 혜관(慧觀) 등에게 칙명을 내려서 다시 정성을 다하여 청하였다. 이에 배를 타고 서울로 갔다. 원가(元嘉) 8년(431) 정월에 건업(建鄴)에 도착하였다. 문제가 불러들여 만나보고 은근하게 위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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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항상 재계하며 살생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몸으로 남을 죽이는데 내몰려서 뜻을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법사께서 이미 만 리를 멀다 않고 이 나라에 와서 교화를 펴시니, 장차 무엇을 가지고 가르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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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마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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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도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이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왕과 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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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 606] 쪽 |
는 수양하는 바가 각기 다릅니다. 범부의 경우는 몸이 비천합니다. 이름 또한 하잘것없어 말과 명령을 떨치지 못합니다. 만약 자신을 이겨서 몸으로 애쓰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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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왕은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고, 만 백성을 자식으로 삼습니다. 한 마디 좋은 말을 하면 선비와 여인네[士女]들이 함께 기뻐합니다. 한 가지 훌륭한 정치를 펴면 신과 사람[人神]마저 함께 화합합니다. 생명을 죽이지 않는 형벌을 쓰고, 힘을 지치게 하지 않는 사역을 시키십시오. 그리 하시면 바람과 비로 하여금 때에 맞고, 춥고 따뜻한 기후가 절기에 고루 알맞아서, 온갖 곡식이 무성하게 번성하고, 뽕과 삼[桑麻]이 빽빽하게 우거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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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가지런히 하신다면[持齋] 가지런함 역시 크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살생을 하지 않는다면 덕 역시 많다 할 것입니다. 어찌 반나절의 음식을 덜어서 한 마리 짐승의 목숨을 온전히 한 뒤에야, 바야흐로 널리 구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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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이에 책상[机]을 어루만지며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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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속인은 고원한 원리에 미혹되고, 사문은 가까운 가르침에 막히고 맙니다. 고원한 이상에 미혹된다는 것은 지극한 도를 허탄한 말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가까운 가르침에 막힌다는 것은 문장[篇章]에 구애되어 사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법사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깨우침을 열어 밝게 다다랐다고 일컬을 만합니다. 그러니 천인의 경지를 더불어 말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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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도록 하여 공양을 융숭하고 후하게 해 주었다. 공경·제후왕과 뛰어난 선비들이 높여서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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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에 절에서 『법화경(法華經)』과 『십지경(十地經)』을 개강하였다. 법석을 여는 날 수레와 일산이 거리에 가득 찼다. 구경을 하며 오가는 사람들로 어깨가 서로 맞닿고 발꿈치가 서로 이어졌다. 구나발마의 정신은 자연스럽고 웅변은 빼어났다. 혹 때로는 통역하는 사람을 빌어서 말이 오가는 사이에 깨닫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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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기원사의 혜의(慧義)가 청하여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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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28품을 내고, 후에 제자가 대신 2품을 내어서 30품을 이루었다. 하지만 미처 옮겨 베끼기 전에 「서품(序品)」과 「계품(戒品)」을 잃어버렸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오히려 두 가지의 판본이 있다. 혹은 『보살계지경(菩薩戒地經)』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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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원가(元嘉) 3년(426)에 서주(徐州) 자사 왕중덕(王仲德)이 팽성(彭城)에서 외국의 이엽바라(伊葉波羅)에게 『잡심(雜心)』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그렇지만 품(品)을 선택함에 미쳐서는, 장애로 말미암아 드디어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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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이르러 구나발마에게 다시 청하여 후품(後品)을 번역하여 13권을 이루었다. 앞서 내었던 『사분갈마(四分羯磨)』·『우바새오계략론(優婆塞五戒略論)』·『우바새이십이계(優婆塞二十二戒)』 등과 아울러 모두 26권이다. 모두 글의 뜻이 자세하고 신실하여 범어와 한어의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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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복사(影福寺)의 여승 혜과(慧果)와 정음(淨音) 등이 함께 구나발마에게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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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여덟 명의 사자국(師子國) 여승이 서울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송나라 땅에는 아직 여승이 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2중(衆)13)을 수계하는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계품이 온전하지 못할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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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마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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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법(戒法)은 본래 많은 승려들이 있어서 나온 것이다. 설사 그러한 지난날의 사실과는 맞지 않더라도, 계를 얻는 데에 문제가 없음은 대애도(大愛道)비구니14)의 인연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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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승니들이 또 연월이 차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굳이 다시 받으려 하니, 구나발마가 일러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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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진실로 더욱 밝히고자 하니, 이것은 크게 수희공덕(隨喜功德)을 돕는 것이다. 다만 서역국 승니의 승랍(僧臘)이 차지 못하고, 또한 열 사람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송나라의 말을 배우게 해야 한다. 별도로 서역의 거사(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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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비구. 비구니의 이부 대중. |
14) 석존의 이모. 부처님의 교단에서 맨 처음으로 비구니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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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를 통하여, 다시 외국에서 승니를 청하여 오게 해서 열 명의 수를 채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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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정림하사(定林下寺)에서 안거하였다. 당시에 신자들이 꽃을 꺾어서 자리에 깔았다. 오직 구나발마가 앉은 자리만 꽃의 빛깔이 더욱 싱싱하였다. 무리들이 모두 성스러운 예로 숭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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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안거를 마치자 기원사로 돌아갔다. 그 해 9월 28일 점심이 끝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각(閣)으로 돌아갔다. 그의 제자가 뒤에 이르러 보니 갑작스레 이미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65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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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입적하기 전에 미리 게송 36행을 유언장으로 지어서, 자신의 인연에 대해 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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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제2과(果)를 증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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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손으로 직접 봉함하고 제자 아사라(阿沙羅)에게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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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은 후에 이 글을 가지고 돌아가서 천축국의 승려에게 보여 주고, 이 나라의 승려들에게도 보여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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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한 뒤 곧바로 새끼로 맨 의자[繩牀]에 붙들어 앉혔다. 얼굴 모습이 입정(入定)에 든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달려 온 도인과 속인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모두 향기가 강렬하게 감돌아 풍겨 나오는 것을 맡았다. 뱀이나 용처럼 생긴 한 필쯤 되는 길이의 물체 하나가, 시신 옆에서 일어나 곧바로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무어라 이름 지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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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남림(南林)의 계단(戒壇) 앞에서 외국법에 의해서 사비(闍毘)하였다. 사부대중이 빽빽하게 모였다. 향과 섶나무를 쌓아 놓고 향유를 뿌려 시신을 불살랐다. 오색의 불꽃이 일어나서 불기운이 왕성하게 타올라 하늘까지 빛났다. 이 때에 하늘은 맑고 환하여, 도인이나 속인이나 모두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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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곳에 백탑(白塔)15)을 세웠다. 거듭해서 계를 받고자 하던 여러 비구니들은 바라던 일이 끊어지자, 슬픔으로 흐르는 눈물을 스스로 이겨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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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승려를 화장하여 타고 남은 ‘하얀 재’를 모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재를 모셨다고 하여 회탑(灰塔)이라고도 한다. 후대의 부도(浮圖)와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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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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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구나발마가 서울에 이르자, 문제가 그를 좇아 보살계를 받고자 했다. 때마침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하여, 미처 그 일을 물어 명을 받들기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구나발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본래의 생각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인해 상심하여 한스러움이 더욱 심하였다. 이에 여러 승려에게 명하여 그의 유언장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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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언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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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삼보(三寶)와 청정한 계를 지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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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상좌(上座)께 절 올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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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한 세상엔 아첨과 간사함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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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고 거짓되어 참된 마음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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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고 미혹되어 참됨을 알지 못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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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으로 덕 있는 사람 질투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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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여러 성현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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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시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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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구나발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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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이 다할 때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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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얻은 착한 공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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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대로 말해 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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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첨과 간사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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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 구하기 바라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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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게으름 타이르고 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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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을 더욱 자라나게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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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큰 법력 이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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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들어보오, 어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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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광야에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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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죽은 시체를 보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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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찐 살벌레 잔뜩 들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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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에다 피고름 흘러 내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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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매어 그곳에 정신 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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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의 본성도 이와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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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이 몸의 모습을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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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이 불을 두려워 아니함과 같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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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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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관(死尸觀)을 닦아 익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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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들으려는 생각[聞思] 던져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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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수풀 사이에 의지해 머물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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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 오로지 정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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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관할 것을 늘 잊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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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가 늘 앞에 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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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거울을 대함과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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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같이 나 역시 그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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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마음 고요하고 편안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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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맑은 몸이 정토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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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한 마음은 극락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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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환희심이 자라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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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없는 마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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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쇄상(骨鎖相)을 이룬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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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이 눈앞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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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고 무너져서 뼈마디도 흩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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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마저 가루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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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없는 지혜는 타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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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상(思法相)16)을 굴복시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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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이 같은 경지 터득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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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편안하고 매우 유연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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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방편의 수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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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게 나아지고 더욱 더 늘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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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한 티끌 찰나찰나 소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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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무너진 정념(正念)의 법(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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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마침내 도달할 곳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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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까닭으로 탐욕 일으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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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라, 여러 감각에서 생기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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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가 미끼를 탐하는 것과 같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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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감각이 헤아릴 수 없이 무너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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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찰나 닳아 없어짐 관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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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라, 저 감각이 의지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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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에서 일어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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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과 업의 과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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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에 의지하여 찰나찰나 사라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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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는 가지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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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물을 생각하는 여러 가지 옳지 못한 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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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별상법(別相法)이라 이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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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상법은 사(思)와 혜(慧)와 염(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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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로 만족하게 닦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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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법상 관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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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 더욱 밝아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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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지혜[爾焰]17)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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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념처(念處)18)를 분명하게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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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율행(律行)이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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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거둬 잡아 인연 가운데 머물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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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은 달구어진 칼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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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갈애(渴愛)19)로 구르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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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애 다하여 열반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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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 저 삼계를 굽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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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불꽃 활활 타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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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체 쇠약하여 바짝 수척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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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을 멈추고 방편을 좋아하면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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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다시 점점 충만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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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승하고 묘한 뭇 상(相) 생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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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위(頂位)와 인위(忍位)도 이와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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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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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Jneya. 이염(爾炎)이라고도 쓴다. 소지(所知)·경계(境界)·지모(智母). 지경(智境)이라 번역. 5명(明) 등의 법이 지혜를 발생케 하는 경계가 되는 것. |
18) 소승의 수행자가 3현위(賢位)에서 5정심관(停心觀) 다음에 닦는 관. 신념처(身念處)·수념처(受念處)·심념처(心念處)·법념처(法念處). |
19) 목마를 때 물을 사랑하듯 범부가 5욕(欲)을 탐하는 것. |
20) 『법화경』 「방편품」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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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바른 방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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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경계 약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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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의 낙이 늘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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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일법(世第一法) 얻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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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일무구한 한 생각 진제를 반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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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로 법인(法忍)이 생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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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도(無漏道)라 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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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과 모든 경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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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마저 다 멀리 여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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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진제의(眞諦義)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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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없애 버리고 청량함 얻음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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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의 과보 성취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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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떠난 청량한 연(緣)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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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거나 가라앉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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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지혜롭기 밝은 달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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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히 안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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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일무구한 적멸의 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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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가 말로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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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부처님께서만 아시는 경지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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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아비담(那波阿毘曇)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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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인연과(因緣果)를 설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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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뜻이란 알아 닦고 행함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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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란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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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논마다 각기 이단(異端)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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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에는 두 가지 이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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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치게 집착하면 시비가 있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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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달한 자야 어그러지거나 다툼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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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여러 묘한 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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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지금 설하지 않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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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망상을 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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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을 미혹시킬까 두렵기 때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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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따라 중생에 이익 되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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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미 약간 설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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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밝은 지혜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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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기를 잘 알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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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바국(摩羅婆國) 경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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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초성과(初聖果)를 터득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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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와 산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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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한 자취는 멀리 여읨을 닦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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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사자국(師子國)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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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파리(劫波利)라는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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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닦아 나아가 제2과를 증득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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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사다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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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어려움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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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욕도(離欲道)를 닦는 장애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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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멀리 여읨 닦음을 보는 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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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이 한적함을 알은 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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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희유한 마음 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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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 606] 쪽 |
이양(利養)하러 다투어 모여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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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를 불타는 독같이 여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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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려 여의는 큰마음 내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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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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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국(闍婆國)과 임읍(林邑)을 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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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행(業行)의 바람에 나부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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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따라 송나라에 이르렀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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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여러 나라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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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닿는 대로 불법 일으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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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야 할 바를 묻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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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관을 살펴 닦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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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몸 멸하여 없어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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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히 등불 꺼지는 것과 같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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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頂禮三寶 淨戒諸上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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濁世多諂曲 虛僞無誠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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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惑不識眞 懷嫉輕有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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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以諸賢聖 現世晦其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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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求那跋摩 命行盡時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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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獲善功德 今當如實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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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以諂曲心 希望求名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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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勸衆懈怠 增長諸佛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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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法力如是 仁者咸諦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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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昔曠野中 初觀於死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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膖脹蟲爛壞 臭穢膿血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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繫心緣彼處 此身性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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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 606] 쪽 |
常見此身相 貪蛾不畏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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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是無量種 修習死屍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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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捨餘聞思 依止林樹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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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夜專精進 正觀常不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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境界恒在前 猶如對明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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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彼我亦然 由是心寂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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輕身極明淨 淸涼心是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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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長大歡喜 則生無著心
|
變成骨鎖相 白骨現在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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朽壞肢節離 白骨悉磨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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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垢智熾然 調伏思法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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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時得如是 身安極柔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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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是方便修 勝進轉增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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微塵念念滅 壞色正念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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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則身究竟 何緣起貪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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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因諸受生 如魚貪鉤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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彼受無量壞 念念觀磨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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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彼所依處 從心猨猴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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業及業果報 依緣念念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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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所知種種 是名別相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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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則思慧念 次第滿足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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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種種法相 其心轉明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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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於爾焰中 明見四念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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律行從是竟 攝心緣中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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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如熾然劍 斯由渴愛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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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盡般涅槃 普見彼三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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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焰所熾然 形體極消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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喜息樂方便 身還漸充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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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妙衆生相 頂忍亦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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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 606] 쪽 |
是於我心起 眞實正方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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漸漸略境界 寂滅樂增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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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世第一法 一念緣眞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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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第法忍生 是謂無漏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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妄想及諸境 名字悉遠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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境界眞諦義 除惱獲淸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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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就三昧果 離垢淸涼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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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涌亦不沒 淨慧如明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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湛然正安住 純一寂滅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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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我所宣說 唯佛能證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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那波阿毘曇 說五因緣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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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義知修行 名者莫能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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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論各異端 修行理無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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偏執有是非 達者無違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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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行衆妙相 今我不宣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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懼人起妄想 誑惑諸世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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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彼修利相 我已說少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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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彼明智者 善知此緣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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摩羅婆國界 始得初聖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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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蘭若山寺 道跡修遠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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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於師子國 村名劫波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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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修得二果 是名斯陀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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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是多留難 障修離欲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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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我修遠離 知是處空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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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生希有心 利養競來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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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見如火毒 心生大厭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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避亂浮于海 闍婆及林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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業行風所飄 隨緣之宋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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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是諸國中 隨力興佛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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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 606] 쪽 |
無問所應問 諦實眞實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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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此身滅盡 寂若燈火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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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승가발마(僧伽跋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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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발마는 중국말로 중개(衆鎧)라 하며 천축국 사람이다. 어려서 속세를 떠났으며, 맑고 준수하게 계율을 잘 지키는 덕이 있었다. 삼장을 잘 해석했다. 그 중에서도 『잡심론(雜心論)』에 정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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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원가(元嘉) 10년(433)에 고비사막을 지나 서울에 이르렀다. 재간이 넓고 인품이 맑아서, 도인과 속인들이 그를 공경하고 특별하게 대우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종사로서 받들어 섬겨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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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경평(景平) 원년(423)에 평륙(平陸)의 수령인 허상(許桑)은 집을 허물어 절을 지었다. 이 때문에 평륙사(平陸寺)라고 이름 붙였다. 후에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승가발마의 도행이 순수하고 치밀하다고 여겼다. 그에게 절에 머물러 달라고 청하고, 공양을 높이 받들어 그의 덕을 드러내었다.
|
승가발마는 혜관과 함께 탑을 3층으로 올렸다. 오늘날의 봉성(奉誠)탑이 바로 그것이다. 승가발마는 도를 행하고 경을 암송하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대중 승려들이 모여들어 불도의 교화가 널리 퍼졌다.
|
과거 구나발마(求那跋摩) 삼장법사는 계품(戒品)에 밝아서, 영복사(影福寺)의 비구니 혜과(慧果) 등을 위해 거듭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하려고 하였다. 이 때에 이부대중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는데, 삼장이 입적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서 사자국(師子國)의 비구니 철살라(鐵薩羅) 등이 서울로 왔다. 이에 대중들이 모두 청하여 승가발마를 스승으로 삼아, 삼장의 자취를 이어받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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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사(祇洹寺)의 혜의(慧義)는 서울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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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것을 바로잡아야 하니, 뜻을 집행하는 것이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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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직접 승가발마와 논의를 겨루어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승가발마는 종지를 표방하고 법다움을 환하게 드러냈다. 이치로서 증명함이 분명하고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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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 606] 쪽 |
실하여, 이미 덕에 귀의(歸依)하는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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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의는 마침내 완고함과 편협함을 돌리고, 수그려서 추앙하여 복종하였다. 제자 혜기(慧基) 등으로 하여금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공경하여 섬기도록 하였다. 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는 수백 명이나 되었다.
|
송나라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은 그의 모범적인 계율[戒範]을 높이 받들고 재 올리는 공양을 널리 설치하였다. 그러자 사부 대중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서울이 기울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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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관(慧觀) 등은 승가발마가 오묘하게 『잡심론』을 이해하여, 그 의미를 꿰뚫어 암송한다고 여겼다. 앞서 구나발마 삼장이 비록 번역했다고는 하나, 아직 책으로 엮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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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그 해 9월 장간사(長干寺)로 학사(學士)들을 불러들였다. 다시 승가발마를 청해 번역하게 했다. 보운(寶雲)이 말을 풀고, 혜관(慧觀)이 붓으로 받아 적었으며, 자세히 고증하고 교감하기를 한 번씩 두루 하여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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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마득륵가경(摩得勒伽經)』·『분별업보략(分別業報略)』·『권발제왕요게(勸發諸王要偈)』 및 『청성승속문(請聖僧俗文)』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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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발마는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므로, 한 군데에 머무르지 않았다. 불경 번역하는 일을 끝내고 난 뒤에 작별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대중들이 모두들 만류했으나, 그를 머무르게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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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元嘉) 19년(442) 서역 상인의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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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담마밀다(曇摩蜜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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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밀다는 중국말로 법수(法秀)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일곱 살이 되자 정신이 깨끗하고 올곧았다. 불법의 일을 볼 때마다 저절로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의 부모는 사랑하기는 했지만 특이하게 여겨서, 마침내 그를 출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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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빈국에서는 많은 성인과 통달한 이를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므로 담마밀다는 자주 훌륭한 스승을 만나 많은 경을 널리 꿰뚫었다. 특히 선법(禪法)에서 깊이가 있었다. 그가 터득한 경지는 지극히 정미하고 몹시 심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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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이 마음이 침착하고 생각에 깊이가 있으며, 총명하여 사리를 잘 해득하였다. 의식과 규범을 세밀하게 바로잡았다. 태어날 때부터 두 눈썹이 붙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연미(連眉) 선사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교화를 펼칠 뜻을 맹세하였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구자국(龜玆: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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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구자왕의 꿈에 신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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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복덕이 있는 분이 내일 입국할 것이다. 그대는 반드시 공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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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곧바로 외교를 담당하는 관리[外司]에게 칙령을 내렸다. 만일 이채로운 분이 국경에 들어오면, 반드시 달려와 아뢰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과연 담마밀다가 이르렀다. 왕은 몸소 교외로 나가 담마밀다를 맞이하였다. 궁으로 들어갈 것을 청하고, 마침내 그를 따라 계(戒)를 받고, 네 가지 공양물로 시주하는 예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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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밀다는 편안하게 옮겨 다닐 수 있으므로, 재물로 봉양 받는 것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몇 년을 머물자 떠날 마음을 가졌다. 그러자 다시 신(神)이 왕의 꿈에 내려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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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덕 있는 분이 왕을 버리고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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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이윽고 왕과 신하들이 극구 말렸으나,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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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고비사막을 지나 돈황에 이르렀다. 여유 있는 넓은 땅에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다. 벚나무 천 그루를 심어서 정원 백 이랑을 조성하였다. 방각(房閣)과 못[池沼]은 매우 엄숙하고 깨끗하였다. 얼마 지나서 다시 양주(凉州)로 가서 공부(公府)의 옛 절에서 다시 절을 수리하였다. 배우려는 문도(門徒)들도 많이 찾아들어 선업(禪業)이 몹시 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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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강남의 천자 땅에 불법을 전하려고 뜻을 두었다. 송 원가(元嘉) 원년(424)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촉(蜀: 四川省)에 이르렀다. 이윽고 협주(峽州)를 나와 형주(荊州)에 머물렀다. 장사사(長沙寺)에다 선각(禪閣)을 조성하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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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사리(舍利) 얻기를 기도하면서 청하였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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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일이 지나 마침내 한 매를 감응하였다. 그릇에 부딪쳐 소리를 내면서 빛을 내뿜어 온 방 안에 가득하였다. 승려와 속인 제자들이 더욱 열심히 용맹정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사람들마다 그 마음을 백 곱절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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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양자강(揚子江)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나중에는 기원사(祇洹寺)에서 휴식을 취했다. 담마밀다의 불도에 대한 명성은 본래부터 드러나서 교화가 여러 나라에 미쳤다. 서울에 이르자, 처음부터 온 도읍이 다 기울어질 만큼 예우하고 가르침을 얻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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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 문애(文哀)황후로부터 황태자, 공주에 이르기까지 후궁에서 재(齋)를 설치하지 않음이 없었다. 초액(椒掖)21)에서 계 받기를 청하였다. 건강을 여쭈는 심부름꾼들이 열흘을 멀다 않고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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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 기원사(祇洹寺)에서는 『선경(禪經)』·『선법요(禪法要)』·『보현관(普賢觀)』·『허공장관(虛空藏觀)』 등을 번역하여 펴냈다. 항상 선도(禪道)를 가르쳐서, 때로는 천 리 먼 곳에서 가르침을 받으러 오기까지 하였다. 멀거나 가까운 곳의 사부 대중들이 모두 그를 대선사(大禪師)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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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會稽: 浙江省) 태수 평창(平昌) 사람 맹의(孟顗)는 깊이 불법을 믿어, 삼보(三寶)를 섬기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평소부터 선(禪)의 묘미를 좋아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매우 두터웠다. 절우(浙右)에 부임하면서 담마밀다를 청하여 함께 돌아다니고, 무현(鄮縣)에 있는 산에다가 탑과 절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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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나라의 옛 습속은 대부분 무당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오묘한 교화가 퍼지면서부터는 집집마다 바른 곳으로 귀의하였다. 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동안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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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10년(433)에 담마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종산(鐘山)의 정림하사(定林下寺)에 머물렀다. 담마밀다는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고 맑아서 평소 산과 시내를 사랑하였다. 종산(鐘山)이 자리한 산다움의 아름다움은 숭산(嵩山)이나 화산(華山)과 겨룰 만하다 생각하였다. 정림하사의 전체적 틀 잡음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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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황후(皇后)의 어전(御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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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가의 옆으로 낮게 자리한 것을 항상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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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높은 곳에 올라 땅을 살펴보고, 산세(山勢)를 헤아려서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 원가 12년(435)에 돌을 자르고 나무를 깎아 상사(上寺)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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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과 서민들이 그의 풍모를 흠모하여 봉헌한 것이 가득 쌓여, 선방(禪房)과 전우(殿宇)를 빽빽하게 여러 층으로 세웠다. 이에 사문(沙門)의 무리들이 만 리 먼 곳으로부터 몰려들었다. 엄숙하고 온화하게 불경을 암송하면서, 교화를 기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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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定林)의 달(達) 선사는 달마밀다의 수제자[神足弟子]로, 당신의 가르침을 넓혀서 명성이 도인과 속인들을 진동시켰다. 그 때문에 청정하게 교화가 오래 지속되고 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뛰어난 업적은 높이 받들어져서 바뀌지 않았으니, 이는 담마밀다가 남긴 강렬한 가르침[遺烈]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서역에서 남쪽 나라에 이르기까지 돌아다닌 곳마다, 선을 닦는 모임[檀會]을 다시 일으켜서 가르침을 널리 펼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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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담마밀다가 계빈국을 떠날 때에 가비라(迦毘羅)의 신왕(神王)이 호위하여 전송하였다. 마침 구자국에 이르렀을 때, 도중에 돌아가려 하여 이에 신왕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담마밀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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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신이한 힘은 변통 자재하여 여러 곳들을 돌아다닐 터이니, 앞으로 그대를 따라 남방으로 함께 가지 않겠나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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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그림자를 거두어 드러내지 않았다. 마침내 먼 곳으로부터 따라와 서울에 이르렀다. 곧 상사(上寺)에서 가비라 신왕의 초상화를 벽에 그렸다. 지금까지도 소리하는 그림자의 효험[聲影之驗]이 있다.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들여 복을 빌면, 소원을 이루지 않는 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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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19년(442) 7월 6일 상사(上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의 나이가 87세이다. 도인과 속인들의 사부 대중이 곡을 하면서 뒤를 따랐다. 이어서 종산(鐘山) 송희사(宋熙寺) 앞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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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석지맹(釋智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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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맹은 옹주(雍州) 경조군(京兆郡) 신풍(新豊)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분명하며, 행실을 닦기를 맑고 깨끗이 하였다. 어려서부터 법복(法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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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입고 학업을 닦는 데에 전념하여, 경을 암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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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양 외국 도인이 천축국 나라에 석가의 남긴 자취 및 대승 경전이 있다고 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탄식하여 느낌이 일어나, 마음을 멀리 밖으로 돌려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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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리도 지척이고 천 년의 세월도 따라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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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위진(僞秦) 홍시(弘始) 6년(404) 갑진년에 같은 뜻을 품은 사문 15명을 불러, 결의하고 장안(長安)을 떠났다. 강을 건너고 골짜기 넘기를 서른여섯 번을 하고, 마침내 양주성(凉州城)에 이르렀다. 양관(陽關)을 떠나 서쪽 고비사막으로 들어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험난한 곳을 넘어갔다. 이전에 전해 들었던 것보다 그 어려움이 배나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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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선선국(鄯鄯國)·구자국(龜慈國)·우전국(于闐國) 등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풍속을 두루 보았다. 우전국으로부터 서남으로 2천 리를 가서 비로소 파미르 고원에 올랐다. 그러나 아홉 명은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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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맹은 남은 도반과 함께 천 7백 리를 나아가서 파륜국(波倫國)에 이르렀다. 같이 가던 축도숭(竺道嵩)이 목숨을 잃어 화장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시신이 있는 곳을 찾지 못했다. 석지맹은 비탄에 젖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스스로 힘써 나아가, 남은 네 명과 함께, 설산(雪山)을 넘어 신두하(辛頭河)를 건너 계빈국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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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는 오백 나한이 항상 아뇩달지(阿耨達池)를 왕래하였다. 큰 덕을 갖춘 나한이 있었다. 석지맹이 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석지맹이 도인들에 대해서 물었다. 그를 위하여 사천자(四天子)의 일을 말해 주었다. 이것이 자세하게 「석지맹전(釋智猛傳)」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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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맹은 기사국(奇沙國)에서 부처님의 글이 새겨진 석타호(石唾壺)22)를 보았다. 또한 이 나라에서 부처님의 발우를 보았다. 광채 나는 빛깔이 자줏빛을 띈 검푸른 색이었다. 네 곳 가장자리가 모두 그러했다. 석지맹은 향과 꽃을 공양하고, 발우를 이마로 모시며 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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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부처님께서 쓰시던 타구(唾具). 법현이 친견했던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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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우가 만약 감응한다면 가벼워질 수도 있고 무거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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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점점 발우가 무거워져서 끝내는 힘으로 견딜 수 없었다. 상[案]에 내려놓았을 때, 다시 그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도심(道心)이 감응한 바가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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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남쪽으로 1천 3백 리를 가서 가유라위국(迦有羅衛國)에 이르렀다.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치아 및 육계골(肉髻骨)을 친견하였다. 부처님의 그림자 자취[影迹]가 찬란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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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빽빽한 숲과 마구니를 항복시킨 보리수를 보았다. 석지맹은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 차서 하루 동안 공양하였다. 아울러 보배 일산[寶蓋]과 대의(大衣)23)로, 부처님께서 악마를 항복시킨 상(像)을 덮었다. 그는 두루 돌아다니면서 신령스러운 변이(變異)를 샅샅이 살폈다. 하늘 사다리[天梯]나 용의 못[龍池]을 본 일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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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화씨국(華氏國) 아육왕(阿育王)의 옛 도읍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큰 지혜가 있는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다. 나열가(羅閱家)라고 불렸다. 그는 모든 족속에게 법을 전파하였다. 왕에게 흠모와 존경을 받아, 순은으로 만든 3장(丈) 높이의 탑을 세웠다. 그는 석지맹이 그곳에 이른 것을 보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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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대승(大乘)의 학문이 있는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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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맹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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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대승의 학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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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열(羅閱)이 놀라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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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일이로다. 드문 일이로다[希有]. 아마 보살께서 나타나신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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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맹은 그에게서 범본(梵本) 『대니원(大泥洹)』 1부를 얻었다. 또 『승기율(僧祇律)』 1부, 여러 경의 범본을 얻었다. 유통시킬 것을 서원하고, 이에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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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년에 천축국을 출발하여 동행한 세 명의 도반은 길에서 죽었다. 석지맹과 담찬(曇纂)만이 함께 돌아왔다. 양주에서 니원본(泥洹本)을 펴내어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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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삼의의 하나. 승가리라 음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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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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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元嘉) 14년(437) 촉(蜀) 땅에 들어갔다. 16년(439) 7월에는 전기를 지어 돌아다닌 곳을 기록했다. 원가(元嘉, 424~452) 말년에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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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사문에 대하여 두루 찾아보았다. 행로를 기록하여 열거한 것이 때로는 간혹 서로 같지 않다. 부처님의 발우와 정골(頂骨)이 있는 장소도 어긋난다. 아마도 천축국으로 가는 길이 단지 한 길만이 아니며, 정골과 발우가 신령스럽게 옮겨 다녀 때로 다른 곳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전기에 서술한 견문을 증거로 삼기에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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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강량야사(畺良耶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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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량야사는 중국말로 시칭(時稱)이라 하며 서역 사람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욕심이 거의 없었다. 아비담(阿毘曇)을 잘 외우고, 율장의 책[律部]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 밖의 여러 경전에 대해서도 대부분 해박하였다. 삼장에도 아울러 밝지만 선문(禪門)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 번 선정의 관문에 들 때마다, 간혹 7일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항시 삼매정수(三昧正受)로써 교화를 여러 나라에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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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元嘉, 424~452) 초기에 멀리 고비사막을 무릅쓰고 건너왔다. 서울에 다다르니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가 매우 특이하다고 더욱 찬탄하였다. 처음에 종산(鐘山) 도림정사(道林精舍)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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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인 보지(寶誌)가 그의 선법(禪法)을 숭배하였다. 사문 승함(僧含)의 청으로 『약왕약상관(藥王藥上觀)』과 『무량수관(無量壽觀)』을 번역하였다. 승함이 곧 붓을 들어 받아 적었다. 이 두 경전은 번뇌의 장애를 건너는 비밀한 술법[轉障之秘術]이자, 정토를 이루는 크나큰 바탕[淨土之洪因]이었다. 그러므로 조용히 읊조리고 음미되어 송나라에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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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平昌) 사람 맹의는 소문을 들었다. 삼가 공경해서 필요한 물자를 넉넉하고 후하게 제공하였다. 맹의가 회계(會稽)의 수령으로 나가면서, 그에게 떠나지 말 것을 진정으로 간청하였다. 후에 강릉(江陵)으로 옮겨가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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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元嘉) 19년(442년) 서쪽으로 민촉(岷蜀)을 유람하며 곳곳에서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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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펴니, 선을 배우는 이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후에 돌아와 강릉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가 6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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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달다(僧伽達多)·승가라다(僧伽羅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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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또 천축국의 사문 승가달다와 승가라다는 모두 선학(禪學)에 매우 밝았다. 송나라에 들어와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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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달다가 일찍이 산중에 있으며 좌선(坐禪)을 하였다. 해가 마침 저물어서 식사를 거르고자 하였다. 그런데 새가 무리를 지어 과일을 물고 날아가다가 내려 주었다. 승가달다가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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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가 꿀을 바치자 부처님께서도 받아 잡수셨다. 지금 날아가는 새가 내려준 음식이라고 해서 어찌 안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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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받아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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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18년(441년) 여름에 임천(臨川)의 강왕(康王)의 청을 받아들여, 광릉(廣陵)에서 집을 지어 거처하였다. 뒤에 건업에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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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라다는 중국말로 중제(衆濟)라 한다. 송나라 경평(景平, 423~424) 말에 송의 서울에 이르렀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며 나무 아래에서 좌선하였다. 본래의 그윽함과 한가함을 닦으며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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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10년(433)에 종부(鍾阜)의 양지쪽에 살 곳을 정하였다. 가시나무를 베어내고 정사를 건립하였다. 곧 송희사(宋熙寺)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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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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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타라는 중국말로 공덕현(功德賢)이라 하며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대승(大乘)을 배웠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마하연(摩訶衍)이라 부른다. 본래는 바라문(婆羅門) 출신이다. 어려서 5명(明)의 여러 논을 익혔다. 천문(天文)·서산(書算)·의방(醫方)·주술(呪術)에도 해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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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우연히 『아비담잡심론(阿毘曇雜心論)』을 읽었다. 깜짝 놀라 깨달아 불법을 깊이 숭봉하였다. 그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외도(外道)를 섬겨 사문(沙門)을 끊어 막았다. 이에 집을 버리고 잠적하여 멀리에서 스승과 벗을 구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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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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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비녀를 뽑아버린 뒤 머리를 깎고, 정신을 전념하여 배움에 뜻을 두었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무렵에는 삼장(三藏)에 두루 뛰어났다. 사람됨이 자상하고 화순하며,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이 있었다. 스승을 섬김에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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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소승(小乘)의 스승을 사양하고, 대승에 나아가 배웠다. 대승의 스승이 시험 삼아 경전이 담긴 상자를 찾아 선택하게 하자, 『대품(大品)』과 『화엄(華嚴)』을 얻었다. 스승이 기뻐하며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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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대승과 소중한 인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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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독송과 강의에서 겨룰 자가 없었으니, 더 나아가 보살계법을 받았다. 이에 부모에게 편지를 띄워 불법에 귀의할 것을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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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오로지 외도(外道)만을 지키신다면, 비록 제가 돌아간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 됨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삼보를 믿어 귀의하신다면, 길이 서로 뵙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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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모는 그의 편지가 온 것에 감격하여, 드디어 외도를 버리고 불법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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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타라가 이전에 사자국(師子國)의 여러 나라에 이르니, 모두들 필요한 물건을 전해 보내왔다. 일찍이 동방에 인연이 있음으로 해서, 이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중도에 바람이 그치고 마실 물마저 떨어졌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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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해 시방불(十方佛)을 염송하고 관세음을 칭한다면, 어디를 가든 감응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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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주경(呪經)을 외우고, 간절하게 예참하였다. 조금 있다가 신풍(信風)24)이 갑자기 이르렀다. 짙은 검은 색의 구름이 끼어 비를 내려, 온 배 안의 사람이 구제되었다. 그의 정성스런 감응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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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元嘉) 12년(435)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자사(刺史)인 차랑(車郞)이 표문을 올려 보고하였다. 송나라 태조는 사신을 보내 영접하였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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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동북풍(東北風) 혹은 계절풍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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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고 서울에 이르자, 명승(名僧) 혜엄(慧嚴)과 혜관(慧觀)에게 칙령을 내려 신정(新亭)의 교외에서 위로하였다. 그의 정신과 마음이 맑고 투철한 것을 보고는, 경건하게 우러르지 않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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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통역을 하여 서로 말을 나누었으나, 길거리에서 반갑게 만나 일산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傾蓋如故]25)같이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렀다. 얼마 있다가 태조가 청하여 맞이하고, 더욱 깊이 숭배하여 존경하였다. 낭야(瑯琊) 안연지(顔延之)는 뛰어난 재주와 큰 학식을 지닌 석학인데도, 의관을 갖추고 문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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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이르러 서울과 원근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갓과 일산들이 서로 줄을 이었다. 대장군인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과 승상인 남초왕(南譙王) 의선(義宣)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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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에 뭇 승려들이 모두 경전을 번역할 것을 요청하였다. 기원사에서 불교 교리[義學]에 밝은 여러 승려들을 모아 『잡아함경(雜阿含經)』을 번역하여 냈다. 동안사(東安寺)에서는 『법고경(法鼓經)』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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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단양군(丹陽郡)에서 『승만경(勝鬘經)』과 『능가경(楞伽經)』을 번역하였다. 이 때에는 참여한 무리가 7백여 명이었다. 보운(寶雲)이 전역(傳譯)을 하고, 혜관(慧觀)이 붓을 잡았다. 말이 오가며 자문하고 분석하여 오묘한 본지를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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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초왕이 형주(荊州)를 평정하였다. 함께 신사(辛寺)로 가서 머물 것을 청하므로 방과 전각을 다시 세웠다. 곧 신사에서 『무우왕경(無憂王經)』·『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무량수경(無量壽經)』 1권·『니원경(泥洹經)』·『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상속해탈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波羅蜜了義經)』·『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 3권·『제일의오상략경(第一義五相略經)』·『팔길상경(八吉詳經)』 등의 여러 경전을 내었다. 이전에 펴낸 것과 아울러 백여 권에 이르렀다. 항시 제자 법용(法勇)으로 하여금 번역을 옮겨 말을 헤아리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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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길을 가다가 만나 서로 잠깐 이야기하는 정도의 교분(交分)이지만, 서로 마음이 맞아 옛날부터 사귄 사이같이 친하다는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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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왕(譙王)이 청하여 『화엄(華嚴)』 등의 경전을 강의하게 하였다. 구나발타라가 스스로 아직 송나라 언어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여기고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생각을 품었다. 곧바로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참회하며 관세음에게 청하여, 신명이 응해 주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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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꿈속에 흰 옷을 입고 손에 칼을 든 사람이 나타났다. 한 사람의 머리를 받쳐들고, 그의 앞에 이르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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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걱정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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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타라가 갖추어 사실대로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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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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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걱정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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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칼을 가지고 머리를 바꾸어 새 머리로 얹히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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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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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타라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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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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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환히 트이면서 깨달아, 마음과 정신이 희열에 젖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도의 의미를 송나라의 말로 갖추어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제야 강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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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元嘉, 424~452) 말기에 이르러 초왕이 자주 괴이한 꿈을 꾸었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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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장차 화란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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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되지 않아서 원흉(元凶)이 역모를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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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건(孝建, 454~456) 초기에 이르러 초왕이 몰래 역적질을 도모하였다. 구나발타라가 얼굴에 근심을 띠고 말을 하지 않았다. 초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구나발타라가 간절하게 간언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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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호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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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왕은 세상 물정과 소신 때문에 그를 핍박하여 함께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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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梁山)에서의 패배로 큰 배가 뒤집혀 상황이 급박하였다. 강기슭까지 너무 멀어서 온전히 구제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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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며, 손에는 대나무 지팡이를 잡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물이 겨우 무릎에 찼다. 지팡이를 가지고 물을 짚어 보니, 물의 흐름이 매우 깊고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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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린아이가 뒤쪽에서 따라와 손을 내밀었다. 돌아보며 어린아이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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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린 아이인데, 어찌 나를 건너게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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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어지러워하는 사이에 10여 보나 나갔음을 느꼈다. 이렇게 해서 강기슭으로 올라왔다. 곧바로 납의(納衣)를 벗었다. 