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철이다. 입추, 말복을 앞두고 피서인파가 산으로 바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여름이 오면 우리 시단에서도 문학행사가 많다. ‘심상해변시인학교’가 지난 7월에 강원도 양양 낙산해수욕장(e-콘도텔)에서 열렸고 ‘문학아카데미 숲속의 시인학교’, ‘화성 제부도시인학교’, ‘만해마을 여름시인학교’ 등 시축제가 이달 중에 개최된다.
이러한 축제가 연례행사로 열리는 데는 시인들과 독자들이 바다나 숲속에서 머리를 맞대고 밤을 새우면서 시와 인생을 진지하게 논하는 기능이 있다. 시창작 강의를 비롯해서 시낭송, 백일장 등을 통해서 시 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피서를 겸하는 시인들과 독자들의 영원한 체험현장이 되기도 한다.
현대시의 창작에서 시인의 체험은 소재와 주제의 선택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우리가 태어나서 현재 이 시간까지 살아온 과정이 모두 체험에 속한다. 이 삶의 궤적(軌跡)에서 재생되는 상상력은 바로 창조적 상상력으로 전환해서 한 편의 시로 혹은 소설로, 수필로 창작되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이런 직접체험에서 획득한 지적자양이 가슴 가득 보고(寶庫)에서 넘칠 때 우리는 어떤 시적 대상물(사물)과 마주치면 바로 이미지와 매치가 되고 주제로의 연결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점을 익히 알고 있다.
지난 7월호『문학세계』에서는 이렇게 시인의 체험들이 형상화한 작품들을 많이 대할 수 있었는데 생생한 형장 체험은 시의 한 기능인 사회성과 역사성을 배제한지 않는 특징이 있다. 우선 장충열의「떠도는 영혼」은 그가 부제로 붙인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처절한 비극의 역사 현장을 시인의 혜안으로 빚은 한(恨)의 가락이다.
산도 괴로움에 귀를 막아
바다 멀리로 빗겨간 힘없는 자들의 외침-
핏자국으로 물든 대지의 신음이
서럽게 메아리치던 산하에
이름 모를 꽃이 피었다
그때도 하늘은 푸르렀으리라
통한의 피울음소리 들으며
밤마다 달빛은 무슨 위로의 말을 건네는가
우리는 지금 ‘거제도 포로수용소’ 그 ‘통한의 피울움소리 들’리는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진한 감동을 교감하게 된다. 왜일까. 이것이 시의 현장성이 갖는 마력이며 흡인력이다. 장충열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체험은 실제적 체험이 아니라, 문학적 체험이다. 대체로 현대의 구조시학에서 수용소에서 ‘핏자국으로 물든 대지의 신음’을 직접 경험하고 수용된 당시의 화자(포로)와 그 상황이 진술하는 시간(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story time-이야기의 전개 시간)과 현재 장충열이 간접적으로 수용소의 당시 상황을 체험하면서 진술하는 시간(reading tine-독서하는 시간 혹은 창작하는 시간)의 두 갈래로서 작품은 심리적으로 실재와 허구의 양면성이 공존하는 것으로 한스 메이홉은 분류하고 있다.
장충열은 이 비극의 현장을 방문하여 당시(진술되는 시간)의 상황을 재생하면서 그들의 ‘떠도는 영혼들의 투명한 눈물’을 위무하고 ‘그 한(恨)의 성분을 무엇으로 분석하’ 지 못함을 그도 함께 애통해 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상황(situation)의 설정이나 화자의 어조는 일반적인 자연서정과는 다르다. 그것은 시인이 역사적 사건이나 상황을 인식하는 시정신과도 상관하지만, 아널드의 말처럼 시의 기능이 인생(혹은 사회)비평의 측면에서 부합하는 지적자양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께 발표한「껍데기와 껍질 사이」와는 표현이나 주제가 상이한 점을 보이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이러한 현장의 공감대를 시의 사회성 또는 시의 역사성이 표징된 작품이라고 말한다. 시에 대한 사회성은 현재 우리가 창작하는 모든 작품을 망라해서 논할 수 있겠으나 장충열처럼 1950년, 6. 25라는 비참한 우리의 역사 현장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시적 정황으로 전환하여 시인의 진솔한 정감을 투영하는 경우는 시의 역사성으로 보아야 하는 견해이다.
