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우중[雨中]의 시가/임수정
꽂혔다 빗방울이 메마른 자연 품에
큐피트 화살로다 심장에 박혔는데
사르르 솜사탕 녹 듯 감미로운 촉촉함
농익은 오디 주에 목줄기 불붙었다
방향을 잃어버린 감정은 밋밋한데
장마철 빗소리 장단 홀로 춤을 추는 꿈
갑 장이 올려놓은 시낭송 감상하다
애절한 목소리에 떨림이 가여워서
술 한 잔 입에다 대니 알딸딸한 오후네
해 뜨면 덥다 하여 그늘 찾아 쉬어 살고
비 오면 빗소리에 낭만 찾는 집 귀신
보인다 사이버 온 창 그네들은 누굴까
비 오기 한참 전에 개장사 오갔는데
철없는 우리 개는 허공보고 짖어댄다
코앞에 닥친 초복[初伏]을 알 턱이 없음이리
비 없는 흰구름만 동 동 동 떠 갈 적에
몸에서 비가 와도 콩밭을 못 적시네
잡풀은 아랑곳없이 돌아서면 한 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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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별 님의 <우중의 시가>에 대한 감상
비가 옵니다. 어제부터 내리던 비였는데요. 아직도 그칠 줄 모르니, 좀 지루하지요. 해마다 거쳐야할 장마철, 雨期라니, 어쩌겠는지요. 이렇게 침울하고 우울하고, 밝지 못하고, 눅눅하며, 습도 많은 雨中에 꽃별님의 시조를 감상하게 되었는데요. 같은 雨中인데도 어쩜 분위기가 이렇게 다른지요. 그래서 같은 사물도 보기 나름이고, 화자의 생각의 전환이 어떠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며, 기쁜 마음으로 감상하고자 합니다.
오디주 한잔이 있다면 참 제격이겠는데요. 그래도 먹은 거라 생각하고, 알딸딸한 기분은 느껴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 기분으로 보면 되겠지요.
먼저 갈래 면에서는 서정, 서사, 극, 교술로 크게 등분 지어 봤을 때, 서정시류에 속하겠지요. 4음보율을 갖춘 정형화된 연시조이구요. 전체적인 내용들을 보면 우중이긴 하지만, 요즘 장마철처럼 심란하진 않네요. 오히려 삶의 여유로움과 옛 선조들의 안빈낙도의 풍류정신도 엿 보이구요. 아마도 실천적 삶을 추구하면서 거기에서 오는 깨달음과 철학적 소신이, 시인님의 낙천적인 성격과 더해져, 6수라는 거작을 탄생시킨 거라 봐 지네요.
각 연의 주제를 정리하면요. 1연, 비오는 날의 감미로움, 2연, 오디주와 빗소리의 향연, 3연, 시 감상의 흥취, 4연, 내면 정서의 심회, 5연, 철없는 개의 순수성과 인간적 고뇌, 6연, 무심한 자연과 살이의 애환, 이지요. 다시 종합해 보면, 시골살이의 실천적 삶을 통한 자연과의 교감이네요. 왜, 제가 이 “실천적 삶” 에 강조를 하는가, 하면요. 요즘처럼 현대 문명화된 삶 속에선 시골살이의 실천이 쉽지 않거든요. 시인님은 실제로 경험한 것을, 시의 여러 장치들을 통해 심미적 발견으로 승화시켰기에, 엄지 손가락을 세워 칭찬하고 싶은 거지요.