어린아이에게 보상코자 둘러보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면서, 바야흐로 신령의 힘이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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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왕현모(王玄謨)가 양산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세조가 군중에 칙명을 내렸다. 구나발타라를 찾으면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역의 사자 편에 부쳐 궁궐로 보내도록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찾아내어, 배를 태워 서울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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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곧바로 접견하여 곡진하게 돌아보며 여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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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를 고대한 날이 오래 되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서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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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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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분수로 헤아려 보면, 죽어 잿가루로 날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접견을 하시니, 거듭 살아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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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명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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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누구와 더불어 역모를 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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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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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한 사람은 군사(軍事)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창(張暢)과 송영수(宋靈秀) 등이 모두 빈도에게 핍박하여 몰아댔습니다. 확실한 것은 단지 제가 예기치 못한 전생의 인연으로 인해, 이 일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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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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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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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칙명으로 후당(後堂)에 거주하였다. 옷과 물건을 제공하여 베풀고, 하인과 수레를 지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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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구나발타라가 형주(荊州)에 있은 지가 10년이 되었다. 매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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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譙王)에게 보낸 편지와 상소를 기록해 두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군대가 패하기에 이르러서 서찰을 검사해 보니, 군사(軍事)에 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세조(世祖)가 그의 순수하고 근실함을 알고는 더욱더 예로써 대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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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한가하게 말을 나누다가 희롱 삼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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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상(丞相)을 생각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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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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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을 받은 것이 10년입니다. 어찌 덕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폐하를 좇아 간절히 비나이다. 바라건대 승상을 위하여 3년간 향을 사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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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섭섭한 마음이 들어 안색을 찌푸렸으나, 의롭다고 여겨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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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사(中興寺)가 완성됨에 이르러 칙령으로 옮겨서 거주하게 하고, 그를 위하여 세 칸의 방을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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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동부(東府)에서 연회(讌會)를 열어, 왕공(王公)들이 모두 모였다. 칙명으로 구나발타라를 불러서 만나 보았다. 이 때 미쳐 머리를 말끔하게 깎지 못한 터라서 흰머리가 희끗하였다. 세조가 멀리서 바라보고는 상서(尙書) 사장(謝莊)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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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연(摩訶衍)은 총명하고 기미를 아는 자인데, 단지 늙음이 이미 이르렀군. 짐이 시험 삼아 늙음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는 반드시 우리들의 의도를 꿰뚫어 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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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구나발타라가 계단을 올라오자, 그를 맞이하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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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연은 멀리서 온 뜻을 저버리지 않았소. 그러나 다만 오직 한 가지 남아있는 일이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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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소리에 응하여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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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멀리 황제의 서울에 와서 30년이 되었습니다. 천자의 은혜로운 대우에 부끄러움을 머금기가 끝이 없습니다. 다만 70살이 되어 늙고 병들어서, 오직 죽음 한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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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그의 임기응변을 가상하게 여겼다. 칙명으로 자신의 자리 가까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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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도록 하여 온 조정의 눈길이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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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말릉(秣陵) 경계에 있는 봉황루(鳳皇樓) 서쪽에 절을 세웠다. 매일 한밤중이 되면 문득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살펴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번번이 악몽을 꾸며 시달리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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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타라가 향을 살라 주문을 외우며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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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묵은 인연으로 이곳에 머물러 있다. 내가 지금 절을 세웠으니, 항시 너희들을 위하여 도를 행하고 예참을 하겠다. 만약 머물고자 한다면 절을 호위하는 선한 귀신이 되어라. 만약 머물 수 없다면, 각기 편안한 바를 따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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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도인과 속인 10여 명이 같은 날 저녁에 꿈을 꾸었다. 천여 명의 귀신이 모두 짐을 꾸려 옮겨가는 것을 보았다. 절 안의 대중이 드디어 편안해졌다. 현재 도후저(陶後渚)에 있는 백탑사(白塔寺)가 바로 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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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大明) 6년(462) 천하에 지독한 가뭄이 들어 산천에 기도를 올렸다. 여러 달이 지나도록 효험이 없었다. 세조(世祖)가 청하여 비를 빌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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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감응이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감응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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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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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러 삼보와 폐하의 하늘같은 위엄에 의지한다면, 반드시 은택이 내릴 것입니다. 만약 감응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뵙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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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곧바로 북호(北湖)의 조대(釣臺)로 가서 향을 사르고 빌었다. 다시 먹거나 마시지도 않았다. 조용히 경을 외우며, 마음속으로 비밀스런 주술을 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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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저녁이 되자, 서북쪽에서 마치 일산과 같은 구름이 일어났다. 해가 서쪽에 떠 있었다. 바람과 우레가 일고 구름이 합쳐지더니, 비가 연이어 내렸다. 다음 날 새벽에 공경(公卿)들이 들어와 축하를 하였다. 칙명을 내려 노고를 위로하고, 하사품을 뒤이어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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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발타라는 어려서부터 종신토록 거친 음식만을 먹었다. 항상 향로를 잡고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매번 식사를 끝내고 나면 번번이 날아다니는 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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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새들이 모여들어 그의 손바닥에서 먹을 것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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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太宗) 대에 이르러 예로써 공양함이 더욱 융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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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시(泰始) 4년(468) 정월에 이르러 몸이 편안하지 못함을 느끼고는, 문득 태종과 공경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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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하던 날 오래도록 우두커니 서서 무엇인가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성스런 모습이 나타났다. 우중(禺中: 오전 10시경)에 드디어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75세이다. 태종은 헤어지는 아픔이 몹시 더하여 부조를 매우 융성하게 하였다. 공경(公卿)들도 모두 장례에 모여들어, 영예로움과 애도함을 함께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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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마저(阿那摩低: 寶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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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또 사문 보의(寶意)라는 자가 있었다. 범어(梵語)로는 아나마저라고 한다. 본래의 성은 강(康)씨로 강거(康居) 사람이다. 대대로 천축국에서 살았다. 송(宋)나라 효건(孝建) 연중(454~456)에 서울에 와서 와관선방(瓦官禪房)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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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시 절 안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였다. 또한 불경과 율장에 밝아 당시 사람들이 삼장(三藏)이라고 불렀다. 평소 수백 개의 조개껍데기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어 보아, 곧바로 길흉(吉凶)을 알았다. 신령스런 주술을 잘하였다. 손바닥에 향을 칠하여 사람의 지나간 과거의 일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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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세조가 높이 두 자쯤 되는 동으로 만든 타호(唾壺) 하나를 내려주었다. 항상 탁상 앞에 놓아두었다. 홀연 어떤 사람이 이것을 도둑질하였다. 보의가 돗자리 하나를 속이 빈 채로 둘둘 말고는, 위를 향해 여러 차례 주문을 외웠다. 3일 저녁이 지나자 타호가 돗자리 안에 되돌아와 놓여 있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 이에 사방 원근의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공경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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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의 문혜왕(文惠王)·문선왕(文宣王)과 양나라 태조(太祖)가 모두 그를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영명(永明) 연간(483~493) 말년에 머무른 곳에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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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구나비지(求那毘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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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비지는 중국말로 안진(安進)이라 하며, 본래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도를 좇아 천축국의 대승법사(大乘法師)인 승가사(僧伽斯)를 스승으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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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하고 슬기로우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부지런히 경을 암송하고 대소승(大小乘)을 연구하여, 꿰뚫은 것이 거의 20만 글자나 되었다. 외전(外典)을 겸하여 공부하여 음양(陰陽)을 자세히 터득하였다. 시간을 점치고 일을 시험하여, 조짐을 증명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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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齊)나라 건원(建元, 479~482) 초에 서울에 와서 비야리사(毘耶離寺)에 머물렀다. 지팡이를 짚고 따르는 무리들의 위엄서린 자태가 엄숙하고 단정하여, 왕공(王公)과 귀족들이 번갈아가며 서로 공양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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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승가사는 천축국에서 수다라장(修多羅藏) 가운데 긴요하고 절실한 비유들을 뽑아 한 부(部)로 편찬하였다. 무릇 온갖 일의 배움에서 새롭게 가르쳤다. 구나비지는 그것들에 모두 뛰어난데다, 겸하여 뜻과 취지에도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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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永明) 10년(492) 가을에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모두 10권이다. 『백유경(百喩經)』이라고 이른다. 뒤에 다시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과 『수달장자경(須達長者經)』 각 1권을 내었다. 대명(大明) 연간(457~464) 이후부터 경전을 번역하는 일이 거의 끊어졌다. 이것이 세상에 유통되자, 세상에서 모두들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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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비지는 사람됨이 매우 도량이 넓고 도타웠기 때문에, 만 리나 되는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남해(南海)의 상인들은 모두 그를 종사로써 섬겼다. 바치는 물건은 모두 받아들여 불법을 영위하는 데 사용하였다. 건업(建業)의 회수(淮水) 옆에 정관사(正觀寺)를 지어 이곳에 거주하였다. 2층 누각과 층문(層門)으로 전당(殿堂)을 정돈하여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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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中興) 2년(502) 겨울, 머무르는 곳에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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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바라(僧伽婆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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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梁)나라 초기에 승가바라라는 자가 있었다. 역시 외국에서 온 불학을 공부한 승려[學僧]이다. 거동과 모양이 신중하고 깨끗하며, 상대하여 담론을 잘 하였다. 서울에 이르러 역시 정관사(正觀寺)에 머물렀다. 지금의 왕이 매우 예를 갖추어 대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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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사와 수광전(壽光殿)·점운관(占雲館)에 칙명을 내려, 『대육왕경(大育王經)』·『해탈도론(解脫道論)』 등을 번역하였다. 석보창(釋寶唱)과 원담윤(袁曇允) 등이 붓을 들고 받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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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불경을 번역한 공이 드높아서 참으로 무어라 찬양할 말이 없다. 옛날에 여래께서 돌아가신 후, 장로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과 말전지(末田地) 등이 팔만 법장(八萬法藏)26)을 함께 갖추어 가지고 주지[具足住持]하셨다. 도를 넓혀 사람을 구제하여 그 일과 쓰임[功用]이 더욱더 넓었다. 그러니 성스러운 지혜가 해처럼 빛나서, 남은 빛이 아직도 숨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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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가전연자(迦旃延子)와 달마다라(達磨多羅)와 달마시리제(達磨尸利帝) 등이 함께 이론(異論)을 널리 찾아서 각각 그 언설(言說)을 지었다. 모두 4아함[含]27)을 근본으로 이어받고, 삼장(三藏)을 종주(宗主)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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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龍樹)와 마명(馬鳴)과 바수반두(婆藪盤豆) 같은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대승 경전을 법칙 삼아 그 핵심이 되는 요점을 잘 추슬렀다. 그 근원은 반야(般若)28)에서 나오고, 흐름은 쌍림(雙林)29)을 꿰뚫는다. 비록 낮은 곳이나 높은 곳이나 두루 화합하여 적셨다고 하지만, 또한 그 본성까지 함께 터득했다. 그래서 삼보로 하여금 책에 실려 전하게 하고, 법륜(法輪)으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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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팔만법문(八萬法門)·팔만사천법장(八萬四千法藏)·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일대 교법을 통틀어 일컫는 말. 중생에게 팔만 사천의 번뇌가 있으므로 이것을 대치(對治)하기 위하여 팔만 사천의 법을 말하였다 한다. |
27) 4아함경(阿含經). 곧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중아함경(中阿含經)』·『장아함경(長阿含經)』·『잡아함경(雜阿含經)』을 말한다. 『아함경』은 아함부에 속하는 소승경의 총칭이다. |
28) 모든 사물의 본래의 양상을 이해하고 불법의 진실한 모습을 파악하는 지성의 작용. 또는 최고의 진리를 인식하는 지혜. |
29)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숲. 석존(釋尊)이 입멸(入滅)하신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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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지 않게 한다. 이 때문에 5백 년 동안에 오히려 정법(正法)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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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신성한 교화가 접하는 곳마다, 먼 곳이건 가까운 곳이건 여기로 모여든다. 한결같은 소리와 한결같은 빛으로 문득 다른 나라를 진동시키고, 한결같은 대(臺)와 한결같은 일산으로 인도를 뒤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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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가유(迦維)30)는 왕래하는 길이 파미르고원과 강으로 끊어져서 수만 리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성인(聖人)의 신비한 힘을 이용한다면, 반걸음이나 한 걸음의 사이와 같을 뿐이다. 그런데도 보고 듣는 것이 제한되고 막혀 있음은 어찌 시절의 운수[時運]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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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연과 운수가 장차 감응하여 불교의 가르침에 잠기어 젖어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도(浮圖)31)의 왕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서역(西域)의 큰 신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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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漢)나라 명제(明帝)는 조서를 내려 초왕(楚王) 영(英)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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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미묘한 말을 외우고, 부도(浮圖)의 인자한 제사를 숭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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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난 것을 해몽하기에 이르러서는, 사신을 서역에 보냈다. 그리하여 섭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도를 품고 와서 교화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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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책을 옆에 끼고 외로이 길을 떠났다. 어렵고 괴로운 중에도 반드시 도달할 것을 기약하였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을 기어올라서는 깊은 연못에 다다랐다. 나르는 듯한 동아줄을 잡고서는 험한 나루를 건넜다. 자신의 몸을 헌신짝처럼 여겨 돌보지 않았으므로, 어려움을 만나서도 태연할 수 있었다. 불법을 전하고 불경을 펼쳐, 처음으로 동쪽 나라 중국을 교화하여 후학들이 배우게 된 것은, 모두 그들의 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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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청(安淸)과 지참(支讖)과 강승회(康僧會)와 축법호(竺法護) 등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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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가유라열(迦維羅閱)·가비라위(迦毘羅衛)와 같은 말. 석존(釋尊)의 탄생지. |
31) 부도(浮屠)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석종(石鐘) 또는 돌탑을 말하고, 중국에서는 스님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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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서는, 모두 다른 왕조에 한 시기씩, 앞사람의 발꿈치를 뒤이어서 크게 도왔다. 그러나 인도와 중국은 말이 매우 다르다. 스스로 훈고에 정밀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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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은 지겸(支謙)과 섭승원(聶承遠)과 축불념(竺佛念)과 석보운(釋寶雲)과 축숙란(竺叔蘭)과 무라차(無羅叉) 등도, 모두 범어(梵語)와 중국말을 매우 잘해서 번역의 일을 다 할 수 있었다. 한 마디 말도 세 번씩 반복하여 말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우리 중국의 음률을 사용하고 윤색하여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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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論)에서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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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세속 말을 따라서 바른 뜻을 보이려 했고, 바른 뜻 속에서도 더욱 뜻이 바른 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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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 일컬음은 대개 이런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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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구마라집이 석학(碩學)으로서 깊은 의미를 찾아내고, 신묘한 식견으로서 그윽하고 심원한 이치를 알았다. 그리하여 중국을 두루 돌아다니고 외국 여러 나라의 말을 모두 잘 알았다. 다시금 지겸과 축불념 또는 축숙란 등이 번역한 문장이 예스럽고 투박하며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다시 거듭 범본(梵本)을 대조하여 번역하였다. 그래서 금본(今本)과 고본(古本)의 두 경전이 말은 다르나 뜻에서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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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도생(道生)과 도융(道融)과 도영(道影)과 승예(僧叡)와 혜엄(慧嚴)과 혜관(慧觀)과 도항(道恒)과 승조(僧肇) 등이 있었다. 모두 말하기 전에 뜻을 깨닫고 글이 구슬처럼 매끄러웠다. 붓을 잡아 뜻을 이어 글을 다듬는 임무는 바로 이 사람들이 맡았다. 그래서 장안(長安)의 번역이 왕성하여 으뜸이 된다고 일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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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요흥(姚興)32)이 천자의 칭호를 쓰면서 서울을 차지하였다. 삼보를 사랑하고 숭상하여 불법을 성곽과 참호로 둘러치듯 보호하였다. 그래서 도를 사모하여 찾아와 위의를 갖춘 이들이 멀고 가까움 없이 연기가 끼듯 모여들었다. 삼장(三藏) 법문과 인연이 있는 것은 반드시 보았다. 그러므로 불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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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남북조(南北朝) 시대 후진(後秦)의 왕. 유학과 불교를 선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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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이 동쪽 중국으로 옮겨온 이래 여기에서 가장 융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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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佛賢) 비구가 강남에서 번역한 『화엄경(華嚴經)』의 큰 책과 담무참(曇無讖)이 하서(河西)에서 번역한 『열반경』의 오묘한 가르침과 여러 승려들이 번역한 4아함경(阿含經)·5부(部)33)·건도(犍度)34)·『바사(婆沙)』35) 등은 모두 내용이 법의 근본에 부합되고 이치가 3인(印)36)에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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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수(童壽: 구마라집)는 첩을 둔 허물이 있고, 불현(佛賢: 불타발타라)은 물리쳐 내쫓긴 자취가 남아 있다. 실록을 고찰해 보아도 상세히 구명하기가 쉽지 않다. 혹시 시절의 운수[時運]가 경박하여 도를 잃고 사람들은 흩어졌기 때문에, 보고 느끼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만약 본래의 자취에 가깝게 더듬는다면, 아마도 또한 구슬에 생긴 하나의 흠집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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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안세고(安世高)·담무참(曇無讖)·법조(法朝)37)·법조(法祚)38) 등은 생각이 조리에 맞고 박학하여 어진 은택을 안개처럼 이루었다. 그러나 모두 편안한 죽음을 맞지 못하니, 갚아야 할 전생의 업보나 피할 수 없는 의로움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러므로 나한(羅漢)은 비록 모든 번뇌가 다하였는데도 오히려 골이 터지는 액운을 만났다. 비간(比干)39)은 충간(忠諫)하면서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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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첫째, 오부대론(五部大論): 법상종(法相宗)에서 쓰는 5종의 논(論). 곧 『유가론』·『분별유가론』·『대장엄론』·『변중변론』·『금강반야론』. 둘째, 오부대승경(五部大乘經)』: 첫째는 대장경 중에 있는 대승 경전을 5종으로 분류한 것. 『개원석교록』의 분류는 반야부·보적부·대집부·화엄부·열반부, 『열장지진』의 분류는 화엄부·방등부·반야부·법화부·열반부. 둘째는 천태종에서 『화엄경』·『대집경』·『대품반야경』·『법화경』·『열반경』을 말한다. |
34) 같은 종류의 법을 모아서 한몫씩 묶어 놓은 것. 경론(經論) 중의 부문을 가리키는 명칭. 편장(篇章)에 해당. |
35)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줄여서 『바사론(婆沙論)』. 5백 대아라한 편저. 659년 현장이 번역. 불멸(佛滅) 후 400년 초에 가니색가왕이 5백 나한을 모아 불경을 결집할 때 『발지론』을 해석하게 한 책이다. |
36) 3법인(法印). 불교의 근본 교의(敎義)를 셋으로 표시한 것.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인(印)은 인신(印信)·표장(標章)이란 뜻으로 일정불변하는 진리라는 표지. |
37) 『고승전』 제1권에 보이는 백원(帛遠)의 자(字)이다. |
38) 법조(法祖)의 아우인 백법조(帛法祚)이다. |
39) 은(殷)나라의 충신. 주왕(紂王)의 음란함을 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기자(箕子)·미자(微子)와 더불어 은나라의 3인(仁)이라고 일컬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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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했으나 오히려 칼을 받는 화를 당하였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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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축법도(竺法度)라는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 오직 소승(小乘)을 고집한다고 말하여 삼장과는 어그러졌다. 밥을 먹을 때도 구리로 된 발우를 사용하니 본래 계율이 허락한 바가 아니다. 땅에 엎드려 서로 향해서 절하니, 이 또한 참법(懺法)40)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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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축법도가 태어난 곳은 남강(南康)41)이어서 천축국에 노닌 것은 아니다. 만년에 담마야사(曇摩耶舍)를 만났으나, 그 또한 소승(小乘)을 전공한 스승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채우려고 한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대중(大衆)들과 다른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도량이 통달한 군자들은 일찍이 돌아서서 가버리지 않았다. 다만 여승의 무리들만 쉽게 따라서 비로소 그 교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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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여인들에 대한 이치의 가르침은 흡족 시키기가 어려워서 일의 자취가 쉽게 뒤집어진다. 인과(因果)를 들으면 소홀히 금방 등져 버리고, 변화하는 술수[變術]를 보면 앞을 다투어 따라간다. ‘따라서 타락한다’는 뜻이 바로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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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생각하니, 불법의 연못은 넓어서 숫자가 8억(億)에 이르지만, 번역하여 얻은 것은 천여 권에 그친다. 모두들 가로막는 사막을 넘어서고, 절벽의 끊긴 길을 넘어 왔다. 혹은 안개를 바라보며 험난한 곳을 건너고, 혹은 말뚝을 붙잡고 몸을 밀어 나오는 고생들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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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서로 모여 헤아려 찾아보니, 모두 열 중에 여덟 내지 아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문에 법현(法賢)·지맹(智猛)·지엄(智嚴)·법용(法勇) 등이 출발할 때는 많은 사람을 모아 무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다만 오직 돌아보는 자신의 그림자만 유일하였다. 그러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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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경전을 읽어 죄장(罪障)을 참회하는 법회. 『법화경』으로 하는 것을 법화 참법, 『아미타경』으로 하는 것을 미타 참법이라고 한다. |
41) 중국의 지명(地名)으로 같은 이름이 여러 곳 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미상(未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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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경전이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은, 경전에 다시 수명을 부여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그런 점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금 세상의 배우는 무리[學徒]들은 오직 한 가지 경전만을 연구하여 익히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넓게 읽으면 많이 미혹된다’고 한다. 이것은 대개 배움을 타락시키는 말이다. 옳은 방법을 총괄한 가르침은 아니다. 어째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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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이치의 참맛을 찾고 법문(法門)을 바르게 판단하고자 한다면, 어찌 억측으로 판단하여 여러 경전을 널리 찾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옮겨 베낀 수고로움이 수포로 돌아가고, 경전이 영원히 상자 속에 감추어진다. 단 이슬과 같은 바른 설법을 끝내 펼쳐서 찾아보지 않아, 더할 나위 없는 보배 구슬을 숨겨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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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선정(禪定)과 계율을 통괄하여 캐내고, 경장(經藏)과 논장(論藏)을 융합하여 배울 수 있다면, 비록 다시 기수(祇樹)의 그늘이 없어지더라도 그윽하고 미묘한[玄妙] 바람은 오히려 불 것이다. 그리고 사라수(娑羅樹)의 잎이 변하더라도 불성(佛性)은 오히려 빛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멀리는 석가의 은혜에 보답하고, 가까이는 불경을 번역한 이들의 은덕을 칭송하는 것이 되리라. 아마도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身命]을 얻을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을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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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贊)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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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바(頻婆)42)가 노래를 멈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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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된 가르침이 베풀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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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승(乘)43)이 마침내 굴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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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법문(八萬法門) 두루 가득 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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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빈바사라(頻婆娑羅). 중인도 마갈타국 임금. 석존(釋尊)이 성도(成道)한 뒤에 귀의하여 가란타에 죽림정사를 지어 바쳤다. |
43) 일반 사람으로서 깨달음의 지위, 특히 해탈의 지경에 도달케 하는 부처님의 교법을 승(乘)이라 하는데 이를 다섯 종류로 나눈 것을 5승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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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별들 북두성 둘러싼 고요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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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 황제 꿈에 신령이 통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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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마등·축법란·지참·구마라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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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위해 목숨 바쳐 모여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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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애로운 구름이 그늘을 옮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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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물이 나루를 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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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말세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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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큰 인연을 심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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頻婆揜唱 疊敎攸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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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乘竟轉 八萬彌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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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星曜魄 漢夢通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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騰蘭讖什 殉道來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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慈雲徙蔭 慧水傳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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俾夫季末 方樹洪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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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전 제4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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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혜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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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만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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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해(義解) 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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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사행(朱士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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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행은 영천(穎川) 사람이다. 뜻과 행동이 바르고 곧아서 어떤 기쁨이나 어떤 막음으로도 그 지조를 꺾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멀리까지 생각을 품고 깨달아, 티끌세상을 벗어나 출가한 후로는 오로지 경전의 연구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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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한(漢)나라 영제(靈帝) 때에 축불삭(竺佛朔)이 『도행경(道行經)』을 번역했다. 이는 곧 소품(小品)의 옛 판본으로서 문구가 간략하여 내용의 뜻이 두루 미치지 못하였다. 사행은 일찍이 낙양에서 『도행경』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문장의 뜻이 잘 드러나지 않고 투박하여, 대체로 미진함을 깨닫고는 매양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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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은 대승의 요체인데 번역의 이치를 다하지 못하였다. 맹세코 뜻을 세워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멀리 가서 대본(大本)을 구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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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위(魏)나라 감로(甘露) 5년(257)에 옹주(雍州)를 출발하였다. 서쪽 고비 사막을 지나 우전국(于闐國)에 이르렀다. 과연 범서(梵書)로 된 정본(正本) 90장(章)을 얻었다. 제자인 불여단(不如檀)을 보내 [불여단은 중국어로 법요(法饒)라는 의미이다.] 범본의 불경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제자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을 즈음에, 우전국의 소승을 배우는 여러 무리들이 마침내 그곳 왕에게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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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땅의 사문이 바라문의 책으로 불법을 미혹하여 어지럽힙니다. 왕은 이 땅의 주인이십니다. 만약 이것을 금지하지 않으면 장차 불법이 끊어져, 한나라는 귀머거리와 소경의 땅처럼 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임금님의 허물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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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왕은 경전을 갖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행은 깊이 원통한 마음을 품었다. 마침내 경을 태우는 일로 증명해 보이고자 하였다. 왕이 곧 이를 허락하였다. 사행이 궁전 앞에 장작을 쌓아 불태우며, 불 곁에 나아가 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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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불법이 한나라 땅에 유통할 것이라면, 불경은 곧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가호가 없다면, 이는 운명일 터이니 어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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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고 경을 불 속에 집어던졌다. 불은 이내 꺼졌는데, 한 글자도 손상되지 않았다. 가죽을 덧댄 책표지[皮牒]도 본래 것과 같았다. 이에 대중들이 놀라고 감복하여 모두 그 신비한 감응을 칭송하였다. 마침내 경전을 진류(陳留) 창원(倉垣)의 수남사(水南寺)로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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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숙란(竺叔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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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하남 땅에 축숙란이란 거사가 있었다. 본래는 천축국 사람이다. 아버지 대에 피난을 와서 하남 땅에 거주하였다. 숙란은 어렸을 때 사냥을 좋아하였다. 훗날 잠시 죽었다가 깨어나는 일을 겪고 나서, 두루 업과 과보를 보았다. 이로 인해 생각을 바꾸어, 오로지 정성을 다해 힘써서 깊이 불법을 숭상하였다. 그는 여러 나라 언어를 널리 연구하여, 범어와 중국어에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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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차(無羅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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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무라차란 승려가 있었다. 서역의 도사로서 옛 서적을 참구하고 배운 것이 많았다. 이들이 곧 손에 범본을 잡으면, 축숙란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를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라 부른다. 가죽을 덧댄 책 표지[皮牒]로 된, 옛 원본은 지금 예장(豫章)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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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太安) 2년(303)에 이르러 지효룡(支孝龍)이 축숙란을 찾아갔다. 한꺼번에 다섯 부를 베껴 쓰고 교정하여, 이를 정본으로 삼았다. 당시에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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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으로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열네 필의 비단에 쓰인 옛 원본은 오늘날의 필사권 20권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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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은 마침내 나이 80세에 우전국에서 세상을 마쳤다. 서방의 법에 의하여 그를 다비하였다. 땔감이 다 타서 불이 꺼졌지만 시신은 오히려 온전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곧 주문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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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진실로 득도하셨다면, 법으로 보아 마땅히 시신이 썩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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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에 응하여 시신이 부스러져 흩어졌다. 이에 뼈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그 후 제자인 법익(法益)이 그 나라에서 돌아와 친히 이 일을 전하였다. 그런 까닭에 손작(孫綽)이 『정상론(正像論)』에서 “사행은 우전국에서 형체를 흩뿌렸다”고 이른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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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효룡(支孝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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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효룡은 회양(淮陽)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풍모 있는 자태가 있어 무겁게 여겨졌다. 이에 다시 더하여 고상한 풍채가 탁월하고, 높은 이론이 시대에 적합하였다. 항상 소품(小品)을 펴놓고 음미하면서, 이를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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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류(陳留)의 완첨(阮瞻), 영천(穎川)의 유개(庾凱)와 나란히 지음(知音)1)의 교류를 맺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8달(達)이라 불렀다. 당시에 혹자가 그를 조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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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진나라에서 용 같은 천자가 일어나시어[龍興] 천하를 한 집안으로 만드셨네[天下爲家]. 가사와 오랑캐 옷을 벗어버려야 하거늘, 사문은 어찌하여 머리카락과 피부를 온전히 하여 비단을 걸치지 않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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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룡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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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를 잡는 것으로써[抱一]2) 소요(逍遙)하고, 오직 적멸로써 정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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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아(伯牙)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악상(樂想)을 일일이 알아 맞혔다는 종자기(鍾子期)와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자기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한 벗을 일컫는 말. |
2) 하나를 잡는 것으로써 천하의 기준을 삼는다(抱一爲天下式, 『老子』 2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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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고자 합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모습을 허물고 옷을 바꾸어 형상이 변했다고 하여, 저들은 나를 욕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저들의 영화를 버렸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귀함에 무심(無心)하면 할수록 더욱더 귀하고, 풍족함에 무심하면 할수록 더욱더 풍족한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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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때맞춘 임기응변은 모두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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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축숙란이 처음으로 『방광반야경』을 번역하였다. 효용은 이미 평소 무상(無相)을 즐기던 터였다. 이에 이를 얻자마자 곧 10여 일 동안 펴서 읽어보고는, 문득 나아가 강의를 열었다. 그 후 그가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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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孫綽)이 찬(贊)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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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모난 것은 견주어 보기 쉬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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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큰 그릇이란 상상하기조차 어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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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고 굳센 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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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넓은 곳으로 매진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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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이 다투어 삼가 귀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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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모하여 본받아 우러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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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랑이는 샘물 가득 구름을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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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는 풍성한 향기를 바람에 싣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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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方易擬 大器難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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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桓孝龍 剋邁高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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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競宗歸 人思效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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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泉彌漫 蘭風肹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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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승연(康僧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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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연은 본래 서역 사람으로 장안에서 태어났다. 모습은 비록 인도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중국말을 하였다. 얼굴과 행동이 자상하고 바르며, 뜻과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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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넓고 깊었다. 『방광(放光)』·『도행(道行)』 등 두 반야경을 외웠다. 곧 대품과 소품의 두 경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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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법창(康法暢)·지민도(支敏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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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나라 성제(成帝) 때에 강법창·지민도 등과 더불어 양자강을 건넜다. 법창도 역시 재주와 생각이 넘쳐 나서 서로 자주 오고가고 하였다. 『인물론(人物論)』과 『시의론(始義論)』 등을 지었다. 법창은 늘 주미(麈尾: 拂子, 털이개)를 손에 쥐고 걸어 다녔다. 이름난 손님을 만날 때마다 청담(淸談)으로 하루해를 다 보냈다. 이에 유원규(庾元規)가 법창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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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털이개를 왜 항상 쥐고 다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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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창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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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같이) 청렴한 사람은 갖지 않고, (나 같이) 탐욕스런 사람은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 가지고 다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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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도도 역시 총명하며 명석하다고 이름이 났었다. 『역경록(譯經錄)』을 지었는데, 지금도 세상에 유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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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연은 비록 덕이 법창과 민도보다 더 높았지만 그들과 달리 청렴하고 검약하게 자처하여 항상 구걸로 생활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미처 그를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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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어느 날 걸식(乞食)을 하다가 진군(陳郡)의 은호(殷浩)를 만났다. 은호가 처음으로 불경의 심원한 이치에 대해 물었다. 즉각 세속 책의 성정(性情) 같은 내용으로 답하면서, 낮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하였다. 은호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를 다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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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낭야(瑯琊)의 왕무홍(王茂弘)이 코가 높고 눈이 깊다 하여 그를 희롱하였다. 승연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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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가 얼굴의 산이라면, 눈은 얼굴의 못[淵]이랍니다. 산이 높지 않으면 신령스럽지 못하고, 못이 깊지 않으면 맑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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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이 명답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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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예장산(豫章山)에 절을 세웠다. 읍과의 거리가 수십 리이다. 강물을 두르고 높은 재를 옆에 끼며, 대나무 숲이 울창하고 무성하였다. 이름난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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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뛰어난 달인들이 메아리가 답하듯 달려와 무리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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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심범천경(心梵天經)』을 수지하여, 공의 논리에 그윽하고 원대하였다. 유달리 강설을 잘 하기에, 배움을 숭상하는 문도들이 오가며 가득 찼다. 그 후 그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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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축법아(竺法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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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아는 하간(河間: 황하 부근) 사람이다. 올곧고 올바르며 법도와 기량이 있었다. 어려서는 외도의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성해서는 불교의 논리에 통달하였다. 그러자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모두 의지하여 가르침을 받고 명을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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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에게 의지한 제자들 모두 세간의 학문을 공부했다. 그러나 불교의 논리는 잘 알지 못하였다. 이에 곧 강법랑(康法朗) 등과 더불어 경전 가운데 나오는 일을 헤아렸다. 이것을 외도의 서적과 짝 맞춰 비교함으로써 이해를 돕는 사례로 삼았다. 이것을 격의(格義)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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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부(毘浮)·담상(曇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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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비부·담상 등도 역시 격의를 말하여 문도들을 가르쳤다. 법아는 풍채가 깨끗하고 시원하였다. 요점의 해설[樞機]에 뛰어나, 외전과 불경을 번갈아가며 강설하였다. 도안(道安)·법태(法汰) 등과 더불어 늘 불경을 펼쳐 해석하되, 의문 나는 것을 모아서 함께 경의 요점을 연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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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고읍(高邑)에 절을 세웠다. 대중 승려가 백여 명에 이르렀으나, 가르쳐 이끄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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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습(曇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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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아의 제자 담습이 스승을 이어받아, 강론하는 말솜씨가 훌륭하였다. 위조(僞趙)의 태자 석선(石宣)의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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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법랑(康法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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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법랑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계율을 절도 있게 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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켰다. 한 번은 경을 읽다가 쌍수(雙樹)·녹원(鹿苑: 鹿野苑)의 부분을 보고는 울적하여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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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과거의 성인이야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어찌하여 성인께서 계셨던 곳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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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맹세코 가이(迦夷: 카필라)로 가서 유적을 우러러보기로 하였다. 곧 같이 공부한 네 사람과 함께 장액(張掖)을 떠나, 서쪽으로 고비 사막을 지났다. 걸어서 사흘이 지나자, 길에는 사람의 자취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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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연히 한 옛 절이 길가에 있는 것을 보았다. 초목이 사람을 덮어 가린,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두 칸의 방이 있었다. 방 가운데 각기 한 사람씩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경을 외우고, 한 사람은 이질(痢疾)을 앓았다. 두 사람의 방이 나란히 있으나 서로 돌보지 않았다. 사방에 똥오줌뿐이어서 온 방안이 냄새나고 더러웠다. 법랑이 그의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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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한 사람은 가는 길이 같아서 불법으로써 친척이 됩니다.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보고서야 어찌 버려두고 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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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랑은 이에 6일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씻고 세탁하며 공양하였다. 7일째가 되자 이 방안 전체가 향화(香華)로 꾸며졌다. 이를 보고는 이윽고 그가 신인(神人)임을 깨달았다. 그가 법랑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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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우리 스승님[和上]의 방입니다. 그 분은 이미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경지를 터득하신 분입니다. 찾아가 문안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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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랑이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그가 법랑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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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정성이 들어맞아 모두가 곧 도에 들어갈 것이오. 멀리 여러 나라로 떠돌아다닐 필요가 없소. 그러한 일은 무익하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도를 수행하여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하오. 다만 법랑 그대는 공업(功業)이 작고 정순하지 못하여 아직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나, 중국[眞丹國]으로 돌아가서는 대법사가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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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네 사람은 다시 더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오로지 정성을 다하여 도를 닦았다. 오직 법랑만은 다시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경론을 찾아 연구하였다. 그 후 중산(中山)으로 돌아왔다. 제자 수백 명이 불법의 강설을 이어나갔다. 후에 돌아가신 곳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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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 606] 쪽 |
손작(孫綽)이 찬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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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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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과 흠집은 숨길 수 없다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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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랑은 환히 빛났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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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빛남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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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공경히 하되 시작은 신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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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함을 추구하되 빛남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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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써 증명을 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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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단단하게 얼 것을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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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亦有言 瑜瑕弗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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朗公冏冏 能韜其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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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終愼始 硏微辯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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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取證 冰堅履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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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소(令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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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랑의 제자 영소는 아버지가 안문(雁門) 사람이다. 성은 여(呂)씨다. 어렸을 때에는 사냥을 즐겼으나, 훗날 발심하여 출가하였다. 법랑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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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배움에 공이 있었다. 특히 선 수행에 뛰어나서, 입정(入定)할 때마다 혹은 며칠씩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유천산(柳泉山)으로 거처를 옮겨 동굴을 뚫고 좌선하였다. 법랑이 세상을 마친 후에는, 나무로 법랑의 상을 조각하여 아침저녁으로 예배하며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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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孫綽)이 『정상론(正像論)』에서 “여소(呂韶)가 중산에서 정신을 집중했다”고 한 것은, 곧 이 사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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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축법승(竺法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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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 606] 쪽 |
축법승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슬기로움으로 훌쩍 뛰어났다. 멀리 비추어 보는 능력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 축법호(竺法護)에게 의지하여 사미가 되었다. 맑고 진실한 뜻과 기개가 있어, 법호가 매우 아름답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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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호의 도가 관중(關中) 지방을 덮자, 재산까지 성대하게 불어났다. 당시 장안의 으뜸가는 집안 출신으로 불법을 받들고자 하는 누군가가, 법호의 도덕을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법호를 찾아가 거짓으로 다급한 사정을 알리고, 돈 20만 냥을 요구하였다. 법승이 당시 열세 살의 나이로 스승의 옆에서 모시다가, 법호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곧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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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和尙]께서는 마음에서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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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돌아간 후에 법승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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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얼굴색을 보아하니 실지로 돈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의 도덕이 어떠한지를 관찰하려고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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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호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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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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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그 손님은 종중 사람 백여 명을 거느리고 법호를 찾아와 계를 받기를 청하였다. 그러면서 돈을 요구한 것을 사과하였다. 이에 스승과 제자의 이름이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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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법승은 서쪽 돈황(燉煌)에 이르러, 절을 세워 배우는 이들을 맞아들였다. 몸을 잊고 도를 위하여 가르치면서 게으르지 않았다. 무릇 이리·승냥이 같이 사나운 족속들의 마음을 바꾸어, 오랑캐 무리들로 하여금 예의를 알게 하였다. 큰 교화가 서쪽 땅에 행해지게 된 것은 법승의 힘이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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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은 『도현론(道賢論)』에서 법승을 왕준충(王濬沖)에 비유해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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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승과 안풍(安豊)은 어려서부터 슬기로운 예지력으로 거울처럼 비추었다. 그러니 비록 승려와 속인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논두렁 밭두렁 같이 서로 비슷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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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이 높은 선비 계옹(季顒)이 그를 위하여 찬과 전기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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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 606] 쪽 |
∙축법행(竺法行)·축법존(竺法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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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승과 같이 공부한 축법행과 축법존이 있다. 그들도 나란히 산중에 깃들어 지조를 지킨 것으로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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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축법잠(竺法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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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잠의 자(字)는 법심(法深)이다. 왕(王)씨로 낭야(瑯琊) 사람이다. 진(晋)나라 승상 무찬군공(武昌郡公) 왕돈(王敦)의 아우이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중주(中州) 유원진(劉元眞)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유원진은 일찍부터 재주와 지혜로서 명성이 있기 때문에 손작이 찬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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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하여 마음을 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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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 한가롭게 머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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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가 체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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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유원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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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아로새길 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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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춤은 어리석은 이를 깨우칠 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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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은 탁 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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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양 밝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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索索虛衿 翳翳閑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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誰其體之 在我劉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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談能彫飾 照足開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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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抱之內 豁爾每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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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잠은 유원진에게 배운 뒤로 경박함과 화려함을 자르고 깎아냈다. 근본을 숭상하고 배움에 힘쓰더니, 미묘한 말로 교화를 일으켜 명성이 서쪽 조정을 적셨다. 그는 풍모와 자태, 용모가 당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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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살에 이르자 『법화경』과 『대품』을 강의하였다. 이미 깊은 이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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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아 올렸을 뿐 아니라 강설마저도 훌륭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풍모를 살피고 도를 음미하는 사람이 항상 5백 명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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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 영가(永嘉) 연간(307~313)의 초기에 난을 피하여 양자강을 건넜다. 중종(中宗) 원제(元帝)·숙조(肅祖) 명제(明帝)·승상 왕무홍(王茂弘)·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 등이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공경하여 벗으로서 공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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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무(建武) 태녕(太寧, 317~325) 연간 중에 법잠은 항상 궁전 안에 나막신을 신고 들어왔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세상 밖의 사람이라 일컬었으니, 그의 덕을 무겁게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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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숙조가 세상을 떠나고 왕무홍·유원규도 죽자, 마침내 자취를 섬산(剡山)에 숨겨 당시의 세상으로부터 피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자취를 뒤쫓아서 도를 묻는 사람들이 이미 다시 산문에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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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잠은 30여 년 동안 강석을 유유자적하였다. 때로는 대승의 법을 펴기도 하고, 때로는 『노자』와 『장자』를 풀기도 하였다. 투신한 제자 모두가 내전·외전에 두루 뛰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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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제(哀帝, 562~563)가 불법을 좋아하고 존중하였다. 자주 두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정성을 다해 모시기를 청하였다. 법잠은 부름의 뜻이 중하다 하여 잠시 궁궐로 나아갔다. 어전에서 『대품경』을 개강하니, 주상과 조정의 선비들 모두가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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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간문제(簡文帝: 司馬煜)가 재상으로 있었다. 조정과 재야에서는 사실상 그를 군주[至德: 至尊을 뜻함]로 여겼다. 법잠은 승려와 속인의 영수로서 선대의 조정에서는 벗으로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그리하여 읍 받는 예와 절 받는 예를 늘상 겸하였다. 간문제가 왕이 되자 경건히 하는 예가 더욱 도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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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잠은 어느 날 간문제의 처소에서 패국공(沛國公) 유담(劉惔)을 만났다. 유담이 조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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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가 무엇 때문에 붉은 문이 있는 궁전에서 노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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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잠이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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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붉은 문이라 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저 오막살이일 뿐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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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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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司空) 하차도(何次道)는 아름다운 덕을 지녔다. 순수하고 소박하여 경전을 독실하게 믿었다. 매양 공경하고 숭상하는 마음이 더해서 스승과 제자로서의 예를 따랐다. 그러더니 자주 초청하여 여러 번 법사를 일으켰다. 법잠은 비록 그들을 따라 다시 동서로 움직였지만, 마음속으로 이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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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나라에 아뢰고 섬주(剡州)의 앙산(仰山)으로 돌아와, 그가 먼저 가졌던 뜻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숲과 언덕을 소요하다가 남은 여생을 마쳤다. 이때 지둔(支遁)이 심부름꾼을 보내, 앙산 옆에 있는 옥주(沃州)의 작은 산을 사서 고요히 머물 곳으로 삼고자 하였다. 법잠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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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려고만 한다면 곧 주겠습니다. 어찌 소유(巢由: 上古時代의 仙人)가 산을 사서 은둔한다는 말을 듣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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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은 뒤에 어떤 고구려(高句麗) 도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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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上座) 축법심은 중주(中州) 유원진의 제자입니다. 체득한 덕이 곧고 우뚝하여 도인과 속인을 모두 다스립니다. 지난날 서울에서 불법의 기강을 유지하여, 나라 전체에서 모두 우러르는 도를 넓히신 뛰어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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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도업이 더욱 깨끗해져서 티끌세상의 더러움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방을 산 속 물가에 꾸며 덕을 닦으면서 한가로이 지내자 생각하셨습니다. 지금은 섬현(剡縣)의 앙산에 계십니다. 같이 노니는 이들과 함께 도의를 논설하십니다. 조용히 사는 삶이 하도 깨끗하여,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들 영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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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영강(寧康) 2년(374)에 앙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9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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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종(烈宗) 효무제(孝武帝)가 조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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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심 법사는 진리를 깨닫고 마음을 멀리 비우며, 거울 같은 풍모로서 맑고 곧았다. 재상의 영화를 버리고 물들인 옷의 검소함을 이어받아, 인간 세상 밖의 산에 살면서 독실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바야흐로 그가 펼친 도에 힘입어 창생을 구제하려 하였다. 갑자기 돌아가시니 가슴이 아프다. 돈 10만 냥을 부조한다. 급히 말을 달려 보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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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손작은 법잠을 유백륜(劉伯倫)에 비유해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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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잠은 도의 소양이 깊고 무거우며 원대한 기량(器量)이 있었다. 유령(劉伶, 유백륜)은 방탕하게 뜻을 멋대로 하여 우주를 작다고 여겼다. 비록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사는 일에서는 유령이 미치지 못하지만, 넓고 큰 바탕의 면에서는 같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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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법우(竺法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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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앙산에는 또한 축법우가 있었다. 의지가 굳세고 행동이 바르며 뭇 경전에 널리 뛰어났다. 어느 날 법잠에게서 아비담(阿毘曇)을 받았다. 하룻밤 만에 곧 이를 외웠다. 이에 법잠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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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눈을 거친 것을 외우다니, 옛날 사람들에게도 칭찬받을 일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다시 이곳에서 불법을 일으키신다면, 반드시 너를 5백 나한의 하나로 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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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살 때 곧 강설을 할 수 있었다. 그 후 섬현성 남쪽에 대사(臺寺)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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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법온(竺法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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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법온은 깨달음과 슬기로운 이해력으로 그윽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다.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더욱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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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법식(康法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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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법식도 역시 의학(義學)의 공부가 있었다. 또한 초서(草書)와 예서로 이름이 알려졌다. 어느 날 강흔(康昕)을 만났다. 강흔은 스스로 서예에서는 법식을 능가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법식과 강흔은 각기 왕우군(王右軍: 王羲之)의 초서를 썼다. 옆 사람이 훔쳐서 돈벌이를 하려 했다. 그러나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또 많은 경을 베껴 썼는데, 매우 중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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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법제(竺法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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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법제는 어릴 때부터 글 짓는 재주가 있어 『고일사문전(高逸沙門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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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 무릇 이러한 여러 사람들 모두가 법잠의 제자들이다. 손작은 이들을 위하여 나란히 찬을 지었으나, 다시 갖추어 적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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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지둔(支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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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의 자는 도림(道林)이다. 관(關)씨로 진류(陳留) 사람이다. 혹은 하동(河東)의 임려(林慮) 사람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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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신통한 이치가 있고 총명함이 몹시 빼어났다. 처음 서울에 이르자 태원왕(太原王) 사마몽(司馬濛)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겨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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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경지에 이른 공부는 재상감으로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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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陳郡)의 은융(殷融)이 일찍이 위개(衛玠)와 교류하였다. 그러면서 위개의 정신의 빼어남은 후진으로서 아무도 그를 이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지둔을 만나자 다시 위개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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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대대로 부처를 섬겼으며, 어려서부터 비상한 이치를 깨달았다. 여항산(餘杭山)에 은거하여 도행품(道行品)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혜인경(慧印經)』을 자세히 공부하였다. 우뚝하니 홀로 빼어나 스스로 하늘의 뜻을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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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에 출가하여 강의하는 곳에 이를 때마다 근본적인 가르침을 잘 드러냈다. 그러나 문장 구절을 간혹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글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거칠다고 평가받았다. 사안(謝安)이 이 소식을 듣고 훌륭하게 여겨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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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곧 구방인(九方堙)이 말의 관상을 보는 일과 같다. 병들어 피로한 말은 버리되, 그 중에서 뛰어나고 빠른 말을 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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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흡(王洽)·유회(劉恢)·은호(殷浩)·허순(許詢)·극초(郄超)·손작(孫綽)·환언표(桓彦表)·왕경인(王敬仁)·하차도(何次道)·왕문도(王文度)·사장하(謝長遐)·원언백(袁彦伯) 등은 당대의 이름난 사람들이다. 모두가 속세를 벗어난 허물없는 사귐을 나눈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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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이 백마사(白馬寺)에 있을 때이다. 유계지(劉系之) 등과 『장자』의 「소요편(逍遙篇)」을 담론하였다. 어느 날 유계지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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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성품에 맞게 하는 것이 소요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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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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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걸(桀)과 도척(盜跖)은 목숨을 잔혹하게 해치는 성품이었습니다. 만약 성품에 맞게 하는 것이 소요라면, 저들 또한 소요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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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물러나서 「소요편」에 주석을 달았다. 이 때에 오랫동안 공부한 유생들이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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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오(吳: 江蘇省)로 돌아와 지산사(支山寺)를 세웠다. 만년에 섬현(剡縣)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사안(謝安)이 오흥(吳興)의 태수(太守)가 되어 지둔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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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그리워하는 날들이 쌓이고 쌓여, 때를 헤아리고 마음을 기울여서 기다렸습니다. 그렇거늘 섬현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다스리려 하신다니 몹시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인생이란 잠시 깃드는 것일 뿐인지라, 근자엔 풍류를 마음껏 즐기는 일조차 거의 다한 듯합니다. 종일토록 근심스럽기만 하고, 하는 일마다 실망하여 탄식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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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기다림은 그대가 오시어 툭 터놓고 이야기하여 시름을 푸는 일입니다. 하루가 천년이 흐르는 것 같군요. 이곳은 대부분 산마을인지라, 한가하고 고요하며 병을 치료할 만한 곳입니다. 일이야 어디라고 섬현과 다르겠습니까만은 의약품에서 같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런저런 인연을 생각해서, 쌓이고 쌓인 저의 그리는 정을 이루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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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는 당시 회계(會稽) 태수로 있었다. 평소 지둔의 명성을 들었다. 그러나 아직 믿지 않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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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 지나가는 기운이니, 무어 말할게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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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지둔이 섬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우군(于郡)을 경유하였다. 이 때 왕희지는 짐짓 지둔을 찾아가 그의 감화력을 살펴보았다. 지둔에게 이르자 왕희지는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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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편」에 대해 들려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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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은 곧 수천 어구의 글을 지어 새로운 이치를 펴서 드러내었다. 글 짓는 솜씨가 놀랍고 절묘하였다. 왕희지는 마침내 옷깃을 열고 허리띠를 풀었다. 지둔에게 정신이 팔려 돌아가기를 잊었으나, 그만 둘 수 없었다. 이어 영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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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嘉寺)에 주석하기를 청하니, 가까이에 두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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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되어 다시 자취를 섬산으로 돌려 옥주(沃州)의 작은 잿마루에 절을 세워 도를 행하였다. 백여 명에 달하는 대중 승려가 늘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다. 때로 혹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지둔은 이에 좌우명을 지어 이들에게 힘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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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할지어다, 부지런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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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도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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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쉬고 머뭇거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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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함을 약하게 하여 잃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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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삼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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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길이 시달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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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의 고달픔은 밖에서 모여들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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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마음은 안으로만 치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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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각오로 내달려 목마르게 흠모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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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아득해도 피로조차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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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 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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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이슬방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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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몸도 나의 것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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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베푼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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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을 품은 달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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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이 반드시 위태로운 것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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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게 맑은 거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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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참선의 연못에서 씻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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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하여 밝은 금계를 지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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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게 계율을 즐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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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한 도리에 마음을 편안히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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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이 없는 경지에 뜻을 높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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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가림을 가라앉혀 맑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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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가지 허물을 무르녹여 단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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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요소를 이룬 우리네 몸은 공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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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사지도 텅 빈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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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고 하여 손가락을 비유한 것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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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되 떠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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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깨달음을 이미 베풀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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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더 그 앎을 그윽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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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따라 그대로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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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더불어 옮겨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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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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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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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도탑게 한 이가 깨달음의 어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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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처럼 되도록 뜻을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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勤之勤之 至道非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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奚爲淹滯 弱喪神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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茫茫三界 眇眇長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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煩勞外湊 冥心內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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殉赴欽渴 緬邈忘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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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一世 涓若露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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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身非我 云云誰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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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 606] 쪽 |