이처럼 ‘초대시 5인선’에서 송창선의「대마도에서」연작 3편도 동일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간절한 그리움이 산으로 맺힌
대마도 고려산(高麗山)을 등지고
앞에는 대한해협과 보일 듯 말 듯 아련한 부산이
망원렌즈에 손 잡힐 듯한데
가슴엔 끝없는 슬픔 너울지다
--중략--
바람결마다 그리운 사랑하는 이들과
꿈에도 사무치는 고향을 두고
낯선 땅에 차갑게 묻힌 몸이
시퍼렇게 출렁이는 가슴만 안고
산처럼 바라느니 겨울보다 먼 내 나라여
송창선의 대마도 체험은 역사기행으로 ‘덕혜옹주 애가’, ‘최익현 추모’ 그리고 위의 작품은 ‘조선 역사관 위령비’라는 부제가 각각 제시되어 있다. 이렇게 ‘조선’의 역사 현장에서 당시의 숨결을 체감하면서 시인의 창조정신은 발현된다. 사실적으로 역사내용만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체험이지만 시인의 정서가 투영되어 한결 그 현장의 숨결이 잔잔하게 메아리로 들리고 있다.
이와 같이 시의 역사성에도 상당한 메시지의 전달이 가능하지만, 시의 사회성은 또 다른 공감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어서 많은 시인들이 창작의 범주에 등한하지 않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바로 박일동의「노숙자」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밤마다 두더지 같은 삶
지하도 콘크리트 바닥이 차다
시린 몸을 녹일
방이 어디 있겠는가
문은 닫혀 있다
들어갈 만한 문은 모두 닫혀 있다
길 없는 길 꿈속에서도
출구 밖을 나서면
오가는 건각(健脚)들이 바쁘고
휘황찬란한 불빛이 눈부시다
찢겨 조각난 기억에도
집이 있고
기다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더없는 행복이련만
박일동은 ‘지하도의 콘크리트 바닥’에 방치된 ‘노숙자’를 만나고 있다. 그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노숙자’를 그냥 간과할 수 없었다. 시가 갖는 사회적인 기능이 현현(顯現)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고립되면 살기가 어려워진다. 어떤 형태로든지 상호 교류가 있어야 하고 집단을 이루며 사회를 구성한다. 이렇게 본다면 시도 그 사회적 모든 요소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시의 소재나 주제가 모두 의식적, 무의식적이든 관계없이 이 사회의 현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과거 한때는 저항시, 참여시, 민중시 등 어떤 경향의 시만이 시의 사회성이 반연된 것이라고 강변한 적이 있었으나 그들만의 논리로는 시의 진정한 사회성에 부합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시인들에게도 현대의 복잡화에 따른 모순과 불합리에 대한 갈등(진실된 가치관의 추구를 위한)이 있다. 그런 것들을 순화하고 정화하는 표현으로 인간의 진실과 가치관의 정립은 물론, 올바른 사회상의 구현에 동참하는 것은 어쩌면 당위성(當爲性)을 창출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박일동의 ‘노숙자’는 우리 사회의 처절한 한 단면을 묵시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불합리성을 메시지로 전함으로써 시인은 그들을 구원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고 사회의 지도층이나 위정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게 될 것이다.
일찍이 현대시의 위의(威儀)는 생활과 사회로부터 분리된 채 순수한 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현대라는 거대한 집단들이 분별없이 행하는 불안, 위기의식은 이를 극복하거나 탈피하려는 희망과 기원으로 다양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 말하자면 주제의식이 좀더 강렬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류인량의「고엽제의 응어리」도 동일한 개념으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멍울진 침묵에 잠긴다
지쳐서 오래도록 창살없이 갇힌 채
영웅이 없는 세상이기에
하나, 둘, 셋 타들어가는 목숨 목숨 목숨이었다
굽이치는 물살로 바위섬을 부수며.....
수액 없는 나무처럼 시들어 가고
냉골처럼 시려오는 고통을 감내하며
희비가 엇갈린 모순의 세월
맑은 바닷속 불가사리는 아직도 건재하지 않는가
웃을 사람이 울고, 울 사람이 웃고 돌아가는 세상
오늘도 응어리진 목숨
낡은 품에 굽이치는 물살로 바위섬을 부수며
바라보는 이 없는 청천 하늘에 홀로 외로이
빛바랜 백기만 들고 있다
류인량의 시적 상황도 ‘고엽제’라는 처절한 사회적 비극을 제시하고 있다. 박일동의 ‘노숙자’나 류인량의 ‘고엽제’는 모두가 국가의 정책적으로 해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인 대사건이다. 이러한 시적 대상이 시인의 작은 표현으로라도 당사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들을 감싸안음로써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충족해야 한다.
이밖에도 함께 발표한 류인량의「병상 일지」와 김윤자의「가난한 이들이여」, 김종덕의「돈의 존재」, 그리고 이종봉의「병상 일기」연작과「그 이름」이 시적 화자의 어조나 주제 등이 사회적인 문제들을 심도 있게 탐색하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시의 사회성은 시인의 주장이 아니라, 고양된 시인의 정서의 표출이라는 명제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첫댓글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윤주희 시인님 감사^^
비평을 베우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면 시를 보는 안목이 넓어지겠지요. 회장님 감사합니다.
저도 배웁니다~~
읽고 느낌 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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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뿐 입니다...갈 길이 멀고도....먼것 같습니다.....
많은 가르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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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백초 시인님 고마워용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