옛 선조들의 시조들을 보면요. 안분지족, 안빈낙도하는 시들이 참 많아요. 오죽 많으면, 안빈낙도,류에서도 소박성이냐, 풍류과냐, 자연과 일체감(동화)냐, 로 나누기도 하잖아요. 이런 많은 시조들이 실제로, 자연과의 체험을 통해서 다 썼다곤 할 수 없겠지요. 관직에 머무르면서 혹은 유배지에서의 집필도 흔했으니까, 자연에 푹빠진,의 천석고황이나 연하고질,류의 시조들은 아닌 셈이죠. 물론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실제 고향인 보길도에 낙향해서 체험을 통한 거작 40수가, 탄생한 걸로 보구요. 순수문학의 계보인 호남학파의 거장인 송순 선생 등은 실제 체험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많이는 실제경험이 아닌, 관념적 이상추구 개념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즐긴 것이죠. 그 당시는 농촌문화가 보편화된 시대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상상력만으로도, 문학은 가능한 일이니, 뭐 대수냐, 의 반문도 있겠지요. 하지만 실제 생활하면서의 시는 다르지요. 구체성면이나 생생함 등이 살아 숨쉬고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문명을 뒤로하고 시골살이의 실천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인님의 글은 마땅히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고, 그래서 시가 관념이 아닌 구체성을 띌 수가 있었던 겁니다. 증거로는요. 1연, 1행(초장)에서 도치법을 살려, 내려온 비가 억센 소낙비 같은 데도, 대지를 젹셔주는 고마움을 애타는 농부의 심정으로 아는지라, 오히려 감미로움으로 듣지요. 그리고 2연에서도 실제 오디주와 빗소리를 향연처럼 표현하셨는데, 농촌에서는 바쁜 때보다는 이렇게 비오는 날, 이웃 불러서 한잔 걸치는 것이니, 이것 또한 실제경험에서 기인한 것 아닐까요. 그것 뿐이 아니네요. 5연에선 “개장수” 얘기 참 실감나지요? 해학적이면서도 농촌의 순수성을 알리는데 일조가 됐지요. 혹시, 강아지 사랑 측면에서 본다면 어째서 해학이냐, 인간의 이기성에 관한 논란이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직은 농촌에서는 복날이 되면, 우리의 오랜 전통 음식문화였으니까, 지향해선 안될 일이지만 이해해야할 부분이지요. 마지막 연도 실제 체험이지요. 비가 좍좍이다가도, 어느 날, 훅훅, 볶는 폭염이 순식간에 지속되는 경우도 있지요. 이파리가 타들어가는 콩밭을 보면서 농부의 심정은 자신의 땀방울이라도 빼보고 싶겠지요. 이런 모든 내용들이 시인의 실천적 경험이 바탕이 되었기에 노래가 살고, 음미하는 우리도 농촌살이로 꽃별님을 따라 내려가고 싶고, 귀향하고 싶은 거네요.
한가지 더 꽃별님의 시를 칭찬하고 싶은 것은 왜 옛 선조들의 시라고 해서 잘된 게 없겠어요. 제가 몰라서 그렇지 시골살이의 체험에서도 대다수의 시조들이 있을 거라 보는데요. 그게 문제가 아니지요. 그때 당시에는 웬만하면 고향으로의 낙향하던 정서이고 보면, 21세기 요즘에 누가 귀농(귀환)을 하겠나요. 하여, 같은 안빈낙도의 시조임에도 옛 선조들의 시에 비해서 시대변화성을 감안한다면 꽃별님의 시가 더 가치도가 높다고 보는데요.
또하나, 감상자를 울컥하게 하는 것은 4연에서 종장을 보면 “보인다 사이버 온 창 그네들은 누굴까” 시인님은 분명 현대문명 속에서의 한 일원이었고, 지금도 진행형이지요. 그런 문명화된 사이버창에 빠글빠글 모여든 (저를 포함) 모든 이들에게 손짓해 보이네요. 자연과의 동화가, 훌훌 벗어버림의 유유자적한 삶이 이렇게 날이면 날마다 즐거움을 준다고요. 그런고로, 이 6수의 <우중시가>는 실천적 경험을 통한, 안빈낙도의 즐거움을, 걸맞은 그릇인 시조라는 형식을 통해, 선조들에 비해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두고자 하네요.
첫댓글 본인의 작품,우중의 시가, 는 수필가 영현 정영미 작가님이 본문 내용을 재편집하여서 서라벌문예를 통해 평론가로 거듭 났다, 기쁨 갑절이었다, 친애하는 영현님께 응원을 보낸다,,,,,