達人懷德 知安必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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寂寥淸擧 濯累禪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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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守明禁 雅翫玄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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綏心神道 抗志無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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寮朗三蔽 融冶六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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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同五陰 豁虛四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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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指喩指 絶而莫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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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覺旣陳 又玄其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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婉轉平任 與物推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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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此以往 勿思勿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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敦之覺父 志在嬰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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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여론은 지둔의 재능이 세상을 경영하는 백성을 구제할 만한데도, 자신을 깨끗이 하려 세속에서 벗어나, 자신과 함께 남을 구제하는 일을 겸하는 겸인(兼人)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지둔이 이에 『석몽론(釋矇論)』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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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는 석성산(石城山)으로 거처를 옮겨 다시 서광사(棲光寺)를 세웠다. 산문(山門)에서 좌선[宴坐]하여 마음을 선의 뜻에서 노닐고, 나무열매를 먹고 개울물을 마셨다. 뜻은 더 이상의 태어남이 없는 경지에서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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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안반(安般: 數息)과 4선(禪)에 관한 여러 경전과 『즉색유현론(卽色遊玄論)』·『성불변지론(聖不辯知論)』·『도행지귀(道行旨歸)』·『학도계(學道誡)』 등의 책에 주석을 달았다. 이는 마명(馬鳴)의 발자취를 따른 것이자, 용수(龍樹)의 그림자를 밟아 오른 것이다. 이치가 법의 근본과 호응하여 실상과 어긋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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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는 산음(山陰)으로 나와서 『유마경』을 강의하였다. 지둔이 법사가 되고 허순(許詢)이 도강(都講)이 되었다. 지둔이 한 논리를 화통하면, 대중들은 허순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허순이 한 질문을 마련하면, 대중들은 또한 지둔이 회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강론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논리는 다하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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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 606] 쪽 |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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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법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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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하게 지둔의 종지를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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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돌아가 스스로 설명하기를 두세 번 하노라면, 도리어 문득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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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애제(哀帝)가 즉위하였다. 그러자 자주 두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므로 서울로 나갔다.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면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을 강의하였다. 승려와 속인이 함께 공경하고 숭배하였다. 조정과 재야에서도 기뻐 감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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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왕(太原王) 사마몽(司馬濛)은 일찍부터 정밀한 논리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의 재주 넘친 글을 가려내어 수백 어구의 글을 만들고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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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이 겨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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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을 찾아갔다. 지둔이 그것을 보고 천천히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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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당신과 헤어진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말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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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몽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서 곧 감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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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승려의 왕이다. 어찌 내가 겨룰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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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초(郄超)가 사안(謝安)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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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의 말솜씨를 혜중산(嵇中散)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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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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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중산은 노력해야 겨우 쫓아갈 수 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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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초가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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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殷浩)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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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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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이어지는 논변에서는 아마도 은호가 지둔을 누르겠지. 그렇지만 솟구쳐 뛰어넘어 곧 바로 연원에 이르려는 점에서는, 은호가 참으로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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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극초는 벗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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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 법사는 신령한 이치에 뛰어나고 그윽한 경지에 빼어나서 홀로 깨달은 분일세. 참으로 수백 년 이래의 불법을 이어 밝혀, 진리를 끊어지지 않게 한 불법의 제왕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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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이 서울에 오랫동안 머물러 3년을 넘어서려 하자, 이에 동산(東山)으로 돌아갔다. 황제에게 글을 올려 하직 인사를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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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이 머리를 조아려 아뢰옵니다. 감히 재능 없는 사람이 바깥세상의 스승이 되려는 바람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후진들을 채찍질하지 못하여, 신령한 다스림에 허물만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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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문(沙門)의 길[義]에서의 법이란 부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순수함을 조각하면 질박함에 어긋나므로, 욕망을 끊어 종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텅 비어 그윽한 거리에서 노닐며, 안으로는 성인의 법칙을 지켜서 5계(戒)의 곧음을 가슴에 달고, 밖으로는 임금님의 다스림을 돕습니다. 소리 없는 음악으로 조화롭게 하되,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화음을 이루어서, 자애로운 효도를 도탑게 하여, 꿈틀거리는 중생들에게 상해가 없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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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지며 구휼하는 애절한 마음을 머금고, 길이 어질지 못한 일을 슬퍼합니다. 조짐이 나타나지 않는 순리(順理)를 잡고, 멀리 숙명(宿命)의 재앙을 막습니다. 더 이상의 자리가 없는 경지의 절개를 끌어안고, 항(亢: 極上)의 땅을 밟아도 후회하지 않습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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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어진 임금은 왕의 자리의 무거움에 나아가서 높은 절개를 공경하고, 뛰어난 법도로 편안히 합니다. 순리의 마음을 더듬어서 형식적인 공경을 생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어받은 시대를 더욱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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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옵선 하늘이 성스러운 덕을 모아주신 데다, 우아하고 고상하여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도리를 신령한 규범에서 노닐어 해가 기울도록 돌아갈 것을 잊습니다. 이른바 새벽의 종과 북소리가 지극하듯이, 명성이 천하를 떨치어 맑은 교화의 바람이 이미 높으므로, 몹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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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역(周易)』 「건괘(乾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 항룡유회(亢龍有悔)란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를 역(逆)으로 이항무회(履亢無悔)라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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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러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수명을 하늘땅과 같이 하여 널리 지극한 교화를 떨치십시오. 진부한 믿음의 요망하고 거짓됨을 제거하여, 공자를 위해 기도한 드넓은 논의를 찾으십시오. 좁은 길에서 진흙 묻히는 일을 끊어, 평탄한 길에서 크나큰 말고삐를 떨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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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시면 태산은 계씨의 산신 제사로 더렵혀지지 않고서도, 하나(도)를 얻어서 신령스러움을 이룹니다. 왕자는 둥근 언덕이 아닌 곳에서 하늘 제사를 지내지 않고서도, 하나(도)를 얻어서 길이 올곧습니다.4) 만약 올곧음과 신령스러움이 각각 하나(도)로써 사람(왕자)과 신(태산)이 서로를 잊는다면, 임금은 임금다워서 아래로 몸소 거동하는 일이 없으려니와, 신은 신다워서 주술로써 신령스러움을 더하지 않습니다. 왕자와 신의 그윽한 덕이 서로를 덮어주어 백성들이 그윽한 돌봄에 힘입고, 넓고 넓은 우주가 상서로운 집을 이룬다면, 크고도 큰 우리나라가 천도를 이루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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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함이 없어야 만물이 근본으로 돌아가고,5) 크나큰 형상을 잡아야 천하가 저절로 찾아듭니다.6) 나라 법에는 형벌과 살육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습니다. 만약 살려주되 그것이 베풂 때문이 아니라면, 상 받는 사람은 스스로 얻습니다. 만약 죽이되 그것이 노여움 때문이 아니라면, 벌받는 사람은 스스로 받을 것입니다. 관청을 넓혀서 귀신의 생각을 꺼려하고, 인사권을 공개하여 그윽한 도량을 지극히 하십시오. 그러신다면, 공자의 이른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계절이 흘러가는구나!(天何言哉 四時行焉)’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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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도는 동산(東山)의 들에 숨어살며 세상의 영화와 달리하여, 긴 언덕의 푸성귀를 먹고 맑게 흐르는 계곡물로 양치질하며 지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세상을 떠나려 하여, 황제의 섬돌 엿보기를 끊었사옵니다. 모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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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로부터 하나(도)를 얻은 것이 있더라.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고, 신은 하나를 얻어서 신령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가득하고,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낳고, 제후나 왕은 하나를 얻어서 올곧게 하니, 이러한 모든 것이 이르는 곳은 하나이다. (『노자』 39장) |
5) 도는 늘 하는 것이어서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다. 제후나 왕이 이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절로 변화하리라. (『노자』 37장) |
6) 크나큰 형상을 잡으면 천하가 마음껏 오가리니, 천하가 마음껏 오가더라도 해가 안 되어 크게 평안하다. (『노자』 35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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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천자의 빛이 곡진하게 비추어, 외람되이 오막살이집까지 미쳐, 자주 밝으신 조서를 받들어 서울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어찌 할 수도 없어 몸둘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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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에 이른 이래 누차 이끌어주심에 힘입었습니다. 빈객의 예로써 넉넉하게 대하시고, 미묘한 말씀으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매양 부끄럽게도 재능이 막힌 곳을 뚫지 못하고, 논리는 새로움을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폐하의 그윽한 계획에 대답하여 그 뜻을 널리 백성에게 알리거나, 보고 들은 것을 성실하게 거짓 없이 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옆에서 모시면서 조심하고 삼갔으나, 흐르는 땀이 자리를 적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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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상산의 네 늙은이[商山四皓]는 한 고조 유방에게 나아갔고, 단간목(段干木)은 위문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물러가고 나아감에 알맞은 때가 있었으니, 묵묵히 말하지 않더라도 임금과 신하 간에 서로 뜻이 어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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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덕은 옛 분들과 다르고 동정도 진심에서 어긋나, 궁궐에 온통 정신을 기울여서 황제를 선동합니다. 근거 아닌 것으로 지쳐버리니, 어떻게 할 만한 정치[有爲之治]를 하겠습니까? ‘아, 세월이 빠르게 흘러감이 이와 같구나!’ 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하물며 다시 뜻을 같이 한 동지들이 한가롭게 살면서 멀고 넓게 빠짐없이 익히니, 고개를 빼어들어 동쪽을 돌아보며 그리워함에, 누군들 품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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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러 원하옵건대 이제 폐하께옵서 저를 내쳐 놓아주시는 은택을 내려주십시오. 숲으로 돌아가 새답게 새를 기르게 하여 주신다면, 그 입은 은혜가 두터울 것입니다. 삼가 봉하지 않은 글로써 아뢰어, 어리석고 좁은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양식을 싸서 꾸려 놓고, 길을 바라보며 엎드려 자애하신 조서(詔書)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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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를 내려 곧 이를 허락하여 노자를 지급하고, 사신을 보내서 일마다 풍성한 후대를 하였다. 당대의 이름난 인사를 모두가 떠나는 길에서 송별연을 베풀어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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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자숙(蔡子叔)이 먼저 와서 지둔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사안석(謝安石)은 뒤에 이르렀다. 채자숙이 잠깐 일어난 사이에 사안석이 곧 자리를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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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앉았다. 채자숙이 돌아와서는 요와 함께 사안석을 들어올려 땅바닥에 팽개쳤다. 그러나 사안석은 개의하지 않았다. 당시 명현들이 그를 사모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윽고 섬산(剡山)에서 자취를 거두어 숲 우거진 물가에서 목숨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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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한번은 지둔에게 말을 보내 주었다. 지둔이 이를 거두어 길렀다. 당시 혹 이 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지둔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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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뛰어나고 빠름을 사랑하여 잠시 기를 따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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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어떤 사람이 학을 선물로 보내 왔다. 이 때 지둔이 학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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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생물이다. 그렇거늘 어찌 사람들의 귀와 눈의 노리개가 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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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마침내 이를 놓아주었다. 지둔이 어릴 때의 일이다. 스승과 함께 사물의 종류를 논하다가, 계란은 날로 먹어도 살생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스승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어 스승이 죽은 뒤, 홀연히 스승의 형상이 나타나서 달걀을 땅에 집어던졌다. 껍질이 깨지면서 병아리가 걸어 나왔다가 잠깐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지둔은 곧 깨닫고, 이로 말미암아 몸을 마치도록 푸성귀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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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은 전에 여요(餘姚)의 오산(塢山)을 지나다 그곳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오히려 오중(塢中)으로 되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어보자 그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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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안(謝安)이 예전에 자주 찾아와 만나면 곧 열흘씩 이곳에서 보냈소. 지금 감정에 부딪쳐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마다 그 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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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병이 심해지자 오중으로 돌아갔다. 진(晋)의 태화 원년(366) 윤4월 4일에 머물던 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53세이다. 곧 오중(塢中)에 묻었다. 아직 그 무덤이 남아 있다. 혹 어떤 사람은 섬주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아직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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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하여 극초(郄超)는 서전(序傳)을 지었고, 원굉(袁宏)은 명찬(銘贊)을 지었으며, 주담보(周曇寶)는 조문을 지었다. 손작의 『도현론(道賢論)』에는 지둔을 바로 상자기(向子期)에 견주어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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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과 상수(向秀)는 장자와 노자를 숭상했다. 두 사람의 시대는 다르나 현담을 즐긴 기풍은 같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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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유도론(喩道論)』에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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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은 의식이 맑고 바탕이 순하여 남을 상대하지 않았다. 현묘한 도가 깊고 성하여 정신과 더불어 맡은 바를 다하였다. 이것이 유학에 힘쓴 먼 곳의 무리들이 근본에 돌아가게 된 이유이자, 유유자적한 도가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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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덕이 높은 선비인 대규(戴逵)가 길을 가다가 지둔의 묘 앞을 지나가다가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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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스런 소리가 아직 멀어지지 않았거늘 아름드리 나무가 이미 무성하구나. 바라건대 신통한 이치가 면면히 이어져서, 기운과 함께 다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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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법건(支法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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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과 함께 공부한 법건(法虔)은 이론에 정밀하게 뛰어나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둔보다 먼저 죽었다. 지둔이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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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장석(匠石)7)은 자귀질을 영인(郢人)에게서 그만두었고, 아생(牙生: 伯牙)은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 자기를 미루어서 남에게 미친다는 것은 참으로 허튼 것이 아니다. 보배롭게 사귄 벗이 이미 사라졌구나. 말을 해도 완상해 줄 사람이 없으니, 마음속에 답답한 것이 맺혀 나도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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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절오장(切悟章)을 짓다가 죽음에 즈음하여 완성하였다. 붓을 떨어뜨리면서 세상을 마쳤다. 무릇 지둔이 지은 시문은 열 권으로 모아져 세간에 성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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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법앙(竺法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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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석운부(匠石運斧)의 고사를 나은 유명한 장인이다. 그는 자귀로 물건을 쪼는 데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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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쪽 땅에 또 축법앙이 있었다. 지혜로운 이해력으로 세상에 알려져서 왕탄(王坦)이 소중히 여겼다. 죽은 뒤에 오히려 형상을 드러내어 왕탄을 찾아가 행실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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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우법란(于法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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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법란은 고양(高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지조가 있었다. 열다섯 살에 출가하였다. 곧 부지런하게 정진하여 경전을 연구하고 외웠다. 밤낮으로 법을 구하고 도를 물음에 있어서 반드시 대중보다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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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이르자 풍채가 빼어나게 뛰어났다. 도를 3하(河)8)에 떨쳐서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유포되었다. 성품이 산천을 좋아하여 대부분 산 동굴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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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철, 산에 있을 때 얼음과 눈보라가 매우 사나웠다. 이 때 호랑이 한 마리가 법란의 방에 들어왔으나, 법란은 얼굴빛에 거부감이 없었다. 호랑이도 매우 순종하더니, 이튿날 눈이 그치자 곧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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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산중의 신(神)들도 항상 찾아와 법을 받았다. 그의 덕이 정령(精靈)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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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강남의 산수(山水)로는 섬현(剡縣)이 가장 기이하다는 말을 들었다. 곧 천천히 동구(東甌)를 걸어서 멀리 우승산(嶀嵊山)이 바라보이는 석성산(石城山) 발치에 머물렀다. 지금의 원화사(元華寺)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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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은 그의 감화력을 유원규(庾元規)에 비유하였다. 손작(孫綽)의 『도현론(道賢論)』에는 그를 완사종(阮嗣宗)9)과 비교하여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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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란이 남긴 묘한 자취는 매우 고상하여 거의 지인(至人)10)의 무리이다. 완보병(阮步兵)은 홀로 오만하여 무리 짓지 않았으니, 또한 법란과 짝한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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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하동·하남·하북의 세 군(郡)이다. 즉 황하 유역을 일컫는다. |
9) 완적(阮籍),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 벼슬이 보병교위(步兵校尉)였기 때문에 완보병(阮步兵)이라고도 함. |
10) 만약 천지 본연의 바름을 타고 대자연의 순리를 부려 무궁한 지경에서 노닌다면, 그런 이가 대체 어디에 기댈 게 있으랴. 그러므로 말하는 것이다. “지인(至人)은 자기를 고집함이 없고, 신인(神人)은 공을 드러냄이 없고, 성인(聖人)은 이름을 떨침이 없다.”(『장자』 「소요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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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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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현에 머문 지 얼마 안 되어 상심하여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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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이 비록 일어났지만 불경의 도리에 빠진 것이 많구나. 만약 한 번만이라도 원만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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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멀리 서역으로 가서 남다른 가르침을 구하려고 하였다. 교주(交州)에 이르러 병이 들어 상림(象林)에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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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支遁)이 뒤쫓아가서 그의 상(像)을 세우고 찬(贊)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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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란은 세속을 초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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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묘한 종지[玄旨]를 빠짐없이 체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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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산택에 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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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외뿔소를 두루 길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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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氏超世 綜體玄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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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遁山澤 馴洽虎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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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전에 이르기를, “법란도 감응하여 마른 샘에서 물로 양치질하였다. 그 일은 법호(法護)와 같다”라 하였다. 그러나 아직 자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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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법흥(竺法興)·지법연(支法淵)·우법도(于法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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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또 축법흥·지법연·우법도 등이 법란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덕이 비슷하였다. 법흥은 견문이 넓은 것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법연은 빛나는 재주로 칭송되며, 법도는 논리의 해석으로 명성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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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우법개(于法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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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개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우법란을 섬겨 제자가 되었다. 깊은 생각이 외롭게 일어나 고유한 견해를 말로 드러냈다. 『방광반야경』과 『법화경』에 빼어났다. 또한 기바(耆婆: 醫神)를 이어받아 오묘하게 의술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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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걸식을 하다가 한 집에 투숙하였다. 주인의 부인이 자리에 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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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위급하였다. 온갖 치료로도 효험이 없어 온 집안이 당황하고 어지러웠다. 법개가 이르기를 “이 병은 쉽게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바로 양(羊)을 죽여서 잡신(雜神)에게 제사를 올리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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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개가 주인을 시켜 먼저 양고기를 조금 가지고 국을 끓여서 병자에게 주었다. 그런 다음에 그 기운을 타고서 침을 놓았다. 잠깐 사이에 양의 얇은 꺼풀에 아기가 쌓여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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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평 5년(361)에는 효종(孝宗)황제가 병에 걸렸다. 법개가 맥을 짚었다. 그는 황제가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다시는 들어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강헌(康獻) 황후가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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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께서 몸이 조금 좋지 않아 법개를 불러 맥을 짚어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다만 문에 이르러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온갖 말로 기피하는구나. 마땅히 정위(廷尉)에게 넘겨 벌을 내리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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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황제가 죽어서 죄를 면하였다. 섬현(剡縣)의 석성산으로 돌아왔다. 스승의 뒤를 이어 원화사(元華寺)를 수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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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백산(白山)의 영취사(靈鷲寺)로 옮겨 늘 지도림(支道林: 支遁)과 색(色)과 공(空)의 의미를 다투었다. 이들의 논쟁에 여강(廬江)의 하묵(何黙)이 법개의 비판을 밝게 펼치고, 고평(高平)의 극초(郄超)가 도림의 해답을 잘 풀었다. 나란히 세간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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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법위(于法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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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개의 제자 법위(法威)는 맑고 총명하여 핵심을 찌르는 말솜씨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손작이 그를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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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에서는 한백(翰白)11)을 찬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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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詩傳)』에서는 빈조(蘋藻: 문장)를 찬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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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고 날쌘 얼룩말이 마당에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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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가 멈춘 때의 향기가 나는 듯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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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백마한여(白馬翰如). 말이 아주 희고 날쌔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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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위(法威: 于威)의 밝은 깨우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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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하여 멀리서도 검토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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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그 명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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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함에 부끄러움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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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曰翰白 詩美蘋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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斑如在場 芬若停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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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威明發 介然遐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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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潔其名 無愧懷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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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개가 어느 날 법위를 시켜, 서울을 벗어나 지둔이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 道行經)』을 강론하는 산음(山陰)을 지나가게 하였다. 법개가 법위에게 일러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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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의 강의는 네가 그곳에 이를 무렵에 어느 품(品)에 이를 것이다. 내가 가르쳐 준 말로 수십 번에 걸쳐 공박하고 논란하여라. 이 품에 있는 것은 예전에도 통하기 어려웠던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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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위가 그 고을에 이르자 바로 지둔의 강의를 만났다. 과연 법개의 말과 같았다. 여러 번 질의와 응답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지둔이 굴복하였다. 지둔은 이로 인해 성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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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얼마만큼 반복해야 만족하겠는가?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서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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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동산(東山)의 속담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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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없는 기량의 법심(法深: 竺法灒), 독창적 생각의 우법개(于法開), 절륜한 말솜씨의 도림(道林: 支遁), 놀라운 기억력의 식스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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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제(哀帝) 때에 여러 번 부름을 받았다. 마침내 서울로 나가서 『방광반야경』을 강의하였다. 모든 옛 불경 번역[舊學]에서 품었던 의문들이 그로 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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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승전』 전체를 살펴보아도 식으로 끝나는 법명을 가진 승려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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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풀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의를 마치고 동산으로 하직하여 돌아왔다. 황제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정중하게 돈과 비단 및 가마와 겨울·여름 옷들을 선물로 보냈다. 사안(謝安)과 왕문도(王文度) 등도 모두 좋은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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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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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께서는 덕이 높고 밝으며 굳세고 대범하십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의술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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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개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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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육바라밀을 밝혀 네 가지 마구니의 병을 제거하고, 아홉 가지 조짐을 조리하여 풍한(風寒)의 병을 치료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합니다. 그러니 또한 괜찮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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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에 산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손작이 그를 가리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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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 있는 말솜씨로 종횡하고, 몇 가지 술법으로 널리 가르침을 편 것은, 법개공에게 달려 있던 일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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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우도수(于道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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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는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가 그를 양육하였다. 도수는 효도와 공경으로 정성을 다하여, 마치 친어머니를 받들듯이 하였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법란(法蘭)을 섬기고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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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이 고명하여 내외의 전적을 해박하게 열람하였다. 의방과 약업[方藥]에 훌륭하며 서찰(書札)을 아름답게 썼다. 다른 풍속들을 훤하게 외우고, 더욱이 담론에 솜씨가 있었다. 법호가 항상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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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는 고상하고 간결하며 우아하고 소박하여, 옛 어진 분들[고인]의 기풍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야흐로 불법의 대들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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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법란과 더불어 양자강을 건너니, 사경서(謝慶緖)가 크게 미루어 중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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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이 산과 시내를 좋아하여 동쪽에 있을 때, 대부분의 이름난 산을 노닐어 밟았다. 사람됨이 비방과 칭송에 개의하지 않으며, 세속과 가까이 할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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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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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법란을 따라 서역(西域)으로 가다가 교지(交趾)에서 병에 걸려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가 3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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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초(郄超)가 그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지둔이 비명(碑銘)을 지어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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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하고 영명한 상인(上人)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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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뛰어나고 이론은 맑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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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바탕은 옥같이 아름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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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스런 말씀은 난초처럼 향기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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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英上人 識通理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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朗質玉瑩 德音蘭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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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은 도수를 완함(阮咸)과 비교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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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함은 여러 번 벼슬을 한 허물이 있고, 도수는 맑고 투명하다는 명성이 있습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짝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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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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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자취에서는 우묵한 구덩이와 높은 땅으로 비교되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고상한 기풍에서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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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론(喩道論)』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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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 낙양에 축법행이 있다. 담론자들은 그를 악령(樂令)에 견준다. 강남에 우도수가 있다. 알만한 이들은 그를 뛰어난 부류로 상대한다. 모두가 당시에 함께 보고들은 것으로, 동료들이 사사로이 칭찬한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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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축법숭(竺法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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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숭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도에 들어와 계율로써 절도를 지켜 칭찬을 받았다. 게다가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뜻을 경전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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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에 두텁게 두었다. 더욱이 법화 일승의 가르침[法華一敎]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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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상주(湘州)의 녹산(麓山)을 노닐 때에, 산의 정령[山精]이 부인으로 나타났다. 법숭을 찾아와 수계(受戒)를 청하고는, 머물던 산을 희사하여 절로 사용하게 하였다. 법숭이 머물러 조금 지나자, 교화가 상주 땅을 두루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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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섬현(剡縣)의 갈현산(葛峴山)으로 돌아왔다. 초가집 암자에서 개울물을 마시며, 선정(禪定)의 지혜로 기쁨을 취하였다. 동구(東甌)의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와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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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魯國)의 은둔하는 선비 공순지(孔淳之)와 만나, 해가 다하도록 즐거이 노닐었다. 문득 이틀 밤을 묵으면 다시 돌아갈 것을 잊었다. 마음을 열어 몰록 들어맞으면 스스로 마음에 꼭 맞는 사귐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법숭은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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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인간 세상 밖으로 멀리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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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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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을 기울여 머리를 맞댈 벗을 만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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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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緬想人外 三十餘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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傾蓋于茲 不覺老之將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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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공순지와 이별하여 떠돌았다. 법숭이 시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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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지기(浩然之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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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마음과 눈에 남아 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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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의 선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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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더니 돌아오지 않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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皓然之氣 猶在心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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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林之士 往而不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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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이와 같은 사람(공순지)을 일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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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숭은 후에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법화의소(法華義疏)』 네 권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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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도보(釋道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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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섬현의 동쪽 앙산에 석도보가 있었다. 성은 왕(王)씨이며, 낭야 사람이다. 진(晋)의 재상인 왕도(王導)의 아우이다. 어린 나이에 불법을 믿고 깨달아, 세상을 피해서 영화를 마다하였다. 친구들이 충고하며 말렸으나 제지할 수 없었다. 향기로운 탕에서 목욕하고, 곧 나아가 머리카락을 깎으려 하였다. 이 때 시를 지어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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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리의 강물이 처음에는 술잔에 넘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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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물에서 시작된 것임을 어찌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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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그는 배움의 행실로 세상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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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知萬里水 初發濫觴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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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以學行顯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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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축법의(竺法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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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는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열세 살 때 법심(法深)을 만나 문득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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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음과 이로움[仁利]은 군자가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공자님께서는 무슨 까닭에 거의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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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심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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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서 잘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거의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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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심은 그가 어리지만 뛰어나게 총명한 것을 보고 출가하기를 권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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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불문에 뜻을 깃들여 법심으로부터 배움을 받았다. 많은 경전을 섭렵하였다. 특히 『법화경』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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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법심을 하직하여 서울을 떠나 다시 크게 강석을 열었다. 왕도(王導)와 공부(孔敷) 등도 모두 가르침을 따라 벗으로서 공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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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이르러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시영(始寧)의 보산(保山)에서 쉬었다. 수업하는 제자가 항상 백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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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咸安) 2년(372)에 이르러 문득 심기(心氣)에 질병을 느끼자, 항상 생각을 관세음보살에 두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씻어주었다. 꿈을 깨니 곧 병이 나았다. 부량(傅亮)은 늘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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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가 법의와 교류하시던 곳에서는, 매양 관세음보살의 신령한 이적을 설법하는 것을 들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숙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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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영강(寧康) 3년(375) 효무(孝武)황제가 사신을 보내, 오시기를 청하였다. 서울로 나가 강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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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태원(太元) 5년(380) 서울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4세이다. 이에 10만 냥으로 신정강(新亭崗)을 사서 묘지로 삼고, 3층의 탑을 세웠다. 법의의 제자인 담상(曇爽)이 묘소에 절을 세워 신정정사(新亭精舍)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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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송(宋: 南北朝 때의 前宋) 효무제(孝武帝, 454~465)가 남쪽으로 내려와 간흉을 토벌하였다. 황제의 깃발을 이곳에 멈추고서 이 절을 임시 궁전으로 삼았다. 효무제가 제왕의 자리를 선양받아 등극하자, 다시 선당(禪堂)에 행차하여 이곳을 개척하였다. 절 이름을 중흥사(中興寺)로 고쳤다. 그런 까닭에 원가(元嘉, 424~452) 말엽의 동요에 이르기를, “전당(錢塘)에서 천자가 나왔다”고 한 것은 곧 이 선당을 가리킨 말이다. 그런 까닭에 중흥사의 선방에는 아직도 용비전(龍飛殿)이 있다. 지금의 천안사(天安寺)가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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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축승도(竺僧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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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도의 성은 왕(王)씨로 이름은 희(晞)이다. 자는 현종(玄宗)이고 동완(東莞) 사람이다. 비록 어릴 때는 매우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자랐으나, 타고난 자태가 빼어났다. 열여섯 살이 되자 정신이 시원하고 빼어나서 남다르게 뛰어났다.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여 고을과 이웃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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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홀로 어머니와 살면서 효성으로 섬기고 예를 다하였다. 같은 고을의 양덕신(楊德愼)의 딸에게 구혼하였다. 양덕신의 딸 역시 양반집의 규수로 이름은 소화(苕華)라 하였다. 용모가 단정하고 또한 고전공부도 잘하였다. 승도와 나이가 같았으므로 구혼한 날에 곧 서로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미처 예식을 치루기 전에 소화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 또한 죽고, 승도의 어머니 역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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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승도는 마침내 세상의 무상함을 보고, 문득 느끼어 깨달은 바 있어, 곧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였다. 이름을 승도라 바꾸고서, 속세 밖으로 자취를 옮겨 땅을 피해 유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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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소화는 부모상을 마치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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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좇는 세 가지 길[三從之義]에서 홀로 서는 도리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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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승도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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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의 터럭이나 피부조차 다치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되거니와, 종실의 제사를 갑자기 지내지 않아도 안 됩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세간의 가르침을 돌아보게 하고, 먼 뜻을 바꾸어 우뚝이 빛나는 자태를 성대하게 하여, 밝은 세상에 빛나게 하고자 합니다. 멀게는 조상들의 혼령을 편안히 쉬게 하고, 가깝게는 사람과 신들의 소원을 풀어 위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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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다섯 수의 시를 그에게 보냈다. 첫 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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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큰 도리는 스스로 끝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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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은 길고도 오래 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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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바위는 소멸되기 어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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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또한 헤아리기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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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 세간에 태어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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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바람이 창문 사이를 지나는 것과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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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영화가 어찌 무성하지 않으리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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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 사이에 시들고 썩어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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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가에서 시를 읊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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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저물 녘 술병 두드리는 일 생각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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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소리 귀를 간지럽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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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맛 입에 달라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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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옷으로 몸을 치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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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갓으로 머리를 꾸밀 수 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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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머리를 깎고 수염을 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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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것에 탐닉하여 있는 것을 해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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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구구한 정 때문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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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후세를 구휼케 하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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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道自無窮 天地長且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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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石故叵消 芥子亦難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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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一世間 飄忽若過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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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華豈不茂 日夕就彫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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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上有餘吟 日斜思鼓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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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音可娛耳 滋味可適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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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紈可飾軀 華冠可曜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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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事自剪削 耽空以害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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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道妾區區 但令君恤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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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승도는 답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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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임금을 섬겨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도를 넓혀서 만방을 제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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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만 같지 못하오. 어버이를 편안히 모셔 한 집안을 이루는 것은 도를 널리 펴서 삼계를 제도하는 것만 같지 못하오. 신체발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세속에서나 가까이 하는 말일 뿐이라오. 다만 나의 덕이 멀리 미치지 못하여 아직 두루 덮을 수 없으니 이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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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삼태기의 흙이 쌓여서 산을 이루는 것처럼, 또한 미약한 것에서부터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오. 이에 가사를 걸치고 석장을 잡고서, 맑은 물을 마시고 반야를 읊는 것이오. 비록 제후의 옷을 입고 여덟 가지 맛있는 반찬을 갖추어 먹으며, 황홀한 악기 소리를 듣고 휘황찬란한 빛깔을 드러내며 산다 할지라도, 뜻을 바꾸지는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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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난날의 약속에 매달린다면 곧 함께 열반을 기약할 뿐이라오. 또한 사람의 마음이 각기 다른 것은 그 얼굴이 각기 다른 것과 같듯이, 그대가 도를 즐기지 않는 것은 마치 내가 속세를 그리워하지 않는 것과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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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씨여, 길이 이별하여 긴긴 전생의 인연을 이제는 끊소! 이 해도 저물어가고 시간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구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나날이 덜어내는 것으로 뜻을 삼아야만 하고, 세속에 머무는 사람은 때맞추어 힘써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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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나이와 덕이 모두 한창 때이니, 마땅히 사모하는 사람을 빨리 찾아야 할 것이오. 도사에게 마음을 뺏겨 좋은 시절을 놓쳐서는 안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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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수의 시를 지어 여자의 시에 회답하였다. 그 첫 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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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건 시운이건 멈추어 주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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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 세월은 지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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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위도 다할 때를 만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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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도 어찌 많다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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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가는 것은 쉬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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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에서 탄식하였다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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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공자(孔子)가 흐르는 물을 보고 ‘수재수재 서자여사(水哉水哉 逝者如斯)’라고 탄식한 것을 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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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지 못했소, 영계기(榮啓期)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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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가 되어서도 맑은 노래 부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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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옷으로 따뜻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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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비단 치장을 따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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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에는 비록 즐겁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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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에는 어찌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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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복은 참으로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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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남을 구휼한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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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運無停住 倏忽歲時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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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石會當竭 芥子豈云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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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由去不息 故令川上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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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聞榮啓期 皓首發淸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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布衣可暖身 誰論飾綾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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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世雖云樂 當奈後生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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罪福良由己 寧云己恤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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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도의 품은 뜻이 돌처럼 견고하여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소화도 느끼고, 역시 깊은 믿음이 일어났다. 이에 승도는 오로지 정성을 불법에 쏟아 많은 경전을 펴서 음미하였다. 『비담지귀(毘曇旨歸)』란 책을 지었으며, 이 또한 세상에 유행한다. 그 후 어디에서 세상을 마쳤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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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혜초(竺慧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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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하내(河內) 지방에 또 축혜초가 있었다. 역시 행실과 지혜를 겸비하여 드러냈다. 덕 높은 선비인 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와 좋은 벗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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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만경(勝鬘經)』을 주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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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전 제5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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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혜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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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만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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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해 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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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도안(釋道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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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의 성은 위(衛)씨이다. 상산(常山)의 부류(扶柳)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이름난 선비집안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 외사촌형인 공(孔)씨가 도안을 양육하였다. 일곱 살에 책을 읽었으며, 두 번 보면 외울 수 있었다. 고을의 이웃 사람들이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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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이 되자 출가하였다. 정신과 지혜는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그러나 형상과 모습은 몹시 누추하여 스승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도안은 농사짓는 집의 노역으로 불려나가 3년이 되도록 부지런히 일하였다. 그러나 한 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독실한 성품으로 정진하여, 재계(齋戒)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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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스승에게 아뢰어 경을 구하였다. 스승은 『변의경(辯意經)』한 권을 주었다. 이 책은 5천 글자 가량의 분량이었다. 도안은 경을 가지고 논에 들어갔다가, 쉬는 틈에 이것을 다 읽었다. 해가 저물어 돌아와서는 경을 스승에게 되돌려주며, 다시 다른 경을 찾았다. 이에 스승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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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준 경도 아직 읽지 못하였을 텐데, 지금 또 다른 것을 찾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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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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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암송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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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를 아직 믿지 않았다. 다시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 한 권을 주었다. 그것은 일만 글자[一萬言]에 조금 모자라는 분량이었다. 도안은 이 경을 가지고 갔다. 처음처럼 저녁에 돌아와 스승에게 되돌려주었다. 스승이 그를 잡고 이 경을 되풀이하게 하니,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이에 스승은 크게 놀라고 감탄하며 그를 달리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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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안이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마음대로 사방을 떠돌아 다녔다. 업도(鄴都)에 이르렀다. 중사(中寺)에 들어가 불도징(佛圖澄)을 만났다. 불도징은 만나자 감탄하여, 하루 종일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의 모습이 뛰어나지 않음을 보고, 모두가 함께 그를 가볍게 보아 괴이하게 여기었다. 이에 불도징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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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머나먼 식견은 너희들이 짝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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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하여 불도징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불도징이 강론하면 도안이 늘 거듭 강술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아직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모두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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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차례를 기다렸다가 곧 어려운 질문을 합시다. 그래서 저 곤륜자(崑崙子: 얼굴이 까맣고 몸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기를 죽여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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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도안이 뒤에 다시 거듭 강술하였다. 질의와 논란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도안은 그 날카로운 칼날을 꺾고 시끄러운 문제를 해소하였다. 그러고도 행동에 남은 힘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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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새까만 도인[漆道人]이 사방 이웃을 놀래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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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자들은 대부분 자기가 듣고 본 것만을 고수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에 도안은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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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시대로부터 아무리 멀어졌다지만 현묘한 종지는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마땅히 그윽한 진리를 끝까지 궁구해야 한다. 멀리 미묘하고 오묘한 종지를 찾아 생멸 없는 진리를 말세에 선양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떠돌아 숨어 다니는 무리들로 하여금 근본으로 돌아가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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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도를 묻고, 경전과 계율을 고루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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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난을 피하여 확택(濩澤)에 숨어살았다. 태양(太陽)의 축법제(竺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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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와 병주(幷州)의 지담(支曇)이 『음지입경(陰持入經)』을 강의하였다. 도안은 뒤늦게 이들을 따라 수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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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되어 동학인 축법태(竺法汰)와 함께 비룡산에서 휴식하였다. 승선(僧先)과 도호(道護)가 이미 그 산에 있었다. 서로 만나자 기뻐하였다. 곧 함께 글을 펴보고 생각을 기탁하니, 미묘함이 정신[神情]에서 우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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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안이 태행산맥(太行山脈)의 항산(恒山)에 절과 탑을 창립하였다. 옷을 바꾸어 입고 교화를 따르는 사람이 하북(河北) 일대를 반으로 나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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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무읍(武邑)의 태수 노흠(盧歆)이 도안이 맑고 빼어나다는 말을 들었다. 민견(敏見)을 시켜 간절히 설법을 요청하였다. 도안이 아무리 사양하여도 면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요청을 받아들여 강의를 열었다. 그 내용이 명실상부하자 도인과 속인들이 기뻐하며 사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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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가 되자 다시 기부(冀部: 河北省)로 돌아와 수도사(受都寺)에 머물렀다. 문도 대중 수백 명에게 늘 법의 교화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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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석호(石虎)1)가 죽자, 팽성왕(彭城王) 석준(石遵)이 그 정통성을 이어받아 후사를 세웠다. 중사(中使: 궁중의 사신) 축창포(竺昌蒲)를 파견하였다. 도안을 화림원(華林園)에 들어오도록 초청하고 널리 승방과 요사를 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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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석씨들의 말기에 나라 운세가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알았다. 곧 서쪽 견구산(牽口山)으로 갔다. 염민(冉閔)의 난이 일어나 인정이 어수선하였다. 도안은 이에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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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늘의 재앙으로 가뭄과 메뚜기떼가 심하고 노략질하는 도적들이 종횡한다. 모여도 안 되지만 흩어져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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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다시 대중들을 거느리고 왕옥산(王屋山) 여상산(女牀山)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황하를 건너 육혼산(陸渾山)으로 들어갔다. 나무열매를 먹으면서 배움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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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모용준(慕容俊)2)이 육혼 땅을 핍박하였다. 드디어 남쪽 양양(襄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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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륵(石勒)의 아들. 후조(後趙)의 초대 제왕. |
2) 5호 16국 연(燕)나라의 국주(國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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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투신하였다. 길을 가다가 신야(新野)에 이르렀다. 도안이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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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흉년을 만났으니, 나라 임금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불법의 일을 세우기 어렵다. 더욱이 교화의 바탕은 모름지기 널리 퍼뜨리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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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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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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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법태(法汰)로 하여금 양주(楊州)로 나아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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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군자(君子)가 많아 풍류를 좋아하고 숭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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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法和)가 촉(蜀: 泗川省)으로 들어가니, 그곳의 산수가 한가함을 닦을 만하였다. 도안과 제자 혜원 등 4백여 명은 황하를 건넜다. 밤길을 가다 우레와 소낙비를 만나, 번개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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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먼저 가던 사람이 인가를 발견하였다. 문 안에 두 필의 말이 있으며, 처마 기둥 사이에 한 섬의 곡식이 들어갈 만한 말 덮개가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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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도안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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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백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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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놀라서 밖으로 나왔다. 과연 이름이 임백승(林百升)이었다. 주인은 그를 신인(神人)이라 생각하고 후하게 접대하였다. 이윽고 제자들이 어떻게 주인의 이름을 알았는지를 물었더니 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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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둘이면 임(林)자이고, 말 덮개의 용량이 백 되[百升]이다. 그러니 이름이 임백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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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에 도달한 뒤에는 다시 불법을 베풀었다. 과거부터 불경을 번역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예전의 번역이 때로 틀린 것이 있기에, 깊은 뜻이 은몰되어 아직 두루 통하지 못하였다. 매양 강설에 이를 때마다, 오직 그 대략의 뜻을 이야기하고는 읽어 넘길 뿐이었다. 도안은 경전을 읽으면서 궁구하여 깊고 먼 경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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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주석한 것으로 『반야도행경』·『밀적경(密跡經)』·『안반경(安般經)』등 여러 경전이 있다. 모두가 본 문장을 찾아 문구를 비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을 다 수록하였다. 이어 의심나는 곳을 분석하고 훤하게 풀이하여, 전부 스물두 권의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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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서는 서두에서 깊고 풍부한 내용을 이루어, 미묘하게 깊은 종지를 다하였다. 앞뒤의 조리가 일관되며 문리가 회통하였다. 경전의 내용이 극명해진 것은 도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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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와 위(魏)나라로부터 진(晋)나라에 이르기까지 경전이 전해온 것은 제법 많았다. 그러나 경을 번역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후세 사람들이 추적하여 찾아보았으나 연대를 헤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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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도안은 곧 명목(名目)을 모두 모아 그 시대와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고, 품(品)의 새 것과 옛 것을 가려내었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경록중경(經錄衆經)』이다. 경전에 근거가 있게 된 것은 실로 그의 공적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그러자 사방의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가서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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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서장군(征西將軍) 환랑자(桓朗子)가 강릉(江陵)에서 주둔하였다. 도안에게 요청하여 잠시 머물렀다. 주서(朱序)가 서쪽으로 가서 주둔하면서 다시 청하였다. 양양으로 돌아가 서로 깊이 인연을 맺고 받아들였다. 주서는 늘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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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 법사는 도학(道學)의 나루를 건너는 징검다리이자, 마음을 맑게 다스리는 주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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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백마사(白馬寺)가 협소해지자, 다시 절을 세우고 단계사(檀溪寺)라 이름 지었다. 곧 청하(淸河) 장은(張殷)의 집이었다. 큰 부자와 장자들이 모두 찬조를 하였다. 5층탑과 4백 개의 승방을 세웠다. 양주자사(凉州刺史) 양홍충(楊弘忠)은 만 근의 구리를 보내서 승로반(承露盤)3)을 만들기를 원하였다. 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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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로반은 이미 태공(汰公)에게 맡겨 만들기를 끝마쳤습니다. 이 구리를 회향하여 불상을 주조하고자 하는데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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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충은 기뻐하며 공경히 이를 승낙하였다. 이에 대중들이 함께 재물을 추려내 희사해서 불상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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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배가 1장 6척이고, 신령한 상호가 밝게 드러났다. 매일 저녁 빛을 발하여 전당(殿堂)이 환하게 빛났다. 또한 뒤에 불상이 스스로 걸어가서 만산(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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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탑의 꼭대기에 얹는 두터운 바퀴[輪]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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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에 이르렀다. 온 고을 사람이 찾아가 우러러 예를 올리고, 옮겨서 절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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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이미 큰 서원이 성취되었으므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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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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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符堅)이 사신을 보내었다. 외국의 금박(金箔)을 입힌 높이 일곱 자의 기댄 자세의 불상과 금불좌상과 구슬로 꿰어 만든 미륵상, 금실로 수놓은 불상, 직물로 만든 불상을 각기 하나씩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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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회(講會)나 법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존상들을 나열하고, 당기(幢旗)와 번기(幡旗)를 배치하였다. 구슬과 노리개가 번갈아 가며 빛나고, 장식한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 계단을 오르고 문턱을 밟는 사람들로 하여금 엄숙하게 경의를 다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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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건너온 구리로 만든 불상이 있었다. 제작의 형식이 예스럽고 기이하였다. 당시 대중들은 그렇게 공경하고 존중하지 않았다. 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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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의 형태는 아름답게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육계(肉髻)의 형태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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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제자로 하여금 그 육계를 화로에 녹여서 고치게 하였다. 그런데 광명의 불꽃이 빛나게 뻗어 나와 법당 안에 가득하였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육계 속에 한 사리가 보였다. 이에 대중들이 모두 부끄러워 감복하였다. 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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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이 이미 신령하고 기이하니 다시 번거롭게 고칠 필요가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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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곧 그 일을 중지하였다. 이에 알만한 이들이 모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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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사리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짐짓 꺼내어 대중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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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양양에 습착치(習鑿齒)란 사람이 있었다. 날카로운 말솜씨는 하늘에서 타고난 듯 뛰어나서, 당시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였다. 그가 먼저 도안의 높은 명성을 듣고 일찌감치 편지를 보내 호감을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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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건대 진실에 응하여 바른 길을 밟아 밝고 환하게 명백하게 안으로 밝으신 분이며, 자비의 가르침을 거듭 비춰주시어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음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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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 606] 쪽 |
입는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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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이 동방으로 흘러 들어온 지 4백여 년입니다. 변방의 왕이나 거사들이 때로 받든 사람이 있고, 중국[眞丹]의 숙천(宿川)에서 이보다 더 앞선 시대에 행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도의 운행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라서, 세속에서는 아직 모두들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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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요즘 도업의 융성함에는 모두가 짝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이른바 달빛이 나오려 할 때 신령한 발우(鉢盂)가 감응하여 내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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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의 임무는 홍범(洪範)4)에 해당하며, 그 교화는 그윽이 깊은 곳을 적셔줍니다. 이곳의 모든 승려들에게는 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경사로운 구름[慶雲]이 동쪽으로 흐르듯, 마니주(摩尼珠)의 빛남을 돌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7보의 자리에 오르시어, 잠시 명철한 등불을 밝히시고, 풍성한 초목[豊草: 衆生]에 감로의 비를 내려주십시오. 양자강 기슭에 전단(旃檀)나무를 심으신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 다시 드높아질 것이며, 현오한 물결이 일렁이고 넘쳐서 거듭 한 시대를 휩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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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의 글은 많아서 여기에 모두 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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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안이 그곳에 이르러 머문다는 말을 들었다. 습착치는 곧 도안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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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四海) 습착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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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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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가득[彌天] 석도안(釋道安)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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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은 명답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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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습착치는 배[梨] 열 개를 선물로 보냈다. 마침 대중들의 식사 때에 전해졌으므로, 도안은 손수 배를 쪼개어 나누었다. 배가 다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되어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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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평(高平)의 극초(郄超)는 심부름꾼을 시켜 천 섬의 쌀을 보냈다. 여러 장의 편지를 써서 깊이 은근한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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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국 우(禹)임금 때 천하(天下)를 다스리던 대법(大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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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 606] 쪽 |
도안은 회답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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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희사하시니 기다리는 분께 번뇌를 끼쳤음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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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착치는 사안(謝安)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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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석도안을 만났습니다. 멀리까지 뛰어나서 평범한 도사가 아닙니다. 문도 수백 명이 재를 올리고 강의함에 게으르지 않습니다. 변화하는 기교와 방술로 보통 사람들의 귀와 눈을 미혹하는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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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세를 중시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일 없이도, 군소(群小) 종문들의 천차만별을 정돈하는 인물입니다. 그리하여 문도들이 엄숙하고 숙연하게 각자 서로 존경하여 크고도 가지런합니다. 이는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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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품은 이론은 간결하면서도 대부분 넓게 섭렵한 것이어서, 내외(內外)의 뭇 서적들을 대략은 두루 보았습니다. 음양·산수(算數)에도 모두 빼어납니다. 불경의 오묘한 이치[妙義]에는 자유자재로 능란하여, 논리의 펼침이 우법란(法蘭)과 법도(法道)와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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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러운 일은 그대와 같이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도 한 번 만나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늘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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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현인들에게 중히 여겨진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도안은 번천(樊川)·면천(沔川: 陜西省)에 있던 15년 동안에 해마다 늘 두 번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강의하였다. 한 번도 그만두거나 빠트린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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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효무황제(孝武皇帝)는 그의 도풍을 듣고, 덕을 흠모하여 사신을 보내 문안을 하였다. 아울러 조서(詔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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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 법사는 기량과 식견이 도리에 통(通)한다. 도풍의 운치가 사물의 말단에도 밝다. 도에 살면서 속인들을 훈도하여 아름다운 공적을 아울러 쌓았다. 그러니 어찌 오직 현재의 세상만을 바로잡아 제도하겠는가? 바야흐로 미래의 세계까지 나루터를 구축한 분이다. 봉급은 모두 왕공(王公)과 같은 대우로 지급하고, 공물은 계신 곳에서 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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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견은 평소 도안의 명성을 듣고 늘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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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에 석도안은 참으로 신령한 큰 그릇[神器]이다. 이 분을 모시어 짐을 보좌케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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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부비(符丕)를 파견하여 남쪽 땅 양양을 공략하였다. 도안과 주서(朱序)가 모두 부견에게 사로잡혔다. 이에 부견은 복야(僕射)인 권익(權翼)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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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십만의 군사로 양양 땅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얻은 것은 오직 한 사람 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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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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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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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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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이 한 사람이고, 습착치가 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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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장안에 이르러 오중사(五重寺)에 머물렀다. 대중이 수천 명에 달하여 크게 법화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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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위(魏)나라와 진나라(晋)의 사문들은 스승에 의거하여 자신의 성명을 지었다. 그런 까닭에 성씨(姓氏)가 각기 달랐다. 도안은 큰 스승의 근본으로서 석가모니를 따를 수 있는 이는 없다고 여겼다. 마침내 승려들의 성을 석(釋)씨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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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얻었다. 과연 그곳에서도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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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의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다시 강물의 이름은 없어진다. 네 개의 성씨가 사문이 되었지만, 모두가 석씨의 종족으로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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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경전의 말씀과도 부합되니, 마침내 영원한 법식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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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밖으로 많은 책을 섭렵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장안에서 의관을 갖춘 집안의 자제로서, 시(詩)와 부(賦: 文體의 하나)를 하는 사람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붙어서 명성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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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남전현(藍田縣)에서 하나의 큰 가마솥을 얻었다. 용량이 곡식 27섬(한 섬은 열 말)을 담을 수 있었다. 가장자리에 전서(篆書)로 글자를 새겨 놓았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을 보였더니 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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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옛 전서(篆書)로 노(魯)나라 양공(襄公)이 주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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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예문(隸文)으로 베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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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사람이 구리로 된 10말들이 그릇을 가지고 시장에서 팔았다. 그 모양이 똑바로 둥근 형이었다. 아래로 향하면 말로 사용하고 가로 놓인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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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치켜 올라간 부분은 되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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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쪽에 있는 것이 홉[合]이고, 다리의 한쪽머리는 피리이다. 피리는 종(鍾)과 같았다. 용량은 반 홉을 담을 만하다. 가장자리에 전서로 글자를 새겼다. 부견이 도안에게 물어보자 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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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왕망(王莽, 9~20)이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 순(舜)임금의 황룡(皇龍) 무진(戊辰)년 단위를 개정하였습니다. 양을 같은 비율로 하여 사방에 이를 유포시켜서, 작고 큰 그릇을 고르게 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공평히 취하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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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많이 듣고 널리 앎이 이와 같았다. 부견은 학사들에게 명령하여, 내외의 경전에 의문이 있으면 모두 도안을 스승으로 삼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경조(京兆)에서 말이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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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도안을 스승으로 삼지 않으면, 어려운 문제는 맞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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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부견은 석씨(石氏)의 난리를 이어받았다. 그렇지만 이때에 이르러 백성들의 호구 수가 풍부해지고 사방을 거의 평정하였다. 동쪽은 동해바다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구자국(龜玆國)을 병합하였다. 남쪽으로는 양양을 싸잡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모두 점령하였다. 오직 건업(建業) 한 모퉁이만 아직 항복받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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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은 매양 자신을 섬기는 신하들에게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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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강남 지방을 평정하여, 진나라 황제를 복야(僕射)로 삼고 사안(謝安)을 시중(侍中)으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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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의 아우인 평양공(平陽公) 부융(符融)과 조정대신 석월(石越)·원소(原紹) 등이 모두 간절하게 간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에 이들은 부견이 도안을 믿고 공경함을 알아, 마침내 함께 도안에게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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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께서 장차 동남 지방에 일을 일으키려 한다. 그렇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창생들을 위하여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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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부견이 동쪽 뜰로 나가면서 도안에게 명하여 가마에 올라 같이 가고자 하였다. 복야 권익이 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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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듣기로는 천자의 가마에는 시중이 함께 타 모셔야 합니다. 도안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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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형상을 허문 자입니다. 어떻게 천자 옆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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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은 발끈 성을 내고 얼굴빛을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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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의 도와 덕은 존경할 만하다. 짐은 천하와도 바꾸지 않겠다. 가마를 함께 타는 영예 정도로는 그의 덕에 걸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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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복야에게 명령하여 도안을 부축해서 가마에 오르게 하였다. 이윽고 도안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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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장차 그대와 남쪽 오월(吳越) 지방으로 떠돌고자 한다. 군대를 정비하여 순수(巡狩)5)하면서 회계(會稽)를 건너 동해를 바라본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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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도안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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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는 천명(天命)에 응해서 세상을 거느리십니다. 여덟 고을에서 바치는 부유함이 있고, 중토에 자리 잡아 사해를 제압하셨습니다. 정신을 함이 없는 세계에 깃들이신다면, 요임금이나 순임금과 나란히 하는 융성한 제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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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백만의 대군으로 가장 질 떨어지는 토지를 구하고 계십니다. 또한 동남지방의 지형은 땅이 낮고 기운이 사납습니다. 예전에 순임금·우임금도 그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진시황도 한 번 갔다가는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보건대 저의 어리석은 마음으로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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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공은 훌륭한 친척이고, 석월은 중신(重臣)입니다. 그들이 모두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오히려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니 저의 경솔하고 얕은 견해의 말도 결코 윤허하시지 않으시겠지요. 그렇지만 이미 후한 예우를 받는 까닭에, 참된 충성[丹誠]을 다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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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부견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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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넓지 않다거나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장차 천심을 가려내서 나라 운수의 소재를 밝히고자 할 뿐이다. 시운에 순응하여 순수(巡狩)하는 것은 전대의 전적에도 드러나 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제왕이 지방을 성찰한다는 글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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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자가 여러 지방을 돌면서 민정을 살피는 일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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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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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천자의 가마를 반드시 움직이고자 한다면, 먼저 낙양(洛陽)으로 행차해 위세를 높이어 정예로움을 비축하십시오. 격문(檄文)을 강남땅으로 전하십시오. 만약 그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그 때 토벌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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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은 이 말에 따르지 않았다. 평양공 부융 등 정예군 25만 명을 파견하여 선봉[前鋒]으로 삼았다. 부견이 몸소 보병과 기병 60만 명을 거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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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진(晋)나라는 정로장군(征虜將軍) 사석(謝石)과 서주자사(徐州刺史) 사현(謝玄)을 파견하여 이에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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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의 선봉대가 팔공산(八公山) 서쪽에서 크게 무너졌다. 진나라 군사가 패배를 뒤쫓아 30리를 쫓아왔다. 죽은 사람이 서로를 베개삼아 누웠다. 부융은 말이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부견은 홀로 말을 타고 도망치니, 도안이 간언한 말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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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항상 여러 경전에 주석을 달았다. 혹 그것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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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말한 것이 이치로부터 그다지 멀어지지 않는다면, 상서로움이 나타나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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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곧 꿈에 머리는 하얗고 눈썹이 긴 오랑캐 도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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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주석을 단 경전은 매우 이치에 합당하오. 나는 열반에 들 수 없어서 서역에 머물고 있오. 마땅히 서로 도와 불법을 널리 전하여야 하므로, 때때로 식사나 마련해 주셨으면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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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십송률(十誦律)』이 이르렀다. 원공(遠公: 慧遠)이 이에 스승님[和尙]께서 꿈꾸신 분이 빈두로(賓頭盧: 佛弟子)임을 알았다. 이에 자리를 마련하고 공양을 올리자 곳곳에서 법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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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이미 도덕에서 대중의 종사가 되었다. 배움에서 삼장(三藏)을 겸하였다. 승니(僧尼)들의 의궤와 규범과 불법의 헌장(憲章)을 조목 별로 나누어, 세 가지 사례로 구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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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행향(行香)·정좌(定座)·상경(上經)에 대한 법이고, 둘째는 평일의 육시행도(六時行道)와 음식(飮食)·창시(唱時)에 대한 법이며, 셋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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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살(布薩)에 사람을 보내서 참회하고 허물을 뉘우치게 하는 따위의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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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사찰에서 마침내 이것을 법칙으로 삼고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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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늘 제자인 법우(法遇) 등과 미륵불 앞에서 서원을 세워,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그 후 진(晋)의 건원 21년(364) 1월 27일에 갑자기 기이한 승려가 나타났다. 형상은 실로 평범하고 누추하였다. 그가 절을 찾아와 기숙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절의 승방은 이미 가득 차 잘 곳이 없으므로 강당에서 거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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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나(維那)가 불전에서 숙직을 하였다. 밤에 이 승려가 창문 틈으로 출입하는 것을 보았다. 급히 이 사실을 도안에게 아뢰었다. 도안이 놀라 일어나서 예를 갖추어 문안을 드렸다. 그가 찾아온 뜻을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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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위해서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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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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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해도 죄가 깊습니다. 어떻게 해탈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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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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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제도할 만하군. 그러나 잠간 성승(聖僧: 부처님)을 목욕시킨다면, 원하는 대로 반드시 결과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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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자세히 목욕시키는 법을 보여주었다. 이에 도안은 다음 세상에 왕생할 곳을 물어보았다. 그가 하늘의 서북쪽 허공을 손으로 가리켰다. 곧 구름이 열리면서 도솔천의 미묘하고 뛰어난 세계가 보였다. 이 날 저녁 대중 수십 명이 모두 같이 이 광경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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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안은 목욕도구를 마련하였다. 비상한 어린아이가 수십 명의 벗들과 나타났다. 절 안으로 들어와 놀다가 잠깐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과연 이것은 성스러운 응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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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2월 8일에 갑자기 대중들에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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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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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식사를 마친 후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성 안쪽 오급사(五級寺)에서 장사지냈다. 진(晋)의 태원(太元) 10년(382)의 일이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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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王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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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마치기 전에 은둔하는 선비인 왕가가 그를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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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이란 이와 같은가 봅니다. 떠나려 함에 그대와 같은 분이 오셨습니다. 어떻습니까? 함께 떠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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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가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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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그 말씀과 같지만은 먼저 떠나시구려. 나는 해결하지 못한 약간의 빚이 남아 있어서, 함께 떠날 수가 없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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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장(姚萇: 後秦의 王, 384~417)이 장안을 점거했을 때, 왕가는 일부러 성안에 남았다. 그 때 요장은 부등(符登)과 매우 오랫동안 대치하였다. 요장이 왕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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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곧 부등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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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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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그럴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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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장이 진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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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렇다 하면 될 것이지, 거의 그럴 것이란 다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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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왕가의 목을 베었다. 이것이 왕가가 말한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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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장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요흥(姚興)이 마침내 부등을 죽였다. 요흥의 자(字)가 자략(子略)이다. 이것이 곧 왕가가 말한 ‘거의 그럴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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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자(字)는 자년(子年)이며 낙양 사람이다. 형상과 모습이 비루하여 마치 모자라는 사람 같았다. 본래 익살스러워 남 웃기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오곡(五穀)을 먹지 않으며, 맑게 텅 비어 기(氣)를 마시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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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종사[宗]로 그를 섬겨, ‘운수가 좋을까, 나쁠까’를 찾아와 묻곤 하였다. 왕가는 사람에 따라 응답하였다. 그의 말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모습은 광대[調戱]와 같았다. 말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과 비슷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이 지나가고 나면 대부분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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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가미산(加眉山)에서 문도를 양성하였다. 부견(符堅)이 대홍려(大鴻臚: 禮接官)를 파견해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부견이 남방을 정벌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내어 길흉을 물었으나 말해주지 않았다. 이어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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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말을 타고 거짓으로 동쪽으로 수백 보를 갔다. 신발과 모자를 땅에 떨어뜨리고 옷을 벗어 버리면서 말을 달려 돌아왔다. 이것으로써 수춘(壽春)에서 있을 부견의 패배를 암시하였다. 그의 선견지명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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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장이 왕가를 살해하던 날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언덕 위에서 왕가를 보았다는 글을 요장에게 보냈다. 도안의 왕가 같은 신인(神人)과의 은근한 계합이 모두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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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앞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서쪽 나라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함께 강론하고 분석하기를 염원하였다. 늘 부견에게 그를 모셔오기를 권하였다. 구마라집도 역시 멀리서 도안의 풍모를 듣고, ‘이 사람은 동방의 성인이다’라고 생각하여, 항상 멀리서 그에게 예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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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도안이 태어났을 때, 왼쪽 팔뚝에 넓이 한 치 가량의 가죽이 붙어 있었다. 잡아당기면 위아래로 움직였으나 손만은 꺼낼 수 없었다. 또한 팔꿈치 바깥쪽으로 네모난 살점이 붙었다. 그 위에 통자 무늬가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인수(印手)보살이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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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이 세상을 마친 16년 후에야 구마라집이 비로소 중국에 이르렀다. 도안과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한탄이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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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일찍부터 경전을 독실하게 좋아하고, 뜻한 바가 법을 베푸는 데 있었다. 초청한 외국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담마난제(曇摩難提)·승가발징(僧伽跋澄) 등이 수많은 경전을 번역한 것이 백만여 글자에 이르렀다. 그는 항상 법화(法和)와 더불어 소리와 글자를 가려내서 정하고, 글 뜻을 상세하게 파헤쳤다. 새로 나온 수많은 경전들이 이 때에 바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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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이 쓴 『명덕사문론(名德沙門論)』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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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도안은 사물에 너르고 재주가 있으며, 빼어나게 경전의 이치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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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를 위한 찬(贊)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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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넓고 넉넉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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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본래 많은 것을 주재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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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깊은 석도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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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이를 겸하여 갑절로 더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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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을 연과 농[汧隴: 陜西]지방에 드날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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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회수와 동해까지 치달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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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형체는 비록 풀로 변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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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항상 살아 있는 것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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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有廣贍 人固多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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淵淵釋安 專能兼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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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聲汧隴 馳名淮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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形雖草化 猶若常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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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기록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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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지방에 따로 축도안(竺道安)이 있어 석도안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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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착치가 편지를 축도안에게 보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도안은 본래 스승을 따른 축(竺)이란 성을 후에 석(釋)으로 바꾸었다. 그러니 세간에서는 그의 두 가지 성을 보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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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석법화(釋法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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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는 영양(榮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안과 같이 공부하여 공손과 겸양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논리의 벼리를 훌륭하게 표명하고, 의문 나고 막힌 점은 슬기롭게 풀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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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石氏)의 난으로 인하여 문도들을 거느리고 촉(蜀)으로 들어갔다. 덕을 사모하는 파한(巴漢)의 선비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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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襄陽)이 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촉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양평사(陽平寺)에 머물렀다. 그 후 금여곡(金輿谷)에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도안과 더불어 산마루에 올라가, 눈길이 닿는 끝까지 두루 바라보다가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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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은 높이 솟아, 노닐며 바라보는 사람이 많네. 세월이 흘러 한 번 변화하면, 마침내 누가 이 산임을 헤아리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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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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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는 마음에 지닌 것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뒷사람들을 걱정하는가? 만약 지혜로운 마음이 싹트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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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안과 함께 새로 나온 경전을 자세히 정리하고 글 뜻을 참작하여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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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위진(僞晋)의 왕 요서(姚緖)가 초청하여, 포판(蒲坂)에 머물면서 강설하였다. 그 후 조금 지나 제자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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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 안에서의 번뇌와 고루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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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의복을 바로 하고 불상을 빙 돌아 예배하였다. 다시 본래의 자리에 앉아 옷으로 머리를 덮고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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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축승랑(竺僧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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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랑은 경조(京兆)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사방을 떠돌면서 도를 물었다. 오랫동안 관중(關中)으로 돌아가 오로지 강설만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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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몇 사람과 함께 초청 받은 곳을 갔다. 도중에 문득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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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절 안에 옷과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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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따라 곧 절로 돌아와 보니, 과연 도적이 있었다. 그의 전갈로 말미암아 잃은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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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랑은 항상 푸성귀를 먹고 무명옷을 입었다. 뜻은 인간 세상 밖에서 즐겼다. 위진(僞秦)의 황시(皇始) 원년(384)에 태산(泰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사(隱士) 장충(張忠)과 숲 속에서 은둔하자는 기약을 맺고, 늘 함께 그곳에서 노닐었다. 후에 장충은 부견(符堅)의 부름을 받았다. 서울로 가다가 화음산(華陰山)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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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승랑은 금여곡(金輿谷) 곤륜산에 따로 정사를 세웠다. 아직도 이곳은 태산의 서북에 있는 하나의 암곡이다. 산봉우리가 높고 험준하며 수석(水石)이 굉장하다. 승랑은 처음 이곳에 승방을 축조할 때, 산의 아름다움을 다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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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설계하여 절 안팎에 집 수십여 채를 지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 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승랑은 쉬지 않고 이들을 가르치면서, 힘들어도 피로해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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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의 임금인 부견은 그의 덕을 평소에 흠모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였다. 그러나 승랑은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함으로써, 마침내 부름을 중지시켰다. 그러자 달마다 편지와 선물을 보내왔다. 부견이 후에 대중 승려를 숙청할 때, 곧 별도로 조서(詔書)를 내려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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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랑 법사는 지계와 도덕이 얼음이나 서리 같다. 배우는 무리들은 맑고 빼어나다. 곤륜산 한 곳만은 관례대로 수색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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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후진(後秦)의 요흥(姚興)도 찬탄과 존중을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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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燕)나라의 임금 모용덕(慕容德)도 승랑의 명성과 행실을 흠모하였다. 임시로 동제왕(東齊王)이라 부르게 하고, 두 고을의 조세(租稅)를 공급하였다. 승랑은 왕의 지위는 사양하고, 조세만을 취하여 복업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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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효무황제(孝武皇帝, 373~396)는 편지를 보냈다. 북위(北魏)의 척발규(拓跋珪, 武帝, 386~409)도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공경 받음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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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짜기 안에는 예전부터 호랑이에 의한 재난이 많아, 항상 지팡이를 짚고 무리지어 다녔다. 승랑이 이곳에 자리 잡자 맹수들이 귀의하여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도인과 속인들이 새벽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와도, 중도에 가로막히는 일이 없었다. 백성들이 감탄하여 끝없이 칭송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곳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금여곡을 낭공곡(朗公谷)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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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승랑을 찾아올 사람이 있으면, 몇 명이건 간에 손님이 당도하기 하루 전에 미리 알아, 제자들을 시켜 음식을 준비토록 하였다. 반드시 그의 말과 같은 결과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모두가 그의 미리 내다보는 밝은 지혜에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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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는 나이 85세로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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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돈(支僧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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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태산에는 또 지승돈이 있었다. 본래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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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롱(汧隴) 지방을 떠돌았다. 오랫동안 형주(荊州)와 옹주(雍州)에서 지냈다. 대승에 오묘하게 통달하였다.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뛰어났다. 『인물시의론(人物始義論)』을 지었는데, 역시 세상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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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축법태(竺法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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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태는 동완(東莞) 사람이다. 어려서 도안과 같이 배웠다. 비록 재능과 말솜씨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태와 풍모는 도안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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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과 함께 난을 피하여 신야(新野)로 갔다. 도안이 무리를 나누어 법태에게 서울로 내려갈 것을 명하였다. 헤어질 때 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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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는 서북 지방에서 의식과 궤범으로써 펼치시오. 나는 동남쪽에서 교화를 넓히겠소. 그렇게 한다면 강호의 도술이 서로 바라보게 될 것이오. 청정한 인연으로 높은 모임에 이르는 것은 아마도 추운 겨울에나 기대할 수 있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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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곧 제자 담일(曇一)·담이(曇二) 등 40여 명과 함께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질병에 걸려 양구(陽口)에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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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환온(桓溫)이 형주에 주둔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그곳을 지나가는지를 묻고는 탕약을 공급하였다. 도안도 또한 제자인 혜원(慧遠)을 형주로 내려보내어 문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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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태는 병이 조금 치유되자 환온을 찾아갔다. 환온은 법태와 함께 오래 이야기하고자 하여, 먼저 다른 여러 손님을 상대하였다. 그래서 아직 법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법태는 병세가 아직 완쾌되지 않았기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였다. 곧 가마를 타고서 곁방[廂]을 거쳐 돌아 나오며, 환온에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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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담(風痰)이 갑자기 발작하여 오래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곧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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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온이 총총히 일어나 밖으로 나와서 법태를 접대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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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태는 키가 8척으로 풍모와 자태가 볼 만하였다. 뱉어내는 말과 쌓은 학식으로, 문장이 난초의 향기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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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문인 도항(道恒)도 자못 재주와 힘이 있었다. 항상 마음이 없다는 논리[心無義]에 집착하여 그 논리가 크게 형주 땅에 행하였다. 이에 법태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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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삿된 주장이다. 반드시 이를 타파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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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크게 이름난 승려들을 모으고, 제자인 담일을 시켜 이를 비판하게 하였다. 경전에 근거하여 이끌고 어지럽게 분석하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도항은 그의 말솜씨에 힘입어 굴복하지 않았다. 해가 이미 저물어서 이튿날 아침에 다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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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자리에 나아가 수 차례 비판하자, 관련된 문책[關責]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도항은 스스로 논리의 길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빛이 약간 달라지면서 털이개로 책상을 두드릴 뿐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혜원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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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라야 할 때 빠르지 않은 베틀의 북[杼軸]이라니, 그것을 어디에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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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석에 있던 사람이 모두 웃었다. 이에 마음이 없다는 논리가 여기에서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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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태는 서울로 내려와 와관사(瓦官寺: 在南京)에 머물렀다. 이에 진(晋)의 태종 간문제(簡文帝)가 깊이 공경하고 중히 여겨, 『방광반야경』을 강의하기를 청하였다. 대회를 연 날에 황제가 몸소 납시니, 왕후와 공경(公卿)들이 모두 모이지 않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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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태는 모습이나 이해력에서 보통 사람을 넘어섰기에,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유포되었다. 개강하는 날에는 도인과 속인들이 구경하고, 법문을 들으려는 선비와 아녀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문도들은 차례대로 줄지어 앉았다. 삼오(三吳: 지금의 江蘇省·浙江省 일대) 지방에서 보따리를 싸매고 찾아온 사람도 천여 명을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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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관사란 절은 본래 하내(河內)의 산완공(山玩公)의 묘 근처에서 도자기를 굽던 곳이다. 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사문 혜력(慧力)이 나라에 요청하여 절로 삼았다. 오직 법당과 탑만이 있었다. 법태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다시 승방과 전우(殿宇)를 개척하였다. 뭇 일을 닦고 세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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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중문(重門)을 세워서 땅의 형세에 어울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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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남왕(汝南王)의 세자인 사마종(司馬綜)의 저택이 절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마침 그가 절 옆으로 굴을 뚫어서 중문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법태는 개의치 않았다. 사마종이 깨달아 몸소 찾아와서 참회하고 사과하였다. 법태는 누워서 그를 맞으며,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행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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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군(領軍)인 왕흡(王洽)과 동정왕(東亭王) 사마순(司馬珣), 태부(太傅) 사안(謝安)도 모두 끝없이 그를 흠모하고 공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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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기 며칠 전에 문득 몸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곧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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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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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태원(太元) 12년(387)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 나이는 68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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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종(列宗) 효무황제(孝武皇帝)는 조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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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태는 도를 팔방에 퍼뜨렸고, 은택(恩澤)이 후예들에게 흘러 넘쳤다. 그러나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픔이 가슴을 꿰뚫는다. 부의(賻儀)로 돈 십만 냥을 보낸다. 장사에 필요한 물자를 수요에 따라 갖추어 마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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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은 그를 위하여 찬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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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한 바람이 숲을 흔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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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울음소리는 계곡에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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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고 밝으신 법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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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을 비교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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凄風拂林 鳴絃映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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爽爽法汰 校德無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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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일(曇壹)·담이(曇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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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태의 제자인 담일과 담이도 모두 경전의 논리를 널리 익혔다. 또 『노자(老子)』와 『주역』에도 빼어났다. 풍류를 좋아하여 혜원과 명성을 나란히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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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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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이는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법태가 통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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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안회(顔回: 孔子의 首弟子)를 데려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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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태가 지은 의소(義疏)와 극초(郄超)에게 보낸, 본래 없음의 뜻을 논한[論本無義] 편지는 모두 세상에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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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세상에서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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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태는 도안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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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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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석승선(釋僧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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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은 기주(冀州) 사람이다. 그는 상산(常山)의 승연(僧淵)의 제자이다. 성품이 순수하고 소박하며 곧은 지조가 있었다. 사미 때 도안과 여관(旅館)에서 서로 만났다. 도안도 당시 아직 구족계를 받지 않았을 때이다. 서로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일들을 피력하였다. 그 정신과 기개가 강개(慷慨)하였다. 헤어질 때 서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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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서로 커서 어른이 되더라도 함께 노닌 일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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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은 계를 받은 이후 정성껏 수행에 힘쓰고, 배움은 경론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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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石)씨의 난을 만나 비룡산(飛龍山)에 숨어살았다. 생각은 바위와 골짜기에 노닐고, 뜻은 선정(禪定)과 지혜를 얻는 데 두었다. 도안도 그 후 다시 그를 따라왔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자 흐뭇해하고 기뻐하면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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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맹서를 비로소 따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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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함께 글을 펴놓고 생각을 모으니, 새로운 깨달음이 더욱 많아졌다. 이 때 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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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이 예전에 불경을 번역할 때에 도가 경전을 빌린 논리[先舊格義]는 이치에 대부분 어긋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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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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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분석하고 소요(逍遙)해야 마땅하지. 하지만 어찌 옛 선배들을 시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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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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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가르침을 널리 밝히려면, 마땅히 진리와 올바르게 일치되도록 하여야 하네. 진리의 북을 다투어 울림에 있어서, 어찌 앞서고 뒤서고 할 게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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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은 이에 법태 등과 함께 남쪽으로 갔다. 진평(晋平) 지방을 떠돌면서 도를 강의하고, 교화를 넓혔다. 그 후 양양으로 돌아와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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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道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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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도 기주(冀州) 사람이다. 그는 곧은 절개가 있고 지혜와 이해력이 있었다. 역시 비룡산에 숨어살았다. 도안 등을 만나자 함께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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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곳에 살면서 속세를 떠나 늘 불법을 바로잡고 싶기는 하네. 하지만 어찌 산문에서 홀로 걸어 다니며 법륜의 수레바퀴를 그치게 해서야 되겠는가? 마땅히 각자 힘에 미치는 대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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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각기 교화를 행하였다. 그 후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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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축승보(竺僧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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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보는 업군(鄴郡)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계행을 지키고 집념과 의지가 곧았다. 배움은 여러 논(論)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아울러 경전과 불법에 밝았다. 도가 이락(伊洛: 伊水·洛水로 지금의 洛陽 지방) 지방에 떨쳤으며, 온 서울이 종사로서 그를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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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西晋)의 기근과 난리를 만나자, 승보는 석도안 등과 함께 확택(濩澤)에 은거하였다. 정밀하게 연구하고 분석하여, 그윽하고 은미한 진리를 모두 훤하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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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형주의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간단한 푸성귀로 스스로를 절제하면서, 높은 정성으로 예참을 수행하여,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불을 우러러 뵙기를 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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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낭야왕(瑯琊王) 사마침(司馬忱)이 형주자사가 되었다. 승보의 곧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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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정신에 의지하여 계사(戒師)가 되어달라고 청하여, 온 가문이 으뜸으로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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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죽기 이틀 전에 문득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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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세상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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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에 즈음하여서는 묘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게 감돌고, 범패소리가 울리며 어우러졌다. 도인과 속인들이 물결처럼 달려오니, 찾아온 사람이 만 명을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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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오후가 되자 병 없이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60세이다. 절 안에서 장사지내고, 승려들이 그를 위하여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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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축승부(竺僧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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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의 씨족은 아직 자세하지 않다. 배움은 뭇 경전에 뛰어나고, 특히 『방광반야경』과 『도행반야경』에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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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西晋) 말기의 난리에 강남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의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성대하게 강석을 여니, 건업(建鄴)의 옛 승려들 치고 추대하고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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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같은 절에 있던 사문 도숭 역시 재능과 이해력이 버금갔다. 도안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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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의 그윽함을 더듬어서 빼어나게 드러내는 능력에는 우리들이 미칠 바가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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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외도의 학문을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가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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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에는 형상이 있으며[心神有形], 한낱 만물보다 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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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 빼어난 말솜씨로 상대방을 꺾어 제압하였다. 이에 승부는 곧 『신무형론(神無形論)』을 지어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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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이 있으면 작용이 있다. 작용이 있으면 다함이 있다. 그러나 정신은 일찍이 다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형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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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말재간에 기대는 무리들은 서로 어지럽게 논쟁하였다. 그러다가 이치가 돌아갈 곳을 찾자 흡족하게 그를 믿고 복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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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다시 『방광반야경』과 『도행반야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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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이 때 나이는 70여 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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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법태가 도안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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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상인(上人)을 추억할 때마다 돌아다니던 일이 어제 같군. 그런데도 세상을 떠난 지 문득 여러 해가 되었네. 그와 맑게 이야기 나눈 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한 번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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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 그의 아름다움을 되새길 수 있기를 기대하였지. 그렇건만 어찌 하루아침에 영원히 세상을 달리할 줄 알았겠나? 깊은 통한의 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의 논리에서 터득한 것과 경서를 펴서 찾아낸 공부는 참으로 도모하기 어려운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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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태가 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주 승부의 논리를 진술하곤 하였다. 지금 미루어 찾건대, 그가 지은 글이 유실되어 없어졌으니 슬픈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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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석담익(釋曇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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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익의 성은 요(姚)씨이다. 강(羌: 서쪽 오랑캐. 지금의 티베트) 지역 사람이다. 혹 기주(冀州) 사람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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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도안을 스승으로 섬겼다. 어려서는 계율 있는 행실로 칭찬을 받았다. 배움은 삼장에 뛰어나 문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촉군(蜀郡: 지금의 成都)을 경유(經遊)하자, 자사(刺史) 모거(毛璩)가 깊이 그를 중히 여겼다. 점심 공양을 마련하고 몸소 우러러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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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담익이 밥 속에 한 톨의 곡식이 있는 것을 보고는 먼저 그것을 취하여 먹었다. 그러자 모거가 마음속으로 몰래 존경하고,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반드시 신심으로 바치는 보시를 저버릴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 후 천 섬의 쌀을 선물하였다. 담익은 이를 받아 나누어 보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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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익은 일찍이 도안을 따라 단계사(檀溪寺)에 있었다. 진(晋)의 장사태수(長沙太守) 등함(騰含)이 강릉에서 자기 집을 희사하였다. 절로 만들기 위해 도안에게 강령(綱領)이 될 승려를 구하였다. 도안이 담익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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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荊州)와 초나라의 백성들이 처음으로 스승을 찾는다. 교화를 이룩할 사람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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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익은 드디어 지팡이를 짚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절을 만들어 세웠다. 곧 장사사(長沙寺)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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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적들이 번갈아 날뛰면서 한남(漢南) 땅을 침략하였다. 강릉 경계 내의 모든 사람들이 상명(上明)으로 피난하였다. 담익은 그곳에 절을 다시 세웠다. 도적 무리들이 소탕되자 다시 강릉으로 돌아왔다. 장사사를 수리하고, 참된 정성으로 기원하고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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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감응이 일어나서 사리가 나타났다. 금병에 담아 재(齋) 올리는 자리에 안치하였다. 담익은 곧 그 앞에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하며 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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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것이 금강(金剛)이 남긴 음덕[餘蔭]이라면, 원하옵나니 광명이 빛나게 하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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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이르렀다. 오색의 광채가 병 속에서 점차 밖으로 나와 온 법당을 가득히 비추었다. 모든 대중들이 놀라고 감탄하여, 담익의 신령한 감응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다시 비록 부란(富蘭) 등의 이교도들이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상서를 본다면 역시 거짓됨을 되돌려 진실함에 귀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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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파릉(巴陵)의 군산(君山)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었다. 이곳은 산해경(山海經)에서 이른바 동정산(洞庭山)이라 하는 곳이다. 산 위에는 구멍이 있어서 오(吳)나라의 포산(苞山)과 통한다. 산이 일찍이 영묘하고 기이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몹시 그곳을 꺼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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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익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 산으로 들어갔다. 길에 수십 마리의 흰 뱀이 누워서,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담익은 물러나 머물던 곳으로 돌아왔다. 멀리 산신령을 청하여 예참을 올리면서 신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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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을 짓기 위해서 나무를 베는 것입니다. 원컨대 공덕을 함께 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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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 곧 꿈에서 신인(神人)을 만났다. 그가 담익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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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께서 삼보를 위하여 사용하신다면, 특별한 도움을 드리는 것이 기쁠 따름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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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다시 산을 찾아가니, 길이 매우 깨끗하고 평탄하였다. 이에 나무를 베서 강의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그 가운데 벌목하는 사람이 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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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훔쳐가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돌아와 절 위에 이르니, 담익의 재목은 이미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몰래 훔쳐 사유물로 취한 것은 모두 관가에서 거두어갔다. 그의 정성스런 감응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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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익은 항상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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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세워 승려들은 충족되었으나 부처님의 형상이 아직도 적다.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부처님 모습의 신비한 상서로움은 여러 지방에 두루 깔려 있다. 그렇거늘 어찌 그런 감응이 없어 그 불상들을 모셔올 수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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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오로지 간절하고 측은하게 정성스러운 감응을 빌었다. 진(晋)의 태원(太元) 19년(394) 갑오해 2월 8일에 문득 한 불상이 성의 북쪽에 나타났다. 빛나는 모습이 하늘에 충천하였다. 당시 백마사(白馬寺)의 승려들이 먼저 그곳에 가서 영접하였다. 그러나 불상을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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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담익이 그곳에 가서 공경하게 예불하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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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아육왕의 이 불상은 우리 장사사(長沙寺)에 내려주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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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세 사람의 제자를 시켜 받들어 영접하였다. 그러자 가볍게 바람에 날리듯, 불상이 일어나서 본사로 맞아 돌아왔다.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오고, 수레와 말의 굉음이 거리를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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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계빈국(罽賓國)의 선사(禪師)인 승가난타(僧伽難陀)가 촉(蜀)에서 내려와, 절에 들어와서 예배하였다. 불상의 광배 위에 범어로 새겨진 글자가 있음을 보고 곧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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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육왕이 조성한 불상입니다. 언제 이곳에 왔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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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담익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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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던 날, 불상의 둥근 광배가 갑자기 신령스럽게 변화하더니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담익과 감응이 통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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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위(僧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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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장사사(長沙寺)에는 또한 승위(僧衛)란 사문이 있었다. 학업이 매우 뛰어나 은중감(殷仲堪)6)이 소중히 여겼다. 특히 『십주론(十住論)』에 뛰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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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진(東晋)의 무장(武將)으로 청렴하고 청담(淸談)을 잘 하였으며 효무제(孝武帝)가 중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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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그 논의 주해(注解)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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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석법우(釋法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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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우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배움을 좋아하여 뜻이 고전문헌에 두터웠다. 그러나 성품이 멋대로 자랑하고 큰 소리를 쳐서,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한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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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안을 만나자 문득 믿고 굴복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깎고 도에 들어, 도안을 스승으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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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한 교화에 씻기어 슬기로운 이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본래의 마음을 꺾고서 겸허하게 덕을 이루었다. 의양태수(義陽太守) 완보(阮保)가 이 소식을 듣고 흠모하여 멀리서 좋은 벗의 의리를 맺고자 하였다. 편지로 서로의 사귐을 나누고, 보시를 보내는 것이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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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양양(襄陽)이 침략을 당하자, 법우는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릉의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강설하니, 수업하는 사람이 4백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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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어떤 승려가 술을 마시고, 저녁에 향공양을 올리는[燒香] 소임을 하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 법우는 다만 그에게 벌만 내리고 내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도안이 멀리서 들었다. 대나무 통에 곤장 하나를 담아 손수 봉함을 하고, 글을 써서 법우에게 보냈다. 법우가 봉한 것을 열었더니, 그 속에 곤장이 있음을 보았다. 곧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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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술을 마신 승려 때문에 보내신 것이다. 나의 주의를 일깨우는 명령이 부지런하지 못하여, 먼 곳에 계시는 스승께서 근심을 담은 선물을 보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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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유나에게 명하여 건추(犍槌)를 울려 대중을 모아놓고는, 곤장이 든 통을 향등(香橙) 위에 안치하였다. 행향(行香: 승려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마친 다음, 법우는 곧 일어났다. 대중 앞에 나가서 통(筒)을 향해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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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 뜻을 표시하였다. 이에 땅에 엎드려 유나(維那: 절의 사물을 맡아 지휘하는 소임을 맡은 승려)에게 명하여 곤장을 세 번 내리치게 하였다. 곤장을 대나무 통 안에 넣고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를 꾸짖었다. 당시 경내의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일에 힘쓰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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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지나 혜원(慧遠)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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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됨이 미미하여 어둡고 모자라서 대중들을 잘 거느리지 못하였네. 스승님[和尙]께서 비록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계시지만, 오히려 먼 곳까지 근심과 염려를 드렸으니 나의 죄가 깊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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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는 강릉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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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석담휘(釋曇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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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휘는 하내(河內) 사람이다. 12세에 도안에게 투신하여 출가하였다. 도안이 그의 고상한 풍채를 가상히 생각하였다. 우선 책을 읽게 하니, 2·3년 안에 배움이 경전과 역사를 겸하였다. 열여섯 살에 비로소 머리 깎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오로지 불교의 논리에 힘썼다. 그윽이 엉킨 진리를 거울에 비추어보듯 헤아려서, 30세가 되기 전에 곧 강설할 수 있었다. 뜻하는 일이 높고 깨끗하였다. 또한 공손함과 양보함으로써 존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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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안을 따라 양양에 있었다. 부비(符丕)가 경내를 침범하였다. 곧 동쪽 형주로 내려가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도인과 속인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늘 근본이 있음을 뒤돌아보았다. 마침내 도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잊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 이에 강릉의 선비와 여인들이 모두 서쪽을 향하여 인수(印手)보살7)에게 공경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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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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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의 도에 의한 교화를 그대 스승[和上: 道安]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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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과거 도안(道安)이 태어났을 때, 왼쪽 팔뚝에 넓이 한 치 가량의 가죽이 붙어 있었다. 잡아당기면 위아래로 움직였으나 손만은 꺼낼 수 없었다. 또한 팔꿈치 바깥쪽으로 네모난 살점이 붙었다. 그 위에 통자 무늬가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인수(印手)보살이라 일컬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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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휘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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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의 내부 행실이야 그 깊고 얕음을 쉽게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외부 인연에 미친 바는 대부분 모두가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있는 한 방울의 물로 어찌 강이나 바다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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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태원(太元) 20년(395)에 세상을 마쳤다. 죽음을 맞이한 날에도 몸에 별다른 병이 없었다. 당(堂)에 올라가 대중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어 고별을 하고 식사를 끝냈다. 그런 뒤 방으로 돌아와, 오른편 겨드랑이를 대고 모로 누워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73세이다. 『입본론(立本論)』 아홉 권과 「육식지귀(六識旨歸)」 12수를 지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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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석도립(釋道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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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립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어려서 출가하여 도안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방광반야경』에 뛰어났다. 또한 노자와 장자의 삼현학8)이 불교의 이론과 약간 상응한다 하여, 그것의 뜻을 자못 귀속시켰다. 성품이 맑고 텅 비어 세상의 일에 나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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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안을 따라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복주산(覆舟山: 當陽 東南 玉泉寺의 뒷산)에 은거하였다. 홀로 바위굴에 거처하며 공양을 받지 않았다. 늘 깊은 생각에 잠겨 선정에 들어가면, 곧 7일 동안을 일어서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일이 자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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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초여름에 담휘는 문득 산에서 내려왔다. 대중 승려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대품경(大品經)』을 강의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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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만 가을까지만 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품던 생각을 거칠게나마 끝마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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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일(自恣日: 陰 7월 16일) 뒤 며칠이 지나서, 과연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당시 사람들은 천명을 아신 분이라고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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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삼현학(三玄學)은 『노자』·『장자』·『주역』의 총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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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석담계(釋曇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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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계는 일명 혜정(慧精)이라고도 한다. 성은 탁(卓)씨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진(晋)의 외병부(外兵部) 극양(棘陽) 수령 잠(潛)의 동생이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배움에 힘써서 마음을 고전 서적에서 노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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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법도(法道)가 『방광반야경』을 강의한다는 말을 들었다. 옷을 빌려 입고 가서 한 번 들었다. 마침내 불교의 이치를 깊이 깨달아 속인 생활을 그만두었다. 도를 따라 도안에게 엎드려 스승으로 섬겼다. 삼장에 해박하게 뛰어나며, 50여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평일에도 하루 5백 배로 예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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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임천왕(臨川王)이 몹시 알아주고 존중하였다. 후에 병이 위독해지자 항상 미륵불의 명호를 외웠다. 입에서 미륵불이란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제자인 지생(智生)이 간호하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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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양정토(安養淨土)에 태어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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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계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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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승님[和尙: 道安]등 여덟 사람과 다 같이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스승님과 도원(道願) 등은 이미 모두 그곳에 왕생하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 가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오직 염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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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끝나자 광명이 그의 몸을 비추었다. 얼굴에 더욱 기쁨이 넘쳐흘렀다. 드디어 문득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이어 그를 도안의 묘지 오른편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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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축법광(竺法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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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광의 성은 역(睪)씨이며 하비(下邳) 사람이다. 오흥(吳興)에 살았다. 일찍 부모를 잃고 양어머니를 섬겼다.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집이 가난하고 비축한 재산이 없어서 늘 몸소 밭을 갈아, 그것으로 어머니를 보양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상을 치를 때 예절을 다하였다. 그리고 복을 마치자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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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담인(竺曇印)을 스승으로 섬겼다. 담인은 밝고 슬기로우며 도의 행실이 있었다. 법광은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구족계를 받을 때까지, 머금은 기풍과 세운 지조가 우뚝하여 여느 사람들과 달랐다. 검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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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실천하고 일을 편안히 여겨, 뜻과 행실이 깊고도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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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담인의 병이 위독하였다. 법광이 곧 7일 밤낮을 정성으로 기도하며 예참하였다. 그러더니 7일째 되던 날, 문득 오색의 광명이 나타나 담인이 거처하는 방문을 비추었다. 담인은 마치 어떤 사람이 어루만져주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이로써 괴롭던 병이 마침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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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스승 곁을 떠나 먼 곳으로 떠돌면서, 널리 경전의 요점을 찾았다. 돌아와 잠청산(潛靑山)의 석실에 머물렀다. 매양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뜻과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정토의 인연으로써 늘 이 두 부의 경을 읽으면서, 대중이 있으면 강론하고, 혼자 있을 때는 암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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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안(謝安)이 오흥을 다스리자, 짐짓 그를 찾아와 공경을 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산중이 그윽이 깊고 막혀서 수레가 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마를 산초(山椒) 나무 밑에 풀어놓고 봉우리를 넘어 걸어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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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간문황제(簡文皇帝)는 당읍태수(堂邑太守) 곡안원(曲安遠)을 파견하여 조서를 보내 일상생활을 위문하였다. 아울러 요상한 별이 나타난 일을 여쭈어, 법광에게 힘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법광은 조서에 답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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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송(宋: 前宋)의 경제(景帝)가 복덕을 닦았더니, 요사한 기운의 별이 자리를 옮겼습니다. 폐하께서 등극하신 이래 정치와 형벌을 참으로 잘 닦으시고, 천하의 무거운 임무를 맡아 모든 일을 풍부하게 잘 처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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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털끝만큼만 잘못하여도 결과는 천 리의 차질이 생기는 법입니다. 마땅히 부지런히 덕(德)으로 다스림을 닦으시어, 하늘의 견책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빈도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주상에게 보답하여야 하오나, 실로 마음은 있어도 힘이 없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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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제자들과 더불어 재(齋)를 올리고 예참을 하였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재난이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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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흥녕 연간(363~365)에 동쪽 우혈(禹穴: 會稽山)로 노닐며 산수를 관람하였다. 비로소 약야(若耶)의 고담(孤潭)에 머물렀다. 고개 옆 잿마루를 의지하여, 한적함에 깃들어 뜻을 기르고자 하였다. 극초(郄超)·사경서(謝慶緖) 등과 모두 세속 밖의 사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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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쪽 나라 대부분에 돌림병이 휩쓸었다. 법광은 이미 어려서부터 자비를 익힌 데다, 아울러 신령한 주문[呪]에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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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산촌 마을을 유행하면서 위급한 환자들을 구제하고, 곧 고을로 나와 창원사(昌原寺)에 머물렀다. 백성들 가운데 병이 있는 사람은 자주 이곳에서 기도하여 효험을 보았다. 이 때 귀신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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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광이 걸어가고 머무는 곳에는 항상 수십 명의 귀신이 그의 앞뒤를 호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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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축도린(竺道隣)이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 阿彌陀佛像)을 조성하였다. 법광은 곧 그와 인연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큰 불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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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나무를 베다가 가뭄을 만났다. 법광이 주문을 외워 물이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진(晋)의 효무(孝武)황제가 바람결에 전하는 소문을 들었다. 흠모하여 서울로 나오라고 요청하였다. 스승의 예로 섬기며 장간사(長干寺)에 머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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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흥(元興) 원년(40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산기상시(散騎常侍) 고개지(顧愷之)가 그를 위하여 찬과 전기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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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축도일(竺道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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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의 성은 육(陸)씨이며 오(吳: 江蘇省)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곧고 바르며 학업의 소양이 있었다. 그러나 자취를 감추고 지혜를 숨겨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와 함께 오래 거처하여야만 그가 신과 같이 빼어남을 알았다. 낭야왕(瑯琊王) 사마순(司馬珣) 형제도 깊이 공경을 더하여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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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태화(太和) 연간(366~370)에 서울로 나가서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법태에게 수학하였다. 몇 년 사이에 생각이 깊고도 깊은 곳까지 꿰뚫었다. 그러므로 강론할 때면 서울이 기울도록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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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태의 제자 담일(曇一)도 우아한 도풍과 지조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담일을 대일(大一)이라 부르고, 도일을 소일(小壹)이라 불렀다. 명성과 덕망이 서로 이어져서 당시에 강론의 종사가 되었다. 진의 간문(簡文)황제도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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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알아주고 중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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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붕어할 무렵 법태도 죽었다. 그러자 도일은 곧 동쪽으로 돌아와 호구산(虎丘山: 左蘇州)에 머물렀다. 학도들이 간절히 만류하였으나 멈추지 않았다. 이에 단양(丹陽)의 윤이(尹移)로 하여금 도일을 서울로 모셔오게 하였다. 도일이 회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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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제가 듣기로, 크나큰 도의 행실은 은둔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그 뜻을 마음대로 펼치는 것이라 합니다. 요순의 태평성대에도 은둔자들에게서 그 본성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방편을 넓히는 일이야 바깥에 있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먼 곳까지 이른 것에서는 세속을 밟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지를 대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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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진(晋)나라의 광명이 밝아져서 덕의 가피는 소외된 곳이 없습니다. 불법에 높이 경례하여, 이를 넓히고 자라나게 하는 일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역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만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장삼을 걸치고 석장을 흔들면서 달려와 천자의 도읍에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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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애욕을 자르고 욕망을 버려, 맑고 그윽하게 마음을 씻고서, 멀리 텅 빈 세상을 기약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가 깊으면 항상 숨어살면서 뜻을 자비구제에 두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유행하되 한 지방에 머물지 않으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되 오직 도에만 힘쓸 따름입니다. 비록 만물이 날짜 헤아림으로 유혹하여도 식자들은 해마다의 공적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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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약 그 속한 승적(僧籍)을 옮겨서 편호(編戶: 가난한 백성의 호적)에 들어가게 한다면, 아마도 사방을 떠도는 사람들이 성인의 세상에서 절벽을 바라보듯 할 것입니다. 거동을 가볍게 하는 무리들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아, 성대하고 밝은 기풍을 훼손하고 주상의 뜻을 잘못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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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황복(荒服: 邊方)의 손님은 궁궐[天臺]과 무관하며, 그윽한 풀숲 속에 사는 사람은 왕부(王府)에 글을 올리지 않는 법입니다. 다행히 시절을 살피시어 날아오르게 하시면, 훗날 모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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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은 이에 그윽한 언덕에 한가하게 머물러서 궁벽한 골짜기에 그림자를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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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유(帛道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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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약야산(若耶山)에 백도유(帛道猷)란 사람이 있었다. 본래의 성은 풍(馮)씨이며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알려졌다. 성품이 진솔하고 소박하여 은둔 생활을 좋아하였다. 읊고 짓는 시편(詩篇)마다 호상(濠上: 세상을 벗어난 仙人)의 풍모가 있었다. 도일과 강론하는 자리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후 도일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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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느긋하게 산림 아래에서 노닐면서 공자·석가의 글에 마음을 풀었습니다. 흥취에 부딪치면 시가 되고, 봉우리를 넘어가 약을 캐서 복용하면 오래된 병이 덜해집니다. 그러니 즐거움에 남음이 있습니다. 다만 그대와 날을 함께 하지 못하여 한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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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시를 지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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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봉우리 수천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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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숲은 평평하게 나루터를 휘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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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구름에 먼 산 그늘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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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다가오니 황량한 잡목 숲이 시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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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은 가려져 보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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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울어야 사람 있음을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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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좁은 길 한가로이 걸어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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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버려진 땔감이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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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알았노라. 백 대 뒤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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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짓 상황(上皇: 요순)의 백성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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連峰數千里 修林帶平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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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過遠山翳 風至梗荒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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茅茨隱不見 雞鳴知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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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步踐其逕 處處見遺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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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知百代下 故有上皇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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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이 편지를 받고는 자신의 포부에 들어맞는 바가 있었다. 곧 동쪽 야계(耶溪)로 가서 도유와 서로 만났다. 숲 아래에 자리를 정하였다. 이에 티끌세상 밖으로 정신을 마음대로 하면서 경서(經書)로 스스로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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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군수인 낭야왕(瑯琊王) 사마회(司馬薈)가 고을 서쪽에 가상사(嘉祥寺)를 일으켰다. 도일의 기풍과 덕이 드높다 하여 초청해서 승려의 우두머리로 앉혔다. 이에 도일은 곧 6물(物: 三衣와 鉢盂·坐具·甁)을 거둬 절로 보냈다. 그것을 팔아 금첩천상(金牒千像)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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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은 이미 내외의 고전에 해박하게 뛰어났다. 또한 계율의 행실이 깨끗하고 엄정하기에 사방 먼 곳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모두 의지하였다. 묻고 명을 받드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구주도유나(九州都維那)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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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잠시 오(吳)의 호구산(虎丘山)에 주석하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곧 산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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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孫綽)이 그를 위하여 찬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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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달리고 말씀을 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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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연 헛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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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우리 도일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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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로운 남음이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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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면 봄날의 뜰과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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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높고 명예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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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와 잎새 아름답고 무성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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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의 기둥들은 빽빽하면서도 성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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馳詞說言 因緣不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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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茲壹公 綽然有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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譬若春圃 載芬載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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條被猗蔚 枝森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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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道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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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제자인 도보는 성이 장(張)씨이며 역시 오나라 사람이다. 총명하고 지혜로워 일찍부터 성취하였다. 더욱이 강석 위에서 능란하였다. 장팽조(張彭祖)·왕수담(王秀琰) 등으로부터 모두 추앙과 존경을 받았다. 아울러 거슬림이 없는 사귐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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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석혜건(釋慧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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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건의 성은 황보(皇甫)씨이며 북쪽 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계율 있는 행실을 받들어 지켜서 지조가 확고하였다. 여산(廬山)에 십여 년 가량 머물렀다. 도인과 속인들 중에 수승한 도리에 뜻을 둔 자들은 모두 그의 풍채에 의탁하여 사모하지 않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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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여러 경전을 새로이 번역하여 내놓았다. 혜건은 그것을 부연하고 밝히는 것에 뜻을 두어 덕 높은 가르침을 선양하였다. 혜원(慧遠)이 산자락에서 그윽한 교화의 바람을 크게 떨쳤다. 그러자 혜건은 곧 동쪽 오월(吳越) 땅으로 유행하다가 그 지역에 몸을 맡기고, 불교를 널리 전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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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 초기에 산음(山陰)의 가상사(嘉祥寺)로 들어와 자기 욕망을 극복하였다. 그리하여 중생들을 인도하고 몸으로 고행하면서 대중들을 거느렸다. 모든 새로 나오는 경전은 다 베껴 써서 강설하기를 거의 5년 가까이 하였다. 문득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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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스스로 반드시 목숨이 다할 것을 알았다. 생각을 안양정토에 두고 성심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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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음의 이웃 절에 정엄(淨嚴)이란 비구니가 있었다. 오래도록 쌓은 덕망과 계행이 있었다. 밤에 꿈을 꾸니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서쪽 성곽의 문[西郭門]으로 들어왔다. 맑고 빛나는 묘한 형상으로 광명이 해와 달처럼 비추었다. 당기·번기와 꽃으로 만든 일산[蓋]은 모두 7보로 장엄했다. 관세음보살을 보자 곧 예배를 드리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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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님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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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께서 대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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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건을 영접하려고 가상사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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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어 그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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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의 병은 비록 오래도록 위독하긴 했지만, 얼굴빛은 평안하여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시자들 모두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맡았으며, 한참 후에야 멎었다. 혜건 스스로 반드시 세상 끝날 날을 헤아리고, 또한 상서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듣고 본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찬탄하고 그리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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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전 제6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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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혜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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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만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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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해 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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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혜원(釋慧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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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의 성은 가(賈)씨이며 안문(雁門)의 누번(婁煩)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주옥같은 문장 솜씨가 뛰어났다. 열세 살에 외삼촌인 영호(令狐)씨를 따라 허·락(許洛: 許昌과 洛陽)에 유학하였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여러 서생들을 위하여 널리 6경(經)을 종합해 연구하였다. 게다가 『노자』와 『장자』에도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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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과 도량이 넓으며 기풍과 조감(照鑑)이 밝고 빼어났다. 비록 오래 공부한 선비로서 뛰어난 이라 할지라도, 그의 깊은 조예에 감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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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에 강남을 건너 범선자(范宣子)에게 나아가, 함께 세상을 피해 숨자고 약속하려 하였다. 마침 석호(石虎)는 이미 죽었고 중원은 난리가 일어나, 남쪽 길이 막혀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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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사문 도안(道安)이 태행산맥의 항산(恒山)에 절을 세웠다. 불법을 널리 찬양하여 명성이 매우 뚜렷하게 알려졌다. 혜원은 마침내 그를 찾아가 귀의하였다. 한번 만나자마자 공경을 다하여 진정한 나의 스승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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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안의 『반야경』 강의를 듣고 툭 트이면서 깨달아 곧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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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이나 도가 등의 구류(九流)는 모두가 쌀겨와 술지게미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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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아우인 혜지(慧持)와 함께 비녀[簪: 선비의 상투에 꽂는 비녀]를 팽개치고, 머리를 깎고서 목숨을 바쳐 수업하였다. 이미 불도의 문에 들어와서는 우뚝 드러나 무리에서 벗어났다. 항상 불법의 벼리를 모두 거둬들이고자 대법(大法: 대승법)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외우며 간직하기를 밤으로 낮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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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나그네라 자본이 없어 늘 따뜻한 비단옷을 입지 못하였다. 그러나 혜원과 혜지, 두 형제가 삼가하고 공손하여 시종 게으르지 않았다. 사문 담익(曇翼)이 늘 등불과 촛불의 비용을 공급해 주었다. 도안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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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익도사는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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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지혜가 전생의 인연에 바탕을 두었고, 수승한 마음을 오랜 세월[曠劫]토록 일으켰다. 그러므로 정신이 빼어나게 뛰어넘고, 근기의 조감(照鑑)은 멀고도 깊었다. 도안은 항상 그를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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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쪽 중국에 도를 유통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혜원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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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스물네 살에 곧 강설의 자리에 나아갔다. 어느 날 어떤 손님이 강론을 듣다가 실상(實相)의 뜻을 질의하여, 혜원과 문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 손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 나고 어두운 부분이 더욱 많아졌다. 혜원이 곧 『장자(莊子)』의 내용을 인용하여 비슷하게 연계시켰다. 이에 의혹을 품던 이가 환하게 깨달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도안은 세속의 책을 덮어두지 않았으면 하는 혜원의 바람을 특별히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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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의 제자에 법우(法遇)·담휘(曇徽)가 있었다. 모두 풍채와 재주가 환하게 빛나고, 지조와 업이 맑고 민첩하였다. 둘 다 혜원을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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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안을 따라 남쪽 번면(樊沔)지방을 떠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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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僞秦, 符堅이 세운 나라)의 건원(建元) 9년(373)에 진(秦)의 장군 부비(符丕)가 양양(襄陽)을 침략하여 합병하였다. 도안은 주서(朱序)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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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가서 길을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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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마침내 대중을 나누어 각기 갈 곳을 따라 떠났다. 떠나는 길에 임하여 모든 장로대덕[長德]들은 도안으로부터 가르침과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혜원은 한 마디의 가르침도 받지 못하였다. 이에 꿇어앉아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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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만 홀로 훈계와 도움의 말씀이 없으십니다. 저는 사람의 예가 아닌 성싶어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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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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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같은 사람에게 어찌 다시 근심할 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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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이에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남쪽 형주(荊州)로 가서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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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나부산(羅浮山)으로 가고자 심양(潯陽)에 이르렀다. 여산(廬山)의 봉우리가 맑고 고요해 마음을 쉴 만하다 싶어서, 비로소 용천정사(龍泉精舍)에 머물렀다. 이 곳은 물과의 거리가 크게 멀었다. 혜원이 곧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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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곳이 우리가 깃들어 머물 만한 곳이라면, 곧 썩은 땅에서라도 샘물을 뽑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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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끝나자 맑은 물이 솟아 나와 금방 개울을 이루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심양 땅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가 멀리 못 옆으로 가서 『해룡왕경(海龍王經)』을 읽었다. 그러자 갑자기 거대한 뱀이 못에서 공중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큰 비가 내렸다. 그 해는 풍년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대로 거처하던 곳의 호로 삼아 ‘용천정사(龍泉精舍)’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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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문 혜영(慧永)이 서림(西林)에 자리 잡았다. 혜원과는 동문제자로 예전부터 친한 사이였다. 그가 혜원에게 요청하여 마침내 함께 머물렀다. 이때 혜영은 자사(刺史) 환이(桓伊)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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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바야흐로 불도를 널리 펼칠 만한 인물입니다. 지금 문도의 권속들이 이미 광범해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바야흐로 많습니다. 그러나 빈도가 깃들어 있는 곳은 비좁아서 서로 거처할 만한 곳이 못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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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환이는 곧 혜원을 위하여 다시 여산(廬山)의 동쪽에 승방과 불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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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하였다. 동림사(東林寺: 여산의 東南方에 있는 大刹·淨土宗의 本據地)가 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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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처음 정사를 조성할 때 산수의 아름다움을 훤히 다하였다. 뒤로는 향로봉(香爐峯)을 등에 업고, 옆으로는 폭포가 떨어지는 구렁을 끼었다. 바위에 의지하여 기단을 쌓고, 소나무로 집을 마름하고 얽었다. 맑은 개울물이 섬돌을 에워싸고, 흰 구름이 방에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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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절 안에 따로 선림(禪林)을 설치하였다. 빽빽한 숲에는 아지랑이가 엉키고, 널찍한 바위자리에는 이끼가 꼈다. 보고 밟는 모든 사람들은 다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엄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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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듣기에 천축국에 부처님의 영상(影像)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께서 예전에 독룡(毒龍)을 교화하실 때 남기신 영상이다. 북천축국(北天竺國) 월지국(月氏國) 나갈가성(那竭呵城)의 남쪽 옛 신선의 석실 속에 있으며, 지나는 길은 고비 사막에서 서쪽 15,850리에 있다. 매양 기쁜 감회가 가슴에 교차하여, 뜻을 세워 우러러 그 영상을 늘 한번 보고자 하였다. 때마침 서역의 도사가 있어 그 빛나는 모습을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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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이에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 곳에 감실(龕室)을 만들어 지었다. 미묘한 솜씨를 지닌 그림쟁이를 시켜 담담한 채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빛깔이 허공을 쌓은 듯하고, 바라보면 연가나 안개와도 같았다. 빛나는 형상이 밝고 아름다워, 숨어 있는가 하면 뚜렷이 나타났다. 혜원이 이에 곧 명(銘)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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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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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도 크도다. 부처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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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현묘하나 이름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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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되어 변화하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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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떨어져 몸을 떠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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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바위에 빛으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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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정자에 그림자로 엉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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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졌어도 어둡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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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둘수록 더욱 밝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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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하늘 허물 벗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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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령의 조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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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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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 아득하게 끊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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廓矣大像 理玄無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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體神入化 落影離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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廻暉層巖 凝映虛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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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陰不昧 處闇逾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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婉步蟬蛻 朝宗百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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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不同方 迹絶杳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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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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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게 빈 우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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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하거나 장려하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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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빈 듯한 모습 그려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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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쓸어 모습을 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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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갖추어지고 몸은 미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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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는 자태 스스로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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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터럭은 빛을 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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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중에도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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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이 사무치면 곧 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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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으로 두드리면 메아리 일으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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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신 음성 산굴에 머물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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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나루에서 남몰래 완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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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기약이야 있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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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공덕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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茫茫荒宇 靡勸靡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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淡虛寫容 拂空傳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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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具體微 冲姿自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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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毫吐曜 昏夜中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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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徹乃應 扣誠發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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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音停岫 津悟冥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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撫之有會 功不由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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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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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꿈치 돌려 공경함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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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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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과 별은 빛을 감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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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모습들 한 빛깔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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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과 집에는 어둠이 자욱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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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길 헤아릴 수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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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움으로 이를 깨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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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으로 이를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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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바람 비록 멀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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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번뇌 쉬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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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그윽한 살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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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 극치로 부채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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旋踵忘敬 罔慮罔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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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光掩暉 萬像一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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庭宇幽藹 歸途莫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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悟之以靖 開之以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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慧風雖遠 維塵攸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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匪聖玄覽 孰扇其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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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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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유한 음성 멀리 흘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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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동방을 돌아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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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풍을 기뻐하고 도를 사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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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러 현도를 모범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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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끝의 오묘함 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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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비단에 미묘하게 운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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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운 경지 기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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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안개처럼 어리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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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는 참모습을 본떴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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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그럴수록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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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흥취에 옷깃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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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로운 바람 길을 인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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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기운 마루처마를 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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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교차한 아직 먼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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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신묘한 용모를 빼닮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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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한 만남을 방불케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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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音遠流 乃眷東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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欣風慕道 仰規玄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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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盡毫端 運微輕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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託綵虛凝 殆映霄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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迹以像眞 理深其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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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興開衿 祥風引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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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氣廻軒 昏交未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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髣髴神容 依稀欽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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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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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명하고 이를 그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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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영위하고 무얼 구하겠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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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께서 들어주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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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닦음 비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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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티끌세상의 자욱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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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윽한 흐름 비추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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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신령한 못에서 양치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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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를 마셔 부드러움에 이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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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비추고 가려 감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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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내리시어 마침내 두루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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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그리움 남몰래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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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노님 그윽이 상상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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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다하도록 뵐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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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근심 길이 떠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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銘之圖之 曷營曷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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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之聽之 鑒爾所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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庶玆塵軌 映彼玄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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漱淸靈沼 飮和至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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照虛應簡 智落乃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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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懷冥託 宵想神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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畢命一對 長謝百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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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예전에 심양의 도간(陶侃: 東晋의 名將)이 광주(廣州)에 주둔하러 지나갈 때의 일이다. 어떤 어부가 바다 가운데서 저녁마다 신비한 광명이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열흘이 지나자 더욱 그 광명이 크게 일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도간에게 아뢰니, 도간이 그곳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불상에서 일어나는 광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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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는 이 불상을 영접해 돌아와서 무창(武昌)의 한계사(寒溪寺)로 보냈다. 한계사의 주지인 승진(僧珍)이 어느 날 하구(夏口)에 갔다가 밤에 꿈을 꾸니, 절이 화재를 만났다. 이 불상을 모신 집만 홀로 용신(龍神)이 에워쌌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승진이 달려서 절로 돌아와 보니, 절은 이미 모두 불타버리고, 오직 이 불상을 모신 집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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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간이 주둔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 이 불상에 위엄스러운 영험이 있다고 하여 사자를 보내어 영접하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불상을 들어 강가에 이르러 배에 올려놓자, 배가 거푸 뒤집혀 침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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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사자는 무섭고 두려워 돌아왔고, 끝내 불상을 싣고 오지 못했다. 도간은 어려서부터 씩씩한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으나, 평소에 신심이란 거의 없었다. 그런 까닭에 형주와 초나라 일대에서 이를 빗대어 노래가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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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간은 오직 검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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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은 신령함을 드러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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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진흙땅 위로 날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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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함이 어찌 그리도 멀고 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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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으로는 이룰 수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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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으로 부르기는 어렵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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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惟劍雄 像以神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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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翔泥宿 邈何遙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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可以誠致 難以力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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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혜원이 절을 창건하여 이미 이루어지자, 마음으로 받들고자 기원하며 청하였다. 곧 바람에 날리듯 불상이 저절로 가벼워져서, 가고 오는데 지장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비로소 혜원에게 신령한 감응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 그 증거가 민간을 떠도는 노래에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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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중들을 거느리고 밤에서 새벽까지 끊임없이 불도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이 남기신 교화가 여기에서 다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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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부지런히 계율을 지키며 번뇌의 마음을 쉬려는 선비와, 티끌세상을 끊고 맑은 믿음을 지닌 손님들이 모두 기약 없이 찾아왔다. 멀리서도 도풍을 바라보고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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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성(彭城)의 유유민(劉遺民)·예장(豫章)의 뇌차종(雷次宗)·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신채(新蔡)의 필영지(畢穎之)·남양(南陽)의 종병(宗炳)·장래민(張萊民)·장계석(張季碩) 등도 모두 세속과 영화를 버리고, 혜원에 귀의하여 노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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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혜원은 곧 정사의 아미타불앞에 재(齋)를 건립하였다. 서원을 세워 함께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빌었다. 그리고는 유유민(劉遺民)에게 그 글을 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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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維歲) 섭제격(攝提格: 古甲子의 寅年) 칠월(七月) 무진삭(戊辰朔: 초하루날의 日辰) 28일 을미(乙未)일에, 법사 석혜원은 곧은 감흥이 그윽하고 멀게, 묵은 심회가 특별히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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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목숨을 이으려는 동지와 번뇌를 쉬게 한, 곧은 신심의 선비 123명과 여산의 북쪽 반야대정사(般若臺精舍) 아미타불 불상 앞에 모였습니다. 다 함께 향화를 올리면서 공경히 서원하옵니다. 오직 이 한 모임의 대중들이 무릇 시주하는 이치가 밝다면, 삼세(三世)의 이어짐이 드러날 것입니다. 감응을 옮길 수 있는 운수와 부합한다면, 선악의 보응도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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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히 손을 잡고 숨겨져 가라앉은 이치를 미루어, 무상(無常)의 시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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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삼보(三報)의 서로 무너짐을 살펴, 험한 세계에서 몸을 뽑아내기 어려움을 알았습니다. 이곳의 여러 뜻을 같이하는 현인들은 그런 까닭에 저녁에는 두려워하고, 아침에는 부지런히 하여, 우러러 제도할 것을 생각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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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신(神)이라는 것은 감응으로는 교섭할 수 있어도, 자취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에 감응하는 사물이 있으면 어두운 길도 지척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를 찾더라도 주체가 없다면, 멀고 아득한 황하의 나루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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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행히 도모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사람이 마음을 서방정토에 두었습니다. 책을 두드리고 믿음을 열어서, 밝은 마음이 천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기연의 모습은 꿈에 그리던 것에 통하고, 흐뭇한 기쁨은 집 나간 아들이 찾아온 것보다 백 배나 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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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신령한 그림은 빛을 드러내고, 그림자는 신의 조화와 짝을 이루었습니다. 공덕은 진리로 말미암아 함께 하였습니다. 이 일은 사람이 운용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하늘이 그 정성을 열어서 보이지 않는 운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사로운 마음을 이겨내어 정밀하게 생각하기를 거듭하여, 그러한 생각들을 모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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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의 크고 빛나는 업적은 들쑥날쑥하며 공덕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비록 새벽의 기원은 같았다 하더라도, 저녁에 돌아가는 곳은 현격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스승과 벗들이 돌아보아 참으로 슬퍼할 만한 일이니, 이 때문에 강개함에 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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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기다리며 법당에서 옷깃을 바로잡고, 다같이 한 마음을 베풉니다. 그윽함의 극치에 회포를 머물고서, 이 동지들이 멀리 떨어진 세계에서 함께 노닐기를 맹세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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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무리에서 뛰어난 사람이 나와 가장 먼저 신령한 세계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구름 위 높은 산에서 홀로 거룩하여, 그윽한 골짜기에서 함께 보전하자는 맹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서 나아간 이들이라면, 뒤에 오는 이들과 더불어 힘써 채찍질하여 나아가는 도리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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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시 미묘하게 부처님의 자태를 관하여, 마음을 열어 곧게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런다면 깨달음으로 알음알이가 새로워지고, 교화로 말미암아 몸이 바뀔 것입니다. 연꽃을 흐르는 물 속에 깔개로 삼거나, 옥구슬 나뭇가지 그늘에서 시를 읊으며, 구름옷을 팔방에 표표히 나부끼거나, 향기로운 바람에 떠다니면서 삶을 다 미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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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편안함을 잊되 더욱 편안하고, 마음은 즐거움을 뛰어넘되 저절로 기쁠 것입니다. 3도(途)에 다다르더라도 멀리 그곳을 떠나고, 하늘 궁전에서 오만하게 속세와는 길이 이별할 것입니다. 뭇 신령의 뒤를 따라, 그 법도를 이어 태식(太息: 궁극의 休息)을 지향하기를 기약할 것입니다. 이 도리를 궁구하는 일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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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고상한 풍모에다 엄숙하고 행동거지가 방정하고 곧았다. 바라보는 이들 누구나 마음과 몸이 떨려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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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어느 사문이 대나무로 만든 여의(如意: 講說에 쓰는 僧具)를 가지고, 그것을 혜원에게 바치고자 산에 들어와 이틀 밤을 묵었다. 그러나 끝내 말을 하지 못하였다. 가만히 구석자리에 머물다가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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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의(慧義)란 법사는 강직하고 올바른 이로서 두려워하는 일이 적었다. 산에 찾아가면서 혜원의 제자인 혜보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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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범용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서, 혜원의 풍모만 바라보고도 추대하여 복종한다. 이제 시험 삼아 내가 어떻게 하는지 한번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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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이르러 혜원이 『법화경』을 강의하는 때를 만나, 늘 어려운 질문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이 떨리고 땀이 흘러내렸다. 끝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산에서 나와 혜보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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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코 놀라운 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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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들을 굴복하고 대중을 덮는 것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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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감(殷仲堪)이 형주로 가는 길에 이 산을 지나다가 공경을 표시하였다. 혜원과 더불어 북쪽 개울에서 『주역』의 바탕을 논하였다. 해가 저물도록 싫증내지 않았다. 이에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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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견이 진정 깊고도 밝구나. 참으로 그와 같이 되기란 거의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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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司徒) 왕밀(王謐)과 호군(護軍) 왕묵(王黙) 등도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멀리서 스승으로 공경하는 예를 보내었다. 왕밀은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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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이제 막 40줄에 접어들었지만, 노쇠하기는 60세 노인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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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회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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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은 사방 한자나 되는 구슬을 아끼지 않고, 극히 짧은 순간 순간을 무겁게 여겼습니다. 그대가 품고 계신 바를 살피건대, 나이 들도록 살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같군요. 시주께서 순리를 밟아 본성에 노닐거나, 부처의 이법을 타고 마음을 부려서, 이와 같이 하기를 미루어 간다면, 다시 어찌 나이가 더하기를 부러워하겠소이까? 애오라지 이러한 이치를 생각하기를 오래하노라면, 어느새 깨달음을 터득할 것입니다. 부쳐 오신 소식에 답장 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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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盧循)이 처음 남쪽으로 내려와 강주성에 있을 때, 산에 들어와 혜원을 찾았다. 혜원은 어릴 때 노순의 부친인 노하(盧瑕)와 함께 서생으로 지냈다. 그리하여 노순을 만나자 기뻐하면서 옛 이야기를 나눴다. 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에 어떤 승려가 혜원에게 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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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은 나라의 외적입니다. 그와 교분을 두터이 나누시면 의혹을 사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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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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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불법에는 감정으로 취하고 버리는 법이 없다. 어찌 알 만한 이들이 살피지 못하겠는가? 이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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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송의 무제(宋武帝, 420~422)가 노수를 토벌하고자 뒤쫓아 와서, 상미(桑尾)에 장막을 설치하였다. 측근들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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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평소 여산의 주인인데, 노순과 교유가 두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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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 무제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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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세상 밖의 사람이다. 반드시 나와 남이란 차별은 없는 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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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사신을 파견하여 편지를 보내 공경의 뜻을 표시하였다. 아울러 돈과 쌀을 보냈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비로소 그의 밝은 견해에 굴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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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경전이 강동 지방에 전해질 때에는 대부분 미비한 점이 많았다. 선법(禪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또 율장은 듬성듬성 빠져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혜원은 불교의 도에 결함이 있는 것을 개탄하였다. 마침내 제자인 법정(法淨)·법령(法領) 등을 시켜 멀리 여러 경전을 찾았다. 그들은 사막과 설산을 넘어, 오랜 세월 후에 비로소 돌아왔다. 모두가 범어(梵語) 원본을 가져 왔으므로 번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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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도안 법사가 관중(關中)에 있을 때, 담마난제(曇摩難提)를 초청해서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세상에 내놓았다. 중국말에 빼어나지 못하여 자못 의심나고 막힌 곳이 많았다. 그 후 계빈국(罽賓國)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가 여러 경전에 박식하였는데, 진(晋) 태원(太元) 16년(391)에 심양(潯陽)을 찾아왔다. 혜원은 그를 초청하여 다시 『아비담심론』과 『삼법도론(三法度論)』을 번역하였다. 이에 두 가지 배움이 곧 일어났다. 아울러 서문을 짓고 종지를 드러내어 학자들에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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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도를 위하고 불법을 펴기에 힘썼다. 그러므로 매양 서역에서 오는 손님을 만나기만 하면, 간곡하게 정성을 다하여 묻고자 방문하였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관중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다. 곧 편지를 보내 인사[通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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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혜원은 머리 조아려 아룁니다. 지난해 요좌군(姚左軍)의 편지를 받고, 자세히 덕스런 분의 물음에 받들어 봅니다. 어진 분께서는 전에 다른 지역에 계셔서 왕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의 경계선을 넘어 오셨습니다. 이때는 통역[音譯]을 주고받을 형편이 못되었지만,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다만 강호가 어렵고 어두워 형세가 어그러진 것을 한탄할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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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크게 막힌 것을 회통하려는 모임을 이르시려, 보배를 품고 이곳에 오시어 머물고 계신 것을 압니다. 질문이 있으면 하루에 아홉 번 달려간다 하니, 문도들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맛을 흐뭇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모두가 찾아갈 길이 없으니, 눈을 들어 멀리 길을 바라보면서 우두커니 바라보는 고단함만 더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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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늘 불법이 베풀어지고 유포되어, 3방(方)이 함께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비록 시운은 말세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불법의 종취는 옛날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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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지로 고르다 하겠습니다. 참으로 아직 깨달음의 나루터를 미묘한 문에서 두드려, 부처님께서 남기신 신령함과 사무치게 교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슴을 비우고 기약을 남기기에 이르러서는, 하루도 그 생각을 품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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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전단(旃檀)을 옮겨 심으면, 다른 물건도 함께 향기가 몸에 배입니다. 마니보주(摩尼寶珠)가 빛남을 토해내면, 뭇 보배들이 스스로 쌓여집니다. 이것이 오직 가르침에 들어맞는 도리라서, 마치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가르침의 근본은 하나의 형상도 없는데다, 응험은 정으로써 하지 않는 데에 있어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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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불법을 짊어진 사람은 반드시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삼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벗을 사귀는 사람은 공덕을 자기 것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만약에 법륜이 8정도(正道)에서 수레바퀴를 멈추지 않고, 삼보가 세상이 다하는 시기에도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면, 만원(滿願: 부루나존자)이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용수(龍樹)보살이 어찌 전시대의 발자취에서 유독 홀로 거룩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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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림짐작해서 마름한 옷을 보내니, 높은 자리에 오르실 때 이를 입기 원합니다. 아울러 빗물을 여과(濾過)시키는 그릇은 이미 법물(法物)입니다. 이것으로 애오라지 나의 마음을 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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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회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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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은 공경하게 절하옵니다. 아직 만나서 말한 일도 없습니다. 또한 글과 문장도 지나치게 막혀서 인도하는 마음을 통할 길이 없거니와, 뜻을 얻을 인연도 무너져 끊겼습니다. 역마(驛馬)로 전해온 정황으로, 거칠게나마 덕스런 풍모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요즘은 또 어떻게 지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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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들으면 반드시 백 가지를 덮을 수 있는 재능을 갖추셨다고 들었습니다. 불경에 ‘말세에 동방에 반드시 호법보살이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빛나도다! 어진 분이시여! 그대는 훌륭히 그 일을 넓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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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재물을 얻으려면 다섯 가지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 계율, 너른 견문, 말솜씨, 깊은 지혜[福·戒·博聞·辯才·深智]입니다. 이것을 겸비한 이라야 도를 융성하게 하지만, 갖추지 못한 사람은 의심으로 막힙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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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분이시여, 그대는 이것을 갖추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음을 기탁하여 우호를 교통하고, 통역을 통해[因譯] 뜻을 전하였습니다. 제가 어찌 그 뜻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만, 거칠게나마 보내오신 뜻에 보답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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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하여 마름하신 옷을, 조금 손보아 법좌에 오를 때 입고자 합니다. 이것이 보내오신 뜻에 맞을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물건에 맞지 않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제 전에 늘 사용하던 놋그릇으로 만든 쌍구조관(雙口澡灌: 入口가 둘인 세숫대야)을 보내오니, 법물의 수에 갖추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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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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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더럽게 물든 즐거움을 버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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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훌륭히 거두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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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치달려 흩어지지 않음을 얻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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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진실한 모습에 들어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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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공의 상 가운데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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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 즐거워할 곳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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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선의 지혜 즐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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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법성이라서 비출 곳조차 없으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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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거짓 등은 참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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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마음을 머물 곳이 아닐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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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분께서 터득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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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요체를 보여 주기 바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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旣已捨染樂 心得善攝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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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得不馳散 深入實相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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畢竟空相中 其心無所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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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悅禪智慧 是法性無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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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誑等無實 亦非停心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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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者所得法 幸願示其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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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다시 구마라집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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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서늘한데 요즘은 또 어떻게 지내십니까? 지난달 법식(法識)도인이 이곳에 와서 그대가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소식을 전하길래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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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듣기로는 그대가 바야흐로 크게 여러 경전을 번역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시면 서로 묻고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지금 전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수많은 한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문득 수십 조의 일을 묻사오니, 여가가 있으면 한두 가지라도 풀어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록 경전 가운데 나오는 큰 문제점은 아니지만, 그대의 결정을 취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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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구마라집의 게송에 회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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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과 말단은 필경 무엇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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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남과 스러짐이 있음과 없음의 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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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티끌이라도 흔들리는 경계를 건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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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이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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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된 생각이 거듭 서로를 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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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딪치는 이치마다 절로 막힘이 생겨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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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에는 비록 주체가 없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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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여는 것은 한 세간만으로는 안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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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다 깨달은 종사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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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장차 그윽한 만남을 쥘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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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 묻을 것 아직도 아득하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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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을 서로 더불길 기약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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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端竟何從 起滅有無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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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微涉動境 成此頹山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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惑想更相乘 觸理自生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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因緣雖無主 開途非一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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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無悟宗匠 誰將握玄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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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問尙悠悠 相與期暮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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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불야다라(弗若多羅)가 중국에 건너와 관중(關中)으로 가서는 『십송률(十誦律)』의 범본을 외웠다. 구마라집이 이것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3분의 2를 마쳤다. 바로 그 때 불야다라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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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항상 그것이 미비한 것을 개탄하였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진(秦)나라로 들어와, 다시 이 부(部)를 훌륭히 외운다는 말을 들었다. 곧 편지를 써서 제자인 담옹(曇邕)으로 하여금 요청하여, 관중(關中)에서 다시 남은 부분을 번역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십송률』의 전부가 갖추어져 빠진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진(晋)나라 땅에서 얻은 원본은 지금까지 서로 전수한다. 파미르 고원의 현묘한 경전이 관중에서 빼어나게 번역하여, 남쪽의 이 땅까지 오게 된 것은, 혜원의 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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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승려들이 모두 중국 땅에 대승 도사가 있다 칭송하였다. 매양 향 피워 예배할 때마다, 곧 동방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서 마음을 여산의 묏부리에 바치기에 이르렀다. 그의 신령한 이법의 자취는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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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중국 땅에는 아직도 ‘열반상주(涅槃常住)’의 학설이 없었다. 다만 수명이 길다는 말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혜원은 마침내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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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란 지극함이다. 지극하면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는 이법에 어찌 다함이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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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하여 『법성론(法性論)』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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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함은 변함 없음을 본성으로 삼는다. 본성을 얻음은 지극함을 이룸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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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논을 보고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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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나라 사람들이라 아직 경전을 지니지도 못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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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모르는 사이에 이 법과 합치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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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절묘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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邊國人未有經 便闇與理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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豈不妙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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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後秦)의 주인인 요흥(姚興)은 덕과 명성을 흠모하고, 그의 재치 있는 생각을 찬탄하였다. 정중한 편지를 보내고, 믿음의 선물이 연이어졌다. 구자국(龜玆國)의 가는 실을 섞어 짠 변상(變像)을 증정하여, 그것으로 자기의 간곡한 마음을 표시하였다. 또 요숭(姚嵩)을 시켜 구슬로 만든 불상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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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론(釋論)』을 처음 번역하자, 요흥은 이 논을 보내고 아울러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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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大智度論)』의 새로운 번역을 마쳤다. 이는 이미 용수보살이 지은 것이며, 또한 대승 경전의 지귀(旨歸)이다. 그러니 한편의 서문을 지어서 지은이의 뜻을 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이곳의 여러 도사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추천하고 사양하여 감히 손을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법사가 이를 위하여 서문을 지어, 후세의 배우는 이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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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혜원은 회답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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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대지도론』의 서문을 짓게 하여 지은이의 뜻을 펴게 하시려 합니다. 그러나 빈도가 듣기에 큰 것을 품으려면 작은 솜옷으로는 싸안기조차 할 수 없고, 깊은 샘물을 길으려면 짧은 두레박줄로는 어림조차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리신 글을 펴보던 날, 높은 명령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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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부딪치는 일마다 그만두어, 다시 뜻을 내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내려 보내 알리시는 인연의 중함으로, 대략 품은 생각만을 엮을 따름입니다. 연구의 아름다움에 이르려면, 마땅히 다시 여러 눈 밝은 대덕들에게 기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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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명성이 높고도 멀리 알려진 것이 본래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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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항상 『대지도론』이 문구가 번다하고 광범위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뜻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곧 그 요점만을 초록하여 20권의 책을 썼다. 차례대로 드러낸 이치는 깊고 청아하여, 무릇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들이는 일을 절반이 넘게 쉴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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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환현(桓玄)이 은중감(殷仲堪)을 정벌하였다. 군사가 여산을 지나가면서 혜원에게 호계(虎溪)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혜원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에 환현이 스스로 산에 들어왔다. 측근들이 환현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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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은중감이 산에 들어가 혜원에게 예를 갖추었습니다. 공은 그를 공경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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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현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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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은중감은 근본부터가 죽은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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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이르러 혜원을 보자 모르는 사이에 공경을 표시하였다. 환현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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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서 받은 몸은 함부로 헐거나 다칠 수 없다. 그렇거늘 어찌하여 수염을 깎고 머리를 잘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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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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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세워 도를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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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현이 훌륭하게 여겨, 품었던 어려운 질문을 감히 다시 묻지 못하였다. 이어 은중감을 토벌하는 뜻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혜원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환현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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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기를 바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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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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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원은 시주께서도 안온하시고 그[은중감]도 다른 탈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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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현이 산에서 나와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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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태어나서 아직 보지 못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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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현은 그 후 임금을 두려워 떨게 하는 위엄으로써 모시려고 애썼다.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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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편지를 보내어 벼슬에 오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혜원의 대답이 견고하고 바르며 확고부동하여, 그 지조가 단석(丹石)보다 굳어 끝내 되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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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환현은 승려들을 숙청하고자 관료붙이들에게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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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의 가르침을 펴서 진술하고 의리를 유창하게 설법할 수 있거나, 혹 계율의 행실[禁行: 戒行]을 반듯하게 닦아 큰 교화의 베풂에 기여할 수 있는 사문들이 있다. 여기에서 어긋나는 자들은 그만두게 하여 돌려보내라. 오직 여산만은 도덕이 있는 사문이 머무르는 곳이다. 수사 간택의 예에 두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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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환현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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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허물어지고 더럽게 뒤섞여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하나 찾아질 때마다, 분개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였습니다. 항상 뜻하지 않은 운수가 나타나서 불교가 가라앉는 일이 닥칠까 두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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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보건대, 청정한 여러 도인들의 가르침은 진실로 그들의 본심과 호응합니다. 무릇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갈라지면, 맑은 물과 탁한 물의 형세가 달라집니다. 굽은 마음을 곧은 마음으로 바로잡으면, 어질지 않은 것은 스스로 멀어집니다. 이 명령이 행해지면 반드시 한결같은 이치를 여기서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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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에야 거짓으로 꾸민 사람에게서는 거짓으로 통하던 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진실한 생각을 품은 사람에게서는 세속의 기대를 저버리는 혐의가 없어져, 도인과 세속이 번갈아 일어나서 삼보가 다시 융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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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하여 널리 승단의 조례와 규제를 세우자, 환현은 그의 말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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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진(晋)나라 성제(成帝, 326~334)가 어렸을 때 유빙(庾氷)이 정치를 보좌하였다. 그는 ‘사문들이 마땅히 왕자를 공경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때 상서령(尙書令) 하충(何充)과 복야(僕射) 저욱(褚昱)·제갈회(諸葛恢) 등이 아뢰어, ‘사문은 왕자에 경례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관리들의 논의도 모두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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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충의 문하생들이 유빙의 뜻을 받들어 반박하였다. 같거나 다른 의견이 어지럽게 일어나서 끝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 후 환현이 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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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姑熟)에 있을 때 공경을 다하고자, 곧 혜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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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이 왕자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감정에 충실하지 않으며, 이치에 있어서도 밝지 않다. 한 시대의 국가 대사란 그 바탕을 진실하게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간 여덟 사문에게 편지를 띄웠고, 이제 그대에게도 부친다. 그대는 왕자를 공경하지 않는 입장에 대해 진술하도록 하라. 이것은 곧바로 실행해야만 할 일이니, 낱낱이 생각하는 바를 자세하게 진술하여, 반드시 그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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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답장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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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문이라 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두운 세속의 캄캄함을 열어주고, 세상을 교화하는 그윽한 길을 트여주어, 바야흐로 나와 남을 잊는 겸망(兼忘)의 도로써, 천하와 더불어 같이 갈 수 있는 존재를 일컫는 것입니다. 높은 경지를 희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유풍에 고개 숙이게 합니다. 개울물에서 양치질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남은 진액을 맛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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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렇게 된다면 비록 나라의 큰 일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초연한 발걸음의 자취를 볼 것입니다. 깨달은 것도 진실로 이미 넓어질 것입니다. 또한 가사(袈裟)는 조정과 종묘에서 입는 옷이 아닙니다. 발우(鉢盂)는 낭묘(廊廟)에서 쓰는 그릇이 아닙니다. 사문은 티끌세상 밖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왕자에게 공경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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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현은 비록 구차하게 앞서의 자기 뜻을 고집하고, 곧바로 남을 따르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였지만, 혜원의 말뜻을 직접 보고는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얼마 안 되어 환현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자, 곧 교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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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은 크고 위대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상의 마음을 미루어 받들었으므로 공경심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이 이미 내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마땅히 겸양하는 빛을 다하겠다. 그러므로 모든 도인들은 다시 왕자에게 예를 올리지 말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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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이에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었다. 모두 다섯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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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편은 재가(在家)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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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있으면서 법을 받드는 사람은 임금의 교화에 순종하는 백성이다. 그들의 심정은 아직 속인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들의 자취는 사방테두리 안의 사람들과 같다. 그런 까닭에 천륜에 대한 애정[天屬之愛]과 주상을 받드는 예절[奉主之禮]이 있어야 한다. 이 예법과 공경에는 근본이 있기에, 마침내 이것에 인연하여 가르침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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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편은 출가(出家)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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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라 하는 것은 세속을 등짐으로써 자기 뜻을 구하고, 속인에서 변하여 그 도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풍속이 변하면 복장도 세상의 전례(典禮)와 같은 예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등지면 마땅히 그 자취를 고상하게 하여야 한다. 대덕은 그런 까닭에 번뇌 빠진 속인들을 번뇌의 흐름 속에서 구제할 수 있으며, 거듭되는 겁(劫)에서 어두운 근기를 뽑아 올릴 수 있다. 멀리는 삼승의 나루와 통하고 가깝게는 인천세계의 길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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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도가 육친(六親)에 젖어들고, 그 은택이 천하에 흐른다. 비록 왕후(王侯)의 자리에 처하지 않더라도, 본래부터 이미 천자의 도리와 일치하여 생민을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는 천륜(天倫)의 무거운 의리와 어긋나지만, 그 효도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다. 밖으로는 임금을 받드는 공손함이 없지만, 그 공경심을 잃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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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편은 구종불순화(求宗不順化)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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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으로 돌아가 가르침을 구하는 이는 삶 때문에 정신이 괴롭지 않다. 속세의 경계를 초월한 이는 마음 때문에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 마음 때문에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그 삶을 멸할 수 있다. 삶 때문에 정신이 괴롭지 않다면 그 정신이 명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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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명합하면 경계가 끊어지는 까닭에 이를 열반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사문은 비록 만승(萬乘) 천자에게 절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그 일을 높이 숭상한다. 왕후(王侯)의 벼슬을 하지 않지만 그 혜택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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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편은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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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과 주공(周公)·공자는 비록 출발점은 다르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로 영향을 미친다. 출처(出處: 세상에 나가는 것이 出이고,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것이 處이다.)는 모두 다르나, 마지막 기필코 하려 한 곳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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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비록 길이 다르다고 말하지만 돌아가는 곳은 같다. 불겸응(不兼應)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불교와 유교를 겸하여 받아드릴 수 없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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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편은 형진신불멸(形盡神不滅)이다. 그 내용은 ‘인식작용과 정신작용이 치달리면, 이를 따라 우리 몸도 동이니 서로 치달린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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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논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이때부터 사문들은 세상 밖에서의 자취를 온전히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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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현이 서쪽으로 달아나자, 진(晋)의 안제(安帝)가 강릉(江陵)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보국대부(輔國大夫) 하무기(何無忌)는 이때 혜원에게 권유하여 황제를 뵈옵고, 문후를 드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혜원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위로하고 안부를 물었다. 혜원은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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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혜원은 머리 조아려 아뢰옵나이다.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陽月和暖], 수라가 입맛에 잘 맞기를 비옵니다. 빈도는 전에 무거운 병에 걸렸습니다. 나이가 들자 쇠약해져 병이 심해졌습니다. 분수에 넘치게 자비하신 조서(詔書)를 받아보았습니다. 곡진하게 영광스러운 위문을 드리우셔서, 온갖 두려움의 깊음이 실로 가슴에 백 배나 더합니다. 요행히 경사스러운 모임을 만났으나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마음과 감개를 자못 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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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조서로 회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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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을 느끼면서도[陽中感懷] 그대가 앓는 병이 아직 좋아지지 않았음을 알고는 마음에 어리어서 잊을 수가 없다. 지난달에 강릉을 떠났지만, 도중에 온갖 좋지 않은 일이 많아 더디기가 보통 때보다 두 배나 더하였다[遲兼常]. 본래는 그곳을 지나다가 서로 만나기를 바랐다. 그대가 이미 산림에서 원기를 보양하는 터이고, 게다가 앓는 병이 아직 낫지 않았으니, 아득히 다시는 인연이 없을 듯하여 한탄함만 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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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陳郡)의 사령운(謝靈運)은 재주를 믿고 세상에서 멋대로 굴어서, 추앙하거나 숭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번 만나자 숙연히 마음으로 감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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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안으로는 불교의 이치에 뛰어나고, 밖으로는 뭇 서적에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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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그의 문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가 의지하고 모방하지 않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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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혜원은 『상복경(喪服經)』을 강의하였다. 뇌차종(雷次宗)·종병(宗炳) 등이 모두 책을 잡고 그의 취지를 이었다. 그 후 뇌차종은 따로 『상복경의소(喪服經義疏)』를 지어 책머리에서 뇌씨(雷氏)를 일컬었다. 이에 종병이 이를 조롱하는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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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대와 함께 스님 스승[釋和尙: 혜원을 가리킴] 사이에서 얼굴을 마주하여 이 내용의 강의를 받았었지. 그렇거늘 어찌하여 지금 곧 책머리에다 뇌씨(雷氏)를 일컫는다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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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교화가 도인과 속인에 아울러 행해진 이러한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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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여산의 언덕에 자리잡고부터, 30여 년 동안 그의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의 발자국을 세속으로 들여 밀지 않았다. 매양 손님을 보내거나 노닐고 밟는 땅은 호계(虎溪)로 한계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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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 의희(義熙) 12년(416) 8월초에 움직임이 흐트러졌다. 6일째가 되자 괴로움이 더욱 심했다. 이에 대덕과 나이 많은 노승들이 모두 이마를 조아리며 된장을 넣은 술을 마시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았다. 쌀즙이라도 마시기를 청하였으나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꿀물을 타서 장(漿)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니, 곧 율사(律師)에게 명해 책을 펼쳐 글에서 마셔도 되는지를 찾게 하였다. 책의 절반도 넘기지 않아서 세상을 마쳤다. 이때 나이는 83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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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도들이 통곡하니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았다.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오고, 수레바퀴가 이어져서, 어깨와 어깨가 서로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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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범부들의 정을 자르기 어렵다고 여겨 7일장으로 치르게 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소나무 밑에 드러내어 놓았다. 얼마 있다가 제자들이 시신을 거두어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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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태수(潯陽太守) 완보(阮保)는 여산의 서쪽 마루를 뚫어, 굴을 만들어 묘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사령운(謝靈運)이 그를 위하여 비문을 지어, 남긴 덕을 새겼다. 남양(南陽)의 종병(宗炳)도 절 산문에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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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혜원은 문장을 잘 지어 글 분위기가 맑고 우아하였다. 법석에서의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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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은 내용이 정밀하고 간결하게 요점을 잘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기동이 깔끔하고 조용하며 풍채가 속된 기가 없이 깨끗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절에 걸어놓으니,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우러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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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논·서(序)·명(銘)·찬(贊)·시(詩)·편지 등을 모아서, 열 권 오십여 편의 문집을 만들었다. 세상에서 중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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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석혜지(釋慧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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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지는 혜원의 아우다. 성품이 텅 비어 조용하며,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열네 살 때 책 읽기를 배웠다. 하루에 얻은 것이 다른 사람이 열흘에 얻은 것과 맞먹었다. 문장과 역사에 빼어나고, 재치 있게 글을 짓는 솜씨가 있었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형과 함께 도안 법사를 섬겼다. 두루 수많은 경전을 배워 삼장의 분석을 마음대로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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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이 양양(襄陽)에 있으면서 혜원을 동쪽으로 내려가게 할 때 혜지도 함께 갔다. 처음 형주(荊州) 상명사(上明寺)에서 쉬었다. 후에 여산으로 가서 모두 혜원을 따라 함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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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지는 키가 8척이나 되었다. 풍채가 빼어나고 시원하였다. 항상 가죽신을 신고 정강이 절반쯤 오는 옷을 입었다. 여산의 문도 권속들은 영명하고 빼어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드나드는 3천 명이 혜지를 우두머리로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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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지에게는 고모가 있었다. 비구니가 되어 도의(道儀)라 이름하였다. 강하(江夏)에 머물다가 서울에 불법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는, 서울로 내려가 교화를 구경하고자 하였다. 이에 혜지는 곧 고모를 전송하여, 서울에 이르러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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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위군(衛軍)인 낭야왕(瑯琊王) 사마순(司馬珣)과 깊이 서로의 기량을 존중하였다. 당시 서역 사문 승가라차(僧伽羅叉)가 훌륭히 네 부의 『아함경』을 외웠다. 사마순이 요청해서 『중아함경(中阿含經)』을 번역했다. 혜지는 곧 그 글과 말을 교열하고 다듬어서, 소상하게 경문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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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여산으로 돌아왔다. 얼마 되지 않아 예장(豫章) 태수 범영(范寧)이 초청해서 『법화경』과 『아비담(阿毘曇)』을 강론하였다. 이에 사방에서 구름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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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여들고, 천리 밖 멀리에서도 찾아와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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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야왕 사마순이 범영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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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과 혜지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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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영이 회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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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현명한 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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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순은 거듭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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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형과 같은 이만 하더라도 참으로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거늘 하물며 다시 아우까지 현명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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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사(兗州刺史) 낭야왕 사마공(司馬恭)은 사문 승검(僧檢)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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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혜지 형제의 지극한 덕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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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검이 회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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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혜지 형제는 여유작작하여 참으로 도풍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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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관중에 있을 때 멀리서 서로 흠모하고 존경하여, 편지를 보내 좋은 관계를 맺어 훌륭한 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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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혜지는 성도(成都)가 땅이 비옥하고 백성들이 풍족하다는 말을 듣고는 가서 교화할 뜻을 세웠다. 아울러 아미산(峨嵋山)을 구경하려고, 지팡이를 떨치며 민수(岷岫: 蜀山)로 가려 하였다. 이에 진(晋) 융안(隆安) 3년(399)에 혜원의 곁을 떠나 촉(蜀)으로 들어갔다. 혜원이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멈추지 않으니 혜원이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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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나면 모이는 것을 사랑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너는 헤어지는 것을 즐거워하는구나. 어찌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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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지도 역시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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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정에 막혀 모이는 것을 사랑한다면, 본래 출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욕망을 잘라버리고 도를 구하고자 하니, 바로 서방으로 가는 것을 바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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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형제는 눈물을 거두고 말없이 안타까워하며 이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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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 형주(荊州)에 도달하였다. 형주자사 은중감(殷仲堪)이 기뻐하고 존중하며 예우하였다. 당시 환현(桓玄)도 그곳에 있었다. 환현은 비록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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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관련된 공부는 소홀하였지만, 그런 한편으로 신출귀몰한 재주가 있었다. 혜지를 만나보니, 거의 인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홀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고금에 비교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더욱 감탄하여, 크게 기쁜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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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지는 이미 그 사람됨을 의심하였다. 그러기에 마침내 그의 요청을 버리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은중감과 환현 두 사람은 간절히 그를 만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혜지는 더욱 그곳에 머물 뜻이 없었다. 형주를 떠날 즈음하여 환현에게 글을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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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병든 몸을 아미산 묏부리에 깃들여, 고비 사막 밖의 교화를 구경하려고 하였습니다. 처음 떠날 때의 생각을 버릴 수 없어, 곧 행장을 꾸려 그쪽으로 머리를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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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현은 이 편지를 받고 슬퍼하며, 그를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알았다. 혜지는 마침내 촉(蜀)에 이르러 용연정사(龍淵精舍)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불법을 크게 홍포하였다. 정낙(井絡: 四川省)의 사방에서 그의 덕을 사모하는 이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자사(刺史)·모거(毛璩)가 평소 덕을 숭상하여 공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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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慧巖)·승공(僧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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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사문 혜암과 승공이 먼저 촉나라에 와서 사람들과 서로 정답게 지내고 있었다. 혜지가 그곳에 와서 머물자, 둘 다 멀리서 그의 풍모를 듣고는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그러니 모두들 혜지의 승당에 오른 이들을 등용문(登龍門)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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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공은 어릴 때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있었다. 촉군(蜀郡: 成都)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혜암은 내외의 경전에 아는 것이 많았으므로, 평소부터 모거가 존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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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촉나라 사람 초종(譙縱)이 전쟁의 기회를 틈타 모거를 공격하여 죽였다. 촉나라 땅을 나누어 갖고서, 스스로 성도왕(成都王)이라 이름하였다. 곧 승려들을 모아 법회를 마련하고, 혜암을 핍박하여 요청하였다. 혜암은 마지못해 그곳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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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예전부터의 시주인 모거가 하루아침에 상하고 파멸되었기에, 이 일을 눈으로 보자 더욱 슬퍼하여 가슴아파하는 것이 얼굴빛에 나타났다. 마침내 초종이 그를 싫어하여 살해하였다. 그러자 온 고을이 어지러워져서, 도인과 속인들이 위태로워하고 두려워하였다. 혜지는 난을 피하여, 비현(陴縣) 가운데 있는 어느 절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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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종의 조카 도복(道福)은 흉악함과 사나움이 매우 심하였다. 군병들을 거느리고 비현으로 가서 토벌하여 살육한 적이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지나가다가 절에 들어왔다. 사람과 말들이 피로 목욕한 것 같았다. 대중승려들이 크게 무서워하여 한꺼번에 놀라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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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지는 승방 앞에서 세수를 하면서도, 얼굴빛에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도복이 곧바로 혜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혜지는 손가락을 튀기며 물을 걸러내면서, 담담히 태연자약하였다. 도복이 부끄러워 후회하면서 땀을 흘리며 절문을 나왔다. 측근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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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大人)이라. 대중과는 다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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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촉나라 경내가 맑고 편안해졌다. 다시 용연사로 돌아와 머물면서 강설하였다. 재(齋)를 지내며 예참(禮懺)하였다. 늙어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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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晋)·의희(義熙) 8년(412) 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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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에 명을 남겨, 계율 있는 거동을 힘쓰도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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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 이르기를 ‘계율은 평평한 땅과 같아서, 모든 착한 것이 이로 말미암아 생긴다’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행주좌와(行住坐臥)하는 일상생활에 마땅히 삼가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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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홍(道泓)·담란(曇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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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방 중국에서 발간된 경전들은 제자인 도홍에게 부촉하고, 중국 서쪽나라에 있던 경전들은 제자인 담란에게 부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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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홍은 일하는 행실이 맑고 민첩하였다. 담란은 정신의 깨달음이 천성적으로 뛰어났다. 이들은 모두 스승의 발자취를 이어받아, 그것을 법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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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석혜영(釋慧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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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영의 성은 반(潘)씨이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여 사문 축담현(竺曇現)을 섬겼다. 후에 다시 도안(道安) 법사를 엎드려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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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혜원과 함께 나부산(羅浮山) 굴에 집을 지어 살기를 기약하였다. 혜원이 도안의 만류를 받자, 혜영은 먼저 오령(五嶺)을 넘으려 하였다. 길을 떠나 심양(潯陽)을 지날 때에, 고을사람 도범(陶範)이 간절하게 그곳에 머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잠시 여산(廬山)의 서림사(西林寺)에 머물렀다. 그곳의 문도들이 조금씩 많아졌다. 게다가 혜원이 같은 산에 절을 짓자,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마칠 생각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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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영은 곧고 검소하며 자연스러워, 마음이 맑아 욕망을 잘 이겨냈다.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어,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았다. 경전을 매우 좋아하여 경전에 푹 빠지고, 강설을 잘하였다. 푸성귀와 거친 베옷으로 거의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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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따로 한간의 초가집을 산마루 위에 세웠다. 선정(禪定)에 들고자 생각할 때마다, 문득 그곳에 가서 지냈다. 당시 그의 방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특수한 향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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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영의 집안에는 항상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혹 두려워하면, 곧 몰아내어 산에 올라가게 하였다. 사람이 돌아간 뒤에는 다시 되돌아와서, 길들인 것 같이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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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혜영이 고을로 나갔다. 해가 거의 저물 무렵에 산으로 돌아와 오교(烏橋)에 이르렀다. 오교의 영주(營主: 軍營의 首領)가 술에 취하여 말을 타고 길을 막아서, 혜영의 갈 길을 가로막고 보내주지 않았다. 날이 이미 너무 늦어져서 혜영이 지팡이로 멀리 말을 가리켰다. 말이 놀라 달아나서 영주는 땅에 넘어졌다. 혜영은 그를 두 손으로 일으켜서 위로하고 영으로 돌려보내니, 이로 인하여 병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절을 찾아가 뉘우치고 사과하였다. 혜영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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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도가 본래 뜻한 것이 아니었소. 그러니 아마도 경계하라고 신께서 하셨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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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도인과 속인들이 들어 알고는 마음으로 귀의한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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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진남장군(鎭南將軍) 하무기(何無忌)가 심양에 주둔하였다. 호계(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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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에 모여서 혜영과 혜원을 초청하였다. 당시 혜원은 이미 오랫동안 명망을 떨쳤다. 또한 평소부터 재주와 능력도 풍족하였다. 그리하여 따르는 사람 백여 명이 모두 거동이 깔끔하고 조용하며 풍모에 질서가 있었다. 고상한 말과 아름다운 논리를 펼치면, 거동들이 볼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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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영은 조용히 홀로 가서 갑작스레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누더기 옷에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발우(鉢盂)를 지녔다. 그러나 정신과 기력은 자연스러워, 맑은 기운을 흩뿌리며 자랑하는 빛이 없었다. 대중이 모두 그의 곧고 검소함을 존중하여, 도리어 다시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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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어려서부터 그를 선배로 추앙하였다. 그러기에 스스로가 혜영의 뛰어난 행실에 고개 숙이고, 낮고 공손한 몸가짐으로 그의 은근한 복을 빌었다. 혜영은 정밀하고 엄격하게 고행하면서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10년(414)에 병에 걸려 오랫동안 위독했다. 오로지 계율로 몸을 삼가하여, 지조를 지키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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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병상에 누워 고통을 품었으나, 얼굴빛은 느긋하고 기뻐하였다. 죽기 얼마 전에 갑자기 옷을 여미고 합장하며, 신발을 찾아 일어나려 하면서 마치 무엇인가 보는 듯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놀라서 물어보니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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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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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자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83세이다. 산에 있던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맡았다. 7일이 되어서야 향기가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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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융(僧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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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산의 승융 역시 굳은 절개로 신령함과 통하여 귀신들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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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석승제(釋僧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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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제는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여산에 들어와서 혜원에게 수학하였다. 대승·소승의 여러 경전과 세속의 경전·수학·서법에 모두 마음으로 연마하고 노닐며, 그 깊은 요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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꿰뚫었다. 30세가 넘자, 비로소 고을에 나가 개강하여 으뜸가는 강사의 자리를 맡았다. 혜원은 늘 그를 보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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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불법을 크게 퍼뜨릴 사람은 네가 그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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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잠시 여산에 머물다가 갑자기 병이 위독함을 느꼈다. 이에 서방 정토에 정성을 다하여 아미타불을 상상하였다. 이때 혜원은 하나의 촛불을 보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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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안양정토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에 모든 시간을 다투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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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제는 촛불을 잡고 책상에 기대어, 생각을 멈추고 어지럽지 않게 하였다. 다시 대중 승려들이 밤에 모여, 그를 위하여 『무량수경』을 돌려 읽게 청하였다. 5경(更)에 이르자 승제는 촛불을 동학에게 주어, 승려들 가운데로 걸어가게 하고는 잠시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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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자신이 촛불을 잡고 허공을 타고 갔다. 무량수불을 직접 만나 손바닥 위에 영접하여 얹어놓고, 두루 시방세계에 이르렀다가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깨어났다. 이 사실을 모두 자세히 병을 간호하는 사람에게 설명하고는, 한편 슬퍼하고 한편으로 위안 받았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몸[四大]에는 아무런 병의 고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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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저녁이 되자 갑자기 신발을 찾아 일어났다. 눈으로 허공을 거슬러서 마치 무엇인가 보는 듯하였다. 잠시 후 다시 누웠다. 얼굴은 더욱 즐거운 빛이었다. 이어 옆 사람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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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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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몸을 돌려 오른쪽 겨드랑이 쪽으로 굽히고는 말과 기력이 다하였다. 그 때 나이는 45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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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석법안(釋法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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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은 일명 자흠(慈欽)이라 한다.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혜원의 제자로서 계율을 훌륭히 수행하고 많은 경전을 강설하였다. 아울러 선업(禪業)을 닦았다.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들을 잘 교화하고 개도(開導)하여, 사악한 것을 뽑아내어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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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7) 신양현(新陽縣)에 호랑이로 인한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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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었다. 현에 큰 사당 나무가 있고, 나무 밑에는 신묘(神廟)가 있었다. 그 좌우에 사는 백성이 백 명을 헤아렸다. 호랑이를 만나 죽는 사람이 하루저녁에 한두 사람씩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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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은 일찍이 그 현을 돌아다닌 일이 있었다. 해가 저물어 그 마을에 묵었다. 마을사람들은 호랑이가 두려워 일찍 문을 닫아버렸다. 법안은 곧바로 나무 아래로 가서 밤새도록 좌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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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무렵 호랑이가 사람을 업고 와서, 나무의 북쪽에 집어던지는 소리를 들었다. 법안을 보더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라는 것 같기도 하였다. 펄쩍 뛰어 법안 앞에 엎드렸다. 법안은 호랑이를 위하여 설법하고 계를 내려 주었다. 호랑이는 땅에 꿇어앉아 움직이지 않다가 얼마 후에 떠났다. 아침에 마을사람들이 호랑이를 뒤쫓아 나무 밑에 이르렀다. 법안을 보고 크게 놀라고는 신인(神人)이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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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 말이 온 현에 전해지니, 선비와 서민들이 종사로 받들었다. 호랑이의 재앙은 이로 말미암아 종식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묘를 고쳐 절을 세워 법안을 머물게 하였다. 좌우의 발과 정원을 모두 희사하여 대중의 복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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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탱화와 불상을 만들고자 하여 구리의 녹[銅靑]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살림이 힘들어서 얻을 수가 없었다. 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그의 탁상 앞을 빙 돌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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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밑에 동종(銅鍾)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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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깨어나 곧 그곳을 파보았다. 과연 두 구의 동종을 얻어, 그 동종의 녹으로 불상을 이루었다. 그 후 구리는 혜원이 불상을 주조할 때에 도움을 주고, 나머지 하나의 종은 무창태수(武昌太守) 웅무환(熊無患)이 빌려 보다가,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두었다. 그 후 법안이 세상을 마친 곳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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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석담옹(釋曇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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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옹의 성은 양(楊)씨이며 관중(關中) 사람이다. 젊어서 위진(僞秦)에서 벼슬하여 위장군(衛將軍)에 이르렀다. 키가 8척이고 씩씩함과 강함이 보통사람을 뛰어넘었다. 태원(太元) 8년(383) 부견(符堅)을 따라 남방을 정벌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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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진(晋)나라 군대에게 패배하여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서, 도안을 좇아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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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이 저 세상으로 가자, 마침내 남쪽 여산에 몸을 던져, 혜원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내외의 경서를 대부분 두루 섭렵하였다. 뜻이 법을 펴기를 숭상하여, 피로하고 괴로운 것을 꺼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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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혜원을 위하여 관중으로 들어가 구마라집(鳩摩羅什)에게 혜원의 편지를 드렸다. 심부름을 한 것이 거의 십여 년이다. 풍류를 고양시켜 격발하여 산봉우리를 흔들 만큼[搖動峰岫] 강하고 굳세며 과감하였다. 구마라집과 단독으로 마주하여서도 스승인 혜원을 욕보이지 않았다[專對不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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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량사(道場寺)의 승감(僧鑒)이 그의 덕과 이해력에 고개 숙여, 양주(楊州)로 돌아오기를 요청하였다. 담옹은 혜원의 나이보다 많다 하여 마침내 과감하게 떠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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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혜원의 문하에는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음 편하게 자는 부류가 적지 않았다. 혹 훗날 추대하여 사양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작은 인연을 빙자해서 담옹을 문하에서 쫓아냈다. 담옹은 명을 받들고 산에서 나왔으나, 얼굴에서 원망하거나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곧 산의 서남쪽에 초가집을 세워 제자인 담과(曇果)와 맑게 선문(禪門)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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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담과의 꿈에 산신(山神)이 나타나 5계(戒)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담과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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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께서 이곳에 계시니 가서 물어보고 계를 받는 것이 좋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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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담옹은 단의(單衣)를 입고 모자를 쓴 어떤 사람을 보았다. 풍채와 모습이 단아하였다. 종자(從者)는 스무 사람 가량 되었다. 그가 5계 받기를 요청하였다. 담옹은 담과가 앞서 꿈꾼 일로 해서, 이 사람이 산신령임을 알고는 곧 설법하고 계를 내려 주었다. 산신은 외국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선물로 주었다. 예배를 드리고는 인사하고 헤어지자마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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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죽던 날, 달려가 발을 동동거리며 통곡하여 그 아픔이 부자 사이보다 더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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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형주(荊州)로 가서 죽림사(竹林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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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석도조(釋道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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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는 오(吳)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사(臺寺)의 지법재(支法濟)의 제자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있어 정성껏 부지런히 배움에 힘썼다. 후에 동지인 승천(僧遷)·도류(道流) 등과 함께 여산에 들어갔다. 7년 만에 모두 산중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각기 익힌 것에 따라 날로 새로움이 있었다. 혜원은 늘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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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등은 쉽게 깨닫는다. 모두가 이들 같다면, 다시는 윤회하여 뒷날 다시 태어날 것을 근심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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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과 도류는 모두 나이 스물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혜원이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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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재주와 의리가 빼어나게 무성하여, 맑은 깨달음이 날로 새로웠다. 이러한 재능을 품고서도 길이 저 세상으로 갔으니, 하나같이 어쩌면 이다지도 가슴 아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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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류는 모든 경전의 목록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어, 도조가 완성하였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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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조는 서울의 와관사(瓦官寺)로 돌아가 강설에 종사하였다. 환현이 늘 그의 강설을 듣고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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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는 늦게 발심했지만 혜원보다 더 낫다. 다만 유교(儒敎)에 대한 해박함이 혜원에 미치지 못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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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환현(桓玄)이 정사를 돕는 자리에 올라, 사문(沙門)들로 하여금 왕자를 공경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도조는 곧 그곳을 떠나 오나라의 대사(臺寺)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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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환현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자, 고을에 명령하여 도조를 서울로 나오게 하였다. 도조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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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인간세계의 일에서 자취를 끊고 하루 종일 도를 강론하였다. 진(晋)의 원희(元熙) 1년(419)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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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요(慧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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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의 제자인 혜요도 경전과 율법을 터득하였다. 교묘한 사고력은 더욱 뛰어났다. 산중에는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刻漏]가 없었다. 이에 개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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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잎의 연꽃을 세워, 흐르는 물결의 바뀜에 따라 열두 시각을 정하도록 하였다. 해시계[晷景]와 차이가 나지 않았다. 또한 나무로 만든 연[木鳶]을 만들었다. 수백 걸음의 거리를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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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순(曇順)·담선(曇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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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에게는 또 담순·담선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모두 교리 이해[義學]로 명성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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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순은 본래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구마라집에게서 수업하였다. 후에 돌아와 혜원에게 사사하였다. 푸성귀를 먹고 덕스런 행실이 있었다. 남만교위(南蠻校尉)·유준(劉遵)이 강릉에 죽림사(竹林寺)를 세우려고 일을 시작해 주기를 청하였다. 혜원은 담순을 그곳에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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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선은 또한 맑고 고상하며 모범적인 풍모가 있었다. 『유마경』에 주석을 달았다. 또한 『궁통론(窮通論)』 등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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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유(法幽)·도항(道恒)·도수(道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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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법유·도항·도수 등 백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 혹은 논리 이해에 깊고 밝으며, 혹은 중생의 일을 바로잡고 구제한 사람도 있고, 혹은 계행이 청정하여 드높은 사람도 있고, 혹은 선정(禪定)에 깊이 들어간 사람도 있다. 모두가 당시 세상에 이름을 떨쳐서, 지금까지 그 일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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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석승략(釋僧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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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략의 성은 부(傅)씨이며 북쪽땅 이양(泥陽) 사람이다. 진(晋)나라 때 하간(河間)의 낭중령(郞中令)을 지낸 부하(傅遐)의 맏아들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장안의 대사(大寺)에 머물면서, 홍각 법사(弘覺法師)의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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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각 법사 역시 한 시대의 빼어난 사문이다. 승략은 처음 그를 따라 수업하다가, 후에 청사(靑司)·번(樊)·면(沔) 지방으로 노닐었다. 육경과 삼장에 통달하였다. 율행을 맑게 삼가하여 불법을 바로잡고 떨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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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장(姚萇)·요흥(姚興)은 일찍부터 그의 이름난 풍모에 고개 숙여 평소 알고 존중하였다. 그들이 황제를 참칭하여 관중을 소유하자, 깊이 서로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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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여 공경하였다. 요흥이 삼보를 받들어 드높게 믿자, 불법의 교화가 널리 성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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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동수(童壽, 鳩摩羅什)가 관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먼 곳의 승려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비구와 비구니가 많아지자 허물과 과실이 간혹 있었다. 요흥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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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가 승가를 배우더라도 괴로움을 참는 단계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찌 허물이 없을 수 있겠느냐? 허물이 있어도 이를 삼가지 않으므로, 마침내 허물이 많아지는 것이다. 마땅히 승려의 우두머리[僧主]를 세워, 불법의 크나큰 바람을 맑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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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조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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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이 동방으로 옮겨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크게 성해져 비구와 비구니가 너무 많아졌다. 마땅히 여기에는 기강이 필요하다. 원대한 규칙을 내려 무너진 실마리를 구제하는 것이 좋겠다. 승략 법사는 젊을 때부터 배움이 넉넉하였다. 늙어서는 덕이 꽃다우니 나라 안의 승주(僧主)로 삼을 만하다. 승천(僧遷) 법사는 선정(禪定)과 지혜를 아울러 닦아서 곧 대중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러니 법흠(法欽)과 혜빈(慧斌)과 함께 승록(僧錄)을 관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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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와 가마와 관리를 공급하였다. 승략은 시중(侍中)의 자리에 준하여 조서를 전해 받아, 양이 모는 수레에다 각각 두 사람을 거느렸다. 승천 등에게도 모두 후하게 공급하였다. 이들은 함께 일하면서 순수하고 검소하여, 넉넉히 당시의 여망에 들어맞았다. 오부대중이 엄숙하고 맑아져서 어느 때 할 것 없이 게으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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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弘始) 7년(405)에 이르러 칙명으로 친히 믿음을 더하여, 몸을 부축하고 말씀을 알리는 종자(從者)를 각각 30명씩 두게 하였다. 승정(僧正)이란 제도가 생긴 것은 승략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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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략은 몸소 걸어 다니고, 수레와 가마는 늙고 병든 승려들에게 공급하였다. 얻은 공양과 구휼품은 대중의 용도에 충당하였다. 비록 늙은 나이였지만, 경전과 계율을 강설하여 대중을 돕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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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弘始, 399~416) 말년에 장안의 대사(大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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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석도용(釋道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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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융은 급군(汲郡) 임려(林慮) 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였다. 그의 스승은 그의 정신과 풍채를 사랑하여, 먼저 불전 밖의 전적을 배우게 하였다. 마을에 가서 『논어』를 빌렸다. 끝내 가지고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이미 다 외어버렸다. 스승이 다시 책을 빌려와서 다시 외우게 하였다.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다 외우니, 감탄하면서 특이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그의 마음대로 유학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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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 살에 이르러서는, 재주와 슬기로운 이해력이 뛰어나 내외의 경서를 마음속에서 노닐었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짐짓 그를 찾아가 묻고 가르침을 받았다. 구마라집이 그를 기특하게 생각하여 요흥(姚興)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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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도융을 만났습니다. 기특하고도 총명한 승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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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이 불러서 보고는 감탄하고 중히 여겼다. 칙명으로 소요원(消遙園)에 들어가 경전을 바로잡고 상세하게 번역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구마라집에게 보살계의 원본을 번역하기를 청하였다. 지금 세상에서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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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중론(中論)』을 번역하여 비로소 두 권을 얻었다. 도융은 곧 강원에 나아가 경문의 글과 말을 분석하여, 맨 먼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뜻을 꿰뚫었다. 구마라집은 다시 도융에게 명하여 『법화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직접 이 강의를 듣고 곧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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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을 일으킬 사람은 도융이 바로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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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사자국(師子國)의 한 바라문(婆羅門)이 나타났다. 총명하고 말재주가 있고 많이 배워서, 서역의 속서(俗書) 치고 펼쳐 외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는 외도의 종사였다. 구마라집이 관중에서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는, 곧 그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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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석씨(釋氏)의 도풍만을 홀로 중국 땅에 전해, 우리들의 바른 교화가 동쪽나라에 젖어들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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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낙타를 타고 책을 등에 지고 장안에 들어왔다. 요흥이 그를 만나보았다. 입과 눈으로 비위를 맞춰 알랑거려[口眼偏僻] 자못 매혹되었다. 바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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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곧 요흥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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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도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습니다[至道無方]. 각각 자신들이 일삼는 것을 존중하기 마련입니다. 지금 중국 땅이 승려들과 변론을 겨루어 보기를 청합니다. 우월함이 드러나는 바를 따라서 교화를 전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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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은 곧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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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관중의 대중승려들은 서로의 부족함을 쳐다보기만 하고 감당할 사람이 없었다. 구마라집이 도융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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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도는 총명하기가 보통사람과 다르다. 말씨름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 위없이 큰 도가 우리 승도들에게 있건만, 그에게 굴복한다면 자못 슬픈 일이다. 만약 외도로 하여금 뜻을 얻게 한다면 법륜의 바퀴축이 꺾어진다. 어찌 그래서야 되겠느냐?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대 한 사람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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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도융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도 재주와 힘이 그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외도의 책을 다 펴서 읽어보지는 못하였다. 곧 비밀히 사람을 시켜 바라문이 읽는 경전의 제목을 베껴오게 하였다. 한번 펴보고서 곧바로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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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날을 정하여 논리를 토론하였다. 요흥이 몸소 그 자리에 나오고,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모두 대궐 아래에 모였다. 관중의 대중 승려들도 모두 사방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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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융은 바라문과 서로 견주어 항변을 주고받았다. 칼날 같은 언변으로 현묘한 기풍을 날리니, 그가 미칠 수 없는 경계였다. 바라문은 스스로 말과 이론으로는 이미 꺾였음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도 널리 많은 책을 읽은 것으로 과시하려 하였다. 이에 도융은 곧 그가 읽은 책과 중국 땅의 경전과 역사책의 이름과 제목을 나열하였다. 그 책의 권수와 부수가 바라문보다 세 배나 더 많았다. 이에 구마라집이 그를 조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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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중국의 넓은 학문[大秦廣學]을 듣지 못하였는가? 어찌하여 홀연히 경솔하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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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문교도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였다. 도융의 발 아래에 머리가 땅에 닿게 절을 하였다. 며칠 안에 얼마 안 되어 떠났다. 불법의 기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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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다시 중국 땅에 일어난 것은 도융의 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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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융은 팽성(彭城)으로 돌아와 항상 강설을 이어갔다. 도를 묻고자 찾아온 사람이 천여 명에 달하였다. 의지하여 따르는 문도들의 수도 3백 명이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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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이 떠들썩한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 항상 다락에 올라가 경전을 펴놓고 완상하였다. 정성을 다해 후학들을 이끌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법을 폈다. 그 후 팽성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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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대품경』·『금광명경』·『십지론』·『유마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모두 세상에서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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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석담영(釋曇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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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영은 혹 북쪽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성품이 텅 비어 고요하여 교유를 그다지 하지 않았다. 가난한 살림을 편히 여기고, 배움에 뜻을 두었다. 행동거지를 자세하게 살펴 지나침을 미치지 못함과 같이 여겼다. 그러나 정신과 기력이 재빨라서 뜻과 행동이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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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화경(正法華經)』과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을 잘 강의하였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천 명을 헤아렸다. 그 후 관중으로 들어가니 요흥이 크게 예의바른 접대를 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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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장안에 이르자, 담영은 그를 찾아가 따랐다. 구마라집이 요흥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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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담영을 만났습니다. 그 역시 이 나라 풍류의 드높은 기준이 될 만한 승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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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은 칙명을 내려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면서 구마라집의 역경을 돕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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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성실론(成實論)』의 번역본이 나올 때, 쟁론하는 문답이 차례대로 거듭 왕복하였다. 담영은 그 지리함을 한탄하였다. 곧 이를 줄여 다섯 번으로 묶어서, 마침내 구마라집에 바쳤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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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훌륭하다. 깊이 나의 뜻에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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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은 그 후 『묘법화경(妙法華經)』을 번역하였다. 담영은 이미 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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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이 경을 으뜸으로 삼았다. 그래서 더욱더 심사숙고하여 곧 『법화의소(法華義疏)』 4권을 지었다. 아울러 『중론(中論)』에 주석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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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산 속 깊이 숨어살면서 티끌세상 밖에서 절조를 지켰다. 공덕을 닦고 선행을 세워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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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석승예(釋僧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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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예는 위군(魏郡)·장락현(長樂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출가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렇지만 나이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의 뜻을 따를 수 있었다. 승현(僧賢) 법사에게 몸을 맡겨 제자가 되었다. 성품이 겸허하고 속내가 민첩하여, 배울수록 때마다 나아졌다. 나이 스물두 살에 이르자 경론에 두루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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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승랑(僧朗) 법사의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의 강의를 들었다. 듣다가 여러 번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였다. 승랑 법사는 승현 법사와는 호상(濠上)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 토론한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같이 가까운 사이였다[濠上之契]. 승현 법사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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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승예의 질문을 받아보았어. 그렇지만 여러 번 생각을 거듭해도 통할 수가 없었어. 뛰어난 스승의 뛰어난 제자라고 일컬을 만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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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살이 되자 , 이름난 나라를 두루 떠돌면서 곳곳에서 강설하였다. 그를 알아주는 이들이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따라와 무리를 이루었다. 그는 항상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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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법은 아무리 미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인과를 알 만큼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선법(禪法)은 아직 전수받지 못하였다. 그러니 마음을 둘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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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구마라집이 관중에 이르렀다. 그에게 청하여 『선법요(禪法要)』 3권을 번역했다. 첫 권은 구마라타(鳩摩羅陀)가 지은 것이고, 마지막 권은 마명(馬鳴)이 설법한 것이다. 중간 권은 외국의 여러 성인들이 함께 지은 것이어서, 역시 『보살선(菩薩禪)』이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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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예는 이 책을 얻고는 밤낮으로 이를 닦고 익혔다. 마침내 색·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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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촉의 다섯 경계를 정밀하게 단련하고, 훌륭히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뿌리를 맑게 하는 경지에 들어갔다. 위사도공(僞司徒公) 요숭(姚嵩)이 깊이 예로써 귀하게 대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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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姚興)이 요숭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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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예는 어떠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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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숭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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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업(鄴)과 위(衛)의 소나무와 잣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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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은 칙명을 내려 그를 만났다.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여 그의 재능과 기량을 구경하였다. 승예는 고상한 인품이 깊고 높으며, 머금고 토해내는 말이 빛나고 빈틈이 없었다. 요흥이 크게 칭찬하고 기뻐하였다. 곧 칙명으로 봉록과 관리와 사람과 가마를 공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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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요흥은 요숭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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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예는 곧 사해의 영수[四海標領]이다. 어찌 한낱 업과 위의 소나무와 잣나무에 그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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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멀리 퍼져나가,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의 덕에 귀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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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번역하는 경은 모두 승예가 참고하여 바로잡았다. 예전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의 「수결품(受決品)」에 이르기를, ‘하늘은 사람을 보고 사람은 하늘을 본다[天見人 人見天]’고 하였다. 구마라집이 이 경을 번역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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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서역의 말뜻과 같다. 다만 말이 실질보다 지나친 점이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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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예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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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사람이 교접하여 둘이 서로 마땅함을 만나는 것[人天交接 兩得相見]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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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기뻐하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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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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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빼어난 깨달음의 두드러져 나옴이 모두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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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성실론』의 번역본이 나오자, 승예를 시켜 이를 강의하였다. 구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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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승예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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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쟁론(諍論) 가운데는 일곱 개의 변화된 곳이 있다. 그 글이 아비담의 이론을 논파한다. 그러나 말에 나타나 있는 것은 적고 숨겨져 있기에, 만약 물어보지 않고 터득한다면 뛰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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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예가 그윽하고 은미한 뜻을 열고 밝히면서, 끝내 구마라집에게 자문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참뜻에 맞게 아득한 이치를 이해하였다. 구마라집이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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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론을 번역하면서 그대와 만났으니 참으로 한탄할 바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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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론(大智論)』·『십이문론(十二門論)』·『중론(中論)』 등의 서문을 지었다. 아울러 『대품경(大品經)』·『소품경(小品經)』·『법화경』·『유마경』·『사익경(思益經)』·『자재왕선경(自在王禪經)』 등의 서문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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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승예가 훌륭히 위의를 가다듬어 경법을 널리 편찬하면서부터, 항상 이 모든 업적을 회향하여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늘 일상생활의 어느 때라도 감히 서쪽으로 똑바로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 후 스스로 명이 다함을 알고, 문득 승려들을 모아 고별인사를 하면서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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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 서원하여 서방세계에 태어나고 싶었다. 내가 보는 바대로라면 어쩌면 갈 수 있을 것이다. 잘 모르겠으나, 결정코 벗어나리니 여우처럼 의심하지 말거라. 다만 몸·입·생각으로 지은 업보는 혹 서로 어긋나고 범하기도 하였다. 원컨대 큰 자비를 베풀어 오랜 겁토록 불법의 벗들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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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방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목욕하고, 향 피우고 예배드렸다. 침상으로 돌아와 서방을 향하여 합장하면서 세상을 마쳤다. 이날 같은 절에 있던 이들은 모두 오색의 향기가 감도는 연기가 승예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때 나이는 67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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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해(僧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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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사문 승해도 승예와 동학으로 역시 높은 명성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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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석도항(釋道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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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항은 남전(藍田) 사람이다. 아홉 살 때 길에서 놀 때에 은둔하는 선비인 장충(張忠)이 그를 보고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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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는 보통사람을 훌쩍 뛰어넘는 상(相)이 있다. 속세에 있으면 재상이 되어 반드시 정치를 보좌하는 공이 있을 것이다. 도에 처하면 반드시 불법을 빛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늙어서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 한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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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항은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계모를 섬기면서 효자로 알려졌다. 집이 가난하여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 항상 손수 그림을 그리고 비단을 짜서 계모를 받들어 모시는 데 썼다. 몹시 경전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배움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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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스무 살에 이르러 계모도 죽자, 장사 지냄에 예를 다하였다. 상복을 다 입고 나서는 출가하였다. 불교 논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아울러 뛰어난 것이 많아 배움이 내외의 경전에 해박하였다. 재치 있는 생각은 맑고 민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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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구마라집이 관중으로 들어왔다. 곧 그를 찾아가 제자의 예를 닦으니, 구마라집이 크게 가상하게 생각하였다. 여러 경전을 번역하기에 이르러서는 모두 자세하게 바로잡는 일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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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道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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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항의 동학으로 도표가 있었다. 그도 자못 재능과 힘이 있어 당시 명성을 독차지하여 도항과 버금갔다. 위진(僞秦)의 왕 요흥(姚興)은 도항·도표 두 사람을 신령한 기운이 걸출하고 밝아서, 나라를 다스릴 도량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곧 위상서령(僞尙書令) 요현(姚顯)에게 명령하여, 도항·도표 두 사람을 끈질기게 핍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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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그만두고 왕업을 도와 떨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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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도항 도표에게 글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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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들의 밝은 지조는 실로 가상스러운 점이 있다. 다만 나는 사해에 군림하여 정치에 재능 있는 사람이 급히 필요하다. 지금 상서령 요현에게 명령하여, 경들의 법복을 빼앗게 하여 이 시대의 세상을 돕게 하였다. 진실로 마음을 도를 맛봄에 둔다면, 어찌 도인·속인의 차별에 얽매이겠는가? 바라건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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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 생각을 알아주어서 절조를 지키겠다며 사양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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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도항·도표은 회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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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에 조서를 받들어보았습니다. 저희들의 법복을 빼앗으신다는 명을 받고는, 슬픈 마음에 젖어 속된 정[五情]을 지키는 것조차 잃었습니다. 저희들은 재질이 어둡고 짧으며 불법에 물든 지도 아직 깊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승복 아래에서 신명을 다하기를 맹세하였습니다. 아울러 불법을 익히느라 세속의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부질없이 비상한 업적만 폐지하여, 끝내 특수하게 남다른 공로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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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오히려 엄릉(嚴陵)의 마음을 구속하지 않았습니다. 위(魏)의 문제(文帝)도 관영(管寧)의 지조를 받아 들였습니다. 지존의 높은 마음을 억누르고 필부의 미미한 뜻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께서는 불도로써 중생을 다스리고 아울러 삼보를 널리 퍼뜨리고 계십니다. 원컨대 인민의 심정을 비추어보시고, 중생에 통달한 이치를 널리 드리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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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은 다시 구마라집과 승략(僧䂮) 두 법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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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지 이미 몇십 일이 되어 매양 그리움이 더해간다. 차츰 따뜻해지면 크게 쉬겠거니 할 따름이다. 별 볼일 없는 몸이 위대한 거동을 하려다 보니, 더욱더 분수에 맞게 처신할 길이 없어, 딱히 마음만 산란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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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온갖 일의 정성스러움을 재능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할 필요가 있다. 근간에 도항·도표 두 사람에게 조서를 내려, 아라한의 옷을 벗고 큰 선비의 자취를 찾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도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없으니, 원컨대 두 법사가 나를 돕도록 이들을 타이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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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과 승략이 회답하는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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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가장 뛰어난 이는 도로써 백성들을 길러 만물이 스스로를 옳게 여기며, 그 다음가는 이는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고 합니다.1) 그런 까닭에 예전의 밝은 임금은 성품이 어긋난 사람은 다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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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장 뛰어난 사람은 그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그 다음은 가까이하고 기리며, 그 다음은 두려워하고, 그 다음은 업신여긴다. (『노자』 17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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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어렵다는 사실을 살피어, 남에게 맡기는 데에는 인연이 많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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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堯) 임금은 허유(許由)를 기산에 놓아두었습니다. 위문왕(魏文王)은 단간목(段干木)에게 수레에서 인사하는 예를 다하였습니다. 한고조(漢高祖)는 상산사호(商山四皓)2)를 종남산(終南山)에 놓아 주었습니다. 숙도(叔度)는 한악(漢岳)에게 부드러운 수레를 사양하였습니다. 이는 무릇 현인의 성품에 맞추어 현명함을 터득한 조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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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도항·도표 등은 덕이 원만한 경지에 도달한 것도 아닙니다. 분수도 절조를 지키는 정도입니다. 그윽한 교화를 익힌 것도 아주 자잘하여, 불도를 가슴에 새겨 따르는 수준입니다. 심오한 경전을 펼쳐 분석하거나,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를 연구하는 데 이르러서는, 어린 동자들을 깨우쳐 교화의 공덕을 도울 정도의 수준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기왕의 은덕을 베푸시어, 그들의 미약한 지조를 지키도록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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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요흥은 자주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온 경내가 이를 구제하여 위태로움을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이에 도항은 마침내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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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의 말처럼, 나의 재화를 더해주는 것은 나의 정신을 손상시킨다. 나의 명성을 생기게 하는 것은 내 몸을 죽이는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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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림자를 바위 골짜기에 숨기었다. 어두운 수풀더미 속에서 목숨이 다하도록 푸성귀를 먹으면서 선정을 맛보아, 인간세계 밖에서 자취를 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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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의 의희 13년(417)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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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항은 『석박론(釋駁論)』과 『백항잠(百行簪)』을 짓고, 도표는 『사리불비담(舍利弗毘曇)』의 서문과 「조왕교문(吊王喬文)」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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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석승조(釋僧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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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시황 때 국란(國亂)을 피해 섬서성(陝西省) 상산(商山)에 들어 숨은 네 사람의 은사(隱士)를 말함. 호(皓)는 희다는 뜻으로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었으므로 이렇게 일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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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 606] 쪽 |
승조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집이 가난하여 대서(代書)로 업을 삼았다. 마침내 책을 베껴 씀을 인연하여 경전과 역사를 두루 읽고, 고전문헌을 갖추어 다 읽었다. 그윽하고 미묘한 진리를 좋아하여, 늘 『노자』와 『장자』를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어느 날 『노자』의 「덕장(德章)」을 읽다가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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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기는 아름답다. 그러나 정신이 그윽함에 깃드는 방법을 기약하기에는, 아직 선(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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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는 구역 『유마경』을 보고 기뻐하였다. 머리위로 받들어 펼쳐 그 의미를 찾아 완상하고는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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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귀의할 곳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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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인연으로 출가하였다. 배움이 대승의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삼장에 뛰어났다. 나이가 스무 살 때 이름을 관중과 조정에 떨쳤다. 당시 명예를 다투는 무리들이 그의 일찍 출세한 것을 시기하지 않음이 없었다. 혹 천리 밖의 먼 곳에서 책을 지고 달려와, 관중으로 와서는 변론을 겨루기도 하였다. 승조는 이미 재치 있는 생각이 아득하고 현묘한 데다 더욱이 담론에 뛰어났다. 핵심을 타서 그들의 날카로움을 꺾어, 일찍이 흘려 지나치거나 막히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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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조의 덕망 있는 유학자나 관외의 빼어난 선비들치고, 그의 칼날 같은 변론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기운을 누르고 콧대를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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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구마라집이 고장(姑藏)에 이르렀다. 승조가 먼 곳에서 찾아가 따르자 구마라집은 끝없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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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장안으로 가자, 승조도 그를 따라 돌아왔다. 요흥(姚興)은 승조에게 명하여, 승예(僧叡) 등과 더불어 소요원(逍遙園)에 들게 하여, 경론을 자세히 가다듬는 일을 돕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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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는 성인의 시대와의 거리가 아주 멀어서 글 뜻에 조잡한 곳이 많다고 여겼다. 먼저 예전에 해석한 경전에서 때로 틀리고 잘못된 곳에 대해, 구마라집을 만나 묻고 배워서 깨달음이 더욱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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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품경』을 번역한 후에, 승조는 곧 모두 2천여 글자에 이르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3)을 지었다. 마침내 구마라집에게 바치니, 구마라집이 이를 읽고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이어 승조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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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대장경 원본에는 『파야무지론(波若無知論)』으로 나와 있으나, 송(宋)·원(元)·명(明) 세 본과 궁(宮)본에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으로 나와 있으므로 이에 따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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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해력으로는 그대를 물리칠 수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 말할 때 서로 공경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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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산의 숨어사는 선비 유유민(劉遺民)이 승조의 이 논을 보고 곧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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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방포(方袍: 승려의 外衣)에도 다시 평숙(平叔: 漢代의 文章家)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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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이것을 혜원에게 보이니, 혜원이 책상을 어루만지며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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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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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함께 펴서 완미하기를 거듭 되풀이하였다. 유유민은 승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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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름다운 물음을 받고, 멀리 우러러보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연말의 엄한 추위에 건강은 어떻습니까? 소식을 전할 길이 막히니, 더욱 끌리고 답답한 마음만 더해집니다. 제자는 시골구석에서 오래된 병으로 항상 앓습니다. 대중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바라며, 외국에서 온 법사들께서도 편안하고 건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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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끝 무렵에 상인(上人)의 『반야무지론』을 보았습니다. 재주의 운용이 맑고 걸출하시며, 취지 가운데는 깊이 진실한 맛이 담겼습니다. 성인의 글을 미루어 밟아나가, 완연히 돌아가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펴서 정중하게 완미해 보니,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마음을 대승의 깊은 못에서 목욕시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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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품은 회포가 그윽함조차 끊어버린 곳에 있음을 깨달았고, 정교한 솜씨를 다하여 어느 곳도 빈틈이 없습니다. 다만 어두운 사람이라 깨닫기 어려워 아직도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문득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말씀드립니다. 원컨대 조용한 여가에 거칠게나마 이를 풀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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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하여 승조는 편지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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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뵈옵지 못하여 우두커니 상상하느라 수고로울 따름입니다. 전에 보내신 소(疏)와 질문을 펴놓고, 반복해서 그 취지를 찾아보니 기쁘기가 잠시나마 마주 대한 듯하였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삼가 할 절기에, 요즘 항상 어떻게 지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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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도는 고단한 병으로 늘 몸이 좋지 않습니다만, 이곳 대중 가운데 몸담으며 심상하게 지낸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은 크게 건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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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後秦)의 임금4)은 도에 대한 성품이 자연스러워, 타고난 기틀이 속인을 뛰어넘습니다. 삼보를 확고하게 지키고, 도를 펴는 데 힘씁니다. 이로 말미암아 색다른 경전과 뛰어난 승려들이 먼 곳에서부터 이르러, 영취산의 기풍이 이 땅에 모여듭니다. 이를 이끄는 임금의 원대한 거동은 곧 천 년에 한번 있을 나루터나 대들보라 하겠습니다. 서역에서 돌아와 대승의 새로운 경전 2백 여 부를 가져왔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이 대사(大寺)에서 새롭게 여러 경전을 번역하니, 법장(法藏)의 깊고 넓음이 나날이 각별하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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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禪師)5)는 와관사(瓦官寺)에서 선도(禪道)를 가르치니, 문도 수백 명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으며 화목하고 엄숙하여, 스스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또 삼장법사6)는 중사(中寺)에서 율부를 출간하였습니다. 근본과 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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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요장(姚萇)의 아들 요흥(姚興)이다. 서쪽으로 여륭의 군대를 깨뜨리고서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요흥은 사문 승예(僧叡)·승조(僧肇) 등 8백 여 명을 시켜, 구마라집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여 구역경전을 재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은 이전에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여 옛 번역을 새로운 번역어로 바꿔 놓았다. 요흥은 뜻을 9경(經)에 의탁하고, 마음은 12부(部)에 노닐어서, 『통삼세론(通三世論)』을 지어 인과(因果)의 가르침을 밝혔다. |
5)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이다. 불타발타라는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한다. 본래의 성은 석씨(釋氏)이고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 사람으로서 감로반왕(甘露飯王)의 먼 후예이다. 천축국의 나가리성(那呵利城)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불대선(佛大先) 대선사(大禪師)에게 수업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선(禪)과 율(律)로써 명성을 날렸다. 함께 수학한 승가달다(僧伽達多)와 계빈국(罽賓國)에 노닐며 같은 장소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전진(前秦)의 사문 지엄(智嚴)이 계빈국으로 가서, 여러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선법(禪法)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인물로 추천받아, 함께 중국에 왔다. |
6) 불야다라(弗若多羅) 삼장(三藏)이다. 중국말로 공덕화(功德華)라 하며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두루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특히 『십송률(十誦律)』에 정통하였다.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연간(399~416)에 지팡이를 짚고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
진나라 임금 요홍(姚泓)은 위진(僞秦) 홍시 6년(404) 10월 17일에 장안(長安)의 중사(中寺)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 수백여 명을 모아 놓고 불야다라를 청하여 맞이했다. 불야다라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우고, 구마라집은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3분의 2를 끝냈을 때 불야다라는 병에 걸려 갑작스레 세상을 하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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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밀하고 소상하여, 마치 부처님께서 처음 제정한 것을 보는 듯합니다. 비바사(毘婆娑)7) 법사는 석양사(石羊寺)에서 『사리불비담(舍利弗毘曇)』을 출간하였습니다. 범어 원본이라 비록 아직 번역하지는 않았지만, 때로 질문하는 가운데 나오는 말은 신기(新奇)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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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도는 일생을 분수에 넘치게 아름다운 운세에 참여하고 성대한 교화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석가모니의 열반의 집회를 보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그밖에 저에게 무슨 남은 한이 있겠습니까? 다만 도가 뛰어난 군자와 이 법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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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이 깊이 있다고 칭찬하시고, 애오라지 다시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물어 오신 내용이 완곡하고 절실하여, 제가 영읍(郢邑)의 목공처럼 마음대로 요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빈도는 생각이 미세한 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아울러 글과 말에 서투릅니다. 게다가 또 지극한 취지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말하면 근본 종지와는 뒤틀립니다. 이러쿵저러쿵 그만두지 않고 말해 보았자 끝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미친 사람의 말로서 보내오신 취지에 대답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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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담마야사(曇摩耶舍)이다. 중국말로 법명(法明)이라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진(晋)나라 융안(隆安, 397~401) 연간 중에 처음으로 광주(廣州)에 이르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렀다. 담마야사는 「비바사율(毘婆沙律)」을 잘 외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에는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 불렀다. |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長安)으로 갔다. 천축국의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와 함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을 번역하였다. 후진(後秦) 홍시(弘始) 9년(407)에 처음으로 범서(梵書)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16년(414)에 이르러 번역을 마쳤다. 모두 22권이다. 위태자(僞太子) 요홍(姚泓)이 이치와 의미에 친히 관여하고, 사문 도표(道標)가 그를 위해 서문을 썼다. 담마야사는 후에 남쪽 강릉(江陵)을 떠돌다, 신사(辛寺)에 머물러서 크게 선법(禪法)을 펼쳤다. 송나라 원가(元嘉, 424~452) 연간 중에 서역으로 돌아갔다. 임종한 곳을 알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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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승조는 다시 『부진공론(不眞空論)』과 『물불천론(物不遷論)』 등을 지었다. 아울러 『유마경』에 주석을 달고, 여러 경론의 서문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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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구마라집이 죽은 후에, 길이 저 세상으로 간 것을 추도하였다. 발돋움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사무쳐서 마침내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었다. 그 글에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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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는 유여열반(有餘涅槃)·무여열반(無餘涅槃)을 말한다. ‘열반’이란 범어를 중국말로 번역하면 ‘무위(無爲)’라는 뜻이다. 또한 ‘멸도(滅度)’라고도 표현한다. 무위라는 것은 허무적막(虛無寂寞)함이 유위의 세계보다 미묘하게 뛰어남을 취한 것이다. ‘멸도’라는 것은 큰 근심이 영원히 끊어져 4류(流)를 뛰어넘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대개 거울에 비친 모습이 돌아갈 곳이요, 칭호가 단절된 그윽한 집이다. 그러나 ‘유여’와 ‘무여’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나온 곳이 다른 호칭일 것이며, 중생에게 응대하는 거짓이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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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한번 이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무릇 열반의 도라는 것은 고요하고 텅 비어서 형체나 표현으로 얻을 수 없다. 미묘하고 상(相)이 없어서 마음으로 알 수가 없다. 뭇 존재를 뛰어넘어 그윽한 세계로 올라가고, 태허의 허공을 헤아려서 길이 오래간다. 이를 쫓아가려 해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를 맞이하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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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취(趣)로도 그 태어남을 거두어드릴 수 없다. 힘으로 밀어붙여도 그 바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득하게 멀고 황홀하여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다섯 개의 눈으로도 그 얼굴을 볼 수 없고, 두 귀로도 그 메아리를 들을 수 없다. 어둡고 그윽하니, 누가 이를 보았으며 누가 이를 깨달았겠는가? 두루 다스려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면서, 홀로 유·무의 세계 밖에 그 자취를 끌고 간다. 그러므로 이를 말하는 사람은 그 진실을 잃는다. 이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그 어리석음으로 되돌아간다. 이를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 본성과 어긋나며, 이를 없다고 하는 사람은 그 바탕을 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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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석가모니는 마갈성(摩竭城)에서 방문을 닫았고, 유마거사는 비야리성(毘耶里城)에서 입을 다물었다. 수보리(須菩提)는 무(無)의 설을 제창함으로써 도를 밝혔고, 제석과 대범천은 들음을 끊음으로써 꽃이 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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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져 내렸다. 이러한 모든 진리는 신(神)이 거느리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입은 이를 위하여 다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말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말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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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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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해탈이란 말의 작용을 벗어난 것이다. 적멸에 영원히 편히 머물러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으며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맑고 고요하기가 허공과 같아, 이름도 없고 증득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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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論)에서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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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은 유(有)도 아니다. 또한 무(無)도 아니다. 말로 표현할 길은 끊어지고, 마음으로 행할 곳도 멸한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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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경론을 지은 취지를 찾아보면, 이것이 어찌 허구의 말이겠는가? 결과적으로 유(有)가 있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有)가 없다고 하지 않은 이유는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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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가? 유의 경계에서 근본을 따져보면, 5음(陰)은 영원히 멸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의 고을에서 미루어 나가면, 그윽한 신령함은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윽한 신령이 다하지 않으면, 맑고 고요한 하나(도)를 품는다. 5음이 영원히 멸하면, 모든 번뇌를 다 버린다. 모든 번뇌를 다 버리기 때문에 도와 함께 상통한다. 맑고 고요하게 하나를 품기 때문에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다.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기 때문에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한다. 도와 함께 상통하기 때문에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다.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을 ‘유’라 할 수 없다.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하는 것을 ‘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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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유’와 ‘무’가 내부에서 단절되고, 일컬어지고 말하는 일이 외부에서 가라앉아, 보고 듣는 일이 미치지 못하는, 4공(空)이 어두운 경지이다. 맑으면서도 평탄하고 머무르면서도 크나큰 경지이다. 9류(流)가 여기에서 서로서로 귀의한다. 뭇 성인이 여기에서 그윽하게 만난다. 이것이 곧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경지이며, 크게 그윽한 고을이다. 그런데도 ‘유’와 ‘무’로써 그 방향과 구역을 규정지어 신비한 도의 경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어찌 아득히 먼 거리의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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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도 열 번 펼치려다 아홉 번 구부려[十演九折] 무릇 수천 글자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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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렀다. 그러나 글의 분량이 너무 많아 여기에다 싣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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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이 이루어진 후에 요흥(姚興)에게 표(表)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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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뢰옵나이다. 하늘은 하나(도)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며, 군왕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옵니다.8)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사리에 밝고 슬기로우며 몸을 삼가고 이치에 환하십니다. 도와 정신이 잘 만나서 나라 안의 인심과 미묘하게 일치하고 깨우치지 못하는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라의 온갖 기틀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고 하루 종일 도를 펴는 데 힘써, 창생들이 의지하고 힘입도록 글을 드리우셔서 모범을 지으십니다. 그런 까닭에 지경 안에 네 가지 큰 것 가운데 임금이 그 하나로 자리잡은 것입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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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의 도라는 것은 무릇 삼승의 귀의하는 곳이자, 대승의 깊은 곳집입니다. 그 경지는 멀고 아득하여 어렴풋한 세계입니다. 보고 듣는 영역이 끊어져 그윽하게 텅 비고 아득하여, 뭇 중생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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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천한 몸으로 분수에 넘치게 나라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배움터에서 한가롭게 살면서, 구마라집 문하에 있기를 십여 년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많은 경전의 취향이 다르고 뛰어난 귀취가 같지 않더라도, 열반이라는 하나의 진리만은 항상 가장 먼저 듣고 익혀 왔습니다. 다만 저는 재주와 식견이 어둡고 짧아, 비록 여러 번 가르침과 깨우침을 받기는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막막한 생각을 품어 어리석음이 다하도록 그만두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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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마치 어떤 깨우침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높고 뛰어난 분이 먼저 제창하신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감히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구마라집 스승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묻고 참고할 곳이 없는 바가 길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그러나 폐하의 성덕은 외롭지 않아 홀로 구마라집 스승님과 정신으로 계합하시고, 일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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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노자』 39장. |
9) 그러므로 도가 크나큰 어떤 것이라면 하늘땅이 크고 왕 또한 크다. 우리가 사는 지경 중에 네 가지 크나큰 어떤 것이 있는데, 왕이 그 중 하나로 머무른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절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노자』 25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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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도가 자리한 곳을 목격하여 당신의 그 마음을 결정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구마라집 스승님의 현묘한 도풍을 진작시켜, 말세의 풍속을 계도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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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연히 안성후(安成侯) 요숭(姚嵩)으로부터 무위(無爲)의 가르침의 궁극을 묻는 질문에 답했습니다. 자못 열반무명(涅槃無名)의 내용과 서로 넘나듦이 있었습니다. 지금 문득 『열반무명론』을 지었습니다. 열 번을 펼치려다 아홉 번을 구부린 엉터리 글입니다. 그렇지만 널리 수많은 경전의 이치를 캐내어, 그 증거에 기탁하여 비유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으로서 폐하의 무명의 이루심을 우러러 진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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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정신과 마음을 활짝 열고, 멀고도 마땅한 경지를 끝까지 다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불문에 논의를 일으키고, 학도들에게 나눠주어 깨우치고자 할 따름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임금님의 뜻에 참고가 된다면 보존하여 기록해 주시기 원하옵니다. 만약 차질을 빚는다면 내리시는 뜻에 엎드려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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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의 회답한 요지는 정성스러웠다. 이에 찬양의 말을 갖추어 더하고는, 곧 칙명을 내려 베껴 쓰게 하고, 모든 자식과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당시에 중히 여겨진 바가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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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 의희(義熙) 10년(414)에 장안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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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전 제7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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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혜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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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만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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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해 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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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축도생(竺道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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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의 본래 성은 위(魏)씨이다. 거록(鉅鹿) 사람으로 팽성(彭城)에서 거주하였다. 집안은 대대로 벼슬한 문족이며, 아버지는 광척(廣戚) 수령이었다. 고을에서 선량한 사람이라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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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은 어려서부터 빼어나게 훌륭하고, 총명하고 명철함이 신과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비범한 그릇임을 알고 사랑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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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사문 축법태(竺法汰)를 만나, 마침내 속가를 벗어나 불법에 귀의하였다. 법태에게 엎드려 가르침을 가슴에 담아 수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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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법문(法門)을 밟게 되자, 영준한 사고가 기발하였다. 문구의 뜻을 연구하고 음미하여, 곧 스스로 슬기로운 이해력을 열었다. 그런 까닭에 열다섯 살의 나이에 곧 강좌에 올랐다. 토하고 받아들이며 묻고 말하는 것이 주옥과 같이 맑았다. 비록 오랜 덕망이 있는 학승이나 당세의 명사라 하더라도, 모두 생각이 좌절되고 언변이 궁해져서 감히 대항하여 응수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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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구족계를 받을 시기에 이르자 비추어보는 안목이 날로 깊어졌다. 성품과 도량이 기민하고 삼가며, 정신과 기개가 맑고 꿋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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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여산(廬山)에 들어가 7년 동안 숨어살면서 자신이 일삼는 뜻을 구하였다. 항상 도에 들어가는 요체로써 슬기로운 이해력을 근본으로 삼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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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경전을 우러러 숭상하고 잡론(雜論)을 참작하였다. 그러면서 만 리 먼 길이라도 법을 따라, 피곤함과 괴로움을 꺼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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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혜예(慧叡)·혜엄(慧嚴) 등과 함께 장안에 노닐었다. 구마라집을 따라 수업하니, 관중의 대중승려들이 모두 신과 같이 깨닫는다고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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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울로 돌아와 청원사(靑園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진(晋)의 공사황후(恭思皇后) 저씨(褚氏)가 세운 절이다. 본래 푸른 나무를 심은 곳이기에 이것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도생은 이미 당시의 불법의 장인이었으므로 초청되어 머물렀다. 전송(前宋)의 태조(太祖)와 문제(文帝)가 깊이 감탄과 존중을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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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태조황제가 법회를 마련하여, 황제가 친히 대중과 함께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식사를 하사하고 한참이 지나자, 대중들은 모두 이러다가 해가 저물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이 때 황제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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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일중(日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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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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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해가 하늘에 빛나고 천자의 말씀이 비로소 일중이라 하시니, 어찌 일중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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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발우(鉢盂)를 취하여 음식을 먹었다. 이에 온 대중들이 모두 그를 따랐으며, 그가 황제의 속마음을 얻은 일에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홍(王弘)·범태(范泰)·안연지(顔延之)도 모두 그의 덕스런 풍모를 공경하여, 그를 좇아 그에게 도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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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은 이미 사유에 잠긴 지 오래되어 언어 밖의 진리를 철저히 깨달았다. 마침내 한숨을 쉬고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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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형상으로써 생각을 다하지만 참뜻을 얻으면 형상은 잊는 것이다. 말로써 이치를 추구하지만 진리에 들어가면 말은 쉬는 것이다. 경전이 동쪽 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번역하는 사람이 거듭 막히고, 막힌 문구만을 많은 사람이 지키니, 원만한 참뜻은 보기 드물다. 만약 그물을 잊어버리고 고기를 취할 수 있다면, 비로소 더불어 도를 말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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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교열하고, 인과(因果)를 연구하고 사유하였다. 비로소 선(善)은 응보를 받지 않고, 몰록 깨우치면 성불한다는 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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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하였다. 또한 『이제론(二諦論)』·『불성당유론(佛性當有論)』·『법신무색론(法身無色論)』·『불무정토론(佛無淨土論)』·『응유연론(應有緣論)』 등을 지었다. 예전 학설을 그물 속에 가두어 버리는 오묘하게 깊은 취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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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구만을 고집하는 무리들 사이에는 혐오와 질투심이 많이 생겨나, 주거나 빼앗는 소리가 다투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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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섯 권으로 된 『니원경(泥洹經)』이 이보다 앞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생은 경의 이치를 해부하고 분석하여, 훤하게 깊고 미묘한 진리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곧 일천제(一闡提)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설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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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열반경』의 대본(大本)은 아직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롭게 선발로 밝힌 혼자만의 견해는 대중들의 마음에 거슬렸다. 이에 구학(舊學)들은 그의 말이 삿된 주장이라고 비난하며 분개함이 매우 심하였다. 마침내 대중들에게 사실을 밝히고, 그를 승단에서 쫓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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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은 대중 가운데서 얼굴빛을 바로하고 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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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말한 것이 경의 논리에 어긋난다면, 청컨대 현재 이 몸에서 곧 문둥병이 나타나게 하소서. 만약 실상과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면, 원컨대 목숨을 버리는 날 사자좌(師子座)에 앉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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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자 옷을 털고 일어나, 떠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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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오(吳)의 호구산(虎丘山)으로 들어갔다. 열흘 사이에 배우는 무리가 수백 명이었다. 그 해 여름에 청원사의 불전에 우레가 진동하면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 서쪽 벽에 빛나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로 인하여 절 이름을 용광사(龍光寺)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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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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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이미 떠났으니, 도생도 반드시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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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여산으로 자취를 옮겨 바위 산 깊숙이 그림자를 숨기니, 산중의 대중 승려들이 모두 공경하고 승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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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열반경』의 대본이 남쪽 서울에 도착하였다. 과연 “천제(闡提: 성불할 성품이 없는 사람)에게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하여서, 전에 그가 말한 내용과 약속을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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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은 이 경을 얻자 곧 이 경을 강설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11년(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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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경자(庚子)일에 여산정사에서 법좌에 올랐다. 정신과 얼굴빛은 밝게 열리고, 덕스런 음성은 빼어나게 나왔다. 여러 번 논의하면서 이치를 궁구함에 오묘함을 다하니, 보고 듣는 대중들이 깨닫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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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석이 곧 끝나려 할 즈음에 털이개[拂子]가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땅에 떨어졌다. 얼굴을 바로 세우고 단정히 앉아, 책상에 기대어 돌아가셨다. 얼굴빛은 달라지지 않은 채 마치 선정에 들어간 듯하였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놀라고 감탄하였다.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슬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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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서울에 있는 모든 승려들이 마음속으로 스스로의 병폐를 부끄러워하면서, 추모하여 믿고 복종하였다. 그의 신같이 내다보는 지극함이 상서롭게 증명됨이 이와 같았다. 이어 여산의 언덕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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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도생은 혜예(慧叡)·혜엄(慧嚴)·혜관(慧觀)과 동학으로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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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과 혜예는 천진함이 나타나고, 혜엄과 혜관은 깊은 흐름을 얻고, 혜의(慧義)는 교만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구연(寇淵)은 조용히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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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과 혜예만이 천진하다는 지목을 받을 만큼 여러 사람 가운데 우뚝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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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관중(關中)에서 승조(僧肇)가 비로소 『유마경』을 주석하였다. 이 때 세상에서는 모두 이를 음미하였다. 도생은 다시 깊은 뜻을 발굴하여 새롭고 다른 내용을 드러내었다. 여러 경전의 의소(義疏)도 지었다. 세상에서 모두 보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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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王徵)은 도생을 곽림종(郭林宗)에 비유하였다. 그를 위해 전기를 써서 그가 남긴 덕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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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은 도생이 추리한 ‘천제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대하여 근거가 있다고 여겼으며, ‘돈오(頓悟)하면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등등의 주장도 역시 법의 문장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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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태조가 언젠가 도생의 돈오의 의미를 진술하였다. 사문 승필(僧弼) 등이 모두 거세게 비난하자 황제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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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저 세상으로 간 사람(도생)을 다시 일어나게 한다면, 어찌 여러분에게 굴복당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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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寶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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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용광사 사문 보림이 처음에는 장안을 거쳐 수학하였다. 그러다가 후에 도생의 여러 논리를 이어받았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그윽함에 노니는 도생’이라는 유현생(遊玄生)으로 불렀다. 『열반기(涅槃記)』·『이종론(異宗論)』·「격마문(檄魔文)」 등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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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法寶)·혜생(慧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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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의 제자인 법보도 역시 배움이 내외의 경전을 겸한 사람이다. 『금강후심론(金剛後心論)』 등을 지어 역시 도생의 논리를 이어받았다. 근대에는 또 석혜생(釋慧生)이 역시 용광사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많은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초서와 예서(隸書)에 솜씨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같은 절에서 업을 이어받았다 하여, 그들을 대소이생(大小二生: 道生·慧生)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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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석혜예(釋慧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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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예는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절조를 지키고, 엄하게 정진하였다. 그러면서 항상 사방을 떠돌며 배웠다. 어느 때 그는 촉(蜀)의 서쪽 경계를 지나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가서 양치는 목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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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나그네 장사꾼 가운데 불법을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이 사람은 사문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초청하여 경전의 뜻을 물어보았다. 통달하지 않은 경전이 없었으므로, 상인이 곧 그의 몸값을 주고 그를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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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다시 승복을 입었다. 배움에 도탑게 힘씀이 더욱 지극하여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마침내 남천축국(南天竺國)에 이르렀다. 발음과 뜻의 훈고라든가, 여러 나라의 다른 뜻을 반드시 깨우치지 아니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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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돌아와 여산에서 잠시 쉬었다. 갑자기 다시 관중으로 들어가 구마라집을 따라 자문을 받았다. 그 후 서울로 가서 오의사(烏衣寺)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강설하였다. 모든 사유는 말의 테두리 밖까지 뛰어나고, 논리는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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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자재하게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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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前宋)의 대장군(大將軍)인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이 그를 스승으로 삼고자 두 번 세 번 초청하므로 마침내 허락하였다. 이에 왕이 자신의 저택에서 계를 받고자 하였다. 혜예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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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禮)에서 갖추고 찾아와 배운다는 말은 들었으나, 찾아가서 가르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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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크게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곧 절에 들어가 경건하게 절하고 공손히 계법을 받들었다. 뒤에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바쳤다. 승예가 입지 않고 늘상 깔고 앉았다. 왕은 몰래 측근에게 30만 냥을 지불하여 사도록 시켰다. 혜예는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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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내가 입지는 않더라도, 이미 대왕께서 보시한 것이라서 애오라지 편의에 따라 썼을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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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의 사령운(謝靈運)도 독실하게 불교 논리를 좋아하였다. 풍속이 다른 언어를 통달하여 잘 이해하였다. 곧 혜예에게 경전 가운데의 여러 문자와 아울러 많은 발음의 다른 뜻을 물어보았다. 이에 혜예는 『십사음훈서(十四音訓敍)』를 지었다. 조목별로 범어와 중국어를 나열하여 밝게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문자들이 의거할 바가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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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예는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5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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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석혜엄(釋慧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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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엄의 성은 범(范)씨며 예주(豫州) 사람이다. 열두 살에 학생이 되어 시(詩)와 서(書)에 두루 밝았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다시 불교 논리를 상세히 연구하였다. 서른 살에 이르자 뭇 서적을 훤하게 모두 익혀, 소문과 명성이 사방 먼 곳까지 퍼졌다. 더욱이 다른 나라까지 교화로 흠뻑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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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그에게서 수학하였다. 소리와 뜻을 찾아 바로잡는 등 남달리 들은 바가 많았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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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前宋)의 고조황제는 평소 그를 알아주고 중히 여겼다. 그 후 고조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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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장안을 정벌하고자 하여 그와 함께 가기를 요구하였다. 혜엄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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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주의 이번 행차가 비록 죄지은 자를 토벌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빈도는 그 일 밖에 있는 사람이라 감히 명령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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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간절히 요구하므로 마침내 함께 떠났다. 문제(文帝)가 자리에 오르자, 좋아하는 정이 더욱 진해져서 만날 때마다 크게 찬양하고 불법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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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황제가 아직 그다지 불법을 숭상하여 믿지 않을 때인 원가(元嘉) 12년(435)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경윤(京尹) 소모지(蕭摹之)가 계문(啓文)을 올려 절을 세우고, 불상을 주조할 수 있는 제도를 주청하였다. 황제는 시중(侍中) 하상지(何尙之)와 이부랑중(吏部郞中) 양현보(羊玄保) 등과 이 일을 논의하면서 하상지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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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경전을 많이 읽지 못하였다. 요즘에 와서는 더욱 여가가 없어서 삼세(三世)의 인과(因果)에 관해서 아직 마음에 두어야 할지 어떨지 가려내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감히 이 일에 대해서 이의를 내세우는 사람이 없다. 바로 경들이 이 시대의 뛰어난 사람들인데도, 대부분 불법을 공경하여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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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태와 사령운(謝靈運)은 항상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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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경(經)의 글은 본래 세속을 구제하여 다스리는 데 있다. 반드시 신령한 본성의 진실로 오묘함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찌 불경으로 나침반을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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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안영지(顔迎之)의 『추달성론(推達性論)』과 종병(宗炳)의 『난백흑론(難白黑論)』을 보았다. 넓고 깊게 불법을 밝혀 더욱 이름난 이론이었다. 모두가 사람의 생각을 열고 장려할 만한 것이다. 만약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모두 이 교화로 두텁게 할 수 있다면, 짐은 앉아서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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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에 소모지가 청한 제도는 아직 완전히 경전에 통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므로 곧 서로 살펴보아라. 경들에게 더함과 줄임을 맡기노라. 반드시 천박하고 경솔하며 음란한 일을 경계하고 막아서, 불법을 널리 펴는 데 손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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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게 하라. 곧 마땅히 명령대로 이 일에 착수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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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하상지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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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무리들은 대부분 불법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평범하여 윗사람의 총명을 막아 가리는 인물로서 홀로 어리석은 정성만을 지켜왔습니다. 모자라고 엷은 덕으로 불법의 큰 가르침에 오점을 남길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 이와 같이 포상하여 떨치라는 지시를 받으니, 제가 감히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전(前) 시대의 뭇 영명한 인물들과 같았다면, 밝은 조서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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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의 왕조 시대도 이미 먼 옛날이라 다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양자강을 건너온 이래로 왕도(王導)·주의(周顗)·유량(庾亮)·왕몽(王濛)·사상(謝尙)·극초(郄超)·왕탄(王坦)·왕공(王恭)·왕밀(王謐)·곽문(郭文)·사부(謝敷)·대규(戴逵)·허순(許詢) 및 죽은 고조황제의 형제인 왕원림(王元琳)·곤계인 범왕(范汪)과 손작(孫綽)·장현(張玄)·은의(殷顗)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혹은 재상으로서 권좌를 보필한 우두머리였고, 혹은 인륜의 모범이 되었으며, 혹은 뜻을 하늘과 사람 사이에 두었고, 혹은 안개와 노을 밖의 신선의 세계에 높이 자취를 두었습니다. 모두가 불법에 귀의하는 뜻을 품거나, 마음으로 불법을 숭앙하여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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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대비할 만한 인물로는 축법란, 우법개, 축법잠, 강승연, 지둔, 축법숭, 우도수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취가 부처님에 버금가서 때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근세의 도인과 속인들을 펼쳐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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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장 두루 오랑캐와 중국[夷夏]의 인물들을 모두 거론하라 하신다면, 멀리는 한(漢)·위(魏)나라에 이르기까지, 기재(奇才)와 이덕(異德)들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혜원(慧遠) 법사는 일찍이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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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釋)씨의 교화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도(道)를 향해 가는 것은 본래 교(敎)의 근원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속세를 구제하는 것도 또한 중요한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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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이 말뜻을 찾아보니 진리의 깊은 곳과 일치하는 바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만약 집집마다 계율을 지키게 한다면, 온 나라에 형벌이 종식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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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불도징(佛圖澄)이 조나라로 가자 두 석씨[石勒 父子]의 사나움이 줄어들고, 신령한 탑에서 광명이 뻗치자 부건(符健)의 포악함이 줄어들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도리로서 왕의 교화를 도운 것은 그 유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모지가 아뢴 바도 모두 잘못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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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도인과 속인을 좀먹고 손상케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수행이 잘못된 비구와 비구니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정과 모습은 분별하기 어려워서, 버리고 취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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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금·동·토목공사가 비록 소요되는 비용이 점점 커진다 하더라도, 반드시 복업을 기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갑자기 단숨에 단절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요즘 이리저리 짐작해 보느라,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편안하기 어려웠습니다. 오늘 친히 덕스런 말씀을 받드니, 참으로 깊이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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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보(羊玄保)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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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하늘과 인간세계의 즈음을 오가는 것이라 어찌 제가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건대, 진(秦)·초(楚)는 강병(强兵)의 술책을 논하고, 손자(孫子)와 오자(吳子)는 다른 나라를 평정하여 자신의 세력권에 넣으려는 계책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장차 여기에서 취할 것은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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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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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전국(戰國)시대의 도구는 아니라서, 자못 경의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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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하상지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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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숨어사는 도인을 예우하면 싸우는 병사는 태만해집니다.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군병의 사기가 쇠퇴합니다. 만약 손자·오자의 뜻만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다른 나라를 삼키는 일이 있게 된다면, 또한 요순의 도에서는 취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오직 불교에서만 취할 것이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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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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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에 경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은 마치 공자에게 자로(子路)가 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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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같다. 이른바 ‘악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惡言不入於耳]’ 함이 이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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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이 때부터 신심이 일어나 비로소 생각을 불경에 두었다. 그 후 혜엄·혜관 두 승려를 만나자 곧 도의 뜻을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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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안연지(顔延之)는 『이식관(離識觀)』과 『논검(論檢)』을 지었다. 황제는 혜엄에게 명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가려내게 하여서, 하루 종일 문답을 주고받았다. 이 때 황제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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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오늘은 예전 지둔(支遁)과 허순(許詢)의 논쟁1)에 부끄럼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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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엄은 그 후 『무생멸론(無生滅論)』 및 『노자약주(老子略注)』 등을 지었다. 당시 동해(東海)의 하승천(何承天)은 모든 것에 박식하기로 이름이 난 사람이었다. 그가 혜엄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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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나라에서는 무슨 달력을 사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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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엄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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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국에서는 하지(夏至)날 방중(方中) 때가 되면 그림자가 없어진다. 이른바 천중(天中)이 이것이다. 오행에 있어서 토(土)에 해당하고, 색은 황색을 숭상하며, 숫자로는 5를 숭상한다. 여덟 치가 한 자에 해당하고, 열 냥은 이 땅의 열두 냥에 해당한다. 월건(月建)이 진월(辰月)이 되는 달(음력 3월)을 세워서 한 해의 첫 달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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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하지·추분·동지를 찾아 파헤쳤다. 달의 엷어짐과 월식을 미루어 살피는 데 이르기까지, 빛과 그림자의 옮겨감을 헤아리는 법이 매우 자세하였다. 또한 별자리로 해마다의 연기(年紀)를 헤아림에 있어서도 모두 조목마다 예를 갖추었다. 그러므로 하승천은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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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바리국(婆利國)의 사람이 중국에 왔다. 과연 혜엄의 말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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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둔이 말년에는 산음(山陰)으로 나와서 『유마경』을 강의하였다. 지둔이 법사가 되고 허순이 도강(都講)이 되었다. 지둔이 한 논리를 화통하면, 대중들은 허순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허순이 한 질문을 마련하면, 대중들은 또한 지둔이 회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강론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논리는 다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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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임예(任豫)에게 명령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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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반경』이 처음 송나라 땅에 도착하였을 때 글과 말은 잘 되어 있었다. 그러나 품목의 수가 빠지고 간략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이 마음에 담아두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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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혜엄은 혜관·사령운 등과 함께 『니원경』 원본에 근거하여 품목을 추가하였다. 글도 원본의 바탕보다 지나친 것은 고쳐 바로잡으니, 비로소 몇 개의 판본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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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엄은 곧 꿈에 형상이 극히 우람한 어떤 한 사람을 만났다. 그가 성난 목소리로 혜엄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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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열반경(涅槃經)』에 무엇 때문에 경솔하게 그대의 짐작을 가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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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엄은 꿈을 깬 뒤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곧 승려들을 모아, 앞서 출간한 책을 회수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당시 알 만한 이들이 모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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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마도 후세 사람들을 경계하고 격려하고자 할 따름일 것이오. 만약 반드시 응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책이 나온 즉시로 꿈에 나타났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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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엄도 그렇게 여겼다. 얼마 후 다시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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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경전을 널리 펴낸 힘으로 인해 반드시 부처님을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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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엄은 전송의 원가(元嘉) 20년(443) 동안사(東安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1세이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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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엄 법사는 그릇이 크고 학식이 깊어, 도를 배우는 사람들의 종사이다. 갑자기 돌아가시니 가슴이 아프고 슬프구나. 돈 5만 냥과 베 50필을 공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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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지(法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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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지는 혜엄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신통한 이해력이 있었다. 스물네 살 때 강릉에 갔다가, 법아(法雅)의 강론을 들었다. 곧 몇 차례 논의를 거듭하니, 법아가 더 이상 손쓸 여지가 없었다. 법아는 사부대중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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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젊은 사람은 찬란하게 문장을 이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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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지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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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시경』의 「변풍(變風)」과 「변아(變雅)」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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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의 명성은 초(楚)와 영(郢) 지방에 퍼지고, 칭송의 소리는 서울과 오나라를 적셨다. 그는 『성실론(成實論)』과 『대품경(大品經)』·『소품경』에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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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석혜관(釋慧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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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관의 성은 최(崔)씨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열 살 때부터 박식한 견해로 이름을 날렸다. 스무 살에 출가하여 사방을 떠돌면서 수업하였다. 만년에는 여산으로 가서, 다시 혜원(慧遠)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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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관중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남쪽에서 북방으로 가서, 새 경과 옛 경의 같고 다른 점을 찾아 그 차이를 상세히 가려냈다. 그는 풍모와 정신이 빼어나고 청아하며, 생각이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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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취를 통하기로는 도생(道生)과 도융(道融)이 가장 으뜸이며, 힐난을 정밀하게 하기로는 혜관과 승조(僧肇)가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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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법화종요서(法華宗要序)를 짓고, 구마라집에게 살펴보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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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자야, 그대가 논한 내용은 매우 통쾌하다. 그대가 조금 물러나 있으면 곧 남쪽 양자강와 한 수 사이로 노닐 것이다. 잘 널리 유통시키는 것을 힘쓰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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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죽은 후에 곧 남쪽 형주(荊州)로 갔다. 고을의 장군인 사마휴지(司馬休之)가 공경하고 중히 여겨, 그곳에 고리사(高悝寺)란 절을 세웠다. 무릇 형(荊)과 초(楚)의 백성들로 하여금, 삿됨을 돌이켜 올바름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 십 중 다섯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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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무제(武帝)가 남방의 사마휴지를 정벌하면서 강릉에 이르자, 혜관과 서로 만났다. 무제가 마음을 기울여 대접하기를 이전과 다름없이 하니 마치 친구와 같았다. 이어 칙명으로 서중랑(西中郞)과 교유하게 하였다. 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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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 곧 훗날의 문제(文帝)이다. 이윽고 서울로 돌아와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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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관은 이미 미묘하게 불교 논리에 빼어나고, 다시 『노자』와 『장자』를 탐구하였다. 또한 『십송률(十誦律)』에 정밀하게 뛰어나고, 여러 경전의 이치를 널리 캐내었다. 그런 까닭에 법을 찾고 도를 묻는 이들이 모여들어, 하루도 자리가 비는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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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元嘉) 3년(426) 3월 상사일(上巳日: 첫 번째 巳日)에 황제의 수레가 곡수의 연회[曲水宴: 3월 3일에 베푸는 잔치]에 임하였다. 혜관과 조정의 선비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혜관이 곧 앉은 자리에서 먼저 지어 바쳤다. 글 뜻이 맑고 은근하며 사리가 당시의 사정과 일치하였다. 이 때 낭야(瑯琊)의 왕승달(王僧達)·여강(廬江)의 하상지도 모두 맑고 우아한 말로 기쁨을 이루어, 티끌세상 밖의 감상을 나누는 교우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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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변종론(辯宗論)』과 『논돈오점오의(論頓悟漸悟義)』 및 「십유서찬(十喩序贊)」과 여러 경전의 서문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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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복(僧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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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량사의 승복은 본래 풍천(灃泉) 사람이다. 오로지 교리 이해[義學]에 정진하여 『승만경(勝鬘經)』에 주석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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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업(法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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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법업도 본래 장안(長安) 사람이다. 『대품경』·『소품경』과 『잡심론(雜心論)』에 빼어났다. 푸성귀를 먹으며 몸을 절제하였다. 그런 까닭에 진릉공주(晋陵公主)가 그를 위하여 남림사(南林寺)를 지었다. 후에 그곳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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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석혜의(釋慧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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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의의 성은 양(梁)씨며 북쪽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격조 있는 풍모가 빼어나게 드러나고, 뜻한 바 일에서 굳세고 올곧았다. 처음 팽성(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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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송나라 사이에서 유학하고, 두루 경전의 논리에 뛰어났다. 그 후 경사로 나와서 곧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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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주(冀州)에 법칭도인(法稱道人)이 있었다. 임종 때 제자인 보엄(普嚴)에게 전하기를, ‘숭고산의 영험한 신이 말하기를 강동에 유장군(劉將軍)이 있다. 아마도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될 것이다. 나는 서른두 개의 큰 보석과 병 하나를 가득 메운 금으로 신표를 삼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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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송왕(宋王)에게 알려지자 송왕이 혜의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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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한 상서로움 역시 비상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이것이 이루어진다. 만약 법사가 스스로 그곳에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보물을 얻을 길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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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의가 마침내 길을 떠났다. 진(晋)의 의희(義熙) 13년(417) 7월에 숭고산으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지극한 마음으로 향을 사르고 도를 행하였다. 7일째 되는 날 밤, 꿈에 수염이 긴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혜의를 데리고 보배구슬이 있는 곳으로 가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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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위 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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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의가 다음날 곧 산중을 두루 다니다가 한 곳을 보니, 환하게 꿈에서 본 곳과 같았다. 산신령 사당의 돌 제단 아래에서 과연 크고 작은 구슬 서른두 개와 황금 한 병을 얻었다. 이 상서로움은 『송사(宋史)』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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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혜의는 서울로 돌아왔다. 송의 무제(武帝)는 접대에 존중을 더욱 더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예우가 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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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 영초(永初) 원년(420) 거기장군(車騎將軍) 범태(范泰)가 기원사(祇洹寺)를 세우고자 하였다. 혜의의 덕이 높아 세상 사람들의 종사가 될 만하다 여겼다. 절 공사를 시작해주기를 굳게 요청하였다. 혜의는 범태의 맑은 믿음이 지극하다 하여, 의궤와 규칙을 지시하여 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혜의를 사리불(舍利弗)에 비교하고, 범태를 수달(須達)장자에 비유하였다. 그런 까닭에 기원사라는 호칭이 그 일컬음에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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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역의 많은 명승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혹 경전을 번역하거나,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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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법(禪法)을 가르쳐 전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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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가(元嘉, 424~452) 초기에 서선지(徐羨之)·단도제(檀道濟) 등이 조정의 정치에 전권을 행사하였다. 범태는 불평하는 기색을 품었다. 언젠가 한 번은 말을 마음껏 하여 이들을 꾸짖으니, 서선지 등이 깊은 유감을 품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범태가 추측할 수 없는 위기에 처했다고 모두들 근심하였다. 범태도 역시 화가 미칠까 염려하였다. 곧 자기 몸을 안전하게 할 방법을 혜의에게 물었다. 혜의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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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과 순종을 잃지 않음으로써 그 윗사람을 섬기는 까닭에, 위아래가 서로 가까울 수 있는 것이니, 무슨 근심할 만한 염려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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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범태에게 권유하여 과죽원(果竹園) 60무(畝)를 절에 시주하여, 보이지 않는 신의 도움을 받으라 하였다. 범태가 이에 따랐으므로 끝까지 그의 복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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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태가 죽자 셋째 아들 범안(范晏)이 혜의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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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저의 아버님이 위험함을 틈타 설득하여, 과죽원의 땅을 요구한 일은 두고두고 유감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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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이 땅을 빼앗고 주지 않았다. 혜의는 범태의 유소(遺疏)를 증거로 삼아 분규를 일으켜 시끄러워지자,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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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혜의는 마침내 자리를 옮겨 오의사(烏衣寺)에 머물면서 혜예(慧叡)와 함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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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가 21년(444) 오의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3세이다. 그 후 범안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범안의 아우 범엽(范曄)은 공희선(孔熙先)의 역적 모의에 가담해 그 일족이 함께 괴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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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승예(釋僧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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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기원사에 석승예가 있었다. 삼론(三論)에 빼어나 송 문제(文帝)의 존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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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석도연(釋道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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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의 성은 구(寇)씨며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출가하여 서울의 동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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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安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계율을 지키고 오랫동안 교학을 익혀, 많은 경전과 논리를 따지는 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빛을 숨기고 덕을 숨겨, 세상에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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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동안사에서 개강하였다. 그윽하고 미묘한 논리를 해부 분석하고, 깊숙이 숨어 있는 진리를 모두 훤하게 밝혔다. 예전부터 적체되어 온 문제점들을 빛나게 얼음 녹듯 풀이하였다. 이에 배우는 무리들이 그를 다시 보고, 성대하게 그의 덕에 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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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팽성사(彭城寺)로 자리를 옮겨 머물렀다. 전송의 문제(文帝)는 도연의 행실이 많은 사람들의 규범이 된다 하여, 칙명을 내려 절의 주지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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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주지하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8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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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림(慧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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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의 제자인 혜림은 성이 유(劉)씨며, 진군(秦郡) 사람이다. 여러 경전과 『노자』와 『장자』에 빼어나고, 해학과 농담을 좋아하였다. 글을 짓는데 뛰어나기 때문에 열 권의 문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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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품이 오만하고 방종하여 자못 스스로의 자긍심으로 남을 얕보았다. 어느 날 도연이 부량(傅亮)을 찾아갔다. 혜림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연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았다. 이에 도연이 얼굴빛에 노함을 나타내었다. 부량이 마침내 그 벌로 혜림에게 곤장 20대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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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세조(世祖)황제도 자못 혜림을 존중하여 불러들여 만나곤 하였다. 그 때마다 항상 홀로 앉는 걸상에 올라앉았다. 안연지(顔延之)가 늘 이를 비난하니, 황제도 곧 좋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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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백흑론(白黑論)』을 지었지만, 불교의 도리에 어긋났다. 형양태수(衡陽太守) 하승천(何承天)이 혜림과 가까이 친교를 맺어 평소 서로를 격양시켰다. 그는 『달성론(達性論)』을 지었다. 모두가 일방적으로 막히고 치우쳐 불교를 꾸짖고 나무랐다. 안연지와 종병(宗炳)이 이 두 논설을 따져 반박하기를, 각기 만여 글자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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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림은 이미 스스로 그의 법을 허물었기에, 교주(交州)로 배척당하여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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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도연이 마성(麻星)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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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석승필(釋僧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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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필은 본래 오(郡)나라 사람이다. 텅 비운 성품과 간결한 도량에다, 행동거지가 방정하고 곧았다. 어려서 용광사의 담간(曇幹)과 함께 장안에 노닐어 구마라집에게서 수학하였다. 날을 아끼고 힘을 아껴 자못 깊은 생각이 있었다. 구마라집의 칭찬이 더해져서 그를 경전의 번역에 참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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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름난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풍속과 교화를 두루 구경하였다. 당시 어떤 사람이 승필에게 절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승필이 그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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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도[至道]를 널리 펴지 않으면, 순박한 기풍이 날로 멀어집니다. 스스로 선정과 지혜를 아울러 구족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름다운 도풍을 세워서 다스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마땅히 인연 따라 이익을 가져와야 하거늘, 어찌 홀로 한 절만을 좋게 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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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남쪽 초(楚)나라 영읍(郢邑)에 자리잡았다. 10여 년 동안 경전과 계율을 가르치고 권유하여, 크게 강남 지방을 교화하였다.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멀리서 이름난 풍모에 고개 숙였다. 사람을 보내어 공경하는 마음을 전하여, 보내오는 보시가 줄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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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울로 내려와 팽성사에 머물렀다. 문제(文帝)가 그의 그릇됨을 존중하여 늘 초청해서 강설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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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가(元嘉) 19년(44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8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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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석혜정(釋慧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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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의 성은 왕(王)씨며 동아(東阿) 사람이다. 어렸을 때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지방에서 유학하였다. 만년에는 서주(徐州)와 연주(袞州)를 유력하였다. 얼굴은 매우 검으나, 빼어난 식견이 맑고 멀리까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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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낙양 안의 도경(道經)도 슬기로운 이해력이 당세(當世)에 높아, 혜정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그의 귀가 매우 크고 길었던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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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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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에는 귀가 크고 긴 인물이 있고, 동아에는 먹처럼 검은 얼굴의 인물이 있다네. 묻는 말에 응수 못하는 것이 없고, 응수하면 막히지 않는 사람이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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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은 지극하게 성품이 허통하고 맑으며, 소상하게 생각하는 힘이 있었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곧 책을 짊어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천 명이었다. 나라 안의 학문을 일삼는 이들이 반드시 모여들지 않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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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과 『소품경』을 외우고, 『유마경(維摩經)』과 『사익경(思益經)』에 주석을 달았다. 『열반약기(涅槃略記)』·『대품지귀(大品旨歸)』·『달명론(達命論)』을 지었다. 아울러 여러 법사들의 뇌문(誄文: 弔文)을 지어 대부분 북쪽 땅에 유전되었다. 그러나 양자강을 넘어 전해진 것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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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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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석승포(釋僧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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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포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 관중(關中)의 구마라집에게서 수학하였다. 전송의 영초 연간(420~422)에 북서(北徐) 지방을 유행하였다. 황산정사(黃山精舍)에 들어가 다시 정(靜)·정(定) 두 스승을 찾아가 학업에 매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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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곳에서 21일간의 보현재참(普賢齋懺)을 행하였다. 7일째 되던 날 흰 고니들이 날아와, 보현보살의 자리 앞에 모여들었다. 중간에 이르러 향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마치자 고니들이 떠났다. 21일째 되던 날 해가 저물 무렵에, 또 노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탑을 몇 바퀴 돌더니 문득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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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포는 어려서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더욱이 상서로운 일까지 감응한 까닭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이로 인하여 더욱 굳세졌다. 날마다 만여 글자의 경전을 외우고, 항상 수백 배씩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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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동쪽 서울로 내려갔다. 때마침 기원사(祇洹寺)에서 강론을 여는 시기를 만났다. 법도들이 운집하고 선비와 서민들이 강석으로 달려왔다. 승포는 처음으로 그곳에 온 사람이라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나귀를 타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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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강론을 보았다. 의복은 더럽고 해어지며, 용모는 바람과 먼지에 시달린 모습이었다. 법당 안은 이미 좁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귀의 안장에 앉아 문 밖에서 강론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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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가 강론을 끝내자, 승포가 비로소 몇 마디 말을 하려 하였다. 법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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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승의 이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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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苞)라 하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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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모두 꾸러미에 쌌는가[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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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도 꾸러미에 쌀 수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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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몇 차례 다른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모두가 앞서 다다른 뛰어난 이의 생각과 힘인지라, 법사가 미칠 수 없는 경계였다.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는 그의 말에 대항할 길이 없어, 마침내 자리를 내어 주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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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왕홍(王弘)과 범태(范泰)가 승포가 논의하는 말을 들었다. 그 재치 있는 생각에 감탄하여 더불어 말을 나누기를 청하였다. 이에 기원사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의 강론을 열고, 불법의 교화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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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진군(陳郡)의 사령운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승포를 만났다. 그의 정신과 기개를 보고 더욱 깊이 탄복하였다. 어떤 사람이 승포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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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운은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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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운은 재주는 남음이 있으나 식견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몸에 닥치는 재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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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승포는 길을 가다가 여섯 명의 도적들이 관리에게 붙잡힌 것을 보았다. 승포는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기를 권유하였다. 여러 도적들이 위태한 지경에 처하자, 간절히 염불하고 또 염불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을 송치하던 관리가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였다. 도적들은 족쇄를 풀고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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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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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法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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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와관사(瓦官寺)의 법화도 논리를 따지는데 정밀하게 뛰어났다. 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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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 명성을 이루어, 전송 고조(高祖)황제의 존중을 받아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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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석승전(釋僧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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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의 성은 장(張)씨며 요서(遼西) 해양(海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연(燕)·제(齊) 지방에 떠돌면서 두루 불전 이외의 경전을 배웠다. 스무 살 때 비로소 출가하였다. 다시 삼장을 정밀하게 닦아, 북쪽 땅 학자들의 종사가 되었다. 그 후 양자강을 넘어 서울에 머물렀다. 자리를 깔고 크게 강론을 펴니 교화가 강남 땅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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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군(吳郡)의 장공(張恭)이 오군으로 돌아와 강설하기를 청하였다. 고소(姑蘇) 일대의 선비들은 모두 그의 덕을 사모하여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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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거사(閑居寺)에 머물다가 만년에는 호구산(虎丘山)에서 쉬었다. 이에 앞서 승전은 황룡국(黃龍國)에서 1장 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였다. 오군으로 들어가자 다시 금불상을 조성하여, 호구산의 동사(東寺)에 안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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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은 성품이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두루 도왔다. 맑고 확고하게 자신을 지켜서, 거처하는 곳에 비단이나 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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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여항(餘杭)에 방현사(方顯寺)를 세웠다. 승전을 초청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대중을 거두는 데 부지런하고, 좌선과 예불을 쉬는 일이 없었다. 더구나 보살피느라 지나치게 애쓰다 보니, 급기야는 앞을 못 보았다. 그러나 더욱 정성을 다해 책려하고, 강의도 그만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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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국(吳國)의 장창(張暢)·장부(張敷)와 초국(譙國)의 대옹(戴顒)·대발(戴勃)도 모두 덕을 사모하였다. 사귐을 맺고 숭배하여 스승으로 예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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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승전은 잠시 임안현(臨安縣)으로 떠돌다가 동공조(董功曺)의 집에 투숙하였다. 그는 청신한 불제자였다. 승전이 그곳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병에 걸려 몹시 위독하였다. 항상 그가 조성한 불상이 와서 서쪽 벽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또한 여러 하늘의 동자(童子)들이 모두 와서 간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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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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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법랑(法朗)은 꿈에 몇 사람이 받드는 어떤 높은 대(臺)를 보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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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떠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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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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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 법사를 영접하러 가는 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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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과연 승전이 세상을 떠났다. 현령(縣令) 완상지(阮尙之)가 백토산(白土山)에 있는 곽문거(郭文擧) 묘지의 바른 편에 장사지냈다. 예전에 양홍(梁鴻)을 요리(要離)의 묘 옆에 부장(附葬)한 고사를 본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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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진관(特進官) 왕유(王裕)와 덕이 높은 선비 대옹이 승전의 묘소에 이르렀다. 돌을 깎아 비를 세웠다. 당사현(唐思賢)이 비문을 지었으며, 장부가 조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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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석담감(釋曇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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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감의 성은 조(趙)씨며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축도조(竺道祖)를 스승으로 섬겼다.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으며, 율행에 간절한 정성을 기울였다. 많은 경전을 배워 연구하였다.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데도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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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지팡이를 짚고 찾아가 그를 따라 배웠다. 구마라집은 항상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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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감은 한 번 들으면, 들은 것을 잘 간직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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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두루 교화를 베풀었다. 형주(荊州)에서 강릉에 도달하여 신사(辛寺)에 머물렀다. 나이가 60에 들어서자, 힘껏 수행하기를 더욱 맑게 하였다. 항상 안양(安養)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여 아미타불을 우러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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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제자인 승제(僧濟)가 그의 곁을 떠나 상명사(上明寺)로 가자, 담감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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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떠나는 일이야 아름답기는 하다만, 아마도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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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간곡하게 조목조목 들어 법을 부촉하였다. 밤이 되자 모든 연로한 승려들과 함께 무상(無常)을 서술하였다.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각각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담감은 홀로 낭하(廊下)를 서성거렸다. 삼경(三更)에 이르러 사미인 승원(僧願)이 방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담감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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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돌아가 자거라. 다시 오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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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새벽에 이르러 제자인 혜엄(慧嚴)이 평상시처럼 문안을 드렸다. 그러나 담감이 합장하고 편안하게 앉아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피니, 사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의 신체는 부드럽고, 깨끗한 향기는 평상시보다 두 배나 더하였다. 이를 알리고 시신을 염하였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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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군(吳郡)의 장변(張辯)이 전기(傳記)와 찬을 지었다. 그는 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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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荔枝) 풀 향기 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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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옥(瑾玉) 구슬 맑게 드러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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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하신 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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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들지도 물들이지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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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선 찬란한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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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선 가지마다 울창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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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세계 노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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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참된 헤어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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披荔逞芬 握瑾表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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渾渾法師 弗淄弗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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暐曄初辰 條蔚暮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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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遊智往 豈伊實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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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道海)·혜감(慧龕)·혜공(慧恭)·담홍(曇泓)·도광(道廣)·도광(道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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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강릉의 도해·북주(北州)의 혜감·동주(東州)의 혜공·회남(淮南)의 담홍·동원산(東轅山)의 도광·홍농(弘農)의 도광 등이 있었다. 모두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임종 때 상서로운 감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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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석혜안(釋慧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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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안은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간절한 정성을 기울여 배움이 경전의 논리에 통달하였다. 아울러 설법을 잘하였다. 또한 오로지 계율을 지켜 칭송을 받았다. 40여 만 글자의 경전을 암송하였다. 여산(廬山)의 능운사(陵雲寺)에 머물렀다.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천 리 밖에서도 바람처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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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지팡이 하나를 손에 쥐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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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서역의 승려가 보시한 지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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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의 빛과 색깔은 현란하였다. 또한 자못 향기도 감돌았다. 지팡이 위쪽에 범어로 된 글[梵書]이 새겨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글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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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관중에 들어가 구마라집을 찾아뵈었다. 쥐던 지팡이도 스스로 그를 따라왔다. 구마라집이 그 지팡이를 보고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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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팡이가 여기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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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 범어 글자를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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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천축국의 사라림(娑羅林)에서 태어났다. 남방이 어지러워지면 초야에 의지하여 일어나리라. 후에 구마라집을 만나면 도의 가르침이 융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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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안은 그 후 지팡이를 외국 승려 바사나(波沙那)에게 선물하였다. 바사나는 이것을 가지고 서역으로 돌아갔다. 혜안은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산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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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석담무성(釋曇無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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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무성의 성은 마(馬)씨며 부풍(扶風) 사람이다. 집안 어느 대[家世]인가에 피난하여 황룡(黃龍)으로 옮겨 살았다. 열세 살에 출가하였다. 실천하는 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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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바르며, 빼어난 영특함에 짝이 없었다. 아직 구족계를 받기도 전에 곧 문답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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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지고 그를 찾아갔다. 그곳에 이르러 구마라집을 만나니, 구마라집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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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가 어떻게 먼 곳에서 올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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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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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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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이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이에 길 떠나길 멈추고 배움에 힘쓰니, 지혜와 학업이 더욱 깊어졌다. 요흥(姚興)이 담무성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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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장(馬季長)은 고명한 석학이었으나, 당시 세상에서 교만하였네. 법사는 아마도 그렇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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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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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써 마음을 굴복시키는 것은 그러한 허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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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은 그를 매우 남다르게 생각하여 공급하는 것이 크게 두터웠다. 요흥의 운수가 장차 기울려 하자, 관중은 위태하고 어지러워졌다. 담무성은 곧 회남(淮南)의 중사(中寺)에서 휴식하면서, 『열반경』과 『대품경』을 항상 바꾸어가며 강설하였다. 그러자 수업하는 사람이 2백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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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연지(顔延之)·하상지(何尙之)와 함께 실상을 논하면서 새벽까지 토론을 계속하였다. 담무성은 『실상론(實相論)』과 『명점론(明漸論)』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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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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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경(曇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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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사에는 또한 담경이 있었다. 담무성과 동학(同學)으로 이름을 나란히 하여, 전송의 임천강왕(臨川康王) 의경(義慶)의 존중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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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석승함(釋僧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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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함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와 천문과 산수에 뜻을 두텁게 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불교 논리에 뛰어났으며,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데도 밝았다. 더욱이 『대열반경』에 빼어나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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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강설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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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元嘉) 7년(430) 신흥태수(新興太守) 도중조(陶仲祖)가 영미사(靈味寺)를 세웠다. 승함의 도풍과 규범을 흠모하였다. 그를 초청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승함은 대중을 도우며 맑고 삼가하여, 3업(業)에 어긋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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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쪽 역양(歷陽)에 떠돌며 불법을 널리 알렸다. 그러자 강남의 도인과 속인들이 소문을 듣고는, 따르는 사람들이 숲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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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임성(任城)의 팽승(彭承)이 『무삼세론(無三世論)』을 지었다. 이에 승함은 곧 『신불멸론(神不滅論)』을 지어 대항했다. 무릇 보고 들은 사람들치고, 곧 땅에 떨어지려 하는 불법을 다시 일으켰노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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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성지원감론(聖智圓鑑論)』과 『무생론(無生論)』·『법신론(法身論)』·『업보론(業報論)』 및 『법화종론(法花宗論)』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얼마 후 남쪽 구강(九江)에 노닐면서 크게 경법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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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야의 안준(顔峻)이 당시 남중랑(南中郞)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다. 따라서 심양(潯陽)에 주둔하였다. 승함과 서로의 그릇됨을 존중하여, 만나면 반드시 종일토록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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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승함은 가만히 안준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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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예언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면, 서울에 곧 재앙과 난리가 있을 것이오. 진인(眞人)의 부신[符]은 응당히 전하에게 속해 있으니, 시주께서는 이 일에 입을 다물어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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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원흉이 역모를 일으켰다가 세조(世祖)가 황제가 되었으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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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평안하고 건강하여 병이 없었다. 문득 대중들에게 고별의 인사를 알렸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천명(天命)을 아는 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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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도함(釋道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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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석도함도 학문과 깨우침에 공부가 있어 『석이십론(釋異十論)』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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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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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석승철(釋僧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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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철의 성은 왕(王)씨며, 본래 태원(太原) 진양(晋陽)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형제 두 사람이 양양에서 임시로 살았다. 승철은 열여섯 살에 여산으로 혜원을 찾아갔다. 혜원은 그를 보고 남다르게 생각하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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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출가할 생각은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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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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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멀리하고 속세를 떠나는 일은 원래 저의 본심입니다. 먹줄을 놓는다거나 쇠를 달구는 일에서는 종장의 뜻대로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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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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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도에 입문한다면, 곧 더 이상의 두려움이 없는 법문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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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관에 꽂는 비녀를 벗어버렸다. 몸을 맡겨 혜원을 따라 수업하여, 두루 수많은 경전을 배웠다. 더욱이 『반야경』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또한 그는 도를 묻는 가운데 여가가 있으면, 마음을 문장과 시를 짓는 일에 두었다. 한 편의 문장이나 한 수의 시를 짓는데, 바로 붓을 대자마자 문장을 완성하였다[落筆成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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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여산의 남쪽에 있는 소나무에 올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맑은 바람이 먼 곳에서 모여들고, 뭇 새들이 이에 화답하며 울었다. 이처럼 그에게는 세속을 벗어난 빼어난 기운이 있었다. 물러나 절에 돌아와서 혜원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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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는 음악을 규제하고, 계율에는 노래와 춤을 끊으라 하였습니다. 노래를 한 번 부르고 휘파람을 한 번 부는 것은 해도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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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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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란해지는 점으로 말한다면 모두가 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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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말미암아 곧 중지하였다. 스물네 살이 되자 혜원은 그에게 『소품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당시 같은 동년배들에게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던 일이다. 자리에 오르자 글 뜻을 분명하게 분석하여, 듣는 사람이 그의 칼날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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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를 꺾을 길이 없었다. 이에 혜원이 그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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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너와 겨루며 대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남은 힘이 없어졌다. 너의 방어벽은 엄중하고 견고하여, 공격하던 사람들이 군병을 잃고 수레바퀴를 돌리게 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자못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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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문인들이 그를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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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이 죽은 뒤에는 남쪽 형주로 떠돌다, 강릉성 안의 오층사(五層寺)에 머물렀다. 만년에는 비파사(琵琶寺)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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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과 의동(儀同) 소사화(蕭思話) 등도 모두 그에게서 계법을 받기 위해, 그를 초청하여 재를 마련하고, 몸소 음식을 상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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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가 29년(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자사(刺史) 남초왕(南譙王) 유의선(劉義宣)이 그를 위하여 분묘를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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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장(僧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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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형주의 상명사에 있는 승장도 『열반경』과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전송의 효무황제 초기에 칙명으로 서울에 내려오라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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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석담제(釋曇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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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제의 성은 강(康)씨이다. 선조들은 강거(康居) 사람이다. 한(漢)의 영제(靈帝) 때 자리를 옮겨 중국에 가까이하였다. 헌제(獻帝) 말기의 난리로 인해 오흥(吳興)에 머물렀다. 담제의 아버지 강융(康肜)은 일찍이 기주(冀州)의 별가(別駕: 벼슬이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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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제의 어머니 황(黃)씨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한 승려를 만났다. 그가 황씨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하나의 털이개와 철루(鐵鏤: 무쇠에 조각한 것)로 된 서진(書鎭: 文鎭) 두 개를 주었다. 잠을 깨서 보니 두 가지 물건이 모두 있었다. 이어 잉태하여 담제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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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제의 나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털이개 등을 그에게 보여주니, 담제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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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왕(秦王)이 선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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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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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디에 두었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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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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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이 되자 출가하였다.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았으나, 깨달음이 천연적으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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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는 부친을 따라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갔다. 가는 길에 우연히 관중의 승략(僧䂮) 도인을 만났다. 문득 승략의 이름을 부르니, 승략 도인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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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가 어떻게 이 늙은이의 이름을 부르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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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제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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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불쑥 부른 것은, 그대가 전에 이 담제의 사미였기 때문입니다. 대중 승려를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어, 나도 모르게 잘못 소리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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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략은 전에 홍각(弘覺) 법사의 제자로서, 승려들을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었다. 승략은 처음에는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여, 곧 담제의 부친을 찾아갔다. 부친이 담제가 태어날 때의 시말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아울러 털이개와 서진 등을 보여주니, 승략이 이에 깨닫고 울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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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돌아가신 저의 스승, 곧 홍각 법사이십니다. 선사께서는 전에 요장(姚萇)을 위하여 『법화경』을 강의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가 도강직(都講職)을 맡아 보았습니다. 요장이 이 두 가지 물건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홍각 법사께서 돌아가신 날을 계산해보니, 바로 이 물건을 맡기신 날이었습니다. 다시 나물 캐던 일까지 기억이 나니, 더욱 슬픔이 북받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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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담제는 경전을 두루 편람하면서, 눈에 지나가는 것은 곧 기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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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는 오군(吳郡)의 호구사(虎丘寺)로 들어갔다. 『예기(禮記)』와 『주역(周易)』·『춘추(春秋)』를 각기 일곱 번씩 강의하였다. 『법화경』·『대품경』·『유마경』을 각기 열다섯 번씩 강의하였다. 또한 글을 잘 지어, 여섯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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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문집이 있다. 역시 세상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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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이 숲과 개울을 사랑하여, 후에 오흥(吳興)으로 돌아갔다. 고장(故章) 곤륜산(崑崙山)에 들어가서, 20여 년간 개울물을 마시며 한가롭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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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 원가 연간(424~452)의 말기에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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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석승도(釋僧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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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도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열 살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수업하였다. 스승이 『관세음경』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을 다 읽고는, 그가 스승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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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은 모두 몇 권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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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그를 시험해보고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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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이 한 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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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도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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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그 때 다 하지 못한 뜻’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상응하는 어떤 일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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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스승은 크게 기뻐하여 『법화경』 한 부를 주었다. 이에 밤낮으로 그것을 보고, 뜻을 찾아 거칠게나마 의미를 해득하였다. 가난하여 기름과 촛불이 없었으므로, 항상 땔감을 주워서 책을 비춰보곤 하였다[採薪自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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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이 되자 다방면에 읽은 것이 더욱 많아졌다. 원기의 바탕이 씩씩하고 용감하며, 영묘한 작용이 빼어나게 드러났다. 행동거지가 올바르고 고상하며, 거동이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일이 없었다. 승예가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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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불법에서 무엇이 되고자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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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도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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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가 되어 도강(都講)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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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승예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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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바야흐로 곧 만인의 불법의 우두머리가 될 사람이다. 어찌 자잘한 승려들을 상대로 하여 부양시키는 정도에서 그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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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족계를 받음에 이르러 식견이 더욱 깊어져서, 선(禪)·율·경론이 저절로 마음속에 들어앉을 만큼 통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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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姚興)이 그의 덕업을 흠모하여 벗으로서 사랑하였다. 절에 들어오면 찾아가서, 가마를 타고 함께 궁전으로 돌아갔다. 구마라집이 경론을 번역해 내려 하였다. 그러자 그도 함께 하여, 참조하고 의논하며 자세하게 내용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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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도는 이미 본래부터 풍채가 좋은데다 관중(關中)의 성대한 모임을 만났다. 이에 많은 경전을 계획하고, 널리 진제와 속제의 이치를 캐내었다. 곧 『성실(成實)』과 삼론(三論)의 의소(義疏)와 『공유이제론(空有二諦論)』 등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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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전송의 고조(高祖) 황제가 서쪽 장안을 토벌하였다. 군주 노릇하던 자[僞主]를 사로잡아 관내(關內)를 쓸어버리고 깨끗이 하였다. 그는 이미 평소 자자하게 승도의 명성을 들었다. 그러므로 곧 요청하여 상견하더니, 승도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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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멀리서 바라본 지 오래인데, 어쩌면 그리도 풍속이 다른 곳에서 지체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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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도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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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공께서 천하를 소탕하여 말발굽소리가 황하와 낙수에 울렸습니다. 이 때에 서로 만나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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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황제가 깃발을 돌려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아들인 계양공(桂陽公) 의진(義眞)을 그곳에 남겨두어, 관중 지방에 주둔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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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때 고조가 승도에게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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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어린 것을 이곳에 남겨 주둔하게 하였다. 원컨대 법사가 때때로 돌아보고 마음에 품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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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의진은 서쪽 오랑캐 발발혁련(勃勃赫連)에게 핍박당하였다. 관남(關南)을 향해 가다가 중도에서 어지럽게 패배하였다. 그러자 추한 오랑캐들이 흉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였다. 기병이 곧 그의 몸 가까이 당도하였다. 승도는 제자 수백 명을 거느리고, 중간에서 오랑캐들을 가로막았다. 의진을 추격하는 기병들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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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劉公)이 아들을 부탁한 일이 있소. 빈도는 지금 곧 죽음으로써 그를 전송하려 하오. 반드시 잡지도 못할 것이니, 번거롭게 추격할 필요가 있겠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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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오랑캐들은 그의 신비한 기운에 놀라, 마침내 칼날을 되돌려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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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진은 달아나 풀밭에 숨어 있었다. 때마침 그의 중병(中兵) 단굉(段宏)을 만나 끝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는 무릇 승도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고조황제는 이 일에 감격하여, 아들과 조카 내외로 하여금 그를 스승으로 섬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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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수춘(壽春)에 절을 세웠다. 곧 동산사(東山寺)가 그곳이다. 항상 경론을 강설할 때마다 수업하는 문도들이 천여 명이었다. 그 당시 오랑캐들이 갑자기 불법을 멸하였다. 그러니 사문들이 난을 피해 이곳에 투신하는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들 모두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하였다. 오랑캐에게 죽음을 당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향을 나누어 주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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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무제(孝武帝)가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사신을 파견하여 불러들였다. 생각을 돌이키어 조서에 응하여 서울의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황제의 가마가 이곳을 찾아오자, 몸소 나가서 영접하고 안부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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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도는 효건(孝建) 연간(454~456) 초기에 3강(綱)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여, 이 일에 감격하고 가슴에 품어,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황제도 역시 목이 메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곧 와관사에 칙명을 내려 『유마경』의 강론을 열도록 명령하였다. 황제가 친히 그곳으로 거동하니, 공경대부들도 모두 다 모여들었다. 승도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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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부처님께서 왕궁에 탄생하시고 쌍수(雙樹)에서 입멸을 보이신 이래로, 천 년의 세월이 넘었습니다. 그 때의 순후한 근원은 영원히 떠나갔어도, 경박한 풍속은 뒤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급고독원은 폐허가 되고, 녹야원은 허물어진 풀밭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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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다섯 종류의 삿된 견해를 지닌 자들은 아래로 나아가는 길을 높은 곳으로 오르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삼계의 중생들은 불이 난 집을 청정한 불국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주상전하께서 눈물을 흘리고, 보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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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성거리며 방황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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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사부대중들이 이 일 때문에 얼굴빛을 바꾸었다. 다시 황제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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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보호하는 일과 도를 널리 펴는 일을 제왕보다 더 앞서 할 사람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네 가지 평등심(平等心)을 움직이시어, 위태로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시고 착한 일을 권유하실 수 있다면, 모래밭과 기왓장이 흩어져 있는 이 세계가 곧 자재천궁(自在天宮)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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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오래도록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앉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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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하직하여 수춘으로 돌아와 석간사(石澗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96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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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僧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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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승인도 당시 세상에 이름난 이로 승도와 버금갔다. 어떤 사람이 승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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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와 승도 가운데서 누가 더 훌륭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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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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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승도는 같이 구마라집에게 사사받았습니다. 공자의 문인에 기준해서 말한다면, 승도는 입실(入室) 제자에 해당하고 나는 승당(升堂) 제자라 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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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위(僧威)·승음(僧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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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도의 제자에 승위와 승음 등이 있었다. 모두 『성실론(成實論)』에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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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석도왕(釋道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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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왕의 성은 반(潘)씨며 장락(長樂) 사람이다. 어릴 때 숙부를 따라 서울에 있었다. 열세 살에 여산의 혜원(慧遠)에게 투신하여 출가하였다. 경전과 계율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였다. 특히 『열반경』에 빼어났다. 수십 년 동안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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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 음식으로 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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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양주(梁州)로 갔다. 길에서 강(羌)족 오랑캐 도적들에게 포위되어, 의복과 발우를 빼앗겼다. 도왕(道汪)과 제자 몇 사람이 마음으로 서원하며, 함께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였다. 잠시 후 구름과 안개 같은 것이 도왕 등의 몸을 덮는 것을 느꼈다. 이에 도적 무리들이 쫓아오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재난을 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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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하간(河間)의 현고(玄高) 법사가 선(禪)과 지혜가 깊고 넓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곳에 가서 이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토곡혼(吐谷渾)의 난을 만나, 그곳에 가는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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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성도(成都)로 돌아왔다. 조정에서 부른 적이 있는 학덕이 높은 선비[徵士] 비문연(費文淵)이 처음으로 그를 따라 수업하였다. 곧 고을 성의 서북쪽에 절을 세워 기원사(祇洹寺)라 이름 지었다. 그곳에서 파촉(巴蜀) 지방에 교화를 행하여 명성이 조정과 재야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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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梁州)자사 신탄(申坦)은 도왕과 구면이었다. 그 후 신탄이 사고를 당하자, 도왕은 그곳에 가서 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신탄이 그곳에 도왕을 머물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비문연이 자사(刺史) 장열(張悅)에게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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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왕 법사는 학식과 수행이 청백하고, 뜻과 기개[風霜]가 매우 준엄합니다. 탁연히 무리 짓지 않고 확고하여 뽑아내기 어려운 지조가 있습니다. 근간에 들으니 양주에서 그를 맞아들이려고 교지를 보내자, 그가 떠나가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온 경내의 여론이 모두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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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을은 변방의 황량한 고을로서 비구와 비구니의 수효가 만 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선(禪)과 계율에 힘입는 바는 그 한 사람에게 의지합니다. 어찌 강물이 갖은 진주를 잃게 하고, 산이 갖은 옥을 잃게 하여서야 되겠습니까? 원컨대 도인과 속인들의 정성을 비추어 보시고, 사부대중의 무리들로 하여금 기댈 곳이 있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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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장열이 곧 정중하게 만류하였다. 마침내 양주로 가는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열이 서울로 돌아가, 전송의 효무황제에게 자세히 도왕의 덕행을 진술하였다. 황제는 곧 칙명을 내려, 그를 영접하여 중흥사(中興寺)의 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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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主)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도왕은 장열에게 병을 이유로 굳게 사양하니, 그곳으로 가는 일을 면하였다. 이로써 병을 사칭하여 휘장을 내리고, 인간세계를 엿보는 일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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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유사고(劉思考)가 고을에 다다라 크게 불법의 제사를 마련하였다. 도왕에게 강설을 청하니, 곧 그의 청에 응낙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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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는 항상 고요함을 지키기로 맹서하였소. 무엇 때문에 절개를 훼손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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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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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은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바야흐로 불법이 이에 기대려고 합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작은 노고를 마다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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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3협(峽) 안의 사람들이 매일 밤마다 바위 언덕 옆에서 신비한 광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유사고는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도왕에게 청해서 광명이 일어나는 곳에 절을 세우게 하였다. 즉각 절벽에 불상을 새기고, 험한 지점에 방[室]을 세웠다. 길을 가다가 우러러 바라보면, 모두가 청정한 마음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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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왕경무(王景茂)가 초청하여, 무담사(武擔寺)에 머물러 승주(僧主)가 되었다. 대중을 도와 맑고도 삼가하니, 도인과 속인이 귀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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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태시(泰始) 원년(465)에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명에 따라 화장하였다. 유사고는 그를 위하여, 무담사의 절 문 오른쪽에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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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景和) 원년(465)에 소혜개(蕭慧開)가 서쪽으로 나아가 성도에 주둔하였다. 도왕의 높은 명성을 듣고 함께 도를 강론할 생각으로 찾아가다가, 중도에서 도왕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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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구나.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그러니 곽문거(郭文擧)가 강성(康成)을 뒤쫓아 간 일 따위야, 어찌 말할 만한 꺼리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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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현인들이 애석하게 여겼음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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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명(普明)·도은(道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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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촉(蜀)의 강양사(江陽寺)의 보명과 장락사(長樂寺)의 도은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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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과 덕망이 높고 밝았다. 거친 음식을 먹으며 경전을 읽고, 어떤 고난에도 굳건한 절개로 감통(感通)을 얻었다. 도은은 배움이 내외의 경전을 겸하고, 더욱 담론과 토론에 빼어났다. 오(吳)나라의 장유가 초청하여 계를 내리는 스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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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석혜정(釋慧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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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의 성은 소(邵)씨며 오흥(吳興)의 여항(餘抗) 사람이다. 가난하게 살면서 지조를 지키고, 힘써 수행함에 정성이 간절하였다. 풍모 있는 자태가 수려하고 반듯하여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처음 여산(廬山)에 유학하였다. 만년에는 서울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였다. 지혜롭게 내외의 경전을 겸하고, 특히 『열반경』에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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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다. 안연지(顔延之)와 하상지(何尙之) 등이 모두 덕스런 풍모를 흠모하였다. 안연지는 늘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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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荊山)의 구슬이라면 오직 혜정, 그 사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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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안준(顔竣)이 나가 동주(東州)에 주둔하자, 손잡고 동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천주산사(天柱山寺)에 깃들어 살았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다시 섬주(剡州) 법화대(法花臺)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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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동앙산(東仰山)에서 쉬었다. 곳곳에서 소요하며 노닐었다. 아울러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힘썼다. 나이가 50세를 넘자, 뜻과 절개가 더욱 굳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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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태시(泰始) 연간(465~471)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58세이다. 지은 문한(文翰)과 문집(文集) 열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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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석법민(釋法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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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민은 북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를 사모하여 뜻을 경전에 도탑게 가졌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였다. 곧 고을과 나라들을 밟아보고, 풍속을 구경하며 도를 음미하였다. 그는 『반야경』과 논리를 따지는 것과 경장과 율장을 모두 마음껏 요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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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강하군(江夏郡)의 오층사(五層寺)에서 쉬었다. 당시 사문 승창(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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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이 강릉 성 안에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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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인 사회(謝晦)가 이를 허물고자 하였다. 법민이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그를 찾아가 사회에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법민은 이에 장사(長沙)의 녹산(麓山)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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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곧 부하들을 거느리고 절에 이르러, 후하게 술과 고기를 두텁게 내려주었다. 엄중하게 북을 치고 위엄을 떨치면서, 불상의 목을 자르고 부셔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로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과 먼지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사회는 놀라고 무서워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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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는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의 무리였던 정법성(丁法成)과 사승쌍(史僧雙)은 몸에 문둥병이 나타났으며, 나머지 대부분도 법을 범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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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법민은 『현험론(顯驗論)』을 지어서 인과를 밝히고, 아울러 『대도지경(大道地經)』에 주석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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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3세이다. 제자 승도(僧道)가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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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종(僧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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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흥군(始興郡) 영화사(靈化寺)의 승종이라는 비구도 경론을 널리 섭렵하였다. 『법성론(法性論)』과 『각성론(覺性論)』이라는 두 논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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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석도량(釋道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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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서울의 북쪽 다보사(多寶寺)에 머물렀다. 빼어난 깨달음이 짝이 없을 만큼 뛰어나고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여 여러 사람의 비위를 거슬렀다. 마침내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드러나자,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남월(南越) 지방으로 옮겨가는 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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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은 혹 그가 몸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 조롱하였다. 이에 도량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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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의 이치로 가는 것이지, 특별히 사람이 시켜 된 일은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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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승려들에게 명하여 밤을 세워가며 남쪽 광주(廣州)로 떠났다. 제자인 지림(智林) 등 열두 사람이 그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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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 머물면서 6년 동안 강설로 대중을 인도하였다. 영외(嶺外) 지방을 교화로써 도야하다가,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성대하게 법석을 열고, 『성실론의소(成實論義疏)』 여덟 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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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9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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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靜林)·혜륭(慧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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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다보사에 또한 정림과 혜륭이 있었다. 정림은 『대열반경』에 빼어나, 전송의 효무황제로부터 큰 그릇으로 존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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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륭도 많은 경전과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또한 어떤 고난에도 굳건한 절개로 신령하게 통하였다. 혜륭이 심기(心氣)병을 오래 앓았다. 밤에 사람이 아닌 어떤 존재가 나타나 탕약을 보내주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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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릉령(秣陵令)이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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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그릇을 주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혜륭이 이것을 취하여 한 번 복용하자 고통 받던 것이 곧 치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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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석범민(釋梵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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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의 성은 이(李)씨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어릴 때 관중·농서(壟西)지방에서 유학하였다. 장성하여서는 팽성(彭城)과 사수(泗水) 지방을 두루 다녔다. 내외의 경서 모두를 마음의 구비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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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는 단양(丹陽)에서 쉬면서 자주 강설하는 법회를 세웠다. 사장(謝莊)·장영(張永)·유규(劉虯)·여도혜(呂道慧)가 모두 그의 도풍을 이어받았다. 흔쾌히 기뻐하면서 서로 칭탄하며 존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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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법화경』과 『성실론』을 강의하였다. 또한 『요의백과(要義百科)』에 서문을 써서, 간략하게 불교의 강령을 표방하였다. 그런 까닭에 글은 이 한 권에 그친다. 구사한 내용에서 생략된 점이 보이지만 당시에 존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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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단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0여 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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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약(僧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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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승약은 본래 상당(上黨) 사람이다. 『열반경』에 빼어나 장창(張暢)의 존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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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석도온(釋道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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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온의 성은 황보(皇甫)씨며, 안정현(安定縣) 조나(朝那) 사람이다. 덕이 높은 선비인 황보밀(皇甫謐)의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책을 좋아하였다. 그리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로써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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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 때 여산(廬山)에 들어가 혜원에게 의지하여 수학하였다. 그 후 장안에 노닐어 다시 동수(童壽: 구마라집)에게 사사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돌아와 양양의 단계사(檀溪寺)에 머물렀다. 대승의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번주(樊州)와 등주(鄧州)의 학도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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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吳)나라의 장소(張邵)가 양양에 주둔하자, 그의 아들 장부(張敷)도 따라왔다. 장부가 도온의 강론을 듣고서 돌아오자, 장소가 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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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온은 어떻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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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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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의 해석은 세세한 것까지 분석하는구나 느꼈지만, 도에 깃든 마음은 쉽게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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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몸소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비로소 그의 정신이 매우 빼어남에 고개 숙였다. 그 후 조용히 도온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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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께서 만일 환속할 수만 있다면, 곧 별가(別駕) 벼슬로 대우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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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온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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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주께서는 형틀과 수갑으로 사람을 유인하시려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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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로 그곳을 떠나 강릉으로 갔다. 장소가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자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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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건(孝建) 연간(454~456)의 초기에 칙명을 받고 서울로 내려왔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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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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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칙명으로 서울의 승주(僧主)가 되었다. 노소(路昭) 황태후가 대명(大明) 4년(460) 10월 8일에 보현보살의 상을 조성하였다. 상이 완성되자 중흥사의 선방에 재를 마련하였다. 초청한 승려가 모두 2백 명이다. 이름을 열거해서 함께 모이게 하여, 사람의 수효를 일찍이 정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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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절은 새로 지어 호위가 매우 장엄하고 엄숙하였다. 문득 한 승려가 늦게 와서 자리에 앉았다. 풍채와 용모가 모두 청아하였기에, 온 법당의 승려들이 그를 눈여겨보았다. 재주(齋主)와 함께 백여 마디의 말을 나누고는 문득 사라졌다. 문을 지키는 이들을 샅샅이 검문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의 출입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중들은 그가 신인(神人)이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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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온은 이미 승주였으므로 말릉(秣陵)의 고사(故事)를 예로 들어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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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께서는 슬기롭게 비추어 보는 기운이 높고 밝으시어, 성스러운 상서로움이 그윽하게 적셨습니다. 청정한 도량에서 생각을 씻어내고, 지극한 경계에서 옷깃을 가다듬으셨습니다. 본래부터 궁성 안에 명성이 자자하시고, 일마다 부처님의 경계 밖에 허통하십니다[事虛梵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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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처음으로 쇠를 녹이고 자를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곧 신비하고 화려한 모습을 묘사하여, 보현보살이 오시는 모습의 성대한 불상을 조성하였습니다. 우주의 진귀한 보배를 기울여, 그 묘함은 하늘의 장식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마련하신 재와 강론은 이 달 8일로 끝났습니다. 보시하신 모임에는 제한이 있고 명부도 본래부터 정해져 있어서, 차례대로 인도하여 자리에 앉게 하니, 수효가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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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며 경을 읽는 것이 절반 가량 진행되려 할 즈음에, 시각은 사시(巳時)가 되었습니다. 홀연히 이상한 승려가 나타나 좌석 안에 참여하였습니다. 얼굴과 행동거지가 단엄하고 기개와 모습이 빼어나게 드러나, 온 대중들이 놀라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재주(齋主)가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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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의 이름은 무엇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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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慧明)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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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절에 주석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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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사(天安寺)에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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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대답하는 사이에 홀연히 사라져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송구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생각을 숙연히 하였습니다. 이는 밝은 상서로움의 드러남이며, 보이지 않는 감응이 펼쳐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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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묏부리는 눈으로 볼 수 있고 화려한 누마루도 멀지 않습니다만, 대저 저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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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으로 감응하면 해[景]를 되돌려 놓고 달[緯]을 움직이며, 맑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기적은 바위를 일으키고 샘을 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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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황제의 덕은 천운을 받아들이고, 황제의 공은 온 백성을 흡족하게 적셔줍니다. 어진 정치로 먼 하늘 끝까지 밝히고, 이치로서 어둠의 세계 밖까지 뻗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상왕 때의 번성하던 선비들은 크게 밝은 조정을 보여줄 수 있었고, 신께서는 발심을 권유하는 오묘한 몸으로 황제의 방으로 나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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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때맞추어 폐하가 바다 구석까지 지혜로 비추신다면, 그 빛남이 일월보다도 밝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사람의 이름을 혜명이라 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을 이어 천복을 일으켜 끝없는 곳까지 드리우실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절 이름을 천안사(天安寺)라 칭하였습니다. 신(神)의 기반이 더욱 멀리 이어지고 도의 정치가 바야흐로 응결되어, 온 천하가 태평하고 만물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삼가 소속된 고을에 이 사실을 줄지어 이야기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서상을 밝히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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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에서는 이 사실을 군(郡)에 말하였다. 당시 경조윤(京兆尹)의 공령부(孔靈符)는 이 사실을 표를 지어 나라에 아뢰었다. 이어 조서가 내려와, 선방을 고쳐서 천안사(天安寺)라 하여 상서로움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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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온은 여러 번 강의를 맡았다. 듣고 음미하는 손님이 강당을 메우고, 서로 마음을 기울였다. 정성을 다해 부지런하게 여러 사람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자주 신비한 이적(異跡)에 감응하였다. 황제는 이를 기뻐하여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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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 냥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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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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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은 재물을 하사하고 도온은 법칙을 이끌어서, 저 위의 하늘에서 감동을 느껴 신령(神靈)한 덕을 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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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9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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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경(僧慶)·혜정(慧定)·승숭(僧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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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흥사에 승경·혜정·승숭이 있었다. 모두 교리의 이해력으로 명성을 드러내었다. 승경은 3론(論)에 빼어나 당시 학도들의 종사가 되었다. 혜정(慧定)은 『열반경』과 아비담에 뛰어나서 역시 여러 번 으뜸가는 자리를 맡았다. 승숭도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그러나 말년에 편벽된 고집이 생겨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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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마땅히 상주(常住)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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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하던 날 혀의 뿌리가 먼저 썩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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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석담빈(釋曇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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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빈의 성은 소(蘇)씨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열 살 때 출가하여 도위(道褘)를 스승으로 섬겼다. 처음에는 강릉의 신사(新寺)에 머물면서, 경론의 강의를 듣고 선도(禪道)를 배웠다. 깊이 있는 생각이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성정을 아직 다 통달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담빈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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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의심하는 내용은 두루 떠돌아다니면 저절로 풀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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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지팡이를 떨치고 옷을 껴입고, 다른 나라에서 도를 묻기로 하였다. 처음 서울로 내려갔다가 이어 오군(吳郡)에 머물렀다. 때마침 승업(僧業)의 『십송률(十誦律)』 강의를 만나 음미하여 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음이 깊은 경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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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울로 돌아와 정림(靜林) 법사에게 『열반경』을 자문 받았다. 다시 오흥(吳興) 소산사(小山寺)의 법진(法珍)을 찾아가 『열반경』·『승만경』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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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였다. 만년에는 남림사(南林寺)의 법업(法業)에게서 『화엄경』과 『잡심론(雜心論)』의 강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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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두루 많은 스승들을 거쳐오면서 색다른 풀이들을 갖추어 들었다. 그러자 곧 오랫동안 사유한 것들이 그때마다 쌓였다. 게다가 그 묘함을 끝까지 추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주장을 녹여 다듬어서 모든 경전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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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다시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자리를 열어 강설하였다. 그러니 사방 먼 곳의 이름 있는 손님들이 책을 등에 지고 갖옷을 걸치고서 모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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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건(孝建) 연간(454~456)의 초기에 이르자 왕현모(王玄模)에게 조칙을 내렸다. 그곳을 떠나 서울로 나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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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면서 『소품경(小品經)』과 『십지론(十地論)』을 강의하였다. 아울러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취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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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마음속으로 경합하려는 무리들이 끈질기게 문답을 주고받으며 비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담빈의 언사가 이치에 맞고 이론에 밝았으므로, 끝내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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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당시에 명망이 높은 인물로서, 담빈의 행실과 깨우침을 가상하게 생각하였다. 한번은 중서사인(中書舍人) 소상개(巢尙介)를 시켜 그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담빈이 굴복당하지 않았다. 마침내 원찬이 몸소 스스로 그를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다. 원찬은 늘 담빈에게 천자를 찾아가 보라고 자주 권하였다. 담빈이 그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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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도는 세상 테두리 밖의 사람인데, 어찌 천자와 취향을 같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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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찬은 더욱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 후 청해서 그의 어머니의 스승이 되었다. 전송의 건평왕(建平王) 경소(景素: 劉景素)도 그에게 계율의 모범이 되는 것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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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장엄사(莊嚴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7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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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제(曇濟)·담종(曇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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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장엄사에는 담제·담종이 있었다. 모두 학업과 재주의 능력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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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존중을 받았다. 담제는 『칠종론(七宗論)』을 짓고, 담종은 경목(經目)및 『수림(數林)』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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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석혜량(釋慧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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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량의 성은 강(姜)씨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현량(顯亮)이다. 동아(東阿)의 도정(道靖)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맑은 명성이 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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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은 큰 스승이고, 혜량은 작은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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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나이와 명망에서는 도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도풍과 규범은 그를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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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임치(臨淄)에 절을 세우고 『법화경』과 『대품경』·『소품경』·『십지론』 등을 강의하였다. 그러니 학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천 리 밖에서도 가마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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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양자강을 건너 하원사(何園寺)에 머물렀다. 안연지(顔延之)와 장서(張緖)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계속 그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들은 늘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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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道安)과 법태(法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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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대에 주옥같은 말씀을 토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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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빈과 혜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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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에 금 같은 소리를 떨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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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말과 오묘한 실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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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려 하다가 다시 일어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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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汰吐珠玉於前 斌亮振金聲於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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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言妙緖將絶復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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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장엄사(莊嚴寺)에서 큰 모임을 열었다. 교학에 정통한 뛰어난 승려 천 명을 가려내어 교열하였다. 황제의 칙명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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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혜량과 담빈을 바꾸어가며 우두머리로 삼았다. 당시의 종사로서 이들과 더불어 경합할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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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3세이다. 『현통론(玄通論)』을 지었다. 지금도 세상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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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석승경(釋僧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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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경의 성은 초(焦)씨이다. 본래는 농서(隴西) 사람으로, 오군(吳郡) 땅에 옮겨 살았다. 지극한 효도는 보통 사람을 넘었다. 재물을 가볍게 생각하여 보시하기를 좋아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가 죽자, 태수(太守)가 돈 5천 냥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간곡하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곧 스스로 흙을 지고 와서 소나무·잣나무를 심었다. 묘소에서 움막살이를 하면서 3년간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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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상을 마치고 출가하여 오현(吳縣)의 화산(華山)에 머물렀다. 후에 관중·농서 지방으로 들어가, 스승을 찾아 법을 전수 받았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서울에 머물면서 크게 경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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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司空) 벼슬에 있던 동해의 서담지(徐湛之)는 그의 소박한 풍모를 존중하여, 온 문중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 후 동쪽 고소(姑蘇)로 돌아가 다시 전념하여 종사의 자리를 맡았다. 대사(臺寺)의 사문(沙門)과 도를 공부하던 사람들이 요청해서 1년 가량 그곳에 머물렀다. 다시 동쪽 상우(上虞)의 서산(徐山)으로 가니, 따라간 학도들이 백여 명이었다. 교화가 삼오(三吳) 지방을 적셔 명성이 나라[上國]에까지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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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陳郡)의 사령운(謝靈運)과도 편지로써 친교를 나누었다. 전송의 세조(世祖)황제는 그의 소박한 도풍에 의지하였다. 칙명으로 서울로 나와 정림하사(定林下寺)에 머물렀다. 자주 법회를 열자, 덕망 있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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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유마경』·「열반경의소(涅槃經義疏)」와 아울러 『아비담현론(阿毘曇玄論)』을 지었다. 교리의 종류를 구별하여 일관된 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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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7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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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륭(曇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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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상우의 서산(徐山)에 담륭 도인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법석을 잘하였다. 만년에는 문득 고결한 절개가 보통을 넘었다. 역시 사령운의 존중을 받았다. 항상 함께 우승산(嶀嵊山)을 노닐었고, 죽은 후에는 사령운이 조문[誄]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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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석승근(釋僧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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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근의 성은 주(朱)씨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숨어사는 선비 주건(朱建)의 넷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노자』·『장자』와 『시경』·『예기(禮記)』를 잘하였다. 그 후 길을 가다가 광릉(廣陵)에 이르러 담인(曇因) 법사를 만났다. 처음 만나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도(道)를 위하여 조아려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두루 돌아다니며 내전(內典)을 배우고, 널리 삼장을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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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울에 이르러 용광사(龍光寺)의 도생(道生) 법사를 만났다. 다시 그에게 의지하고 기대어 수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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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다. 전송의 효무(孝武)황제가 칙명을 내려 상동왕(湘東王)의 스승이 되었다. 승근은 병을 이유로 간곡하게 사양하였다. 하지만 끝내 면할 수는 없었다. 왕은 그를 따라 5계(戒)를 받기를 청하고, 매우 넉넉한 예우를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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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지빈(智斌)이 초대 승정(僧正)인 담악(曇岳)과 교대하여 승정이 되었다. 지빈도 덕이 대중의 종사가 될 만 하였다. 삼론(三論)과 『유마경』·『사익경』·『모시』·『노자』와 『장자』 등에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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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의가(義嘉)가 음흉한 계획을 꾸몄을 때, 당시 사람들이 지빈을 참소하여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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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빈은 의가를 위하여 도를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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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교주(交州)로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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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상동왕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명제(明帝)이다. 승근에게 칙명을 내려 그를 천하의 승주(僧主)로 삼았다. 법기(法伎) 일부와 친신자(親信者) 20명을 공급하고, 한 달에 돈 3만 냥씩을 지급하였다. 겨울과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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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 등 사계절에 하사품을 내렸다. 아울러 수레와 가마와 관리를 하사하였다. 모든 외진(外鎭)에 명령하여 모두들 공여하라고 하니 승근은 사양하였다. 사방에서 받들어 헌납하면서 모두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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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의 마음을 얻었는가, 못 얻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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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존중받았음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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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근은 돈을 감추어 두지 않는 성품이었다. 모두를 복 짓는 일에 채워 영근사(靈根寺)와 영기사(靈基寺) 두 절을 세워서,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들이 머무는 곳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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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의 말년에 이르러 황제가 자못 기피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졌다. 그런 까닭에 열반이나 멸도와 같은 번역은 여기에서 잠시 쉬었다. 모든 사망·환란·쇠약하고 머리가 희게 쇠는 따위의 말들은 모두 황제와 상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이 법을 범하여서 황제의 마음을 거슬려 살육을 당한 사람이 열에 일곱·여덟 사람이나 되었다. 승근이 늘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간언하니, 은혜와 예우도 엷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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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남(汝南)의 주옹(周顒)이 황제의 장막에서 모셨다. 어느 날 승근은 주옹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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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요즘 행하시는 일은 절대로 임금다운 거동이 아닙니다. 속가의 일로써 풍자하고 간언하여도 도움되는 바가 없으니, 오묘한 진리의 깊은 이야기야 더욱 멀기만 합니다. 오직 삼세(三世)의 괴로운 과보만이 가장 인정에 가깝고 절실한 말이 될 것입니다. 시주께서 혹 기회를 엿볼 인연이 있으시면, 바로 이것만을 말씀드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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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황제가 중풍을 앓아 자주 침과 뜸을 더하였다. 그러나 고통과 괴로움이 조금도 변함 없었다. 이에 곧 주옹과 은홍(殷洪) 등을 불러 귀신과 잡스런 일에 관한 것 등을 말하게 하여, 답답한 가슴을 풀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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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옹은 곧 『법구경(法句經)』과 『현우경(賢愚經)』 등 두 경을 익숙하도록 읽었다. 매양 알현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곧 말에 앞서 이 경들의 내용을 말하였다. 황제는 왕왕 놀라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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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보라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이라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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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 606] 쪽 |
이로 인하여 죄를 범하고 황제의 뜻에 거슬렸던 무리들이 여러 번 사면을 받았다. 이는 대개 승근이 인연이 되어 제대로 된 사람을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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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근은 송(宋)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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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도(曇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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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담도가 승근의 뒤를 이어 승주가 되었다. 담도는 본래 낭야 사람으로 삼장과 『춘추』·『노자』·『장자』·『주역』에 빼어났다. 전송의 세조(世祖)·태종(太宗) 황제가 모두 흠모와 칭송을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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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젊은 황제가 예에 어긋나자, 담도도 행함과 감춤에 마땅한 바를 얻어, 거동이 황제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는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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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玄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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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절에 또 현운이 있었다. 그도 대·소승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장영(張永)과 장융(張融)이 모두 승당 제자가 되어 도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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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석도맹(釋道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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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맹은 본래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연(燕)·조(趙) 지방을 두루 떠돌아, 풍속과 교화를 모두 구경한 후 수춘(壽春)에 머물렀다. 정력을 쏟아 부지런히 배우니, 삼장과 9부(部)의 대승·소승·논리를 따지는 것 등에 모두 생각이 깊고 미세한 경지에 들어갔다. 거울같이 투철하게 비추어보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특히 『성실론』 하나만은 가장 독보적이었다. 이에 크게 강서 지방을 교화하니 학인들이 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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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元嘉) 26년(449)에 이르러 동쪽 서울로 노닐었다.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면서 다시 강석을 열어 이어갔다. 전송의 태종황제가 상동왕(湘東王)으로 있을 때 깊이 숭앙하고 추천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갑절로 예우와 대접을 더하였다. 그리고 접대비로 돈 30만 냥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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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황제는 건양문(建陽門) 밖에 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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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하였다. 도맹에게 조칙을 내려 기강을 이끌게 하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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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람이 도를 널리 펴고 도는 사람에 의거하여 넓혀지는 것이다. 지금 법사를 얻은 것은 오직 도가 창생들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세상의 바람에도 광명이 있게 된 일이다. 절 이름을 흥황사(興皇寺)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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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말미암아 흥황사가 이 절의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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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창건하는 공사가 끝나자 조칙을 내려, 도맹에게 절에서 『성실론』의 강론을 개강하게 하였다. 처음 개강하는 날에는 황제가 친히 거둥하였다. 그러니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였고, 사방 먼 곳의 학자와 손님들이 책을 등에 업고 나란히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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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맹의 고상한 운치는 사람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토해내고 받아들이는 말이 소상하고 세밀하니, 황제는 오래도록 거룩하다고 칭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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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맹 법사는 고상한 인격으로 중생 구제를 많이 하였다. 짐도 평소부터 손님 같은 벗으로 대해 왔다. 한 달에 돈 3만 냥, 관리 네 사람, 장부를 정리하는 자 20명, 수레와 가마 각 한 대를 하사하여, 가마를 타고 찾아오는 손님을 돌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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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맹은 얻는 것이 있으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모두 보시하거나, 절을 짓는 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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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휘(元徽) 3년(475)에 동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5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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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견(道堅)·혜란(慧鸞)·혜부(慧敷)·혜훈(慧訓)·도명(導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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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도견·혜란·혜부·혜훈·도명 등이 모두 흥황사에 머물렀다. 교리를 이해하는 명성 또한 도맹에 버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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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석초진(釋超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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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진의 성은 전욱(顓頊)씨며, 장안 사람이다. 확고한 지조가 있으며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였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돈독하여, 대승·소승의 여러 경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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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전체적으로 훑어보기를 더하였다. 정신과 성품이 온화하고 기민하며, 계율의 행실이 엄격하고 깨끗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이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명성을 관중 지방에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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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오랑캐 발발혁련(勃勃赫連)이 장안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하고 어지러워져서 불법의 일도 피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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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초진은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더욱 경문의 뜻을 정밀하게 찾아보고 강설을 열었다. 얼마 후 초진은 고소(姑蘇)로 가서 다시 불법을 널리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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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회계(會稽) 태수로 있었다. 그의 고상한 풍모에 깊이 의지하고자, 곧 사람을 보내서 영접하여 산음(山陰)의 영가사(靈嘉寺)로 편안하게 모셨다. 이에 절동(浙東)에 머물면서 강론을 이어갔다. 그러니 고을과 외곽의 비구·비구니 및 청신도의 남녀들이 모두 보살의 인연을 맺고, 계율의 모범에 조아려 가슴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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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부름을 받고 서울로 나아갔다. 『대법고경(大法鼓經)』을 강의하였다. 잠시 뒤 다시 회계로 돌아와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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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반경』이 궁극적인 진리의 가르침이라 여겼다. 그래서 늘 생각에 남겨 두어 머뭇거리다가, 여러 번 강설을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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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재(齋) 모임을 결성하는 사람치고 반드시 초청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다른 곳에 먼저 가기로 허락한 경우가 있으면, 곧 날짜를 옮겨서 재를 열었다. 그 후 노쇠하여 다리에 병이 생겼다. 외부로 찾아가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모두들 음식을 방으로 보내서, 그것으로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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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진은 성품 됨됨이가 경전을 독실하게 믿고 좋아하였다. 보고 찾는 데 지극히 간절하였다. 늙어서 앞이 보이지 않자, 제자를 시켜 열흘에 한 번씩 『열반경』을 소리 높여 읽게 하였다. 그가 경전을 탐독하고 좋아함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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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9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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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기(曇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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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또 담기 법사가 있었다. 본래 성은 조(趙)씨며, 역시 장안 사람이다. 관중에서 오랑캐의 난리를 만나자, 그곳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산수를 두루 구경하면서 회계 고을에 이르렀다. 『법화경』과 아비담에 빼어났다. 당시 세상에서 종사로 받들어서 초진과 서로 버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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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인 낭야왕(瑯琊王) 유곤(劉琨)이 초청하여, 고을 서쪽 가상사(嘉祥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본래 유곤의 조부인 유회(劉薈)가 창건한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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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빙(道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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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도빙도 세상에서 뛰어난 이였다. 그러나 집착하는 성품이 강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렸으므로, 그를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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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석법요(釋法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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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요의 성은 양(楊)씨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만 리 밖이라도 찾아가 물었다. 전송의 경평(景平) 연간(423~424)에 연주(袞州)와 예주(豫州) 지방으로 와서, 많은 경전을 끝까지 꿰뚫었다. 한편으로는 불교 외의 다른 경전[異部]에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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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동아(東阿)의 도정(道靜)이 그의 강론을 들었다. 대중들이 여러 번 다시 강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도정은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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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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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양자강을 넘어왔다. 오흥(吳興)의 심연지(沈演之)가 특별히 깊이 그릇이라고 존중하였다. 초청해서 오흥(吳興) 무강(武康)의 소산사(小山寺)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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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19년 동안 기원하기를 요청하는 법사가 아니면, 한 번도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강산에서 기거하였다. 그러면서 해마다 강론을 열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업고 찾아오는 삼오(三吳)의 학자들이 거리를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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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열반경』·『법화경』·『대품경』·『승만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대명(大明) 6년(462)에는 황제가 오흥군(吳興郡)에 칙명을 내려 예를 갖추어 서울로 오르게 하였다. 도유(道猷)와 함께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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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두 깨달음의 내용에 관하여 각기 종사(宗師)가 되었다. 이르자마자 곧 강석에 나아갔다. 황제의 가마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료들이 자리에 배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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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요는 나이가 비록 노년이 되어서도 거친 음식과 고난 속에서 굳건한 절개를 고치지 않았다. 계율을 지키는 절도가 청백하였기에 도인과 속인이 귀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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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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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요(曇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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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송 희제(熙帝) 때에 담요가 있었다. 『유마경』·『십주론(十住論)』및 『노자』와 『장자』에 빼어났다. 또한 초서·예서에 솜씨가 있어, 전송의 건평(建平) 선간왕(宣簡王) 유굉(劉宏)의 존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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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석도유(釋道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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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유는 오군(吳郡) 사람이다. 처음에는 도생(道生)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따라 여산(廬山)으로 갔다. 스승이 죽은 후에는 임천(臨川)의 군산(郡山)에 은거하였다. 이어 새로 번역한 『승만경』을 보자, 책을 펼쳐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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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스승께서 내신 옛날의 이해는 어둡기가 옛날 번역한 경과 똑같았다. 다만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경이 새로운 이해를 거친 뒤에야 새로 결집하여 번역하였으니, 자못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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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하여 『승만경』에 주석을 달아 스승이 남긴 유훈을 거듭 베풀었다. 이 주석서는 모두 다섯 권이 있었다. 그러나 글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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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前宋)의 문제(文帝)가 혜관(慧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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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의 내용을 다시 누가 익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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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관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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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의 제자인 도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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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곧 임천군에 조칙을 내려, 도유가 서울로 나왔다. 서울에 이르자 곧 맞아들여 궁중에 들게 하였다. 교리 이해를 공부하는 승려들을 크게 모아놓고, 도유에게 돈오에 관해서 진술하여 펼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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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말재주를 다투는 무리들로부터, 돈오에 관련된 질문이 바꾸어가며 일어났다. 도유는 이미 생각을 쌓아 현오한 경지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가르침의 근원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므로 기회를 타서 날카로움을 꺾고, 답변하면 반드시 상대방의 칼날을 꺾었다. 이에 황제는 책상을 어루만지며 통쾌하다고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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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무제(孝武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더욱 찬탄하고 존중하였다. 곧 칙명으로 신안사(新安寺)로 가서, 절의 법도를 다스리는 불법의 주인[鎭寺法主]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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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늘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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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은 홀로 우뚝 솟아 빼어나게 비추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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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유는 곧바로 말고삐를 잡아 홀로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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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게 스승을 밝혔다고 일컬을 만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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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아름다운 소리도 덧붙일 것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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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公孤情絶照 猷公直轡獨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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可謂克明師 匠無忝徽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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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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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道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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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예주(豫州)에 도자가 있었다. 『유마경』과 『법화경』에 빼어나 도유의 논리를 이어갔다. 도유가 지은 『승만경』의 주석본을 간추려 정리하여 두 권으로 만들었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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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慧整)·각세(覺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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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다보사(多寶寺)의 혜정과 장락사(長樂寺)의 각세도 모두 명성과 덕을 나란히 하였다. 혜정은 특히 3론(論)에 정밀하게 뛰어나 학자들의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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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었다. 각세는 『대품경』과 『열반경』에 빼어나 불공가명(不空假名)에 대한 논리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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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석혜통(釋慧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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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통의 성은 유(劉)씨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시원하게 트이고, 우뚝한 기개가 텅 비고 그윽하였다.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을 때 매양 털이개를 한 번 흔들면, 그때마다 높은 이들이 탄 가마가 거리를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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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서담지(徐湛之)와 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스승과 벗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효무황제는 총애와 봉록(俸祿)을 도탑게 더하였다. 칙명으로 회릉(悔陵)과 소건평(小建平) 두 왕의 벗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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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찬(袁粲)이 『거안론(蘧顔論)』이란 책을 지어 혜통에게 보여주었다. 혜통은 어려운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 글이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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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대품경』·『승만경』·『잡심론』·『아비담』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아울러 『박이하론(駮夷夏論)』·『현증론(顯證論)』·『법성론(法性論)』·『효상기(爻象記)』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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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의 승명(昇明) 연간(477~479)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3세이다. |
첫댓글 스님 다 읽고 싶으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